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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 상평창ㆍ의창의 흉년 구제사업[常平義倉救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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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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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상평창ㆍ의창의 흉년 구제사업[常平義倉救荒]

위문후(魏文侯)의 정승[相] 이회(李悝)가 말하기를 "정부 식량을 너무 비싸게 팔면 선비, 장인, 상인들[사람이라 함은 곡식을 사 먹는 사(士)ㆍ공(工)ㆍ상(商)을 말한
것이다.]에게 손해를 주고 너무 헐하게 팔면 농민에게 손해를 주는바 선비[士], 장인, 상인들에게 손해를 주면 그들이 유리 분산하는 것이며 농민에게 손해를 주면 국가가 빈곤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무 비싸게 팔거나 너무 헐하게 파는 것이 그 손해되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정치를 잘하는 자는 선비, 장인, 상인들에게 손해를 주지 않고도 농민들로 하여금 농사에
더 힘쓰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양곡수매사업을 잘하는 자는 반드시 그 해 연사의 흉풍을 상, 중, 하로 신중히 구별하여 100묘의 평년 수확이 150석인데 대풍년에 4배로 증산되어 600석이라면
연간 식량을 제외하고 남는 400석 중에서 300석만 수매하고 100석을 남기며, 보통 풍년에 3배로 증산되어 450석이라면 연간 식량을 제외하고 남는 300석 중에서 200석을
수매하며, 보통 풍년이 못된 해에 2배로 증산되어 300석이라면 연간 식량을 제외하고 남는 100석 중에서 50석을 수매하여, 백성들의 식량을 확보하게 하고 시장 가격을 알맞게 한
뒤에 그만둔다. 또 작은 흉년에는 보통 풍년이 못된 해에 수매한 수량을 내어 팔며 보통 흉년에는 보통 풍년에 수매한 수량을 내어 팔며 대흉년에는 대풍년에 수매한 수량을 내어 판다"
하였다.[상고하건대 반지(班志)에 이리(李悝)의 말에는'나라를 잘 위하는 자는 사람을 상(傷)함이 없게 하고 농사를 더욱 힘쓰게 하는 것이라'하였다. 이제 1부(夫)가 5명의
식구를 거느리고 토지 100묘를 경작하여 일년에 한 묘에서 한 섬 반(半)을 수확하니 속(粟)이 150섬이 되고 10분 1의 세(稅)로서 15섬을 제(除)하면 남은 것이
135섬이다. 한 사람이 한 달에 한 섬 반을 먹으면 5명이 일년간에 속(粟) 90섬이 되고 남은 것이 45섬이 있으며 한 섬에 돈[錢] 삼십(三十)이면 돈 1천 350이 남게
되는데 사려(社閭)의 상신(嘗新)으로 봄과 가을의 제사에 돈 삼백(三百)을 쓰면 남은 것이 1천 50이고 옷값으로 한 사람이 대개 돈 삼백(三百)을 쓰면 5명이 일년에 1천
500을 쓰게 되니 부족한 것이 450이다. 불행하여 병에 걸리고 사람이 사상(死喪)하고 한 비용과 위에 바치는 구실은 또 여기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농부가 항상 곤란하여
농사를 힘쓰지 아니할 마음이 있고 파는 곡식 값을 심히 귀(貴)함에 이르게 하는 소이(所以)이다. 그러므로 곡식을 사들이는 것을 잘 고르게 하는 자는 반드시 조심스럽게 해의
상숙(上熟)ㆍ중숙(中熟)ㆍ하숙(下熟)이 있음을 보는 것이니 상숙한 해는 그 수확이 스스로 평년(平年)의 사(四) 곱이 되어 남는 것이 400섬이고 중숙한 해는 스스로 세(三) 곱이
되어 남는 것이 300섬이고 하숙한 해는 스스로 두 곱이 되어 남는 것이 100섬이며 흉년의 수확은 소기(小饑)이면 100섬을 수확하고 중기(中饑)이면 70섬이고 대기(大饑)이면
30섬이다. 그러므로 대숙(大熟)이면 나라에서 3분을 사들이고 1분을 남기며 중숙이면 2분을 사들이고 하숙이면 1분을 사들여서 사(士)ㆍ공(工)ㆍ상(商)으로 하여금 넉넉하게 하고
값이 평준(平準)하면 멈추며 소기이면 하숙한 해에 사들인 것만치를 펴고 중기이면 중숙한 해에 사들인 것만치를 펴고 대기이면 대숙한 해에 사들인 것만치를 펴서 파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흉년이나 수재(水灾)ㆍ한재(旱灾)를 만나더라도 곡식을 내어 파는 것이 귀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유산(流散)하지 아니하나니 유여(有餘)함을 취하여 부족함을 보태어 주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이것을 위(魏)나라에 행하니 나라가 부(富)하고 강하였다.

○ 상숙(上熟)한 해에 그 수확이 스스로 네 곱이 되고 남은 것이 400섬이라 함은 평년(平年)에 100묘에서 150섬을 수확하는데 이제 대숙(大熟)하여 네 곱이 되면 600섬을
수확하게 되니 그 식구들의 일년 동안의 비용을 계산하면 남은 것이 400섬이고 나라에서는 300섬만을 사들이니 이것이 3분을 사들이고 1분을 남기는 것이 된다. 중숙(中熟)한 해는
저절로 세 곱이 되어 450섬인데 일년을 마추면 남은 것이 300섬이고 나라에서 200섬을 사들이니 이것이 3분을 사들이고 1분을 남기는 것이 된다. 하숙(下熟)한 해는 스스로 두
곱이 되어 300섬을 수확하는데 일년을 맞추면 남는 것이 100섬이고 나라에서는 그 50섬을 사들이니 하숙(下熟)한 해에 1분을 사들인다 함은 100섬을 중분(中分)한 1분을
말함이다. 소기(小饑)하면 100섬을 수확한다 함은 평년의 100묘에는 150섬을 수확하는데 이제 소기(小饑)하여 100섬을 수확한 것은 평년의 3분의 2이다.

○ 중기(中饑)한 해의 70섬은 평년의 2분의 1을 수확함이고 대기(大饑)한 해의 30섬은 평년의 5분의 일을 수확함이다.]

한나라 선제(宣帝) 때에 대사농(大司農) 중승[丞] 경수창(耿壽昌) 경수창(耿壽昌)：중국 한나라 선제(宣帝) 때 경리에 능했던 사람.

이 아뢰기를 "지방[邊郡]에 명령하여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장하게 하고 곡식이 흔할 때에는 시장 가격보다 비싸게 사들이고 곡식이 귀할 때에는 시장 가격보다 헐한 값으로 팔아서
백성들이 유리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는데 이것을 상평창(常平倉)이라고 불렀다.[당시에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곡식 한 섬 값이 5전에까지 떨어져서 농민의 이익이
적었으므로 경수창(耿壽昌)이 이 제도를 실시하도록 건의한 데 대하여 백성의 여론이 좋았다. 선제(宣帝)가 이에 조서를 내려 그에게 관내후(關內侯)라는 직위를 주었다.]

사마광(司馬光) 사마광(司馬光)：중국 송나라 때의 저명한 유학자로서 벼슬이 재상 지위에 있어서 온국공(溫國公)을 봉하였기 때문에 온공이라 하였다. 역사서적 『자치통감(資治通鑑)』이
그의 저작임.

이 말하기를 "상평창(常平倉)은 바로 삼대시대에 있었던 제도로서 이회(李悝)나 경수창(耿壽昌)에게 와서 처음 창안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곡식이 흔할 때나 귀할 때에 백성들에게
손해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식량문제에 있어서 그 혜택을 입으며 관청에서도 이익을 보는 것이니 이보다 좋은 법이 없다" 하였다.

수문제(隋文帝) 개황(開皇) 5년에 탁지상서(度支尙書) 장손평(長孫平)이 건의하기를 "옛날에는 3년 농사를 지으면 1년 먹을 것을 축적하고 9년 농사를 지으면 3년 먹을 것을
축적하였으므로 아무리 홍수와 가물의 피해가 있더라도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정부의 지도정책이 옳았으며 예비적 축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모든 고을[州]
백성들로 하여금 순서있게 마을마다 의창(義倉)을 설립하게 하며 각자의 수확량에 따르고 규정에 의하여 조나 보리와 같은 곡식을 매호[家] 당 1석 이하씩 내게 하되 빈부의 정도를
보아서 차이를 둘 것입니다. 그리고 해당 마을에다 창고를 지어 저장케 할 것인바 그에 대한 관리사업은 해당 마을의 책임자[社司]에게 맡기고 장부를 만들어 매년 수납량을 주관하여
부패 혹은 손실을 보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혹 연사가 좋지 못하여 해당 마을에 기근[饑]이 있을 때에는 의창 곡식을 대여하여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는데 수문제가 그 건의대로
실행하고 그 이름을 의창(義倉) 혹은 사창(社倉)이라 하였다.[당시에 도처에 곡식이 쌓여 사람들이 기근을 모르고 살았는데 백성들이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소비하였기 때문에
사창(社倉)에 저장해 두었던 곡식을 모두 고을에 바치게 되었다. 결과 흉년을 만나게 되면 고을에서는 여러 해 묵은 곡식을 먼저 내주었다. 그러나 수양제(隋煬帝) 때에 이르러
국가비용이 부족하여 이 곡식마저 국가재산으로 충당하였다. 당태종(唐太宗) 때에 와서 다시 전국에 명령하여 의창을 설치하게 하여 흉년에 대한 대책을 세우게 하고 다른 비용으로 쓰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또 무후(武后) 무후(武后)：중국 당고종(唐高宗)의 황후로서 고종이 죽은 후 중종(中宗)ㆍ예종(睿宗)을 폐위시키고 자기가 황제로 되어
칙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 일컬었음.

와 중종(中宗) 때에 국가와 민간[公私]의 경제 형편이 긴박하게 되어 의창(義倉) 곡식을 꾸어 쓰다가 신룡(神龍) 이후에 이르러서는 전국 의창의 저축이 전부 탕진되어 버렸다.]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곡식은 가까운 데 두는 것이 좋은바 만일 사람들이 의창에 가서 곡식을 가져온다면 백성에게 불편하다. 그러므로 창고를 해당
부락[社]에 두어야만 굶주린 백성이 그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에 와서는 의창이란 이름은 전과 같이 있으나 창고를 주나 군(郡)에 두어 일단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곤란할
때에 관리들이 도대체 상부에 보고하지 않으며 어진 관리라야 겨우 보고를 하나 그 보고에 관한 비준이 내려온 뒤에는 구제사업을 아전들에게 맡겨 실행한다. 이렇게 문건이 오고 가고
하며 곡식을 가져오고 가는 일이 곤란할 뿐만 아니라 감독한다는 서리(胥吏)놈들이 서로 떼어먹고 보니 혜택을 입는다는 자도 대개 읍[城郭] 근처에 살면서 제 힘으로 갖다 먹을 수
있는 사람뿐이다. 먼 곳에 사는 사람이야 이 얼마 되지 않은 곡식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노인을 부축하며 어린 것을 업고 수백 리 길을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오대(五代)시기 주세종(周世宗) 현덕(顯德) 6년에 회남(淮南) 지방에 흉년이 들었는데 세종이 정부미를 대여해주라고 명령하였더니 어떤 자가 말하기를 "백성이 가난하여 가을에
상환하지 못할 염려가 있다"고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백성은 자식과 같은 것이니 자식이 죽게 되었을 때에 아비로서 어찌 구제하지 않으며 어찌 또 그들의 상환하기를 바라리요?"
하였다.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정부에서 대여해주는 것은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려는 것이나 고통으로도 되는바 혜택이란 목전의 곤란을 해결해주는 것이요 고통[病]이란 뒷날 그들에게 상환을
독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 상환을 독촉함에 있어서 기한을 엄격히 설정한다거나 감모를 받거나 이자를 붙이기도 하며 혹은 가난하여 받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촉하기를
마지않으며 혹은 아전[胥吏]들이 거짓 문서를 꾸며 가지고 일반 평민들에게 물리기도 하니 이것은 모두 백성들에게 고통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관리[有司]들은 농간을 부려 적게 주고 많이 받으며 세를 받는 신하들은 가혹하게 많이 받아들이는 것만을 위주로 하여 한재, 수재, 충재에도 세를 감해주지 않으며
지방장관[長官]은 세를 독촉하다가 액수가 차지 않으면 자기 사업에 대한 성적 평가를 받지 못하며 민가에서 세액을 다 바치지 못할 때에는 파산을 당하기 전에는 장부에 계속 남겨
둔다.

백성에게서 나온 사창 곡식을 받을 때에도 이렇거든 하물며 국가에서 준 빚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물론 온갖 방법을 다하여 받아갈 것이다. 세종이 백성을 자식 같이 여겨
그들이 곤궁할 때에 구제해주고 꼭 상환할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 이는 인자한 생각이며 어진 임금의 정치[王者之政]이다"라고 하였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호씨의 이 말은 비단 국가식량 대차에 따르는 폐단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의창(義倉)의 폐단에 관한 것으로도 된다. 의창은 본래 흉년 대책에 관한
시설로서 이를 설치하여 우리 백성을 굶어 죽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관리들이 처음 받을 때에는 많이 받아가기에 급급하여 현물의 좋고 나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저장한 뒤에는 곡식이 뜨거나 썩을 것을 염려하여 흉년 들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되는 대로 주어 버린다. 그러므로 꼭 먹을 사람에게 주지 못하며 받을 때에는 흔히 얼토당토 않는
자에게 물리기도 한다.

호씨의 이른바 '그들에게 상환을 독촉함에 있어서 기한을 엄격히 설정하거나 감모를 받거나 이자를 붙이기도 하며 혹은 쌀을 주고 돈으로 내게 하며 혹은 가난하여 받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촉하기를 마지않으며 혹은 아전[胥吏]들이 거짓 문서를 꾸며 가지고 일반 평민들에게 물리기도 한다'라는 말은 꼭 지금의 의창 폐단에 해당한다. 소위 의창(義倉)이라는
의(義)자는 도리어 불의(不義)로 되며 본래 백성에게 이익을 주자는 것이 도리어 그들을 해롭게 한다. 이것은 그 사업이 번잡하고 소란하여 관리들의 탐오 행위를 조장할 뿐이요 실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사업에는 정말 유익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고해 보면 사창(社倉)은 본래 농민들을 설복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유여할 때에 절약하여 흉년 대책을 세우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당 부락[社]에 설치하여 그 부락 자체에서
관리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주(州)나 읍(邑)에 이관하여 저장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환상(還上)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위 환상이란 국가와 군대를 위하여
저장한 것이므로 도시에 저장하여 관청[官府]에서 관리하고 여러 지방에 따로따로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의창(義倉)을 주와 군에 이관하여 관리를 시켜 해마다 내주고
받아들이는 것이 예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환상도 해마다 백성에게 대여해주었다가 도로 받아들이므로 사창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미 앞당겨서 백성에게 대여해주고 후에 받아들이며 이것을
모두 관청[官司]에서 주관하여 법률로써 처리하게 된다. 여기에서 기한을 엄격하게 설정하고 독촉을 강하게 하며 적게 주고는 많이 받고 흉년을 기다림이 없이 강제로 분배하여주며 가난한
백성들이 도망을 가면 이웃이나 친족들에게 물리며 교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하여 온간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등 백 가지 폐단이 다 생기며 심지어는 죄수가 감옥에 그득 차고 온 고을이
매질 판으로 되니 소위 사창이란 사람을 잡는 그물로 될 뿐이요 백성을 구제하려던 본의란 찾아볼 수 없다. 이렇기 때문에 송나라 왕안석(王安石) 왕안석(王安石)：중국 송나라 때의
저명한 문학가이며 정치가로서 청묘보갑법(靑苗保甲法) 등 여러 가지 새 법을 제정한 사람.

의 청묘법(靑苗法) 청묘법(靑苗法)：중국 송나라의 정치가 왕안석(王安石)이 제정한 법으로서 농사를 짓는 빈농민에게 돈을 2할 변으로 정월에 주었다가 여름에 받으며 5월에 주었다가
가을에 받던 것.

을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하였으니 이 사창제도가 청묘법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저 상평창(常平倉)제도는 흉년에도 백성에게 혜택을 주며 풍년에도 백성에게 손해를 주지 않아서 국가나 개인[公私]에게 폐단으로 될 것이 없으며 상부나 하부가 모두 유익하니 이보다 더
좋은 법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법전에도 서울과 지방에 상평창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일찍이 실행한 적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만일 상평창을 설치하려면 지금의 환상(還上)제도를
잘 개편하여 각 고을[列邑]에 상평창을 설치하고 법에 의하여 여유 있는 식량을 사들이고 부족할 때에 내다 팔게 할 것이다. 또 사창(社倉)은 지방 백성을 설복시켜 희망에 따라
설립케 하되 해당 부락 사람들이 공동으로 주관하게 하여 관청에 이관하지 말아야 하는바[수(隋)나라 초기와 주자(朱子)의 사창제도에 의하여 현지 실정에 맞도록 규정을 만들어서 해당
마을 백성들이 공동으로 주관케 할 것이며 관청에서는 다만 설치 및 유지 사업만을 협조하고 감독하거나 주관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만 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창을
해당 마을에 설치하면 시골[鄕里]에서 적합한 인재를 구하기 어려워서 설립하기 곤란할 것이며 또 설립하더라도 더러 사욕을 채우다가 폐지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한다.
이것은 정부에서 설복시켜 서로 협잡을 못하게 하며 백성들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지 않음을 체험한다면 자연 습속으로 되어서 실행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가사 설치할 수가
없거나 자꾸 설치했다가 폐지되는 일이 있더라도 해마다 백성을 못살게 구는 그러한 해독은 없을 것이다. 백성이 이 환상제도의 해독을 모면하게만 되더라도 자기 직업에서 안심하고 농사에
전력하여 집집마다 고방에 간직하고 노적으로 쌓아 놓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상평창(常平倉)제도가 있어서 도와준다면 흉년에도 굶주린 생명을 구제해주게 될 것이니 어찌 환상(還上)제도에
비할 바이랴?

송나라 효종(孝宗) 때에 사창제도[社倉法]를 전국에 공포하였다. 처음에 주자[朱文公]가 건녕부(建寧府) 숭안(崇安)현 개요향(開耀鄕)에 있었는데 건도(乾道) 건도(乾道)：중국
송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무자(戊子)년에 그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다. 주자가 개요향 사람들과 함께 부(府)에 요청하여 상평창의 곡식 600석(石)을 얻어다가 대여해주고 겨울에 이자를 붙여[쌀 한
섬[石]에 이자 두 말[斗]] 원곡 이자로 계산하여 상환케 하였다. 그 뒤로부터는 상평창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작은 흉년에는 그 이자를 절반씩 감해주고 큰 흉년에는 이자 전부를
면제해주었다. 이렇게 14년을 지낸 결과 순 이익으로 남은 쌀로써 창고를 짓고 기본금을 만들고도 본곡 600석을 상환하였고 저축된 쌀 3천여 석으로 사창을 설치하여 놓고는 다시
이자를 받지 않고 다만 소모미[耗米]로 매석 당 서 되[升]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 개요향만은 아무런 흉년에도 식량 곤란을 보지 않았다.[각 사(社)의 사수(社首)와
보장(保長)은 각 사람의 호구를 문부(文簿)에 열기(列記)하고 보(保)에서는 그 사람이 도망하여 왔거나 죄를 지었거나 거처가 똑똑치 못하거나 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한 연후에
문서(文書)와 대조하여 곡식을 꾸어주고 그 꾸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호(戶)에는 주지 아니하니 그 법(法)이 주자(朱子)의 ｢사창사목(社倉事目)｣에 자세히 쓰여 있다.]

그 후 주자가 효종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이 법을 광범히 시행할 것을 요청하고 이어 말하기를 "전국에 명령을 내려 백성을 설복시켜 설치케 하되 설치를 희망하는 데는 주와 현에서
해당 지역의 실태를 참작하여 당지에 있는 상평창 곡식을 내주어서 밑천으로 하게 하고 혹 부유한 자가 있어서 자신의 쌀을 밑천으로 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대로 들어주고 그 이자와
본곡을 상환할 것입니다. 만일 지방의 정황과 풍속이 다른 데가 있으면 다시 정황에 따라 규정을 제정하여 이를 준수하게 하고 사창 설치를 희망하지 않는 곳이 있더라도 관청[官司]에서
강제로 억누르지 못하게 하면 소란스럽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효종이 그 의견을 좇아 조서를 내리기를 "본토에 사는 원주민[鄕土居]과 타관에서 온 관원[寄居官員] 및
선비[士人]들 중 행실이 점잖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고을에 설립요청 문건을 제출하게 하고 고을에서는 의창미(義倉米) 중에서 사창 밑천으로 적당히 내어줄 것이나 사창 곡식의 출납에
대해서는 사창 책임자가 본 지방 노인들과 함께 상의하여 공동으로 처리하게 하고 고을에서는 그 사업에 간섭하거나 억압하지 말 것이다" 하였다.[주자(朱子)가 일찍이
금화사창(金華社倉)에 기록하여 말하기를"세속이 이 법(法)을 병통으로 여기는 까닭은 왕안석(王安石)의 청묘법(靑苗法)으로써 구실을 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청묘법(靑苗法)이라는
것은 그 주기를 돈으로써 하고 곡식으로써 하지 아니하며 그 처리하기를 현(縣)으로써 하고 향(鄕)으로써 하지 아니하며 그 주관하기를 관사(官史)로써 하고 향(鄕)의
토군자(土君子)로써 하지 아니하며 그 실행하기를 급추(急追)히 거둬 모으려는 뜻으로써 하고 불쌍히 여기는 충애(忠愛)한 마음으로써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왕안석은 능히 한
고을에는 행하였으나 능히 천하에는 행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 또 의흥사창(宜興社倉)에 기록하여 말하기를"다스리는 사람은 있으되 다스리는 법(法)은 없다 함은 바꿀 수 없는 지극한 말이다. 선왕(先王)의 때에는 백성으로 하여금 3년 농사를
짓게 하면 반드시 1년 먹을 저축이 있으므로 쌓아서 30년에 이르면 10년 먹을 저축이 있고 백성이 흉년에도 병들지 아니하니 이것은 만세(萬世)의 좋은 법이라 이를 것이다. 그
다음은 한(漢)나라의 소위 상평창(常平倉)이라는 것이니 지금에도 본시 행하는데 그 법이 또한 일찍이 선(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에 홀로 그 법령(法令)은 문서(文書)와
창(倉)의 열쇠가 겨우 있을 뿐이니 이는 사람이 그것을 지키는 이가 없으면 법은 한갓 이름만의 법이 되어 능히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며 하물며 소위 사창(社倉)이라는 것은 먹을
수 있는 물건을 향리(鄕里)의 거칠고 한적한 곳에 모아 놓고 그것을 주관하기를 직책을 맡은 관사(官史)로써 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어거하기를 귀양 보내는 무거운 형벌로써 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늘 충신(忠信)하고 밝게 살피고 하는 인사(人士)를 얻기를 금일의 수공(數公)과 같은 이를 하여 서로 더불어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한결같이 하여 그 곡식을 내고
들이고 함을 조심스럽게 하고 간교와 속임을 막고 함이 아니면 그 법의 지키기 어려움을 며칠을 기다리지 아니하여 볼 것이다. 이 뜻을 아울러 후의 군자(君子)들에게
고(告)하노라'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흉년을 구제함에 있어서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첫째는 착한 정치를 함으로써 자연과의 조화를 일으켜 풍년이 들게 한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다만 예비 저축을
해 두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굶주린 때에 와서 구제하려 한다면 당장에 무슨 대책이 나오겠는가?" 하였고 그는 말하기를 "흉년구제사업이란 신통한 방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리사업을 완비하는 것이 제일 필요하다"고 하였다.

여동래(呂東萊)가 말하기를 "대체로 흉년구제 정책을 총괄해서 말하자면 옛날 착한 임금들과 같이 예비 축적을 해 두는 것이 상책이요, 이회(李悝)의 사업을 모방하는 것이 그 다음가는
대책이요, 축적된 곡식을 나누어 먹일 만한 데가 있으면 그것을 유통하여 백성을 이주시키거나 곡식을 운반하는 것이 또 그 다음이요, 그도 저도 할 수 없으면 죽을 쑤어서 나누어
먹이는 것이 제일 하책이다" 하였다.

조변(趙抃) 조변(趙抃)：중국 송나라 때 왕안석(王安石)의 새 법을 반대하였으며 『청헌집(淸獻集)』을 저작한 저명한 유학자.

이 월주(越州) 고을 원으로 되었을 때에 오월(吳越)지방에 큰 가물이 있었다. 조변은 백성들이 굶주리기 전에 속현(屬縣)들에 공문을 보내어 재해를 입은 자가 몇 명이며 관청에
의뢰를 받아야 할 자가 몇 명이며 백성을 시켜서 수축할 제방과 저수지는 몇 군데며 금고와 창고에서 융통할 수 있는 돈과 곡식이 얼마며 부유한 사람으로서 곡식을 내놓을만한 자가 몇
명인가를 묻고 각 속현에서 이 실태를 조사 회보하게 하여 그에 대한 대책을 세밀히 세웠다.

송(宋)나라의 제도를 상고해 보면 모든 재해를 만난 지대에서는 노력을 투입할 공사를 진행하였는바 농경지 정리, 관개시설 및 성황당[城隍], 도로 제방 등 토목공사와 식수사업들이
그것이다. 감사(監司)가 미리 공사 규모와 전곡(錢穀) 소요의 수량을 계산하고 이해관계를 열거하여 정부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으니 이는 매우 좋은 시책이었다. 흉년이 들 때마다
정부에서 국가식량을 주거나 다른 지방의 곡식을 운반하여 준다더라도 그 허다한 굶주린 백성을 전부 구제하기는 형편상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더러는 공으로 받아먹는 자가 있으나 그
수량이 극히 적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백성들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이자를 받는다.[이것이 바로 환상미(還上米)] 그러므로 굶주리던 백성이 비록 한때의 연명은 할 수 있으나 가을에 가서
수확물을 다 긁어서 상환하므로 그 해에 아무리 풍년을 만나더라도 봄이 되면 먹을 것이 없어서 도로 전날과 같이 된다. 그리고 수확할 것조차 없는 가난한 자는 그냥 유랑을 하게
되므로 결국 대여곡을 그의 이웃이나 일가에게 물린다. 그리하여 관청에서는 소란스럽게 매질을 하고 백성의 원성은 극도에 달하여 아무리 이웃이나 일가들에게까지 다니면서 물리려 하지마는
그들 중에도 가난한 자는 목숨을 내바칠 뿐이며 절대로 물어낼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국가식량도 결국 결손을 보지 않을 수 없고 더군다나 대여자 명단에 기록된 굶주린 백성이란 대개
관리들과 친근한 자이며 이정(里正)의 일가이거나 부호[豪家]의 노복들 뿐이요 실지 불상한 백성들은 대여곡을 얻어먹지 못하게 된다.

지금 만일 사창[倉] 곡식을 대여해주거나 상평창[常平] 곡식을 내다 파는 사업 이외에 그 수량을 적당하게 남겨 일부는 의탁할 데 없는 노약자, 병신, 부녀자들에게 식구에 따라
무상으로 공급해주고 그 나머지 수량은 굶주린 백성을 광범히 모집하여 후한 품삯으로 제방을 수축하여 관개사업을 진행한다면 재난구제와 수리사업이 동시에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굶주린
백성이 제 노력으로 벌어먹기 때문에 문서에 기록하는 번잡성도, 후일 상환할 걱정도 없을 것이며 각자의 희망에 따라 일을 하기 때문에 불평을 가질 이유도 없을 것이며 한 사람이
일하면 자기의 부모와 가솔을 넉넉히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지원하는 자가 많을 것이니 그 혜택을 받는 범위가 광범할 것이다.

수리사업이 일단 완성되면 흉년 피해가 영원히 제거되어 백성은 먹을 것을 염려하지 않고 국가에서는 세입에 결손을 보지 않아서 영구히 안심하고 살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은 오늘 목전의
이익에 비하여 천양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기타의 공사[工役]로서 관개사업과 같이 급하지 않은 사업이라도 그 당시의 실정에 적합한 일이라면 역시 참작하여 실행해야 한다.[이상은
상평창(常平倉), 의창(義倉), 흉년 구제사업[救荒]을 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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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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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文侯相李悝曰"糶甚貴傷人 人 謂士ㆍ工ㆍ商. 甚賤傷農. 人傷則離散 農傷則國貧 故甚貴與甚賤 其傷一也. 善爲國者 使人無傷 而農益勸. 是故 善平糴者 必謹觀歲有上ㆍ中ㆍ下熟.
大熟則上糴三而捨一 中熟則糴二 下熟糴一 使人適足 價平則止. 小饑則發小熟之所斂. 官以斂藏出糶中饑則發中熟之所斂. 大饑則發大熟之所斂 而糶之." 按班志 悝之言曰 "善爲國者 使人無傷而農益勸.
今一夫挾五口 治田百畝 歲收畝一碩半 爲粟百五十碩. 除十一之稅十五碩 餘百三十五碩. 食人月一碩半 五人終歲 爲粟九十石. 餘有四十五碩. 碩三十 爲錢千三百五十. 餘社閭嘗新春秋之祠 用錢三百
餘千五十. 衣人率用錢三百五文 終歲用千五百 不足四百五十. 不幸疾病死喪之費及上賦斂 又未與此. 此農夫所以常困 有不勸耕之心 而令糶至於甚貴者也. 是故 善平糴者 必謹觀歲有上ㆍ中ㆍ下熟.
上熟其收自四餘四百碩 中熟自三餘三百碩 下熟自倍餘百碩. 小饑則收百碩 中饑七十碩 大饑三十碩. 故大熟則上糴三而捨一. 中熟則糴二 下熟則糴一 使人適足價平則止. 小饑則發小熟之所斂
中饑則發中熟之所斂 大饑則發大熟之所斂而糶之. 故雖遇饑饉水旱 糶不貴而人不散 取有餘而補不足也."於是 行之魏國 國以富强. ○上熟 其收自四餘四百石者 平歲 百畝收百五十石. 今大熟四倍
收六百石. 計人終歲 餘四百石 官糴三百石 此爲糴三捨一也. 中熟自三 四百五十石也. 終歲 餘三百石. 官糴二百石 此爲糴二而捨一也. 下熟自倍 收三百石 終歲餘百石 官糴其五十石云. 下熟糴一
謂中分百石之一也. 小饑則收百石者 平歲百畝 收百五十石. 今小饑收百石 三分之二也. 中饑七十石 收二分之一也. 大饑三十石 收五分之一也.○漢宣帝時 大司農中丞耿壽昌奏"令邊郡 皆築倉以}\
賤時增其價而糴 以利農}\ 貴時減價而糶以利民."名曰常平倉. 時 歲數農穰 碩至五錢 農人少利. 壽昌奏置此法 人便之上乃下詔賜爵關內侯.司馬公曰"常平倉 乃三代聖王之遺法
非獨李悝ㆍ耿壽昌能爲之也. }\賤不傷農 }\貴不傷民 民賴其食 而官取其利 法之善者 無過於此."○隋文帝開皇五年 度支尙書長孫平 奏"古者 三年耕 餘一年之積 九年作 餘三年之蓄. 雖水旱爲災
人無菜色 皆由勸導有方 蓄積先備. 請令諸州百姓 勸課 當社共立義倉 收穫之日 隨其所得 勸課出粟及麥 一家一石以下 貧富爲差. 於當社 造倉窖貯之 卽委社司 執帳檢校 每年收積 勿使損敗.
若時或不熟 當社有饑 卽以此}\ 賑給."帝從之 名曰義倉 或曰社倉.時 在處委積 人免饑饉 後以百姓不思久計 輕易損費 社倉所儲 並納本州. 遇有旱荒 先給遠年粟. 至煬帝時 國用不足
並取義倉以充官費. 至唐太宗時 復令天下州縣 置義倉以備凶年 勿許雜用. 武后ㆍ中宗之際 公私窘迫 貸義倉支用. 神龍以後 天下義倉 費用向盡.胡氏曰"賑饑莫要乎近. 其人隨義倉取之 於民不厚
而置於當社 饑民之得食也 其庶幾乎. 後世 義倉之名固在 而置倉於州郡 一有凶饑無狀 有司固不以上聞也 良有司敢以聞矣. 比及報可 委吏屬 出而施之 文移反復 給散艱阻 監臨胥吏 相與侵沒 其受惠者
大抵城郭之近 力能自達之人耳. 居之遠者 安能扶老携幼數百里 以就龠合之廩哉?"五代周顯德六年 淮南饑 世宗令以米貸之. 或曰"民貧 恐不能償."世宗曰"民猶子也. 安有子倒懸 而父不爲解者
安責其必償也?"胡氏曰"稱貸 所以惠民 亦以病之. 惠者 紓其目前之急也 病者 責其他日之償也. 其責償也 或嚴其期 或徵其耗 或取其息. 或予之以米而使之歸錢 或貧無可償而督之不置
或胥吏以詭貸而徵諸編民 凡此皆民之所甚病也. 有司 以豐取約予爲術 聚斂之臣 以頭會箕斂爲事. 大旱而稅不蠲 水潦而稅不蠲 蝗蝻螟賊而稅不蠲. 長官督稅 不登數則不書課 民戶納欠 不破産則不落籍
出於民尙如此 而况貸於公者? 其責償 固不遺餘力矣. 世宗 視民猶子 匡救其乏 而不責其必償 仁人之心 王者之政也."丘濬曰"胡氏此言 非但稱貸之弊 乃今日義倉之弊也. 義倉 本以爲荒歉之備
使吾民不至於損瘠. 而有司者 方其收也 急於取足 不復計其美惡. 及其儲也 恐其浥爛 不暇待其荒斂. 所予者 不必所食之人 所徵者 多非所受之輩. 胡氏所謂 其責償也 或嚴其期 或徵其耗 或取其息
或與之以米 而使之歸錢 或貧無可償 而督之不置 或胥吏以詭貸 而徵諸編氓 此數言者 切中今日義倉之弊. 所謂義者乃所以爲不義 本以利民 反有以害之也. 但見其事煩擾 長吏奸而已 其於賑恤之實
誠無益焉."按社倉 本以勸課人民 節有餘備凶歉者也. 宜置於當社 令其社中掌之 不當移爲州邑之儲也. 此與今本國還上 其本自別. 所謂還上 軍國之儲也 當貯於城邑 官府管之 不宜散置於外面也. 後世
義倉屬於州郡 典以官吏 逐年斂散. 而本國還上 亦逐年貸民還納 故其事相同也. 旣前期與民 後徵其償 官司管納 馭以刑獄則於是有嚴期督迫 約予豐取 不待凶年 勒配分給. 貧民流亡 代侵隣族 猾吏用奸
詭受橫徵 百端弊害 以至囚繫滿圄 鞭朴遍境徒爲陷人之網 而無復救民本意矣. 王安石靑苗法 人皆稱其不便此與靑苗 有何異乎? 若夫常平之制 豐不傷農 饑不傷民 公私無弊 上下俱利 法之善者 無逾於此也.
國典亦令京外 置常平倉而不曾擧行 何也? 如欲措置之 善變今還上 列邑皆置常平 依法糶糴. 社倉則勸諭父老 從願設立 令當社人士 公共主幹 而勿與官司 依隋初及朱子社倉之制 量宜定式 令當社人士
公共主幹 官司則但興助修飭而已 不得監主主管.如此然後得也. 或曰"社倉置於當社則鄕里之間 難以得其人 未能設立 或徇私糜廢則奈何?"曰朝家誠心勸諭 不爲侵擾 民見其利 不被其害則因以成俗
固無不可行者. 縱使未能設立 或修廢無常 猶無年年毒民之害矣. 民苟免於其害則可以安業務農 家有蓋藏之積. 又有常平以輔益之則饑歲濟活 豈可還上比也?○宋孝宗時 頒社倉法於諸路. 初
朱文公居建寧府崇安縣開耀鄕. 乾道戊子 建人大饑 文公與鄕之人士 請於府 得常平米六百石賑貸 至冬加息 一石息米二斗. 計米以償. 自後 隨年斂散 少歉則蠲其息之半 大饑則盡蠲之 凡十有四年 得息米
造倉收貯 乃以元數六百石還府. 以見儲米三千餘石 以爲社倉. 不復收息 每石止收耗米三升. 以是一鄕之間雖遇凶年 人不缺食. 各社社首ㆍ保長排簿 各人戶口 保明其非逃亡作過 無行止之人然後 照狀支給
其不願請貸之戶 不支. 其法 詳見朱子社倉事目. 後於召封 請以其法 推廣行之. 因曰"願下諸路 曉諭人戶 有願置立者 州縣量支常平米斛 其有富家願出米作本者 亦從其便 息米及數亦與撥還.
如有鄕土風俗不同者 更許隨宜立約. 申官遵守 其不願置立處 官司不得抑勒 則亦不至搔擾矣."孝宗從之. 詔"令本鄕土居或寄居官員ㆍ士人有行義者 狀陳州縣 量於義倉米內支撥. 其斂散之事 與本鄕耆老
公共措置 州縣並不干與抑勒!" 朱子嘗記金華社倉曰"世俗之所以病乎此者不過以王氏之靑苗爲說耳. 然靑苗者 其給之也 以金不以}\ 其處之也 以縣不以鄕 其職之也 以官吏 而不以鄕人士君子 其行之也
以聚斂亟疾之意 而不以慘怛忠愛之心. 是以 王氏能行於一邑 而不能行於天下."○又記宜興社倉曰"有治人無治法 不可易之至論也. 先王之世 使民三年耕者 必有一年之畜. 故積至三十年 則有十年之畜
而民不病於凶饑 此可謂萬世之良法矣. 其次則漢之所謂常平者 今固行之 其法亦未嘗不善也. 然今獨其法令簿書管鑰之僅存耳. 蓋無人以守之 則法爲徒法 而不能以自行也. 而况於所謂社倉者
聚可食之物於鄕井荒閑之處 而主之不以任職之吏 馭之不以流徒之刑. 苟非常得忠信明察之士 如今日之數公者 相與幷心一力 以謹其出納 而杜其奸欺 則其法之難守 不待日而見之矣. 幷此
以告後之君子云."○朱子曰"自古救荒 自有兩說. 第一是感召和氣 以致豐穰 其次只有儲蓄之計. 若待他餓時理會 更有何策?"又曰"賑饑無奇策 不如講求水利."○呂氏 東萊 曰"大抵荒政 統而論之
先王有預備之政 上也. 修李悝之政 次也. 蓄積有可均處 使之流通 移民移粟 又次也. 咸無焉 設糜粥最下也."○趙抃知越州 吳越大旱. 前民之未饑 爲書問屬縣被災者幾 鄕民能自食者有幾
當廩於官者幾人 溝防構築可僦民使治之者幾所 庫錢倉粟可發者幾何? 富人可募出粟者幾家 使各書以對而謹其備.按宋法 諸災傷地分 有興工役可以募人者 如農田 水利及城隍ㆍ道路ㆍ隄岸土工ㆍ種植林木之類.
監司預行檢計工料ㆍ錢}\之數 具利害奏聞 此意甚好. 每令饑歲國家或發倉廩 或移他粟 而許多饑民勢不能盡周. 故或有白給者 其數不過升合 其餘率皆稱貸取息. 卽還上. 是以 饑民雖得一時之活
而至秋還償 罄竭所收 雖逢樂歲 及春則無食 猶夫前日. 其貧無所收者 便至流亡 侵督之害 及於隣族官有鞭笞之擾 民多冤號之聲 雖督遍隣族 隣族亦貧者 有死而已 終無可出. 於是 官}\亦免欠縮
况得參饑民之錄者 例多主吏親切 里正族屬及豪家奴僕耳? 至於無告之民 則反見遺落. 今若以倉儲常平糶發之外 量分其數 其老弱殘疾婦女 無依之類 計口白給. 其餘則廣募饑民 優給雇價 築堤堰以興水利.
如此則救災興利 一擧兩得. 民之饑者 食於其力 故無圖錄之弊 無後償之憂. 從其自募 故無生怨之心. 優給其價 一人之役而足以資其老幼 故應募者衆 而惠之所及者廣. 水利一興 則永無凶年之害 民不缺食
國不闕稅 可以千萬歲永賴矣 其與今日之爲利害 相去霄壤也. 其他工役 雖非水利之爲急 苟合於時務 亦在所宜商量也. 已上論常平倉ㆍ義倉ㆍ救荒.隨錄卷之七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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