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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전제에 관한 각종 문제 [田制雜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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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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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전제에 관한 각종 문제 [田制雜議]

혹자가 말하기를 “이 법이 지극히 좋고 또 구비되어 있으나 한 농호가 받는 밭의 면적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들이 장성하면 불가불 따로 밭을 받게 될 것인데 만일 근처에 적당한
밭이 없어서 먼 곳에 가서 받게 된다면 부자가 떨어져 살게 되지 않을까?” 한다. 옛날 정전법을 실시하던 시대에는 부자 형제가 함께 살았었는데 진(秦)나라 때에 상앙(商鞅)
상앙(商鞅)：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사람 공손앙(公孫鞅). 진(秦)나라에 벼슬한 저명한 법제가이며 개혁론자인데 그를 상군(商君)으로 봉하였기 때문에 상앙이라 함.

이 부자 형제가 동거하는 것을 싫어하여 정전을 폐지하고 나누어 따로 살게 하였다. 이것은 후세의 법이 백성들로 하여금 부자가 이산(離散)하기 쉽게 만든 것이니, 공전법을 실시하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염려할 것이 없다. 대체로 백성은 고정된 직업[常産]이 있으면 친척이 서로 의지해서 사는 것이며 고정한 직업이 없으면 부자라도 함께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이런 것은 목전의 일을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밭을 넉넉히 가지고 있는 자라도 만일 자식이 많으면 밭을 더 사서 분거시키게 될 것이며 근방에 살 밭이
없으면 먼 곳의 것이라도 사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은 현재에 있어서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사고가 있거나 사망했다 하자. 그가 가졌던 토지가 개인의
소유라면 그렇다고 반드시 팔아넘기지도 않을 것이나 공전이라면 대경자에게 그냥 양여하여 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경우에는 파는 자가 있더라도 사유지라면 값을 주어야 살 수 있을
것이나 공전이라면 받아야 할 자가 당장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공전제도가 가족끼리 따로 살기를 쉽게 하는가 사전제도가 따로 살기를 쉽게 하는가? 더군다나 지금 밭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는 10분의 1에 불과하고 밭을 못 가진 자가 10중 8∼9인 이 형편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혹자가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성은 대개 밭과 논을 아울러 가지고 벼, 콩 따위를 섞어서 심고 있는데 만약 이제 밭을 획정할 때에 한 경(頃) 속에서 밭과 논이 반드시 섞여
있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혹은 밭만 있고 논은 없으며 혹은 논만 있고 밭을 갖지 못한 자가 많을 것이다" 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공전법을 실시하더라도
서민은 오늘의 일과 별다른 변동이 없을 것이다. 비록 밭을 획정해 준다더라도 서로 바꾸어 부칠 수가 있는 것이며[각각 쌍방의 필요에 의하여 서로 합의를 보아 바꾸어 부칠 수 있음을
말한다.]친척과 인리간에 서로 융통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한 가족일 때에는 아버지에게 밭이 있으면 아들에게 논을 주고 형에게 논이 있으면 동생에게 밭을 주어 서로 좋도록 할
것이다.]지금 실정을 보더라도 논이 있는 자에게 꼭 밭이 있지도 않으며 밭이 있는 자에게 꼭 논이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논이고 밭이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중국을 보아도 회수 이북 수천 리의 땅이 전부 밭이고 논은 전혀 없으며 우리나라도 서북지방에는 논이 전혀 없는 데가 있으므로 이런 것을 논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지금
남방 산 고을 백성은 대개 밭만을 경작하고 있지만 김제(金堤)의 동진평(東津坪)과 여산의 채운향(彩雲鄕) 등지에서는 전부 논만이 있고 밭이 없다. 이것은 백성들이 자연의 조건에
따라 각각 밭이나 논을 경작하고 있으면서 서로 유무상통하며 서로 보충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다른 지방보다 쓸 것을 못 쓰고 물건이 없어서 군색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말할 여지조차 없지만 목전의 사실로써 설명한다.]

혹자가 또 말하기를 "이 법을 실시하면 땅에 비하여 사람이 많아질 우려가 있다" 한다. 이것도 그렇지 않다. 천지간의 모든 것이 이렇게 되는 이치는 없다. 사람이 땅에서 사는 것이
고기가 물에서 사는 것과 같은데 고기가 많아서 물이 모자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땅이 적어진다고 가정하자. 지금은 한 사람이 겸병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밭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일을 걱정하지 않고 만민이 고르게 나누어 가진 후에 사람이 혹 많아질까를 걱정할 것이 무엇이냐? 대체로 공전과 사전을 막론하고 이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고 별다른 지역을 따로
떼어서 살지 않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다른 것은 공전제를 실시하면 공평하여 고르게 되고 사전제이면 각자의 소유대로 남아 있어서 불균등하게 되며 공전제를 실시하면 백성이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고 인심이 안정하게 되므로 교육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고 풍속이 후해져서 만사가 다 잘될 것이나 사전제이면 모든 것이 이와 반대로 되는 것이다. 또 이 법을
실시하면 곡식이 흔해져서 넉넉히 사용할 것이니 지금 상태와 같은 이런 현상이 어찌 있을 것이랴?[지금의 실정을 보면 밭을 많이 가진 자는 밭은 많아도 힘의 한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경작하지 못하고 밭이 없는 자는 여력이 있으나 밭이 없어서 경작할 곳이 없기 때문에 황전(荒田)이 많게 된다. 그리하여 비록 병작(幷作) 〈지금 밭을 타인에게 주어 경작케
하고 그 소출을 나누어 먹는 것을 속칭 병작이라한다.〉 ― 하는 규례가 있으나 이에 의하여 밭이 많은 자는 밭을 남에게 주어서 경작케 하고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여
근로 생산에 종사하지 않으며 한편 밭이 없는 자는 남의 것을 경작하여 매년 상시적인 경작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더러 제것이 아니라 해서 걸우고 다루지 않기 때문에 많은 밭이 박토로
되고 만다. 그러나 이 법을 실행한다면 황전이 없어질 것이며 밭마다 노력을 들이게 될 것이니 그때의 곡식 생산량은 지금보다 배 이상이 될 뿐만 아닐 것이다. 해마다 계속하여 수확이
이렇게 배씩으로 증가되면 어찌 곡식이 흔해지지 않을 수 있으랴?] 공자가 말하기를 "고르면 가난함이 없다[均無貪]" 고 하였으니 성인의 말씀이 어찌 세밀하고도 지당하지 않은가?

혹자가 말하기를 "이 법을 시행하면 처음에는 부유한 자들이 고통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편히 살면서 공부도 하지 않고 백성에게 아무런 공덕도 없으면서 밭만을 많이
차지하여 그의 부유함은 향(鄕)이나 읍에서 으뜸가고 있으니 이야말로 분에 넘치는 일이다. 그러나 부유한 생활에 습관이 젖은 지 오래되었다. 이제 갑자기 감소시키는 것은 인정상에도
난처한 점이 있으니 특별히 관대하게 처분해 주어서 곡식을 바쳐 지금의 소위 첨정(僉正), 찰방(察謗) 따위의 명예직[影職]을 주고 실직(實職)의 예와 같이 밭을 주며 병역을 면제해
주다가 후에는 단연 이런 예가 없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제를 영구화함에 있어서 별반 해(害)가 될 것이 없을 것이며[오래되면 바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자들도
처음에 원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한다. 이러한 일은 일시적인 조그마한 방편이며 형편을 보아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렇게 할 수도 있는 일로서 옛날 사람들도 그렇게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렇게 꼭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 하면 이 법의 시행은 관에서 남의 밭을 빼앗아서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경작자의 힘에 따라 백성들 자신이 받기를
원하는 것을 나누어 주기 때문에 부유한 자들도 자제(子弟)나 노복들에게 나누어 주게 될 것인바 이것은 다만 경작자에게 나누어 주어 병역 의무를 지게 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설사
그들의 부(富)가 감소된다하더라도 천금을 가진 부유한 집은 본래 가난하던 집보다 나을 것이다. 그대 말이 비록 깊은 염려에서 나온 것이나 법을 처음 실시할 때에 있어서 만일 이런
단서를 열어 놓는다면 사람마다 모두 사심을 일으켜 제 잇속에만 분주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대중의 뜻을 일치케 하고 근본을 세우는 정책이 아니다. 옛날부터 성왕들이 법제를 만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데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다만 그 목적이 자기 일신의 이익을 위하지 않고 천하를 위하여 일을 한다면 어느 누구가 복종치 않을 사람이 없고 정직한 마음으로 일을
집행하면 실행치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실행한다면 사람마다 제 마음에 맞는 직분을 얻어 평안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니 쓸데없이 정당하지 않은 법을 만들어
부유한 자들만을 좋게 해줄 것이 아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옛날의 제도가 이미 폐지된 뒤에 밭은 공유로 되지 않고 사유가 되어서 부유한 자들은 큰 벌판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가난한 자는 송곳을 세울만한 땅도 없게 되었기
때문에 부유한 자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점점 더 가난해졌다. 세기가 오래됨을 따라 토지는 모리배들의 수중에 다 점유되고 양민들은 모두 유리하게 되어 그들의 고용살이를
하게 되니 그것이 끼친 해독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모든 토지는 다 사유로 되어서 점유자들은 아주 세전(世傳)해 온 재산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을
일조(一朝)에 변경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만일 이제 이것을 그대로 두고 다만 일정한 면적으로써 제한하여 매매를 허용하며 공경(公卿)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정한 한도에
의하여 많은 자는 팔고 적은 자는 사도록 것을 허용하는 것이 어떠한가? " 한다. 그러나 이것도 먼저 경계와 면적이 바로잡히고 경작하는 민호를 밝혀서 토지를 경작자의 호에 배당해
준 다음에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민간에서 하는 것을 관에서 다 살피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가짜 민호를 기입하여 대장에 허위로 등록하는 등의 폐단들을 방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계를 바로잡고 민호를 밝히는 일은 이 공전제도를 실행하지 않고는 될 수 없다. 또 설사 경계를 바로잡고 민호를 밝히고도 사유를 그대로 두면서 그 면적을
일정한 한도로 제한한다는 것은 형편상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토지가 공전으로 되면 사람들이 모두 관으로부터 분배를 받게 되므로 자손이 많아도 토지 없는 걱정이 없을
것이며, 아버지는 대부(大夫)가 되고 아들이 사(士)가 된 자가 있다면 그 규정에 따라 분여 받을 토지의 면적이 다르더라도 받는 시기는 하등의 지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유제로
되어서 관으로부터 토지를 분여 받지 못하게 된다면 자손이 많은 자는 그들을 위해서 미리 토지를 사 두는 자도 있을 것이며 대부의 자식으로서 대부가 되지 못한 자는 한전제에서 초과된
부분의 토지를 팔게 될 것이다. 사람이 늙거나 젊으며 낳거나 죽으며 또 자손이 많고 적으며 사고파는 것이 어려움에 따라 인정과 형편상에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길 것이며 이로 인하여
간계를 부리고 속이는 번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아무리 엄격한 법률과 가중한 형벌이 있다 하더라도 범하는 자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 이렇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유만을
제한한다면 이는 함정을 파서 백성을 몰아넣고 형벌을 가하는 셈이 될 것이다. 설사 상앙이 하던 짓과 같이 강제적으로 일시 실행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일단 형벌이 조금 늦춰지면
법은 일조에 무너지고 말 것이니 이것을 과연 무슨 정치 법률이라 할 것인가? 대체로 일시에 성공하기 어려운 듯 한 사업이라도 백성을 평안히 살리기 위하여 백성을 부리며 한번 힘들여
영원히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이것을 속된 사람들은 어렵다고 하나 현명한 자라면 반드시 실행하는 것이다. 토지를 사유로 두고 면적을 제한한다는 이런 법은 사리를 조금 아는
자는 반드시 실행할 수 없는 법이란 것을 알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사리를 아는 자는 모두 겸병(兼幷)의 폐해를 통렬히 금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옛날 법제를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한전법(限田法)을 실시할 수 없는 것도
역시 이러한 것이다. 무릇 밭을 자신이 경작하지 않고 타인에게 병작(幷作)을 주는 자는 병작자로 하여금 5분의 4를 먹게 하고 밭주인은 5분의 1을 받게 하여[조세는 밭주인이
부담하고]위반하는 자는 관에 고발하여 법으로써 나누어 주게 하고 지주가 차지할 5분의 1마저 몰수하게 한다면 농사를 지은 자는 그의 노력만큼 받게 되고 자작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많은 경지를 갖더라도 이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금하지 않더라도 겸병의 폐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한다. 이 법은 그럴듯하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곤란한 점이 있다. 그것은
대체 개인과 개인이 서로 속삭이는 일은 매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에서 살피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미 그들에게 토지를 사유하도록 허락해주고 또 그들의 이익을 제한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간사한 폐단이 많이 생겨서 실행하기가 오히려 한전법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또 후세의 채지(采地)와 세록전(世祿田) 및 선비를 교양하는 대책까지도 모두 폐지하게 되어
사대부들로서 다만 자기가 경작하는 토지에만 의거하여 생활하게 될 뿐일 것이다. 이제 만일 선비를 교양하는 규정을 회복하지 않고 그와 같이 한다면 대부로서 관직 없는 자와 세가 집
자제와 향리의 선비, 관에서 일하는 이례(吏隸), 고아, 과부 등은 의지할 곳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겸병하는 모리배를 미워하다가 선비와 농민들의 직분이 다른 의의까지를 없애는
것이다. 이는 다만 손에 고무래와 호미를 든 사람만이 밥을 먹을 수 있고 사대부는 살아갈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니 천하의 공통된 의리로 보아도 옳을 것 같지 않다.[번지(樊遲)의
농사를 배우겠다는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노력을 교환하여 벌어먹는다는[食功] 등에 관한 맹자의 이론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만일 조정에 대대로
내려오는 대신[世臣]이 없고 나라에 학문하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이 어찌 국가의 이익이 될 것인가?[대부와 사는 언제나 없어서는 안될 것이디. 또 이미 벼슬을 하던 자가 갑자기
농사일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직접 농사를 짓지 않던 자는 스스로 벌어먹기 어려울 것이니 여기에서 발생하는 폐단은 필연코 대부로 하여금 녹을 얻기 위하여 벼슬에 매달리게 할 것이며
간활한 관리들은 한사코 뇌물을 취하려는 것이 오늘보다 더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염치는 없어지고 간사하고 속이는 것이 습속으로 될 것이니 그 해독을 어찌 다 말하랴? 이것은 형편상
반드시 발생하고 말 일이다.]또 아무리 이렇게 한다더라도 이미 밭을 제한하지 않았으니 빈부가 언제나 고르게 될 수 없으며 또 토지에다 사람을 결부시키지 않으니 부역을 피하는 자가
더욱 많아져서 유리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공전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백 가지 법을 만들어 놓아도 하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공전법이 지극히 좋기는 오늘날에 그것을 실시하지 못할 바에는 당분간 토지 측량[量田]이나 호패법이라도 실시해야 할 것이다" 한다. 이것도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법은 번잡하면서도 간사한 폐단이 생기기 쉬우니 한번 힘들여 영원히 평안하게 하는 법은 아니다. 이것을 실시하기는 공전법보다 곱절이나 어려우면서도 그
효과는 적을 것이다. 대체로 일이 부득이 한 경우면 할 수 없이 이런 법을 실행하는 것도 있을 듯한 일이나 그러나 지금의 백성은 모두 우리의 백성이며 땅은 모두 우리의 땅인 이상
다만 국가에서 실시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아무런 부득이 한 일이 없는 터에 무엇이 안타까워서 이런 법을 취할 것인가? 가사 지금 양전법을 실행하여 토지를 측량한다더라도 소란을
일으키기는 일반인 반면에 얼마 안 가서 다시 어지러워질 것이며[다만 장부상으로만 밭이 등록되고 실지 경계는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호패법을 실시하는 것도 실행시의 일은 공전법
실시보다 못지않은 반면에 백성이 싫어하고 기뻐하기는 공전법의 실행과 반대로 되기 때문에 엄격한 법률과 혹독한 형벌이 아니고는 실행할 수 없을 것이며[대체로 공전법에서는 부역이 있는
자에게 반드시 밭을 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밭을 받고 대장에 등록하게 되지만 호패법은 밭과 사람이 배합되지 않기 때문에 등록한다면 백성에게 하등의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탈적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백성은 모두 부역을 기피하려 하고 관에서는 적에 올리려 하므로 엄격한 법률로써 준엄하게 실행해야만 전국적으로 호패를 차게
될 것이다.]가령 호패법을 일시적으로 실시하더라도 형벌을 조금 늦추면 법이 도로 폐지되고 말 것이다.[위에서 말한 한전법과 같다.]이것을 오래 실행하면 오래될수록 다사(多事)하고
번거로울 것이다.[사람에게는 동정(動靜)이 있어 죽고 사는 것에 일정함이 없으니 전답처럼 한번 정하면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공전법은 양전법과 호패법 양자의
장점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일거양득이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빈부가 고르게 되므로 모든 백성이 기꺼이 따르게 될 것이다. 양전법과 호패법은 노력을 두 번 들이고도 그 이득은 겸해
얻지 못하며 하나를 얻고 둘을 잃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모두 싫어하여 기뻐할 자가 없다. 요령 있는 것을 버리고 번잡한 것을 취하며 지극히 좋고 폐단이 없는 것을 버리고 이익
절반 폐단 절반인 것을 취하여 한번 노력하면 영원히 평안할 것을 버리고 언제나 고생하고 폐기되기 쉬운 것을 취하는 이런 일을 현명한 자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공전제도는
지극히 순조롭고 지극히 안정적이며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요령이 있는 것이거늘 무엇을 꺼려서 시행하지 않을 것인가? 제왕(帝王)이 천하,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이밖에는 다른 좋은
법이 없었던 것이다. 후세에 만약 이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좋은 정치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영명한 군왕이 있어서 과단성 있게 시행만 한다면 어느 때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실행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법을 실시하면 진실로 기뻐할 자가 많을 것이나 부호들이 자기의 이익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니 난을 일으킬 염려가 없지 않겠는가?" 한다. 그럴 리는 결코 없다.
만일 국왕의 덕이 부족하고 신하들이 모두 사리사욕을 추구하게 된다면 이러한 일뿐만 아니라 백 가지 일이 모두 희망이 없고 나아가서는 국가까지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국왕이 밝고 신하들이 마음을 합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서 헌신적으로 실행만 한다면 만백성이 성심으로 기뻐서 따라오게 될 것이니 흑 사리사욕을 추구하여 원한을 품는 자가
있다하더라도 누구와 함께 난을 일으킬 것인가? 설령 그렇게 되지 않아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더라도 자멸하고 말 것이니 이런 것이 어찌 나라의 걱정거리까지 되랴! 예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모두 일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음탕하고 혼매한 생활을 일삼았던 자들이며 지성으로 착한 정치를 시행하려다가 난리를 당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대체로 천하만사는
단지 두 가지뿐이니 천리(天理; 저의)와 인욕[人欲; 이기심]이 곧 그것이다. 가깝게 말하면 마음의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멀리 천하만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정의감을 가지면 이기심은 저절로 없어지게 되어 모두 길하고 유리할 것이니 언제 어디서 정의를 위하여 일하다가 몸을 망친 자를 보았는가? 성인이 주장하는바
정의대로 행할 뿐이니 정의가 가리키는 방향이라면 비록 사람을 죽이고 토벌하는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순임금이 사흉(四凶) 사흉(四凶)： 좌전에 있는 말로서 고대
중국의 순임금이 죽이었다는 네 악한인 혼돈, 도올, 궁기, 도찬(渾沌, 檮杌, 窮奇, 饕餐).

을 벤 것과 문왕(文王) 문왕(文王)： 고대 중국 주나라의 어진 임금.

이 50국을 멸망시킨 것과 선왕(宣王) 선왕(宣王)： 중국 주나라의 임금인데 그는 서방에서 침입한 만족 견융(犬戎)을 평정.

이 견융을 토벌한 것들은 모두 이를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일정한 주견이 없이 망설이기만 한다면 아무 일도 못할 것이다. 간사한 무리들이 노할까 봐 염려한다면 그자들을
물리치지도 못할 것이며 간활한 관리배들이 원망할까봐 두려워한다면 회뢰(賄賂)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인순고식(因徇姑息)하는 것이 과연 국가를 다스리는 시책이라면 당나라의
덕종(德宗)이 절도사의 세습을 그대로 허락한 것이고 헌종(憲宗)이 반역자들을 처단한 것이 도리어 실책으로 될 것이며 송나라의 고종이 원수와 강화한 것이 옳고 모든 현자들[諸賢]이
국가를 회복하기 위하여 분투한 것이 도리어 그릇된 것으로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누가 안전하고 누가 위태로우며 누가 흥하고 누가 망할 것인가?
이것이 일은 다르더라도 이치만은 한가지인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백성이란 명령하면 실행하고 지도하면 복종하여 대소 귀천이 모두 다 제 직분을 얻게 되어 백성은 도탄에서 벗어나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됨에랴! 다만 국왕이 사심을 버리고 어진 덕을 밝히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요 부유한 자들의 반란 따위를 걱정할 바 아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공전법을 실시하여 규정에 의해서 밭을 받고 등급에 의하여 세를 바치게 한다면 주나라 때의 십부유구(十夫儒滿 ; 정전 제도에서 경계선으로 파 놓은 도랑)의 제도를
실행하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것인데 구태여 4경씩으로 한계를 짓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한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땅이 좁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의 땅이라도 좁은 곳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런 데는 이렇게 할 것이다. 가사 10부(夫)나 100부로 제도를 만든다 해도 안될 것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정(李靖;당나라 명장)이 진(陣)을 칠 때에 좁으면
팔진(八陣)을 고쳐서 육화진(六花陣)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인바 그 실상은 팔진법의 뜻이 모두 육화진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구태여 4경씩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1경 혹은
1묘씩으로 계산하더라도 괜찮으니 요컨대 경계만 바로잡아서 사람들에게 고르게 나누어 주며 인수를 밝히고 부역을 고르게 하여 각각 자기의 직업에서 정상적 생활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혹자가 또 말하기를 "규정에 따라 밭을 차등이 있게 분배해 준다면 1경으로 해도 될 터인데 4경을 경계로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다. 이것은 밭들 사이에 도랑이나 길을
두어서 배수와 교통을 위함이니 물이나 길이 모두 다 작은 데로부터 큰 데로 가는 것을 고려하여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법은 지금 형편에 맞추어서 만든
것이지마는 실제로 삼대(三代) 때에 이미 모두 실행하였던 제도이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경계를 한번 정해 놓으면 후에 다시 고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시초부터 신중히 법을
세우려는 것이다.[옛날 백성이 밭을 분배 받고 병역 의무를 고르게 졌던 것은 모두 법에 의하여 정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은 지금 실정에 맞추기 위하여 대부 사에게 밭을 더
주게 되었기 때문에 옛날의 것에 비하여 조금 미흡하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양인과 천인 및 군인과의 구별을 두어야 하기 때문에 옛날의 것과는 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쓸데없는 산과 숲 등의 땅이 많은데 이런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 한다. 원래 성인의 법이란 자연적 조건을 맞추어 적당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그
실정에 순응한다면 지대에 따라 알맞게 할 것이니 경작할 수 있는 땅은 밭을 만들고 산과 숲으로서 경작이 불가능한 데는 각각 그에 맞게 삼림, 원예나 목축장을 만들면 좋다.[우리나라
산협 지대의 땅들은 백성들의 이용이 극히 적어서 대부분이 버린 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성읍 촌락들도 대개 산기슭에 있으므로 이런 땅을 과원(果園)으로 만들 수도 있다. 여기에
만일 대추, 밤, 감, 배, 딱, 차, 참대 나무 등을 그 토품에 맞추어 각호마다 수백 주씩을 심는다면 그로부터의 이익이 전답의 수입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백성들이
이것들을 심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관리배들이 닥치는 대로 침해하기 때문이다. 이제 어떤 고을에 밤나무 밭이 있으면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배 이상의 세금을 강제로
받을 뿐만 아니라 멀리까지 가서 그 물품을 사다 바치게까지 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밤나무 미워하기를 원수 미워하듯 하고 있다. 남방의 민가에 유자나무가 있으면 관에 반드시
등록해야 하고 세금을 바칠 뿐만 아니라 신역을 시키는 외에 이 유자나무에 대한 작업까지 더 부담하게 된다. 비록 이 나무가 썩게 된 뒤라도 자손에게까지 내려가면서 세금을 바치게
하고 심지어는 이웃 마을에까지 해를 입히기 때문에 그 유자나무의 움이 돋는 것을 보면 서로 경계하면서 뽑아버리고 있다. 또 벌통에 이르기까지도 등록을 해서 세금을 받기 때문에 산골
백성들이 양봉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말이나 매를 기르는 데도 등록하여 세금을 받는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법령을 명확하게 제정하여 백성들에게 모든 침해를 끼치지 못하게 한 뒤에라야
백성들을 고무시켜 산업을 일으키고 그들의 이익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각지에 있는 산과 숲, 습지들을 모두 목축장이나 양재림, 저수지로 만들어 이용하지 못할 곳이
없게 되어서 백성들이 혜택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국가도 자연히 부강하게 될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전대(前代)에는 둔전(屯田)이 편리하다고들 많이 말하였는데 이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다. 둔전이란 원래 군대에 공급하는 비용을 적게 들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평시에는 각 영과 진에 군자전만을 둘 것이요 둔전을 두지 말 것이다.[군자전은 백성에게 분배하여 경작케 하며 또 병역 의무를 지게하고 거기에서 받은 세를 소속 영이나 진에 바치게만
할 것이다.]그 이유는 진이나 영에 군인이 있어서 번을 서고 있지마는 무예(武藝)를 연습하는 자로서 연습을 그만두고 둔전에 종사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또 둔전을 경작함에
있어서 소나 농기구 등의 비용이 적지 않으므로 암만해도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같은 땅을 경작하면서 군대를 괴롭게 하고 재물을 소비하면서 백성을 침해하는 것보다 차라리
백성에게 주어 세를 받고 병역 의무를 지게 하는 것이 낫다.[이것이 이른바 집에 있는 소 한 마리를 간신히 끌고 가서 양 다섯 마리를 사고는 소 없어진 줄은 잊어버리고 양 다섯
마리를 얻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지금 아문에서 둔전을 하는 것도 이와 같다.]그러므로 둔전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렇게 명확하다. 그러나 만일 국경에 어떤 사변이
있어서 군대를 오래 주둔시켜 방위해야 하고 또 국가로부터 공급을 받는 데라면 부근에 있는 묵은 유한지를 측량하여 옛날의 제도에 따라 둔전을 둠으로써 운반하는 노력을 덜고 또 군수
자재를 많이 저축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사건이 종식되면 반드시 폐지하여 백성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어야 한다.[둔전을 설치하더라도 역시 경묘법에 의하여 경을 만들어야 한다.]

세와 병역을 정함에 있어서는 모두 밭에 의거하여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며 사람에 의거하여 정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는바 이는 고금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옛날에는 밭을 기본으로 하여 세와 병역을 부담하게 하였기 때문에 혹 밭을 경작하던 자가 사망하더라도 밭은 그대로 있고 경작하는 자만을 교체하게 되므로 국가에서는 병역을 도피하는
폐단이 생기지 않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부역만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사람을 기본으로 하여 세와 부역을 정한다. 그리하여 해당자가 부단히 사망하고
유리하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조세를 이웃에 물리는 폐단이 있었다.[조(租)ㆍ용(庸)ㆍ조(調) 조(租)ㆍ용(庸)ㆍ조(調)： 중국 당(唐)나라 때의 세제(稅制)인데 조(租)는 매
농호마다 경지 1경씩을 주고 해마다 조세 2곡씩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용(庸)은 장정 1명에 대하여 매년 부역 20일씩 출역케 하는 것이며 조(調)는 백성에게 해마다 비단 3필과
솜 3냥씩을 받는 것이다.

의 세 가지 세제가 모두 백성에게 밭을 주기는 하였으나 장정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양세법(兩稅法) 양세법(兩稅法)： 중국 당나라 때에 시행한 세제로서 국가의 조세, 부역, 공물 등
세를 1년에 2기로 나누어 받던 것.

이 자산의 등급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먼저 세액을 정해 놓고 호를 대, 중, 소로 나누어 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을 면할 수가 없었다.]우리나라의 병역제는 일가친척과 가까운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폐단이 있는바 이것은 필연적인 형세에 의하여 만민에게 해독이 미치는 것이다. 이발(李渤) 이발(李渤)： 중국 당나라 때의 인물.

과 구준(丘濬) 및 근세 이율곡(李栗谷)의 말을 참고해 보아도 명백한 일이니 국가와 민생을 위하여 대책을 강구하는 자들은 이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당나라 헌종 때에 이발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臣)이 위남(渭南) 고을을 지날 때에 들으니 장원향은 이전에 4백 호였었는데 지금은 불과 백여 호이며 문향(閔鄕)은 이전에 3천여
호였었는데 지금은 겨우 천 호이며 기타 주, 현도 다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렇게 된 이유를 구명하여 보니 모두 피호세(避戶稅)를 이웃 마을에 전가시켜 징수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구박에 못 견디어 도망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세무 관리들이 백성을 착취하여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데서 온 결과로서 못[澤]을 말릴 것만을 생각하고 고기[魚]가 아주 없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여씨춘추(呂氏春秋 여불위가 지은 책이름)』에 '못을 말려서 고기를 잡으면 어찌 고기를 잡지 못하리오마는
다음해에는 고기가 아주 없어지고 말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바 이발의 말은 거기에 근거한 것이다. 근세에 백성으로부터 취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다. 그 중에도 족징(族徵),
인징(隣徵) 및 수렴의 피해가 더욱 심하여 한 번만 훑어가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훑어가기를 마지아니하여 물줄기가 다 마르고 고기가 아주 멸종하기 전에는 멈추지 않고 있다.
왜 이렇게 되는가? 중등 가정의 생산은 겨우 1호의 세를 바칠 수 있으나 혹 수재, 한재 및 흉년을 만나거나 질병을 얻게 되면 그나마도 부족하여 꾸어다 바치지 않을 수 없게 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다가 타인의 것까지의 배(倍)액을 무리꾸럭하기 때문이다. 한 개 리(里)를 예로 들어 1리 안에 100호가 살고 있다 하자. 1년에 1호가 1호 세만을 내는 것이
옳지만 가령 금년에 도망간 20호의 세를 남은 80호에 물리면 4호가 5호분의 세를 내게 되며 또 다음해에 도망간 30호의 세를 70호에 물리면 5호가 7호분의 세를 내게 되며 또
다음해에 도망간 50호의 세를 남은 50호에 물리면 1호가 2호분의 세를 내게 될 것이다. 도망한 자의 미납 세액이 늘어나 늘고 남아 있는 자에게 물리는 세가 날마다 증가되므로
남은 자 역시 견딜 수 없어서 집단적으로 도망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며 그에 따라 남은 자의 부담도 날이 갈수록 가중해지니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백성만이 못살게 될 뿐만 아니라 나라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선조임금 때에 이율곡이 국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고리대 업자들과 장관수배[債帥輩]들이 방어군의 인원수를 갉아먹어 병역 대신에 면포[綿布]를 납부케 하기 때문에 군졸이
두어 번 국경으로 나가 있게 되면 가산이 탕진되어 살 수가 없어서 줄곧 도망쳐 버린다. 그리하여 다음해 병역 명단에 의거하여 입대를 독촉하면 본읍에서도 그 친척에게 부담시키고 그
친척이 도망하면 친척의 친척에까지 침해하게 되어 그 화환(禍患)이 끝없이 만연되고 있으니 백성은 장차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고, 또 계속하여 말하기를 "지금 백성
한 사람이 도망하여 흩어지면 일가와 가까운 이웃집에까지 침해하며 그 일가와 이웃이 견디지 못해서 도망가면 또 일가의 일가, 이웃의 이웃에까지 침해하여 한 사람의 도망한 일이 10여
명에게 미쳐서 백성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어야만 그만두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폐단을 철저하게 혁파하여야만 아직 흩어지지 않은 백성이나마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오늘 장부 상에 있는 병역 인원수는 실제로 호(戶)도 없는 것이 절반이다. 이 상태로 간다면 목전의 온갖 수요에 도저히 응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간교한 백성들이 모두 군역을
도피하고 있다" 한다. 아! 한심한 일이다. 이것이 곧 국가가 흥성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다. 지금 백성의 고통이란 거꾸로 매어 단 것보다 더 위급하다. 만일 시급히 구제해 주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나라는 공허하게 될 것이니 나라가 공허하게 된 뒤에는 목전의 수요를 어디서 해결해낼 것인가?" 하였다.

○ 토지 국유[公田]와 인재를 추천하여 등용하는 제도[貢擧] 양자가 실행되더라도 후세의 포악한 임금과 탐오한 관리 및 경박하고도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반드시 토지 사유와
과거제도를 다시 시행하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야말로 천하ㆍ국가의 치란(治亂)과 인심ㆍ풍속의 옳게 되고 못되는 것과 크게 관계되는 바이니 국왕은 국가적인 훈계를 만들어
후세에 전하고 전국에 포고하기를 명나라에서의 오랑캐에 대한 훈계문(戒和虜)과 같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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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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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制雜議附

或曰 "此法至矣盡矣. 但一戶所受有限 子壯則必別受田 若近處無窠 受於遠村 則未免父子異居矣." 曰 "古者 井田之世 父子同居 秦商鞅 惡民父子兄弟同居 故乃令分異 而廢井田. 只後世之法
使民父子易於離散爾 固非所慮於公田也. 蓋民有常産 則親戚相存 無常産則父子不相保. 且以目前事較之 亦可易見. 今雖多田者 子若衆多 則必買田而後乃得容居 而近處無可買之田 則不得已買於遠地
此則今亦無奈何. 人有故亡者 以私田則不必賣與 以公田則必代與. 雖有賣者 以私田則有價然後 乃買. 以公田則當受便可受. 然則公田之法 爲易以異居乎? 私田之法 爲易以異居乎? 况今多田者 十居其一
而無田者 常爲八九者乎? 或又曰 "今我國之民 旱田與水田幷有之 故雜種稻豆 相和以用. 若畫地定受 則一頃之內 未必兼有旱田水田 有旱田無水田 有水田無旱田者 必多矣." 曰是雖然矣. 公田旣行之後
民與今日之事 亦無相遠. 公田雖定畫界 不無相求和換之事. 謂各以要用 兩相私和 分畝換耕. 親戚隣里之間 自可相通相宜 以一家同産言 則父有旱田 則子求水田而受之 兄有水田 則弟求旱田而受之
亦唯其所宜. 以相濟也. 今亦有旱田者 未必有水田 有水田者 未必有旱田 而况旱田水田都無者 至衆也耶? 如中原之地 自淮以北 數千餘里 皆一片旱田而無有水田. 我國西北地 亦水田絶無 安可論此?
雖今南方 峽邑之民 則例多專事旱田. 如金堤東津坪 礪山彩雲鄕等處則 連野盡是水田 而無旱田. 此皆其民 隨其自然之勢 各專其業 而懋遷有無以相濟也. 未聞以此闕用致乏 不比他方也. 此條本不足卞
而姑從目下人事說破耳.或又謂若行此法 未免地少人多 是亦不然. 天地造化 却無如此之理. 人生於地 有如魚生於水 未聞魚多 而水不勝也. 果使地少也 今之一人兼幷 而衆人無田 爲不足憂 而兆人均分之後
或有餘人之爲可憂耶? 大抵無論公田與私田 俱是一般此地此人 元非別基局. 只公田則公而均 私田則私而偏 公則民産有恒 人心有定 敎化可成 風俗可厚 萬事無不各得其分 私則一切反是耳. 且此法若行
菽粟如水火 又焉有今世景象乎? 今多田者 有剩田 而力有限 故不遍耕. 無田者 有遊手 而無其田 故不得耕. 所以 地多荒田也. 縱有幷作之規 (今以田給人耕之 而分其出 俗稱幷作) 多田者 給人幷作
廣合諸出 自可安坐而食 故無所事於勤力. 無田者 姑耕人田 每歲難常. 以爲非己之有 故亦無意於糞治 所以田多不糞也. 此法若行 則地無荒田 田皆勤力 通計地上生}\之數 則比今不啻倍矣. 歲歲如此
恒久倍獲 豈不菽粟如水火乎? 孔子曰 "均無貧." 聖人之言 豈不曲曲盡當矣乎?或曰 "行法之初 富人未免爲苦. 今逸居不學 無德於民 而田連阡陌 富冠鄕邑者 固爲僭分 然習富已久 卒然減省
亦人情所難堪 宜當寬貸 許納粟拜影職 如今僉正察訪之類 依實職例 受田免兵 令後勿爲式. 如此則田制之行 不害於永久 久後 自歸於正. 而富人無怨於初頭矣." 曰如此等事 係於一時微權 苟量時審勢
有不得已者 則古人亦有行之者. 然 此則恐不必然. 茲法之行 非官奪人田 計民分給 民各自爲望受 則富人自當分於子弟奴僕 不過立號出兵耳. 就使減省 千金之家 終必愈於自前貧窘之人矣.
此雖曲思深慮之言 行法之初又開此路 則人爭興心 奔走財貨 非所以一衆志 立大本之道也. 自古聖王之創制安民 無他術也. 其所存爲天下謀 而不爲一己謀 則人無不服 執之以正 而行之以公 則事無不立.
苟如是 則人各得其所 而安其分矣. 不必曲爲之法 以處倖民也.或曰 "古制旣廢之後 田不在公而在民 富者連絡阡陌 貧者無立錐之地. 是以富者漸益富 貧者漸益貧. 及其久也 則牟利之輩 盡有土地
而良民相率流移 爲其傭作之人 其害所至 不可勝言. 然今率土 皆爲私有 人各視爲世傳之物 則一朝更變 亦甚難行. 若仍爲私田 不禁買賣 而唯限其數 自公卿 以至庶民 皆有定限 田多者 許其鬻賣 田少者
買而足之. 若此則如何?" 曰此亦先正經界 又明丁戶 以田配丁 然後乃可. 不然 民家所爲 官府有不能盡察 而虛立名字 冒錄籍案之弊 終不可防. 然 經界之正 丁戶之明 非行公田 亦無由可得.
就令經界旣正 丁戶旣明 許爲私有 而復制其限 勢有所難行也. 蓋爲公田 而人得受之於官 則生子衆多者 不憂其無田 父爲大夫 子爲士者 其科雖異 受納無滯矣. 旣爲私田 而無所受於官 則人家生子
未免豫買. 大夫之子 未爲大夫者 必使之賣其餘田. 老少生死 子孫衆寡 買賣難易之間 人情事勢 拘礙百端 因而奸僞 不勝其煩矣. 雖嚴法刻刑 猶多犯之者 如此而欲期於必行 是設穽以陷民
而又從而刑之也. 設使如商鞅之爲 强立一時 刑少弛 則法還廢 此果何樣政法乎? 事雖似難於一時 佚道使民 一勞永逸者 俗人以爲難 而君子必行之. 如此之法 則少知事理者 亦識其不可行矣.或曰
"兼拜之弊 自古識者 皆欲痛禁 而每難於復古制. 限田之不可行 亦如此 則凡田不自耕 而給人幷作者 定爲著令 作者 食五分之四 田主取其一分 租稅仍今出於田主. 違者 許告官分給如法 而幷沒其一分.
如是則力農者 得食其力 而不自作者 無所利於剩田 雖不曲爲之防 而兼幷之弊自息矣." 曰此法雖似然矣 細思之 煞有曲折. 蓋此私相約和 有同買賣 難以自官畫定. 且旣許其田爲私有 而復欲制之於其利
奸弊無窮 而事之難行 反有甚於限田. 且後世 采地ㆍ世祿田 凡養士之具 一切皆廢 士大夫 各資其田里而已. 若不復養士之規 而但欲如此 則大夫無官者 世胄子弟 鄕里儒士 以至吏隸 役於官者及凡孤兒寡婦
皆失所賴矣. 是惡兼幷牟利之輩 而幷沒別君子野人之意. 只令手持耰鋤者乃有其食 而大夫士未有以處 則天下之通義 亦不如是. 以孔子答樊遲學稼之問及孟子勞心勞力食功之說 見之可知. 誠使朝無世臣
國乏遊學 豈人國家之利哉? 大夫士終不可無 而已貴者 不能猝爲手稼 不耕者難以自食 則其弊也 將大夫持祿苟容 士干祿競進 猾吏捐身徇賄 不啻如今之爲矣. 廉恥道喪 奸偸成俗 其害豈可勝言?
是其必至之勢也. 且雖如此 旣不限定其田 則貧富終不可均 又不以田配人 則逃役者 益易於流亡矣. 蓋不復公田 百般作法 無一可者也.或曰 "公田固善之至矣. 今世如未能行 則姑行量田 號牌可也."
曰如此 猶賢乎已. 然二者 事爲常煩 奸弊易生 非一勞永逸之道也. 行之之難 有倍於公田 而其收效 淺且短矣. 凡事 出於不得已 則無可奈何 而姑取其彼善於此者 或有之矣. 民是吾民 地是吾土
只在君相之擧而布之耳. 本無不得已 何苦而如此? 蓋今量田 亦未免一時之擾 而未久還晦. 以田只載於簿書 而經界不明於本地故也. 戶牌則一時多事 無異於公田 而民之欣厭 則與公田異 故非嚴法刻刑
不可以得行. 蓋公田 有役則有田 民自受田入籍. 戶牌則田與人不相配 民無所利於入籍 而有利於脫籍 故兆民 皆欲避役 而唯上之人 必欲籍之 是以設法必極其嚴 行法必極其峻 然後國中方無不佩之民矣.
假令得行一時 刑少弛則法還廢. 亦如上所云 限田之爲. 萬世常行 則萬世常多事矣. 人有動靜 死生無常 非如田地一定不易故也. 公田則兼是二者之利 一擧而兩得 加以貧富均一 兆民悅服. 二者則兩勞
而其利不相兼 得其一而失其二. 加以民皆不欲 而無悅之者. 夫去其要而執其煩 捨其盡善無弊 而取其半得半弊 捨其一勞永逸 而取其常勞易廢 斯豈智者之所宜爲也? 公田之法 至順至安 至簡至要
何憚而莫之行乎? 帝王治天下國家 此外更無他法. 若後世終不得行 則終無望治矣. 苟英明之君 斷而行之 無古今無華夷 本無不可行也.或曰 "此法 固悅之者衆. 然豪富未免奪利 則不無作亂之端乎?"
曰此則必無之理也. 若君德不明 在位之臣 皆謀身徇利 則非特此事 百爲無望 而社稷且將難保. 誠使君明於上 在位之臣 協心徇國 則擧而措之 億兆誠心悅服 設有奸濫專利者 或懷怨懟 將誰與爲亂?
設謂出於必不然 而或有作亂者 自伏其誅而已. 豈至以此 爲國家之憂哉? 自古致亂者 率以徇一己之慾 而事淫昏也. 未聞以至誠行仁政 而致亂者也. 大凡天下萬事 只是兩端 天理人欲而已. 近自一心之微
遠至於天下之事 皆一規也. 人苟存天理 則人欲自退 聽而吉無不利 何嘗見存天理 而病身者乎? 聖人所主 一於天理而已. 天理所在 雖有誅殛討伐之勞 亦所不辭. 舜之誅四凶 文王之滅國五十
宣王之薄伐犬戎 皆爲此也. 若無所主 而半上半下 畏首畏尾也. 慮奸回之或有怒 則小人不可退矣. 慮猾吏之或起怨 則賄賂不可遏矣. 因循姑息 果是爲國之道也 則唐德宗之仍許擅襲 爲得計
而憲宗之斷削諸叛爲失策. 宋高宗之主和讎虜爲是 而諸賢之奮欲恢復者爲非矣. 以此見之 孰得孰失 孰安孰危 孰興孰亡 其事雖殊 其理一也. 况此吾民 令之斯行 導之斯從 大小貴賤 無不各得其分 若脫塗炭
而置之袵席之上者耶? 只患人君 不能去一己之私 明一心之德 富民作亂 非所慮也.或曰 "若以此法 定科而受田 分等以收稅 則周家十夫有溝之制 亦無不可 而今必以四頃爲界 何也?" 曰本國地狹
雖中國亦不無地狹處 故如此矣. 十夫百夫爲制 亦何不可乎? 此如李靖爲地狹 故變八陣爲六花之意也. 其實八陣之義 皆在六花之中矣. 非必四頃 雖一頃一畝 皆以是計之. 只是要正地界以均人 明人數以均役
使之有恒産 各得其分耳. 或又曰 "旣科受有差 則只作一頃可也 而猶必以四頃 爲界 抑又何耶?" 曰田間溝徑 疏洩水潦 通行人物皆由小以趨大 則不可不如此. 且此法 雖爲宜於今 其實三代制度
無不可盡行者 經界一成 後難更改 故欲謹之於初也. 古時 民之受田出兵 一齊以整. 此法因今之宜 故大夫士 受田有增減. 所以比古 猶有些不及處. 我國則良賤軍伍 不得不異制 又隔一層矣.或曰 "本國
山阜林麓不用之地居多 如此者奈何?" 曰聖人經制 皆因其自然之勢 而利導之. 苟順其理 各有其宜. 其可耕之地 則作田頃 其山阜林藪不可耕之地 則各隨其便 爲樹藝牧畜之所 可也. 我國山峽之地
民利絶鮮 率爲棄地. 至於城邑村落 所在多傍山麓 可爲果園. 民若種得棗栗枾梨桑楮茶竹之類 隨土所宜 戶各數十百株 則其爲利也 不減田畝之收矣. 而民不興於樹藝 何也? 是亦長民者 觸事侵害而然也.
今或邑有栗林 則令農民守直 而倍數徵歛 至於私貿遠方而納之 故民之疾栗林也 如疾仇讎. 南方民家 一有柚樹 則置簿徵納 身役之外 添得此役 雖柚株旣朽 而其徵納 則傳之子孫. 害及隣里 故一有萌生
相戒拔去. 以至蜂桶置簿 而峽民難於養蜜. 有馬有鷹 置簿而無勢者 難於畜馬養鷹. 一有名目 皆作民害 其間抑勒催督 吏胥奸弊 又不可勝言. 嗚呼! 民何不幸 不出於古之 世乎? 今欲以樹藝之利
以裕山峽之民 則必先自朝廷 省除進上 以絶憑藉之路 明著法令 一切勿侵 然後可以勸民興生 使資其利. 如此則凡四方之地 山阜藪澤原隰 或爲牧畜之場 或爲材木之儲 或爲陂堤之瀦 無處不有其宜 而生民有賴
家國自然贍裕矣.或曰 "前代 多言屯田之便 此則當如何?" 曰屯田 本是 給軍省費之大者. 然平時則諸營鎭 只置軍資田 而不可復爲屯田也.軍資田則令民受耕 出兵 而但收其公稅 移入該屬營鎭而已.
蓋營鎭 雖有番軍 本以番防 而鍊習武藝者 不可捨鍊習 而驅諸屯田. 且田牛農器 費用不些 不無侵損於軍民矣. 同是一地 與其勞軍費財以損民 孰若給民收稅 以出兵之爲愈? 此所謂以在家之一牛 艱辛道路
販得五羊 而忘其一牛之失 誇其五羊之得者也. 今世 各衙門屯田 皆此類也. 其爲不可也 較然矣. 唯邊隅有虞 屯衆境上 不可放解 而自公廩給者 則量以便近陳閑處 依古法開屯田 以省轉輸 而廣軍畜可也.
事已則亦當罷之 而令民分受. 雖爲屯田 亦依法作頃.凡定稅定役 莫善於以地 莫不善於以人 古今已然之效 皆可見. 古者以地出稅 以地出役 卽出兵. 則人或死亡 而地有常所耕者代之 故國無漏戶之弊
民無無産之役. 後世 以人定稅 以人定役 則人有死亡 流移 故唐之租稅 有攤稅比鄰之弊. 租ㆍ庸ㆍ調法 雖授民以田 而以丁戶爲主. 兩稅法雖以資産爲宗 而先定稅數 以大中小戶 分定故俱未免此弊.
本國軍役 有一族切隣之弊 此必至之勢 而流毒億兆者也. 李渤ㆍ丘濬及近世栗谷說 可考而見 爲國家生民計者 宜深思之.唐憲宗時李渤上言 "臣過渭南 聞長源鄕 舊四百戶 今纔百餘戶. 閔鄕 舊三千戶
今纔千戶 其他州縣 大率相似. 跡其所以然 皆由以逃戶稅 攤於比鄰 致驅迫俱逃 此皆聚歛之徒 剝下媚上 惟思竭澤 不慮無魚."○丘濬曰 "呂氏春秋 謂竭澤而漁 豈不得魚. 明年無魚."
李渤所云'惟思竭澤 不慮無魚'蓋本諸此. 後世取民 大率似此 而攤稅之害尤毒 非徒一竭而已. 且將竭之至再至三 而無已焉 不至水脈枯 而魚種絶 不止也. 何則 中人一家之産 僅足以供一戶之稅
遇有水旱疾癘 不免擧貸逋欠 况使代他人 倍出乎? 試以一里論之 一里百戶 一歲之中 一戶惟出一戶稅可也. 假令今年 逃二十戶 乃以二十戶稅 攤於八十戶中 是四戶而出五戶稅也. 明年 逃三十戶
又以三十戶稅 攤於七十戶中 是五戶而出七戶稅也. 又明年 逃五十戶 又五十戶稅 攤於五十戶中 是一戶而出二戶稅也. 逃而去者 遺下之數日增 存而居者 攤與之數 日積. 存者不堪 又相率以俱逃
一歲加於一歲 積壓日甚 小民何以堪哉? 非但民不可以爲生 而國亦不可以爲國矣.我宣廟朝 栗谷告於上曰 "今債帥輩 剝割防軍 必使代納綿布 軍卒數度留防 家已懸罄 不能支保 逋亡相繼. 明年 按籍督戍
則本邑必以一族 應役 一族又逃 侵於一族之一族 禍患蔓延 無有紀極 將至於民無孑遺矣." 又曰 "今茲一有逃散之民 則必侵其一族及切鄰 一族切鄰 不能支保 亦至流散 則又侵其一族之一族 切鄰之切鄰.
一人之逃 患及千戶 必至於民無孑遺 然後乃已也. 必革此弊而後 未散之民 庶幾安輯矣." 或曰 "今日 軍額隸籍 絶戶者 居半 若如此 則無以應目前之百需 且巧詐之民一切避役矣." 曰 "嗚呼 此
國之所以終不振也. 今生民之困 甚於倒懸 若不急救 勢將空國 空國之後 目前之需 亦辦出何地耶?"○公田貢擧兩者 雖已行 後世暴君汚吏及輕佻好利之輩 必有建請復設私田科擧之議. 此是天下國家大治亂
人心風俗大邪正所係 人君宜著爲廟訓 垂之後世 布告中外 如皇祖戒和虜之訓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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