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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 경상비[經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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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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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경상비[經費]

경상비. 국가의 일체 경상비[經稅]는 경상세로써 지출하고[지금 실시되고 있는 대동법과 같이] 지금과 같은 과(科) 외의 부역은 없앨 것이다.[모두 경상적인 세입에 의하여 모든
비용을 규정하고 지금의 공물, 진상과 여러 가지 잡세 및 주ㆍ현의 각종 비용은 모두 경상적인 세입 속에 포함시킬 것이며, 나아가 인부 거마비까지도 모두 이에 포함시켜 털끝만큼이라도
백성으로부터 따로 받지 말 것이다. 이 규정은 지금의 대동법에 의거할 것이나 불충분한 것들을 모두 개정하여 조례를 일일이 명확하게 규정해서 전국에 실시하되 고을마다 법을 달리하거나
백성에게 잡역들을 부담시키는 폐단이 없게 할 것이다. 이것은 다만 경상적인 세입에 경상적 지출을 하자는 것으로서 본래 "대동"이란 글자를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전세(田稅)를 전부 서울까지 운수하고도 따로 공물과 진상이 있으며, 또 지방 관리의 녹봉은 경상적인 세입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따로 고을에서 받고 있어서 무슨 일만 있으면
백성에게 받아 내기 때문에 세 외의 수렴과 과(科) 외의 부역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잡역이 점차 가중되고 있다. 경상적인 세입이 고갈되고 대단히 불일치하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는 요구되는 일체의 비용을 합산하여 국가로부터 쌀로 내는 일정한 규정을 정하자는 의논들이 있다. 그러므로 비용을 국가에서 일정한 규정에 의해서 지출하고 모든 부역은
국가에서 값을 주어 백성으로부터 따로 노력을 징발하지 않게 하는 이것을 대동법(大同法)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만약 경상적인 세입이라든지 경상적인 비용이라고만 말하고 대동법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 내용을 모르고 다만 경상적인 세입만을 일정한 예산에 넣고 다른 일이 생기면 또 세 외의 수렴이 있을 것으로 알 염려가 있으니 지금 쓰고 있는 이름을
알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대동법은 지출할 것을 보아서 받아들이는[量出爲入] 규정이지만 이것은 수입을 보아서 지출하는[量入爲出] 제도이다. 그러나 일정한 규정에 의하여
거두어들이고 여러 가지 세를 중복해서 받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하다. ○제주(濟州)만은 세미를 서울까지 운수하지 말고 그 지방의 토산물로써 바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공물은
너무 번다하하고 무거우니 응당 그 세입 &lt;이것은 그 곳의 녹봉, 군자금, 각종 경비를 공제한 나머지를 말한 것이다.&gt;을 참작해서 수량을 정해야 하며 진상도 역시 적게
하여 예의적 공물을 매년 한 번씩 바치게 할 것이나 귤, 유자들만은 성숙한 때를 보아서 별공(別貢)으로 정하여 한 번 내지 두 번으로 바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해당 지방관이 이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되 일일이 규정에 의해서 무슨 물건이든지 모두 값을 주어 준비할 것이며 따로 민간에게 징수하지 말게 할 것이다. &lt;장인을 시켜 물건을 만든 것도 그 값을
줄 것이다.&gt;

각 관청에서 소요되는 물품은 모두 그 수량을 정하여[지금의 공물의 종류 및 수량을 다시 참작하여 일정하게 정하되 국가적 용도에 필요 없는 것은 없애버릴 것이다. 그 종목과 수량을
정한 다음에는 각 관청에서 자기 관청의 사용하는 물품으로서 무엇이 얼마, 무엇이 얼마라고 장부를 만들어 기재할 것이다. ○제향(祭享)에 쓰는 물품들도 모두 그 수량을 정할 것이다.
지금 종묘에는 세소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일일이 천신(薦新)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 번거로운 것 같으니 적당하게 참작하여 규정을 정해야 할 것이다. 어전 진상에 올릴 일체의
일은 본 기관인 사옹원에 넘길 것이다.] 모두 서울에서 물품을 준비하는 주인을 정하되[지금의 공물 주인과 마찬가지로 주인이라고 칭해도 좋다.] 서울로 운수해 온 세미에서 그 값을
2배 또는 5배로 후하게 주더라도 풍년, 흉년을 가리지 않는 영구적인 규정을 하여서[쌀과 돈으로 혹은 포와 돈으로 절반씩 주기로 정할 것이다.] 그 주인으로 하여금 일정한 법이
있음을 알게 해서 미리 주선하여 사 두게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은 그가 먹으면서 바치는 물건이 결핍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밖의 각종 물품들은 모두 서울 안에서 살 것이며 짚
하나도 지방에다 정하지 말것이다. 감사도 역시 자기 감영에서 사서 쓰고 각 고을에다 정하지 말 것이다.[만일 지방에다 나누어 정하면 비록 그 값을 적게 주는 때도 있겠지마는 먼
곳에 있어서는 그 물건의 값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주관하는 관청에서 흔히 값을 깎아서 염가로 주고는 좋은 물건을 사오라 하는 일도 있으며 검수할 때에 퇴박을 하거나 받을 때에
아전들이 그것을 기회로 각종 농간을 하고 있다. 이 한 가지 폐단이 생겨서 만민에게 해독을 끼치고 있으니 정부로부터 먼저 그 근본을 바로잡아 나누어 정하지 않음으로써 지방의 모범이
되게 해야 한다. 만일 지방에서 사들이는 폐단을 없애지 않는다면 이는 백성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며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라서 물화(物貨)가 유통되지 않고 있는데 각종 물품을 서울에서만 사서 쓰게 한다면 값을 아무리 후하게 준다더라도 물화가 모여들지 않기 때문에
각 관청에서 제때에 쓰지 못할 우려가 있다" 한다. 이 말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물품을 서울에서 사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이 법을 처음 실시할 때에는
혹시 그러한 일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마는 2∼3년이 못가서 유언[浮言]은 점차 없어지고 지방의 물화들이 많이 유통하게 될 것이다. 종전에 물화가 유통되지 못한 원인은 값을 제대로
주고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도로가 험하고 좁아서 교통이 중국만은 못하나 이익 있는 데를 가고 손해보는 데를 가지 않는 것은 세상 사람의 동일한 심정이니 값을 후하게
주는 이상 사람들이 그 이익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서 그들을 오지 못하게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니 혹자의 말은 단연코 옳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의 바치는
물품들은 공납이라고 하나 사실은 본지의 산물로써 바치는 것은 백 분의 1∼2도 못 되고 대부분을 서울 사람이 값이나 뇌물을 받아 가며 서울에서 사서 방납(防納)하고 있으니 이것이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확증해 준다.

설령 먼 지방에 있는 물품이라 서울에서 사서 바치기가 어렵다면 서울 시세[즉 주인에게 주는 값]를 정한 다음에 그만한 값을 해당 물건이 나는 고을에서 상납하는 세를 감해 주고 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물품 사들이는 사람을 정하여 그 값을 그에게 주게 하고 그 사람에게 책임지워[속칭 공물부로(貢物夫老)라고 한다.] 수납하는 관청에 바치게 하고 그 사람과 그
값을 영구히 고정시켜 경주인(京主人)의 예와 같이 할 것이다.[해당 운수비는 보통 예대로 줄 것이다. ○혹 부득이 지방에서 사야 할 경우에도 이와 같이 규정을 정하여 한 가지라도
여러 고을에다 나누어 정하지 말 것이다. ○지금 대동법을 실시한 고을에서 혹 본지에서 바치는 물건이 있고 서울 기관[京司]에서 그 대가를 공제해 준다더라도 언제나 갑자기 나누어
정하여 영구적인 규정[永定之式]이 없으며 본 고을에서도 또 그 사람과 값을 고정시키지 않고 관원이 마음대로 받아 내기 때문에 그것을 백성에게 받아 가는 예가 많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그 값을 받지도 못하여 결국 중복하여 물게 된다. 그리하여 그 사이에서 방납(防納)과 뇌물의 토색 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되니 반드시 이렇게 실행해야만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각 도의 진상(進上)도 감사가 본영(本營)에서 규정된 대로 사서 준비할 것이요, 각 읍에다 나누어서 정하지 말 것이다. 혹 부득이 해서 각 읍에다
정하게 되는 경우에는 위의 예와 같이 할 것이다.]

토산물에 따라서 공물을 바치는 것[任土作貢]은 비록 옛 법이라고 하나 지금 그 법대로 한다면 폐단이 생길 수 있으니 균등하고 폐단이 없는 대동법만 같지 못하다. 공물이란 것을
토산물로써 받도록 정했다더라도 서울 기관에서는 각 고을에 나누어 정하고 각 고을에서는 각 면에, 면에서는 민호에다 펴서 받으므로 여러 가지 진상하는 물건들도 품질이 균일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서울의 관리는 고을의 관리에게 독촉하고 고을의 관리는 면차(面差)에게 독촉하고 면차는 백성에게 독촉을 하게 되어 갖가지로 수량은 불어가고 뇌물을 강요하여 폐단만 더
생기게 된다. 그 일로 헤매이다가 일을 못하게 된 자가 얼마이며 그 독촉에 매맞고 시달리는 자가 얼마이며 왕래하는 여비와 인부, 거마 등의 비용은 또 얼마인가? 그러므로 국가에서
받는 것은 한 개의 세소한 물건이라 하지마는 백성들에게 끼치는 손해는 그보다 만 배로 되어 온 백성이 피해를 받지 않은 자가 없게 된다. 하물며 토산물이란 이전에 있다가 지금에
없을 수도 있으며 세월의 흉풍에 따라 먼 곳에 가서 사다가 바치는 폐단도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토산의 유무 여하와 농민의 다소도 불문하고 연산군 때의 호사 음탕하던 그따위
수요들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을 것인가? 더구나 지금은 정사[政]를 서리(胥吏)들에게 맡겨서 만사가 모두 뇌물 놀음에 좌우되지 않은가? 이렇기 때문에 한량없는 탐욕을 채우는 자는
서리배 들이요, 그 피해를 심각하게 받는 자는 나라와 백성인 것이다. 만일 대동법과 같이 한다면 쌀로 바치는 일정한 수량이 있어서 백성이 균평하게 한 번씩만 낼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니 무슨 폐단이 있으랴? 가사 각 관청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공물의 수보다 많고 10배의 가격을 더 준다더라도 지방에다 내려 물리는 폐단만 없다면 백성의 고통은 10분의
9를 덜게 될 것이다. 옛날 봉건시대에는 제후의 나라에서 그 토산물을 공물로 받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니 도리에 있어서도 그렇게 해야 했을 것이다. 바친 물건이 설사 좋지
못했더라도 그 일을 주관하는 자의 허물을 책망하는 데 그쳤고 반드시 그 물건을 퇴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백성에게 피해가 되지 않았었으나 지금은 이와 달리 서울
안에서 소요되는 각종 물품을 모두 지방에다 정하기 때문에 내는 것은 백성이지만은 좋다 나쁘다 하여 받고 퇴박하는 것은 서울의 각 관청이므로 일이 거꾸로 되고 만 것이다. 한번만
퇴박하면 그 피해가 무궁하지만 받고 안 받는 권한을 가진 관리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백성에게 내려 누르게 되니 어찌 차례차례로 내려오면서 박해하는 폐단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균평하고 폐단이 없는 대동법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국왕이 백성으로부터 받는 세는 10분의 1 이외에 없었고 각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도 10분의 1세의
수입으로써 시장에서 샀던 것이다.[여동래(呂東萊) 여동래(呂東萊)：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로서 이름은 조겸(祖謙).

가 『우공』의 공부(貢賦) 조를 논한 말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세 이외에 공물을 받는 것은 옛 법이 아니니 반드시 경상세의 수입 중에 넣어서 지금의 대동법의
예에 의하여 사서 쓰도록 해야 완전하다.[토산에 따라서 공물을 바치는 것은 비록 옛 법이라고 하지만 옛 제도를 자세히 상고해 보면 오늘날 말하는 그것과는 다르다. 대체로 옛날에는
서울 백 리 내[畿內]에서는 쌀이나 조 등속을 바치고 따로 공물이 없었으며 서울 이외의 모든 영주들에게만 공물을 받았었는데 그것도 제후가 자국 내에서 받아들이는 10분의 1세
중에서 사서 바쳤기 때문에 백성이 내는 것은 전세뿐이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세를 받고 또 공물이 있는바 소위 공물이란 것은 군마다 현마다 모두 각종 물품을 바치고도 또
별징(別徵)이 있어서 상례의 법과 같이 되었으니 어찌 폐단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름은 같으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 국왕에게 수요되는 경상적 비용은 일정한 수량을 정하여 매년 서울까지 운수해 오는 세미 중에서 지출하되 옛날 국왕은 대신[卿] 열 사람의 녹봉을 받는다는 제도에 준하여 그 수량을
정할 것이다.[이 수량 내에서 수라를 맡은 사옹원(司饔院)과 의복을 맡은 상의원(尙衣院)의 모든 수요 마련에 지출하게 마련하고 기타의 것들도 다 일정한 수량을 정할 것이다. 이런즉
궁중의 수요는 이렇게 해야 할 것이므로 현재 있는 내수사(內需司)는 없앨 것이다.]

국왕의 수요에 필요한 것은 해당 관청을 하나 두어 그 일을 전문적으로 맡게 할 것이다.[지금의 각 관청에서 매일 배정하는 규례를 폐지하고, 사옹원으로 하여금 그 일을 전적으로 맡게
하며 중국의 제도를 참고로 하여 1년간의 식사에 필요한 물품들의 수량을 정하고 그 물품은 모두 배 혹은 5배의 값을 주고 사게 하는바 본원(本院)에서 저장한 어수미(御需米)의
돈이나 쌀을 주인에게 주어서 공물 주인(貢物主人)이 하듯이 물품을 사서 본원에다 직접 납부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장(醬), 초(酢), 술, 젖갈 같은 것은 본원에서 각각
주관자를 시켜 직접 정조(精造) 저장하여 사용케 하고 해당 관원이 요리 만드는 것을 감독하여 드릴 것이다. 자세한 것은 관제(官制) 직장(職掌) 조에서 말하기로 한다. 국왕에게
드리는 수라, 떡 등의 수량도 이전의 제도를 참고로 하여 일정한 규정을 정할 것이다.]

상고해 보면 옛날 국왕의 녹봉은 대신 열 사람의 녹봉에 해당했는데 군(君)과 후(后) 부인의 의식 범절과 궁내의 제반 시중자의 수요가 모두 이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의 것을
옛 제도의 본의와 참작해 본다면 환관(宦官이나 별감(別監) 등에게는 따로 녹봉을 주어야 할 것이나 시녀(侍女) 같은 것은 이 수량 속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궁녀의 녹봉은 월
2곡씩으로 정하나 그 속에서 감하여 경상적인 준칙에 따라 사철의 의복감을 주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직(職)이 있는 자라면 그 직에 따라 더 주어야 한다. 또 시녀의 숫자도 소요를
참작하여 일정하게 정할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도 시녀의 수를 일정하게 두어 무제한한 데까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자전(世子殿)에는 따로 마련하되 국왕의 수요의 5분의 1로 정할 것이다.[모든 왕자나 왕녀가 장성하여 궁문을 나가게 되면 모두 따로 녹봉을 줄 것이다.]

옛날에는 천자의 태자에게 제후의 봉토와 같이 백 리의 채지[食采]를 정해 주었던바 지금 세자에게 국왕의 수요 5분의 1로 정한다면 좀 나을 것 같다.

대비전(大妃殿)에는 따로 마련하되 국왕의 6분의 1로 할 것이다.[대비전의 시녀의 녹봉도 이 수량 속에 포함한다. 이것은 실행함에 있어서 이만한 수량을 국왕에게 소요되는 수량에 더
첨가해서 준다는 것이며 따로 떼어 준다는 것이 아니다.]

선왕(先王)의 후궁에게는 따로 녹봉을 주어야 한다.[그 품직을 보아서 규정을 정해야 하는바 만일 따로 녹봉을 받는 일이 있다면 그 후궁의 노비들의 의식(衣食)도 모두 그 후궁의
비용에서 지출할 것이다. 상고하건대 이 조항은 어수(御需) 조에 해당한 것이니 만약 그 수를 정한다면 녹제(祿制) 편의 첫머리에 실어야 한다.]

사리로써 따져 보면 국왕과 후비와 후궁은 모두 국왕의 수요 부문에 포함되어야 하고, 대비는 따로 마련해야 하며 선왕의 후궁들도 따로 녹봉을 정해야 할 것이다.[혹자가 말하기를
"옛날 선왕(聖王)의 제도에서는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분등을 두어서 봉양하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상하 차등이 합리적으로 되었었다. 경대부(卿大夫)의 부모는 경대부의
녹봉으로 봉양하게 하면서 국왕의 어머님에게 녹봉을 따로 정해 주는 것은 근세에 와서 신하를 억누르고 국왕에게 아첨하는 행위에 가까우니 옛날의 지극히 공정하던 제도와는 맞지 않는다"
고 한다.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만일 일국의 국왕이 선왕을 살아 계시는 것과 동일하게 봉양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내가 말한 것이 정당할 것이다.]

상고해 보면 옛날부터 국왕이 되어서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융성하기를 원하지 않은  바 아니나 치세는 적고 난세가 많았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애당초 옳지 못한 법제로써
나라를 통치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궁벽한 곳에 있어서 모든 제도와 규범들이 처음부터 부적당한 것이 많아 중국의 비할 바 아니었다. 이제 만약 한번 옛날의 법제를 들어
경상적인 제도로 정한다면 국왕의 비용이 유족하고 임금의 식사도 정(精)해질 뿐만 아니라 이전에 있던 각종 폐단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쓸데없는 관청[冗司]은 합하고
쓸데없는 관원[冗官]은 감원하며 지금 내수사에서 사사로이 사용하는 경비도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리 되면 만민의 고통을 덜 수도 있고 온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도 있어서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대가 강해지며 교육 문화를 발전시켜서 태평세월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진 임금[聖王]의 착한 정치에서 이보다 급한 것이 없으며, 추성하는 신하들의 국왕에
대한 도리에서 이보다 절실 것이 없다.

각 도에서 바치는 물건을 모두 예의적 공물[禮貢]로 개정하고 지금의 진상의 규정을 없앨 것이다.[토산품도 선택하여 예공에 합당한 것 이외에는 전부 없앨 것이다. 각종 물품은 종류와
수량을 작정하여 지금과 같은 매달 진상하는 폐단을 없앨 것이다. 매년 한차례씩 정초 인사를 드릴 때에 예공으로써 드리게 할 것이나 마련한 값은 서울의 시세 &lt;각 관청에서 서울
주인에게 주는 값&gt; 에 따라 본 고을에서 받는 경비로 감해 줄 것이다. ― 본 고을에서 받는 경비란 것은 모두 그 고을의 보관세[留稅]이다.&gt; 감영에서는 이 물건들을
사서 준비하는 사람을 정하여 그에게 값을 실지대로 주고 기타 장인을 사용했으면 역시 규정된 값을 주며 &lt;규례는 공장(工匠) 조에서 말한다.&gt; 감사가 친히 포장하는 것을
보살피어 봉인할 것이다. ― 물건을 마련한 자가 물건을 운수하는 자로 되어야 하는데 도중에서 수요되는 마바리[刷馬]는 관청에서 내 주되 그 값은 규정에 따라 내 준다.&gt;
이렇게 하고 각 고을에다 나누어서 배정하지 말 것이다. 병사ㆍ수사에게는 예공을 받지 않는다. ○옛날에는 제후들이 자기 나라의 토산품을 예의로써 바치면 천자가 사양했고 내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옳은 일이었던 것이다. 각 도에서 예공으로써 바치는 물건은 감사가 정성껏 마련하여 예의로써 바치면 조정에서도 예의로써 받을 것이며 물품이 좋지 못하더라도 그 도의
주관자의 근실하지 못함을 책할 것이요, 그 물건을 퇴박하지는 말아야 한다.]

공헌물(貢獻物)을 바치고 받는 절차도 그 의식(儀式)을 바로잡아야 한다. 당(唐)나라의 원조(元朝) 의식도 취할 바가 있으니 그것을 참작해서 정하도록 할 것이다. 즉 원조에 백관이
조회를 할 때에 승지가 먼저 각 도에서 올린 축하문[箋文]을 합해 가지고 승정원에서 대기하고 예조[禮曹)에서는 각 도로부터의 공헌물을 가져온 자[즉 축하문을 가지고 온
차사원(差使員)]로 하여금 그 중에서 드릴만한 것은 드리고 나머지는 사람을 시켜 정부 앞에 갖다 진열하고 사자(使者)가 제자리로 나아간다. 백관이 모두 조배(朝拜)를 마친 다음에는
승지가 앞에 나아가서 축하문을 올리고, 예조 당상(堂上)이 나아가 꿇고 각 도의 공물을 말하고 해당 관청에 돌리기를 청하면, 승지가 나아가서 말씀을 받들어 전하기를 "그렇게 하라"
고 한다. 그 뒤에 예조 낭관(郎官)이 분부를 받아 문을 나오고 공물을 가진 자가 뒤를 따른다. 백관의 원조 의식이 끝나고 파석할 때에 이르러 예조가 물러나와 분부에 의거하여
공물을 처리한다.[제향 때나 빈객을 위하여 바친 물건들은 해당 관청에 나누어 맡기는데 궁내에 드릴 것은 들여오고 호조에 보낼 것은 호조에 줄 것이나 모두 국왕에게 품달하여
처리한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율곡(李栗谷)이 선조 임금에게 고하기를 "지금의 진상은 진상이라고 하여서 모두 다 국왕에게 드릴만한 것이 아니고 소소한 물품까지 다 바치게 되니 수륙(水陸)의 산물을 모두 긁어
바치더라도 진짜로 가려서 국왕의 식사에 바칠 만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옛날에 착한 국왕 혼자서 천하를 위해서 일을 한 것이지 천하 사람이 국왕 한 사람을 위하여 복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치는 물품이 모두 바칠 만한 것일지라도 응당 감면해서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어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필요하지도 않은 물품을 받음으로써 백성을 괴롭히고 해를
끼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상고해 보면 옛날 성현들의 제도에서는 공물을 아래에서는 도리로써 바치고 위에서는 예의로써 받았었다. 만일 서로 도리와 예의로써 한다면 일이 모두 사리에 합당할 것이니 어찌 폐단이
있을 것인가? 다만 그것이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폐단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날 각 도의 진상이라는 것은 대부분 국왕의 식사를 위한 물품이라 하여 각종 세소한
것들을 달마다 혹은 한 달에도 2∼3차례씩 바치는데[경기도에서는 매일 바치고 있는데 이것은 국초부터 있었던 일이 아니라 중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감사가 친히 진상물을 감정하지
못하므로 처음에는 각 고을의 수령이 때로 감정하여 봉진하였으나 수령도 또 그것을 다 감정할 수가 없으므로 경기도의 6개 찰방으로 하여금 대신하여 윤번으로 감정하게 하였다.] 이것은
모두 경상적인 세금 이외에 받는 것으로서 고을에 나누어 받으면 고을에서는 또 백성에게 나누어 받으니 그 중간에서 층층마다 더 받고 마디마다 폐단이 더할 뿐만 아니라 그 진상물을
올리는 때에는 쓸데없이 여러 관청을 경유하여 각 기관에다 바치기 때문에 서리배들이 능간을 마음대로 부리는 서리배들에게 맡기니[서리배들이 중대한 일이라고 빙자하여 뇌물을 토색질하는
것이 진상과 같이 심한 것이 없다. 때문에 지금은 진상물을 받기 전에 먼저 인정포(人情布) 인정포(人情布)：교제비로 쓰는 필목.

를 받고 진상물을 싣기 전에 먼저 인정포를 싣고 있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진상품은 산적 꼬치에 꿰나 인정포는 한 바리에 가득하다" 고 한다. 이 말에 의해서도 그 폐단이
어떤가를 알 수 있다.] 이는 도리로써 윗사람에게 바치고 예의로써 아랫사람의 것을 받는 본의가 아니다. 또 종목이 번거로워서 생것, 습한 것을 가리지 않고 차고 더운 시기를
불문하고 솜에 싸고 얼음에 섞어 천리나 운반하고 있다. 한 개의 맛도 없는 물건이 국왕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못하면서 1천 호를 파산하게 하고 만민에게 해를 주면서 이 짓을 하는
것이다.[이 자들이 빈궁한 마을을 다니며 독촉할 때에 남정네와 아낙네를 비끄러매고 때리며 길가에서 헐벗어 얼고 땡볕에 쪼이고 하는 백성들이 원통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는 이런 백성의
참상을 만일 국왕이 한 번 목격한다면 아무리 맛이 좋은 물건일지라도 반드시 마음이 아파서 차마 목에 넘기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이 비린내 나고 냄새나는 물건은 원래 먹기에
싫증나기 쉽고 구복(口腹)에도 이롭지 못한 것이거늘 만민을 못살게 굴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알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국왕이 깊숙한 대궐 안의 비단 요 위에 앉아서 나는
임금이다 라고 하고 있으니 어찌 실지 백성들의 실정을 알리오? 그리하여 눈앞에서 아첨하는 신하들이 이것으로써 자기만치 가장 임금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그것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국왕의 덕을 손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마디라도 충고하는 사람이 있으면 국왕에게 불경하다고 지목된다. 이것이 해독이 온 나라에 뻗쳐서 멈추지 않는 원인이다.] 옛날의
제왕은 항상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자기의 우환으로 삼아서 감히 자기의 구복을 채우기 위하여 천하에 명령하지 않았으니 이런 의미에서 보면 소위 진상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가? 그러나 이런 것도 또한 우리나라의 제도가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중국의 제도는 국왕의 식사에 일을 전담하는 관청이 있으며 진상하는 물건도 모두 경상적인
세입으로써 사서 쓰게 되어 있으므로 지방에서 진상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옛날 국왕의 식사에 소ㅓ요되는 물건은 그것을 담당한 관리에게 맡겨서 규정에 의하여 올리고 진상물을
천하에 명령하지 않았던 것이다. 삼대(三代) 때는 막론하고라도 한(漢), 당(唐) 이후에도 모두 그것을 전적으로 맡는 관청을 두어 경상적인 세입으로써 국왕의 수요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였고 근본적으로 진상이라는 규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기록에 진상(進上)이라는 두 글자가 없다. 당나라의 덕종이 탐욕스러워서 수렴하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사관이
그가 사적 공납을 요구했다고 풍자한 일이 있었지만 그가 받은 것은 물품이나 비단에 불과했고 달마식사를 위한 생선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명(明)나라에 이르러서는 이에
관한 제도가 더욱 세밀해졌다. 즉 세입으로 들어온 은전(銀錢)으로 광록시(光祿寺)에다 획정해 주어서 진공(進供)하는 물품 전부를 사서 쓰게 했고 각 성(省)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모든 백성들이 평안히 살고 온갖 물화가 서울에 폭주하여 서울이 날로 풍성하게 됨에 따라 국왕의 식사도 극히 정결하고 풍부하게 되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왕의 수라에 필요한 비용을 경상적인 세입 가운데서 지출하지 않고 또 그것을 전담하는 관청이 없으므로 각 관청에서 매일 배정해서 올리며[지금 각 관청에서 받아들인 공물의 3분의 2
이상이 국왕의 소비로 된다.] 지방에서는 각 도에서 매달 진상하기 때문에 인부가 지고 수레에 실어서 운반하게 되어 전국이 피폐해지고 있다.[우리나라에서는 국왕에게 들이는 비용을
경상적인 세입으로써 지출하는 규정이 없고 또 이를 전담하는 관청을 설치하지도 않아 매일 배정하여 올리기 때문에 정부의 각 관청에서는 국왕의 수라를 위해서 설립한 기관이 많다. 또
거기서는 달마다 진상하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각지 고을들의 진상을 위하여 분주한 자가 무수하다. 그러므로 국가의 모든 일에서 국왕의 수라를 제공하기 위한 진상 사무가 대체로 10 중
8∼9를 차지할 것이다. 이와 같이 번거롭고 폐단이 심해서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게 되었는바 이런 폐단은 전대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통전(通典)』 통전(通典)：중국 당나라 때의
두우(杜佑)가 중국의 고대사를 편찬한 것인데 모두 200여 편임.

에 이르기를 "고구려가 옥저(沃沮)를 예속시켰을 때에 그들에게 바다의 고기와 소금을 내라고 하여 천리를 운반하였다" 고 하였다 이것을 보아도 그때의 풍속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중국은 처음부터 성왕(聖王)들의 법이 있었기 때문에 혼탁한 시대에도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제도와 습속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본조에 들어와서 이런 폐습을
씻어 버리고 갱신하였다고 하지마는 아직도 다 개혁하지 못한 것이 허다하다.] 이 공물과 진상이 모두 백성으로부터 나오기는 매일반이다.[경상적인 세도 백성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것은 적당하게 제도를 세웠기 때문에 착한 정치[德政]가 현저하고 만민이 평안하게 살아 하나도 폐단으로 될 것이 없어서 국왕의 수라도 극히 정결하고 풍부하지마는
우리나라의 것은 사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구복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만 가지 폐단이 생겨서 나라는 병들고 백성도 피폐해져서 결국 국왕의 식사까지도 정결하고 적당하지 못하게
된다.[지금 진상 물선(物膳)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은 크나 다만 외형뿐이고 실속은 좋은 것이 없다.] 그 효과와 득실의 상거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이 아니니 국왕이 된 자로서 어찌
잘못을 깨달아 고치지 않을 것이랴? 반드시 옛날 제도에 으거하여 경상적인 세입에서 국왕에게 소요되는 비용을 지출하고 또 국왕의 식사를 전담하는 관청 하나를 두어 전적으로 수라에
관한 일을 맡게 하며 지금의 진상하는 일용 번쇄한 일체 물건들은 모두 없애 버릴 것이다. 그리고 다만 공헌하여야만 할 것은 일정한 수량을 정해서 1년에 한차례씩 예의로써
공헌(貢獻)하며[현재 명절마다 바치는 것도 틀린 일이다. 무릇 공헌(貢獻)이라면 국왕 한 분에게만 바쳐야 한다. 지금처럼 여러 궁가에 나누어 바치는 것은 옳지 않다.] 정부에서도
예의로써 받으면 옛날 예절에 근사하여 정치하는 방도가 서고 만사가 잘 되어서 태평의 기초가 여기에 있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 서울 안에 있는 백관으로부터 이서(吏胥), 복례(僕隸)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상적인 녹봉을 줄 것이다.[지금 백관의 녹봉은 극히 박하여 1품관의 봉급이 1년에 60석이어서 9품에
이르면 겨우 12석에 불과하다. 때문에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지방으로부터 진봉(進奉)이라고 바치는 봉물을 받아먹고 있는데, 그나마도 청직이나 요직에 있는 자라야 얻을 수 있고 그
외는 얻지 못한다. 또 각 관청에서 쓰다 남은 물건을 소위 분아(分兒)라고 하여 모든 관원들이 사사로이 나누어 먹으며, 이서들의 녹봉은 혹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기관마다 제각기
다르다. 녹봉이 있는 자에게는 혹 포(布)로 가격을 따져서 주거나 혹 한 달에 쌀 6두를 주나, 이례(吏隸)는 모두 녹봉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기 늑탈로써 사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사세가 이렇게 된 이상 그 피해를 이루 말할 수 없는바 옛 원칙을 참작해서 대관(大官)으로부터 이서ㆍ복례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경상적인 녹봉을 정하여 세미에서
주어야 한다. 그 수량에 관해서는 녹제(綠制) 조에서 서술한다. 경상적인 녹봉이 있어서 넉넉히 살 수 있게 되면 지금의 소위 진봉, 분아와 같은 것을 금지할 것이며 서리배들의
사기, 늑탈, 뇌물을 토색하는 폐습들을 일체 혁파할 것이다.]

경대부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관부에서 일하는 자에게 모두 경상적인 녹봉을 등급에 따라 주면 귀한 자는 제사를 받들고 친척을 돌볼 수 있을 것이며 천한 자도 부모와 처자를 부양할
수 있을 것인바 이런 것을 모두 경상적인 녹봉으로 주면 그만이니 어찌 경상적인 녹봉 이외에 무엇을 토색하게 둘 것인가? 대체 대부(大夫)의 문에서는 묶은 포육 같은 예물[束脩之餽]
이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옛날의 상례이다. 대부들이 이렇게 하면 서리배들이 뇌물을 토색하는 폐습도 자연히 개혁될 것이다.

각 관청[各司]에서는 모두 자기 기관[公廨]에서 소요되는 일정한 비용을 정하여 지출해 주고 지금의 토색하는 폐단을 없앨 것이다.[대, 소 각 관청에서 공적인 일로 쓰는 용지, 실내
설비[鋪陳], 등촉(燈燭), 시탄(柴炭), 횃불 등을 적당하게 쌀로써 계산하여 두었다가 지출하되 매년 1월 세미 중에서 지출해 주어서 각 관청으로 하여금 이것으로써 쓰도록 해야
한다. &lt;실내 설비는 파손되는 대로 사서 비치하고 땔나무나 횃불 따위는 주인을 정하여 지금 공물 주인이 하는 것과 같이 사들이게 할 것이다.&gt; 이렇게 하면 지금 상급
관청에서 실내 설비에 필요한 물건들을 지방에 청구하는 일들을 먼저 금지해야 하며 송사에 쓰이는 용지 값으로 받는 것을 금지하고 포 값으로 받아들인 종이를 법전에 의하여 공용에
충당할 것이다. 또 지금 지방에서 전세를 비롯한 각종 물건을 납부함에 있어서 종이로 받는 것은 극히 부당하니 폐지할 것이다. 이밖에 나무, 초, 홰 따위를 구차하게 받아들인 폐단도
일체 엄금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녹제(祿制) 조에 있다.]

상고해 보면 전에 있던 공해전(公廨田)이란 것은 이러한 비용을 지출하기 위해서 두었던 것이었다.

[지금 각 관청에서 수요로 하는 위의 물품은 대단히 부족한 것도 있고 남아서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하는 것도 있는데 대체로 모두 부당한 토색에서 나온 것이다. 쌀이나 포를 쓰는
아문에서는 예컨대 이것을 이것은 더 받아 왔던 암흑 숫자라 하여 잉여물로 취급하고 있으나, 공물을 받아들인 아문에서는 방납자로부터 짜 먹으니 방납자는 백성에게 짜내어 이를 먹는
것이며, 형벌을 쓰는 아문에서는 사령백성들에게 짜 먹으니 사령은 범행자에게 폐단을 일으켜 뇌물을 받는 것이며, 군사 관계를 맡은 아문에서는 서원(書員)에게 짜 먹으니 서원은
병역자의 수를 줄여서 짜내는 것이며, 각 수직방에서 때는 나무는 번 서는 군인에게 짜 먹으니 군인은 나무꾼의 것을 빼앗아 때는 것이다. 이런 폐습이 그만 예규처럼 되어 버려서 가는
곳마다 이러하다 하여 심지어 수령이 임명을 받아 하직하고 나올 때에도 정원(政院)에서 붓 값이라고 하여 수령을 붙들어 놓고 포필(布疋)을 내라고까지 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오랜
관례가 되어서 관리들도 그것이 괴상한 것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서울 안에서 지출하는 모든 비용은 전부 경상비로써 지출할 것이며[서울 안의 모든 경비는 운수해 온 세미로 쓸 것이다.] 지금과 같이 지방에다 지정하여 받는 폐단을 없앨
것이다.[지출하는 모든 비용은 다 일정한 규정에 따라 경상비에서 지출할 것이니 서울에서 부리는 마바리와 인부 같은 것도 경상비에서 값을 줄 것이며 절대로 지방에다 나누어 배정하지
말 것이다.]

서울 안의 모든 일은 응당 서울 안에서 마련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흔히 지방에다가 배저하여 내게 하고 있다. 예컨대 서울 안에서 부리는 마바리와 인부에 관한 일들도 흔히 지방에다
나누어 배정하고 있는바 여비를 걷어 가지고 객지에 내왕하며 머무르는 동안 그 폐단이 무궁하여 만에게 해독을 주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중국 사신이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의 모든 수요 물품도 서울 안에서 사서 쓸 것이요 지금과 같이 지방에다 나누어 배정하지 말 것이다.[모든 관청에서 사는 물건은 모두 값을 후하게
주어서 다른 관청에서 사는 가격과 같이 &lt;즉 주인에게 주는 가격으로&gt; 줄 것이니 이렇게 하여야만 물화가 모여들어 사서 쓰는 데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에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대개 관리들은 국고로부터 나가는 눈앞의 적은 것이 아까운 줄만 알고 이것을 지방에다 나누어 받는 것이
백성에게 큰 해를 주어 국가의 근본이 상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국가사업을 하는 자는 반드시 이런 뜻을 알아서 백성들과 이해를 다투거나 지방에다 나누어 배정하지 말 것이다.]

○ 지방의 관원들과 이례(吏隸)들에게도 모두 경상적인 녹봉을 정하여 줄 것이다.[지금 지방 관리들은 모두 경상적인 녹봉을 받지 못하여 수령은 백성으로부터 규정 외의 수렴을 받아
살아가고 감사는 각 읍 관원에게 받아먹으며 병사ㆍ수사ㆍ첨사ㆍ만호는 번 드는 군인에게 포를 받아먹고, 찰방은 역졸에게 받아먹고 있는바 이들이 모두 제가끔 받아먹기 때문에 수량도
제한이 없다. 서리, 복례들은 여러 곳에서 뜯기어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소관 부문에서 뜯어먹고 있다. 이렇게 전국의 백성은 어느 곳에서나 손해를 입지
않는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것을 참작해서 대, 소 관원으로부터 서리, 복례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상적인 녹봉을 주어 본처(本處)의 경비에서 떼어 줄 것이다. 그에
관한 수량은 녹제(祿制) 조에 있다. 이렇게 하면 종전의 모든 폐해는 일체 없어질 것이니 그 관부에서 수요호 하는 물품도 일정한 수량과 절차에 의해서 쓰게 하며 절대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지 말게 할 것이다.]

이율곡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지방관들에게 경상적인 녹봉이 있어서 넉넉히 먹고도 남아 친구에게까지 나누어 줄 수가 있었기 때문에 녹봉의 다소를 보아서 그의 생활수준을 맞추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지방 관리에게 경상적인 녹봉이 없고 관가 안에 있는 1두의 쌀이라도 모두 국가의 물건 아닌 것이 없다. 이런 조건에서는 비록 백이(伯夷) 백이(伯夷)：
고대 중국 은(殷)나라 때 사람. 그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정복할 때에 그것을 반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굶어 죽었음.

와 같은 청백한 사람이 관리로 되었다 하여도 국가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입에다 풀칠할 재주가 없을 것이니 이는 나라의 법이 구비되지 못한 까닭이다. 이리하여 관직에 있는
자로서도 법대로 해 가기가 어렵고 탐욕스러운 자는 너무 함부로 쓰기 때문에 국세 이외에 이름도 없는 가렴주구가 백성을 못 견디게 하니 이것은 사세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그가 말하기를 "지금 관리들은 다 불법적인 것을 본받으며 서리배들은 글자로 농간하여 관청 하인 하나에 이르기까지 조그만 건덕지라도 있으면 짜내 먹는 것으로써 일을 삼으니
이것은 진실로 정치를 문란하게 하고 나라를 망치게 하는 고질적인 된 나쁜 습속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서리배들에게 모두 경상적인 녹봉이 있어서 위로부터 타서 먹고 살았었는데 지금은
서리배들에게 녹봉이 없기 때문에 짜내어 먹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되었는바 이는 국가의 제도가 미비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서리배들이 뇌물을 토색하는 것은 응당 금지해야 하며
그가 농사를 지어 살아갈 비용을 주어야 한다" 고 하였다.

지방의 각 관청에서도 모두 기관에서 소요되는 물품과[공사(公事)에 쓰는 용지 및 실내 시설물들] 기타 필수 비품의 예산을 일정하게 정하여 줄 것이다.[수량은 녹제(祿制) 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곳에 남겨 둔 보관세에서 지출할 것이다. 아래로 내려오는 손님[使客]의 비용도 그렇게 한다.]

각 고을에는 사신[使客] 접대비를 정해 줄 것이다.[대로(大路)와 소로(小路)에 따라 그 일의 많고 적은 것을 참작해서 그 수량을 결정하여 줄 것이다. 녹제(祿制) 조에 있다.
만일 중국에서 오는 사신,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이웃나라에서 오는 사신, 이웃나라로 가는 사신일 때에는 특별비용을 떼어 줄 것이다.]

지방에서 지출하는 모든 비용은 모두 경상비로써 지출하고[지방의 경상비는 모두 유세(留稅)에서 지출한다.] 지금과 같이 민간에서 받아 내는 폐단을 없앨 것이다.[모든 지출 비용은 다
일정한 규정을 두어서 경비 중에서 지출하며, 예외로 사용해야 할 비용이 있으면 그것도 경비에서 지출케 할 것이다. 예컨대 마바리 인부의 비용도 경비에서 줄 것이며 일체 민간에
나누어 배정하지 말 것이다. ○다만 통신 연락 등만은 한호(閑戶)를 쓰되 그것도 일정한 규정에 의하여 부리게 할 것이다. ○말에 싣는 짐바리는 한 바리에 200근 &lt;본래
이렇게 한 것이었으나 지금 저울이 무거울 뿐만 아니라 중량에서 돈중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60근으로 기준을 정하여 정식 도량형이 나온 뒤에 돈중까지 계산해야
한다.&gt;을 기준으로 해서 저울에다 달게 하고 값을 줄 것이며 저울을 서울과 지방에 주어 다 같이 실행케 할 것이다.]

[지금 대동법에서 마바리 값을 후하게 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관리가 짐을 무겁게 실어 말은 한 바리라고 하지마는 실은 두 바리의 짐이 되게 싣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말을 가진 촌민에게 강제로 싣는 일이 있어서 그 폐단이 무궁하니 반드시 그 것에 관한 규정을 명확히 정하여 저울로 달아 주어야 한다.

지금 각 읍에서 관문을 돌리는 일은 세를 내지 못한 자에게 벌로써 시키는 예가 있는데 이것도 무방할 것 같다.

지금 대동법의 조목에 여러 잡역들은 모두 대동미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소위 호속미(虎贖米)라는 것은 전과 같이 민호(民戶)로부터 따로 받아 낸다. 그런데 범을 잡는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해서 피해를 덜려고 한 것이었는데 지금에는 각 고을에다 호피(虎皮)를 2∼3장씩 나누어 배정하고 해마다 정기적으로 호피를 납부하게 하여 집집마다에 그 대가를 받게 되었다. 비록
각 읍에서 혹 범을 잡아 바치더라도 상급 기관에서는 흔히 조그만 흠집을 잡아서 고의적으로 퇴박하고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 내고 있다. 이것은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을 없앤다고
하면서 도리어 백성을 해롭게 하는 것이니 법의 본의가 과연 어디 있을까? 다만 시골에서 각각 함정이나 기계를 만들어 범이나 표범을 잡으라 하여 잡은 자로 하여금 갖도록 하여 관에서
거두어들이지 말 것이며, 만일 병사(兵使)나 수령이 군대를 동원해서 잡으면 그 관원에게 상을 &lt;특별한 맹수가 아닌 이상은 가자를 올려 줄 필요는 없고 쌀이나 포로써 상을 주어
병사와 함께 나누어 먹게 하는 것이 좋다.&gt; 호피는 관에 납부하게 할 것이다. 만일 범이나 표범의 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서 함정과 기계를 설치하지 않았거나 관에서도
잡지 않은 경우에는 모두 징벌에 처할 것이다. 일용에 사용할 호피는 관가에서 사서 쓰는 것이 합당하다.]

○ 이상의 각종 지출 비용의 3분의 1은 돈[錢]으로 줄 것이다.[국왕의 수요물로부터 관리, 이례의 녹봉 및 각종 지출 비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와 같이 한다. 예컨대 쌀로 쳐서
얼마라 하면 그 중에서 3분의 2는 쌀로 주고 3분의 1은 돈으로 주며, 면포로 쳐서 얼마라 하면 3분의 2는 면포로 주고 3분의 1은 돈으로 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돈을
사용하게 된 후라야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흉년을 만나면 각종 지출 비용은 모두 10분의 2를 감할 것이다.[국왕의 수요 물품으로부터 관리의 녹봉과 모든 지출 비용도 모두 그렇게 한다. ○세액의 총계로 계산하여 손실이
10분의 6인 경우에는 흉년이라고 평정하되 주(州)나 군(郡)은 한 고을의 전체를 잡아서 평정할 것이며 감영과 병영, 수영은 한 도의 전체를 잡아서 평정할 것이다. 만일 큰
흉년이라면 적당하게 더 감해 줄 것이다.]

서울과 지방의 모든 지출 비용은 대소를 불문하고 모두 그에 관한 규정을 정한 다음에 경상적인 세입 이외에 백성에게 털끝 하나라도 받는 것을 불허하며 범한 자에 대하여는 위법
행위로써 처벌할 것이다.[규정 이외의 징수에 대해서는 본래 금지하는 법령이 있고 또 각 관청에서 수요되는 모든 물품은 그에 대한 값을 넉넉히 정하여 주었으니 관리는 응당 이 본의에
따라 공사(公私)에 모두 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혹 염가를 주고 억제로 사거나 바치게 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이례들은 민간으로부터 토색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지
않을 수 없는바 이는 이례를 짜 먹고 이례는 결국 백성을 짜 먹어서 그에 대한 가격을 떼어먹는 것이니 이러한 자는 징벌에 처해야 한다.]

조정암(趙靜菴)이 중종 임금에게 고하기를 "사람이 이기심을 극복하면 사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종 임금 때에는 관후한 정치를 숭상하여 심지어 탐오하는 죄까지도 더러 용서해
주었었는데 뇌물을 주는 행위가 대개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종 때에는 만호(萬戶) 같은 관원까지도 청렴하고 결백한 것을 숭상하였으니 선비들의 풍습이 바르고 바르지 못함에 따라
정치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폐단이 그리 심하지는 않으나 엄격히 금지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범하는 자가 있을 때에 그로 하여금 정부에서
벼슬을 못하게 한다면 사람마다 그것이 두려워서 자연 자숙하게 될 것입니다. 또 친척이나 친구 간에 서로 주고받는 것이 뇌물과는 다르지마는 역시 사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못하게 하면
세상일이 자연 청백하고 명랑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우리나라의 제도에는 세미와 공물이 있는데 세미는 가벼우나 공물이 무겁다. 그러나 조종(祖宗) 때에는 국가 경비를 간략하게 쓰고 백성으로부터 받아들이기를 절도 있게 하였으나
연산군 중년에 용도가 많아져서 정상적인 공물만으로는 그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추가 결정함으로써 욕심대로 하였었다. 그 후에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고치지 않고
이어 권신과 간신들이 나라를 맡게 되어 뇌물이 정치를 좌우하게 되었으며 하급 관리가 장부를 장악하게 되어 방납과 강박하는 폐단이 날로 더해지고 달로 심해져서 경상적인 국세는 점차
줄어들었으나[전결(田結)의 수가 불명해서 누락된 것이 많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다.] 공물은 점차 중해졌다. 무슨 일만 있다면 일에 따라 또 나누어 물리기 때문에 공물과 잡역이
번중(繁重)해져서 백성들은 모두 부역을 회피하고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선조왕 초년에 영의정 이준경(李浚慶) 이준경(李浚慶)： 조선 선조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대동법
실시에 공헌하였다.

이 이런 폐단을 개혁하자고 말했으나 실시하지 못했고, 그 후 찬성(贊成) 이이(李珥) 누차 건의하여 공물법[貢案]을 개혁하려 했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고 임진왜란 이후에 영의정
유성룡(柳成龍) 유성룡(柳成龍)：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서 자는 이현(而見)이며 호는 서애(西崖)이다. 임진 왜란 때에 영의정 또는 도체찰사의 중직에 있으면서 크게 활약한 인물로서
그의 저작으로 『징비록(懲毖錄)』이 저명함.

이 건의하여 공물을 없애고 그것을 쌀로 바치게 하여 서울에서 물건을 사서 쓰게 되었으나[임진왜란 때에 나라가 폐허로 되어 양식을 조달할 수가 없으므로 유성룡이 이에 공물법을 고쳐서
쌀로써 받아 백성의 궁핍을 구휼하고 동시에 군량을 보충하자고 상소를 올렸던바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난세를 바로잡아 옳은 궤도에 올려 세우는 데는 군비와 식량이 충족한 데
좌우되기도 하지마는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 있습니다.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아니라 부역과 과세를 경하게 해 주는 데 있습니다. 국가의 전세는
10분의 1보다 경하나 세 외에 받아들이는 것, 즉 진상과 각종 방물(方物) 같은 것으로써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심히 많습니다. 이것은 처음 공물을 정할 때에 전결수에 따라 각
고을에 고르게 하지 않고 일정한 기준이 없어서 고을마다 다르기 때문에 1결에 대하여 공물로 내는 값을 쌀로 1∼2두를 내는가 하면 7∼8두 내지 10두까지 내는 자도 있습니다.
백성들의 부담이 이렇게 불균형할 뿐만 아니라 또 도로에서 오고 가는 비용과 각 관청에 바칠 때에 간사한 관리들의 압박, 농간에 못 이겨 내는 비용이 백 배나 되지만 실제로 국가에
들어가는 것은 겨우 10 중 1∼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데로 들어가고 말아서 진상(進上)은 아주 백성을 못살게 하는 폐단으로 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처음 법을 제정할
때에는 이렇지 않았을 것이나 오래 내려오는 과정에서 인위적 악폐가 천만 가지로 생긴 것입니다. 이제 즉시 개혁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다시 소생할 희망이 없고 국가는 경비를 염출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항상 생각하기를 공물은 한 도(道) 공물의 원 수량을 총계하고 또 그 도내의 전결수를 계산 참작하여 일률적으로 정할 것인바 많은 것은 덜고 적은 것은
더해서 고을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일률적으로 정할 것입니다. 예컨대 갑 읍에서 1결당 쌀 1두를 낸다면 을 읍ㆍ병 읍도 역시 1두를 내게 하고, 2두를 낸다면 역시 2두를 내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백성의 부담도 균평하게 될 것입니다. 토산물의 값도 역시 이렇게 균일하게 하여 쌀이나 포, 콩으로 내게 하는데 3년간 1도에서 바칠 토산물이 수량을
전결에 따라 고르게 배정한다면 매 결에 되나 홉으로 낼 정도에 불과하게 되어 백성들은 토산물의 공납이 있는 줄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진상물도 이와 같이 하여 모두 쌀이나 콩으로
대가를 내도록 하고 여러 곳에서 받게 할 것입니다. 예컨대 전라도는 군산창과 법성창에서, 충청도는 아산창과 가흥창에서, 강원도는 흥원창에서, 황해도는 금곡창과 조읍창에서, 경상도는
원상이 회복될 때까지 본도(本道)에 받아 두었다가 군량으로 쓰며, 함경도와 평안도는 본도에 저장하고 나머지 5도의 쌀 콩은 모두 서울 창고에까지 운수케 할 것입니다. 각 관청에서
받아들인 공물, 진상, 토산물은 총계하여 값을 정하기를 제용감(濟用監)이 저포(苧布)를 진헌할 때에 면포 값으로써 하는 것과 같이 하고 일 맡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서 쓰게 할
것입니다. 만일 군비가 부족하거나 국가에서 별도로 쓸 일이 있으면 공물이나 진상의 수량을 감하여 쓰면 창고에 있는 쌀이나 콩을 번잡하게 바꾸지 않고도 넉넉히 쓸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명나라에서는 지방으로부터 진상하는 일이 없고 다만 13개 성에서 받은 은을 광록시(光祿寺)에 맡겨 두었다가 진공(進供)하는 물건을 모두 사서
쓰며 만약 특별히 쓸 일이 있으면 특명으로 국왕의 식사비를 일부 감하여 그 값에 해당하는 은을 쓰기 때문에 먼 곳의 백성들은 운수하느라고 수고하는 일을 모르며 사방의 각종 물화가
모두 서울에 모여들므로 무슨 물건이든지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서울은 날로 번성하고 전야(田野)의 백성들도 평안히 자기 직업에서 종사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법을 잘
제정하여 놓은 까닭이니 우리나라에서도 응당 본받아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진상과 다른 일은 종전대로 하고 공물만을 쌀로 마련하여 바치면 서울에서 그 물건을 사서
쓰게 되었었다.] 오래지 않아 이 법이 도로 폐지되고 말았다. 광해군이 왕이 된 초년에 호조 참의(戶曹參議) 한백겸(韓百謙)이 상소하기를 "우리나라에서의 공물의 폐단에 관하여
사람마다 다 국가의 존망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하는바 전하(殿下)께서도 어찌 이를 듣지 못하였습니까? 토산물로써 공물을 바치는 것은 당초에는 모두 조리(條理)가 있었겠지마는
오늘에 와서는 백성을 못살게 할 뿐만이 아닙니다. 이것을 실행한 지 오래되어 마디마디 폐단이 생겨서 종이 1권을 10금을 주어도 바칠 수가 없고 가죽 1장을 소 열 마리를 팔아서도
부족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난치의 고질로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이때에 그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곧 민심이 붕괴될 형편이니 아무리 착한 사람이 정치를 한다더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을미년에 영의정 유성룡이 그 폐단을 깊이 알고 공물을 없애어 쌀로 받아서 필요한 잡물을 모두 서울 안에서 사 쓰게 하고 그 나머지로써 군비에 보충하자고 하였던바
원망하는 자가 많고 기뻐하는 자가 적었기 때문에 그만 계속하지 못하고 폐지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기회에 바로잡지 못하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러 백성의 고질로 되었으니 제가 크게
염려하는 바입니다. 유성룡이 제기한 법은 8도를 통해서 원근을 막론하고 밭 1결마다 쌀 2두씩을 내어 서울까지 실어 오게 하고 대소 공물은 일체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그
법은 연해에 있는 고을들은 그 지방에서 배로 실어다가 상납하면 쌀 2두가 경하지마는 산읍은 수로로부터 먼 지방에서 포구까지 운반하는 비용이 공물보다 3배나 되므로 산읍 백성이
원망을 하였으며 또 소요되는 물건을 본(本曹)조에서 직접 사 팔고 하여 장사꾼과 같이 그 값을 깎는 것만을 일삼기 때문에 시장 백성들이 원망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때에는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물화는 모여들지 않는데다가 급히 쓸 물건이 있더라도 시장에서 구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지방에다 따로 정해서 들여오기 때문에 백성들은 중첩해 바치는
원망이 있었고 관리들은 법을 믿을 생각을 갖지 않아서 모두 불편하다고만 하였으며 또 방납하는 자는 이익을 볼 수가 없고 아전배들은 농간을 해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그 법을 없애 버리려고만 하였었습니다. 위에 있는 자들은 내용은 모르면서도 그 말을 듣고 덮어놓고 반대를 하여 쌀로써 받는 것이 공물로 받는 것보다 폐해가 더하다 하였습니다. 급히
쓸 물건을 방납하는 자에게 의뢰하여 그들의 농간을 제멋대로 하게 두어 아무 제한이 없었으니 한심할 일입니다.

모리배들의 욕심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속담에 가죽이 없어지면 털 붙을 데도 없다는 말이 불행히 근사하게도 맞았습니다. 대체로 그때 당사자들의 본의는 백성에게 많이 받아서
군량을 보충하려는 데만 있어서 백성들의 부담을 균형있게 하는 데는 그리 깊은 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 우에서 서로 제 바 있어서 마침내 실행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본의를 취하고 잘못된 일을 고쳐서 포구까지의 운수 거리를 원근으로 따져서 쌀로 차이를 두되 일률적으로 쌀 2두씩 정할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2일 이상이 걸리는 거리에는
쌀을 표준으로 하여 포로 내게 하고 또 경중과 곤란을 고려하여 피차 동일하게 해 주면 어느 누구가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또 모든 물건을 사들일 때에 모두 후한 값을 주어 시장
가격에 비하여 배 혹은 5배를 주어 풍년에도 더하지 않고 흉년에도 감해 주지 말아 방납하는 자들에게 일정한 법이 있음을 알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 일을 주선하면서 없는 것을 사고
있는 것을 팔아 거기에서 이익을 먹게 하면 누가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혹 제향 때에 소요되는 것과 특수한 물품을 서울에서 구하기 어려워서 지방으로부터 받아야 할 때에는 그
지방에서 바칠 쌀이나 포를 그것에 해당한 가격만큼 감해 주면서 본 고을로 하여금 바치게 하면 그것을 신축성 있게 처리하는 것은 한 당사자의 능력에 달린 것으로서 백성의 부담이
고르게 되어 가격의 고하로 인한 폐단과 부역의 고통을 면하게 될 것이니 무엇이 불편하며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일을 정부에서 의논하였는데 영의정 이원익(李元翼)
이원익(李元翼)： 임진왜란 때의 인물로서 자는 공려(公勵)이며 호는 오리(梧里)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 평안도를 방위하였으며 광해군 때에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진상과 공납을
없애고 대동법을 제정하여 경기도 내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 곧 조례를 작성하고 대동청(大同廳)[즉 지금의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여 우선 경기도에서 시험 실시하게 하였다. 그 법은 매 1결마다 상, 중, 하 년을 막론하고 쌀 16두를
받아서[가을, 봄으로 나누어 절반씩 받는다.] 서울에다 바치게 하는 동시에 모든 공물, 진상 및 본읍에서 주는 녹봉, 서울에서 부리는 마바리에 관한 것들을 모두 그 속에
포함시켰으니 지금 경기도의 백성이 조금 살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이전에는 공물 값만을 받았기 때문에 1결에 2두씩을 받았으나 이것은 공물과 진상 및 잡역들을 모두
그 속에 포함시켰으므로 16두로 되었다.]

효종(孝宗) 초년에 좌의정 김육(金堉) 김육(金堉)： 조선 인조 때 사람으로서 호는 잠곡(潛谷), 영의정을 지냈으며 대동법 실시와 화폐 통용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대동법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시행되도록 하였다.

이 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정부의 의론이 구구하여 일치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단지 충청도에만 실시하였는데 그 법은 선혜청의 규정과 대략 같으나 새 조목을 첨가한 것이
자못 많다.[지금 김육이 작성한 『대동법사목』(大同事目) 1권이 있는데 그 조항에는 불충분한 것도 많다.] 즉 그 법은 매 1결에 쌀 10두씩을 받고 이외에 다시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대단히 편하게 지냈다. 그러나 효종 말년에 김육이 또 전라도에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조관들 중에서 반대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연해 읍에만 실시하였으며
그 외에는 아직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니[전라도에서는 1결마다 쌀 13두씩을 받는다.] 이상이 지금 실행하고 있는 대동법의 경위이다.[충청도, 전라도에서 1결마다 받는 쌀이 다소의
차이가 있는 것은 이 법을 전국적으로 균일하게 실시하지 못하고 또 종전 각 도의 공물 수납에 경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도에서는 누락된 전결이 많기 때문에 쌀을 더 많이 낸다.]

소위 대동법과 지금의 부역법에 관한 규정의 차이를 대략 말하면, 그 소요될 것을 계산하여 그것에 해당한 수량의 쌀을 받아서 정부에서 지출하는 것을 제정하는 것이 대동법이요, 원래의
부세는 도리어 경하나 일이 있을 때마다 백성들에게 일정한 한도가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지금의 부역에 관한 규정이다. 지금 토지제도가 문란해져서 많은 결지(結地)의 땅이
서원배(書員輩)들의 수중에 맡겨져 마음대로 속이고 빼어 버리며 수령이라는 자들도 또 사사로이 은닉하기를 예사로 하기 때문에[속칭 은결(隱結)이라고 한다. 대개 처음에는 토지제도가
명확하지 못하고 국가에서 사실을 구명하기 어려웠으므로 탐오하는 관리로서 이와 같이 하는 자도 더러 있었던 것이다. 또 그 후에 국가에서 부역을 시키는 데서 정상적인 규정이 없고
보니 은결을 두어 사사로이 나누어 받는 것이 백성에게 조금이라도 폐단을 적게 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선량한 관리라도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정상적으로 받는
것은 천 결의 세도 못되는데, 만일 백 필의 비용을 써야 하는 일이 있기만 하면 덮어놓고 백 필의 비례로 각 도에 나누어 배정한[일일이 전결(田結)에 의거하여 계산하지도 않고 일만
있으면 마음대로 나누어서 물리기 때문에 아무런 경중의 기준도 없고 사방의 부담이 고르지 않아 현격히 차이가 난 데가 많다.] 각 도에서는 또 마음대로 여러 읍에 나누어 배정하기
때문에 여러 읍에서는 또 백성들에게 나누어 징수하게 된다. 이렇게 정부에서는 각 도에, 각 도에서는 각 읍에, 각 읍에서는 호주에게, 호주는 농민에게 나누어 물리어 매개 계층마다
붙어먹고 마디마다 농간질을 하여 그 폐단이 무수하니,[매개 계층마다 수량을 불리게 되는 것은 무슨 물건을 나누어 정할 때 일정한 수량과 일정한 규례가 없어서 백성들은 전혀 그
수량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탐욕스럽고 간활한 관리들이 그 틈을 타서 마음대로 많이 받아 내고 또 단계별로 운수하여 납부하는 과정에 잉여물을 가져야만 퇴박맞은 것과 소모된 것을
보충해 넣을 수가 있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관리가 아닌 자라도 더 받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마디마다 농간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받아들이는
일이 점차 많아져서 무한한 폐단을 낳게 되는 것이다.] 만민이 부담하는 비용을 총계하면 수십만 필 이상이 될 것이다. 조그만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전국 백성이 모두 소란스럽게
되고 전국의 호주들이 분주히 뛰어다니게 된다. 각 읍의 관리로서 왕래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고 그 문서의 번잡함과 독촉하는 소란과 어디나 있어야 하는 뇌물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 정부의 수요로 올려 가는 것은 고작 백 필의 포에 그칠 따름이다. 한 가지 일이 이러하니 또 다른 일도 이렇게 되며 오늘도 이러니 내일도 이럴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하루도 편안하게 쉴 날이 없으며 인심이 날로 어지러워져서 폐습이 날로 심해만 간다. 또 거기에다 관원들의 녹봉이 극히 박하기 때문에 관원들의 생활비도 흔히 공적인 사업을
빙자해서 떼어먹고 붙여 먹으며, 서리배들은 녹봉이 없으므로 간사한 짓을 하고 뇌물을 토색질하여 살고 있다. 그러므로 관원로부터 아전배에 이르기까지 청렴한 자는 가난해서 살 수가
없게 되고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는 날로 부유하게 되어 가장 청렴한 자일수록 더욱 궁핍하게 되고 가장 탐욕스러운 자일수록 점차 부유해져서 실컷 먹고 남는다. 이리하여 수단이 없는
수령들은 항상 말하기를 "6년 관원이 되기를 원치 않고 한번 칙사 대접받기를 원한다" 고 한다. 풍속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법제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폐해가
여기에까지 이르렀는데도 대동법을 실시하려 하면[지금 실행하고 있는 대동법도 지출할 것을 보아 받아들이는 [量出爲入] 방식이고 또 미진한 점이 많지만 백성으로부터 받는 것만은 그래도
일정한 규정이 있다.] 정부의 모든 관리들이 다 "대동법은 실행할 수 없다" 하고 토지를 측량하려 하면 모두 "토지 측량은 할 필요가 없다"고들 하니 참 한심할 일이다. 정부에서
일정한 규례에 의하여 백성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하면서 일정한 수량도 없이 또 무질서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라고 하 이 자들이 우매하거나 무식한 자가 아니라면 가장 옳지
못하고도 나라를 배반하는 자들이다. 저 아전배, 천예(賤隸), 방납, 모리배들을 무어라고 책망할 것인가?

[감사로 된 어떤 자와 수령으로 된 어떤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일찍이 회의석상에서 대동법을 노골적으로 반대한 자들이었다. 나중에 그 자들이 사적으로 한 말을 들었는데 감사가 "자네
고을에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게 된 것은 나의 덕인 줄 알게! " 라고 말하니 수령이 대답하기를 "저의 고을에 대동법을 실시하지 못하게 된 것은 사또님의 덕택입니다. 만일 대동법이
실시된다면 수령들은 손발을 놀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고 한다. 아! 슬픈 일이다 그들의 이른바 손발을 놀린다는 말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거니와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데 있는가? 자기들 마음대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인가? 과연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데 있다면 국가에 일정한 세입이 있고 관원들에게 일정한 녹봉이 있는 것은 본래 수령들이
크게 원하는 바로서 정치와 교육, 군인, 백성이 모두 다 힘껏 실행하기를 노력해야 할 것이니 손발을 놀릴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마음대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있다면 이는
백성을 좀먹는 적이다. 비루한 자가 자기만을 살찌우면서 국가에 법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과 간신과 더불어 이익을 도모하며서 나라가 어지러운 것을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 이런 자들은 왕법(王法)에서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평소에 명사(名士)로 일컬어졌며 또한 당시의 명망 있는 자들이었다. 세상이 옳게 되지 못하고
정치가 바로잡히지 못하여 사대부들의 마음이 사리사욕에 물젖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일마다 나쁜 것을 좋아하고 좋은 것을 싫어하게 되며 마음이 항상 사리사욕에 있고 국가와 민생에
있지 않는 것이다. 맹자가 정전 제도를 논하면서 이르기를 "제후들은 그것이 자기에게 해롭기 때문에 그 문헌들을 없애 버렸었다" 하였고 또 "폭군과 탐관오리는 반드시 그 경계를
무시한다" 하였으니 의리와 이익,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이렇게 매양 상반되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혹자가 말하기를 "정하려고 하는 이 법은 경상적인 세입으로써 비용을 쓰게 하는 법으로서 진실로 지당하다. 그러나 모든 관리의 녹봉이 지금보다 많아지고 서울과 지방의 이례(吏隸)에
이르기까지 모두 녹봉을 주게 되며 온갖 비용을 모두 경상비에서 지출하게 되니 백성들의 부세(賦稅)가 너무 무겁지 않겠는가?" 한다. 지금 모든 관리의 녹봉이 박하고 이례에게 급료를
주지 않으나 대개 다 편히 살고 호화스럽게 지내는 자가 많으니 이 자들이 과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는 것인가? 무릇 전국에서 쓰는 비용은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다만 정치를 하는 자가 법을 조리 있게 만들면 일이 제대로 되어서 백성들이 각자의 직분에 안정되기 때문에 부세가 고르게 되어 백성들이 화락하고 국가의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에 질서가 없게0 되어 서로 도적질을 하고 탐오하게만 되기 때문에 부세가 무거워져서 백성들이 곤란해지고 나라까지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비용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다 하지마는 양자의 결과는 이와 같이 득실의 상거가 먼 것이다. 게다가 국왕이나 신하라고 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설정해 놓은 것이며 하부의 이례라는 것은 본래
상부의 일을 받들어 실행하기 위해서 둔 것이므로 모두 백성에게 얻어먹는 것이다. 만약 백성을 헤아려서 관원을 세우고 일을 헤아려서 이례를 정한다면 어찌 녹봉의 부족을 걱정하겠는가?
응당 해야 할 바를 하고 세입을 헤아려서 지출한다면 어찌 비용의 부족을 걱정하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림에 덕을 밝히고 법을 삼가여 그 일을 바로잡아서 조그마한
이익이라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관리로서 목전의 일에 대하여 구차하고 간략한 것만을 위주하여 못된 폐단을 확대시키면서 "나는 백성으로부터 가렴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일에 비근하고 구차함이 있는데도 백성들에게 피해가지 않는다는 것은 천하에 이런 이치는 없으니, 이는 물이 모두 바다로 가는 형세와 같은
것이다.

○ 중국으로 가는 사신(使臣)에게는 그 비용을 정하여 지급하고 지금과 같이 청구하는 폐단을 없앨 것이다.[지금 중국으로 가는 사신에게는 정부에서 비용을 주지 않고 8도의 모든
고을에다 청구하므로 감사ㆍ수사ㆍ병사ㆍ수령들이 그 정실 관계의 후박(厚薄)과 세력의 경중에 따라서 마음대로 잡물을 보내 주는바 수량의 다소도 정한 바 없이 모두 과(科) 외의
부담으로 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 낸다. 그에 관한 인부와 마바리로 운반하는 고통이 전국에 뻗치게 되니 그 폐단이 클 뿐만 아니라 그 일 자체가 심히 부적당하니 예조로 하여금 여비를
정해 주고 이런 일체 폐단을 혁파하도록 할 것이다.]

▷옷감[衣資]

상사(上使) 부사(副使)에게는 각각 공복(公服) 한 벌,[서장관에게도 한 벌을 주나 품직에 따를 것이다.] 명주 8필,[서장관에게 6필. ○여름이면 명주의 절반을 감하고 대신
모시베로 줄 것이다.] 면포[엿새 [六升]ㆍ아래도 같다.] 6필,[여름이면 절반을 감하고 대신 정포로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데리고 가는 자에게 주는 옷감도 이 안에 포함된다.
아래에서도 모두 같다.] 쌀 20곡,[서장관은 15곡] 군관ㆍ의관ㆍ역관에게는 각각 명주 4필,[여름이면 절반을 감하고 대신 모시베로 줄 것이다.] 면포 6필, 쌀 8곡.

▷노비(路費)[반전(盤纏)이라고도 한다.]

은 100냥, 장지(壯紙) 50권, 백지(白紙) 100권, 부채 300자루, 황모필 300자루,[대ㆍ소ㆍ절반씩. 먹도 동일하게 준다.] 참먹[眞墨] 정(丁)[이것은 일행 전체의
비용이다. 만일 사신이 나누어 쓰게 되면 상사가 4분, 부사가 3분, 서장관이 2분이다. ○ 사신 일행이 타는 것, 먹는 것은 모두 연로 고을에서 관비로 쓴다. 국경을 넘은
다음에는 모두 경상적인 공급이 있으므로 본래 별도의 수요품 항목이 없지마는, 만리 행정에 세세하나 반드시 필요한 물자가 역시 전혀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필류(紙畢類)
같은 것은 도중에서 쓸 것에 불과하다. 안면 관계는 본래 개인에 속한 것으로서 공적으로 지출할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만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이런 특별 지급이 있는 것이니 모두
사신을 우대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장사치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라면 정부에서 엄금할 일이니 어찌 여비를 주어 장려하겠는가? ○ 일본과 여진으로 가는 사신에게는 옷감
외에 이런 노비를 주지 말 것이다. 만일 주어야 할 때는 비용을 절반 감하거나 혹은 3∼4분의 1로 정하여 줄 것이다.]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예비금으로서 따로 은 백 냥을
가지고 가게 할 것이다.[형편을 보아 가감할 수 있다. ○이것은 경상적인 것이 아니다. 국가의 사명을 띠고 외국을 가게 되므로 혹 의외의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 예비로 주는 것이니,
일이 있으면 쓴 다음에 돌아와 보고하고 일이 없으면 그대로 가져 올 것이다.]

사신들의 비용을 국가에서 주지 않고 지방에 청구하게 하는 것은 규정에 대단히 어긋난 일이다. 지금 호조에서 비용을 넉넉하게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지금 호조에서 사신 일행에게 포,
명주, 은, 부채 등을 비롯하여 표피(豹皮), 녹피(鹿皮), 청서피(靑鼠皮), 수달피, 은장도, 놋장도, 왜검, 지삼초(枝三草), 은담뱃대 같은 것들을 주는데 그 수량이 극히
많다. 이것은 대체로 병자호란 이후에 이렇게 되었는바, 여진족들의 각색 요구가 심하기 때문에 왕자나 권귀(權貴)들이 사신으로 가게 되는 경우에는 그들에게 뇌물을 주는데 그것이 점차
많아져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지방에다 청구하기를 마지 않고 있다. 이것은 청구하는 일이 그만 관례로 되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반대하는 자도 없어서 더러는 이것을 기회로
부자가 되려고 기도하는 자까지도 있게 되었다. 그릇된 폐단에 의한 해독과 선비들의 더러운 풍습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응당 철저한 용단을 내려 이따위 폐단을 고쳐야
한다.[옛날에 청구하던 예는 종이 권이나 칼자루 및 부채자루 등속에 불과했지만 근래에 와서는 여러 가지 폐단이 극도에 이르렀다. 세력이 없는 자의 청구라면 그 절반도 못되게 주지만
권귀자의 청구라면 공물과 같이 실어 올린다. 심지어 무관들까지도 은과 포로 400∼500냥을 넘게 갖다 주는 형편이다. 이 청구는 지방에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군사
기관[京兵衙門]에까지 청구하게 되는바 어떤 대장급의 인물들은 몰래 군사 물자를 팔아서 은을 사 주기를 마치 어떤 속국이 조공 바치듯 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번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대개 크게 치부를 하게 되며 또 그곳에 가서 뇌물을 주고 장사를 하는 폐단이 점차 더해졌다.]

혹자가 말하기를 "지금 사정을 보면 그곳에 갔을 때에 그들이 뇌물을 강요하고 우리가 뇌물을 주는 것이 이미 곤습적인 예로 되어 있는바 그들이 조종을 하고 있어서 우리 측으로서는
어떻게 끊을 수가 없다. 정부에서 규정대로 비용을 준다 하여도 사정이 이것만으로는 일을 주선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 한다. 국가에서 법제를 정하는 것은 오래 두고
진행하여야 할 것을 정하는 것이요 오늘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란 모두 이익을 도모하여 스스로 뇌물을 쓰는 자들이다. 만약 자신이 스스로
정직하다면 그들이 아무리 오랑캐일지라도 우리에게 존경할 줄을 알 것이다. 사신들이 뇌물을 주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는다 하더라도 군대를 일으켜 침략하기까지는 되지 못할 것이다. 설령
부득이 뇌물을 주어야 할 경우에는 응당 정부로부터 그만한 수량을 따로 주어야 할 것이요, 사신으로 하여금 전국에 청구하여 만백성의 고혈을 짜내면서 뇌물을 쓰는 단서를 열어 주어
국법을 문란하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지금 단지 사신으로 가는 자들만이 청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도 더러 청구하는 예가 있다.[지금 국가에서 건축, 연회 등 일이 있으면 예사로 청구를 하고 국가의 혼인이 있을
때에도 청구를 하게 한다.]

국왕이란 일국의 부를 가지고 있으므로 경상적인 세입만으로도 족히 제반 지출을 할 수 있으니 어찌 지방에다 청구를 해서야 되겠는가? 국가로서 청구를 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알리지
못할 수치이다. 이제 만약 이런 일을 없애지 않는다면 관리의 악습을 바로잡을 수 없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천왕(天王)이 와서 수레를 요구했고 금을 요구했다" 고 하였으니 그 경계하는 뜻이 심원하다. 『호씨전(胡氏傳)』 호씨전(胡氏傳)： 중국 송나라의
호안국(胡安國)이 주석한 『춘추』를 가리킴.

에 주하기를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더 좋아하는 것이다. 왕노릇하는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이 보고 본받는 것이다. 대부가 자기 집안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사(士)와 서민도 반드시 자기 일신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약탈하며 심지어는 반역까지 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날의 국왕은 반드시 자신이 검소한 덕으로써 백관에게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상하가 모두 각각 자기 지위에 따라 행동하였으며 백성의 마음이 안정되어 모두 자기의 직업에 안착하고 다른
욕망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적 행동이나 엄한 형벌이 없었다. 그러나 사치한 마음이 한번 움직이면 그것을 막을 길이 없어서 결국 더 심하게 되어, 관리들에게는 도덕도, 염치도 없어지며
날마다 아첨하고 뇌물질을 일삼아 나중에는 위태하고 멸망하는데 빠지고 난 후라야 그치게 되는 것이다. 『춘추』에 쓴 것을 보면 주나라가 쇠퇴하고 문란해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아!
애석하다. 이 뇌물을 청구하는 것이 이렇게 위험하다는 것을 국왕에게 깨우쳐 주어서 국왕으로 하여금 그에 대하여 삼가하고 깊이 반성하도록 하는 것이 망하는 것을 흥하게 하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잡는 도리라는 것을 알게 하는 사람이 없구나!

○ 중국 사신의 도중 접대는 도착한 참읍(站邑)에 일임하고 지금과 같이 여러 고을이 멀리까지 나와서 접대하는 폐단을 없앨 것이다.[지금 여러 고을이 참점에 나와서 접대하는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마땅히 대로 연변의 고을로 하여금 접대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 장소가 빈 참점으로서 성읍이 아닐 때에는 인접한 고을로 하여금 접대하도록 하되 반드시
영구히 한 개의 고을에 정할 것이며 여러 고을에다 나누어 분배하거나 다시 변경하지도 말 것이다. 모든 접대에 필요한 기구, 잡물들도 쓸 것을 미리 준비해 두며 접대하는 비용은 일체
국가의 경상비에서 지출할 것이다. 사환(使喚)이 부족하면 한호(閑戶)를 불러 쓰되 그 외에 참점 사람을 쓰게 되면 그에게 받을 세를 감해 주고 그래도 부족하면 값을 주어 사람을
사서 쓰게 할 것이다. 모든 참읍에는 조세(漕稅)를 그만큼 남겨 두었다가 쓸 것이다. ○ 비단 외국 사신뿐만 아니라 지금 본국 사신들도 여러 고을에 뜯어 맡겨서 접대하고 있는데
더욱이 이런 규례는 마땅히 해야 한다. ○ 품삯은 1인당 하루에 쌀 5승씩을 상규에 준하여 돈으로 줄 것이며, 만약 운반할 것이 있으면 마바리 값에 준하여 줄 것이다. &lt;지금
대동법에서는 마바리의 삯을 매 1참(站)에 대하여 풍년이면 쌀 3두, 평년이면 2두 반, 흉년이면 2두씩을 주기로 정하였으나 평년을 기준으로 하여 돈으로 환산하여 줄
것이다.&gt;]

대로 연변의 고을에 이례(吏隸)를 넉넉히 정해 주고 또 참점(站店)도 증설해 주면 사람을 사서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사람이 부족하면 그 고을의 군인을 부려쓰고
그만큼 번(番)을 감해 주어도 무방하니, 사환이 부족하다 하여 여러 고을에다 뜯어 맡기지 말 것이다. 그 고을에서 서울에 바칠 세미[漕稅]를 그만큼 남겨 두었다가 쓰게 되니 부족할
리도 없을 것이다. 가사 특별한 경우에 경비가 부족하면 그 고을 조세의 전부를 남겨 두거나 혹은 다른 고을에서 서울로 올려 갈 세미를 옮겨 와도 무방하니, 경비가 부족하다 하여
여러 고을에 뜯어 맡기지 말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칙사의 접대를 여러 고을에 뜯어 맡긴 것은 벌써 오래되었다. 만일 한 고을에서 담당하게 되면 한 개 고을의 재산과 인력으로써는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고
한다. 각종 물품의 수입을 국가에서 계산하여 거기에서 비용을 떼어 줄 것이다. 예컨대 백 석이 수요 되면 백 석을 떼어서 사용하고 천 석이 수요 되면 천 석을 떼어 사용하여 수요
되는 것만큼 쓸 것이니 무엇이 부족할 것인가?

혹자가 말하기를 "사환이 부족할 것 같다" 한다. 이례와 한호 외에도 참점에서 사람을 사서 쓰는 규정이 있으므로 적당하게 맡기면 그만이니 어찌 사환의 부족을 걱정할 것인가? 대로
연변의 고을들에서는 거기에 사용하기 위하여 다른 부역들을 면제해 주고 있고 경비를 넉넉히 주고 있고 이례도 더 정해 주고 있고 참점도 더 두고 있고 역졸도 더 두고 있다. 칙사
일행이라야 불과 40∼50명이므로 그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데 부족할 리가 없다. 거기에다 세미를 그곳에 남겨 두며 인근 고을의 세미까지 옮겨다가 충분히 쓰고 있는데 무슨 부족이
있으랴! 먼 고을로부터 여기 와서 접대한다는 것은 실상 배정되어 오는 사람은 몇 명에 불과하나 그 몇 명을 보내기 위하여 인부를 동원하고 물건을 멀리 운반하느라고 2∼3일 혹은
5∼6일이 걸리는데 관부에서는 일을 전폐하게 되고 온 고을이 시끌시끟하게 되며 모든 주민이 노력을 허비하고 손해를 보게 되어 심지어 닭, 개까지도 온전히 있을 수가 없게 되니 그
폐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본 참점에서 한 사람에게 맡길 일을 먼 곳에 맡기면 백 사람을 괴롭혀도 부족할 것이며 본 참점에서 1석의 수요로 될 것을 먼 곳으로부터 가져 오면
백 석을 사용하여도 부족할 것이거늘 더군다나 중간에는 탐관오리들이 또 그 틈을 타서 간사한 짓을 하는 자가 있으니 그 손해는 몇 천 배만이 아니다. 때문에 다른 고을에 나와서
대접하는 10석의 비용은 먼 고을 천 사람의 가산을 파산시키고 먼 고을로 나가는 10명의 부역은 먼 고을 만 명의 일을 못하게 만드 것이다. 국가에서 대로 연변에 있는 고을의 백
석 세미를 쓴다면 여러 고을 만 석의 재물이 허비하지 않게 하되 여러 고을 만민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니 과연 그 득실이 어떠한가? 지금은 간략한 것을 버리고 번거로운 것을 택하며
쉬운 데를 버리고 어려운 데로 가게하고 있다. 만약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한번 맞게 되면 전국의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경가파산(傾家破産)하여 사방으로 싸다니게 하고 전국의 관리로
하여금 모두 사무를 전폐하고 길가에서 방황하게 하니 이것이 무슨 짓인가? 그러므로 단연 규정을 정하여 이런 규례를 영원히 폐지하고 참점이 있는 고을에다 일임하여 접대하도록 할
것이다.

또 지금은 외국 사신에게만이 아니라 본국 사신의 행차 때에도 먼 고을에다 몇 명씩 뜯어 맡겨서 접대하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더욱 어린애 장난과 다름이 없으니 시급히 개혁해야
한다.[대체로 종전에는 한 곳에서 조그만 일이 있어도 원근을 막론하고 그냥 각 고을에 뜯어 맡기고 있었으니 이것도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일찍이 지평현(砥平縣) 사람들이 다른 고을로 가서 접대하는 일을 보았었는데 지평현에 뜯어 맡긴 것을 보면 장정이 호마다 1∼2명이며 그 현에서 수렴하는 것은 소 한
마리,[청렴한 관원라면 다른 관청과 합해서 소 한 마리만을 쓰겠지만 청렴하지 못한 자는 참점에 도착할 때 한 마리, 참점을 떠날 때에 또 한 마리씩을 받는다. 다른 물건도 다
이러하다.] 노루 3∼4마리, 닭 수백 마리, 꿩 60∼70마리, 계란, 기름, 꿀, 각종 어물, 각종 채소, 소금, 장, 각종 과실, 각종 쌀과 가루, 각종 그릇, 심지어
돗자리, 빗자루, 남비, 솥, 바가지, 조롱박 등 온갖 잡물들까지 그때 쓰고 안 쓰는 것도 불문하고 모두 굉장하게 준비해서 소와 말에 싣고 수 백리 밖으로 운반한다. 그 외에도
종류가 대단히 번잡하다. 심지어 돼지 대가리, 실내 설비품, 대소 차일, 방석, 병풍 등은 본 고을에서 내온 것이라고 하나 그것을 운반하는 인부, 우마가 적지 않으며 관원, 이례,
노비, 우마 등의 양식과 비용이 헤아릴 수 없다. 그 물건들을 수렴할 때에 온 경내를 채찍질하여 받아 내므로 열 집이면 아홉 집은 통곡을 하게 된다. 막상 참점에 도착하더라도
잘되지 않아 큰 사변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만약 칙사가 서울에서 10여 일 묵게 되면 그 참점에 유숙하는 인부, 우마가 오래 머무를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전에 왔던 자는
돌아가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교대하는데 양식과 물자가 부족하면 또 다시 수렴하여 가지고 가서 계속하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백성은 한 사람도 편안히 있을 수 없어서 백 가지 천
가지의 폐단이 끝이 없는데다가 욕심 많은 관리들이 이 기회를 타서 간사한 짓을 하는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거기에서 발생한 폐단이 이렇지마는 결국 준비한다는 것은 장정 두어
명이 반나절의 먹을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대로 연변의 해당 고을로 하여금 이만한 사람을 더 내게 한다면 지금 비용에다 조금만 더해도 충분할 것이니 어찌 지금과 같은 폐단이
있겠는가?[지금 지평현 주민에게 끼친 손해를 계산해 보면 천 석만도 아니다. 만일 대로 연변에 있는 해당 고을로 하여금 이 일을 맡아서 하게 한다면 비록 일일이 따로 차리고 일일이
사람을 사서 쓰더라도 두어 섬의 비용에 불과할 것이며, 더군다나 합해서 준비하고 겸해서 일을 보게 한다면 그리 더 많은 힘이 들지 않을 것이다. 설령 지평현에서 다른 고을로 나와
접대하지 말고 그 대가로 쌀 50∼60석을 내어서 대로 연변 고을의 전세(田稅)를 대납해 준다면 도로 연변 고을의 백성들은 기뻐서 날뛸 것이며 지평현의 백성들도 역시 무거운 짐을
부려 놓은 듯할 것이니 그에 대한 득실이야 이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당해서 이러한데 1년에 2∼3차례를 당하더라도 매번 다 이렇게 된다. 또 고을 사람을 보내어
반드시 참점에다 접대하기 위한 가설 가옥[假家]을 전기하여 건축해야 하는데 아무리 초가집을 짓더라도 멀리 객지에 가서 집을 짓게 되므로 그 비용이 백 배나 든다. 그런데 한번
지나간 후에는 도로 헐어 버리며 그 후에 또 이렇게 짓게 하고 있다. 만약 본 고을에서 이것을 담당해서 튼튼한 집을 짓게 한다면 어찌 이러한 폐단이 있을 수 있겠는가.[만일
튼튼하게 기와집을 지어 놓으면 이런 폐단이 영영 없을 뿐만 아니라 도로의 볼품도 좋고 여행을 하는 자들의 휴식과 숙박도 편안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참점을 더 증설하는
이유이다.] 여기에 다만 한 개 현을 예로 들었으나 다른 여러 고을들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근년에 와서 선혜청(宣惠廳)으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의 값을 주고 있으나 못된
폐단을 없애지 못한 것은 각 고을에서 아직 다른 고을에다가 뜯어 맡기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니 이것을 곧 폐지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상에서 논한 재물을 허비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은 오히려 그 중 작은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옛날 중국의 열국시대에는 모두 행인(行人)과 대행인(大行人)이란 관직을 두어서
외국으로부터 온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맡게 하여 맞아들이는 의례와 그에 따르는 마초를 준비하는 일들을 맡아서 관리하였던바, 만일 왕의 사신이라면 대신이라도 시켜서 감독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때문에 의례가 일정하게 되었고 일에 조리가 있었다.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오(吳)나라를 섬길 때에 국내의 일은 대부(大夫) 종(種)으로 하여금 주관케 하고
국외의 일은 범여(范蠡)로 하여금 주관케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자기가 맡은 국내외의 일을 전담하게 되어 서로 번잡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국력을 허비하여 사신을 맞아들이면서 사신을 대접하는 관부를 두지 않고 또 전담하는 참점의 제도를 정하지 않아 외국 사신이 한 번만 오게 되면 정부에서는 재상, 집사,
육조, 여러 기관의 관리들이 사무를 폐지하고 모여 기다리게 되며 지방에서는 각 고을의 수령, 향관(鄕官), 이례(吏隸), 만민(萬民)이 모두 그 일 때문에 분주하고 피곤하게 된다.
즉 온 나라의 정신과 근력을 오로지 이 일에만 빼앗기하게 되어 허둥거리고 번잡하여 눈을 뜰 수가 없는 판이니 어느 겨를에 여력이 있어서 자기의 본래 직무를 하겠는가? 이것은
병력으로써 침략하지 않고도 상대 국가를 저절로 멸망케 하는 짓인 것이다. 이런 일은 천하가 태평하던 세월에도 나라를 위하는 정치가 아니어든 하물며 지금 우리나라는 굴욕을 당한 뒤에
수치를 참고 있는 이때에서랴? 이에 관한 제도를 조속히 제정하여 여러 고을에서 먼 곳까지 나가서 접대하는 규례를 영원히 폐지하여 대로 연변의 고을에다 전적으로 맡기고 정부에서는
사신을 접대하는 관원을 정하여[관반(舘伴)ㆍ원접사(遠接使)의 임무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을 재상이나 집사 중에서 택하여 겸임하도록 할 것이다.] 사신을 접대하는 모든 일을 그
사람에게 일임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일을 맡은 대로 연변의 고을에서는 사신 접대하는 일에만 전적으로 책임을 질 것이며 정부의 여러 기관과 여러 도, 여러 고을에서는 저마다
자기 맡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어찌 그렇게 바삐 덤비는 일이 있겠는가?

혹자가 생각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칙사를 대접하는 데 있어 극히 풍성하게 갖추고 대접하는 물건의 수효도 많기 때문에 만일 뜻밖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배 혹은 5배의 값을
주어도 제때에 사지 못하여 우리나라에서 경상적으로 바치는 공물을 주인에게 맡겨 미리 사주는 그것과는 다를 것이니 반드시 따로 백성에게 받아야만 일을 실패할 우려가 없다" 한다.
이것은 그렇지 않다. 칙사를 대접하는 데 수요 되는 금, 은, 채단 같은 것은 본래 민간에서 나올 수도 없는 물건이며 민간에서 낼 수 있는 것은 어육과 채소, 과실 유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민간에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급박한 때라도 후한 값으로 어찌 못 구할 것인가?[설사 아무리 후한 값을 주어도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민간에서는 더욱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음식 종류도 될 수 있는 것만을 구할 것이며 될 수 있는 것만을 구하더라도 찬품(饌品)이 아주 풍부할 것이다. 빈궁한 백성으로 하여금 반드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구하라 하여 하루 동안 먹다 남기고 갈 찬품을 치레한다면 천자(天子)가 순행한다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어찌 천자의 천하를 안정케 한다는 본의나 또
천자의 사신을 대접하는 도리에 적합하겠는가? 더군다나 칙사 내왕시의 접대비용이 전에는 그리 많지 않았었는데 이 일을 맡는 자들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례라고 하여 만민으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을 짜내다가 모두 중간에서 허비하는 것이 아닌가? ]

○ 지방에서 신관(新官), 구관(舊官)을 맞이하고 보내는 것도 그 방식을 개정하여 지금과 같이 본지에서 인부나 말을 보내는 규례를 없앨 것이다. 수령, 진장(鎭將), 교관, 찰방
등이 부임하거나 해임하여 갈 때에도 다 역마를 타게 할 것이다.[감사, 병사, 수사, 도사(都事), 우후(虞候)가 지금은 모두 역마를 탄다. ○ 해임하고 돌아갈 때에 소솔들도 말을
타고 가게 할 것이다. 수량은 우역(郵驛)에 있다. 본 고을의 하인들은 자기 경내에서만 의례를 갖추어 맞이하거나 전송하고 다른 경내를 넘어서지 말 것이며 다만 이례 2∼3명을
보내어 서울까지 맞이하거나 보내 줄 것이다.&lt;시골 있는 자가 혹 정부의 명령으로 해임할 때나 부임할 때는 바로 그의 집으로 가서 맞거나 보내 줄 것이다.&gt; ○ 서울까지
가서 맞거나 보내 주는 하인의 수는 도사, 우후에게는 수령과 같고 감사ㆍ수사ㆍ병사에게는 4명, 판관ㆍ진장ㆍ교관ㆍ찰방에게는 모두 2명씩으로 하고 &lt;도중에 소비되는 양식과 마초는
그들이 가지고 가고 또 자기의 녹봉이 있으니 그에 관한 급료를 주지 말아야 한다.&gt; 그 수를 초과한 자는 처벌할 것이며 그것을 주관한 관리도 처벌할 것이다.]

○ 관리의 가족은 자기의 인부와 말로써 내왕할 것이다. 그러나 노정의 이수를 계산하여 비용을 주되 부임해 갈 때에는 서울에서 계산하여 주고 해임하고 갈 때에는 본 고을에서 줄
것이다.[역시 본 고을 경비에서 떼어 줄 것이다. ○ 본 고을 하인도 역시 그 고을 경내까지 맞이하고 전송할 것이다.] ○ 노비(路費)는 매 백 리마다[백 리 이하는 말할 것 없고
100리로부터 2백 리까지는 백 리와 같이 한다. 기타도 이를 미루어 계산할 것이다.] 부윤(府尹)ㆍ도호부사에게는 쌀 30두, 부사(府使)ㆍ군수에게는 25두, 현령 및 판관에게는
20두, 군승(郡丞)ㆍ현승(縣丞)에게는 쌀 15두씩 줄 것이다.[모두 3분하여 3분의 2는 돈으로 주고 3분의 1은 쌀로 줄 것이나 전부 돈으로 달라고 요구하면 들어줄 것이다. ○
만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서울에서 다 주기가 곤란한 것은 중로(中路)인 고을&lt;예컨대 서북에 갈 때에는 평양ㆍ함흥과 같은 것&gt;까지 계산하여 갈라서 지급한 뒤에 감할
것이다. 또 거기에서 떼어 주고 받았다는 문건을 돌려보내도 좋다. ○ 감사, 수사, 병사, 진장, 교관, 찰방이 가족을 데리고 가서 오래 있게 될 때에도 이 예에 의할 것이다.
감사ㆍ병사ㆍ수사의 가족에게는 30두, 첨사의 가족에게는 25두, 교관ㆍ만호의 가족에게는 20두, 찰방의 가족에게는 15두씩을 줄 것이다.]

지금 관리를 맞아들이고 보내 주는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인마(人馬)를 징발하여 도로가에 분주하게 싸다니며 천리 밖에까지 쌀, 찬, 소반과 기명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모두
바리에다 싣고 객지에 묵으면서 대접을 하고 돌아오니 이것은 형편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에게 꼭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는 이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이 오직 상부의 세력만을 믿고 백성의 고통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번 맞이하고 보내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파괴하는지는 알지 못한다.[맞으러 가는 인부와 말이
서울에 머무르는 기한을 예정할 수가 없고 서울에 유숙할 때의 고통과 비용이 막대하므로 반드시 값을 후하게 주고 많이 가지고 간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그 비용을 수합하는데 혹 1결에
포 두어 필씩이나 받는 데도 있다. 예를 들어 흥덕현(興德縣) 하나를 본다면 민호가 천도 못되는 현에서 9년 동안 신관을 10번이나 맞이하였는데 거기에 소요된 물자 이외에
백성으로부터 마바리 삯으로 받아 낸 포가 7백여 동(同)에 달하였다고 한다. 백성들의 부담이 이렇게 됨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목전에 당하는 것이
아니면 예사로 쉽게 말하고 그 실정을 깊이 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듣건대 중국에서는 지방으로 부임하는 자는 대체로 역참마다 역마로써 교체하여 고을 경내에까지 보내고 가족은 자신의 인마로써 왕래하는데 본 고을에서는 자기의 경내에서만 맞아들이고 보내
준다고 한다. 사리로 보아서 이것이 지당한 것이다.[혹자가 말하기를 "관리의 가족은 개인의 인마로써 왕래케 하는 것이 당연하나 수령들이 모두 역마를 타게 되면 역로(驛路)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니 극히 먼 변강의 수령을 제외하고는 기타 수령에게는 본 고을에서 부리는 말의 수를 승마[騎馬] 한 필, 마바리[駄馬] 3필로 확정하되 그 비용을 본 고을
경비에서 지출하고 민간으로부터는 다시 받아들이지 말게 하면 어떠한가?" 한다. 만일 본읍의 인마를 쓰게 된다면 그 중에 포함된 연로(沿路)의 각종 비용이 반드시 나중에는 점차
증가하게 될 것이니 아무리 법적으로 가격을 일정하게 정한다더라도 그대로 실행하기는 어려워서 서민이나 이례가 당하는 피해는 지금과 다름이 없을 것이므로 역마를 사용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역참은 본래 도로 왕래를 위해서 역마전을 두고 있으므로 거기에 수요되는 비용을 적당하게 정하여 우대해 주어야 할 것이니 다만 그 수량을 어떻게 결정하는 가에
달린 것이다. &lt;만약 각 고을에서 소비되는 비용의 절반만을 떼어서 각 역참에다 준다 하여도 대단히 충분할 것이다.&gt; 한 번의 비용으로 한 번 행차에 사용하고 두 번의
비용으로 두 번 행차에 사용한다면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대개 고을에서 인마를 내든지 역마를 이용하게 하든지 모두 백성들이 부담하는 것으로서 국가적 견지에서 보면 양자가 모두
같은 것이나 이 두 가지 규정에 있어서 편리하고 불편하며 소득이 많고 손해가 되는 차이는 큰 것이다.]

조중봉(趙重峰) 조중봉(趙重峰)： 임진왜란 때의 사람으로서 이름은 헌(憲)인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승려 영개(靈介)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금산(錦山)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부하 700명도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는데 지금 금산에는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이 있다.

이 『동환봉사(東還封事)』에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관리의 임명을 대부분 함부로 하여 동에서 빼다가 서에다 채우며 아침에 임명하였다가 저녁에 바꾸어 어떤 경우에는 미처 앉을
겨를도 없게 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정치는 간사한 아전배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장부를 찢고 재물을 도적질하게 될 뿐입니다. 신관을 맞이하고 구관을 보내는 데 있어서 인마를 징발하여
수 천리를 분주하게 싸다니면서 가난한 백성들의 생활을 파탄시키고 있는바 이것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폐단입니다. 중국에서는 관원으로 된 자가 만리 밖으로 부임하더라도 자기의
인부와 말로써 가족을 데리고 가서 말 한 마리, 인부 한 명도 관청 비용을 소모하지 않기 때문에 그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백성들은 모두 자기의 직업에 안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신임자가 목민관으로서 부적당하다면 속히 갈아 버릴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신관 행차가 출발하는 날에야 국왕에게 아뢰어서 파면시키고 있다. 이에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멀리 온 관속들은 달변을 얻어 유숙해 가면서 신관의 발령을 기다리게 되고 보니 그가 집에 돌아가면 가산을 팔아서 달변을 갚아야 하므로 가정은 못살게 되고 맙니다. 1년에
파면을 당하는 자가 한 둘이 아닐 것이며 그를 맞으러 가는 자가 수백 명만도 아닐 것이니 1년 치고 이 일 때문에 자기 일을 못하는 자가 또 몇 백 명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을
사소한 일이라 개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생각건대 법을 개정하고 새 제도를 세우는 것이 본래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만 윗사람이 실행하지를 않기 때문에 이것을 소위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부득이 지금과 같이
마바리를 부려 쓰더라도 바리의 수만은 일정하게 정하여[『대전』에 이르기를 "수령은 6품 직의 바리 수에 의하고 그의 가속에게는 부(府)나 주(州)이면 20필, 도호부이면 17필,
군(郡)이하는 15필씩 정하여 인부수도 말 수에 따른다" 하였으니 이에 기준하여 정해야 한다.] 경상비에서 값을 지급하는 것이 옳다.[이렇게 하면 먼데서 온 허다한 빈궁한 관속들이
서울에 머물러 꾸어 쓰고 파산하는 일은 면할 수 없을지라도 전제의 부역제도로 보아서는 원칙에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대동법 사목[大同事目]에 의하면 "질만(秩滿) 질만(秩滿): 관직의 임기가 만료됨. 과만(瓜滿), 봉만(俸滿)이라고도 함.

한 수령의 마바리 값은 대동미에서 지급한다"고 하였으나 수령이 자주 교체되는 것은 그 고을 사람들의 불행이라 하여 벌징으로 백성에게다 물리고 있다. 대체로 정치를 하는 자가 관리를
옳게 선발하지 못하여 자주 갈리기 쉽게 하였으니 그것이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이 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생각지는 않고 도리어 둘러대기를 "고을 백성이 불행하여 거듭 곤란을 겪게
만들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백성의 윗사람 된 자의 말이라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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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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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費一以經稅 其行用如今大同制. 斷今科外之賦. 一以經稅之入 制爲百用之式. 凡今貢物 進上 凡百調度及州縣各項支用 皆入經稅中 以至人夫刷馬 盡入其中 不復一毫別徵於民. 其爲制 因今大同事目
而變通其未盡者 皆一一明定條式 通國均行 使邑不殊制 民無雜役. ○此只是經稅經用 本不必擧論大同字 而今國制 田稅盡輸於京 而別有貢物進上. 又外官之廩 不入經稅 而別自官捧 凡有事爲 皆別定於民
故未免有稅外之斂 科外之賦. 至其弊也 雜役漸重. 因爲常賦 四方苦歇 亦甚不一. 近世有欲量其需費 通均出米 自公家定用制式之議. 是以今凡百費用 自公有定支 凡百力役 自公給其直 而不復別調民役者
稱爲大同法. 今若只謂經稅經費 而不言大同 則人或不察 徒知經稅之充於常計 而凡有事爲 別爲調役 則將復有稅外之歛矣. 故擧今俗稱以明之. 但今之大同 是量出爲入之規而此乃量入爲出之制也. 然
所收有定制 而不復種種調斂則同也 ○唯濟州 田稅不漕京 定以土貢. 但今之貢物 太煩重 宜酌其稅入(此除其本處廩祿ㆍ軍資ㆍ諸色經費而計) 以定數 其進上亦酌宜省定 以禮貢獻 每歲一次. 唯橘柚之類
則以其成熟時 別貢亦定以一二次. 然皆自其牧官 均行此法 一依定式. 凡物 皆給價以備 勿別徵於民間. (其係工造者亦給工價.)各司該用諸物 皆量定其數 以今貢物數目 更爲酌量定數 其不切於國用者
則蠲除之. 旣定其數 逐司開某物若干某物若干 皆有籍案. ○凡祭享物品 亦明定其數. 今宗廟凡百瑣物 盡爲薦新 亦似煩屑. 如此等事 皆當酌合事宜 定其常式. ○其係御供進排者 悉移於司饔本司.
皆自京募定貿備主人 如今貢物主人 亦可稱爲主人. 以漕稅 優給其價 比常價 或倍或蓰豐凶永定 米錢參半 或布錢參半以定. 使其主人輩 知有一定之法 得以預爲周旋 懋遷有無 自食其利 而無闕所納 此外
凡物皆自京貿 一芥勿定於外方. 監司亦自營貿 勿定於各邑. 若或分定於外方 則雖會減其價 凡物價貴賤 有非遠地所懸斷 故主司例多折給廉價 而責其精美者. 且其點退之際 吏緣爲奸 千百其端 一弊之生
害歸萬民 當自朝廷先端其本 愼毋分定以爲列藩之則. 此若不除 是自賊其民 自病其國也.或者 以爲"本國異於中國 物貨不通 百物若自京貿 則雖優定其價 物貨終不湊集 各司未免臨用闕乏之患."此言似然
而實不然. 諸物之不自京貿 久矣. 若設行之初 則容或有此 不出二三年 浮言漸息 京外物貨 大開流行. 從前物貨之不行 正以其不用價貿故也. 我國道路阻隘 不似中國 而人之趨利避害之情
則天下無不同者. 旣優定其價 則利之所在 人必趨之 雖欲禁止 亦不可得也. 或者之言 斷不然也. 况今諸物 名雖貢納 其實備自本地者 百無一二 皆京人私徵價賂而自京防納矣 據此 尤斷其不然也.設令
有遠方之物 自京難辦貿者 則旣定京價 卽所給主人之價. 然後 以其數 準除所産官上納之稅 令本官 募定貿備之人 準給其價 仍令爲使 俗稱貢物父老 以納於該司 永定其人 永定其人 永定其價一如京例.
一路刷馬 則自當依例給之. ○設令 不得已有外定之物 當如此定式 而一物 不可分定於諸邑. ○卽今已行大同邑 若本地備納之物 則雖京司會減其價 每不時分定 而無永定之式. 本邑亦無永定其人其價之事
官自徵出 故例多責辦於民 民不見其價 終未免爲疊徵. 而其間 節節防索賄胳 不可勝言 必須如此而後 可祛民弊也. ○諸道進上監司亦自本營 依式貿備 不可分定於各邑. 設令 有不得已定於各邑者
則亦一如此例.任土作貢 雖稱古法 今之爲制 則未免生弊 莫如大同之均平無弊. 蓋貢物 縱使定之 一以土宜 京司分定於各邑 各邑分徵於各面民戶 名色不一 物品難齊. 於是 京吏刀蹬於邑吏 邑吏刀蹬於面差
面差刀蹬於齊民 節節衍數 節節索賂 節節增弊 其間奔走廢事者 幾人? 督迫捶撻者幾人? 往來糧賫 夫馬價費 又幾許耶? 是以 國家所捧 一物之微 而民間所費 萬倍其數 而億兆無不受其害矣. 況土産
昔有今無 或歲有得失 而未免有貿諸遠方之弊乎? 况今不問土産與否 田丁多少 而燕山荒淫之需 因循不改者乎? 况今 政委胥吏 而百事賄成者乎? 夫如是 故恣其溪壑之欲者 吏胥 而深受其害者 國與民也.
若如大同之法 則米數有定 民知一番均出而已 有何弊乎? 假使各司凡物 有加於所貢之數 而過給十倍之價 民之侵苦 則可減十之九矣. 蓋古者封建 則諸侯之國 不得不貢厥土宜. 非唯禮當如此 設令 所貢之物
有欠精美 不過責其主者之過而已 必不有點退之擧也 故能無弊及於民. 今則異於是 京中所用百物 皆定於外方 而辦出者民間 點退者京司也. 一番點退 其害無窮. 夫執點退之權 以臨有口無言之民
安能無次次刀蹬之弊乎? 此所以莫如大同之均平無弊也. 雖然 王者之取民 什一稅外 更無他斂 古者 方國所貢之物 亦是以什一稅 入市貿者也. 說詳呂東萊論 禹貢貢賦語.今之稅外有貢 本非古法
必以經稅之入 依今大同例定貿 然後乃爲盡善也. 任土作貢 雖曰古法 詳考古制 則有不如今之所謂者. 蓋古者畿內 則有米粟之輸 而無貢 畿外諸侯 乃有貢. 而所貢之物 亦自其國 以什一稅 入貿備以貢
民之所出 則只是田稅而已. 今則旣有田稅 又有貢物 而其所謂貢者 令逐郡逐縣 皆供百物 而別徵以納. 爲法如此 則安得不弊? 此所以名同 而實則異也.○御需定其常數 每歲 以漕稅畫入
以古者國君十卿祿之制 準定其數. 以其數內 量支司饔ㆍ尙衣兩院諸需磨鍊 而其餘亦有常數. 此則以爲宮中之需如此 而內需司 則直當罷之.御供所需 該司一衙門 專掌其事. 罷今各司逐日進排之規.
司饔院專掌其事 依中朝制 酌量一歲御供支用之物. 凡物 皆倍蓰其價 以本院所藏御需米錢 給定主人 如今貢物主人之爲 而直納本院. 如醬酢酒醢之類 則自本院 精造藏貯以用 各有主者ㆍ次知 當該官員
監飪以進. 詳官制職掌條. 凡供上宣飯饌品器數 皆當酌量舊例 定其常式.按古者 國君十卿祿 而君及后夫人 其裘服之費 從御之養 凡百宮中之需 無一不入於其中矣. 以今而酌古意 則宦官ㆍ別監之類
當別有其祿 若侍女則當入於此數內也. 宮女廩料 定以月二斛 而減折依常 準給冬夏衣資爲當. 若有職者 則自當有加也. 又侍女 當酌定其數. 此古者 所以侍女皆有定數
而不至於無節者也.世子殿則當別爲磨鍊 定以五分御需之一.諸王子ㆍ王女 旣長出閤 則亦皆有本祿.按古者 天子之太子 食采百里 與諸侯封同 則世子殿 以五分之一爲定 似爲優贍.大妃殿 當別爲磨鍊 定以六分
御需之一.大妃殿侍女之祿 亦入於此數內. ○此當磨鍊時 別以此數 添合於御需數也. 非謂分異各供也.先王後宮 則當別有其祿. 以其品秩 酌宜定式. 旣別受祿 則其宮奴婢等衣食 自以其內給之.
○按此御需條 若旣定其數 則亦當具載祿制篇之首.揆以事理 國君后妃後宮 則當入御需內. 若大妃 則當別爲磨鍊 至於先王後宮 亦當別有其祿也. 或曰"聖王之制 自天子 以至庶民 所養各有其分
於其上下差等之定 己無不各極其當矣. 卿大夫有親者 自以其祿養之 而國君則別定母后之俸 無乃近於後世抑臣謟君之爲 而未合於聖王至公之制耶?"曰恐不可以此而論. 若以一國君民 事先王如在之意 推之
則當如此也.謹按自古 人君未嘗不欲其國之治 而治少亂多者 何也? 先爲非法之制 以率一國故也. 至若我國 則自昔僻陋 凡制度規爲 初失其當者多 又非中國比矣. 今若一擧古法 定爲經制 則不唯御用至贍
御膳至精 在前諸弊 皆自蠲除 而冗司可合 冗官可省 內需私財亦可以罷. 誠如是 則可以蘇萬民之病 可以服天下之心 可以國富而兵强 可以成敎化而致太平矣. 聖王承天之政 莫此爲急 忠臣愛君之道
莫此爲實.○各道所獻 正其禮貢 改今進上之規. 簡其土宜 合於享上者 餘悉蠲除. 凡物皆酌定數目 罷今逐月進上之弊. 每歲一次於正朝拜箋時 以禮貢獻. 然其措備也 各物依京定價(卽各司所給主人之價)
會減本處經費.(外方經費 皆其留稅.) 自監營 定貿備人 準給其價 其有用工者 則亦依式給價(規制詳工匠條.) 監司親監封褁. (宜令貿備者 仍爲陪持人 其一路亦以刷馬 自當依常例給價.)
如此而勿爲分定於各邑. 兵水使 則無貢獻. ○古者 諸侯禮獻以其國之所有 天子有辭讓 而無徵求此蓋至義也. 凡諸道貢獻之物 監司敬備禮獻 朝廷亦受之以禮. 設或欠精 但當讁其道主之不謹而已
不可點退其物也.貢獻物獻受之節 亦當正其儀式. 唐元朝儀 亦有可取者 參取以定. 當於元朝 百官將朝 承旨先以諸道箋文 別爲一按 俟於承政院. 禮曹以諸道貢獻物使者 卽陪箋差使員. 執其可執者
餘則使人 皆陳於朝堂前. 使者就位 百官旣朝拜 承旨前跪 啓箋文. 禮曹堂上進跪 啓稱諸道貢物 請付該司. 承旨前承敎 退稱敎曰'可'禮曹郎官 受而出門 執物者隨之. 及百官禮畢罷出 禮曹退
以貢物取旨以處 其當用於祭享賓客供上之類 各分付所司 其當內入者內入 其可付戶曹者 則付於戶曹 皆禀旨以處. 如此爲當.栗谷告于宣祖曰 "今之所謂進上者 非必盡合於上供也. 細瑣之物 莫不畢獻
水陸之産 搜括無餘 而眞擇其可進于御膳者 則亦無幾焉. 古之聖人 以一人治天下 不以天下奉一人 雖使進獻之物 一一皆合上供 亦當減省 以舒民力. 况以不急之需 殘傷百姓者乎?"按王者之制 貢獻
下供以義 上受以禮. 苟以禮義 則事皆當理 寧有弊乎? 唯其失於禮義 故有不可勝言之弊. 今之所謂諸道進上者 多是羞膳之物 而名色甚繁 細瑣無遺 逐月封進 月或再三次. 京畿則逐日封進
此則亦非國初所有 始於中葉云. 監司有不能親監 初以諸邑守令 代監以封 守令亦不能盡監 今則以京畿六察訪 輪代. 皆於常稅之外 分徵列邑 列邑又徵斂於民間 其間階階容剩 節節增弊 已不可言
而及其封而進之也 則徒然以納於色司 任其吏胥之操弄 吏胥因以藉重而索賂者 莫如進上之甚. 是以 今收斂進上物 必先斂人情布 輸載進上物 必先載人情布. 俗諺曰"進上貫於炙串 則人情滿於駄載."據此
亦可知其弊矣. 甚非所以以義供上 以禮受下之意. 且其名色旣繁 而不揀生濕 無問寒暑 褁絮照氷 駄運千里 一箇無味之物 人主未嘗一經眼前者 是亦破千家之産 貽萬民之害 而致之者也. 誠使人主
一覩其督迫窮閭 捶繫男婦 凍暍道路 愁嗟無告之狀 則雖甚合御之物 亦必惕然 而不忍下咽矣. 而况腥臭之物 人所易厭 無益於口腹 而殘傷萬民者耶? 此不難知 而只爲人主 坐於深宮細氈之上 以爲我是人主
豈計其弊? 而容悅面諛之臣 自以是 爲愛君莫己若. 而一有言及病國喪德者 則指以爲不敬君上也. 此所以害遍區域 而未有已也. 古之帝王 恒以國家 之未治 爲己憂 而不敢以口腹 令於天下 其於此意
又何如也? 雖然 是亦我國規制 有所未立而然也. 中國之制 御供有專任之司 而供上之物 皆以常稅之入 貿備以用 未聞有外方進上也. 古之王者 膳御所需 旣付有司 惟正之供 而未嘗以足 令於天下.
三代姑未論 漢唐以來 亦皆立所司 付以常稅之入 以專供上之事 元無進上之規. 是以 歷代史記 未嘗有進上二字. 雖以唐德宗之私己好斂 史譏其宣索私獻 而其所獻者 亦不過貨帛而已. 至於月進魚膳之物
則未之見也. 以至皇朝 其制尤詳 以稅入銀錢 畫付光祿寺 凡進供之物 皆貿買而用之 亦無各省進上之事. 是以 中國四方之民 晏然安業 而百物無不湊集於京都 京師日以殷富 御供亦極豐潔. 我國則御需
未有常稅之用 御供亦無專任之司 內則各司逐日進排 今各司貢物 爲御供者 過三之二. 而外令各道 逐月進上 夫輸驛傳 四方凋弊. 本國御供之規 旣無常稅之畫入 又無設官之專任者 逐日進排 故內而各司
爲御供設立者甚多. 逐月進上 故外而各官 爲進上奔走者 無數. 國家萬事 其係御供進上者 蓋十八九矣. 事煩弊極 民不堪命 蓋其流弊 自前代而然. 通典記 高句麗役屬沃沮 責出海中魚鹽食物
千里擔負致之. 此亦可以見其俗矣. 蓋中國則其初經聖王經制 故雖當汙濁之世 猶有可言者. 本國則其初 只是夷裔之習 故雖以本朝之洗新 前陋尙有未盡變者矣. 是二者 雖同出民力 常稅亦是民力所出.
而彼以事宜而立制 故德政自著 萬民安業 無一有弊 而卒至御供 亦極豐潔. 此以己私而爲令 故口腹爲主 萬弊俱生 國病民疲 而卒至御供 亦不精適. 今進上物膳 名雖大 只取其外 實無精美者. 其效驗
得失之歸 相去不啻天壤 爲人上者 可不省惕 而思改哉? 誠依古制 以經稅畫定御需之數 又令御供一司 專掌供上之事 一如中朝 而凡今進上日用 煩瑣之物 悉皆滌除. 但其眞合貢獻者 定其常數 每歲一次
以禮貢獻. 如後世諸名節 本是不經者. 凡貢獻亦當獻御前一位 今之分獻諸殿 本非是. 朝廷 亦受之以禮 則庶幾近於古禮 治道立 而萬事得. 太平之基 其在此矣 豈不休哉?○京中百官 以至吏胥僕隸
皆給常祿. 今 百官祿俸至薄 一品歲俸六十石 至九品則僅十二石 不能自給 例受外方餽遺 名曰進奉. 唯居淸要者 得之 其餘則不得焉. 又各司該用餘物 皆私分諸官 名曰分兒. 吏胥祿則或有或無
諸司不同. 其有者 或以價布或米 月六斗. 奴隸則擧無其廩 故吏隸 皆待漁奪以爲生事. 旣如此 其弊害所至 有不可勝言者. 當參酌古意 自大官以下 以至吏胥僕隸 皆定給常祿 以漕稅頒給 其數見祿制.
常祿旣皆足以爲資 則凡今進奉分兒之類 皆當禁斷 吏輩漁奪納賂之習 一切痛革.自卿大夫 以至庶人 在官者 廩祿各有其分 貴者 足以奉祭祀周親戚 賤者足以養父母育妻子 皆一於常祿而已 豈常祿之外
更令有需索乎? 夫大夫門 絶束脩之餽 古之常制也. 大夫如是 則胥吏索賂之弊 自當革矣.各司 皆定給公廨所需 斷今誅求之弊. 大小各司 皆當定給. 公事紙札ㆍ鋪陳ㆍ燈燭ㆍ柴炭ㆍ炬等 皆酌量容入
折米定數. (柴則只以上直房計之.) 自漕稅 每歲孟春支下 各司自當以此爲用. (鋪陳之屬 則隨弊貿備 柴炬之屬 則募 定主人 如今貢物主人之爲.) 旣爲如此 則凡今上司 鋪陳諸物 求請外方等事
當先禁止. 凡詞訟作紙 禁受價布 依法典 以紙捧之 以爲其公事紙. 且今 外方公納田稅以下凡物 亦有作紙 尤極不當 此則宜悉革罷. 此外 各司柴炬燭等 苟且徵責之弊 幷宜一切痛革.
詳見祿制.按前代公廨田 蓋爲此等支費也.今各司右件所需 或有甚乏不足者 或有過濫應別人求者 蓋皆出於非理誅求. 若用米布衙門 則例以剩米 餘布辦之 卽加捧不會之數也. 有貢物衙門 則徵辦於貢物防納者
以其侵民食利也. 用刑衙門 則辦於使令 以其作弊受賄也. 分軍衙門 則辦於書員 以其侵軍有取也. 各直處房柴 則以其所配番軍 掠拔樵夫所擔而用之 弊習成規 觸處皆然. 如是 故守令拜辭時 則政院
輒稱筆債 而勒住守令 徵責布疋. 此皆因成舊例 爲官者 不復知其可怪焉.京中凡百支費 皆以經費 京中經費 皆其漕稅. 斷今支定外方之弊. 凡百支費 皆有其式出自經費. 如京刷馬人夫等事
亦自經費給價切勿分定外方.京中凡事 當自京調支 而今多出定外方. 如京刷馬人夫等事 亦例爲分定外方 其收賫 往來留待客地之間 其弊無窮 因以害及萬民. 毒民之甚 無過於此.詔使京中支待諸需
亦皆自京貿用 勿定外方. 凡公家所貿 皆優定其直 當同各司 諸物定價之例. (卽所給主人之價.) 如此然後 諸物爭輸 而不艱於貿備矣. 不然 或有闕事之患 且生弊民之端也. 大凡有司 徒知計出庫儲
費目前之小財 爲可吝惜 而不知分定外方 啓生民之大害 爲重傷邦本. 謀國者 必須知此意 愼勿與民爭利及分定外方也.○外方官員吏隸 亦皆定給常祿. 今外官 擧無常祿. 守令則科外斂民 以爲資
監司則食於各邑 兵水使 僉使 萬戶則放番軍收布 以爲資 察訪則斂於驛卒 以爲資. 是皆各自爲歛 多寡無節 至於吏胥僕隸 則八方擧無所食 各以所管漁奪 爲資 如京之爲 此所以一國生民 無處不罹害也.
當參酌古意 自大小官員 以至吏胥 僕隸 皆給常祿 以本處經費 會減以支其數. 見祿制. 旣爲如此 則從前諸弊 掃除革絶 其官需諸物 亦皆有定數 依式貿用 切勿分徵民間.栗谷曰"古之宰邑者 有常俸足食
而分其餘 以及親舊 視俸多少 以裁濶狹. 今也不然 守宰無常俸 官中斗米以上 皆爲國物 雖伯夷爲宰 不私用國物 則無以糊口 此國法之未備者也. 於是 君子 旣難於守法 而貪夫 踰越太甚 國賦之外
無名科斂 使民不堪 勢使然也."又曰 "今 百僚師師非度 吏胥緣文舞奸 以至一皁一隸 稍有所管 則輒事漁奪 此誠亂政亡國之痼弊也. 然 古者府史胥徒 皆有常祿 仰食於上. 今之吏胥 擧無廩俸 若不漁奪
無所資生 此亦國制之未備者. 吏胥之求賄 固當痛絶 而其代耕之資 不可不給."外方官司 皆定給公廨所需 公事紙札鋪陳之類. 及應用雜物價. 數見祿制. 以留稅支下. 下使客需亦然. 各邑
皆定給使客支需. 以大路 小路 酌其煩簡 定數支下 詳見祿制. 若詔使 朝京使 鄰國使 往鄰國使 別會減.外方凡百支費 皆以經費 外方經費 皆其留稅. 斷今徵責民間之弊. 凡百支費 皆有其式
出自經費. 常例外 如有應費 則皆會減以支. 如刷馬人夫等事 亦自經費給價 切勿分定民間. ○唯傳關等事 以閑戶 依式調役. ○凡刷馬駄載重. 凡一駄二百斤 (本當如此 然今秤 重且未行錢
今宜以百六十斤 爲定 以待正秤行錢.) 爲式懸秤秤給. 京外皆然.今 大同 刷馬價旣爲優定 而人不樂從者 爲官者 例重其卜 名以一駄 而實爲兩駄之卜故也. 於是 有勒簿村民有馬者 而抑載之. 其弊無窮
不可不明定其式 懸秤秤給.今 各邑傳關 例以未輸罰定 此則似亦無妨.今 大同事目 凡干雜役 皆入其中 而所謂虎贖米者 依前別徵於民戶. 蓋捉虎本出於爲民除害 而今 逐邑分定虎皮 或一邑二三 令歲有常期
督納其皮 以家戶徵出價米 各邑雖捉納虎豹 上司 亦多以小點退 故必徵其價焉. 求以除民害 而適所以害民也. 法之本意 果安在哉? 但令鄕里 各設機穽 務捉虎豹 使自爲利 勿收入官. 若兵使 守令
發軍圍捕者 則論賞其官(若非異常惡獸 則不可陞資 只賞給米布 與將士共之 可也.) 而納皮於公. 若有虎豹蹤跡 而鄕里不設機穽 官員不爲圍捕 則俱有重罰. 常時公用虎豹皮 則自該司 給價貿用
如此爲當.○右各樣支費 皆三分一以錢. 自御需以下官員ㆍ吏隸祿俸及凡百支費 皆然. 如米若干斛則二分米 一分錢. 綿布若干疋則二分綿布 一分錢 其收稅時 亦三分 一以錢. 此乃行錢後 能如是.如遇饑荒
則各樣支費 皆減十之二. 自御需以下官吏祿俸 及凡百支費 皆然. ○總計稅數 十損六以下 則論以饑荒. 州郡則通一邑而論. 監兵水營則通一道而論. 朝廷則通一國而論. ○若大無則量宜更減.京外大小支費
旣皆定有其制. 經稅外 不得一毫更徵於民 犯者 以枉法論. 科外徵斂者 固有其律矣. 又凡各官需諸物 旣皆優給其價 則爲官者 當體此意 使無傷於公私. 而今 或有出給廉價 勒定貿納者 故吏隸
未免索取民間 以充備 是侵徵吏隸以索民 而竊用其價也. 如是者 宜置重典.靜菴告于中宗曰"人能克己 則無私矣. 成宗朝 尙寬厚之政 至於奸贓之罪 亦或寬之 賄賂之行 蓋始於是時也. 在世宗朝
如萬戶等官 亦皆廉潔相尙 士習之邪正 治道之汚隆 因此可見也. 今世 此弊雖未至甚 須痛治之 少有所犯 使不得立朝 則人知所畏 而各自砥礪矣. 且如親戚 朋友互相贈遺者 雖非賄賂之比
然亦使之不得以私相干 則世道 自至於淸明矣."○本國之制 有稅有貢 而稅輕貢重. 然 在祖宗朝用度簡約 取民有節 燕山中年 用度侈張 常貢 不足以供其需. 於是 率意加定 以從其欲. 厥後 因循不改
繼以權奸當國 政以賄成 下吏執簿 防納刀蹬之弊 日滋月深 常稅漸輕 田結不明多漏落 故如此. 貢物漸重 凡有事爲 又多隨事分定. 於是 貢物雜役繁重 而民皆逃役 莫保其生. 在宣祖初 領相李浚慶
議革其弊 而不得行. 其後 贊成李珥 累建白 欲改貢案 竟未施行. 壬辰倭亂後 領相柳成龍 建議罷貢作米 自京貿用 壬癸兵亂 國家板蕩 調辦兵食 計無所出. 柳相 乃請變通 貢物收納以米 以救民病
兼補軍餉. 其疏曰"撥亂反正 雖在於足兵足食 而其要 尤在於得民. 得民心之本 不可以他求 惟當輕徭 薄賦而已. 國家田稅則輕於什一 稅外之事 如貢物 進上及各節方物 被侵之事甚多.
而其初磨鍊貢物之際 不以田結之數 均一平鋪各邑 多寡無準 故一結貢物之價 或有出米一斗二斗者 或有出米七八斗 或十斗者. 民役不均如此 加以往來道路之費 各司捧納之時 爲奸吏刀蹬操弄 出費百倍
入於公家者 僅十之一二 而其餘 皆歸於私門. 至於進上之弊 病民益甚 此亦當初制法則未必如此 而行之旣久 人僞滋勝 弊端萬千. 今若卽未變通 則民生更無蘇息之望 而國計無儲畜之路. 臣常以爲
貢物則當以一道貢物元數 總計幾許 而又計道內田結之數 參詳畫一 衰多益寡 勿論大小邑 皆一樣磨鍊 如甲邑一結出一斗 則乙邑丙邑 亦出一斗. 出二斗 則亦皆出二斗. 如此 則民力均平 而所出如一矣.
方物之價 亦依此均布. 或米或豆 以其一年 一道所出方物之數 從田結 均定所納. 每結 不過出升合之微 而民不知有方物矣. 其進上亦然 皆以米豆出價 諸條所收 全羅道則納于羣山法聖倉.
忠淸道則納于牙山及可興倉. 江原道納于興元倉. 黃海道納于金谷 助邑倉. 慶尙道則待本道蘇復間 納于本道 以爲軍食. 咸鏡ㆍ平安道則留貯本道 而其五道米豆 皆令輸到京倉. 各司貢物 及方物進上
計物定價 如濟用監進獻苧布價木之例 使有司貿用. 而若軍資不足 及國家別有調度之事 則貢物進上量數裁減 而米豆之藏在庫中者 不煩換作 而取之有裕矣"又曰"臣聞皇朝 無外方進上之事. 只以十三省收銀
付光祿寺 凡進供之物 皆貿買而用之. 若有別用之事 則以特命 減膳而用其價銀 故遠地之民 不知有輦載輸運之勞 而四方工匠百物 無不湊集於京都 如探淵海 求無不得 而京師 日以殷富 田野之民 晏然安業.
此其立法之善 我國所當取法也."於是 令進上及他事皆仍舊 而只改貢物 作米以納 自京貿用. 不久還罷. 光海嗣位之初 戶曹參議韓百謙 上疏曰"我國貢物之弊 人皆曰國家存亡 實繫於此 殿下亦豈不聞?
夫任土之貢 當初皆有條理 不但爲今日之病民而已也. 行之旣久 節節生弊 一卷之紙 十金猶不足供 一張之皮 十牛猶不得償 直到今日已成膏盲. 苟不及此時 變而通之 則土崩瓦解之勢 行將立至.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往在乙未年間 相臣柳成龍 深知其弊 罷貢作米 該用雜物 皆從市直 貿易用之 以其餘 補軍資. 其意非不善 而其法 有未盡善. 怨者多 而悅者少 終至於不旋踵而還罷. 有此機會
而不得更張 至今 爲生民之病 臣竊痛焉. 其法 通八道 無論遠近 每田一結 出米二斗 輸納于京 大小土貢 一切停罷焉. 夫沿海之邑 自以其地 載船上納 則二斗之米 豈不爲輕乎? 若如山郡遠水之地
則轉輸出浦之費 三倍本數. 於是乎 山郡之民怨焉. 該用之物 本曹親行買賣 有同商賈 以減削其價 爲能事. 於是乎 市廛之民怨焉. 當其時 還都未久 物貨未集 如有不時之需 市廛所不可得
則不得已別定於外方 民有疊徵之怨. 吏無信法之意 相與共起 而稱不便. 防納無所售其利 吏胥無所容其奸投間抵隙 必欲壞其法而後已. 聽者不察 從而尤之 遂眞以爲作米之害 甚於貢物之弊. 而緩急之用
或賴防納之徒 任其奸濫 無所制限. 噫! 牟利溪壑之欲 亦何有紀極哉? 皮盡而毛無所附 不幸而近之也. 蓋其時 當事者之意 專在於多取贏餘 以補軍餉 而於調均民役之事 不甚留意 此所以左右牽掣
終至於不可行也. 今若取其意 而反其事 略以出浦遠近 差等作米 不必以二斗爲拘 距海二日程以上則又準米作布 輕重苦歇 彼此如一 則何所? 凡物 皆給優價 比之市直 或倍或蓰 豐不增 凶不減 使防納之輩
知有一定之法 得以周旋其間 貿遷有無 自食其利 則何所不悅? 其中或祭享所用 尙方所需 有難於自京募納 則量除所産官 作米或布之數 以本色上納 則其伸縮裁量 只在一有司能事. 而民役恰好調均
可免低昂苦歇之弊 有何不便之事? 亦何不可行之有哉?"事下廟堂 領相李元翼 因以詳定條式 建設大同廳 卽宣惠廳. 先試京畿. 其法 每一結勿論上中下年 收米十六斗 分春秋兩等收. 輸納于京. 凡貢物
進上 及本邑衙祿 京刷馬之類 盡入其中. 至今 畿民之稍得保存者 賴此. 前但貢物價 故一結二斗 此則貢物進上 一應雜役 皆入其中 故十六斗. 孝宗初 左相金堉 又建議請行大同法 朝議多有異同
但行於忠淸道. 其法 大槩同宣惠之規 而其間條目添定者 頗多. 今有堉所定大同事目一卷 其節目未盡者亦多. 每一結收米十斗 此外不得更有徵斂 民甚便之. 末年 堉又請推行於全羅道 朝臣多不欲者
但行於沿海邑 其餘則尙不得行. 全羅道則每一結 收米十三斗. 此 今日大同法之始末也. 忠淸ㆍ全羅每結收米 有多少者 此不能均行於通國而從前 各道貢物 有輕重故也. 京畿 則田結尤多漏落
故出米尤重.所謂大同法 與卽今賦役之規 語其不同之大槩 則計其所需 定數收米 而自朝家 制其費者 大同之法也. 原賦反輕 而逐事斂民 無定限者 卽今之規也. 今 田政蕩然 萬結之地 任其 書員輩
恣意偸脫 而爲守令者 又例爲私隱 俗稱隱結 蓋當初田制不明 國家難以覈實 故汚吏或有如此者. 旣國家出役 無常制則有隱結 私自分徵. 然後民得少寬 故雖稱良吏者 亦未免此. 常科所收 則未滿千結之稅
而凡有事爲 皆別調於民. 如今日有容費百疋之事 則以百疋 率意分定於各道 不必一一計據田結 遇事輒率意分定 以故輕重無準 四方苦歇 例多懸絶者. 各道 又率意分定於列邑 列邑 又爲分徵於萬民.
自朝家而各道 自各道而列邑 自列邑而戶主 自戶主而田夫 其間 階階增剩 節節行奸 其弊萬端. 所以 階階增數者 凡物所分定 無常數 無常式 民不知其本數 故貪猾乘間 任意濫徵 又次次輸納之際 必有餘剩
然後可以待揀退 備耗欠 故雖非貪猾 亦不得不加剩. 事旣如此 則節節皆有容奸之地 此所以奸濫漸滋 遂生無限弊端也. 總計萬民所費 則不下數十萬疋. 一事之微 而八方萬民 無不被其擾. 八方戶主
無不奔走. 各邑官吏 無不往來 其文書之煩 催驅之擾 賄賂之廣 有不可勝言. 而及其終也 朝家所需 止是百疋之布耳. 一事如此 他事又如此 今日如此 明日又如此. 是以 百姓無寧息之日 因而人心日亂
奸弊日甚. 是以 官員祿俸至薄 而官員所資 多賴於憑公營私之物. 吏胥皆無廩給 而吏胥所食 盡在於行奸索賂之中. 是以 自官員 以至吏胥 廉簡者 貧不自存 貪鄙者 日漸富饒. 最廉簡 則尤不勝 其窮
最貪鄙 則尤富厚厭足. 是以 鄙夫爲守令者之恒言曰"不願居官六載 但願一待勑使."風俗之如此 法制使然也. 其害至此 而欲行大同 卽今大同之規 亦是量出爲入 且多未盡者. 然其取於民 猶有定制.
則滿朝官吏皆曰"大同不可爲也."欲行量田 則皆曰 "量田不當爲也."嗚呼! 不願朝家取民之有定制 而但願其無定數者 非迷惑無識 則其不義 負國也. 甚矣! 彼胥徒賤隸 防納 牟利之輩 卽何足誅焉?
某人爲 監司 某人爲守令 嘗陽作公議 以沮大同者也. 及聞其私語 則監司曰"君邑大同之不行 吾之德也."守令曰"下邑大同之不行 使道之德也. 若行大同 守令無所 措手足矣. "噫! 所謂措手足者
未知其意 在於爲國家生民乎? 在於爲營私任欲乎? 果在於爲國家生民也 則國有常斂 官有常祿 固是守令之大願也. 政敎軍民 皆所當盡力處 安在其無措手足乎? 果在於營私任欲也則是民之蟊賤(賊)也.
鄙夫爲肥己 而幸國家之無法者 與奸臣爲圖利 而喜國家之有亂者 何異哉? 王法之不容貸者也. 雖然 彼亦素稱名士 而亦有時望者也. 世衰道微 士大夫陷溺其心久矣. 故於凡事 常喜彼而惡此
在彼而不在此也. 孟子論井田之制而曰"諸侯 惡其害己也 而皆去其籍."又曰"暴君汚吏 必慢其經界."此可見義利公私之分 每每相反也.或曰"此所定法 乃經稅制用之式 固爲至矣. 但百官廩祿 皆加 於今
京外吏隸 皆有其祿 凡百支用 皆出經費 則民之賦稅 不已重乎?"曰今 百官祿薄 吏隸無料 而率多安居侈靡者 是果自耕而食乎? 凡天下有所資者 莫非出於民也. 但爲上者 有以制 其條理 則事得宜
而各安其分 故賦稅均 而民和國治. 不然 則事無紀 而爭興偸濫 故徵斂重 而民困國亂. 雖是皆出於民 而兩端得失之歸 遠矣. 且夫君臣者 本爲理民而設 吏隸者 本爲承事而置 故皆得食於民.
若度民而立官 度事而定吏 則何患乎廩不足? 爲其所當爲 而量入爲出 則何患乎用有乏乎? 是以 君子之治天下國家也 明德謹法 正其事而不近小利. 彼務苟簡長奸弊 而曰"我不斂於民"者 闇孰甚焉?
事有近苟 而害不歸於百姓者 天下無是理也. 此萬折必東之勢也.○赴京使臣 定其資給 罷今求請之弊. 今赴京使臣 朝家未有資給之事 令自 爲求請於八道列邑. 故監 兵水使 守令 視其情之厚薄
勢之輕重而任意輸送雜物 多少無定 皆拮据 科外 浚削民膏 而其夫馬 轉輸之勞 遍於八方 非唯弊之巨者 亦事甚無理 宜令該曹 定數資給 而一切痛革其弊.衣資 上副使 各公服次一襲. 書狀官同.
但各從其品所服. 紬八疋 書狀 六疋. ○夏則減紬半 代以白苧. 綿布 六升. 下同. 六疋 夏則減半 代以正布. 私從衣資 亦在此內 下並同. 米二十斛.書狀十五斛. 軍官ㆍ醫官ㆍ譯官 各紬四疋
夏則減半 代以白布. 綿布六疋 米八斛.路費 亦名盤纏 銀一百兩 壯紙五十卷 白紙一百卷 扇子三百柄 黃筆三百柄 大小各半 墨亦同.眞墨三百丁. 此乃一行 所資. 若使臣分出爲用 則上使四分 副使三分
書狀二分. ○使臣之行 官騎官食 越境以後 亦廩饋有常 本無別項所需. 而但萬里之行 微瑣要須 亦不可全無所資. 至於紙筆之類 則不過用於道路. 顔面亦係私事 本不當自公有給 而旣 不免有所逢着
則似難全無人事. 故有此特給 皆所以優使臣也. 若夫賄賂商販之端 則朝家所當痛絶 豈復資而啓之乎? ○往日本及女眞使 衣資外 當無此. 若宜有之 則量爲減半 或三四分之一以定之. ○不虞之備
別褁銀百兩. 或量宜加減. ○此則不預常需. 以國事出疆 或慮有意外事 特齎別需 以備不虞也. 有則用 而歸告 無則不用.使臣所資 不自公給 而使之求請外方 初甚欠典. 今則自戶曹資給極多 今自該曹
給一行布紬ㆍ銀兩ㆍ紙ㆍ扇 以至豹皮ㆍ鹿皮ㆍ靑黍(鼠)皮ㆍ水▩皮ㆍ銀粧刀ㆍ錫粧刀ㆍ倭劍ㆍ枝三草ㆍ銀烟竹之類 其數極多. 蓋自亂後如此 而虜人誅求百端 王子權貴之奉使者 皆將賂行貨 漸漸增添而然云.
而猶求請不已. 蓋求請 旣有成例 故無人止之也. 或有因此圖富者 謬弊之害 士風之汚 一至此哉? 宜明加禁斷盡革其弊也. 故事求請 例是紙束 刀子ㆍ扇柄之屬而已. 近年以來 百弊俱極. 其無勢者所請
則或不如舊 而至於權貴所請 則百物並輸. 閫帥輩 至齎銀布 數逾四五百 非但外方 亦求於京兵衙門 而其大將輩 暗以軍資 貿銀以輸 亦如外藩之數 是以一番使行 率多致富 而到彼貨賂販市之弊
日漸加焉.或曰"若今事勢 則到彼誅求賂遺 已成習例 其操縱 非在我所能斷. 朝家雖有定式資給 勢不可以此周旋 奈何?"曰國家制式 乃萬世當行之法 豈但爲今日設也? 然今日 使人皆圖利自賂.
苟在我不自失 則彼雖虜人 亦知敬戢. 以使臣無私賂 而生釁加兵於國 此必無之理也. 設令不得不多賂 則當自朝家量其入 別有所給 尤不可使自求請於八方 以暗爍萬民之膏 而開賄門亂國法也.今
非但奉使者有求請 國家往往亦有求請之例.今國家有營造ㆍ進宴等事則例爲求請 爲國婚者 亦令求請. 夫王者 富有一國 經稅所入 本足以供百用 豈有求請於外藩之理? 以國家而求請 不可使聞於他邦. 此若不除
無望其正官邪也. 春秋書"天王來 求車求金."其爲戒 至深矣. 胡氏傳曰"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王者有求 下觀而化. 大夫必將有求 以利其家 士庶人必將有求 以利其身 不至於奪攘簒弑
則不厭矣."古之君人者 必昭儉德 以照臨百官 尊卑登降 各有度數 民志旣定 皆安其分 而無求 兵刑寢矣. 及侈心一動 莫爲防制 必至於亢. 不衷官失德廉恥道喪 寵賂日章 淪於危亡而後止也. 觀春秋所書
則知周室衰亂之由矣. 嗚呼惜乎! 無人以此 啓迪於君上 惕厲深省思所以興衰撥亂之道也.○詔使一路支待 專委當站邑 罷今列郡遙出之弊. 今 諸邑出站之弊 不可勝言 宜令直路邑支待. 若空站非其邑居者
則令傍近邑主之. 亦永定一邑 勿爲幷定. 又勿移易. 凡器用雜物 可預備者 皆須預備. 凡百支待所需 皆以經賦 計入會減. 使喚不足 則閑戶例役之外 役以站店 而準除其稅 又不足 則給價雇人.
凡當站邑漕稅 量爲留下不漕. ○非但客使 今本國使臣 亦例爲分排諸邑 而出站 尤當革罷此規. ○凡雇價 定以人日米五升 以錢準常式給之. 若有輸運者 則以刷馬 依例給價. (今大同刷馬價
每一站豐年則米三斗 平年二斗半 凶年二斗 當以錢 依平年準式 定之.)直路邑 旣優定吏隸 又加設站店 則當不至於雇人矣. 設若極其事而言之 則雇人不足 則雖役以其邑軍士 而計減其番 亦無妨.
不可謂使喚不足 而分排諸邑也. 本邑漕稅 量宜留下 必無不足之理矣. 設若極其事而言之 則盡數留下 或又移輸傍邑之稅 亦無妨. 不可謂支用不足 而分排諸邑也. 或曰"勑使支待 分定列邑久矣.
若使一邑當之 一邑物力 恐不能支. "曰凡物之入 皆以國計會減 若入百石 則減百石 若入千石 則減千石 唯其稱入而已. 物力何患不足乎? 曰"使喚恐不足."曰吏隸ㆍ閑戶之外 又有站店蠲稅 雇人立役之規
唯其量任而已 使喚何患不足乎? 直路之邑 旣除他役矣 旣優以財力矣 旣加定吏隸矣 旣加置站店矣 旣加置驛卒矣 勑使一行 不過四五十人 本無不足於支待之理. 况留其田稅 以至傍邑取足 而後已耶?
夫遠邑出站 其所分供 無過數人 而調發丁夫 斂合百物 遠輸二三日 或五六日程 官府廢事 邑境騷擾 萬民勞費 以至鷄犬 亦不寧居 凡其弊害 不可盡言. 本站一人之任 遠地則勞百人 而猶不及.
本站一石之需 遠地則費百石 而猶不足. 况其間貪官汚吏 乘時作奸者 又不啻千倍耶? 是以 出站十石之費 足破遠邑千人之産 出站十夫之役 足廢遠邑萬夫之事 國家減除路邑百石之稅 而不費各邑萬石之財
不勞各邑萬民之力 則其爲得失 果如何也? 今捨簡而取煩 去易而趨難 一遇客使 使擧國民庶 無不傾家破産 奔走東西. 使擧國官吏 無不廢務曠職 遑遑道路 此何爲者耶? 所當斷然定制 永罷此規
專委當站之邑也. 且今 非但客使 本國使臣之行 亦令遠邑出站 各分數人以供之 此尤與兒童之戱無異 當速改也. 蓋從前 每有一處些小事 無論遠近 輒令分定者 是亦不行大同之故也.嘗見砥平縣出站之事
砥平所分定 每家丁一二人 而本縣所收斂 牛一首 若廉官 則與他官幷力 只費一牛. 其不廉者 則來站一牛 去站又一牛 他物亦皆稱是. 獐三四首 鷄數百餘首 雉六七十首 以至鷄卵ㆍ油ㆍ蜜 一應魚物
一應蔬菜ㆍ鹽醬 一應果實 一應米麵 一應器用 以至草席ㆍ箕箒ㆍ鍋鼎 大瓠小瓠 凡百雜物 不論臨時用 與不用 無不廣備 牛載馬輸 數百里外 其數甚繁. 至於猪首 鋪陳 大小遮帳 方席 屛風等
則雖出自官中 而夫馬亦不少. 官員ㆍ人吏ㆍ奴婢ㆍ牛馬 糧資 又不可紀. 方其收斂鞭督遍境 十室九哭 及至站上 萬事齟齬 小不生事. 若或勑使 留京旬餘 則客於站上 夫馬不能久留 前來者還去 復調以往
代之糧資. 凡物不足 則又斂以往繼之. 是以百姓 無一人安坐者 千百弊害罔有其極. 貪官猾吏 因事作奸 尤不可勝言. 其弊如此 而卒之所辦者 乃家丁數人 半日之食耳. 若使直路本邑 加供此數人者
則不過略添其費 而有餘裕矣. 豈有此弊哉? 計今砥平萬民勞擾 耗費不啻千石. 若使直路本邑 當之 雖一一別辦 一一雇人 不過數石之費. 况合辦兼任 無大難易耶? 設令砥平 除出站而出米五六十石
代納直路邑田稅 則不唯直路邑民 驚喜過望 砥平之民 若解倒懸 其爲得失 據此可見矣.一度如此 雖一年兩三度 每度皆如此. 又站上所接假家 必先使邑民往造 雖是草家 遠造客地 其費百倍. 一過之後
還毁棄之 後復如之. 若使本邑當之 而堅造宇舍 則又豈有此弊哉. 若堅造瓦舍 則非唯永無此弊 亦足以壯道路之觀瞻 安行旅之止息也. 此站店之所以加設也. 只擧其一 則諸邑 從可知也. 近年 自宣惠廳
雖給諸物之價 而未救極弊者 以猶令出站故也. 莫如直罷之.上所論耗財勞民之弊 此猶其小者也. 古者列國 皆有行人ㆍ大行人之官 以掌賓客之政 治其登降揖讓之節 牲蒭委積之數. 至于王使 則雖使上卿監之
亦莫不有主其事者. 故能禮達如一 而事有始終. 越王句踐之事吳也 四封之內 使大夫種主之 四封之外 使范蠡主之. 二人者 各專其能 內外不相擾 故能有所立 而成其志也. 今也爲彼役國 不置主客之官
不定專站之制 一有客使 內則宰執 六曹百司之官 無不廢事聚待. 外則百邑守令 鄕官 吏隸 萬民 無不棄務奔疲 使擧國精神筯力 專奪於此 遑遑擾擾 不得開眼. 奚暇餘念及於職事乎? 此不待以兵
而其國可使自靡也. 天下休明之世 已非爲國之道. 况今含垢忍痛之日乎? 宜早定其制 永罷諸邑出站 而一委直路之邑. 內則定主客之官 可爲舘伴ㆍ遠接使者 宰執中擇定 定爲兼任. 凡所儐接 一委其人.
如此則主司路邑 專治策應之事 而朝廷百司 諸道百郡 自當各治其務 何遽至于遑遑哉?或以爲"本國待天子之使 極其豐謹 支供之物 厥數甚繁. 如値不時 雖以倍蓰之價 亦難及期貿得 非如本國常供物
各有主人預意貿備之比 必別賦於民 然後可無闕事之患."此甚不然. 蓋詔使時所需 其金綵等物 則本非民間所出. 民間所能出者 不過魚肉蔬果之類爾. 雖甚不時 苟是民間所有 則厚價之下 豈有不得之理?
設謂眞有厚價 而不能得者 則民間 尤無可得之路矣. 凡飮食之類 當致其可致者而已. 致其可致者 而饌品無不豐備矣. 窮極萬民 必求難致之物 以侈一日飫餘之饌 雖天子巡狩 必不使之如是
此豈體天子撫綏萬方之意 而禮待王人之道也哉? 而况詔使之行 自前支待 其入實不多 而有司指稱舊例 罄竭萬民 徵斂百物 盡歸於中間虛費耶?○外方新舊官迎送 改定其式 罷今本地夫馬之規.
守令ㆍ鎭將ㆍ敎官ㆍ察訪 赴任及去任 亦皆乘驛遞. 監兵水使都事虞候 今固乘驛矣. ○去任時 雖屬散亦給其馬匹從人. 數見郵驛條. ○本地下人 各其境上 備儀從迎送 不得過境. 唯吏隸三人 迎送至京.
(在鄕者 或除朝辭赴任及去任時 直還其家 則迎送至家.) ○凡京迎送下人都事虞候同守令 而監兵水使四人 判官丞鎭將敎官察訪皆二人. (此則非應入草料 人皆持粮以行. 蓋官吏皆有常祿.) 其踰數者
以枉法論. 本處主掌官吏 亦重論. ○其家屬則皆運以私人馬 但計程給路費. 赴任時 則自京給之 在鄕者 則自其所居官經費 會減給之. 去時則自本邑給之. 亦以本邑經費 會減. ○其本邑下人
亦迎送於境上. ○路費每一百里 未滿百里者 勿論. 百里外未滿二百里者 同百里論. 餘倣此. 府尹ㆍ都護府使 米三十斗. 府使 郡守 二十五斗. 縣令及判官 二十斗. 郡丞 縣丞 十五斗.
皆二分錢一分米支給 願純錢者亦聽. ○若遠地自京有難盡給 則量於中路邑(如西北則平壤ㆍ咸興之類.) 折關支給 後迴其關 會減可也. ○監兵水使鎭將敎官察訪 皆令挈家久任 則依此例. 監兵水使家屬
三十斗 僉使二十五斗 敎官萬戶二十斗 察訪十五斗.今 迎送之弊 不可勝言 調發人馬 奔走道路 千里之外 輦米齎饌 以至盤盂 百物無不駄載 留待客地 供饗以歸 此事勢之必不能者也. 責人以必不能
而視爲當然者 以本國之俗 徒恃上下之勢 而不念天民之苦故也. 是以一度迎送 而殘破民生者 不知其幾何矣. 夫馬往者 其留京遲速 不可預定 而留京苦費萬端 故必多價厚齎而往. 民間有收合
或至一結數匹布. 試以興德一縣言之 戶未滿千 而九年十遞 除官齎供需外 民結所出刷馬價 至七百餘同云. 民費如此 而朝家猶忽之者 常情不在目前 則例爲易言 而不深覈其實故也. 聞中國 赴外任者
率以鋪馬 而以私馬私人 運其家屬 邑人但迎送於境上云. 揆以事理 允爲至當. 或曰"家屬則固當運以私人馬 若守令盡乘驛遞 則驛路難支. 除極邊外 其餘守令則各以其本邑刷馬 的定其數 騎馬一匹駄馬二三匹
自經費會減給價 勿復徵責民間. 如此則如何?"曰若以本邑人馬 則沿路支供 亦在其中 此其事勢終必漸加 雖有的定公價 法難以行 民吏受害 不異今日 莫如純用驛遞也. 若夫各驛 則本爲道路而設
其馬田供需之類 亦當量此以優 唯在量定之如何. (若移各邑所費之半 給定各驛 則不啻優足矣.) 一分而待一行 二分而待二行 有何異乎? 大槩 以邑以驛 莫非民力 自公視之 則其實一也. 而彼此規畫之間
其便否得失之歸 相去遠矣.趙重峰東還封事曰"本國除拜 率皆苟充 抽東補西 朝授夕換 或有坐席之未煖者 絶簿盜財 祗陷於奸民之術. 迎新送舊 差發人馬奔走千里之外 以破殘民之産者 又中國所無之弊也.
中國爲官者 雖赴萬里之外 以私馬私人 運其家小 一馬一人 不煩官力. 所以弊不及民 而人全恒産也. 且今 新除之人 不合牧民 則速遞可也 而必於當行之日 乃始啓罷. 遠來官屬 稱貸月利 留待新官之發
則歸家賣田僕 償月利 而家已告絶矣. 一歲貶罷者 不止一二 而爲一官來迎者 不啻百人 則一年之中 以此失業者 幾百人哉? 此可謂細事 而莫之改乎?"又按改法定制 本無所難 但上之人 未之行耳
此所謂難也. 必不得已 仍今刷馬 則宜申定馬數大典"守令則依六品馬數 家屬則府州二十匹 都護府十七匹 郡以下十五匹."人隨馬數 當以此商量以定. 自經費給價可也. 如此 則雖未免許多遠方窮殘官屬
留京丐貸破産之事 田地之役 則不失定制矣. 卽今大同事目"秩滿守令刷馬 自大同給價."其數遞者 則謂爲邑民之不幸 而徵責民間. 夫爲政者 不擇官吏 而易於數遞 其負生民已多矣. 不此之思
卽復諉曰"邑民之不幸 而使之重困."是豈爲民上之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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