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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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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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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호구(戶口)

『주례(周禮)』에 의하면 대사도(大司徒)가 각 영주국 지도와 매개 지역 백성들의 수효를 장악하여 국왕을 도우며 여러 나라들을 편안케 하였다.

사민(司民-인구 계산을 맡은 벼슬)이 전국 백성의 수효를 기록하는 임무를 맡는데 남녀를 불문하고 생후 7∼8개월 이상 되면 호적에 기입하되 국내의 도시와 지방에 따라 남녀별로
사망자 및 출생자 수를 쓰고 지우는 일을 한다.[생치(生齒)라 함은 남자는 여덟 달 만에 이가 나고 여자는 일곱 달 만에 이가 난다. 판(版)은 곧 호적(戶籍)이고 국중(國中)은
왕국(王國)은 안이고 올린다 함은 등록(登錄)함이고 내린다 함은 제적(除籍)함이니, 해마다 나는 자가 있으면 호적에 올려서 싣고 죽은 자는 내려서 제(除)한다.]

3년이 되면 전국에 걸쳐 호구의 증감과 생활형편을 크게 고사[大比]하는데 그 일은 사구(司寇) 사구(司寇)：중국 주나라 때 여러 나라에 있던 6경(卿) 중의 하나로서 법을 맡은
관직명.

를 시켜서 실행한다. 사구는 10월이 되면 사민(司民)이라는 별에 제사를 지내고 전국 백성의 수효 총계를 국왕에게 올린다. 국왕은 이것을 절을 하면서 받아 가지고 정본은 호적창고에
보내어 비치하며 내사(內史) 내사(內史)：중국 주(周)나라 때 국왕의 측근에서 관직ㆍ녹봉ㆍ행정 기구의 개편 등 직무를 주관하던 관직명.

, 사회(司會) 사회(司會)：중국 주나라 때 국가의 회계를 맡은 관직명.

, 총재(冢宰) 총재(冢宰)：중국 주나라 때 모든 관리를 통솔하던 관직명.

등은 베껴낸 호적 부본을 비치하여 국왕의 일을 보좌한다[그 정본(正本)은 천부(天府)에 올리고 내사(內史)ㆍ사회(司會)ㆍ총재(冢宰) 삼관(三官)의 맡는 자는 곧 그
부본(副本)이다.]고 하였다.

서간중(徐幹中)의 논평에 이르기를 "대체로 국가가 태평하게 되는 것은 모든 사업이 잘 진행되는 데 있다. 사업이 잘 진행되는 것은 백성에게 부역을 균일하게 시키는 데 있고 부역의
균일은 백성의 수효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있으니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그 국가의 정치를 잘하는 기본으로 된다. 그러므로 옛날 제왕[先王]들은 전국 백성의 많고 적은
수효를 정확히 알아서 아홉 가자 직업[九職] 아홉 가지 직업[九職]：『주례』에 있는 말로서 농민, 원예, 목축, 식림, 장인, 길쌈하는 여자……등과 같은 각종 직업.

을 나누어 맡겼다. 이렇게 한 뒤에는 수고하는 자와 게으른 자를 알 수 있을 것이며 부역도 균일하게 될 것이다. 부역을 균일하게 시키면 상부에서나 하부에서 모두 자기의 지혜와
노력을 짜내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되고도 모든 사업이 잘 진행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업이 잘 진행되므로 인하여 국가는 부강해지고 대소사가 불편을 느낄 것이 없으며
백성들이 화목하여 하부로부터 원망이 없을 것이니 이렇게 되고도 정치가 잘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므로 샘은 근원이 있어야 하고 정치는 근본문제를 잘 처리하는 데 있을 뿐인
것이다.

때문에 『주례(周禮)』에 사구(司寇)가 백성의 수효를 국왕에게 바치고 국왕은 그것을 절을 하면서 받아 가지고 호적창고에 보내어 비치하며 내사(內史), 사회(司會), 총재(冢宰)
등은 그 부본을 가지는바 이와 같이 백성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위정자(爲政者)들은 이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경작지를 가지지 않고 작물을 심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아무리 농부가 있다 한들 어떻게 그들의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옛날 제왕들이 육향(六鄕), 육수(六遂) 제도를 마련한 것은 그 조직으로써 백성을 결속하는 기본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인(鄰)과 비(比)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도록 서로 담보하며 재난을 당하였을 때 서로 보호하게 하며 상과 벌이 서로 연관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나들이[出入], 출생, 사망, 선악과 나라에
대한 복종의 척도들을 모두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난폭한 임금이 정치를 하게 된 때로부터는 인구가 호적에서 누락되며 장정들이 부역을 도피하여 도망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두 옳지 못한 생각을 품고 허위 농간을 하게 되니 이렇게 되면 엄혹한 형벌과 준절한 법령으로도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인구 수효는 모든 사업의 기초로서 거기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있어야만 토지의 분배와 공물, 부세의 수입, 기계도구의 제조, 녹봉제도의 제정, 사냥과 부역의 실시,
군대의 편성 등 사업을 할 수 있으며 국가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사삿집에서는 이에 따라 제도를 세우는 것이니 국가의 의례가 구비되는 것과 형벌을 쓰지 않게 되는 것도
모두 이 인구의 수효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데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동진(東晉) 애제(哀帝)의 흥령(興寧) 2년 3월 경술(庚戌)에 전국의 호수와 인구를 철저히 조사하여 토단(土斷) 토단(土斷)：주민들이 거주하는 주소를 표준으로 하는 것.

법을 실행하는데 이것을 경술년 법령[庚戌制]이라고 하였다.[토단(土斷)이라 함은 진(晋)나라가 호족(胡族)에게 몰려서 서북 사민(士民)이 동남에 가서 교우(僑寓)하고 있는 자가
현재의 주거(住居)에 토착(土着)한 사람과 같이 단정(斷定)한다함을 이름이다.]

효무제(孝武帝) 때에 범영(范寗) 범영(范寗)：중국 동진(東晉) 때의 경학자(經學者). 자는 무자(武子). 저서로 『춘추곡량전집해(春秋穀梁傳集解)』가 있다.

이 당시의 정책에 관하여 건의하기를 "옛적에 중부지역(황하 하류)이 소란하여 백성들이 양자강 하류 지방에 산재하여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돌아올 것 같기 때문에 본적지의 호적에 달아
두도록 하였으나 그 후 세월이 점차 오래됨에 따라 그들은 객지에서 각각 자기 직업에 안착하여 선대 분묘까지 그곳에 두게 되었으므로 사실상 본 고향의 호적을 가지고 있지 않고
객지에서 영구한 거주를 하고 있으니 지금에는 지역관계를 분명히 갈라서 민호들을 고착시키고 인재등용조례를 밝히는 동시에 지역편성제도를 실시해야 합니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들은 필시 '사람마다 좋은 곳으로 가겠다 하여 부역을 회피할 우려가 있다'고 하겠지마는 이는 바로 그 지방 착취자들의 고집이요 정당한 논거로는 되지 않습니다. 옛날 국토를 상실한
임금도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국왕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며 춘추시대의 외국 사람이 타국에 벼슬할 때에는 본국의 가계를 따르지 않는 법이 있었습니다. 또 온 천하 사람들의 선대를
따져보면 모두 국가의 변천에 따라 이동된 것인데 어찌 오늘에만 실행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효무제(孝武帝)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안제(安帝)의 의희(義熙) 9년에 송공(宋公) 유유(劉裕)가 호적은 사람의 거주지를 본위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 제왕들은 정치제도를 세울 때에 전국의
지대별로 순위에 따라 계선을 나누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지방에 편안히 살게 하였기 때문에 삼대(三代)적에는 정전(井田)제도가 잘 실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秦)나라에서 그
제도를 개혁하였고 한나라에서도 진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부호들이 겸병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폐단이 생겼던 것입니다. 서한(西漢) 때에는 전경(田景) 전경(田景)：중국 산동지방에 살던
종족 이름.

의 족속을 서울 주변 지방 세 고을에 대규모로 이주시켜 바로 그 지대에 지방기관을 설치하고 다시 제(齊)나라, 초(楚)나라의 본적에 붙이지 않았던바 이때에 전국에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그들의 이주한 지방이 고향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영가(永嘉) 연간으로부터 부득이 남방으로 오게 되어 회해(淮海)지대에 임시 거주하면서 정부에서 실지(失地) 회복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국토통일사업을 계획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였기 때문에 백성을 어떻게 처리해서 안착시킬 일까지는 염두에
두지 못하였습니다.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에게 이르러서는 백성들의 안착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 정치상 큰 장애로 된다 하여 경술(庚戌)년에 소재지에 고착시키는 토단(土斷)제도를
실시하여 그들의 생업을 어느 정도 하였던바 이때에 생활이 향상되고 국가가 풍부하게 된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연대를 지난 결과 어느 정도
설정하였던 제도가 점차 해이하여 여기저기 분산적으로 살면서 향촌의 단위 조직이 문란해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국가의 교화[王化]가 전일하게 마치지 못하고 백성의 고통도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이것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정치가 잘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이란 습성에 물젖어서 새로운 사업에는 그들과 의논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의 고향을
'상재(桑梓)'라고 하는 것은 자기 조상이 거기에서 살았다는 의미로서 그 지대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술년의 토단법(土斷法)에 의거하여 그 기본을 어느 정도
정리하여 성과가 약간 나타나게 됨을 보아 도덕적 미풍[仁義]으로써 교양하는 동시에 국가의 위신으로써 그들을 고무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장강[大江]을 뛰어넘어
황하(黃河)를 걸터앉으며 전국을 통일하여 옛 지역을 회복하면 그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던 지망을 당장에 성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이 처음에는 잠시 힘들지마는 나중에 반드시
용이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그 곳에 고착시키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당(唐)나라 제도에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갓난아이를 황(黃)이라 하고 네 살이 되면 소(小)라 하고 16세부터는 중(中)이라 하고 20세부터는 장정[丁]이라 하고 60세부터는
노인이라 하여 매년 문부에 기재하였다가 3년만큼 호적을 세 부씩 작성하여 한 부는 본 고을[縣]에 두고 한 부는 주(州)에, 한 부는 호부(戶部)에 각각 보내었다.

중국 역대 왕조의 호구 증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복하고 전 중국을 통일한 뒤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형벌이 소용없을 정도로 국가가 태평하였는데 그때의 인구는 1천 370만 4천
913명이었으니 이는 주나라의 전성[極盛]시대였다. 주평왕(周平王)이 동쪽으로 서울을 옮긴 후 30여 년 만인 장왕(莊王) 13년-제환공(齊桓公) 2년에는 서울로부터 5천 리 바깥
지방은 주나라 황제의 통치를 받지 않았는데 태자(太子)를 비롯한 고급 관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의 인구가 1천 94만 1천 923명이었다.

한나라는 고조(高祖) 때부터 평제(平帝)의 원시(元始) 2년에 이르러 호수는 1천 223만 3천여 호요 인구는 5천 959만 4천 900명이었으니 이는 전한(前漢)의 전성시대였으며
광무제(光武帝)의 중원(中元) 2년에는 호수가 427만 9천 600여 호요 인구가 2천 100만 7천 800명이었고 환제(桓帝)의 영수(永壽) 2년에 이르러 호수가 1천 607만
900호요 인구가 5천 6만 6천 명이었으니 이는 후한(後漢)의 전성시대였다.

소열(昭烈) 소열(昭烈)：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건국자 유비(劉備)의 시호.

은 촉한(蜀漢)을, 조조(曺操) 조조(曺操)：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정치가, 군사가, 시인이며 위(魏)나라를 건국한 사람.

는 중부 중국[中原]을, 손권(孫權) 손권(孫權)：중국 삼국시대에 남방에서 오(吳)나라를 창건한 사람.

은 강동(江東)을 각각 할거함으로써 세 나라가 솥발처럼 대치하여 전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에 촉한은 호수가 28만이며 위(魏)는 호수가 66만 3천 400이며 오(吳)는 호수가
52만이었다.

진무제(晉武帝) 태강(太康) 원년(元年)에 오(吳)를 정복한 후로는 전국의 호수가 245만 9천 800이며 인구가 1천 616만 3천 800명이었다.

수문제(隋文帝)는 후주(後周)를 정복하여 호수 360만을 쟁취하였고 진(陳)나라를 정복한 뒤에 또 50만 호를 편입한 다음 검소하고 절약하는 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결과 그의 아들 양제(煬帝) 대업(大業) 2년까지 18년간에 호수가 890만 7천여에 달하였다.

당나라 고조(高祖)의 초년에는 200여만 호를 소유하였으나 정관(貞觀) 정관(貞觀)：중국 당나라 태종(太宗)의 연호.

연간에 정치를 알뜰하게 꾸리었고 풍년도 자주 들어서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에 이르러서는 호수가 891만 4천 700이며 인구가 5천 291만 9천 300명이었으니 이는
당나라의 전성시대였다. 그 후 안녹산(安祿山) 안녹산(安祿山)：중국 당나라 현종(玄宗) 때 북방의 이민족으로 현종의 첩 양귀비(楊貴妃)의 총애를 받아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다가 죽은 사람.

의 반란을 치른 뒤 숙종(肅宗) 건원(乾元) 3년에는 호수가 193만 3천 100이었고 문종(文宗)의 개성(開成) 연대에는 호수가 499만 6천 700호였다.

마단림(馬端臨)이 말하기를 "한나라 이후로는 호구의 다과에 의하여 국가세입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전성시대라도 군, 현[郡國]들에서 올려 보낸 호적상 숫자가 결국 삼대적의
주(周)나라와 전한(前漢), 후한(後漢)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였다. 이 숫자는 대개 부세를 모면하기 위하여 서로 덮어주고 빼어 놓은 것이니 어찌 고증할 나위나 있으랴?" 하였다.

두우(杜佑)는 말하기를 "옛날 성현[昔賢]의 말에 창고가 차면 예절을 알고 의식이 넉넉하면 체면을 차린다는 말이 있으며 공자가 위(衛)나라에 갔을 때 염유(冉有)가 수행하였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훌륭하다! 백성들이 많구나!'하였다. 염우가 묻기를 '이렇게 백성이 많은데 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부유하게 해야 한다'하였다. 염우가 또
묻기를 '벌써 부유해졌거니 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예절을 알도록 교양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문답 내용을 보더라도 국가가 넉넉하면 정치가 바로 되고
가정이 넉넉하면 교양을 줄 수 있음을 알 만하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는 옳바른 정치를 할 도리가 없다. 대체로 개인이 국세를 납부하지 않아서 풍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국가는
부세를 많이 받아서 풍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개인이 국세를 납부하지 않고 도망한다면 그는 그 지방에서 살지 못하게 되어 더욱 가난할 것이며 국세를 많이 받으면 백성이 모두
도망하여 큰 상인들에게 예속되므로 국가재정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이(羸)라 함은 대가(大賈)에 의탁한 집이니 정수(正數) 속에 들어 있는 호(戶)가
이미 부역을 피하면 부랑(浮浪)으로 떠돌아다니게 되어 대가(大賈)에게로 들어가서 고용(雇傭)살이로 붙어살고 그 이익은 대가에게 수납(收納)되는 것이다. 이 설(說)은
『관자(管子)』에 쓰여 있다.]

삼대(三代)시대에는 정전(井田)제도에 의거하여 국세를 받았는데 진(秦)나라에서 그 제도를 폐지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도 진나라의 법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위나라, 진나라[魏晉]
이후로 여러 가지 명목을 붙여서 세를 받았지마는 그 당시의 폐단을 고치지 못하였다. 그 후 동진(東晉)이 양자강 이남으로 온 뒤에는 모용장(慕容垂), 부견(苻堅), 요장(姚萇)
등이 도읍을 중부지역에 번갈아 설정하고 있어서 백성들은 일정한 호적을 가지지 못하고 매우 불합리하게 되었으므로 드디어 해당 소재지에 고착시키는 제도를 설정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경제가 풍족하고 풍속이 순후하게 된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그 후에 그 제도가 해이하여 옛날의 나쁜 폐단이 다시 발생하였으므로 의희(義熙) 연간에 다시 그 법을 실행하였는바
이 성과의 역사적 사실은 옛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수(隋)나라가 북주(北周)의 뒤를 이은 후 대업(大業) 연간에 이르러서는 호수 890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당시는 서위(西魏)의 난리를 겪었으며 또 주(周)나라와 제(齊)나라가
국토를 분할 점유하였고 포악한 임금과 더러운 관리들의 통치하에서 조세는 과중하고 부역에 실달려서 백성들이 견디다 못하여 권력이 있는 자에게 의탁하게 되었으며 법령과 규율이 극도로
문란해지고 간사한 부정행위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고경(高熲)이 인구 유동의 폐단을 보고 수적법(輸籍法)을 제정하여 과세 명목을 일정하게 하는 동시에 그 액면을 경하게
감해주면서[고경(高熲)이 아뢰기를 "사람에 의거하여 세금을 받는 것은 등분을 둔다 하더라도 해마다 받을 때에 증감하는 것이 항상 많아서 관리들이 제멋대로 문부에 더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정한 문부가 없는 이상 계산하고 검열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수적법의 실시를 청하였다. 이 수적부의 양식은 모든 백성의 납세액을 그 문부에 빠짐없이 기입하여
지방관리들이 제멋대로 부역을 시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방식을 모든 비장에 배포하고 매년 1월 5일에 고을 인원을 파견하여 인접지에 있는 5개 당(黨) 혹은 3개 당을 한 개
단위로 하여 이 양식대로 민호의 상하(上下)를 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법을 실행한 뒤로는 관리들의 농간이 없어졌다.] 사람들로 하여금 붙임살이[浮客]란 결국 권력자에게 국가세액의
절반을 빼앗긴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들을 호[氓]로 편입하여 국가사업에 복무하게 하며 또 세를 경감해주는 혜택을 입게 하였다.[붙임살이란 국세를 도피할 목적으로 권력자에게 의탁하여
그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는 자이다. 옛날 한나라 문제(文帝) 3년에 조세를 감해준 일이 있었는데 순열(荀悅)이 논평하기를 "옛날의 10분 1세는 가장 정당한 세제이었다. 한나라
때에 더러 100분의 1세를 받은 적도 있었으니 극히 경(輕)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권력자들의 토지겸병이 많아짐에 따라 붙임살이하는 자가 국가세액의 절반을 바치게 되고 보니
국가에서 주는 혜택은 삼대시대보다 후하다고 하여도 권력자의 착취가 진(秦)나라 때보다 심하였으니 이것은 국가의 혜택이 하부에 침투되지 못하고 권력이 부호로부터 행사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권력자에게만 더 잘살게 해줄 뿐이다. 고경(高熲)이 실시한 감세법[輕稅之法]으로 인하여 붙임살이가 모두 호로 편입되었으니 수(隋)나라가
번성하였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하였다.] 이렇게 백성들에게 먼저 국가의 신임을 보인 다음 그 법을 실시한 결과 백성들은 혜택을 입게 되고 관리들은 나쁜 농간을 하지
못하였다. 수(隋)나라 때에 국가의 창곡이 전국에 저축되어 풍속이 순후하게 된 것은 고경의 힘인 것이다.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전국의 총 호수가 300만 호였는데 천보(天寶) 말에 이르러 130여 년을 지나서야 겨우 수나라의 숫자에 도달하였을 뿐이었다. 당나라의 융성이 서한보다
나았으니 전국의 총 호수가 서한 때에 비하여 초과해야 할 것이나 호적상 통계 숫자가 도리어 300만으로 저하되었다. 이것은 당(唐)나라 때에 인재를 선발하고 관리를 임명함에 있어서
문예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관리의 재능과 실무 능력이 일치하지 않으며 제정하여 놓은 법률이 더러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관직에 따라 실지 책임을 지우는
본의도 없게 되고 보고나 건의에 근거하여 실지 사정을 고찰하는 방법도 없어져서 높은 벼슬만 하면 찬사를 올리게 되었으니 거기에는 경박한 무리와 부화방탕한 도배가 없지 않았다. 일반
경향이 법전을 연구하고 부기로 따지면 속된 자라고 하며 근본문제를 취급하고 지엽문제를 취급하지 않으면 오활한 자라고 하였다. 오직 호화롭게 놀고 지내는 것을 승벽으로 여겨 서로
몰려다니면서 직무를 서리배에게 맡기고 뇌물행위가 관청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호적상 숫자가 이렇게 된 것이다.

옛날부터 정치를 하는 도리는 전국의 인구 수효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해야만 부역을 공평하게 할 수 있어서 모든 사업이 잘되고 국가와 개인이 풍부하게 되며 교육과
문화가 발전되고 생활과 풍습이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재난도 발생하지 않으며 변고와 난리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례』 ｢주관(周官)｣에는 비(比),
여(閭), 족(族), 당(黨), 주(州), 향(鄕), 현(縣), 비(鄙)의 제도를 두어 지방행정체계를 세웠으며 그에 속한 백성들을 통제하였다. 또 백성의 호적을 국왕에게 드리면
국왕이 그것을 절을 하면서 받는다고 하였으니 주나라 때에는 호적사업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취급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정치를 하는 방도가 틀리고 호적이 누락됨에 따라 백성들이 새나 짐승처럼 되어 그들의 유리행동을 제지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들이 못살게 되고 국가도 빈곤하게 되며 옳지 못한
행동이 점차 일어나서 국가가 전복되는 줄을 모르고 있다. 이것이 정치에 있어서의 중요하고도 원대한 고리를 차지하는 것이니 국가를 바로잡는 방도를 구하려면 그 기본을 여기에 두지
않고 되랴?"라고 하였다.

송태조(宋太祖) 송태조(宋太祖)：중국 송나라의 창건자 조광윤(趙匡胤).

가 오대(五代) 오대(五代)：중국 조대의 이름으로서 전오대(前五代)와 후오대(後五代)의 구별이 있는데 당나라 이전의 송(宋)나라ㆍ제(齊)나라ㆍ양(梁)나라ㆍ진(陳)나라ㆍ수(隋)나라는
전오대이며, 송나라 이전의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晋)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는 후오대임.

의 어지러운 뒤를 이어 나라를 창건하였을 때에 전국의 호수가 96만 7천 300호였는데 지방의 할거자를 쳐 부신 후 개보(開寶) 9년에 이르러 전국의 정식 호와
붙임살이[主客戶]까지 합하여 309만 500호였으며 신종(神宗)의 원풍(元豐) 6년에는 전국의 정식 호와 붙임살이의 총수가 1천 7백 21만 1천 700호요, 인구가 2천 4백
96만 9천 300명이었다. 서울을 남쪽으로 옮긴 후 고종(高宗)의 소흥(紹興) 30년에 여러 지구의 정식 호와 붙임살이의 총수가 1천 137만 5천 700호요, 인구가 1천
922만 9천 8명이었다.[마단림(馬端臨)이 말하기를 "서한(西漢)의 호구가 제일 많을 때에는 평균 10호에 48명이 조금 더 되었고 동한(東漢) 때에는 평균 10호에 52명이나
되었으니 주(周)나라의 하농부(下農夫)에 준할 만하며 당(唐)나라의 호구가 제일 많을 때에는 평균 10호에 58명이 조금 더 되었으니 주나라의 중농부의 다음에 준할 만하다.
본조(송나라)의 원풍(元豐) 연대로부터 소흥(紹興) 연대에 이르기까지는 대략 호구가 평균 10호에 인구 20명으로 되어 한 호에 두 명씩밖에 되지 않으니 어찌 이러할 이치가
있겠는가? 이것은 하부에서 이름을 달리하고 호에서 인구를 빼버린 자가 많기 때문인 듯하다"고 하였다.]

섭적(葉適) 섭적(葉適)：중국 송나라 때 강회제치사(江淮制置使) 벼슬을 하였으며 『수심문집(水心文集)』, 『외집(外集)』을 저작한 사람.

의 상소(上疏)[효종(孝宗) 때]에 이르기를 "정치에서의 주요문제는 백성들을 단합시키는 데 있는바 백성이 많으면 토지가 개간되고 국세가 증가하여 국가에 복무할 자가 많아서 군사가
강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국가에서 하는 일에 반드시 복종하고 국가의 하려는 일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전국(戰國) 전국(戰國)：중국 주나라 위렬왕(威烈王)
23년으로부터 주나라가 망할 때까지(기원전 383∼221)의 시기.

시대에는 저마다 백성을 끌어들이는 일에 치중하였는바 상앙(商鞅)은 삼진(三晉) 삼진(三晋)：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조(趙)씨ㆍ위(魏)씨ㆍ한(韓)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건국한 조나라ㆍ위나라ㆍ한나라의 총칭.

으로부터 이주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을 꾀어다가 진(秦)나라 지역에 채우게 하였으며 한(漢)나라 말기에 전국의 혼란이 조성되어 세 나라가 권력을 다툴 때에 손권(孫權)이 산월(山越)
산월(山越)：중국 삼국시대에 절강과 안휘 남방 산악지대에 있던 종족의 이름.

백성들을 잡아다가 자기 백성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배를 타고 먼데까지 가서 섬에 사는 미개 민족까지 포로로 잡아다가 부려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세 나라 중에서
촉(蜀)나라가 망할 무렵에는 호수가 28만이었으며 오나라가 망할 무렵에는 호수가 50여만이었는데 위(魏)나라도 100만 호가 못되어 방대한 지역을 가지고도 통일된 한나라의 수개
군의 인구수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의 많고 적은 것이 그 국가의 강약을 좌우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전국의 군, 현[州縣]들에서
다만 현재 국세 납부자의 숫자만을 계산한 것이므로 거기에는 이미 입대하여 군인으로 된 자 수십백만 명이 제외되었고 집을 떠나 불교나 도교를 믿는 자와 부역 종사 중에 있어서
도첩(度牒) 도첩(度牒)：봉건시대에 불교 승려에게 발급하던 증명서.

을 받지 못한 자 수십만 명도 이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호구가 증가되고 인구의 출생률이 높아서 역사상 전성시대에 거의 가까우며 이 강대한 역량이 천하에 당해낼 자가 없을 듯
하지마는 인구가 지방에 따라 편파적으로 분포되어 균일하지 못하며 또 권력자에게 예속되어 자체가 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토지를 개간하는 이익도 없고 국세수입의 증가도
없으며 부역 나올 많지 않고 국대가 강대하지 못하며 도리어 빈약한 실정이 외부에 발로됩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많은 백성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효과적인가를 모르고 그들의
생활문제를 자연에 맡길 뿐입니다. 그 외에 또 군, 현들에서는 장정과 중정(中正) 중정(中正)：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제(北齊)의 부역제도에서 사용한 16∼17세의 남자에 대한
칭호.

에 따라 비단을 내게 하여 돈으로 받아 가니 이것은 백성들이 이 국토에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받아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옛날 백성을 끌어들이는 일은 대단히 어렵게
되어 주민들이 많아지기를 기다려서 이용하려다가 마침내 그렇게 되지 못한 실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국가가 다사한 이때에 이미 많아졌고 훈련된 백성을 거느려 북쪽으로 밀고
올라간다면 어느 누구가 감히 반항하겠습니까? 그런데 소위 정론가들이 이에 대한 관심을 둔 적이 없으니 이것은 너무나 정치의 기본문제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백성이
있으면 반드시 토지를 경작케 할 것입니다. 이것은 토지를 경작하면 백성들의 생활도 유족하고 국가세입도 증대되며 집에 있을 때에는 부역을 시킬 수 있고 선발하면 군인으로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하여 그대로 처박아 두어서 몸들이 여위게 되고, 그들이 자기 직업을 가질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둔하고 재간이 없는 자는 남의
집에 가서 붙임살이[浮客]를 하게 되며 힘 있고 이속이 밝은 자는 장사도 하고 도적질도 하여 겨우 조석[朝暮] 끼닛거리나 벌지마는 가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풍년이 든 해에도
시장에는 비싸게 정부미조차 없어서 백성은 항상 자기가 요구하는 마되[升斗] 곡식을 보장하여 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게 됩니다. 대체로 보아 관청의 명령에 의하여 국세와 부역을
바치는 자가 3분의 1도 되지 못하며 토지를 소유한 자는 자신이 경작하지 않으며 경작할 수 있는 자는 자기의 토지를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인구가 아무리 번성하여도 국가에서
활용하여 쓰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대체로 오월(吳越) 오월(吳越)：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五代)시대를 거쳐 송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절강(浙江)ㆍ강소(江蘇) 지방에 있었던 국가.

지방이 번창한 것은 당나라 말기로부터 백성들이 그곳으로 모여 살았기 때문인바 그 지방 15개 주의 백성 수효가 전국 인구 절반에 해당합니다. 그 지방의 면적을 따져보건대 백성들을
수용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어깨가 갈리고 옷깃이 바꾸일만치 배좁아서 그들 자신도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나 형초(荊楚) 형초(荊楚)：중국의 호북, 호남과 양자강 유역.

지방은 빈터로 되어 묵은 땅 천리에 부락[聚落] 하나 없는 데도 있으니 저 오월 백성을 나누어 이 지방에 이주시킨다면 토지는 더 개간되고 백성이 자족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집에 있을 때에는 국가 부역에 응할 수 있으며 나와서는 군인 노릇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경리가 자연 부유하게 될 것이니 현하의 당면 사업은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마단림(馬端臨)이 말하기를 "천자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자기 직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벼슬하는 사람이 대신[公卿者]의 지위에 있다면
대신의 일이 그의 직무이며 평민이 군인으로 되는 것도 역시 그의 직무이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직무를 부역[役]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옛날의 이른바 부역이라는 것을 더러는 전쟁이
났을 때에 직접 방패와 창을 들고 전선에 나간 것을 부역이라고 하는 자도 있었으며 더러는 토목 공사장에 나가서 삽자루를 잡고 노동하는 자를 부역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백성을
농한기에 부리라고 한 것과 ｢왕제(王制)｣에 1년 동안 3일 이상 일을 시키지 않는다고 한 것들은 모두 부역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향장(鄕長), 정장(亭長),
군인들의 직무가 극히 미천하고 곤란하여 매를 맞고 고통을 받는 정상이란 군인으로 나가거나 노동에 종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직무를 부역이라 하여 병역, 부역의 칭호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은 호구를 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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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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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禮 大司徒 掌建邦之土地之圖 與其人民之數 以佐王安擾邦國.司民 主民數者. 掌登萬民之數 自生齒以上 皆書於版 辨其國中與其都鄙及其郊野 異其男女 歲登下其死生. 生齒 男八月 女七月而生齒.
版卽籍也. 國中王國之內. 登上也. 下除也. 每歲 有生者登而載之 死者下而除之. 及三年 大比以萬民之數 詔司寇. 司寇及孟冬祀司民之日 祀司民之星. 獻其數于王 王拜受之 登于天府.
內史ㆍ司會ㆍ冢宰貳之 以贊王治. 其正本 登于天府 其內史ㆍ司會ㆍ冢宰三官所掌者 乃其副貳耳.○徐幹中論曰 夫治平在庶功興 庶功興在事役均 事役均在民數周 民數周爲國之本也. 先王周知其萬民衆寡之數
乃分九職焉. 九職旣分則劬勞者可見 勤惰者可聞也. 然而事役不均者 未之有也. 事役旣均 故上盡其心 而人竭其力. 然而庶功不興者 未之有也. 庶功旣興 故國家殷富 大小不匱 百姓休和 下無怨疾焉.
然而治不平者 未之有也. 故泉有源 始有本 道者審本而已矣. 故周禮孟冬 司寇獻民數于王 王拜受之 登于天府. 內史ㆍ司會ㆍ冢宰貳之 其重之也如是. 今之爲政者未之知卹也. 辟猶無田而欲樹藝.
雖有農夫 安能措其强力乎? 是以 先王制六鄕六遂之法 所以維持其民 而爲之綱目也. 使其隣比相保受 賞罰相延及 故出入存亡 臧否逆順 可得而知也. 及亂君之爲政也 戶口漏於國版 夫家脫於聯伍
避役逋逃者有之. 於是 姦心競生而僞端並作. 小則濫竊 大則攻劫 嚴刑峻令 不能救也. 人數者 庶事之所自出也 莫不取正焉. 以分田里 以令貢賦 以造器用 以制祿食 以起田役 以作軍旅. 國以建典
家以立度. 五禮用修 九刑用措 其唯審人數乎!○東晉哀帝 興寧二年三月庚戌 大閱戶口 令所在土斷 謂之庚戌制. 土斷謂令西北士民 僑寓東南者 所在以土著 爲斷也. 孝武時 范寗陳時政曰"昔 中原喪亂
流寓江左庶有旋返之期 故許其挾注本郡. 自爾漸久 人安其業 丘壟墳栢 皆以成行. 無本邦之名 而有安土之實. 今宜正其封疆 土斷人戶 明考試之科 修閭伍之法. 難者 必以爲人各有桑土之懷 下役之慮.
然斯誠兼幷之所執 而非通理之論也. 古者失地之君 猶臣所寓之主 列國之臣 亦有違適之禮. 且夫普天之人 原其氏出 皆隨代移遷 何至於今而獨不可?"帝善之. 安帝義熙九年 宋公劉裕謂人居土
上表曰"先王制治 九土攸序 分境畫野 各安其居. 故井田之制 三代以崇. 秦革其政 漢遂不改 富强兼並 於是爲弊. 在漢西京 大遷田景之族 以實關中. 卽以三輔爲鄕閭 不復係之於齊楚 九服不優
所託成舊. 自永嘉播越 爰託淮海 朝運匡復之算 人懷思本之心 經略之圖 日不暇給. 是以 寧人綏理 猶有未遑. 及至大司馬桓溫 以人無定本 傷理爲深 庚戌土斷 以一其業. 于時 財阜國豐 實由於此.
自茲迄今 彌歷年載 畫一之制 漸用頹弛. 雜居流寓 閭伍不修. 王化所以未純 人瘼所以猶在 自非改調 無以濟治. 夫人情滯常 難與慮始 謂父母之邦 爲桑梓者 誠以生焉 敬愛所託. 請依庚戌土斷之科
庶存其本 稍與事著然後 率之以仁義 鼓之以威聲. 超大江而跨黃河 撫九州而復舊土 則戀本之志 乃速申於當年. 在始暫勤 要終必易."於是 依界土斷.○唐令 凡男女始生爲黃 四歲爲小 十六爲中 二十爲丁
六十爲老 歲造計帳 三年造戶籍. 凡三本 一留縣 一送州 一送戶部.○歷代盛衰戶口. 周武王克商 平治天下 周公相成王 致理刑措. 人口千三百七十萬四千九百二十三 此周之極盛也. 平王東遷三十餘年
莊王十三年 齊桓公二年 五千里外 非天子之御. 自太子公侯以下 至于庶人 凡千一百九十四萬一千九百二十三人.○漢自高祖 至孝平元始二年 戶千二百二十三萬三千餘 口五千九百五十九萬四千九百
此前漢之極盛也. 光武中元二年 戶四百二十七萬九千六百餘 口二千一百萬七千八百. 至桓帝永壽二年 戶千六百七萬九百 口五千六萬六千 此後漢之極盛也.○昭烈據蜀 曹操據中原 孫權據江東 三國鼎峙
戰爭不息. 蜀有戶二十八萬 魏有戶六十六萬三千四百 吳有戶五十二萬. 晉武帝太康元年平吳後 大凡戶二百四十五萬九千八百 口一千六百一十六萬三千八百.○隋文帝承後周 得戶三百六十萬 平陳 又收戶五十萬.
儉約爲治干戈不用 洎于煬帝大業二年十八年間 至八百九十萬七千餘戶.○唐高祖初 有戶二百餘萬. 貞觀之際 勵精爲治 頻至豐稔. 至玄宗天寶十四載 戶八百九十一萬四千七百 口五千二百九十一萬九千三百
此唐之極盛也. 經祿山之亂 肅宗乾元三年 戶一百九十三萬三千一百. 至文宗開成時 戶四百九十九萬六千七百.馬端臨曰"漢以後 以戶口定賦 故雖極盛之時 而郡國所上戶口版籍 終不能及三代兩漢之數.
蓋以避賦之故 遞相隱漏 豈足憑乎?"杜佑曰"昔賢云'倉廩實 知禮節 衣食足 知榮辱.'夫子適衛 冉子僕曰'美哉! 庶矣! 旣庶矣 又何加焉?'曰'富之. 旣富矣 又何加焉?'曰'敎之.'固知國足則政康
家足則敎從 反是而理者 未之有也. 夫家足 不在於逃稅 國足不在於重斂. 若逃稅則不土著而人貧 重斂則多養羸而國貧 不其然矣. 羸者 大賈蓄家也. 正數之戶 旣避賦役則至浮浪 爲大賈蓄家之所役屬
而收其利也. 說見管子. 三代之際 井田定賦 秦革周制 漢因秦法 魏晉以降 名數雖繁不救時弊. 東晉之宅江南也 慕容符姚迭居中土 人無定本 傷理爲深 遂有土斷之令 財豐俗阜 實由於此. 其後法制廢弛
舊弊復起 義熙之際 重擧而行 已然之效 著在前志. 隋受周禪 洎于大業 有戶八百九十萬. 時承西魏喪亂 周ㆍ齊分據 暴君汚吏 賦重役勤 人不堪命 多依豪室 禁網墜紊 奸僞尤滋. 高熲覩流冗之病
建輸籍之法 定其名 輕其數高熲 奏"以人間課稅 雖有定分 年常徵納 除注恒多 長吏肆情 文帳出沒 旣無定簿 難以推校."乃請爲輸籍之樣. 其法 凡民課輸 皆籍其數 使州縣長吏 不得走弄出役
徧下其樣于諸州 每年正月五日 縣令巡人各隨近五黨ㆍ三黨 共爲一團 依樣定戶上下 自是奸無所容矣. 使人 知爲浮客 被强家收太半之賦 爲偏氓 奉公上 蒙輕減之征. 浮客 謂避公稅依强豪 作佃家也.
昔漢文 三年 除入田租. 荀悅論曰 古者什一而稅 天下之中正 漢家或百一而稅 可謂至輕矣. 而豪强占田逾多 浮客輸太半之賦 公家之惠 優於三代 豪强之暴 酷於亡秦 是惠不下通 威福分于豪人也.
不正其本 適足以資富强矣. 高熲設輕稅之法 浮客悉自歸於編戶 隋代之盛 實由於此. 先敷其信 後行其令 烝庶懷惠 姦無所容. 隋氏資儲 遍於天下 人俗康阜 熲之力焉. 國家貞觀中 有戶三百萬
至天寶末百三十餘年 纔如隋氏之數. 大唐之盛邁於西漢 約計天下編戶 合踰元始之間 而名籍所少三百餘萬. 直以選賢授任 多在藝文 才與職乖 法因事廢 隳循名責實之義 闕考言詢事之道 崇秩之所至
美價之所歸 不無輕薄之曹 浮華之伍. 習程典親薄領 謂之淺俗 務根本去枝葉 指以迂濶 風流相尙 奔競相驅 職事委於群胥 貨賄行於公府而至此也. 夫古之爲理也 在於周知人數 乃均其事役則庶功以興
國富家足 敎從化被 風齊俗一. 夫然故 災沴不生 悖亂不起. 所以 周官有比ㆍ閭ㆍ族ㆍ黨ㆍ州ㆍ鄕ㆍ縣ㆍ鄙之制 維持其政 綱紀其人. 獻民數於王 王拜受之 其敬之守之如此其重也. 及理道乖方 版圖脫漏
人如鳥獸 飛走莫制. 家以之乏 國以之貧 姦宄漸興 傾覆不悟. 斯政之大者遠者 將求理平之道 非其本歟!"○宋太祖承五代之亂 有戶九十六萬七千三百 削平僭據. 至開寶九年 天下主客戶三百九萬五百.
至神宗元豐六年 天下主客戶一千七百二十一萬一千七百 口二千四百九十六萬九千三百. 南渡後 高宗紹興三十年 諸路主客戶 一千一百三十七萬五千七百 口一千九百二十二萬九千八.馬端臨曰"西漢戶口極盛之時
率以十戶 爲四十八口有奇. 東漢戶口 率以十戶 爲五十二口 可準周之下農夫. 唐人戶口極盛之時 率以十戶 爲五十八口有奇 可準周之中次. 自本朝元豐 至紹興 戶口率以十戶 爲二十口. 以一家止於兩口
則無是理. 蓋詭名子 戶漏口者衆也."葉適上疏 孝宗朝 曰"爲國之要 在於得民 民多則田墾而稅增 役衆而兵强. 田墾稅增 役衆兵强 則所爲而必從 所欲而必遂. 是故 昔者 戰國相傾 莫急於致民. 商鞅
誘來三晉願耕之民 以實秦地. 漢末 天下殫殘 而三國爭利 孫權搜山越之衆以爲民 至於帆海絶徼 俘執島居之夷而用之. 蓋蜀之亡也 爲戶二十八萬 吳之亡也 爲戶五十餘萬 而魏不能百萬而已. 擧天下之大
不能當全漢數郡之衆. 然則因民之衆寡 爲國之强弱 自古而然矣. 今天下州縣 直以見入職貢者言之 除已募而爲兵者 數十百萬人 其去而爲浮屠ㆍ老子及爲役 而未受度者 又數十萬人 若此皆不論也. 而戶口昌熾
生齒繁衍 幾及全盛之世 其衆强富大之形 宜無敵於天下. 然而 偏聚而不均 勢屬而不親. 是故 無墾田之利 無增稅之入 役不衆兵不强 反有貧弱之實見於外. 民雖多 而不知所以用之 直聽其自生自死而已.
而州縣又有因其丁中 而裁取其絹價者 此其意 豈以爲民不當生於王土 而征之者歟? 夫前世之致民甚難 待其衆多而用之 有終不得者. 今之欲有內外之事 因衆多已成之民 率以北向 夫孰敢爭者?
而論者曾莫以爲意 此不知其本之甚者也. 以臣計之 有民 必使之闢地. 闢地則民足稅增 其居則可以爲役 出則可以爲兵. 而今也不然 使之縮居憔悴 無地以自業. 其駑鈍不才者 則爲浮客爲傭力 其懷利强力者
則爲商賈 爲竊盜 苟得朝暮之食 而不能爲家. 豐年樂歲 市無貴糶 而民常患夫斗升之求無所從給. 大抵得以稅與役 自通於官者 不能三之一. 有田者 不自墾 而能墾者非其田
此其所以雖昌熾繁衍而上不得而用之也. 夫吳越之盛 近自唐季 人民偏集 以十五州之衆 當今天下之半. 計其土地 不足以容之 肩摩袂錯 慼處而不自聊. 荊楚之地 荒墟林莽 千里無聚落. 分吳越之民
以實荊楚 則田益墾而民自足 居可以爲役 出可以爲兵 財賦不理而自富 臣以爲當今之務莫愈於此. 馬端臨曰"自天子以至庶民 各有其職 君子之任公卿者其職 而庶民之爲軍士者 亦職也. 是以
古無謂職爲役之稱. 古之所謂役者 或以起軍旅 則執干戈冒鋒鏑而後 謂之役. 或以營土木 則親畚鍤疲筋力而後 謂之役. 夫子所謂'使民以時'王制所謂'歲不過三日'皆此役也. 後世如鄕亭軍士等職 至困至賤
較其笞箠困踣之狀 則與以身任軍旅土木徭役者 無以異矣. 於是 因謂職爲役 有軍役身役之稱." ○已上論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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