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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 국조(國朝) 명신들의 정치 폐단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國朝名臣論弊政諸條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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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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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국조(國朝) 명신들의 정치 폐단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國朝名臣論弊政諸條附)

율곡(栗谷)이 논하기를 "백성을 구제하는 방안은 폐단을 개혁하는 데 있다. 그런데 지금은 도망한 백성 하나만 있으면 반드시 그의 일족과 가까운 이웃 사람들을 대신 잡아내어 일족과
가까운 이웃 사람이 견디다 못하여 또 유리하게 되면 그들의 일족의 일족과 이웃의 이웃 사람에게 침탈하여, 한 사람이 도망친 후환이 천 호에까지 미쳐서 결국은 백성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 후라야 그만둔다. 이렇기 때문에 옛날 백 호 되던 마을이 지금 10호도 되지 못하며 지난해에 10호 되던 마을이 지금은 한 집도 없게 되어 어디를 가나 동리가 쓸쓸하고
사람 사는 집에는 연기를 볼 수가 없다. 만일 시급히 이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의 근본이 무너져서 나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폐단을 개혁하려면 전국 군,
읍에 명령을 내려 백성들의 인구 대장을 조사하고 만일 유망(流亡)하여 호가 없어진 것이 있으면 삭제해 버리고 일족이나 이웃 사람에게 대신 내놓게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나라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도망한 자 하나에만 국한되고 아직 유산되지 않은 백성은 안착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이 회복되어 유족하게 되고 호구가 번성하게 되면 지금 부족한
군액(軍額) 수도 얼마 안 가서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지금 군액 수에서 장부상에만 기재되고 실지에 빈 호로 있는 것이 절반이나 되는데 만약 당신의 말과 같이 한다면 목전의 여러 가지 수요에 응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니 어떻게 할 것인가?’ 한다. 시속배의 소견이란 일마다 모두 이러하니 이것이 바로 나라가 끝내 부강하게 되지 못한 원인이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상 곤란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보다 더 심하다. 만약 시급히 구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공허하게 될 것이니 나라가 공허하게 된 다음에 목전의 수요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이것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 귀결인
것이다. 군인의 수를 줄어들지 않게 하는 요체는 실제로 그 군인의 수가 있도록 하여 국가적 수요에 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실지에 없는 호에다 군인을 내라는 것은
단지 일을 침탈하여 군인을 대신하는 값으로 포를 징수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위급한 때를 당하여 군대를 소집하게 된다면 일족이 전부 창을 메고 나오지도 못할 것이며 대가로 받은
포로써 사람을 모집할 수도 없을 것이니 어찌 헛장부만 있는 것을 아껴서 백성으로 하여금 실제의 해독을 입게 할 것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망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마는
그 망한 나라 중에도 일족과 이웃 사람에게 대신 받아 내는 폐단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의 이 허수아비 법을 도대체 어느 때부터 만들어 시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는 참으로 만고에 없는 고통거리로서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할 일이다. 『서전』에 이르기를 ‘형벌은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고 상은 후대에까지 지속한다’고 하였다. 백성이
이산하는 것은 곤하고 지친 데서 나오는 것이니 응당 그들을 구제해서 살릴 대신에 도리어 독하고 악착스러운 법으로써 채 이산되지 않은 백성을 이산케 하니 이것이 어찌 어진
사람으로서의 차마 할 일인가?

혹자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이 옳으나 만약 간교한 백성들이 전부 병역을 도피하여 결국 한 사람도 병역에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다. 이것은 절대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대체로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고 일가를 버리고 유리하게 되는 것은 곤궁과 절박을 견디다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간교하다 하더라도 만일 일정한 직업이 있어서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누가 이산하여 고통받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므로 만일 일족과 이웃 사람에게 대신 받아 내는 폐단을 없애고 자기 일신의 병역만을 담당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자기 직업을 즐겨서 물불에서 벗어난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모두가 병역을 피할 리가 있겠는가? 이 법을 곧 개혁하려면 각 군, 읍에 명령을 내려 점차로
무직업자[閑丁]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군대의 부족한 수효를 보충하여 허투루 주워 모은 군대를 폐지하고 정규군으로 보충하며, 신설한 군대는 대전(大典)에 실려 있지 않은 것과
한역(閑役)의 적에 이름만 얹어 두고 국가에 하등의 이익도 되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군대를 보충케 하고 병조의 관리로 하여금 그 일을 전부 장악하여 실행케 하면 반드시
실지 숫자를 파악하게 될 것이니 군인 대장[軍籍]에 관한 기관을 따로 설치하지 않더라도 군인 대장이 다 완성될 것이다. 그런 후에 무직업자를 수색하여 잡으면 잡는 대로 보충하며
연말마다 군, 읍에서는 군인 대장을 병조에 올리고 예적(隸籍)은 해당 기관에 올려서 실지 있는 수만을 기록케 하고 헛이름을 전부 삭제해 버릴 것이다. 만일 무직업자를 잘 잡아내어
10호 이상 더 증가케 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새로 호수가 없어지고 군액 수가 줄어서 5호 이상에 달한 자는 처벌하되 혹 철직을 시키거나 혹 강직도 시키며 심한 자는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증감의 숫자가 상당히 많은 관리는 그가 정치를 어떻게 하였는지를 막론하고 3년 동안 호구를 늘리지 못하였다면 역시 논죄할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수령들이 법을
두려워하여 힘껏 백성을 잘 보아 주게 되어 10년을 지나지 않아서 백성의 생활은 부유해지고 군대의 수도 충당하게 될 것이다.

옛날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5천의 병졸로써 회계(會稽)에서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지극히 약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10년을 낳아 모으고 10년을 가르치고 훈련시킨
결과 마침내 나라를 부강케 하고 군대를 강화하여 강적을 멸하였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당당한 만승지국(萬乘之國)으로서 이제 만약 낳아 모으고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도리를 다한다면 어찌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부유해지지 않으며 풍속을 옳게 바꾸는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인가?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지금의 소위 모든 정군(正軍), 보솔(保率), 나장(羅將), 조례(皁隸)들과 모든 부역에 나오는 자들을 보면 그들이 장기간 번을 서거나 혹은 2번으로 나누거나
혹은 3번으로 갈라서거나 6∼7번까지 이르고 있는데 어떤 자는 착취와 학대를 견디다 못해서 도망하고 어떤 자는 조금 편안한 직업에 고착되어 살아가는 자도 있다. 모두 다 같은
백성인데 무슨 구별을 이렇게 두어서 근심과 즐거움을 다르게 할 것인가? 지금의 정책으로서는 대신과 해당 기관에서 그것을 계산해 보고 처단을 내리며 잘 절충하여 모든 병역을 번갈아
세워 서로 교대해서 쉬게 하고 누구에게나 너무 헐하거나 너무 괴로운 폐단이 없게 하면 도망했던 자가 도로 모이게 되고 백성들이 부역을 피하여 이산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 율곡이 또 말하기를 "권신과 간신들이 정치를 혼란케 한 이후로는 위에서나 아래에서 모두 뇌물만을 일삼기 때문에 벼슬도 뇌물이 아니면 올라가지 못하고 송사도 뇌물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며 죄도 뇌물이 아니면 면할 수가 없게 되어 모든 관리들이 못된 것을 본받고 이서(吏胥)들은 붓으로 꾀로 농간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모든 물품을 관부에 납부할 때에도 좋고
나쁜 것과 많고 적은 것을 불문하고 다만 뇌물이 많고 적은 정도에 따라 조례(皁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관할하는 일만 있으면 낚아 먹고 앗아 가기를 일삼고 있다. 이뿐
아니라 송사를 판결하는 중대한 일까지도 간활한 아전배들에게 맡겨 뇌물을 보아서 송사의 그르고 옳은 것을 제 마음대로 치혈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참으로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나라를 망치는 고질인 것이다. 지금 권신과 간신들이 없어지고 옳은 언론이 조금 서게 되어 정부에서도 낡은 폐습이 조금 개혁되었으나 이서배들의 농간은 전보다 더 심해졌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려면 여러 관속들을 엄격히 단속하고 탐오에 대한 법을 거듭 밝히며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아서 정부의 규율을 엄격히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서 근신하도록 한
연후에 남의 것을 낚아 먹고 뇌물 받는 폐습을 일체 금할 것이다. 은밀히 숨긴 것을 적발하여 그 실정을 알며 백성들로 하여금 신소하게 하여 그들의 원통한 일을 살펴 주되 만약
이서나 사령배들이 혹 뇌물을 받았거나 강탈한 일이 있어서 발각되면 포 1필 이상의 범죄를 범한 자는 전 가권을 이주시키는 법조에 의하여 모두 공허한 육진(六鎭) 지방으로 보내면
뇌물 짓을 하는 폐습이 일소될 뿐만 아니라 변경을 공고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이서배의 뇌물 받고 토색하는 짓은 물론 근절되겠지만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자료는 주어야 할 것이다. 옛날에는 관청의 서리 등에게 모두 경상적인 녹봉이 있어서 위로부터 받아먹었으나 오늘날의 이서들에게는 녹봉이 따로 없기 때문에
이렇게 낚아 먹고 침탈하지 않고는 기한(飢寒)을 면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이는 우리나라의 법제가 미비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율곡이 또 말하기를 "지금의 소위 진상(進上)이라고 하는 물건들은 전부가 모두 국왕의 수요에 적합한 것도 아니다. 세쇄한 물건을 다 바치며 수륙 산물을 남김없이 긁어 오지만
실제로 가려 보면 국왕의 식사에 갖출 만한 것은 거의 얼마 되지도 않는다. 옛날의 어진 임금은 한 사람으로써 천하를 다스렸으되 천하로써 한 사람을 봉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바치는 물건을 일일이 모두 국왕의 수요에 적합하게 하더라도 그것을 덜어서 백성의 생활이 펴이도록 해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긴요하지도 않은 수요물을 가지고 백성을 못살게 할 것인가?
이런 폐단을 개혁하려면 대신들과 해당 기관에 명령하여 진상의 명목을 검토하고 긴한 것과 헐한 것을 갈라내어 국왕의 수요에 꼭 필요한 것만을 두고 그 나머지 긴요하지 않은 물건은
모두 없애버릴 것이며 비록 국왕의 수요에 적합하더라도 수량이 너무 많은 것은 그 수량을 적당히 감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국왕의 백성 사랑하는 혜택이 아래까지 미칠 수 있으며
오직 적당한 공물만을 바치게 하였다는 미사가 주나라 때의 문왕만 못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만약 당신 말과 같으면 백성 사랑할 줄만 알고 국왕 받들 줄을 알지 못하니 신하로서의 정성이 아니다'라고 한다. 아! 한심한 일이다. 습속에 젖은 소견이란 일마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바로 위로 국왕의 성스러운 덕을 보좌해 드리지 못한 원인이다. 충신은 국왕을 사랑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큰 원칙으로써 할 것이며 세소한 정성으로써 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국가가 편안하고 민생이 부유하게 되면 우리 국왕이 얻는 바는 더 많아질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은 세소한 물건을 더 드리고 덜 드리는 것으로써 우리 국왕에게 이익이
되느니 손해가 되느니 하리요? 옛날 순(舜) 임금이 칠그릇을 만들 때에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충고한 일이 있었다. 이는 천자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당시에는 칠그릇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순 임금의 신하들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순 임금은 천하의 성군이 되었고 그 신하들은 천하의 어진 신하가
되었었다. 아! 한심한 일이다. 이런 일을 어찌 속류배들과 더불어 상의할 수 있겠는가? " 하였다.

○ 율곡이 또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방납(防納)을 엄격히 금해서 모든 공물은 백성으로 하여금 직접 관청에 바치게 하고 각 관청에서는 역시 국왕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였기
때문에 이서들의 속이는 바 되지 않았으며 강박하거나 하부와 상부가 서로 막히지 않아 백성들도 공물에 고통을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정치가 점차 부패해지면서 폐습이 날로 더해졌기
때문에 간사한 아전들이 사적으로 각종 물건을 준비해 놓고 관청과 개인을 농간하여 백성들이 관청에 직접 바치는 물건을 가로막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비록 좋은 물건을
바치더라도 그것을 억눌러서 받지 않고 반드시 자기가 준비했던 물건을 납부한 연후에 그 몇 배의 값을 토색하고 있으나 국법이 해이해져서 그것들을 금지하지 못한다. 이렇게 날이 오래
되고 보니 국가의 경비는 하나도 늘지 못하면서 백성만 못살게 되었다. 근래에 와서 이 폐단을 개혁하려고 하지마는 그것에 대처할 요령이 없이 다만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직접
바치라고만 하고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자체가 공물을 준비하지 않은 지가 벌써 오래 되었으므로 방납이 없어진다는 말을 들으면 물건을 갑자기 구득할 수가 없어서
도리어 비싼 값으로 이전에 방납해 주던 자들에게서 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자들은 물건을 깊이 감추어 놓고 몇 배의 가격을 강요하게 될 것이니 전날의 방납이라는
이름은 없어지더라도 방납의 실제 폐단은 이전보다 도리어 더 심해질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런 폐단을 개혁하려면 어떤 대책을 써야 할 것인가?' 한다.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일에 임해서 계획을 잘 세우고 때에 따라 적당하게 처리할 것이니 어찌
상례적으로 내려오는 방도에만 구애되겠는가? 내가 일찍이 해주에서 공물 바치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서는 매 밭 1결마다 쌀 1두씩을 받아서 관청이 물건을 구해 가지고 서울에 납부하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단지 쌀 1두 내는 것만 알 뿐이요 관청에서 강제로 징수하는 폐단을 알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백성을 구하는 좋은 법이라 할 것이다. 만약 이 법을
전국에 시행한다면 방납의 폐단이 곧 자연히 개혁될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군, 읍중에서 부유하기로는 해주만한 곳이 없는데 8도의 군, 읍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주를 본뜰 수가 있겠는가?’ 한다. 만일 이런 구법을 변경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대신과 각 기관으로 하여금 전국의 대장들을 갖다가 그 지방 인물의 정황과 전결(田結)의 다과와 물산의 다소를 알아서 그
지방의 공물을 다시 정하여 받거나 혹은 그 고을들의 고통과 헐한 것을 고르게 하며 국가에 그리 필요하지 않은 공물에 대해서는 참작하여 수량을 감해 버리되 8도의 군과 읍에서 바치는
공물이 반드시 모두 해주에서 전세 1결에 1두씩 받는 그것과 같게 한 다음에 그 법령으로 반포한다면 어찌 안 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 율곡이 또 선조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조종조 때에는 경비를 아주 절약해서 썼고 백성들로부터 받는 것도 심히 경하게 하였었는데, 연산군 중년에 경비를 방대하게 지출하여 경상적인
공물만으로는 수요에 응할 수가 없기 때문에 수량을 더 정해 받아서 그 욕망을 채웠습니다. 제가 전에 노인들에게 그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었는데 요전 승정원에 있으면서 호조의 공물
대장[貢案]을 가져다가 보니 제반 공물이 모두 홍치(弘治) 홍치(弘治): 중국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신유년에 수량을 더 정하여 받은 것으로서 지금도 그대로 준용하고 있습니다. 그때를 상고해 보면 바로 연산군 때였습니다. 저는 자신도 모르게 책을 덮고 탄식하기를 ‘홍치 신유년은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이어서 그 사이에 어진 임금이 왕위에 있지 않은 바도 아니었었는데 어찌 이런 법을 고치지 않았을까?’ 하였습니다. 또 그 원인을 연구해 본즉 그 후
70년간에는 권신과 간신들이 국권을 잡았기 때문에 2∼3명의 어진 사람들이 정부에 있었지마는 자기의 포부도 펴기 전에 꼭 기화(奇禍)를 당하고 말았으니 어느 겨를에 이것을
논의하였겠습니까? 그것은 오늘날 반드시 고쳐야 할 것입니다.

또 물산이란 때를 따라 변하기도 하는 것이며 민호와 물산과 전결(田結)은 수시로 증감되는 것입니다. 지금 각 고을에서 바치는 공물은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 많아서
엉터리없는 요구를 하기 때문에 다른 고을에 가서 사드리거나 혹은 서울에서 사서 바치므로 백성들의 비용이 백 배 더 들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쓰는 것도 넉넉지 못합니다. 게다가
민호(民戶)는 점차 줄어가고 전야는 점차 황폐해져서 이전에 백 명이 바치던 것을 작년에는 10명에게서 받아 내고 작년에 10명이 바치던 것을 금년에는 1명에게서 받아 내어 그
형세가 반드시 한 사람도 없게 된 후에야 끝날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공물법을 고치자는 말이 나오면 의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조종(祖宗)의 법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아무리 조종의 법이라도 백성이 이렇게 빈궁하게 된 바에는 고치지 않을 수 없거늘 하물며 연산군 때의 악법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혜로운 생각을 가지고
사리에 통달한 자를 택해서 그 일을 전담하게 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그 것을 지도하게 하여 연산군 때에 더 받았던 규정을 전부 없애 버리고 조종의 옛 법을 회복케 할 것이며, 이어
전국 각 읍의 물산의 유무와 전결의 다소와 민호의 다과를 상고해서 수량을 적당하게 정하여 일률적으로 고르게 한다면 백성의 생활이 거꾸로 매달린 것을 풀어놓은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율곡이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있을 때 장계(狀啓)를 올려 이르기를 “진상(進上)이 번중(煩重)해서 한 개 도(道)의 가난한 백성들이 날마다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아서도 그것을
바칠 수 없기 때문에 밭이 묵어도 김을 매지 못하며 집이 무너져도 수리하지 못하여 정처없이 유리걸식하고 있습니다. 만약 본 지방의 토산이 아닌 진상물을 바치게 되면 여러 집에서
없는 것을 긁어모아 멀리 다른 고을에 가서 사 오게 되므로 그 노력과 비용이 10배나 더 듭니다. 예로 어금니가 난 늙은 노루 같은 진상은 노루를 암만 많이 잡았더라도 어금니가
없거나 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잡기 위하여 사냥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그윽히 생각해 보았는데 만약 약으로 바치는 진상이라면 응당 의사(醫司)에게 바칠 것이며 사옹원에게
바칠 것이 아닙니다. 노루는 마찬가지인데 반드시 어금니가 있는 것이나 큰 것을 구하고 있으니 저는 참으로 그 이유를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또 사슴의 혀니 사슴의 꼬리니 하는 것도
본래 맛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수라상 음식으로 적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포나 돈을 가지고 서울에 가서 사는데 흔히 대신의 집에서 사게 되어 그 값이 비쌉니다. 더러는 이미
바쳤던 물건을 다시 사다가 도로 바치게 됩니다. 이것은 백성의 고혈을 짜서 대신에게 돈벌이하는 자금으로 대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을 생각하면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본 도는 서울까지 며칠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습니다. 더울 때에도 생물을 바치게 되는데 그것을 아침에 준비하여 저녁에 봉하더라도 봄과 여름에는 빛깔과 맛이 반드시 변하게
되므로 미리 빙고에 넣습니다. 그러나 날이 오래 걸려서야 도회지 관부에 보내기 때문에 처음 봉할 때에도 이미 맛이 변한 그것이 더군다나 수백 리를 지나서야 서울에 도달하게 되니 더
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혹자는 정성을 들이지 않아서 부패 방지를 잘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임시 창졸간에 준비할 수가 없는 것이니 형편상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대저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고 이어서 죄와 벌로써 들여대니 이것이 어찌 어진 임금의 정치라고 하겠습니까? 지난날에 봉진(封進)한 진상물에서 사고가 없었던 것은 사옹원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바친 데 불과할 뿐이며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진념하시고 높은 마음으로 과단을 내려 산 사슴과 설에 잡은
도야지[臘猪] 진상을 참작해서 감해 주신다면 5∼6마리만 감해 주더라도 성스러운 혜택이 백성에게 널리 미칠 것입니다. 어금니 난 노루, 큰 노루도 따로 그런 이름을 붙이지 말고 산
노루로만 하여 잡는 대로 바치게 하면 사냥하는 고통이 조금 덜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사슴의 혀와 사슴의 꼬리도 맛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서 모두 감해 주면 멀리까지 가서 비싼
값으로 사는 걱정이 조금 덜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본 도로 하여금 2월 이전과 10월 이후에는 생물을 바치게 하고 3월 이후와 9월 이전에는 본 도의 생물을 경기도의
건어물과 바꾸어 바치게 하면 진상하는 물품이 수라상 음식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군, 읍에서도 꼭 바쳐야 한다는 질책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의 몇 가지 일은 전하의 총명으로서
손대기가 쉬운 일이면서도 백성들에게는 뼈에 새길 은혜가 될 것이니 이것을 깊이 고려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 조중봉(趙重峯)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선조왕에게 상소하기를 "저는 그윽히 들으니 중국 정부에서는 국왕의 수라에 소요되는 비용이 모두 백성의 부세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은으로 받아서 상선감(尙膳監)에 맡기면 상선감의 태감(太監)이 매일 은을 가지고 시장에서 물선(物膳)을 사고 요리하는 것을 감독하여 올린다고 합니다. 대체로 중국과 같은 나라에는
인마(人馬)가 번성하고 겸하여 운하와 다른 수상 운수의 길이 있어서 산해진미를 능히 신선한 채로 가져다가 쓸 수 있지만 반드시 부세로 받은 은으로 시장에서 사서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 왕들의 마음이 만일 생물을 가져오게 한다면 천만 리 먼 길에 운반하는 수고가 운반하는 비용보다 배나 더 들고 은으로 계산하여 전하면 6백 마리의 말에 실어 옮길 것이
한 마리로 충분히 실을 수 있다고 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이 법이 일단 실행된 뒤에 백성들의 배나 더 내는 걱정이 없어지고 역들에서 무겁게 운반하는 고통이 없어져서
시장에는 온갖 물건이 구비되어 값에 따라 은을 정해 주기 때문에 국왕의 수라도 자연 모두 구비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국의 백성이 날로 부유해지고 나라가 태평하며 공고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우리나라의 백성들에게는 경상적인 공물 외에도 또 진상하는 물선을 사서 바치는 고통이 있기 때문에 백성이 빈궁해지고 원한이 극도에 이르게 되니 국가의 큰 걱정거리로 되는 것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세세한 일이라고 하여 경홀히 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폐단이라도 있으면 만민으로 하여금 안정되게 살 수 없도록 하니 무관심하게 앉아서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음식감[物膳]이란 이전에 나오던 것이 지금에 없기도 하는 것인데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일률로 내라고만 하니 겨우 아침 저녁만 먹고 사는 백성이
부족한 양식을 덜어서 멀리 며칠 거리나 되는 데까지 가서 값을 배나 더 주고 구하게 됩니다. 생선 한 마리 값이 본 고장에서 산다면 쌀 한 되에 불과한 것인데 먼 곳 사람이 와서
급하게 구하다 보니 반드시 4∼5두를 써야만 사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 비용은 품을 팔아서도 부족하면 부득이 밭을 저당 잡혀서 내는 형편입니다. 아무리 토산이라 하지마는 경주의
전어(錢魚)는 명주 1필로써 바꾸고 평양의 동수어(凍秀魚)는 정포(正布) 1필로써 바꾸고 있는바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물건 값으로서 이와 같은 것이 끝없이 많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운반할 때 바치는 아전배의 양식과 서울 아전에게 주는 뇌물이 하나같이 백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또 만약 엄동(嚴冬)이 아니면 얼음을 섞어서 무겁게 싣고 가게 되니 역마가 등이
벗어지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게 되면 농가의 소를 끌어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각 도의 각 역에서는 크고 작은 사신 행차와 왜국과 여진의 사신 내왕도 있어서 견딜 수가 없게 되므로
집은 열이면 아홉이 비게 되었으니 후일 국가에서 장차 어떻게 명령을 전달하겠습니까? ｢우공(禹貢)｣을 상고해 보면 청주, 서주, 형주, 양주는 모두 해변에서 가깝지만 청주만이
해산물을 바치고 양자강, 회하, 황하, 한수에도 생선이 있지 않은바 아니나 회하 지방에게만 생선을 바치라 하여 제물에 썼을 뿐이었습니다. 옛날의 성왕들은 이렇게 자기의
구복(口腹)을 위하여 천하의 백성을 병들게 하지 않았으니, 이것을 미루어 보면 먼 도(道)에서 진상물로 바치는 생선은 제사에 쓰는 것에만 한하여 받음으로써 굶주리는 백성과 없어지는
역(驛)을 회생시키는 것이 전하의 어진 정치를 실행함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할 일입니다.

경기도에서 진상하는 생선과 산 꿩도 그곳 백성의 큰 고통이 됩니다. 신(臣)이 옛날 노인에게 들었는데 실제로 국초에는 그렇게 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장헌대왕(莊憲大王): 조선의 제5대 왕 세종의 시호.

이 해변가의 백성 300호로 하여금 생선을 번갈아서 바치라 하였으되 세 철에 그치게 하였었는데 이때의 생선 값은 극히 큰 것이라야 쌀 1두를 넘지 않았다 합니다. 그러던 것이
강정대왕(康靖大王) 강정대왕(康靖大王): 조선 성종왕의 시호.

만년에 손순효(孫舜孝)가 경기 감사로 있을 때 마침 중국 사신이 왔었는데 오래 체류할까 염려해서 생선과 꿩을 백성에게서 많이 수렴하여 그를 접대하는 데 사용하려 하였다가 사신이
빨리 돌아가서 생선이 소용없게 되었기 때문에 날마다 수량을 계산하여 단자(單子)로써 사옹원에 보내었다 합니다. 그 생선이 없어질 만한데다가 손순효의 과만이 곧 다가오므로 생선을
자기가 갈 때까지 진상을 하겠다 생각하고 그냥 다시 백성으로부터 받아서 올렸는데, 손순효를 대신하여 온 감사도 손순효가 그렇게 하였으니 자기가 어찌 감히 폐하겠는가 하였는데 이것이
전례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생선 값이 점차 높아져서 혹 4결마다 한 마리 값씩을 내기로 정했으나 4결의 것으로써 구하기가 어려우면 8결에서 내기로 정하였으니 매
1결마다에 2두씩 내어 합계 16두의 쌀을 가지고서야 겨우 한 마리를 사게 됩니다. 네 곳 전[四殿]에 들이는 생선이 하루에 몇 마리인지 알 수 없으니 각 고을에서 바치는 것으로
매일 몇 16두가 소비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개 16두의 쌀이면 궁한 백성 8∼9명의 1개월간 식량이 됩니다. 1결에 2두씩 내는 것이 비록 적은 것 같지만 봄, 여름에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빌릴 곳조차 없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채근하여 내지 못하면 아전배가 얽어 매다 가두고 있습니다. 만일 벌거벗고 굶주린 농가집 부녀가 머리털을 쥐어뜯고 발을
구르며 통곡을 하면서 구하지 못하는 형편을 하소연하는 그런 정상을 위에서 본다면 인자한 마음을 가진 성주(聖主)로서 어찌 차마 이런 백성의 원한을 모아다가 앞에 잔뜩 벌여 놓을 수
있겠습니까? 비린내 나는 생선을 본래 즐기지도 않건마는 날마다 궁한 백성 수십 호의 반년 먹을 양식을 허비하니 이것은 결코 옛날 주나라의 문왕이 정당한 물건만을 바치게 했던 것과는
다릅니다. 원컨대 전하는 장헌대왕이 정했던 어부 300호만을 두고 손순효가 바치던 일체의 것을 폐지한다면 경기도의 백성이 조금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효종(孝宗) 황제가 즉위 초에 조서를 내려 날마다 수라에 쓰던 양 한 마리 닭 한 마리씩을 삭감하라 하였습니다. 대체로 양과 닭을 사용하는 것은 성화(成化) 성화(成化):
중국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이전까지 내려오던 규례였으나 효종의 마음에는 자기의 식사가 너무 사치함으로 인하여 늙고 병든 백성이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며 아들로서 이렇게 아버지의 법을
고친다 하여 불효까지는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국왕의 식사가 제도에 벗어난 것은 처음에 아첨하는 신하로 말미암아 시작되어 그 폐단이 백성에게 이렇게
미쳤거늘 하물며 연산군의 황음한 때에 더 배정하여 진상하던 물건을 그대로 받고 있겠습니까? 지난 가을에 이이(李珥)가 이를 개혁할 데 대하여 언급한 바 있었으나 윤허(允許)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진상의 폐단을 먼저 고치지 않고 수령들의 가렴만을 금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세를 경하게 받으라, 음식을 간소화하라는 등의 명령을 해마다
파발로 내리고 있지마는 백성들은 하등의 혜택도 입지 못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 조중봉의 상소에 또 이르기를 "제가 보건대 압록강 이서로부터 순천(順天)에 이르기까지 돌산이나 척박한 들판이 아니고는 경작하지 않는 땅이 한 군데도 없어서 촌(村), 둔(屯),
읍(邑), 이(里)마다 닭 소리, 개 소리가 서로 들리고 소, 말, 돼지, 양이 산야에 덮여 있으며 집집마다 자녀들이 떼를 이루고 저마다 자기 직분에 따라 편히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영평(永平) 영평(永平)： 지금 중국 천진으로부터 북경에로 가는 도중에 있는 지방.

과 계주(薊州)는 인가와 물산이 더욱 번성하며 통주(通州)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집집의 울타리와 담장들이 서로 잇닿아 있고 인마의 왕래가 번화합니다. 북방의 벌판은 본래 불모지로
불리어 왔지만 지금 이와 같이 된 것은 대개 중국의 정부가 국가의 근본을 공고화하려면 곧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을 깊이 고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백성을 평안히 살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철저히 실행해서 수령의 녹봉도 달마다 은으로 주어 시장의 물건을 사다 쓰게 하고 절대로 백성으로부터는 달걀 한 개, 포 한 자라도 받지 못하게 하며
농민들의 신역 외에는 일체 잡역을 시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비루하고 탐욕이 많은 수령이라도 감히 법을 위반하여 백성을 침탈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번성하고
토지가 개척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심하게도 우리나라는 양계(兩界)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옥야천리에 경작되지 않는 땅이 많고 옛날에 있던 민가가 지금은 풀밭으로 되었으며 소 한 마리, 말 한 마리 있는 집은 열에
하나 둘도 못되며 자녀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것도 보기에 심히 드무니 이것도 어찌 천지만물의 운수가 우리나라에게만 나쁘게 점지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대 우리나라에서는 폐단으로 된 정치가 오래 내려오고 가렴이 여러 가지로 많아져서 8결마다 매년 포 3필씩을 바치게 되고 봉족(奉足) 봉족(奉足)： 조선시대에 매 개 입대 군인에게
붙은 원호 책임 인원.

값으로 해마다 5필씩을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권농관, 이정(吏正), 크고 작은 통(統)의 통장이 한 달에 6회씩 그것을 점검하는데 혹 미처 하나라도 빠뜨린 것이 있으면 벌로서
포를 받으며 또 관속이 매일 한 번씩 조사하여 미처 빠뜨린 것이 있으면 또 벌로서 포를 받습니다. 일족에게 물리는 부역도 원근(遠近)과 친소(親踈)를 불문하고 3∼4인분의 값을
내게 되므로 베틀마저 그만 없어지게 되어 어른도 바지저고리를 입은 자가 적거든 어느 겨를에 어린애의 포대기를 생각하겠습니까? 이것이 백성이나 아이들이 얼어서 보존하기 어렵게 된
원인입니다.

관청에 내는 세와 개인에게 얻어 쓴 빚도 준비하기가 곤란한데다가 한 말의 세를 혹 너 말 내기도 하고, 본 고을 창고에 바치면 너 말인 세를 먼 곳에 운반하게 되어 원세보다 4배를
더하게 되며, 또 용정(舂正) 비용으로 해마다 8두를 내게 되고, 진상으로 올리는 꿩과 노루의 값으로 호마다 5두씩을 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병(甁)에 둔 곡식도 떨어져서 살아갈
수가 없으므로 소를 팔아서 먹더라도 계속할 수가 없게 되니, 이것이 백성과 어린아이들이 굶어서 보존하기 어렵게 된 원인입니다. 아! 소를 기르는 것은 봄에 밭갈이를 하려는 것인데
지금 그것을 팔아먹고, 자식을 기르는 것은 늙어서 덕을 볼려는 것인데 또 굶겨 죽이게까지 된 것입니다.

구제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어서 죽기를 원하는 그때에 또 도망한 군인과 노비의 가까운 이웃 사람이라 하여 모두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있으니, 이것이 좋은 전토를 경작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바가지를 들고 멀리 도망하는 원인입니다.

또 함경도 한 도에서 진상으로 바치는 대포(帒布)가 백 필 미만이나 그 도내의 관리들이 예사로 세포(細布) 1필씩을 더 받고 있습니다. 염분세(鹽盆稅)는 1년에 1석씩을 받으면
충분한데도 해마다 4석씩을 받고 또 장지(壯紙) 4권씩을 더 징수하기 때문에 소금 굽는 백성[鹽戶]들이 견딜 수가 없어서 염분을 그만둔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籍]의
이름에 의하여 세를 받고 있어서 조상 때부터 전해 오는 부담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 북도(北道)는 처음 신설할 때에 민가가 적고 산에 수목이 많아서 토산으로 초피(貂皮)가 나기 때문에 그것을 진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서(貂鼠)가 이미 없어져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공물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또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서울에 가서 비싼 값으로 사서 바치니 지방의 고통으로서 이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도에서도 이런 유의 민원(民怨)이 한량이 없을 것이니, 백성이 날마다 이산하게 되는 원인은 실로 이러한 몇 가지 폐단을 떨쳐 버리지 않는 데서 기인합니다. 진상을 올리는
폐단과 고을 관원의 가렴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백성들이 살 곳을 잃고 국가의 근본이 위태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위로부터 백성이 이산되고 국가가 보존할 수 없게 된 것을 참으로 안다면 먼저 긴요하지 않은 진상의 액수는 없애 버리고 연산군 때에 더 배정하여 받던 진상물 같은 것도 일체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 수령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것을 빙자하여 백성들에게 절대로 해독을 끼치지 못하도록 하며 경상적인 공물과 부세는 원 수량만을 받고 거듭 거두지 못하도록 하며
관청에서 쓸 물건이나 사신을 접대할 물품도 일정한 수량으로 받을 것을 규정하여 한 말의 쌀, 한 자의 포라도 백성으로부터 함부로 받지 못하게 하되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탐오죄로써 엄하게 징벌하거나 변경으로 정배를 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인구 증식에 대하여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여자가 장성해서도 시집보내지 않는 자는 벌을 주어서 홀로 사는 남자와
원한을 품은 여자가 없이 백년을 해로하면서 낳고 길러 각자가 편히 살게 되면 전국이 자연 공허한 곳이 없이 머지않아 부유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 조중봉이 또 상소하기를 "제가 듣건대 중국 정부에서는 중앙 각 부서의 아전으로부터 지방의 각 진과 고을의 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청 일을 보는 자 즉 연습생[門生],
필사생[寫手], 조례(皁隸), 간수[牢子]들까지도 모두 매월 봉급이 있어서[은 2냥반]한 사람만 관청에 있게 되면 그 집의 자제가 4, 5명이 있더라도 그들에게 역(役)을 면제한다
하니 이것이야말로 주나라 때에 부(府)의 이례와 서리들의 녹이 하사(下士)와 같다는 본의에 맞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정부의 서리(書吏), 조례, 전복(典僕)으로부터 지방의 아전, 서원(書員), 사령(使令) 등에 이르기까지 매일 관청에 박혀 있어서 그 고생이 막심하지마는 한 푼도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농사를 지으려도 겨를이 없으며 장인이 될 수도 없고 상업도 할 수 없어서 먹고 입을 것이 도무지 나올 곳이 없습니다. 도적질을 하려도 비렁뱅이질을
하려도 겨를이 없으니 살기 위해서 그들은 국가를 속이고 수단을 부리며 백성을 위협하고 물화를 토색하며 문서를 위조하여 재물을 훔치고 창고에 들어가 곡식을 도적질하는 등의 일들을
염치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엄한 법으로써 그 폐단을 없애려 하더라도 한량없는 그 간계를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니, 그들이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염치를 알도록
가르쳐서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자숙하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더러는 ‘국가의 비용이 이미 고갈되었으니 허다한 재물과 곡식을 얻어서 그 허다한 이서(吏胥)들에게 급료를 나누어 주기는 곤란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신(臣)은
곰곰이 생각하건대 그 급료를 받지 못하는 허다한 이서들이 여러 가지로 간사한 짓을 꾸며서 국가의 일을 그르치는 것이 얼마나 많으며, 국가의 재산을 도적질해 가는 것이 얼마나
많으며, 군민(軍民)의 산업을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왕 그들에게 속임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도적질해 갈 그 부분을 나누어 주어서 즉 녹봉을 고르게 주어서 국가의 일을
그르치거나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지 못하게 한다면 설혹 법을 위반한 자가 있더라도 그들에 대하여 위에서 추궁할 근거가 있게 되며 그들도 그 허물을 자복하게 될 것입니다.
｢홍범(洪範)｣ 홍범(洪範)： 상서의 편명,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통일한 뒤에 기자가 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조항을 들어 무왕에게 가르쳤다는 문헌.

에 이르기를 '벼슬하는 사람에게는 녹을 넉넉히 주어야 착해진다'고 하였으니, 그들로 하여금 기한(饑寒)이 절박하도록 만들어 놓고 간사한 폐단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면 비록 고요(皐陶)
고요(皐陶)： 중국 고대 순 임금의 어진 신하로서 법을 맡았다는 사람 이름.

로 하여금 법을 집행하게 하더라도 별 방책이 없을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지금 관청에는 공밥 먹는 자가 대단히 많고 또 각 기관에서 받아들이는 공물 값으로 대체하는 종이와 각 도 관리들이 벌로 받는 포를 거두어들여서 저장해 놓았으나 거의 다 관원들의
친구간에 쓰는 물자로 허비할 뿐입니다. 이것도 국가 재산이니 합해서 집계해 놓고 부당한 소비를 절약하여 응당 써야 할 곳에만 쓰도록 한다면 여러 기관들의 이졸(吏卒)들이 자기
급료의 부족을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령 지방에 원곡(元}\) 만 석을 가진 고을이 있다면 경비로 천 석까지 쓸 수 있는데 그 수량 중에서 매년 4백 석을 가지고 불시의 비용에
쓰고 6백 석으로 50명의 1년간의 급료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월급 1명당 벼 1석]더군다나 10만 석이 있는 고을이라면 경비로 만 석까지 쓸 수 있는데 그 수량 중에서 매년
6천 석으로 5백 명의 1년분의 급료를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회계에도 올려 지지 않고 한갓 수령들의 개인적인 소비에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수많은
백성들의 곡식을 받았더라도 한 사람의 사욕을 채우고 허다한 사람으로 하여금 기한에 떨게 하니 이것이 어찌 천리에 맞는다고 하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예부(禮部) 같은 대처(大處)의 세 당상이 좌기(坐起)하는 곳에도 9명의 아전이 있을 뿐이며 의(儀)ㆍ제(制)ㆍ사(祀)ㆍ제(祭)의 네 기관에도 각각 9명씩 있으니 지방의
아전은 응당 이보다 적은 인원일 것입니다. 중국과 같이 사람과 물산이 번성하고 사무가 번거로운 곳에서도 고급 관리들이 부려 쓰는 사람과 물산이 사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심부름하는 데
그치고 저자 거리에서 폼재려고 데리고 다니는 아전이 한 명도 없습니다.

조그마한 우리나라의 백성과 물산으로써는 요동과 계주의 지방 한 쪽에 비할 수 없는데도 정부나 지방의 뭇 관리들은 아첨하는 자가 앞에 가득한 것을 대단히 좋아하며 한 명의 아전이 할
수 있는 일을 서너 명의 아전에게 나누어 맡기므로 떠들썩한 소리만 더할 뿐이고 실제 사업은 하나도 되지 않으며 행차할 때에는 반드시 길을 치우라고 호통하는 자와 호위하는 자를 많이
거느리는데 구종(驅從)들이 작은 곳으로 다니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아! 사치를 이렇게 과하게 하여서 온갖 일을 그르치니 한심한 일입니다. 참으로
중국의 제도를 따른다면 먼저 육조(六曹) 이졸(吏卒)의 수를 감하고 여러 관청과 지방에서도 이에 준하여 그 정원수를 감해서 정할 것입니다. 만일 이곳에서 부족하고 저곳에서 남는
경우에는 서로 전출시켜 충당하되 일을 집행하는 인원만을 남겨 두고 그들에게 급료를 주면 사람마다 직무에 따라 먹고 살며 국가의 경비도 대단히 고르게 되어 아전들은 자기 직무를 다할
것이며 국가의 사업도 깨끗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어떤 자가 율곡(栗谷)에게 묻기를 "당신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폐단을 개혁하는 데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폐단 중에서 백성의 가장 큰 우환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 하니,
율곡이 대답하기를 "일족에게나 이웃에 연대 책임을 지우는 것이 첫째 폐단이며, 국왕에게 올리는 진상 물품의 번중(煩重)이 둘째 폐단이며,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서울에서 방납하는
것이 셋째 폐단이며, 부역을 고르게 시키지 않는 것이 넷째 폐단이며 서리배들의 가렴주구가 다섯째 폐단이다. 이것은 그 중 특히 심한 것만을 말한 것이니 지금의 폐단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즉 경지를 다시 측량하지 않아 묵는 땅에 세를 물리게 되는 것, 불교도가 아직도 있어서 놀고먹는 사람이 농사짓는 밭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불시의 수요를 모두
시장에서 구하는데 시장 사람들이 갉아먹고 떼어먹는 폐단이 부락 내에 미쳐서 부락 사람들의 재산이 고갈되는 것, 이름도 없는 잡세를 각 고을에 함부로 물려서 그 받아가는 것이 국가의
본세보다 더 중한 것, 종모법(從母法)을 양민 여자에게 적용하지 않아 양민이 모두 변해서 사천(私賤)으로 되는 것, 쓸데없는 관원이 아직도 많아 헛된 비용이 낭비되는 것, 민호는
점차 줄어가는데 고을이 너무 많은 것 등등 지금의 폐단을 다 말하려면 하루를 해도 부족할 것이다.

만일 지금 이대로 가면서 오늘날의 정치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어진 국왕이 위에 있고 어진 신하가 아래에 있더라도 정치에서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며 몇 년이 못 가서
백성들은 생선이 썩어 문드러지고 흙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외에 또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있으니, 지금 백성의 형편을 보면 죽어 가는 사람의 숨이 넘어가는
것과 같아서 평시에도 보존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만약 외곽 경비가 허술하여 남쪽에서나 북쪽에서 침략군이 쳐들어온다면 질풍이 막 낙엽을 쓸어 버리듯 할 것이다. 백성은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통곡이 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하였다.

생각건대 현하의 폐단에 대하여 여기에서 그 개략적인 것을 말했다고 본다. 이것을 만일 하나 하나씩 들어 말하려면 하루를 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란 기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이 있으니 기본적인 것이 바로잡히면 부차적인 것은 저절로 바로잡히게 되는 법이다. 지금이라도 전제(田制)를 시행하여 경지에 의하여 병역 의무를 지게 한다면 일족이나
이웃에 전가시키는 폐단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전국에서 고르게 대동법을 시행하여 1년간 국왕의 소요 수량을 영구적으로 일정하게 정한다면 진상 공물의 폐단이
고치지 않으려도 자연히 고쳐질 것이며, 맡기는 일의 양을 헤아리고 서리 수를 정하여 모두 다 자기 직무에서 일하게 하고 각자에게 모두 녹봉을 준다면 부역이 불균등하거나 서리배가
가렴 주구하는 폐단은 가만 두어도 저절로 혁파될 것이며, 백성들의 살림이 고르게 되고 부역도 고르게 되어 과외의 침탈이 없어지면 부유하지 않으려 해도 부유해지고 인구가 증가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정치와 교화를 이루어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착한 정치를 실행하려 하더라도 한갓 허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국가를 다스리는 법이다. 법이란 저절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국왕이 먼저 어진 신하를 얻어서 자기를 보좌케 하고 인재를 광범히 구하여 적당한 위치에
배치한 후라야 비로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대신을 선택하는 근본은 국왕의 마음을 사심없이 밝히는 데 있고, 마음을 사심 없이 밝히는 요체는 성인의 학문을 배우는 데 있는
것이다. 대저 법이란 목수의 먹줄 및 자와 같으며 대장장이의 모형과 같은 것이다. 이른바 먹줄과 자가 옳은 먹줄과 자가 아니며 이른바 모형이 옳은 모형이 아니라면 아무리 천하에
제일가는 기술자가 있더라도 집 한 칸, 그릇 하나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좋은 기술자만 있으면 그만이라 하여 먹줄과 자와 모형을 꼭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옳게 생각지 못함이 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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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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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國朝名臣論弊政諸條附栗谷論曰"救民 在於革弊. 今茲一有逃散之民 則必侵其一族及切隣. 一族切隣不能支保 亦至流散 則又侵其一族之一族 切隣之切隣 一人之逃 患及千戶 必至於民無孑遺然後 乃已也.
是故 昔年百家之村 今無十室 前歲十家之村 今無一室 邑里蕭條 人烟夐絶 無處不然. 若不更張此弊 則邦本顚蹶 無以爲國矣. 欲革此弊 當下令四方之郡邑 按其簿籍 苟有流亡絶戶 輒削其名 不侵一族切隣
則國家所失 只在於逃者 而未散之民 則庶幾安輯矣. 休養生息 戶口繁盛 則未充之軍額 亦指日而可充矣. 或曰'今日軍額隸籍 絶戶者居半 若用子言 則無以應目前之百需 奈何?'曰流俗之見 每每如是
此國勢之所以終不振起也. 今者生民之困 甚於倒懸. 若不急救 勢將空國 空國之後 目前之需 辦出何地耶? 此必至之理也. 所貴乎軍額之不減者 爲其實有是軍 可以備用也. 今者 絶戶之軍 只侵一族
徵其價布而已. 脫有緩急發軍之擧 則一族 終不足以荷戈 價布 終不足以募人 安用吝惜虛簿 以使民受實害哉? 古今敗亂之事 固非一二 而未嘗見以一族切隣之弊 亡其國者也. 我國作俑 未知昉於何時
此誠千古所無之患也 不可使聞於後世也. 書曰'罰不及嗣 賞延于世.'斯民之流散 出於困瘁 當惠鮮之不暇 而反以毒虐之政 散其未散之民 此豈仁人君子之所可忍爲耶? 曰'子言則是矣. 但巧詐之民 一切避役
軍額終至於無一人 則奈何?'曰此必無之理也. 凡民之離鄕去族 轉徙不定者 皆出於悶迫不得已也. 彼雖巧詐 若有産業 可以資生 則孰肯自取流離之苦哉? 若無一族切隣之患 只應其一身之役 則民之安生樂業
如脫水火矣 豈有一切避役之理乎? 此法旣革 則當令郡邑 漸刷閑丁 以充闕額 悉罷旅外 以補正軍. 至於新設之衛 非大典所載者 及寄名於閑役之籍 無益公家者 皆刷出充軍 使兵省之官 摠掌其事 必得實數
則雖不別設軍籍之局 而軍籍已了矣. 夫然後 更搜閑丁 隨得隨補 每於歲抄令郡邑 上軍籍于兵曹 上隸籍于該司 只錄實數 悉刊虛名. 如有善得閑丁 增十戶以上者 論賞. 新有絶戶 縮其額數 減五戶以上
論罪 或罷或降職 甚者重治. 增減相當者 勿問爲政 三年戶口不增者 亦論罪. 誠能行此 則守令畏法 盡心懷保 不出十年 民生可給 軍額可充矣. 昔者 越王勾踐 以五千之卒 棲於會稽 可謂至弱矣.
及其十年生聚 十年敎訓 則乃能富國强兵 以滅勁敵. 况我堂堂萬乘之國 若盡其生聚敎訓之道 則豈無國泰民富 丕變風俗之效哉?"○又曰"今之所謂正軍保率羅將皁隸諸員 凡百應役之類 或立長番 或分二番
或分三番 至六七番 或不堪侵暴而逋竄 或稍得安業而自保. 同是赤子 有何彼此 而使憂樂不同耶? 爲今之計 大臣與該司 量度裁制 折長補短 務使一切之役 皆得番休迭息 均齊方正 無有甚苦甚歇之弊
則流亡可以還集 而民無投屬厭避之計矣."○又曰"自權奸濁亂之後 上下唯貨賄是事 官爵非賄不進 爭訟非賄不決 罪戾非賄不免 以致百僚 師師非度 吏胥緣文舞術. 百物納官之際 精麤不分 多寡不算
唯以貨賂等級 而取捨之 以至一皂一隸 稍有所管 則輒事漁奪. 不特此也 獄訟重事 亦委猾吏之手 視其賄賂 而曲直之 此誠亂政亡國之痼病也. 目今 權奸已去 公論稍行 朝廷之上 小革舊習 而吏胥之奸
比前尤甚. 欲革此弊 則當嚴勑具僚 申明贓法 振起頹綱 使朝著肅然 人知警懼 然後一禁侵漁受賂之習. 發隱摘伏 以得其情 許民陳訴 以察其寃. 若有吏胥使令之徒 或受賂或漁奪 事覺則布一疋以上
悉治以全家之律 以實六鎭空虛之地 則非徒一洗賄賂之習 亦將有助邊圉之固矣. 雖然 吏胥之求賄 誠可痛絶 而其代耕之資 不可不給. 古者 府史胥徒 皆有常祿 仰食於上 今之吏胥 別無廩俸 若不漁奪
難免飢寒 此我國之制 有所未盡者也."○又曰"今之所謂進上者 非必盡合於上供也. 細▩之物 莫不畢獻 水陸之産 搜括無餘 而眞擇 其可進于御膳者 則亦無幾焉. 古之聖王 以一人治天下 不以天下奉一人.
雖使進獻之物 一一皆合上供 亦當減省以舒民力 况以不急之需 殘傷百姓耶? 欲革此弊 則當令大臣及該司 悉取進上名目 講究其緊歇 只取其切於上供不可不存者 其餘不緊之物 皆悉蠲除 雖合於上供
而數目太多者 亦量減其數. 夫如是 則聖上愛民之惠 可以下究 而文王惟正之供 不得專美矣. 或曰'若如子言 則徒知愛民 而不知奉上 非臣子之誠也.'曰嗟乎! 流俗之見 每每如是
此所以不能仰補聖德者也. 忠臣 愛君以大道 不以小誠. 若使國家治安 民生富庶 則吾君之所獲 多矣. 豈以區區小物之增減 足爲損益於吾君耶? 昔者 舜作漆器 羣臣爭諫 是天子之貴 尙不得用漆器矣.
以子言觀之 舜朝之臣 可謂不愛其君矣. 然而帝舜爲天下之聖主 虞臣爲天下之良弼. 嗚呼! 此豈可與流俗碌碌之輩 商議其得失耶?"○又曰"祖宗朝防納之禁 甚嚴. 凡百貢物 只使百姓直納于官司 百司之官
亦奉上意 不爲胥吏所瞞 無刀蹬阻隔之患 百姓不困於貢物焉. 世道漸降 弊習日滋 奸吏猾隸 私備百物 愚弄官私 阻當百姓. 雖持精美之物 終抑不納 必納私備之物 然後索其百陪之價 而邦憲頹廢 不能禁戢.
爲日已久 國用不加毫末 而民間已空杼軸矣. 近來 雖欲革此 而未得其要 只令百姓自納 而不設適用之策 百姓之不能自備者 久矣 一朝聞防納之弊 無計辦出 不免還持高價 私貿于曩 日防納之徒
被他深藏固靳價倍. 前日防納之名 雖廢 而防納之實 反甚矣. 或曰'欲革此弊 當出何計?'曰達人 臨事而善謀 隨時而適宜 豈拘於常故者之所能耶? 余見 海州貢物之法 每田一結 收米一斗
官自備物以納于京 民間只知出米而已 刀蹬之弊 略不聞知 此誠今日救民之良法也. 若以此法 頒于四方 則防納之弊 不日自革矣. 或曰'我國郡邑之實者 莫海州若也.
安能使八道郡邑皆效海州之爲耶?'曰若無變常規 則誠如子言矣. 若使大臣及該司 悉取八道 圖籍 講究其人物之殘盛 田結之多寡 物産之豐嗇 更賦其貢物 而或均其苦歇 至於貢物之不切於國用者 量宜蠲減
必使八道郡邑之所辦出 皆如海州之一結一斗 然後乃頒其令 則何不可行之有?"○栗谷又告于宣廟曰"祖宗朝 用度甚約 取民甚廉. 燕山中年 用度侈張 常貢 不足以供其需 於是 加定以充其欲. 臣於曩日
聞諸故老 未敢深信. 前在政院 取戶曹貢案觀之 則諸般貢物 皆是弘治辛酉所加定 而至今遵用. 攷其時 則燕山朝也. 臣不覺掩卷太息曰'弘治辛酉 於今七十四年 聖君非不臨御 而此法
何爲不革耶?'究取所由 則七十年之間 皆有權奸 當國 二三君子 雖或立朝 志不及展 奇禍必隨 何暇議及於此哉? 其必有待於今日乎. 且物産 隨時或變 民物田結 隨時增減. 今則列邑所貢 多非所産
有如緣木求魚 未免轉買他邑 或市于京. 民費百倍 公用不裕. 加以民戶漸縮 田野漸荒 往年百人之所納 前年責辦于十人 前年十人之所納 今年責辦于一人 其勢必至於無一人然後 乃已. 今者 語及改正貢案
則議者 必諉以祖宗之法 不可輕改. 雖祖宗之法 民窮至此 不可不變 况燕山之法乎? 伏望殿下 擇有智慮曉事者 專掌其事 以大臣領之 悉除燕山所加定 以復祖宗之舊 因考列邑之物産有無 田結多少 民戶殘盛
推移量定 均平如一 則民生如解倒懸矣."○栗谷爲黃海監司時 狀啓曰"進上煩重 一道殘民 獵山漁水 日不暇給 田蕪不芸 屋壞不葺 顚沛流離 無以奠居. 若非厥土所産之物 則頭會箕斂 遠貿他境 勞費十倍.
至如牙獐ㆍ甫獐之封 獲獐累而非牙獐ㆍ甫獐 則不能罷獵. 臣竊念若爲藥餌而進也 當納于醫司 不當納于饔人也. 獐 一也 而必求牙甫 臣誠未燭其理也. 又如鹿舌ㆍ鹿尾 本非佳味 不合進御 而皆以布貨
往貿于京 多得於貴近之家 厥價翔貴. 往往以曾進之物 輪廻復納. 是則浚民膏澤 以爲貴近網利之資而已. 思之至此 可爲於邑. 且本道 距京城 數日之程 暄暖之時 亦進生物 雖朝備而夕封 春夏則色味必變
必須預爲之備 置之凌陰. 經日旣久 乃送于都會官. 故 初封之時 已多失性 况過數百里 乃達于京城者乎? 若以預備腐敗爲不恪 則臨時倉卒多不能辦此 理勢之必然也. 夫責人以必不能 而隨之以罪罰
豈聖王之政乎? 前日之封進無事者 不過行賂饔吏而已 非色味不變也. 伏望深軫民隱 斷自聖衷 進上生鹿ㆍ臘猪 量宜蠲減 則雖除五六口 聖澤之及民者廣矣. 牙獐ㆍ甫獐 不必別立名號 只以生獐 隨得封進
則田獵之苦 可以小歇矣. 鹿尾ㆍ鹿舌 知厥味之不佳 而悉復罷除 則倍價遠貿之患 可以小息矣. 若使本道 只以二月以前 十月以後 封進生物 而三月以後 九月以前 命以本道生物 換京畿乾物 則供進之物
可合御膳 而郡邑免必至之責矣. 凡此數者 在聖明 若反手之易 而生民有浹骨之恩 試留睿思 鞏固邦本 幸甚."○趙重峯奉使中國而還 上▩於宣祖曰"臣竊聞中朝御膳之用 皆出民賦 而收銀以藏 尙膳監太監
逐日出銀 以貿物膳于市 而監飪以進云. 夫以中土人馬之盛 兼有漕河舟運之路 凡山珍海錯 可以立致其新採者 而必賦銀而貿市者. 蓋聖祖之心 以爲若致生物 則千萬里輸輓之勞 有倍於漕運之費 而折定銀兩
則六百馬之所轉 可轉爲一馬矣. 此法一定 民無倍出之患 驛無重運之苦 而市廛之中 百物皆具 隨價定銀 自不闕其御膳矣. 此所以中原之民 日日富庶 而太平鞏固者也. 我國之民 常貢之外
又有進上物膳貿納之苦 民窮怨極 大爲國家之憂者 不可勝紀. 殿下勿以爲細▩ 而忽之. 一事之弊 能使萬民 不得其所 誠不忍坐視 而不救也. 蓋物膳之出 或有昔産 而今絶者 不問有無 一切責辦
僅保朝夕之民 嬴糧倍價 而遠求數日之程. 一魚之直 在本土 雖不過米升 而及乎遠人之渴求 則必用四五斗然後 乃能貿歸. 傭力難支 則不得已雇田以支矣. 雖或土産 慶州錢魚 則換以紬一疋 平壤凍秀魚
則換以正布一疋. 列邑進上物價如此者 何限? 况其輸運之際 色吏之糧 京吏之賄 一出於民 而若非嚴冬 則照氷重載 馬無完背者 故驛馬難支 則刷及民牛. 諸道各驛 大小使行及倭ㆍ野人之往來 亦不能支
而十室九空矣. 國家他日 將何以傳命乎? 考之禹貢 靑ㆍ徐ㆍ荊ㆍ楊 莫非濱海 而惟靑州 貢海錯 江淮河漢 無不有魚 而惟淮夷貢魚 以供祭祀而已. 古之明王 不以口腹 而病天下之民 如此. 以此推之
則遠道生物之進 止存祭祀之用 以蘇其飢民殘驛 是宜聖政之所當先者也. 京畿生鮮 生雉之進 大爲畿民之苦. 臣聞之古老 實國初所未定者也. 莊憲大王 令水民三百戶 輪廻納魚 止爲三時之鮮. 是時
魚價極大者 不滿米斗. 康靖大王晩年 孫舜孝爲監司 適華使之來 恐其久留 多斂魚雉於民 擬用迎接 而使華遄還 魚無所用 日以單子計 送于司饔院. 及其將盡 舜孝以爲'遞日將近 當止於臣身.'乃再斂於民
而進之. 繼舜孝者 以爲舜孝尙爾 臣何敢廢之? 仍爲舊規. 以及于今 則魚價漸重 或以四結 定其一尾之價 四結難備 則定以 八結 每結二斗 合得十六斗米 以貿一尾. 四殿所進 日不知其幾尾 則各邑所辦
日不知其幾十六斗矣. 夫十六斗 窮民八九口一月之産也. 結出二斗 雖似甚微 而及其春夏 舊穀旣盡 稱貸無所 里胥一督而不備 則編繫而囚之. 視其赤身餓婦 自挫其髮 而頓號難辦之狀 則以聖主惻隱之心
寧忍其聚民之怨 而滿陳于前乎? 腥膻之物 旣不肯御 而日費窮民數十戶半歲之食者 決非文王惟正之供也. 願殿下 止存莊憲大王所定魚夫三百戶 舜孝所供一切命罷 則畿民庶可小蘇矣. 孝宗皇帝 卽位之初
詔減日用御膳羊一鷄一. 夫羊鷄之供 成化以前 必有成例 而孝宗之心 猶恐御膳之或侈 而老病之民 或不得食肉 則以子改父 而不害爲孝. 夫以我朝御膳之過制者 始由容悅之臣 而弊及萬姓者 如此
况於燕山荒淫之時 凡百進上之物 多所增定者乎? 前秋 李珥乃言及此 竟未允許. 此之不先 而欲禁守令之橫斂 不亦難乎? 所以薄稅斂簡飮食之敎 歲傳於鋪馬 而民不蒙澤也."○又曰"臣見鴨綠以西 至于順天
非石山瘠原 則無一不耕處 村屯邑里 鷄犬相聞 而牛馬猪羊 籠絡山野 家家子女 三九成羣 隨其貧富 各安生理. 永平薊州 人物尤盛 通州至于帝城 垣籬相屬 肩磨軸擊. 朔野 素稱不毛之地 而今焉如此者
蓋以天朝憂深慮遠 知邦本之固 在於民安. 凡所以安養斯民者 無所不用其極. 雖守令廩料 亦且月給銀兩 貿市物而用之 不敢收民間一鷄卵一尺布 使田賦身役之外 更無他徭. 雖有守令之貪鄙者 不敢越法以侵民
故能人繁而地闢也. 慨我東方 自兩界 以及都門 膴原沃野 多有不墾 昔日民居 今爲茂草 家畜一牛馬者 十無一二 民有子女成羣者 亦甚罕見. 夫豈天地生物之數 偏不足於海隅乎? 蓋弊法已久 橫斂多端
八結之布 歲輸三疋 奉足之價 歲給五疋. 爲勸農吏正 編戶大小統者 一月六點 一或有闕 則罰之以布. 官屬 或每日一點 而有闕 則罰之以布. 一族之役 不問遠近親踈 人費三四人之闕價 杼軸職此而一空
長者鮮備襦袴 遑顧孩兒之襁褓乎? 此民兒之所以凍而難保者也. 官租私債 艱難備辦 而一斗之稅 或出四斗 本倉四斗 輸於遠方 則四倍其數 舂正之納 歲備八斗 進上雉獐之價 戶出五斗. 甁粟已罄 無以卒歲
則賣其牛犢 而猶或難繼 此民兒之所以飢而難保者也. 嗚呼! 有牛所以當春賴耕 而今乃賣食 育子所以臨老資養 而又至餓斃. 賑恤無人 方願遄死之際 又以闕軍逃奴之切隣 連繫而置之牢獄 所以樂土良田
多不暇計 而執瓢遠走者也. 且咸鏡一道 進上所入帒布 不至於百疋之多 而一道之內 苟食官債者 例收細布一疋. 鹽盆之稅 歲收一石 則足以裕用 而歲收四石 且徵壯紙四卷 鹽戶不支 破盆已久 而按籍收稅
傳爲祖役. 北道新設之初 野罕民家 山多樹木 故土産貂皮 而以之進上矣. 今則貂鼠永絶 而猶存其貢 他無所得 倍價貿京 一方之苦 莫甚於此. 他道民怨之類此者 何限? 民日流離者
實由於此等數弊之不祛. 嗚呼! 以進上之事及逐邑官員厚奉之故 至於百姓之失所 而邦本之杌隉如此. 若自上 誠知民散 而國不能獨保 則先除其不緊進上之數 如燕山加定之物 一切蠲免. 申戒守令
不敢倚以毒民 常貢賦稅 止收元數 而不敢重斂. 衙養之物 定以常數 使臣之供 亦從定品. 斗米尺布 不敢橫斂於民 而一有違者 徵以贓律 或徙邊城. 生息之源 亦勿閑絶 女壯而不嫁者 有罪 使男不曠
女無怨. 百年生育 而各爲安居之地 則八道之內 自無閑曠之處 將不期而富庶矣.○又曰"臣聞中朝 內自部府椽吏 外至鎭邑胥吏 凡仰於官者 如門生寫手皁隸牢子之屬 莫不有月俸 銀二兩半. 而一人在官
則在家子弟 雖至四五 皆不定役云. 此實成周府史胥徒 祿同下士之意也. 我國則內自書吏ㆍ皁隸ㆍ典僕 外至衙典ㆍ書員ㆍ使令等 日不離官 其苦莫甚 而了無一錢之所及. 旣不暇治農 又不能爲工爲商
而其衣其食 畧無出處. 作賊則不暇 丐乞則無閑 此所以欺官弄術 怵民要貨 絶簿盜財 入倉偸粟 不顧廉耻 而爲之者也. 若嚴刑重法 以杜其弊 則將不勝其姦計之百出矣. 孰若開其衣食之源 而敎以廉耻
使之自不爲姦也哉? 議者 必以爲國用已竭 難得許多財穀 以分許多吏胥之料矣. 臣竊以爲許多吏胥之不得其料 而多般舞詐 以誤國家事者 不知其幾何事乎? 以盜國家之財貨者 不知其幾何數乎?
以破軍民之産業者 不知其幾何戶乎? 等被其欺 寧分所盜 以均其廩 而勿使誤國害民 則設有犯法者 上有可執之辭 而彼乃自伏其辜矣. 洪範曰'凡厥正人 旣富方穀.'俾其饑寒之切身 而望其奸弊之不作
雖使皐陶執法 無所施 其明矣. 方今 冗食者甚多 且各司貢物作紙之價 及各道官吏刑贖之布 收而藏之 不過爲官員親舊之資而已. 是亦公物也 若合而計之 節其不當費 而用於當用之地 則庶司吏卒
不患其料之不足矣. 且外邑 假有元穀萬石之地 則費耗至於千石矣 歲以四百石 留佇不時之需 以六百石 可分五十人一年之料矣. 月給人租一石. 况有十萬石之地 則費耗至於萬石矣 歲出六千石
則可給五百人矣. 此則不籍于會計 徒歸于守令之私用矣. 雖得許多民穀 以遂一人之私欲 而使許多人飢寒 是豈天心哉? 蓋中國之制 如禮部大處三堂上坐起之所 止有九吏 儀ㆍ制ㆍ祀ㆍ祭四司 各有九人
外邑之吏 當減於此矣. 夫以中朝人物之盛 事務之繁 而高官之所使令者 止於決事執役 而不敢帶一吏 以榮市巷之目. 以偏方人物 不得擬於遼ㆍ薊一面 而內外庶官 深好便侫之滿前 一吏可辦之事 分屬于三四吏
只益喧叫 而事實不治 出則必求呵擁之滿路 驅從小處 到底興歎. 嗚呼! 奢侈之過 而百事之誤如此. 誠能依中朝之制 先減六曹吏卒之數 庶司外邑 以此損之 刻定其額. 如有此裕彼缺者 推移充定
止留任事者 量給其料 則人食其事 而國用甚均 吏恪其任 而公務亦淸矣."○或問於栗谷曰"子以爲救民在於革弊 當今之弊 孰爲民患之大者?"栗谷曰"一族切隣之弊 一也 進上煩重之弊 二也 貢物防納之弊
三也 役事不均之弊 四也 吏胥誅求之弊 五也 此特其甚者而已. 當今之弊 奚止於此? 田不改量而陳荒之地 未免於收稅 釋敎尙存而遊手之民 未返於田畝 不時之需 悉辦於市人 而市人剝膚 橫侵之責
徧及於防內 而防內竭髓 無名之稅 濫觴於列邑 而徵斂反重於貢賦 從母之法 不用於良女 而良民盡變爲私賤 冗官尙多 而浮費尙廣 民戶漸縮 而郡縣太多. 今世之弊 若欲盡言 日亦不足. 由今之道
無變今之政 雖堯舜在上 皐▩在下 亦將無益於治亂 不過數年 民必魚爛而土崩矣. 抑有大可憂者焉 度今民力 如垂死之人 氣息奄奄 平日支持 亦不可保 脫有外警 起於南北 則將必若疾風之掃落葉矣.
百姓已矣 宗社何依? 言念及此 不覺慟哭也."按當今之弊 於此略見其槩. 苟欲條條而陳之 日亦不足矣. 雖然 凡事有本有末 本擧則末自正. 蓋旣行田制 以田出兵 則一族切隣之弊 不期除而自除矣.
一國均用大同之制 一歲恒定御需之數 則進上貢物之弊 不期改而自改矣. 量其任 定吏數 無不各使其職 各有其廩 則役事不均 胥吏誅求之弊 不期革而自革矣. 民産旣均 賦役旣一 而無科外橫侵 則不期生息
而自富庶矣. 如此而後 可以成政敎 而致治功. 不如此 雖欲行仁政 徒虛語耳. 雖然 此皆爲治之法也. 法不能自行 必也人君先得賢臣 爲之左右 廣求俊乂 列于庶位然後 可以有行. 擇大臣之本
又在乎明一心之德 明心之要 其唯聖學乎! 大抵法者 猶匠人之繩尺也 猶冶人之模範也. 所謂繩尺 非繩尺 所謂模範 非模範 雖有天下良工 無以成一間室一箇器. 世之徒談良工 而謂不必用其繩尺模範者
其不思甚矣.隨錄卷之四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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