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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고려(高麗)의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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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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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고려(高麗)의 전제

고려 때 전제는 대체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개간지[墾田]의 총 면적을 집계하고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군인[府兵]과 시민[閑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가 본인이 죽으면 전부 국가에 도로 바쳤다. 그러나 군인만은 20세에 처음으로 토지를 받았다가 60세에 도로 바치고 그 자손이나 친척이 있으면 토지와
병역을 대신 담당하며[몸에 병이 있을 때에도 토지를 대신 경작하게 할 수 있다.] 자손이나 친척이 없으면 감문위(監門衛)에 등록하여 두었다가 70세가 된 뒤에
구분전(口分田)[5자결[五結]]으로 주고 남는 토지는 회수하며 본인이 죽고 자손이 없는 자와 전몰자의 처도 모두 구분전을 주었다. 또한 공해전(公廨田)을 두어 고관[庄宅],
왕실[宮院], 백관[百司]들과 주, 현(州縣), 역참[舘驛]들에 모두 차등이 있게 주었다.

고려 태조(太祖)가 처음으로 병역법을 제정하고 토지를 나누었는데 국토를 통일하였을 때에 관리와 군인들은 관직의 품계에는 관계없이 그 사람 행실의 선악(善惡)과 공로의 대소를 보아서
차등이 있게 토지를 주었다. 경종(景宗) 경종(景宗)：고려 왕조의 제5대 왕.

때에 처음으로 직관(職官) 전시과(田柴科) 전시과(田柴科)：고려시대 관리들의 품계에 따라 토지와 임야를 차등 있게 주던 제도.

를 제정하였는데 역시 벼슬 품계[官階]를 따지지 않고 인품(人品)에 의하여 규정하였다.[자줏빛 옷을 입은 관직 이상에 18개 등급을 두어 1품에게 밭과 시장갓[田柴] 각각
110결(結)씩을 주었는데 이하로 내려오면서 체감하여 18품에 이르면 밭 32결과 시장갓 25결씩을 주었으며 또 붉은 옷을 입은 관직 이상에 10개 등급을 두어 1품에게 밭
65결과 시장갓 585결씩을 주었는데 이하로 내려오면서 체감하여 10품에 이르면 밭 30결과 시장갓 18결을 주었으며 비색[緋] 옷 입은 관직 이상에 8개 등급을 두어 1품에게 밭
50결과 시장갓 40결씩을 주었는데 이하로 내려오면서 체감하여 8품에 이르면 밭 27결과 시장갓 14결씩을 주었으며 녹색 옷 입은 관직 이상에 10개 등급을 두어 1품에게 밭
45결과 시장갓 35결씩을 주었는데 이하로 내려오면서 체감하여 10품에 이르면 밭 45결과 시장갓 35결씩을 주었으며 이하로 내려오면서 10품에 이르면 밭 20결과 시장갓
10결씩을 주었다. 이밖에도 여러 등급의 잡색 관직이 있었으나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는 모두 밭 15결씩을 주었다.]

목종(穆宗) 목종(穆宗)：고려 왕조의 제7대 왕.

때에 문무관의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고 문종(文宗) 문종(文宗)：고려 왕조의 제11대 왕.

때에 이르러 또 그 제도를 고치어 중서령(中書令) 중서령(中書令)：고려 왕조의 최고 행정기관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책임관직명.

, 상서령(尙書令) 상서령(尙書令)：고려 성종(成宗) 14년에 여러 관서를 통솔하던 어사도성(御事都省; 국초의 광평성)을 개칭한 상서도성(尙書都省)의 최고 관직명. 중국 당ㆍ송
때에도 이런 관직이 있었음.

, 문하시중(門下侍中) 문하시중(門下侍中)：고려시대 중앙정부의 재상 직명.

으로부터 군인, 한량(閒良) 기타에 이르기까지 18과(科)로 나누어서 100결로부터 17결까지의 차등을 둠으로써 항구한 규정[常式]을 삼았다.[제1과에 밭 100결, 제2과에 밭
90결, 제3과에 85결, 제4과에 밭 80결, 제5과에 밭 75결, 제6과에 밭 70결, 제7과에 밭 65결, 제8과에 밭 60결, 제9과에 밭 55결, 제10과에 밭 50결,
제11과에 밭 45결, 제12과에 밭 40결, 제13과에 밭 35결, 제14과에 밭 30결, 제15과에 밭 25결, 제16과에 밭 22결, 제17과에 밭 20결, 제18과에 밭
17결씩을 주었다. 이상 각 과에 따르는 시장갓[柴]의 결수는 여기에 함께 기록하지 않는다.] 6품 이하 7품 이상으로서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자의 처에게는 구분전 8결을 주며
8품 이하의 전몰 군인은 그의 처에게 모두 구분전 5결을 주며 5품 이상 되는 집으로서 부처가 다 죽고 아들이 없이 출가 전 딸이 있을 때에는 구분전 8결을 주었다가 그 딸이
출가한 뒤에는 토지를 관가에 반환하였다.

문종(文宗) 8년에 일체 토지의 품질을 판정하였는데 매년 경작하는 땅을 상등 전으로 하고 한 해 건너 경작하는 땅을 중등 전으로 하고 2년 걸려 경작하는 땅을 하등 전으로 하였다.
그리고 매년 경작하는 산지대의 밭 1결(結)은 평지대에 있는 밭[平田] 1결과 같이 치고 한 해 걸려 경작하는 산지대의 밭[山田] 2결은 평지대에 있는 밭 1결과 대등하며 2년
걸러 경작하는 산지대의 밭 3결은 평지대에 있는 밭 1결과 대등하게 되어 있다.

문종 23년에 토지 면적을 측량하였는데 토지의 1결은 사방 33보(步)요[6촌이 1분(分)으로 하고 10분을 1척으로 하여 6척이 1보로 된다.] 2결은 사방 47보요 3결은 사방
57보 3분이요 4결은 사방 66보요 5결은 사방 73보 8분이요 6결은 사방 80보 8분이요 7결은 사방 87보 4분이요 8결은 사방 90보 7분이요 9결은 사방 99보요
10결은 사방 104보 3분이었다.

태조(太祖)(고려) 원년(元年)에 관리들에게 이르기를 "태봉주(泰封主) 태봉주(泰封主)：신라 말기에 철원에서 건국한 궁예(弓裔)를 가리킴.

가 백성들을 희생시켜 자기 욕망을 채우며 오직 받아들이는 데 혈안이 되어 옛 제도를 준수하지 않았는바 1경(頃)의 토지에 대한 조세(租稅)가 6석(石)이요 역참[驛]을 관리하는
집에 3속(束)의 실(絲)을 부과함으로써 그 만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와 길쌈을 걷어치우고 유리 분산하는 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일체 조세를 옛날 제도에 의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성종(成宗) 성종(成宗)：고려 왕조의 제6대 왕.

11년에 국가 토지[公田]에 대한 조세를 판정하여 4분의 1을 받았는데 논[水田]에 대해서는 상등 답 1결에 조세[租]가 3석 11두 2승(升) 5홉(合) 5작(勺)이요, 중등 답
1결에 조세가 2석 11두(斗) 2승 5홉이요 하등 답 1결에 조세가 1석 12두 1승 5홉이었으며 밭[旱田]에 대해서는 상등 전 1결에 조세가 1석 12두 5홉 5작이요, 중등
전 1결에 조세가 1석 10두 6승 2홉 5작이요, 하등 전 1결에……[*역자 주：이 부분의 글자가 빠져 있음.][또 상등 답 1결에 조세가 4석 7두 5승이요, 중등 답 1결에
3석 7두 5승이요, 하등 답 1결에 2석 7두 5승이며 상등 전 1결에 조세가 2석 3두 7승 5홉이요, 중등 전 1결에 1석 11두 1승 5홉이요, 하등 전 1결에 1석 3두
7승 5홉이었다.]

문종(文宗) 4년에 수재, 한재, 충재, 상(霜)재를 판정하여 밭 1결을 십등분하여 피해가 10분의 4에 해당할 때에는 조세를 삭감하고 피해가 10분의 6에 해당할 때에는 조세와
포(布)를 삭감하며 피해가 10분의 7에 해당할 때에는 조세와 포 및 부역을 다 면제하였다. 동 23년에 전세(田稅)를 규정하여 10부(負)를 단위로 하여 쌀 7홉 5작씩을 내게
하였는데 1결이 될 때에는 쌀이 7승 5홉이요 20결이 될 때에는 쌀이 1석(石)이었다.[공민왕(恭愍王) 공민왕(恭愍王)：고려 왕조의 제31대 왕.

5년에 지시를 내리기를 "서북지방의 토지에 대해서는 일찍이 조세를 받은 적이 없이 국방 경비에 충당하여 온 지가 오래였는데 근래에는 대부분을 권력 있는 자들이 이를 겸병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는 관가에서 검열 단속하고 매 1결에 1석씩 부과하여 군사상 수요로 지출하게 하라!"고 하였다. 동 11년에 제학(提學) 백문보(白文寶) 백문보(白文寶)：고려 말기의
저명한 정치가이며 문학가로서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른 사람.

가 차자(箚子) 차자(箚子)：임금에게 올리는 간단한 형식의 상소문(上疏文).

를 올려 건의하기를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는 한(漢)나라에 모방하여 10분의 1에 해당한 조세를 받을 뿐인데 경상도의 전세는 다른 도와 동일하건마는 수륙 운반비[漕輓之費]가 역시
조세의 배나 되오니 청컨대 처음 지정된 정장(丁壯)들에게 7결씩을 더 주어서 조세에 따르는 비용을 충당하게 하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우왕[辛禑] 2년에 헌사(憲司)에서 전쟁과
흉년이 거듭되고 군량이 떨어진다 하여 공신들이 받는 소작료에서 3분의 1을 받고 사원 토지에 대해서는 절반을 받으며 국왕과 왕후에게 소속된 관아의 전세로 받아들인 이외의 여유분을
전부 군사상 수요에 보충하자는 것을 제의하니 우(禑)왕이 이 말을 좇았다. 이제 고려시대의 세법(稅法)을 상고하건대 전후에 여러 차례 변경되었는데 역사에 명확한 기록이 없어서 지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백문보(白文寶)의 상소를 보면 최초에는 10분의 1로 세율[率]을 정하였던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논평에 이르기를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뒤에 먼저 전제를 바로잡아 관리와 백성들에게 분여하여 나라에는 일정한 법이 있고 양반과 평민들을 자기
직업에 안착하도록 하였으며 문종(文宗)은 겸손과 검박을 숭상하고 지출을 절약하여 집집마다 풍족히 살며 국가 창고에는 곡식이 언제나 차 있었는데 의종(毅宗) 의종(毅宗): 고려
왕조의 제18대 왕.

, 명종(明宗) 명종(明宗): 고려 왕조의 제19대 왕.

이후부터는 권력 있는 간신들이 정권을 독단하였으며 원(元)나라와의 관계가 밀접하게 된 뒤에로는 무제한한 착취와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긁어 들이는 과세로 인하여 호수와 인구는 날로
줄어들고 말세의 정치가 혼란하여 호적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으며 전시과(田柴科)가 폐지되어 토지는 사유로 되었다. 그리하여 부호와 권신들이 제각기 겸병을 일삼아 일망무제한 전야를
산과 하천으로 경계를 삼고 있으며 양민(良民)들은 모조리 대신들의 손아귀에 들고 나라는 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제현(李齊賢) 이제현(李齊賢)：고려 말기에 여러 차례 재상을 지낸 명신이요 저명한 문인으로서 호는 익재(益齋).

은 말하기를 "등문공(滕文公)이 맹자(孟子)에게 정전제도에 대한 것을 물으니 맹자가 대답하기를 '옳은 정치[仁政]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지 않으면 정전이 균일할 수 없고 녹봉[穀祿]이 공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포악한 임금과 탐욕스러운 관리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헐어버리는 것이다. 일단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은 뒤에는 밭을 분배하거나 녹봉을 제정하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삼한(三韓)지역은 사면[四方]으로부터 수로와 육로로 모여드는 데가 아니기 때문에
풍부한 물산과 재산을 모을 만한 조건이 없어서 백성들이 믿는 것이란 단지 토지를 경작하는 것뿐이다. 압록강(鴨綠江) 이남은 대체로 전부 산이요 매년 경작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은
전연 없거나 있다 하여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런 형편에 토지 경계의 바로잡는 문제를 홀시한다면 그 이해(利害)관계가 중국에 비하여 천양지차로 될 것이다. 태조가 신라(新羅)의
혼란한 정치와 태봉(泰封)의 부화 난폭한 제도를 물려받은 뒤에 온갖 사업을 새로 조직하기에 겨를이 없어서 다만 구분전제도[口分之法]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4대를 지나 경종(景宗)이
전시과(田柴科)를 설치하였는데 비록 불충분한 점은 없지 않으나 역시 옛날 세록(世祿)을 주던 의미였다. 그러나 9분의 1을 받던 조법(助法)과 10분의 1을 받던 부세[賦]법을
실시하는 것과 관리와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히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처 논의를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후세에 와서 여러 번 이런 제도를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은 잘되지 않고
말았다. 대개 처음부터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데 치중하지 않았으니 근원을 흐리게 하고도 하류가 맑게 하려고 한들 될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당시의 여러 신하들 중에서 맹자의
말씀대로 정전법을 연구하여 이를 보급하기에 노력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고려 말기에 헌관(憲官) 조준(趙浚) 조준(趙浚)：고려 왕조에서 밀직사사(密直司事) 겸 대사헌 벼슬을 하였고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사람. 호는 우재(吁齋).

이 전제를 회복할 데 대하여 글을 올려 제의하기를 "대체로 옳은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데로부터 시작되는바 국가 운명의 장단(長短)은 백성들의 고락(苦樂)에 달려
있고 백성들의 고락은 전제의 공평 여부에 관계됩니다. 옛날 문왕과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정전제도로 백성을 다스렸기 때문에 주(周)나라에서는 그의 통치를 800여 년이나
계속하였고 진(秦)나라에서는 정전제도를 철폐하였기 때문에 겨우 2대[二世]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뒤에 이어 전제를 제정하여 모든 관리에게는 벼슬
품계에 따라 토지를 주었다가 본인이 죽으면 그것을 회수하였고 부병(府兵)들은 20세에 토지를 탔다가 60세에 도로 바쳤습니다. 대체 토지를 받은 일체 관리들이 죄를 지게 되면 이를
회수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마다 조심하여 감히 법을 위반하지 못하였으며 예의(禮義)가 보급되고 풍속이 아름다웠으며 군대에 있는 군인들이나 지방의 교통기관에 근무하는
아전[吏]들도 각각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고 안락한 정착생활을 하게 되며 국가는 자연 부강하게 되어 천하를 집어삼키려던 요(遼)와 금(金)이 우리나라에 인접하여 있었지마는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은 태조께서 전국의 경지를 분배하여 백성들과 함께 복리를 같이 누리며 생활을 풍족하게 하여주고 사상을 단결시켜 국가 천만 대의 기초를 축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조 이후에는 무직자[閑人], 공신, 음관(蔭官)들과 귀순하여 온 타국 백성들에게도 가급전(加給田)과 보급전(補給田)을 주고 과거에 급제한 자에게 주는 별사전(別賜田)의
명목이 대대로 증가되었습니다. 토지를 맡은 관리는 복잡한 사무를 감당하지 못하였으므로 토지를 주고 회수하는 제도가 점차 문란해지고 간교한 무리들이 이런 틈을 타서 온갖 기만행위를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벼슬을 하는 자와 출가한 자들이 무직자로서 받은 토지를 계속 경작하고 있으며 군대에 입대하지 않은 자가 허위 수단으로 군전(軍田)을 받으며 아비는 협잡을
하여 제 마음대로 자식에게 토지를 넘겨주며 자식은 이것을 엄폐하여 국가에 바치지 아니하여 선대 임금들이 제정한 법이 해이하여져서 겸병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군인[兵者]이란 나라를 보위하며 국경을 지키기 위하여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기름진 땅을 떼 내어 42개의 도(都)와 부(府)에 복무하는 군사 20여만 명의 녹봉에
충당하며 그들의 피복, 식량, 무기들이 모두 이 토지에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따로 군사비용이 들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는 곧바로 삼대(三代)시절의 병역의무를
농지에다 결부시켰던 유풍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군사제도와 토지제도가 다 폐지되어 매약 불의의 사변에 부딪치게 되면 농민들을 몰아내어 군대로 보충하기 때문에 군사가 약해서
적에게 패하며 농량[農食]을 갈라내어 군사를 먹이기 때문에 호수[戶]가 줄어들고 고을[邑]은 없어지게 됩니다.

선대 임금[祖宗]들이 제정한 지공무사한 전제에 의하여 분여한 토지가 한 가정의 부자끼리 주고받는 사유물로 되며 제집에 있어서 벼슬을 않은 자와 한 번도 봉족(奉足)
봉족(奉足)：조선시대에 입대 군인이나 부역에 나간 사람의 후방을 책임진 자.

이나 군대에 복무한 일이 없는 자가 가만히 앉아서 금의 옥심[玉食]으로 향락을 누리고 있는 반면에 밤낮으로 임금을 시위(侍衛)하는 신하와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신고를 겪은
군인들은 도리어 1묘(畝)의 토지도 받지 못하여 자기의 부모처자가 굶주리고 있으니 그들에게 어떻게 충성과 의리를 타이르며 사업에서 성과를 올리라고 하겠는가? 안으로는 호적과 토지
및 법령을 맡은 관리들, 밖으로는 지방관과 염찰사들이 자기의 본신 직무는 폐지하고 날마다 토지송사[田訟] 체결에 매달려서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문부를 처리해야 하며 증거를 캐기
위하여 농민과 노인들에게 연유를 조사하며 소송에 관계된 사람들이 옥중과 법정에 차고 넘으며 이들은 농사를 전폐하고 판결을 기다리며 수개월간의 문건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불과 1묘에
대한 시비가 몇 십 년을 끌어 나갑니다. 이와 같이 침식을 잊을 정도로 미처 판결을 해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토지의 사유[私田]가 분쟁의 단서로 되어 소송사건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자식과 부모 사이도 한 고랑의 밭에 대한 문제가 혹 뜻대로 되지 않으면 도리어 원망이 생기거든 하물며 형제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토지사유[私田]로
인하여 인간도덕을 짐승과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심지어 최근 연간에는 겸병하는 폐단이 더욱 심하여 간사하고 흉측한 무리들의 점유한 토지가 몇 고을을 포괄하고 산과 하천으로 계선을
삼고 있으며 그것을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세전지물이라고 하며 다른 사람들이 대대로 가꾸어 오던 뽕나무와 지어 놓은 집을 모조리 수탈하게 됩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가엾은 백성들이
사방으로 유리 분산하고 있으니 이는 토지의 사유제도가 분란의 원인을 조성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간관(諫官) 간관(諫官)：봉건시대에 국왕의 잘못을 충고하는 전임관직인데 조선의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관리의 통칭.

이행(李行) 이행(李行)：고려 말기에 예문대제학(藝文大提學) 등 요직에 있었으며 호는 기우자(騎牛子).

이 말하기를 "부호와 억센 자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국가 경비가 고갈되며 조세(租稅)가 가혹하고 증대되어 백성들이 피폐하며 강한 자와 약한 자들이 서로 물고 뜯어 분쟁과 소송이
번잡하며 골육(骨肉)지친끼리 서로 알륵을 조성하여 풍속이 퇴폐하게 되니 이는 토지사유에 따르는 폐단이요 부호들이 세력을 잃게 되면 원망과 비방이 종식하기 어려우며 선비[士族]들이
직업을 잃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우며 토지가 많게 되면 조사 처리를 명백히 하기는 어려우며 문부가 복잡하고 많으면 사실을 정확히 구명하기 어려우며 간교한 아전들이 기만과 사기를
일삼으면 이를 미처 적발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것이 폐단을 없애기에 힘이 드는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마음에 맞게 되면 기뻐하는 자가 많아서 원망과 비방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선비로서 직업이 없는 자에게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짓게 하며 관직을 가진 자에게 녹봉을 주어 농경에서의 수입을 대체시키면 그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정직하고 청렴하여 신망이 있는 자를 골라서
염찰사로 임명하며 청렴하고 민첩하여 재간이 있는 자를 골라서 지방관[守令]으로 임명한 다음 지방관들은 각각 한 고을[邑]씩 맡아서 사실을 조사 처리하게 하고 염찰사들은 한 개의
도(道)를 맡아보아 지방관들의 잘하고 못하는 데 따라 승급 또는 철직을 시키면 토지에 대한 내용을 명백히 파악할 것이요 문서[簿書]에 대한 조사가 세밀할 것이요 간교한 아전들의
기만 협잡을 적발할 수 있을 것이니 폐단을 제거하는 방법에서 무엇이 어렵겠는가? 이렇게 하면 창고들에는 곡식이 차서 용도의 여유가 생길 것이며 녹봉을 후하게 주어 청렴한 습성들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며 가렴주구가 없어져서 백성들의 생활이 펴일 것이며 분쟁과 소송이 없어져서 풍속이 순후하게 될 것이요 농촌에는 농사가 잘 되고 부세[賦]로 받아들이는 것을 적게
하며 호수와 인구가 증가하고 역사[徭役]를 공편하게 시키게 되면 이상의 폐단들을 제거하기에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경전[傳]에 이르기를 '교화를 혁신하면 정치를 잘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옳은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데로부터 시작한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제 조준(趙浚) 등의 이론을 보면 그들의 본의가 모두 공평한 데로부터 출발하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들의 말만은 실로 변경할 수 없는 이론이다.[이상은 고려의 전제를 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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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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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田制 大抵倣唐制. 括墾田數分膏瘠 自文武百官至府兵閑人 莫不科授 身沒並納之於公. 唯府兵 年滿二十始受 六十而還. 有子孫親戚則遞田丁 身有疾者 亦許遞田. 無者 籍監門衛. 七十後 給口分田
五結 收餘田. 無後身死者及戰亡者妻 亦皆給口分田. 又有公廨田 給庄宅ㆍ宮院ㆍ百司ㆍ州縣ㆍ館驛 皆有差. ○太祖初定役分田. 統合時 朝臣軍士勿論官階 視人性行善惡 功勞大小 以差給之.
景宗始定職官田柴科亦不論官階 定以人品. 紫衫以上 作十八品 一品田柴各一百十結. 以次遞減至十八品 田三十二結 柴二十五結. 又以丹衫以上 作十品 一品田六十五結 柴五十五結. 遞減至十品 田三十結
柴十八結. 緋衫以上 作八品 一品 田五十結 柴四十結. 遞減至八品 田二十七結 柴十四結. 綠衫以上 作十品 一品 田四十五結 柴三十五結. 遞減至十品 田二十結 柴十結. 此外又有雜職諸品.
其未及此科者 皆給田十五結.穆宗 改定文武兩班田柴科. 至文宗 又更定其制 自中書令ㆍ尙書令ㆍ門下侍中 至軍士ㆍ閑人ㆍ雜類 分爲十八科. 自一百結 至十七結爲差 以爲常式. 第一科田百結 二科九十結
三科八十五結 四科八十結 五科七十五結 六科七十結 七科六十五結 八科六十結 九科五十五結 十科五十結 十一科四十五結 十二科四十結 十三科三十五結 十四科三十結 十五科二十五結 十六科二十二結
十七科二十結 十八科十七結. ○其各品柴科 此不具載. 六品以下 七品以上無連立子孫者之妻 給口分田八結. 八品以下戰亡軍人 通給妻口分田五結. 五品以上戶夫妻皆死 無男而有未嫁女子者 給口分田八結
女子嫁後還官.文宗八年 判凡田品 不易之地爲上 一易之地爲中 再易之地爲下. 其不易山田一結 準平田一結. 一易田二結 準平田一結. 再易田三結 準平田一結. 二十三年 定量田步數. 田一結方三十三步
六寸爲一分 十分爲一尺 六尺爲一步 二結方四十七步 三結方五十七步三分 四結方六十六步 五結方七十三步八分 六結方八十步八分 七結方八十七步四分 八結方九十步七分 九結方九十九步
十結方一百四步三分.太祖元年 謂有司曰"泰封主以民從欲 唯事聚斂 不遵舊制. 一頃之田租稅六石 管驛之戶賦絲三束. 遂使百姓 輟耕廢織 流亡相繼. 自今租稅 宜用舊法."成宗十一年 判公田租
四分取一. 水田 上等一結 租三石十一斗二升五合五勺. 中等一結 租二石十一斗二升五合. 下等一結 租一石十二斗一升五合. 旱田 上等一結 租一石十二斗一升五合五勺. 中等一結
租一石十斗六升二合五勺. 下等一結 缺 又水田 上等一結 租四石七斗五升. 中等一結 三石七斗五升. 下等一結 二石七斗五升. 旱田 上等一結 租二石三斗七升五合. 中等一結 一石十一斗二升五合.
下等一結 一石三斗七升五合. 文宗四年 判水旱蟲霜爲災 田一結率十分爲定. 損至四分除租 六分除租布 七分租布役俱免. 二十三年 定田稅以十負出米七合五勺 積至一結米七升五合 二十結米一石.恭愍王五年
下旨曰"西北面土田 未嘗收租 委之防戍 其來尙矣 近來權勢多所兼幷. 自今官爲檢括 每一結賦一石 以支軍需." 十一年提學白文寶上箚曰"國田之制 取法於漢 十分稅一耳. 慶尙之田稅 與他道雖一
而漕輓之費 亦倍其稅. 請元定足丁 加給七結 以充稅價."辛禑二年 憲司以兵荒相仍 軍食罄竭 請於功臣田租 三分取一. 寺社田 收其半. 兩殿所屬官司田科 斂外羨餘 並充軍需. 從之. ○今按麗時稅法
前後屢變 史無明文 今不能詳. 然以白文寶箚子觀之 其初則以什一爲率耳.麗史論曰"太祖旣一三韓 首正田制 分給臣民. 國有定制 士庶安業. 文宗恭儉節用 家給人足 太倉之粟 紅腐相因. 毅明以降
權奸擅國. 逮事胡元. 誅求無厭 科斂萬端 戶口日耗 叔季失德 版籍不明. 田柴之科 廢而爲私田. 勢家世族 爭相兼幷 田連阡陌 標以山川. 良民盡入於巨室
而國以陵夷."李齊賢曰"滕文公問井地於孟子. 孟子曰'仁政必自經界始. 經界不正 井地不均 }\祿不平. 是故暴君汚吏 必慢其經界. 經界旣正 分田制祿 可坐而定也.'三韓之地 非四方舟車之會.
無物産之饒 貨殖之利 民生所仰 只在地力. 而鴨綠以南 大抵皆山 肥膏不易之田 絶無而僅有也. 經界之正 若慢則其利害 比之中國相萬也. 太祖繼新羅衰亂 泰封奢暴之後 萬事草創 日不暇給
止爲口分之法. 歷四世 景宗作田柴之科 雖有疎略 亦古者世祿之意. 至於九一而助 什一而賦 與夫所以優君子小人者 則不暇論也. 後世屢欲理之 終於苟而已矣. 蓋其初 不以經界爲急.
撓其源而求流之淸何可得也? 惜乎! 當時群臣 未有以孟子之言 講求法制 啓迪而力行之也."麗末 憲官趙浚等 上書請復田制 曰"夫仁政 必自經界始. 國祚之長短 出於民生之苦樂. 民生之苦樂
在於田制之均否. 文武周公 井田以養民 故周有天下八百餘年. 秦毁井田 二世而亡. 太祖旣一三韓乃定田制. 百官則視其品而給之 身沒則收之. 府兵則二十而受 六十而還 凡士大夫受田者 有罪則收之.
人人自重 不敢犯法 禮義興而風俗美. 府衛之兵 州郡津驛之吏 各食其田 土着安業 國以富强. 雖以遼金虎視天下 而與我接境 不敢呑噬者 由太祖分三韓之地 而與臣民共享其祿 厚其生結其心
爲國家千萬世之元氣故也. 自是以來 閑人功蔭 投化入鎭 加給補給. 登科別賜之名 代有增益. 掌田之官 不堪煩瑣. 授田收田之法 漸致隳弛 奸猾乘間 欺蔽無窮. 已仕已嫁者 尙食閑人之田. 不踐行伍者
冒受軍田. 父匿挾而私授其子 子隱盜而不還於公. 祖宗之法旣壞 而兼幷之門開. 兵者所以衛王室 備邊虞者也. 國家割膏腴之地 以祿四十二都府甲士十萬餘人. 其衣糧器械 皆從田出. 故國無養兵之費
卽三代藏兵於農之遺意也. 今也兵與田俱亡 每至倉卒 則驅農夫以補兵. 故兵弱而餌敵 割農食以養兵 故戶削而邑亡. 以祖宗至公分授之田 爲一家父子之所私. 不一出門而仕朝 不一奉足而從軍者 錦衣玉食
坐享其利. 夙夜侍衛之臣 百戰勤勞之士 反不得一畝之耕 以養其父母妻子 其何以勸忠義而責事功哉? 內而版圖典法 外而守令廉使 廢其本職 日聽田訟 不避寒暑 句稽文卷. 檢覆證左 訊之佃戶 訊之故老.
凡其辭連 盈獄滿庭 廢農待決. 數月之案積如丘山. 一畝之爭 連數十年. 忘寢廢食 剖決不給者 以私田爲爭端而訟煩也. 子之於父母 一畝之求 或不如意 則反生怨恨 况於兄弟乎?
是以私田而陷人倫於禽獸也. 至於近年 兼幷尤甚 奸兇之徒 跨州包郡 山川爲標 指爲祖業. 凡人累世所植之桑 所築之室 皆奪而有之. 哀我無辜 流離四散 此 以私田爲亂之首也."諫官李行曰"豪强兼幷
國用乏竭. 租稅苛倍 生民凋悴. 强弱相呑 爭訟繁多. 骨肉相猜 風俗壞敗 此私田之弊也. 富强失利 怨謗難弭. 士族失業 生理難繼. 田地廣大 審覆難悉. 簿書煩多 考核難精. 奸吏隱匿 覺察難及
此革弊之難也. 雖然事出於公正 合於人心 悅之者衆 怨謗可弭矣. 士之無職者授田 使得農耕. 有職者給俸 以代其耕生理可繼. 擇公廉有重望者爲按廉 擇廉敏精幹者爲守令. 守令各考一邑 以核其事實.
按廉統察一道 以黜陟守令. 田地審覆可悉 簿書檢察可精 奸吏隱匿可察矣. 其救之之術 何難之有? 至於倉廩實而儲胥有餘 祿俸厚而廉恥可興 檢斂息而民生可紓 爭訟絶而風俗可厚. 田野闢而賦斂薄
戶口繁而徭役均 其革之之利 爲如何哉? 傳曰 更化則可善理. 又曰 仁政必自經界始."今按浚等之論 其意未必一出於公 而其言則實不易之論也. 以上高麗田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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