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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ㅂ) 수리(水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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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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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 수리(水利)

위양왕(魏襄王) 위양왕(魏襄王)：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임금.

때에 사기(史起) 사기(史起)：중국 춘추시대 위(魏)나라에서 장수(漳水)를 막아 업(鄴) 땅에 관개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부유케 했다는 사람.

가 왕에게 건의하기를 "위(魏)나라의 토지제도는 한 사람에게 100묘씩 주게 되어 있는데[토지를 나누는 법(法)은 1부(夫)에 100묘이다.] 업(鄴) 땅에서만 200묘씩을 준
것은 그 지방의 토품이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장수(漳水)란 물이 그 부근에 있으니 관개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양왕이 사기(史起)로 업 땅의 원을
삼았더니 사기가 장수(漳水)를 인수하여 업 땅에 관개함으로써 위나라의 하내(河內)지방을 부유케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우리 고을 원이 누구런가? 현명한
사공(史公)이란다. 장수를 끌어다가 묵은 땅에 관개하니 소금 성에 찌던 땅에 벼와 기장 생산되네!"라고 하였다.[개펄이라 함은 곧 척노(斥鹵)이니 짠물이 드나드는 땅을 이름이다.]

진(秦)나라 정국(鄭國) 정국(鄭國)：중국 전국시대 경수(涇水)를 관중(關中)지방으로 이끌어들이는 정국거(鄭國渠)를 시설한 한(韓)나라 사람.

이 경수(涇水)를 파서 중산(中山)으로부터 호구(壺口)에 이르기까지 인수로[渠]를 만들고 북산(北山)의 동쪽을 거쳐서 낙수(洛水)로 흐르게 하였는데 인수로의 길이가 3100여 리에
달하였으며 그물을 모두 관개에 이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막히고 메인 데를 파내고 메마른 불모지[鹵之地]를 적시니 그 몽리 구역이 4만여 섬지기[頃]인데 한 마지기[畝] 당
1종(鍾) 종(鍾)：곡식 따위의 양을 되던 단위의 하나. 종은 6석 4두, 또는 10섬이라고도 함.

씩을 수확하였다. 이로 인하여 관중(關中)지방이 농산지대로 되어 흉년을 모르게 되었기 때문에 진(秦)나라가 부강하여져서 나중에 전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 인수로를 정국의
도랑[鄭國渠]이라고 불렀다.

이빙(李氷) 이빙(李氷)：중국 한나라 때 치수사업과 교육사업으로 유명한 사람.

이 촉(蜀)나라의 군수[守]로 (지금의 사천성) 땅 원이 되어서 강물을 막아 보를 만들고 또 두 강과 성도(成都)의 중앙 지대를 굴착하여 두 줄기의 물이 본 군(郡)을 거쳐서
선박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또 여러 고을의 관개수로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촉 지방이 옥야천리로 되고 그 물을 '육지의 바다[陸海]'라고 불렀다.

한문제가 문옹(文翁) 문옹(文翁)：중국 한나라 때 관리로서 치수사업을 많이 하였으며 교육사업에 모범적인 인물이었다는 사람.

으로 촉군 태수(蜀郡太守)를 삼았는데 그가 전설(煎洩) 어구를 뚫어서 묵밭 1천 700경(頃)에 물을 대게 하니 백성들이 많은 수확을 얻었다.

한무제 때에 대사농(大司農) 정당시(鄭當時) 정당시(鄭當時)：중국 한나라 때 여남(汝南) 태수 벼슬을 한 사람.

가 말하기를 "운하를 파서 위수(渭水)를 끌어오면 장안으로부터 남산 밑을 거쳐 황하에 이르는 300리 거리에 관동까지 배로 운수할 수 있으며 또 역수(易水) 역수(易水)：중국
연(燕; 지금의 하북성)나라의 강 이름.

를 직선으로 끌어오면 그 물로 백성들의 경지 1만여 경(頃)에 관개할 수 있다"고 하니 무제가 군인 수만 명을 동원하여 이를 굴착하여 2년 만에 준공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편리하다고 하였고 이때에 정치가들이 저마다 관개사업의 유리성을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삭방(朔方), 서하(西河), 하서(河西), 주천(酒泉) 등지에서는 모두 황하수와 산지의
냇물들을 끌어서 경지에 관개하였으며 관중(關中), 보거(輔渠), 영지(靈軹) 등 지방에서는 여러 곳의 물을 끌어왔으며 여남(汝南), 구강(九江) 등 지방에서는 회수[淮]를
끌어왔으며 동해지방에서는 거정(鉅定)이란 늪 물을 끌어왔으며 태산(泰山)지방에서는 문수(汶水)를 끌어왔는데 이 수리공사들은 모두 인수로를 내어 각각 수만 경의 경지에 관개하였고
이외의 소소한 도랑[小渠]과 산비탈[陂山], 길섶으로 인수한 곳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 후 조(趙)나라 중대부(中大夫) 백공(白公) 백공(白公)：중국 춘추시대에 수리사업을 많이 한 사람.

이 인수로를 파서 경수(涇水)를 끌어오자고 건의하여 곡구미(谷口尾)로부터 시작하여 늑양(櫟陽)으로 들어오게 하고 다시 위중(渭中)으로 흐르게 하였던바 길이가 200여 리가 되어
경지 4천 500여 경(頃)에 관개하였다. 그리하여 그 인수로를 백거(白渠)라 불렀다. 백성들이 그 혜택을 많이 입게 되매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농사를 어느 곳에서 지으려는가?
지양(池陽), 곡구(谷口)에 가서 지어야 하네! 옛날의 정국(鄭國)과 오늘의 백공(白公)은, 물을 끌어다가 우리를 살렸나니. 삽을 들면 그것이 곧 구름이요, 도랑을 열면 그것이
바로 비라네! 물 한 섬에는 개흙이 두 말, 물을 대고 개흙으로 걸우어 우리 곡식 가꾼다면 서울의 억만 인구 먹고 입기 넉넉하리!"라고 하였으니 이는 정거(鄭渠)와 백거(白渠)에서
입은 혜택을 노래한 것이다.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소신신(召信臣) 소신신(召信臣)：중국 한나라 때 남양(南陽) 태수로 있으면서 수리사업과 교육사업을 많이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아버지(召父)라고 불렀다는
사람.

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으면서 오양현[穰縣] 남쪽 60리 지점에 겸로피(鉗盧陂)라는 저수지를 파서 돌을 쌓아 둑을 만들고 옆에 돌문 여섯을 내어 물을 조절함으로써 관개용으로
널리 이용하니 관개면적이 해마다 증가되며 3만 경(頃)에 이르렀고 백성들이 많은 혜택을 입었다. 후한 때에 이르러 두시(杜詩) 두시(杜詩)：중국 후한 때 전공이 있었으며 수리사업을
완수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어머니[杜母]라고 불렀다는 사람.

가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와서 이 겸로피를 수축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전날의 소신신이 우리의 아버지였다면 오늘날의 두시는 우리의 어머니로다"라고 하였다.

후한(後漢) 장제(章帝) 장제(章帝)：중국 후한의 제3대 왕.

때에 왕경(王景) 왕경(王景)：중국 후한 때 저명한 치수사업가.

이 여강 태수(廬江太守)로 되었는데 그 군 관내의 안풍현(安豐縣)에 초(楚)나라 때 손숙오(孫叔敖) 손숙오(孫叔敖)：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에서 세 번 정승으로 되었으며
치수사업과 교육사업을 많이 한 사람.

가 굴착한 작피(芍陂)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그가 이미 황폐되었던 작피를 다시 수축한 결과 그 고을이 풍족히 살게 되었다.[작피의 지름이 100리인데 1만 경의 경지에 관개하였다
한다.]

후한 순제(順帝) 순제(順帝)：중국 후한의 제6대 왕.

때에 마진(馬臻) 마진(馬臻)：중국 한나라 때 회계(會稽) 태수로 있으면서 수리사업을 많이 한 사람.

이 회계(會稽) 태수로 되어 처음으로 경호(鏡湖)에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그 주위가 310리였으며 경지 9천여 경(頃)에 물을 대어 백성들이 많은 이익을 입었다.

조위(曹魏) 조위(曹魏)：조비(曹丕)가 건국한 중국의 위(魏)나라.

때에 사마의(司馬懿) 사마의(司馬懿)：중국 삼국(三國)시대 위(魏)나라의 저명한 군사가이며 정치가로서 치수사업을 많이 한 사람.

가 관중(關中)에 주둔하면서 성국거(成國渠)를 파고 임진피(臨晉陂)를 수축하여 그 물로 경지 수천 경(頃)을 관개하니 국가가 풍부하게 되고 백성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그가 또
태부(太傅) 벼슬을 하여 정치를 보좌할 때에 정부에 건의하여 광제거(廣濟渠)를 파고 황하 물을 끌어서 개봉(開封) 개봉(開封)：중국 송나라 때의 수도로서 지금의 하남성에 있음.

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그 물을 동남지방의 여러 저수지에 대게 하여 처음으로 회수 이북지대를 크게 개간하였다. 그 후에 또 백척(白尺), 회양(淮陽) 두 인수로를 넓혔으며 또
1만여 경 되는 여러 저수지를 영수(潁水) 남북에 수축하니 이때로부터 회수 이북 지방에는 곡식 창고가 즐비하게 늘어 있었다.[또 위(魏)나라 정혼(鄭渾)이 패군 태수(沛郡太守)로
있었는데 그 지방이 저습하고 진흙탕이 많아서 백성이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정혼이 소현(蕭縣)과 상현(相縣) 두 고을에 저수지를 만들고 논을 개간하려 하니 처음에는 백성이 모두
불편하다고 하였다. 정혼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업을 실행하면 영구한 이익으로 된다" 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백성을 인솔하고 공사[功]를 진행한 결과 한 해 겨울에 모두
완성하였다. 그 뒤로부터는 매년 많은 수확을 얻었고 단위 당 수확률이 해마다 늘었으며 조세수입도 예년보다 배로 증가하였고 패군 경내가 그 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게 되어 빗돌을 세워 공덕을 찬양하고 저수지 이름을 '정피(鄭陂)'라 하였다. 또 서막(徐邈)은 양주(涼州) 고을 원으로 있을 때에 그 고을은 비가 적게 와서 항상 식량 곤란을
겪었다. 서막이 조정에 제의하여 무위(武威), 주천(酒泉), 염지(鹽池) 등 지대의 저수지를 수축한 다음 소수 민족들로부터 세를 받았으며 또 논을 널리 개간하여 빈민을 모집해다가
경작케 한 결과 농민들이 모두 유족하게 살고 국가의 창고도 충만하게 되었다.]

[이에 그 고을의 비용과 군사비를 공제하고 남은 것으로써 금, 비단, 마소를 사서 국왕에게 바치는 물품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서북지방[西城]에서 중앙에 공물을 바치고 물화가 유통된
것은 모두 서막(徐邈)의 공로인 것이다.]

동진(東晉) 동진(東晉)：중국 역사에서 진(晉)나라를 서진(西晉)ㆍ동진(東晉)으로 나누는데, 원제(元帝)가 서울을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으로 옮긴 뒤로부터는 동진이라고 함.

때에 장개(張闓) 장개(張闓)：중국 진(晉)나라 때 소준(蘇峻)의 반란을 토평한 공로로 의양백(宜陽伯)의 봉작을 받은 사람.

가 진릉(晉陵) 고을 내사(內史)로 있었는데 당시 진릉 소속 네 고을은 모두 한재를 극복하지 못하여 농사를 실패하였다. 장개가 곡아, 신풍 두 저수지를 창설하여 800여 경(頃)의
토지에 물을 대도록 하였는바 그 지방에 매년 풍년이 들었다. 그리하여 갈홍(葛洪) 갈홍(葛洪)：중국 진(晉)나라 때의 도술가로서 『포박자(抱朴子)』와 『신선전(神仙傳)』을 저작한
사람.

이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정부에 보고하였더니 정부에서는 그를 발탁하여 대사농(大司農)으로 임명하였다.

송(宋)나라 효종(孝宗) 때 절강(浙江) 동부지방에 큰 기근이 있었다. 주자가 제거(提擧) 제거(提擧)：중국 송나라 때의 관리(管理)라는 뜻으로 사용하던 관직으로서 예컨대
제거수리(提擧水利)와 같음.

로 있으면서 굶주린 백성을 시켜서 수리사업을 진행하고자 요청하였으나 조정 의논이 이를 어렵게 여겼다. 주자(朱子)가 재차 요청하기를 "근래 해마다 거듭되는 한재에 국가에서 창고를
헤쳐 구제해주고 있다. 만일 그 구제식량에 조금만 더 보태어 백성들의 노력비로 쓴다면 한재도 구제할 수 있고 영구한 이익을 얻을 것이니 이는 한 가지 사업으로써 두 가지 이익을
동시에 쟁취하는 것이다. 내가 직접 본 무연한 들판들은 모두 쓸쓸하였는데 저수지를 가진 지방만은 곡식이 무성하고 결실이 잘되어 풍년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을 보아 수리사업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만일 마을마다 촌락마다 저수지를 파게 한다면 백성들은 영구히 유리(流離)하거나 아사할 걱정이 없을 것이며 정부에서도 세를 감해주거나 국가 양곡을 내어
구제해주는 비용을 영구히 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송나라 효종 건도(乾道) 말년에 어떤 관원이 말하기를 "강서(江西) 지방이 해마다 가물어서 흉년이 드는 것은 미리 수리대책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효종(孝宗)이 이에 조서를 내리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한발[旱乾]과 홍수[水溢]의 재난은 당요(唐堯)와 성탕(成湯)의 태평시대에도 면할 수 없건마는 백성들이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미리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 두었기 때문이다. 지금 강서의 여러 고을에서 물을 접근한 전답은 작물이 잘되고 여무나 높은 지대에는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으면 작물이 당장 말라버리고
마니 이것은 수리사업을 등한히 하여 한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까닭이다.

당나라의 위단(韋丹)이 강서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에 저수지 598개 소(所)를 수축하여 1만 2천 경(頃)의 토지에 관개하였으니 강서 한 지방에만 실행하였어도 이런 성과를
올렸거든, 하물며 전국에 광범히 실시한다면 그 이익이 얼마이겠는가? 더군다나 농사는 생활의 근본이 아닌가? 5곡을 가꾸는 데는 관개시설을 이용하는 것이다. 지금 각 지방의 큰
산에는 수원이 대단히 많으나 백성들이 그것을 이용할 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도랑을 파고 웅덩이를 막아서 저수하는 것이 감사(監司), 수령(守令)의 직무가 아니겠는가? 감사
수령들은 나를 위하여 구릉지대와 고원 및 저습한 지대를 보아서 그에 적당한 농업을 장려할 것이며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되 부역을 고르게 시키고 물을 대어 농업에 대한 시기를 잃지
말게 하라! 아무리 흉풍이 다른 해가 있더라도 농사에 근실한 자로 하여금 속수무책으로 고난을 당하지 말게 할 것이니 이것이 자연과 인류 생활에 있어서 서로 연관되는 이치이다.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 나는 진행 사업의 근면 여하를 보아 상, 벌을 주겠다" 하였다.[이상은 수리(水利)를 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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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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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襄王時 史起說王曰"魏氏之行田也以百畝 賦田之法 一夫百畝 鄴獨二百畝 是田惡也. 漳水在其傍 是可爲用."於是 以起爲鄴令. 遂引漳水漑鄴以富魏之河內. 民歌之曰"鄴有賢令兮爲史公
決漳水兮灌鄴傍. 終古潟鹵兮生稻粱." 潟鹵 卽斥齒 謂鹹鹵之地也.○秦鄭國鑿涇水 自中山西抵壺口爲渠 並北山東注洛. 三百餘里渠成而用漑. 注塡閼之水 漑澤鹵之地 四萬餘頃收皆畝一鍾. 於是
關中爲沃野 無凶年. 秦以富强 卒幷諸侯 因名曰鄭國渠.○李氷爲蜀守 壅江水作堋 穿二江成都中 雙過郡下 以通舟船 因以灌漑諸郡. 於是 蜀沃野千里 號爲陸海.○漢文帝 以文翁 爲蜀郡太守 穿煎洩口
漑灌繁田千七百頃 人穫其饒.○武帝時 大司農鄭當時言"引渭穿渠 起長安 並南山下至河 三百餘里漕關東. 徑易又可以漑渠下民田萬餘頃."帝發卒數萬穿之 二歲而通 人以爲便. 是時 用事者爭言水利
朔方ㆍ西河ㆍ河西ㆍ酒泉 皆引河及川谷以漑田. 而關中ㆍ輔渠ㆍ靈軹引諸水 汝南ㆍ九江引淮 東海引鉅定 澤名 泰山下引汶水 皆穿渠 爲漑田各萬餘頃. 他小渠 陂山通道不可勝言.
趙中大夫白公復奏"穿渠引涇水."首起谷口尾 入櫟陽 注渭中 袤二百里 漑田四千五百餘頃 因名白渠 民得其饒. 歌之曰"田於何所? 池陽ㆍ谷口. 鄭國在前 白渠起後. 擧鍤爲雲 決渠爲雨. 涇水一石
其泥數斗. 且漑且糞 長我禾黍. 衣食京師 億萬之口."言此兩渠饒也.○元帝時 召信臣爲南陽太守 於穰縣南六十里 造鉗盧陂. 累石爲隄傍開六石門 以節水勢 用廣漑灌. 歲歲增多 至三萬頃 人得其利.
及後漢 杜詩爲太守 復修其業. 時 歌之曰"前有召父 後有杜母."○後漢章帝時 王景爲廬江太守 郡部安豐縣 有楚孫叔敖所起芍陂. 先是荒廢 景重修之 境內豐裕. 其陂徑百里 灌田萬頃.○順帝時
馬臻爲會稽太守 始立鏡湖築塘 周廻三百十里 灌田九千餘頃 人穫其利.○曹魏時 司馬懿鎭關中 穿成國渠 築臨晉陂 漑田數千頃 國以充實百姓欣賴. 正始三年 懿爲太傅輔政 又請穿廣濟渠 引河入汴
漑東南諸陂 始大佃於淮北. 後 又廣開淮陽 百尺二渠 又修諸陂於潁之南北萬餘頃. 自是 淮北倉庾相望. 又魏鄭渾 爲沛郡太守 郡居下濕 水澇爲患 百姓饑乏. 渾於蕭ㆍ相二縣 興陂均開稻田
郡人皆以爲不便. 渾以爲'終有經久之利.'遂躬率百姓興功 一冬皆成 比年大收 頃畝歲增 租入倍常 郡中賴其利 刻石頌之 號曰鄭陂. 又徐邈 爲凉州 土地少雨 常苦乏}\.
邈請修武威ㆍ酒泉ㆍ鹽池以收虜}\. 又廣開水田 募貧民佃之 家家豐足 倉庫盈溢. 乃度州界寒用之餘 以市金ㆍ綵ㆍ馬ㆍ牛通供中國之費. 西域入貢 財貨流通 皆邈之功也.○東晉 張闓爲晉陵內史時 所部四縣
並以旱失田. 闓乃立曲阿 新豐塘 漑田八百餘頃 每歲豐稔. 葛洪爲其頌 乃徵拜大司農.○宋孝宗時 浙東大饑 朱子爲提擧 請募飢民 興脩水利. 朝議難之. 復請曰"連年灾旱 國家發倉廩以賑之. 若於數外
微有增加 以爲募民興役之資 則救災ㆍ興利 一擧而兩得之. 臣親見所至原野 極目蕭條 唯是有陂塘處 則其苗之蔚茂秀實 無異於豐歲 於是 益知水利之不可不修. 若令逐村逐保 各有陂塘之利
則民間永無流離餓殍之患 國家亦永無蠲減糶濟之費矣."○孝宗乾道末 臣僚言"江西連年荒旱 不能預興水利 爲之備."於是乃降詔曰"朕惟旱乾水溢之災 堯湯盛時 有不能免 民未告病者 備先具也. 豫章諸郡縣
但阡陌近水者 苗秀而實 高仰之地 雨不時至 苗輒就槁. 意水利不修 失所以爲旱備乎! 唐韋丹 爲江西觀察使 治陂塘五百九十八所 灌田萬二千頃. 此特施之一道 其利如此 矧天下至廣也 農爲生之本也?
泉流灌漑 所以毓五}\也. 今諸道名山 川原甚衆民未知其利. 然則通溝瀆瀦陂澤 監司守令 顧非其職歟? 其爲朕 相丘陵原隰之宜 勉農桑盡地利 平繇行水 勿使失時. 雖有豐凶而力田者 不至拱手受弊
亦天人相因之理也. 朕將卽勤惰 而寓賞罰焉." 已上論水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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