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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화폐에 관한 고찰[錢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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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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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화폐에 관한 고찰[錢貨]

『주례』에 의하면 외부(外府)는[정현(鄭玄)은 말하기를 "외부(外府)는 전화(錢貨)가 밖에 있는 것을 맡은 자이다"하였다.] 나라[邦]의 재정 출납을 맡는 관리로서 온갖 물건을
주선하여 국가의 경비와 모든 관리들이 쓰는 비용을 공급하며[포(布)는 천(泉)이다. 그 거두어 둔 것을 천(泉)이라 하고 그 통행하는 것을 포(布)라 하니, 이름을 수천(水泉)에서
취한 것은 그 흘러 행하여 퍼지지 아니하는 데가 없다는 뜻이고, 들어오고 나가고 한다 함은 받아들이고 다시 냄을 이름이고, 백물(百物)을 공(共)한다 함은 혹은 짓기도 하고 혹은
사기도 하는 뜻이고, 대(待)한다 함은 공급함과 같고, 법(法)이 있다 함은 관(官)의 공용(公用)이다. 천(泉)은 처음에 한 가지만 있더니 주경왕(周景王)이 대천(大泉)을
만들어서 두 가지가 되었다.] 모든 제사, 손님[賓客], 상사[喪事], 회합[會同], 군사(軍旅) 등에 관한 일체 비용과 증정물[齎] 및 상품으로 주는 화폐를 제공한다.[증정물은
여비이다. 왕소우(王昭禹) 왕소우(王昭禹)：중국 송나라 때 『주역상해(周易詳解)』를 저작한 사람.

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자개[貝]를 기준으로 하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태공(太公) 태공(太公)：중국 주나라 건국시에 공로를 세운 강태공(姜太公).

때에 구부환법(九府圜法) 구부환법(九府圜法)：중국 주나라 때 강태공(姜太公)이 화폐제도를 실행하기 위하여 대부(大府), 옥부(玉府), 내부(內府), 외부(外府), 천부(泉府),
천부(天府), 직내(職內), 직금(職金), 직폐(職幣) 등 직무를 맡아보게 한 법.

을 제정하여 처음으로 자개 대신에 돈을 사용하였다. 이것을 혹은 포(布)라 하고 혹은 천(泉)이라고 하였으니 포는 널리 편하다는 뜻이며 천은 유통한다는 의미로서 실지는 같은 것이나
후세에 와서 포(布) 혹은 천(泉) 대신에 전(錢)자를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천부(泉府)는[천화(泉貨)를 맡은 관부(官府)이다.] 시장에서 받아들이는 돈을 주관하는바 시장에서 팔리지 않고 민간에 체화되어 있는 물건을 거두어들인다고 하였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주례』에 각 기관을 맡은 벼슬이 많은데 전적으로 재정을 맡은 관직으로서 외부(外府)와 천부(泉府) 두 관직이 있었다. 즉 외부는 정부비용의 수입 지출을
주관하고 천부는 물건 매매에 관한 일을 주관하였던 것이다. 대체 천하의 온갖 재부는 모두 돈을 매개로 하여 유통한다. 무거워서 운반할 수 없는 물건은 돈이 아니면 먼데까지 가지고
다니지 못하며 한 군데 체화된 물건은 돈이 아니면 서로 처리하지 못하며 떼어낼 수 없는 큰 물건은 돈이 아니면 짜개어 쓰지 못한다. 그것은 물화[貨]는 무겁지마는 돈은 가벼우며
물건[物]은 체화로 될 수 있지마는 돈은 어디나 통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례』에 사시(司市)는 어떤 지대를 정연하게 구획하여 시장을 만들며 점방을 버리고 물품을 따로따로 분배하여 시장을 공평하게 하며 법령으로써 사치품을 금지하여 시세를 고르게
하며[물미(物靡)라 함은 팔리기는 쉬우나 소용이 없는 물건이니 그것을 금하면 시장의 물건 값이 고르게 된다. 정사농(鄭司農)은 말하기를"미(靡)는 사치함을 이름이라"하였다.]
상인들을 시켜서 물품[貨]을 풍부하게 하여 돈[布]을 유통케 하며[물화(物貨)를 여러 곳으로 통함을 상(商)이라 이르고 거(居)하여 물건을 파는 것을 가(賈)라 이른다. 부(阜)는
성(盛)한다는 것과 같고 포(布)는 천(泉)을 이름이다.] 국내에 흉년과 질병이 있을 때에는 시장에서 세를 받지 않고 돈[布]을 많이 만들어 유통시킨다.[재해가 있어서 물건이
귀(貴)하면 시장에서 세(稅)를 받지 아니하는 것은 물건이 적어서 백성이 궁핍(窮乏)하고 괴로워하는 때문이다. 금(金)이나 동(銅)은 흉년이 없으니 물건의 귀함을 인하여 천(泉)을
많이 만들어서 백성을 요족(饒足)하게 하는 것이다.]

상고해 보면 옛날 어진 임금들이 전국에 정전제도를 실시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고 특히 도시에 지역을 구획하여 가가와 전을 설치하는 등 사업을 이와 같이 세밀히 조직하였다.
이러므로 하여 선비, 농민, 상인, 수공업자가 모두 자기 직업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여 전국의 모든 사업이 날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상고해 보면 포(布)는 즉 천(泉)이며 천은 바로 돈[錢]이다. 돈이란 모든 물화를 척도하는 것이요, 물호를 유통시키는 것은 상인들이다. 그러므로 상인들이 상품을 풍족하게 한
뒤에야 화폐가 순환되는 것이며, 큰 흉년이 있을 때에는 먹을 것과 물화가 풍성하게 유통되어 역시 백성들의 궁핍을 구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시장에서 세를 받지 않는 것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상인들을 모아들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물화를 교역하는 밑천이 부족하여 백성들이 식물을 구할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구리를 녹여 돈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대체 곡식은 흉풍이 있으므로 사람의 힘으로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금과 구리는 흉풍에 관계없으므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 ｢식화지(食貨志)｣ ｢식화지(食貨志)｣：중국 한나라 때 반고(班固)가 저작한 『한서(漢書)』의 편명으로서 국가의 재정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부분.

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주옥(珠玉)을 상등 화폐[上幣]로, 황금을 중등 화폐로, 칼과 포(布)를 하등 화폐로 하였는데 태공(太公)이 구부환법(九府圜法)을 설정하였다.[『주례』
｢주관(周官)｣에 대부(大府), 옥부(玉府), 내부(內府), 외부(外府), 천부(泉府), 직내(職內), 직폐(職幣), 직금(職金), 천부(天府) 등 벼슬이 있었는데 모두 재정을
맡은 관직이기 때문에 구부(九府)라 하였다. 환(圜)이란 공평하게 통용한다는 뜻이다.] 황금은 길이 한 치에 무게가 한 근이며 돈은 둥굴고 가운데를 모나게 만들었는데 단위 무게를
수(銖)로 계산하였으며[황금(黃金)은 근(斤)으로써 이름을 삼고 돈은 수(銖)로서 무게를 삼는다.] 포백(布帛)은 넓이 2척 2촌을 폭(幅)이라 하고 길이 40척을 필(匹)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화폐는 금보다 귀중하고 칼보다 편리하며 샘물처럼 유통되고 포백에 의하여 출납되는 것이다" 하였다.[속(束)은 모음이다.]

『관자(管子)』에 이르기를 "성탕(成湯)시대의 7년 대한과 하우(夏禹)시대의 5년 홍수에도 사람들이 죽을 먹거나 자식을 판 일이 없었으니 이는 성탕이 장산(莊山)의 금으로 화폐를
만들고 하우가 역산(歷山)의 금으로 화폐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곤란한 생활을 해결해주었기 때문이다. 대체 세 가지 화폐란 그것을 쥐었을 때 직접 몸이 덥거나 배가 부르는데 도움을
주지 않으며 그것을 버렸을 때 대번에 몸이 춥거나 배가 고픈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옛날 임금들이 이것으로써 모든 재물을 보유하고 사람의 할 일을 통제하여 국가를 다스렸다. 때문에
그것을 저울이라고 하였으니 저울은 물건의 무게를 따라 맞추어서 변동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진나라[秦]에서는 반냥전(半兩錢)[글자를 반냥이라 썼고 무게도 반냥이었다.]을 사용하였다. 한나라가 건국된 뒤에 그것이 너무 무거워서 사용하기 불편하다 하여 협전(莢錢)으로
개조하였던바[돈의 엷기가 느릅나무 꼬투리[楡莢]와 같다는 말이다. 무게는 1수(銖)요, 반경은 5푼인데 거기에 한흥(漢興)이라고 썼다.] 이때에 물가가 등귀하여 쌀 한 섬에 1만
돈[萬錢]이었다.

문제(文帝) 5년에 다시 사수전(四銖錢)[글자는 반냥이라고 썼으나 무게는 실지 4수(銖)이다. 대체 24수가 1냥으로 된다.]을 만들고 화폐 사조(私造) 금지령을 폐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체로 만들어 쓰게 하였다. 가의(賈誼) 가의(賈誼)：중국 한문제(漢文帝) 때의 문학가이며 정론가. 치안책(治安策)이라는 상소를 올렸음.

가 간하기를 "법령에는 전국으로 하여금 모두 구리와 주석으로 돈을 만들게 하되 만일 납을 섞어서 위조하는 자가 있으면 자자[黥]로 죄를 준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만드는 데는
잡것을 섞어서 협잡하지 않으면 이익을 볼 수 없는 것인데 그 섞는 협잡물이 그리 많지 않으나 이익을 많이 보는 것입니다.[미(微)는 적음이다. 간악한 백성들이 납과 철을 섞는데 그
용비(用費)함이 심히 적되 이(利)를 얻음이 심히 후(厚)한 것이다. 일설(一說)에는 미는 정밀하고 교묘(巧妙)함을 이름이라 한다. 납과 철을 섞음이 그 기술이 심히 정밀하고
교묘하여 각지(覺知)하지 못하고 이(利)를 얻음이 심히 후하므로 사람들이 쉽게 범행(犯行)하여 그 간교함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대체 일에는 재난을 자아내는 수도 있고 법에는 협잡 행위를 조장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평민들로 하여금 저마다 화폐 주조권을 가지게 하여 각각 들어앉아 돈을 만들게 하고서
법령으로 그들의 사기와 폭리를 금지하려 한다면 비록 날마다 범죄자의 이마에 자자[黥]를 찍더라도 사기 행위가 금지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백성을 유도하여 함정에 빠지게 하는
법령으로서 이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사용하는 돈이 저마다 다를 것이므로 혹은 가벼운 돈을 써서 백 문(文)에 얼마씩을 더 받으며[당시 돈 무게가
4수(銖)이며 법정화폐[法錢] 100매의 무게는 1근 16수였다. 그러므로 가벼운 돈 몇 매씩 더 주어 중량을 맞게 하였다.] 혹 무거운 돈을 쓰게 되면 저울로 달아보아 중량이
맞으면 남는 부분을 받지 못하여[무거운 돈을 쓰면 평칭(平稱)보다 남음이 있으므로 능히 받지 못하는 것이다.] 법정화폐의 표준이 시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관리가 강제로 통일시키려고
하면 크게 까다롭기만 하고 권력으로는 제지할 수 없을 것이며 그대로 버려둔다면 전방마다 쓰는 돈이 달라서 화폐가 대단히 문란해질 것이니 정말 이에 대하여 옳은 방도로써 처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지금 농사를 버리고 구리를 채굴하는 자가 날로 붇고 쟁기와 호미 대신에 불무지를 일삼기 때문에 위조화폐가 날이 갈수록 많은 반면에 식량은 증가되지 않습니다.[동(銅)을 파내어 돈을
만들고 그 농사를 버리는 까닭에 곡식이 많아지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착한 사람도 이익에 쏠려서 나쁜 일을 하며 순진한 백성도 죽을 함정에 빠지게 되나[출(怵)은 유인(誘引)됨이니 착한 사람도 이익(利益)에 유인되어 간사한 일을 함을
이름이다.] 국가에서는 이에 대하여 근심하지 않습니다. 관리들이 이에 대하여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화폐 위조를 금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화폐 위조를 금지한다면 법정화폐의 시세가
반드시 비싸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싸지면 이익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위조하는 자도 더 많아질 것이니 아무리 시장에서 범죄자를 죽이더라도 그를 금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꼬리를 물고 계속하는 위조 사건을 다 제지할 수도 없고 법령이 번번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는 것은 모두 구리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구리가 전국에 분포되면 그에 따르는 해독의
영향이 많을 것이므로 그를 국가에서 회수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정부에서 구리를 회수하여 백성에게 분포되지 않게 하면 백성들이 화폐를 위조하지 못할 것이므로 자자[黥] 찍히는
범죄자가 적어질 것이며 위조화폐가 유통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주는 화폐의 신용이 높아질 것이며 구리를 채취하고 돈을 위조하던 자가 도로 농사를 짓게 될 것이며 정부에서는 구리를 다
회수한 다음에 그 많은 구리를 가지고 시세를 조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동(銅)이 쌓인다 함은 동이 많이 쌓임을 이름이다.] 즉 돈 시세가 눅어지면 술책[術]을 써서 돈을
거두어들이고 돈 시세가 비싸지는 때에는 역시 술책을 써서 많이 유통시키면 물가는 반드시 균형이 잡힐 것입니다. 이런 방도로써 여러 물화의 가격을 통제하며 국가경비의 과부족을
조절한다면 국가에서는 부유하게 되고 기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말민(末民)은 공상(工商)을 업(業)으로 하는 자를 이름이다.] 이렇게 된 다음에 우리가 쓰고
남은 물화를 갈라다가 변경의 오랑캐[匈奴]에게 사용하여 그 백성들로 하여금 달라붙게 하면 적들은 반드시 붕괴될 것입니다"하였다.[말업(末業)을 하는 자가 이미 괴롭고 농민이
본업(本業)을 도탑게 하여 창고가 가득 차고 베와 비단이 남음이 있으면 호인(胡人) 흉노를 불러서 많이 와서 항복하게 하므로 우리의 버리는 재물을 정한다고 이름이고, 버리는
재물이라 함은 버릴 수 있는 무용(無用)한 재물을 이름이고, 축(逐)은 다툼이다.]

가산(賈山) 가산(賈山)：중국 한문제 때 화폐 제조를 반대하는 상소를 한 사람.

이도 말하기를 "돈이란 쓸모없는 물건이지마는 그것으로 부귀를 살 수 있는바 부귀는 임금[人主]이 가지고 있는 권리[柄]입니다. 그런데 지금 백성으로 하여금 화폐를 지어 쓰게 하니
이는 백성들이 임금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니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문제가 듣지 않았다.

이때 오(吳)왕 유비(劉濞)는 동광을 개발하고 돈을 만들어서 황제와 같이 부유하게 지내다가 결국 반역(叛逆)하였으며 등통(鄧通)도 돈을 만들어서 재물이 제왕보다 많았다. 그
뒤로부터 무제(武帝)에 이르는 40여 년간에 지방 관청[縣官]에서도 경비가 부족하면 더러 동광을 채굴하여 돈을 만들어 썼으며 백성들도 돈을 위조하여 썼으니 그 수는 헤일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리하여 돈이 많아질수록 가치가 가벼워졌으며[돈을 만든 것이 많으므로 돈이 또한 경하니 경(輕)하다 함은 또한 천(賤)함이다.]물품이 적어질수록 비싸졌다.[백성은
다만 돈을 만들고 다른 물화(物貨)를 만들지 아니하므로 적었다.]

무제 원수(元狩) 5년에 관리들이 돈이 가벼우면 위조하기가 쉽다 하여 다시 오수전(五銖錢) 오수전(五銖錢)：중국 한나라 때 사용하던 화폐.

을 주조하자고 청하였는데 돈의 둘레를 투박하게 하여 돈을 갈아서 녹이지 못하도록 하였다.[둘레를 만들고 글자와 무늬가 있었다.]

당시에 관리나 백성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위조하다가 죽은 자가 수십만 명이며 서로 살해를 하고도 발각되지 않은 자가 헤일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위조화폐를 자진하여 내놓고 용서받은
자가 100여만 명이었으므로 범죄자가 엄청나게 많아서 관리들이 다 잡아죽이지 못하였다.

이에 각 지방[郡國]에 금지령을 내려 돈을 사사로이 짓지 못하게 하고 전적으로 상림원(上林苑) 상림원(上林苑)：중국 한나라 때의 비원(秘苑).

의 세 기관에 맡겨서 제조하게 하였다.[수형도위(水衡都尉)가 상림원의 총책임을 맡았는데 거기에는 속관(屬官)으로 균수관(均輸官), 종관(鐘官), 변동령(辨銅令) 등 세 관직을
두었다.] 돈을 많이 주조한 다음에는 전국에 명령하여 상림원 세 기관에서 제조한 돈 이외에는 유통을 금지하였으며 그 전에 지방에서 만들어 쓰던 돈들을 전부 녹여서 구리로 회수한
결과 백성들의 화폐 위조가 더욱 적어졌다. 이 오수전(五銖錢)은 주조하는 비용이 타산에 맞지 않아서[이익이 없다 함을 말함이다.] 오직 월등한 기술자나 큰 협잡배라야만 위조할 수
있었다.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공우(貢禹) 공우(貢禹)：중국 한나라 때 국왕에게 바른말로써 많이 충고한 저명한 학자.

가 말하기를 "백성들은 화폐를 위조하다가 죄를 범한 자가 많으며 부유한 사람들은 돈을 집에다 가득 쟁여 두고도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농사를 버리고 이익만을
추구하여 범죄 행위를 근절할 수가 없으니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화폐주조 관서를 폐지하여 다시 돈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조세(租稅)와 녹봉을 모두 포백과 곡식으로
계산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농업에 전력을 들이게 해야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논의하는 자들이 사고파는 데는 돈으로 해야 할 것이요 포백을 가지고 한 자, 한 치씩 찢어 낼
수 없다 하여 공우(貢禹)의 의견도 시행되지 못하였다. 무제 원수(元狩) 5년부터 처음으로 상림원(上林苑) 세 관서에서 오수전(五銖錢)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평제(平帝)
원시(元始) 연간에 이르러서는 유통화폐가 280억만을 넘었다고 한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포백으로는 옷을 만들고 미곡으로는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니 이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것으로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될 수 없는 물건이다. 만일
포백이나 미곡으로써 화폐를 대신하려 한다면 포백은 한 치씩 찢지 않을 수 없고 미곡은 낱낱이 훑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길쌈하는 여자가 한 올씩 모아 한 필을 만들고 농사하는
사람이 한 톨씩 모아 말 곡식을 만드는 것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더군다나 포백은 직접 수요가 되는 것이요 화폐란 의식에 직접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진(晋) 공림(孔琳)
공림(孔琳)：중국 서한(西漢) 때의 유학자.

이 말하기를 '옛날 어진 임금들이 직접 수요가 되지 않는 화폐를 가지고 직접 수요가 되는 재부를 융통케 하였으니 이는 부셔지거나 소모되는 폐단이 없을 뿐더러 운반하는 고통도 덜게
된다' 하였다. 이런 것으로 보면 공우(貢禹)가 제기한 계책은 절대로 쓸모없는 것이다. 만일 시골 어느 한구석에서 포백을 쪽쪽이 찢거나 미곡을 흩어 가면서 화폐 대신 사용하는 데가
있다면 관청[官府]에서 응당 금지해야 할 일이거늘 더군다나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법령을 세우겠는가?"라고 하였다.

촉(蜀)나라 공손술(公孫述) 공손술(公孫述)：중국 후한 때 지방관리로서 사천지방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켜 황제로 자칭하다가 광무제(光武帝)에게 죽은 사람.

이 동전을 폐지하고 철전을 만들었으나 백성들이 화폐로 쓰지 않았다.[『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 ｢서역전(西域傳)｣：중국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중국 서쪽에 있는
여러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北史)』의 편명.

에 이르기를 "계빈국(罽賓國)에서는 은으로 돈을 만들었는바 전면[文]에는 말 탄 그림을 그리고 후면[幕]에는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후면이란) 막(幕)은 만(幔)자로 읽는다.
오익산연국(烏弋山燕國)의 돈도 계빈국과 같이 하여 전면[文]에 사람 얼굴을 그리고 후면[幕]에는 말 탄 그림을 그린 다음 금은으로 돈 둘레를 장식하였다. 안식국(安息國)
안식국(安息國)：고대 중국의 서부에 있던 나라.

에서도 은으로 돈을 만들어 전면에 왕의 얼굴을 그리고 후면에는 왕후[夫人]의 얼굴을 그렸으며 그 왕이 죽으면 즉시 개조하였는데 대월지국(大月氏國) 대월지국(大月氏國)：고대 중부
아시아의 나라 이름으로서 처음 감숙성 서부에 살다가 쫓겨간 민족이 창건한 나라.

에서도 이와 같이 했다" 하였다. 『남북사(南北史)』 『남북사(南北史)』：중국 역사에서 정치변동이 가장 빈번했던 남북조(南北朝)시대의 여러 나라 역사를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역사서적.

에 이르기를 "후주(後周) 때 하서(河西)지대의 여러 고을에서는 더러 서역(西域)에서 유통하는 금은 화폐를 섞어서 썼다" 하였다.]

상고해 보면 철전(鐵錢)이 무거워서 사용하기 불편하기 때문에 당시에 화폐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 후세의 지폐[交子]를 사용하는 폐단을 열어 놓았으니 대개 화폐를
주조하는 데는 구리나 주석만한 것이 없다. 또 전폐(錢幣)를 사용한 지는 오래였는바 중국에서만 전폐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서역 여러 나라들에서도 모두 전폐를 사용하였다. 근세에
거란(契丹)이 동북에서 일어나 역시 전폐를 제조 사용하여 국가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였으니 천하에 어디서나 사용하지 못할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얼마 전에
표류해 온 서양 사람을 직접 만나서 물어 보았는데 자기 나라에서도 은화폐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서양[西洋國]이란 옛날 서역 여러 나라들의 남쪽에 있는 나라인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을 혼동하여 남만(南蠻)이라고 일컫는다.]

오나라 손권(孫權)이 처음으로 당오백전(當五百錢)과[글자를 대천오백(大泉五百)이라고 썼는데 지름이 1촌 3푼이요 무게가 12수(銖)였다. 관리를 시켜 구리를 회수하여 돈을 만든
다음에 화폐 사조(私造) 금지령을 내렸다.] 당천전(當千錢)을[지름이 1촌 4푼이요 무게가 16수(銖)였다.] 만들었는데 돈 가치가 너무 비싸기 때문에 다만 헛 명목뿐이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고통으로 여겼다.[후일에 손권이 명령하기를 "전날 큰 돈을 만들기는 물화를 광범히 유통시킬 수 있다고 하기에 허락한 것인데 이제 듣건대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불편하다 하니 이 돈을 없애서 기명을 만들 것이며 관청에서는 다시 큰 돈을 발행하지 말라! 만일 개인으로서 현물을 가진 자가 있다면 소유물 전부를 바치게 하는 동시에 가격을
감하여줄 것이니 원통한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하였다.]

상고해 보면 이는 손권이 재주를 부리는 술책인데 후세에 와서 큰 돈을 만든 것이 이때부터 시작하였다. 대체 옛날부터 임금을 세워 백성의 우두머리[生民之主]로 삼은 것은 대개 그로
하여금 전국의 이권을 관리하게 한 것이요 전국의 이권을 독차지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한낮에 시장을 열어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교역하여 물건의 유무를 상통하게 하였다. 만일 물물
교환만을 하게 되면 없는 물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화폐를 만들어서 척도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물건과 화폐는 반드시 가치가 서로 맞아서 경중(輕重)의 차이가 없게 된 후에야
이 제도가 오래도록 시행되고 폐단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권리를 잡은 임금이나 대신들은 다만 국가경비가 부족하다 하여 이익이 있을 술책만 꾸며냄으로써 전국 백성들을 기만하여 전국의 재부를 긁어다가 개인의 이익만을 채우니 이것이
어찌 임금으로 된 본의인가?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이익으로 되는 줄만 알고 소득은 극히 적은 반면에 손실로 되는 것이 극히 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고금을 통하여 역력히 볼 수 있는 경험이다.

위(魏)나라 조비(曹丕) 조비(曹丕)：중국 동한(東漢)의 정권을 탈취하여 위(魏)나라를 건국한 위문제(魏文帝)의 이름.

때에 오수전(五銖錢)을 폐지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곡식과 비단으로써 물품을 사고팔게 하였다.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서는 화폐를 폐지하고 곡식으로 표준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백성들의
사기 행위가 점차 많아져서 저마다 곡식을 습하게 하여 이익을 획득하거나 비단을 엷게 하여 교환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아무리 형벌을 엄격하게 하여도 금할 수가 없었다.
사마지(司馬芝) 사마지(司馬芝)：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여러 고을 태수가 되어 정치적 업적이 많은 사람.

등과 온 조정의 여론이 전폐(錢幣)를 사용하면 국가가 부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 형벌도 덜 쓰게 될 것이니 지금 만일 오수전(五銖錢)을 지어 쓰면 모든 일에 편리할 것이라 하므로
명제가 디시 오수전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진(晉)나라 시대에까지 이 제도를 개혁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진(晉)나라 안제(安帝) 때에 환현(桓玄) 환현(桓玄)：중국 진(晋)나라 때 사람.

이 돈을 폐지하고 곡식과 비단[穀帛]을 화폐 대신으로 쓰자고 건의하였는데 공림(孔琳)이 의견을 말하기를 "｢홍범(洪範)｣의 여덟 가지 일[八政]에 화폐를 먹는 문제 다음 자리에
놓았으니 물건을 바꾸는 밑천으로서의 화폐가 어찌 긴요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만일 백성들로 하여금 돈 만드는 데 품을 들이게 한다면 이는 농업에 방해가 될 것이니 이를
금지해야 된다. 이제 농민들은 곡식을 생산하기에 힘을 쓰고 장인은 도구 만드는 데 힘을 써서 각자가 자기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어느 여가에 돈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착한 임금[聖王]들이 목전 필수품이 아닌 화폐[貨]를 제정하여 필수품인 물건을 유통케 하였다. 전폐는 부셔지거나 없어지는 폐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물화를 운반하는
고통도 덜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모나 자개[龜貝]의 화폐 역할을 대체하여 역대를 내려오면서 사용하게 되는 까닭이다.

곡식이나 비단은 본래 의식에 필요한 것인데 이제 그것을 찢고 흩어서 화폐[貨]로 사용한다면 손해가 많은 것이며 또 장사꾼들의 손에 의하여 번잡하게 찢어지고 되질하고 베는 데서
감모가 생길 것이니 이것이 폐단으로 될 것은 목전에 확연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종유(鍾繇) 종유(鍾繇)：중국 삼국(三國)시대 위(魏)나라의 태부(太傅) 벼슬을 한 인물.

가 말하기를 '교활한 자는 저마다 곡식을 습하게 하여 폭리를 도모하며 엷은 비단[薄絹]을 만들어 화폐에 충당하였는데 위(魏)나라 때에 엄혹한 형벌로 제재하였어도 금지할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마지(司馬芝)가 말하기를 '돈을 사용하면 국가가 부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 형벌을 덜 쓰게도 된다' 하였다. 또 지금의 실정을 보면 전폐[錢]를 쓰는
곳이라 하여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며 곡식[穀]을 화폐로 쓰는 곳이라 하여 부유해지는 것도 아니다. 위나라 명제(明帝) 때에 전폐를 폐지하고 곡식을 화폐로 사용한 지가 이미
40년이었다. 그것이 백성들에게 대단히 불편하다 하여 온 조정의 여론이 모두 다시 전폐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바 하부에서 불평이 없었고 조정에서 이의를 가진 자도 없었다.
그들의 곡식 대신에 전폐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곡식과 비단을 화폐로 쓰는 것이 폐단으로 된 것은 과거에 이미 명백하게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폐단을 방지하는 방안은
전폐를 폐지하는 데 있지 않다고 본다" 하였다.

전량(前涼) 전량(前涼)：중국 진(晋)나라 때 16국의 하나로서 양주 자사 장궤(張軌)의 후손 장조(張祚)가 건국한 나라.

장궤(張軌)의 참군(參軍) 색보(索輔)가 장궤에게 말하기를 "옛날에는 금이나 자개[貝]나 가죽을 화폐[貨]로 사용하여 곡식과 비단을 되고 재는 데서 생기는 소모가 없게 하였고
한나라에서 오수전(五銖錢)을 제정하여 계속 유통하다가 진(晋)나라 태시(太始) 연간에 하서(河西)지방이 황폐하게 되면서 전폐를 폐지하고 포백의 필을 찢어서 자투리[段數]로 만들어
썼다. 좋은 비단을 한 번 찢어 버린 다음에는 사고 바꾸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연히 여자들의 노력만 허비하고 옷감으로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가장 큰 폐단이었다. 지금
중국이 비록 소란하지마는 여기는 안전하니 오수전을 다시 제조하여 편리한 방도를 써야 한다"고 하였다. 장궤(張軌)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오수전 제도를 제정하여 시장에서 사용하게
한 결과 전폐가 원만하게 유통되어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유송(劉宋) 유송(劉宋)：중국 왕대의 이름으로서 유유(劉裕)가 진(晋)나라의 선위(禪位)를 받은 후 송나라라 하였는바 후대 조씨 송나라와 구별하여 이렇게 불렀음.

문제 원가(元嘉) 연간에 사수전(四銖錢)[글자는 사수(四銖)라고 씌었으나 중량은 더 많았다.]을 만들어 썼다. 그 후 이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이 흔히 "유통 화폐의 수량이 부족하고
국가비용이 부족하니 개인들의 구리 사유를 금지하고 이를 국가소유로 하여 오수전을 주조하자!"라고 하였다.

범태(范泰) 범태(范泰)：중국 남송 때 국학(國學)을 세워 인재를 많이 양성한 사람.

가 건의하기를 "대체 사고파는 데 있어서는 화폐유통의 다소에 관계되지 않는다. 옛날에 귀하던 것과 오늘날에 흔한 것은 시세에 따라 서로 팔고 사는 기준은 일반인 것이니 다만 관청과
백성이 모두 그와 같이 통용만 하게 되면 화폐의 부족을 염려할 것이 없다. 만일 화폐를 많이 유통해야만 국가비용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옛날과 같이 대모[龜]나 자개[貝]를 사용해도
될 것이다.

구리란 것은 용도가 광범한 것으로서 종(鍾)이나 악기[律]에 사용하여 온 역사가 오래며 기계와 저울에서의 역할도 거대하다. 대체 기구가 필요하다면 귀천 간에 모두 요구되는 것이요,
물건을 만드는 데 적당하다면 개인이나 국가에 모두 긴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필요한 기구를 부셔서 쓸모가 없는 전폐를 만들자고 하니 이는 화폐를 유통시킴에 있어서
성과가 노력을 보충하지 못할 것이며 용도에 있어서 임금이나 백성들이 모두 곤란을 느끼게 될 것이니 실지문제를 타산한다면 손해는 많고 이익이 적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원가(元嘉) 연간에 주조한 사수전(四銖錢)은 테두리[輪郭]와 모양이 옛날 오수전(五銖錢)과 같아서 만드는 데 비용이 이익보다 많기 때문에 백성들이 위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효무(孝武), 효건(孝建) 초기에 이르러 다시 주조한 사수전은[글자를 효건사수(孝建四銖)라고 썼다.] 모양이 엷고도 작으며 테두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에 사방에서
위조하는 자들이 생겼으며 돈에다 납과 주석을 섞어서 전부 견고하지 않았다. 이를 금지함에 있어서 엄혹한 형벌을 실시하였으며 관장(官長)들도 그에 관련되어 죽은 자가 많았지마는 죄를
요행히 면한 자들이 서로 위조를 계속하므로 모든 물건 값이 등귀하게 되고 사람들이 고통스러웠다. 그리하여 돈에 대한 표준을 정하고 돈이 아주 엷고 작거나 테두리[輪郭]가 없는 것은
전부 사용을 금지하였다.[그 뒤에 또 구리를 구하기가 점차 어렵다 하여 이수전(二銖錢)을 주조하려 하였는데 안준(顔峻) 안준(顔峻)：중국 남조(南朝) 송나라 때 사람.

이 국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이수전을 주조하였다. 그 돈은 형식과 구조가 더 정밀하게 되어 백성들이 모방해서 위조하려 하였으나 그와 같이 대소에 있어서나 후박(厚薄)에 있어서
맞추어 내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가볍고 엷은 것을 행엽(荇葉)이라고 하였는데 시장에서 이것을 통용하였다. 송나라의 폐제 자업(子業)이 왕위에 있을 때에 심경지(沈慶之)
심경지(沈慶之)：중국 남조의 송나라 때에 전공으로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른 사람.

가 또 화폐의 사조[私鑄]를 허락하자고 건의하였다. 그 뒤로는 화폐제도가 극도로 문란하여져서 1천 잎[錢]을 꿰어도 길이가 2촌이 되지 못하였는데 이것을 아안전(鵝眼錢)이라 하였고
이보다 나쁜 것을 연환전(綖環錢)이라 하였는데 물에 넣어도 가라앉지 않고 손만 대면 부셔지기 때문에 시장에서 일정한 수량으로써 결가하지 않았다. 그 돈은 1만 잎이라야 한 줌도
차지 않고 쌀 한 말[斗]에 1만 잎을 주어야 사게 되어 상품이 유통되지 못하였다.]

제(齊)나라 고제(高帝) 때에 봉조청(奉朝請) 공개(孔顗) 공개(孔顗)：중국 남제 고제(南齊高帝) 때 사람.

가 고제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돈 주조에 있어서 폐단으로 되는 것은 중량을 매번 변경하는 데 있는바, 돈을 너무 무겁게 만들면 사용하기 불편하게 되는 것이 걱정이나 불편한
그것은 폐단으로는 되지 않으며 가볍게 만들어서 폐단으로 되는 것은 위조가 많은 데 있는 것이니 위조가 빚어내는 폐단이 더 큽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위조를 하여도 엄혹한 법령으로
금지하지 못하는 것은 상부에서 돈을 주조하는 데 소요되는 구리와 공정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저 구리와 공정을 아끼게 되는 원인은 돈이란 쓸모없는 물건이라 하여 그것으로 물품을 사고
파는 데 되도록 무게는 가볍고 액수가 많게 하려고 하며 품을 덜 들이고 쉽게 만드는 데만 치중하고 그 후과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나라에서 오수전(五銖錢)을 처음
주조한 때로부터 송문제(宋文帝) 때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간에 국가는 흥망이 있었으나 오수전만은 그대로 써 내려왔으니 이는 오수전의 무게가 알맞으며 물화를 융통하는 데 편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돈을 주조하는 기관[錢府]을 설치하여 대규모로 돈을 주조하되 그 중량을 한나라의 제법과 같이 5수(銖)로 하면 국고에 축적이 많고 국가경비도 유여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화폐제도[錢法]에 대하여 논의한 자가 많았으나 남제(南齊) 공개(孔顗)의 이른바 '구리를 아끼지 말고 소요 공정을 아끼지 말라'는 이 두 가지는
돈을 주조함에 있어서 만대를 두고 변경할 수 없는 좋은 방안으로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주조한 그 돈은 부피[體質]가 두껍고 자료가 알맞게 들며 일정한 규격으로 정밀하게
만들어서 테두리가 반듯하게 될 것이다. 이런 돈은 한 돈[錢]을 만드는 데 한 돈어치가 들게 되어 밑천이 비싸고 노력도 많이 들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돈을 만들라 내몰아도 그들이
하지 않을 것이거늘 하물며 금지령을 위반하며 법을 범해 가면서 가만히 만들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상에서는 구부환법(九府圜法)이 나온 뒤로부터 구리로 돈을 만드는 데 혹은 반냥(半兩)전으로, 혹은 유협(楡莢)전으로, 혹은 팔수[銖] 내지 사수(四銖)전으로 하여 몇
번이나 변하였는지 알 수 없거니와 한나라의 오수전만이 가장 알맞았다. 또 오수전이 나온 뒤에 혹은 당천(當千)전, 혹은 행엽전(荇葉錢), 혹은 아안전(鵝眼錢), 연환전(綖環錢)으로
또 몇 번이나 변하였는지 알 수 없거니와 그 중에서 당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만이 가장 알맞았다. 이상에서 말한 것 이외에도 혹은 당삼전[以一當三], 혹은 당십전[以一當十]이
있었으나 다 오래 유통되지 못하고 바로 개혁되어 버렸고 다만 돈의 질과 규격에 있어서 당나라의 개원통보와 같은 것은 지금에도 통용되고 있다" 하였다.

후위(後魏) 초기로부터 태화(太和) 연간에 이르기까지는 전폐(錢幣)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효문제(孝文帝)가 처음으로 전국에 명령하여 전폐를 사용하게 하였고 동 19년에 국가
주전설비가 어느 정도 갖추어졌으며 글자를 태화오수(太和五銖)라고 써서 서울을 비롯하여 고을과 진(鎭)들에서 모두 통용하게 하였다. 안팎 관리들의 녹봉은 종전에 주던 비단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비단 한 필을 주던 대신 전폐로 200전(錢)을 주었다.

선무제(宣武帝) 때에도 오수전을 주조하고 규격대로 주조하지 않은 돈을 금지하였는데 여러 주와 진들에서는 더러 사용하지 않은 데도 있고 더러는 태화오수(太和五銖)만을 사용하는 데가
있어서 물화가 유통되지 못하였다. 효명제(孝明帝) 때에 임성왕 징(任城王澄) 임성왕 징(任城王澄)：중국 후위(後魏)의 임성왕인 척발징(拓拔澄).

이 글을 올려 이르기를 "하(夏)나라, 은(殷)나라 때의 화폐제도는 전국에서 공물로 받아들인 금으로 다섯 가지 품종을 제정하였고 주(周)나라에서도 그 제도를 답습하여 오다가
태공(太公)이 구부(九府)법을 설정한 뒤로부터 환(圜)이라는 전폐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수(銖)와 냥(兩)의 중량 규정이 확립되었고 제환공(齊桓公)도 이 제도를 적용하여 여러
제후국들 중에서 패권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 후 진시황(秦始皇) 진시황(秦始皇)：중국 진(秦)나라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서 전국시대의 열강이었던 6국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황제란
칭호를 쓴 임금.

과 한나라 효문제 때에 이르러서 그만 돈의 중량을 감하기도 하고 가하기도 하다가 효무제(孝武帝) 때에 와서 오수전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간에는 없애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여 수시로
옛 제도를 개혁하였기 때문에 돈이 대소의 품종이 있게 되었습니다. 태화 오수전은 효문제가 주의 깊게 제정한 것으로서 후에는 오수전과 함께 통용되었으니 이것은 없앨 수 없는 제도인데
지금은 이를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돈에 관한 법령에 명확한 조항[明文]이 있어서 아안전(鵝眼錢)과 환착전(鐶鑿錢)이라는 명목을 붙였고 다시 그 금지령을 해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하북(河北)지방의 주나 진(鎭)들에서는 새로 만들어 쓰는 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 전일 사용하던 오수전까지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만 홑실로 짠 비단[縑]과 성글게 짠
포(布)만으로서 넓이가 좁고 길이도 짧아서 일정한 규격에 맞지도 않는 포 온필을 찢어 자투리로 만들어서 물화를 유통시켰습니다. 이리하여 공연히 길쌈하는 노력만 낭비하게 되고 기한의
고통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포나 비단을 자투리로 찢어 쓰고 전폐유통을 방지하였기 때문이니 실로 주리고 헐벗은 자를 구제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거두는 본의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주례』에 '외부(外府)는 포(布)의 출납을 맡는다' 하였는데 포(布)는 즉 천(泉)이니 돈을 저장하였을 때에는 천(泉)이라 하고 돈이
유통될 때에는 포(布)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돈이 처음 발생하였을 때는 한 종류를 써서 제조자로 하여금 균일하게 만들어 한없이 순환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秦)나라 때에 내려오면서 화폐제도를 개혁하고 새로 주조하는 일이 빈번하고 온갖 종류의 돈이 생겨서 그만 인접 지역에 비법적으로 교역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삼가 상고해 보건대 태화오수(太和五銖)전은 영원히 유통될 화폐이거니 어찌 서울과 성시에서만 사용하고 전국에 유통하지 못하겠습니까? 대체 포백은 한 자, 한 치씩 찢어서 쓸 수
없으며 오곡은 메고 지고 다니는 고통이 있거니와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노끈에 죽 꿰이기[강(繈)은 역시 돈꿰미이다.] 때문에 말[斗]이나 섬[斛]을 빌릴 것도 없으며 자나
저울로써 달고 재는 품도 없는 것이니 세상에 나라를 다스리는 사업에서 가장 편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지방에 명령하여 신구전(新舊錢)을 불문하고 안팎이 완전하고 좋은 것은 모두
유통하게 하고 아안전(鵝眼錢)과 환착전(鐶鑿錢) 및 규격에 맞지 않는 것들은 법에 의하여 금지할 것이며 만일 위조하는 자가 있으면 보통 법보다 더 중하게 처형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물품의 시세를 균일하게 하려면 시장 상인들이 잘 복종해야 될 것이니 말일 법령을 엄격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간계를 제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효문제(孝文帝)가 그
의견을 좇았다.

당고조(唐高祖) 무덕(武德) 4년에 오수전을 폐지하고 개원통보(開元通寶)를 새로 주조하였는데 매 10전에 무게가 한 냥쭝으로서 1천 잎이면 엿 근 넉 냥쭝으로 되었는데 이 돈은
무게와 크기가 가장 알맞게 되어 각 지방에서 모두 편리하게 여겼다.[구양순(歐陽詢)이 팔분체(八分體)와 초서체[隸體]를 섞어 글자를 썼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한 냥 무게는
24수(銖)가 되므로 한 돈 중량은 2수 반이 조금 못된다. 옛날 저울은 지금 저울의 3분의 1이 되므로 지금 한 돈 무게는 옛날 저울의 7수 이상이 되니 옛날의 오수전에 비하면
2수 이상이 더 무거운 셈이다" 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 영순(永淳) 원년(元年)에 칙령을 내리기를 "화폐 위조 발기인이나 주선한 우두머리는 모두 교형에 처하되 처단하기 전에 곤장 100도를 치며 서둘이꾼과 장소를
제공한 주인에게는 각각 매 60개를 친 다음에 먼 곳으로 추방하며 위조 장소의 이웃 사람들은 1년 도형에 처하며 이정(里正), 촌정(村正), 방정(坊正)들도 각각 매 60개씩
친다. 그러나 만약 그 위조 사건을 고발한 자가 있으면 범죄자의 가산으로써 상을 주며 동범자로서 자수할 때에는 죄를 면해주는 동시에 규례에 의하여 상을 준다" 하였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2년에 한문제(漢文帝) 때의 제도를 모방하여 화폐의 개인 주조를 금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칙령을 내려 여러 관리들에게 가부(可否)를 토의하라
하였다. 녹사참군[事參軍] 유질(劉秩)이 제의하기를 "옛날의 화폐는 주옥(珠玉)을 상등 화폐로, 황금을 중등 화폐로, 칼이나 포를 하등 화폐로 각각 규정하였는데 지금의 돈은 옛날의
하등 화폐에 해당합니다. 이제 만일 현재 화폐를 버리고 사람마다 자체로 주조하도록 방임한다면 상부에서는 하부를 통제할 수 없게 되고 하부에서는 상부를 섬기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이
첫째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체 곡물이 흔하면 농민에게 손해를 주고 돈 가치가 낮으면 상인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곡물의 귀하고 흔한 것과 돈 가치의
높고 낮은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곡물이 귀하면 돈 가치가 낮아지는 것이며 곡물이 많은 데서 돈 가치가 높아지는 것인바 곡물이 많으면 수집해 들이는 조치를 취하여 유통이 적게 하며
곡물이 적으면 비싸게 되는 것이니 비싸면 그것을 많이 유통시키는 조치를 취하여 눅게 하는 것입니다. 돈 가치를 높이고 낮추는 원칙은 반드시 이렇게 하는 데 기인하는 것이니 이런
것을 어떻게 개인에게 화폐를 만들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둘째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체 돈을 주조함에 있어서 납과 철을 섞지 않으면 이익이 없고 납과 철을 섞으면 화폐의 질이
나빠지는 것이니 만일 이에 대하여 엄격한 처벌을 가하지 않으면 확대되어 가는 그 경향을 제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화폐위조 금지령을 실시하고 있는 이때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범죄 행위를 하는 자가 있거늘 더군다나 위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위조하지 말라고 하면 될 일입니까? 이는 함장을 파 놓고 백성을 유인하여 들어가게 하는 셈이니 이것이 셋째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령 백성들에게 돈을 주조하도록 용허하더라도 이익이 없으면 그들이 주조하지 않으려니와 이익으로 된다면 농사를 그만두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농사를 그만둔
자[去南畝者]가 많으면 논밭이 묵을 것이며 논밭이 묵으면 긴박한 기한에 처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넷째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너무 부유한 자에게는 고무 격려할 수 없는
것이며 가난하고 굶주리는 자에게는 위력으로써 복종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법령이 실현되지 못하는바 사람들이 국가의 법령을 들은 체 만 체하는 것은 모두 빈부가 일치하지
못하는 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개인에게 돈 주조를 용허한다면 빈궁한 자는 반드시 주조하지 못할 것이므로 저는 빈궁한 자가 더욱 빈궁하게 되어 부호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게 될 것이니 부호들이 이를 기회로 하여 더욱 날뛰게 될 것을 염려합니다. 옛날 한문제(漢文帝) 때에 오(吳)왕 비(濞)가 한 개 제후로서 황제[天子]와 같이 부유하였으며
등통이 한 개 대부 벼슬에 불과하였지마는 그가 가진 재물이 국왕과 같았으니 이것은 모두 돈을 주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국가에서 개인에게 기어이 주전을 허락하려 한다면 이는
개인에게 국가의 이익을 양도하는 것이니 이것이 다섯째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돈이 비싸서 농민에게 손해를 주고 원료가 많이 들어서 이익이 적다고 말들을 하나 저는 그 말이 옳지
않다고 봅니다.

대체 돈이 비싸게 되는 것은 개인의 주조가 날마다 전보다 많아지나 국가의 주조가 전보다 더하지 못한 까닭이며 또 국가의 돈[公錢]이 가치가 구리 가격과 거의 같기 때문에 주조자들은
중량이 많은 국가의 화폐를 파괴하여 가벼운 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금법이 조금 너그러워지면 위조화폐가 유통되고 금법이 엄격하면 이것이 정지됩니다. 정지된다는 것은 돈
주조를 그만둔다는 말이니 이 때문에 돈이 적어지는 것입니다.

대체 화폐 용도가 부족한 것은 구리의 부족에 기인되고 구리의 부족 원인은 그것을 사용하는 데가 많은 데 있습니다. 구리란 병장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 철만 못하며 기명[器]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철기[漆]만 못하므로 구리 사용을 금지해도 무방할 것이거늘 국가에서 어찌 금지하지 않습니까? 국가에서 사람들의 구리 사용을 금지하면 구리를 보유해도 쓸데없을 것이며
구리를 사용할 데가 없으면 구리 값이 헐하게 될 것이며 그것이 헐하게 되면 화폐유통이 자연 넉넉해질 것입니다.

대체 구리를 민간에 내려 보내지 않으면 위조범들이 위조를 할 수 없을 것이며 위조할 수 없게 되면 국가의 화폐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사람들이 죽을죄를 범하지 않고 돈도
날로 증가하게 될 것이므로 그들이 위조를 하더라도 다시 이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한 가지 일을 하여 네 가지 이익을 얻는 셈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신[公卿]들이
모두 화폐의 개인 주조를 금지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하였기 때문에 현종이 다만 군과 현에 지시하여 질이 나쁜 화폐 사용을 엄금했을 뿐이었다.

두우(杜佑)의 ｢화폐론(錢幣論)｣에 이르기를 "화폐제도를 설정한 의의는 가장 심원한 것이다. 대체 모든 물건은 그 수량을 헤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을 헤게 된 이상 어떤 물건
하나를 지정하여 모든 물건을 척도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금이나 은은 기명이나 장식물을 만드는 데 국한되며 곡식과 비단은 또한 메고 다니거나 찢어 나누기에 불편하다. 그러나
돈만은 주고받는 데 편리하여 부단히 유통되는 것이 흘러나오는 샘과 같다.

만일 곡식이나 비단으로써 사고파는 표준을 삼는다면 끌고 다니거나 찢는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중량[銖兩]과 치수[分寸]를 가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역사상 유통한 화폐 중에서
오수전(五銖錢)이 가장 알맞아서 그 하나만이 긴요하게 오랫동안 유통되어 왔다. 금으로 돈을 만들면 비록 오수전보다 작게 하더라도 그보다 비쌀 것이니 크기와 중량을 시기에 맞게
편리할 것이다.

태공(太公)이 주(周)나라에서 구부환법(九府圜法)을 실시하고 제(齊)나라에 가서 실행하면서 말하기를 "화폐 조절에 대한 묘리를 아는 자는 국가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무난하게
성취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화폐가 정치에서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 관중(管仲)은 말하기를 "세 가지 화폐[三幣] 세 가지 화폐[三幣]：금, 은, 동으로 만든 화폐.

를 가지고 있더라도 직접 의식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것을 버리더라도 직접 기한(飢寒)에 절실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마는 옛날 임금[先王]들은 이로써 재물을 경리하였고 백성의
경제생활을 통제하여 국가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대체 생산에 종사하는 자가 많으면 국가가 부유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는 것이며 농사짓는 사람이 적으면 백성이 빈곤하고 국가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물건 값을 비싸게도 하고
헐하게도 하는 것은 법령 여하에 달려 있으니 그를 좌우할 수 있는 수단은 실로 이 돈에 있다.[『관자(管子)』에 이르기를 "연사에는 흉풍이 있기 때문에 곡식이 많고 적을 때가
있으며 법령에는 완급(緩急)이 있기 때문에 물화가 비싸고 헐할 때가 있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건이 많으면 헐하고 적으면 비싸나 많은 것을 분산하면 적어지고 적은 것을 모으면
많아지는 것이다. 임금된 자가 이런 일을 알기 때문에 국가 용도의 과부족을 보아서 국내의 물화[財物]를 통제한다. 즉 곡식이 헐할 때에는 화폐[幣]로써 식량을 사들이고 포백이 헐할
때에는 화폐로써 입을 것을 사들이는 것이니 물화[物]의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일정한 표준을 두어서 통제하는 것을 경중을 알맞게 하는 저울[輕重之權]이라고 한다" 하였다.]

후세에 와서 정치를 논의하는 자들이 더러 구리와 공력을 아껴서 큰돈을 작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화폐 가격을 높이 올려서 이익을 획득하는 자도 있으나 이것은 모두 경제 정책의 원대한
계획에 암둔한 것이다. 그리하여 화폐 위조가 더욱 심해지고 농사를 그만두는 자가 날로 더 많아지기 때문에 아무리 엄격한 형벌로써 금지하며 날마다 그들을 사형에 처하더라도 그를
제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구리를 민간에 유통시키지 않으면 화폐에 관한 권리가 국가에 속한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적절한 이론[篤論]으로서 이야말로
국가를 다스리는 절실한 문제이며 폐단을 방지하는 좋은 방안이다" 하였다.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12년에 칙령을 내리기를 "문무 관직에 있는 자로부터 양반, 평민, 상인, 여행자, 사찰[寺觀], 부락[坊], 시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를 불문하고
사적으로 저장한 현존 화폐는 모두 5천 꿰미[貫] 이상을 보유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이상의 액수를 초과한 자가 있다면 다른 물건을 사서 저장할 수 있으되 기한을 경과하여
위반하였을 때에는 관직이 없는 자[白身人]이면 범인 자신을 사형에 처하고 범죄자가 관리인 경우에는 정부에 보고하여 강직을 시키고 규정 액면을 초과하여 보유한 돈은 몰수하여 관청에
바치는데 그 중 5분의 1은 고발자에게 상으로 준다" 하였다.

당시 서울[京師], 향촌[里閈], 시가[區肆]들에서 돈을 보유한 자는 흔히 절도사(節度使) 절도사(節度使)：중국 당나라 때 지방의 행정, 사법, 군사 등 권리를 행사하던 장관.

들이었다. 즉 왕악(王鍔), 한홍(韓弘), 이유간(李惟簡)과 같은 자들은 적게 보유한 자라도 50만 꿰미[貫] 이하가 없었다. 이때에 그들은 저마다 땅이나 집을 사서 돈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 버리게 되었고 자본이 많은 상인들은 좌우군(左右軍) 좌우군(左右軍)：중국 당나라 때 군사제도에서 나온 군대 편제 이름.

에 의거하여 관청돈[官錢]이라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부(府)나 현에서 철저히 규명할 수가 없어서 결국은 칙령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마단림(馬端臨)이 말하기를 "후세의 국왕들이 백성의 경제생활을 돌보아서 빈부를 고르게 하지 못하고 다만 법령을 설정하여 겸병하는 부호들을 제지하려 하였다. 백성들의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것은 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지마는 그들의 화폐 축적을 제한한다는 것이야말로 잘못이 아니겠는가? 대체 토지를 사는 자는 그 목적이 겸병하는 데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반드시 법령을 제정하여 그의 소유면적을 제한해야 할 것이나 화폐를 축적하는 자는 그 목적이 화폐를 사용하려는 데 있는 것이므로 정부에서 처음부터 번잡스럽게 법령을 제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른 물건을 사서 두라고까지 시킬 필요는 없다. 지금 돈 가치가 높고 물가가 헐하다 하여 화폐 축적을 제한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있으나 돈 가치가 높고 물가가 헐한
것은 모리배[逐利]들이 가장 듣기를 원하는 소식이므로 일부러 법령을 제정하여 압력을 가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공연히 서로 밀고하는 길을 열어 놓게 되어 더 한층 소란만을 일으킬
뿐이다. 우리나라 소흥(紹興) 연간에도 화폐 축적의 제한령이 있었지마는 이것은 모두 실행할 수 없는, 졸렬한 정책[末策]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동래(呂東萊)는 말하기를 "화폐[泉布]라는 개념은 물화[財貨]를 많이 유통케 하는 물건으로서 선대 임금들이 그것을 재부의 근본으로 삼지는 않았다. 옛날에는 국가의 경제생활을 말할
때에 3년 농사를 지으면 반드시 1년 먹을 것이 남는 것이므로 30년을 그와 같이 농사를 지으면 9년 먹을 것이 축적되어 이것으로써 재부를 충족시킨다 하였다. 옛 사람들은 물화를
논할 때에 다만 9년의 축적을 말하였고 처음부터 축적된 것이 몇 만, 몇 천 꿰미[緡]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 농사 짓고 길쌈하는 것이 의식과 물화를
생산하는 근본이며 돈[泉]이나 포는 물화를 유통하기 위하여 적당하게 만들어 놓은 척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곡식이 있어야 화폐나 포도 척도로 쓸 데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 근본인 곡식이 없다면 아무리 돈꿰미를 많이 축적해 놓았더라도 무엇을 상대로 가감하여 주고받고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삼대(三代) 이전에는 재정과 부세[財賦]를 말할 때에
모두 곡식으로써 근본을 삼았고 화폐[泉布]는 물화를 사고 팔 때의 척도로 쓴다고 말할 뿐이었다. 백성들로부터 받아들임에 있어서 아홉 가지 공물[九貢]과 아홉 가지 세[九賦]를 모두
화폐[錢幣]로 받아서 그 액수[賦]가 매우 적었으며 소위 녹봉도 토지를 주어 녹봉을 제정하였으므로 임금이나 대신[卿]이나 대부(大夫) 할 것 없이 식읍의 대소를 규정하는 데 지나지
않았고 돈이나 비단으로 녹봉을 준 일은 없었다.[근세에는 조세[田賦]와 녹봉을 전부 돈으로 받는다.] 때문에 삼대 때 사람들은 거개 본 지방에서 안착생활을 하고 상업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돈을 쓸 데가 적기 때문이었다.

한나라 초기에는 아직 옛 제도가 남아 있어서 왕과 대신으로부터 지방관과 아전에 이르기까지 만 석, 천 석, 백 석이란 등급을 두어 모두 곡식으로 녹봉을 삼고 매인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은 구산전(口算錢)에서 떼어주는 데 불과하였다.[한 사람에게서 받는 돈 120잎을 1산(算)이라 한다.]

한무제(漢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국가비용이 부족하여 고민법(告緡法)을 제정하여 전국의 돈을 긁어 들이었는데 그때부터는 옛날 제도가 점차 없어지고 전폐(錢幣) 가치가 높아지게
되었다.

대개 삼대 이전에는 오직 곡식을 기본으로 삼고 화폐[泉布]를 임시 유통수단[權]으로 하여 언제나 임시 유통수단이 곡식보다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개인이
집에서 천만 뀀이씩 축적하여 국가와 세력을 겨루게 되었으니 이것도 역시 옛날 제도가 점차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우(禹貢) 등이 화폐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고 곡식과 비단만을
쓰려고 하였으니 이는 또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 곧아진 논법이다. 대체 천하 일이란 원칙[經]과 임시조치[權], 근본[本]과 지엽[末]들이 있어서 항상 서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나 임시조치가 원칙보다 중할 수 없으며 지엽[末]문제가 근본 문제를 압도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일시적인 부정 폐단만을 생각하고 화폐를 폐지해 버리려고 한다면 이는 그
하나만을 알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된다. 예를 들면 위문제(魏文帝) 때에 국내에서 돈을 전연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결과 그만 곡식을 습하게 하고 비단을 엷게 짜는 폐단이
있게 되어 도리어 세상에 쓸모 있는 물건을 못 쓰게 만들었던 일과 같다. 그 본래의 목적은 곡식과 비단을 중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나 도리어 곡식과 비단을 천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을
보아서도 화폐폐지 정책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다.

한(漢)나라 때부터 수(隋)나라에 이르는 기간에 유통한 화폐 중에서 오수전(五銖錢)이 가장 알맞았고 당나라로부터 오대(五代)시기에 이르기까지는 개원통보(開元通寶)가 가장 알맞았다.
기타 화폐로서 너무 무거운 것으로는 소위 직백(直百)이니 당천(當千)이니 하는 이름을 가진 돈이 있었는가 하면 너무 가벼운 것으로는 유협(楡莢)전이니 삼수(三銖)전이니 하는 돈들이
있었는데 다 적당하지 못하였다. 오직 오수전과 개원통보는 무게에 있어서 알맞았고 그 주조 기술이 정밀하여 그보다 더 좋게 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송나라) 초기에 개원통보로 표준을
삼았는바 그 돈이 영구히 사용할 만하였다. 그런데 태종(太宗) 때에 장제현(張齊賢) 장제현(張齊賢)：중국 송나라 때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른 사람.

이 주조 규정을 변경[變鑄]한 뒤로부터 돈은 비록 많았지마는 너무 엷고 질이 나빠서 쓸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그때 당사자들이 돈이 많도록 하는 데만 힘을 쓰고 화폐정책의 기본을
고려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대체 국가에서 화폐제도를 설정하는 목적은 그것으로써 경중 본말(輕重本末)을 척도하려는 것이오, 어떤 이익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런데
경제정책[財計]에 정통하지 못한 자들은 돈을 많이 주조하면 거기에서 생기는 많은 수입이 이익으로 되는 줄만을 알고 돈을 아무리 주조하여도 그것은 이익이 적은 것이며 권력을 국가에서
장악하는 그것이 큰 이익으로 되는 것을 모른다.

남제(南齊) 때의 공개(孔顗)가 화폐주조 문제를 논의할 때에 구리를 아끼거나 그에 소요되는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만일 그의 말과 같이 구리를 아끼지 않는다면 돈을
주조해도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며 이익을 얻지 못하면 위조하는 자가 감히 생기지 못할 것이며 위조하는 자가 생기지 않으면 돈을 출납하는 권리가 정부에 집중되고 돈을 주조하는 권리가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이익으로 되는 점이 클 것이다. 그러나 한갓 작은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돈이 대번에 엷어지고 나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옳지 못한 자들은 돈
주조에 힘을 써서 저마다 돈을 만들 수 있게 되므로 이익으로 되는 주조권이 정부에서 분리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이것은 작은 이익을 추구하다가 큰 이익을 잃어버리는 것이니
공개(孔顗)의 말이 가장 정당한 논법이다. 대개 돈이란 것은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으며 추워도 입지 못하는 물건이다. 가사 돈이 지방에 고갈되었더라도 곡식과 비단이 넉넉하고 산과
늪에 있는 자원으로 모두 다 이익을 얻게 된다면 이때는 돈이 비록 적더라도 돈 가치가 높아질 뿐이오, 돈 가치가 비록 높더라도 물건을 사고 팔 때에 서로 척도를 맞추어 쓰게 되니
오히려 국가의 이익으로 될 것이다. 문제(文帝)는 "옛날 제도를 연구하여 화폐정책에 관한 원리를 체득한 뒤에라야 화폐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하였다.[섭몽득(葉夢得)
섭몽득(葉夢得)：중국 송나라 때 호부상서(戶部尙書) 벼슬을 하였으며 『석림춘추(石林春秋)』를 저작한 사람.

의 『석림연어(石林燕語)』에 이르기를 "『한서(漢書)』 왕가전(王嘉傳)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서울 안에 있는 돈이 40억 만이요, 수형부(水衡府)에 있는 돈이
25억만이요, 소부(小府)에 있는 돈이 18억 만이었다'고 하니 이는 당시에 돈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돈으로 계산해 보면 겨우 830만 꿰미에 불과하니
이것으로는 경기 좋은 해의 물화를 전매하던 1년 수입도 못된다. 대개 한(漢)나라 때에 돈 가치는 굉장히 높고 곡가가 너무 헐하여 때로는 곡식 한 섬[斛]에 수십 잎[錢]으로까지
떨어졌기 때문에 왕가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때에 국왕의 외척들의 재산이 천만 잎에 달하였고 소정(小正)이 천만 잎을 소유하였으나 이것도 만 꿰미[貫]에 불과한 것으로서 지금의
중호(中戶) 이하 하호(下戶) 이상 정도에서도 모두 이 수량을 가지고 있다. 근래에 국가경비의 부족을 우려하는 자들은 매양 유통화폐가 적다하여 유협전(楡莢錢), 주석으로 만든
돈[錫], 당십(當十)전 등 온갖 돈을 만들었으나 결국 하등의 이익도 없었다. 대개 돈이 많고 적은 것은 곡물이 흔하고 귀한 데 달린 것이오, 돈을 넓게 만들거나 좁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또 위(魏)나라의 이회(李悝)의 말한 바와 같이 한 농부가 경지 백 묘를 경작하면 한 묘에 곡식[粟] 한 섬 반을 수확하는데 총 수확이 150석이다. 한 농부의 가족이
다섯 명으로서 한 사람이 매월 한 섬 반씩 먹게 되므로 이 백 묘의 수확에서 국세 15석과 식량 90석을 제하면 45석이 남는다. 이 곡식을 한 섬에 30잎씩 받는다면 총계 1천
350잎으로 된다. 이 속에서 성황당 제사[社閭]와 조상에게 지내는 봄가을의 천신(薦新) 제사에 200잎만 쓰고 그 나머지 돈으로는 다섯 가족의 의복비에 충당한다면 돈이 적은 것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오대(五代) 때에 주세종(周世宗)이 돈을 주조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고 백성들이 돈을 녹여서 기명(器皿)과 불상을 만든다 하여 화폐주조 기관[監鑄錢]을 설치하고 민간에 있는 일체
구리 기구와 불상들을 수집하여다가 모조리 부셔서 돈을 주조하였다.

사마광[司馬公]이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주세종 같은 이는 명철하다고 할 만하다. 그는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써 유익한 일을 폐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송(宋)나라 초기에 주조한 돈에는 '송원통보(宋元通寶)' '태평흥국(太平興國)'이라고 썼으며 그 후에 또 태평통보(太平通寶)를 주조하였고 그 뒤로부터는 국왕의 연호가 갈릴 때마다
반드시 다시 주조하여 그 연호로써 돈의 명칭을 삼았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돈을 주조할 때에 연호로써 명칭을 붙인 것은 유송(劉宋) 효전제(孝建帝) 때부터 시작되었다. 송나라에서는 개보(開寶) 연대로부터 연호가 갈릴 때마다 반드시
돈을 한 번씩 고쳐 주조하였기 때문에 국왕마다 두어 가지 돈을 주조하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주조한 국왕은 인종(仁宗)이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42년간에 아홉 번 연호를
고치면서 10종의 돈을 주조하였다.

아! 한심한 일이다! 구리를 녹여서 돈을 만드니 구리와 숯이 어디서 나오며 주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을 모두 백성에게서 짜내는 것이니 백성이 어찌 그 손해를 입지
않으랴? 더군다나 관리, 감독, 기술자, 인부에게 공급하는 비용이 있으며 녹이는 데서 액체가 소모되며 잘못 만들어서 노력을 허비하며 먼 데서 운반하는 데 비용이 들게 되니 이로
인하여 아전이나 백성들이 죄를 범하거나 파산을 당한 자가 없는 곳이 있으랴? 이는 옛날 사람들의 백성에게 이롭게 하던 것을 갖다가 백성을 해롭게 만든 것이다" 하였다.

송나라에서 왕안석(王安石)이 정권을 잡은 뒤로 처음 구리 사용 금지법을 폐지하였다. 그리하여 간사한 백성들은 날로 구리를 녹여서 그릇[器]을 만들며 국경지대[邊關]와 해상
선박들에서 구리돈 수출을 다시 감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재정이 날로 축소되었다.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돈을 녹여서 그릇을 만들면 거기에서 생기는 이익이 10배로 된다. 돈이란, 본래 모든 물화의 척도로 사용되어 가격의 높고 낮은 것을 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조함에 있어서 비용의 다과와 이익의 유무를 교계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 그것을 녹여버리니 금지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그래도 돈을 녹여서 그릇을 만들면 돈은 비록 없어져도 그릇은
그대로 본국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흩어져서 사방으로 나가게 되면 배로, 수레로 실어 내어 타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국경 수비[關防]가 엄격하지 않고 법률이 해이해져서
정식화폐[眞錢]는 날마다 줄어들고 위조화폐[僞錢]가 날마다 많아진다. 이 한없이 오르는 물가로써 제한되어 있는 재물을 허비하여 버린다면 천하 만물이 구리이며 볕과 그늘[陰陽]이
숯이라도 모자라게 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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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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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禮 外府 鄭玄曰"外府 主泉藏在外者." 掌邦布之入出 以共百物 而待邦之用 凡有法者. 布泉也 其藏曰泉 其行曰布. 取名於水泉 其流行無不徧. 入出 謂受之復出之. 共百物者 或作之 或買之.
待猶給也. 有法 百官之公用也. 泉始蓋一品 周景王鑄大泉 而有二品. 凡祭祀ㆍ賓客ㆍ喪紀ㆍ會同ㆍ軍旅 共其財用之幣齎 賜與之財用. 齎 行道之財用也. ○王昭禹曰. "古者用具交易. 至太公
立九府圜法 始用錢代貝. 或曰泉 或曰布 布取宣布之意 泉取流行之意. 其實一而已 後人代以錢字." 泉府 司泉貨之府. 掌以市之征布 斂市之不售貨之滯於民用者.丘濬曰"周禮掌財之官非一職
而專掌錢布者 外府ㆍ泉府二官. 外府掌齎載之出入 泉府掌賣買之出入. 蓋天下百貨 皆資於錢以流通. 重者不可擧 非錢不能以致遠. 滯者不能通 非錢不得以兼濟. 大者不可分 非錢不得以小用.
貨則重而錢輕 物則滯而錢無不通故也."司市 以次敘分地而經市 以陳肆辨物而平市 以政令禁物靡而均市 物靡者 易售而無用 禁之則市均. 鄭司農云"靡謂侈靡也." 以商賈阜貨而行布. 通物曰商 居賣物曰賈
阜猶盛也 布謂泉也. 國凶荒扎喪 則市無征而作布. 有災害物貴 市不稅 爲民之困也. 金銅無凶年 因物貴大鑄泉 以饒民.按聖人旣爲之井天下之田 以奠民生 於其都市廛肆 分地定制 尤爲詳盡如此.
此所以四民各得其所 而天下事功 日興而不廢也. 又按布卽泉也 泉卽錢也. 錢所以權百物 而流通之者 商賈也 故商賈阜盛貨賄而後 錢布得行. 若夫凶扎之際 食貨阜通 亦得以濟民之乏矣 故於是時 市無征
所以綏民生 而來商賈也. 又慮貨易之具不足 而民無以博食 故爲之鑄銅作錢. 蓋米}\有豐歉 非人力所能致 金銅則無豐歉 可以人力爲之也.○漢食貨志曰"古者以珠玉爲上幣 以黃金爲中幣 以刀布爲下幣.
太公立九府圜法周官有太府ㆍ玉府ㆍ內府ㆍ外府ㆍ泉府ㆍ天府ㆍ職內ㆍ職幣ㆍ職金 皆掌財幣之官 故云九府. 圜謂均而通也. 黃金方寸而重一斤 錢圜亟方 外圜而內孔方. 輕重以銖. 黃金以斤爲名.
錢以銖爲重也. 布帛廣二尺二寸爲幅 長四丈爲匹. 故貨寶於金 利於刀 流於泉 布於布 束於帛." 束 聚也.○管子曰"湯七年旱 禹五年水 人之無襢有賣子者 湯以莊山之金鑄幣 禹以歷山之金鑄幣
以救人之困. 夫三幣 握之非有補於溫飽也 捨之非有切於饑寒也. 先王以守財物以御人事 而平天下也. 是以 命之曰衡 衡者使物一高一下 不得有調也."○秦用半兩錢 文曰半兩重如其文. 漢興 嫌其重難用
更鑄莢錢. 言薄如楡莢也. 錢重銖半徑五分 文曰漢興. 於是 物價騰踊 米石萬錢. 文帝五年 更鑄四銖錢 其文爲半兩 實重四銖. ○凡二十四銖 爲一兩. 除盜鑄錢令 使民得自鑄.
賈誼諫曰"法使天下公得鑄銅錫爲錢 敢雜以鉛鐵爲巧者 其罪黥. 然鑄錢之情 非淆雜爲巧 則不可得贏 而淆之甚微 有利甚厚. 微細也 姦民淆雜鉛鐵 其所費甚微 而得利甚厚也. 一說微謂精妙也. 淆雜鉛鐵
其術精妙 不可覺知而得利甚厚 故人輕犯之 姦不可止也. 夫事有召禍 而法有起姦. 今令細民 人操造幣之勢 各隱屛而鑄作 因欲禁其厚利微姦 雖黥罪日報 其勢不止. 夫懸法以誘民 使入陷穽 孰多於此?
又民用錢 郡縣不同 或用輕錢 百加若干.時 錢重四銖 法錢百枚當重一斤十六銖. 輕錢則加若干枚令平滿也. 或用重錢 平稱不受 用重錢 則平稱有餘不能受也. 法錢不立. 依法之錢也. 吏急而一之乎
則大爲煩苛 而力不能勝. 縱而不呵乎 則市肆異用 錢文大亂 苟非其術 何嚮而可哉? 今農事棄捐 而采銅者日蕃 釋其耒耨 冶鎔炊炭姦錢日多 五}\不爲多 言采銅鑄錢 廢其農業 故五}\不爲多
善人怵而爲姦邪 愿民陷而之刑戮 怵誘也謂良善之民 亦誘於利而爲姦邪也.國知患此. 吏議必曰禁之 禁之則錢必重 重則其利深 盜鑄如雲而起 棄市之罪 又不足以禁矣. 奸數不勝 而法禁數潰 銅使之然也.
故銅布於天下 則其爲禍博矣 不如收之. 上收銅勿令布 則民不鑄錢 黥罪不積矣 僞錢不蕃 民不相疑矣 采銅鑄作者 反於耕田矣 銅畢歸於上 上挾銅積以御輕重. 銅積謂多積銅 錢輕則以術斂之 重則以術散之
貨物必平矣. 以臨萬貨 以調盈虛 以收奇羨 則官富實 而末民困矣. 末民 謂業工商者. 制吾棄財 以與匈奴 逐爭其民 則敵必壞矣." 末業旣困 農人敦本 倉廩實而布帛有餘 則招胡人多來降附
故言制吾棄財也. 棄則謂可棄之財. 逐競也. 賈山亦曰"錢者 無用器也而可以易富貴. 富貴者 人主之操柄也 令民爲之 是與人主共操柄 不可長也." 上不聽. 是時 吳王濞 卽山鑄錢 富埒天子
後卒叛逆. 鄧通以鑄錢 財過王者. 自是至武帝時 四十餘年間 縣官用少 往往卽銅山鑄錢 民間亦盜鑄 不可勝數 錢益多而輕 鑄錢者多 故錢輕. 輕亦賤也. 物益少而貴. 民但鑄錢
不作餘物故少.○武帝元狩五年 有司言 輕錢易作奸詐 乃更請鑄五銖錢 周郭其質令不得磨錢取鎔. 周匝爲郭文漫皆有. 時吏民之坐盜鑄金錢死者 數十萬人 其不發覺相殺者 不可勝計 赦自出者百餘萬 犯法者衆
吏不能盡誅. 於是 悉禁郡國無鑄錢 專令上林三官鑄 水衡都尉 掌上林苑 屬官有均輸ㆍ鐘官ㆍ辨銅令. 錢旣多 而令天下非三官錢 不得行. 郡國 前所鑄錢 皆廢銷之 輸入其銅 民之鑄錢益少. 計其費
不能相當 言無利也. 唯眞工大奸乃盜爲之.○元帝時 貢禹言 "民坐盜鑄陷刑者多 富人藏錢滿室 猶無厭足. 棄本逐末 姦邪不可禁 宜絶其原 罷鑄錢之官 毋復以爲幣 租稅祿賜 皆以布帛及}\
使百姓壹意農桑."議者以爲 交易待錢 布帛不可以寸尺分裂 禹議亦寢. 自武帝元狩五年 三官初鑄五銖錢 至平帝元始中 成錢二百八十億萬餘云.丘濬曰"布帛以爲衣 米}\以爲食 乃人生急用之物
不可以一日無焉者也. 顧欲以之代錢 則布帛不免於寸裂 米}\不免於粒棄. 織女積累以成丈疋 農夫積粒以滿升斗 豈易致哉? 况布帛有用者也 錢幣無用者也. 晉孔琳謂'聖王制無用之貨 以通有用之財
旣無毁敗之費 又省運致之苦.'由是觀之則貢禹此策 決不可用. 苟或偏方下邑 有裂布帛捐米}\ 以代錢用者 官府尙當爲之禁制 况立爲之法乎?"○蜀公孫述 廢銅錢 鑄鐵錢 百姓貨幣不行.
漢書西域傳"罽賓國 以銀爲錢 文爲騎馬 幕爲人面 幕卽漫也. 烏弋山燕國之錢 與罽賓同. 文爲人頭 幕爲騎馬 加金銀 飾其厠. 安息亦以銀爲錢 文爲王面 幕爲夫人面 王死卽更鑄. 大月氏亦同."
南北史云 後周河西諸郡 或雜用西域金銀之錢.按鐵錢重 故難用 非唯當時貨幣不行 亦以啓後世交子之弊矣. 蓋鑄錢 莫如銅錫也. 又錢幣之興也 久矣. 不但中國用之 如西域諸國無不用之. 近世
契丹起於東北 亦能創制行錢 以富國便民 信乎天下無不可用之國也. 向也 親逢西洋漂流人問之 其國尙用銀錢云. 西洋國 蓋古西域諸國之南也 今我國混稱爲南蠻.○吳孫權 始鑄一當五百錢 文曰大泉五百
徑一寸三分 重十二銖 使吏輸銅鑄畢 設盜鑄之科. 及當千錢 徑一寸四分 重十六銖. 錢旣太貴 但有空名 人間患之 後 權令曰"往日鑄大錢 云以廣貨 故聽之 今聞人意不以爲便 其省之 鑄爲器物
官勿復出也. 私家有者 並以輸藏平卑其直 勿有所枉."按此乃權權詐之術也 後世鑄大錢始此. 夫上天立君 以爲生民之主 蓋以之掌天下之利 非以其專天下之利也. 日中爲市 使民交易 以通有無. 以物易物
物不皆有 故有錢幣之造焉. 必物與幣 相當而無輕重懸絶之偏 然後可以久行而無幣. 時君世臣 徒以用度不足之故設爲罔利之計 以欺天下之人 以收天下之財 而專其利於己 是豈上天立君之意哉? 爲此者
知其欺人之可以得利 而不知其所得至小 所喪至大. 古今已驗之效 皆可見也.○魏曹丕時 罷五銖錢 使百姓 以}\帛爲市買. 至明帝世 錢廢}\用旣久 人間巧僞漸多 競濕}\以要利 作薄絹以爲市
雖處以嚴刑而不能禁也. 司馬芝等 擧朝大議 以爲"用錢非徒豐國 亦所以省刑 今若更鑄五銖 於事爲便."帝乃更立五銖錢 至晉用之 未有所改創.○晉安帝時 桓玄立議 欲廢錢用}\帛. 孔琳議曰"洪範八政
貨爲食次 豈不以交易之所資 爲用之至要者乎? 若使百姓 用力於爲錢 則是妨爲生之業 禁之可也. 今農自務}\ 工自務器 各隸其業 何嘗致勤於錢? 故聖王制無用之貨 以通有用之財. 旣無毁敗之費
又省運致之苦 此錢所以嗣功龜貝 歷代不廢者也. }\帛本充於衣食 今分以爲貨 則致損甚多 又勞毁於商販之手 耗棄於割截之用 此之爲弊 著于目前. 故鍾繇曰'巧僞之人 競濕穀以要利 制薄絹以充貨
魏世制以嚴刑 不能禁也.'是以 司馬芝以爲'用錢非徒豐國 亦所以省刑也.'且據今用錢之處不爲貧 用}\之處不爲富. 魏明帝時 錢廢用穀四十年矣. 以不便於人 乃擧朝大議 莫不以宜復用錢 下無異情
朝無異論. 彼尙捨}\而用錢 足以明}\帛之弊 著於已試也. 愚謂救弊之術 無取於廢錢."○前凉張軌參軍索輔 言於軌曰"古以金貝皮幣 爲貨 息}\帛量度之耗. 漢制五銖錢 通易不滯 晉太始中 河西荒廢
遂不用錢 裂疋以爲段數. 縑帛旣壞 市易又難 徒壞女工 不任衣用 弊之甚也. 今中州雖亂 此方全安 宜復五銖 以濟變通之會." 軌納之 立制準市用錢 錢遂大行 人賴其利.○劉宋文帝元嘉中 鑄四銖錢.
文曰四銖 重如其文. 其後 言者多以錢貨減少 國用不足 欲禁私銅以充官 鑄五銖. 范泰議曰"夫貨存貿易 不在多少. 昔日之貴 今日之賤 彼此共之 其揆一也 但令官人均通 則無患不足. 若使必資廣
以收國用者 則龜貝之屬 自古而行. 銅之爲器 在用也博矣 鍾律所通者遠 機衡所揆者大. 器有要用 則貴賤同資 物有適宜 則家國共急 今毁必資之器 爲無施之錢 於貨利 功不補勞 在用則君人俱困 校之以實
損多益少也." 先是 元嘉四銖錢 輪郭ㆍ形制 與古五銖同 用費無利 故民不盜鑄. 至孝武ㆍ孝建初 改鑄四銖 文曰孝建四銖 形式薄小 輪郭不成就. 於是 人間盜鑄者雲起 雜以鉛錫 並不牢固. 雖重制嚴刑
官長坐死 免者相繼而盜鑄彌甚 百物踊貴 人患苦之 乃立品 極薄小 無輪郭者 悉加禁斷. 其後 又以銅轉難得 欲鑄二銖錢. 顔峻諫 不聽 乃鑄二銖 形式轉細 民間摸効之 而大小厚薄 皆不及也.
其尤輕薄者 謂之荇葉 市井通用之. 子業時 沈慶之又啓通私鑄. 由是 錢貨亂敗 一千錢長不盈三寸 謂之鵝眼錢. 劣於此者 謂之綖環錢 入水不沉 隨手破碎 市井不復斷數. 十萬錢 不盈一掬 斗米一萬
商貨不行.○齊高帝時 奉朝請孔顗上書曰 "鑄錢之弊 在輕重屢更. 重錢之患在於難用 而難用爲無累. 輕錢之弊 在於盜鑄 而盜鑄爲禍深. 人所以盜鑄 而嚴法不能禁者 由上鑄錢惜銅愛工也. 所以惜銅愛工者
謂錢無用之器 以通交易 務欲令輕而數多 使省工而易成 不詳慮其患也. 自漢鑄五銖錢 至宋文帝四百餘年 制有廢興 而不變五銖者 其輕重可法 得貨之宜也. 以爲開置錢府 大興鎔鑄 錢重五銖 一依漢法
則府庫以實 國用有儲."丘濬曰"自古 論錢法者多矣. 唯南齊孔顗所謂不惜銅 不愛工 此二語者 爲萬世鑄錢不易之良法也. 如此則其爲錢也 體質厚而肉好適 均制作工 而輪郭周正 造一錢費一錢 本多而工費
雖驅之使鑄 彼亦不爲矣 况冒禁犯法 而盜爲之哉? 然自太府圜法以來 以銅爲泉 或爲半兩 或爲楡莢 或爲八銖ㆍ四銖 不知幾變矣 惟漢之五銖 爲得其中. 五銖之後 或爲當千 或荇葉 或爲鵝眼綖環
又不知其幾變矣 惟唐之開元爲得中. 二者之外 或以一當三 或以一當十 然皆行之不久而遽變 惟其質制如開元者 則今通行焉."○後魏初至太和 錢貨不用. 孝文帝始詔天下用錢. 十九年 公鑄粗備文曰太和五銖
令京師及諸州鎭皆通行之. 內外百官祿 準絹給錢 疋爲錢二百. 宣武帝時 又鑄五銖錢 禁不依準式者. 諸州鎭或不用 或止用古錢 致商貨不通. 孝明帝時 任城王澄 上書"夏殷之政 九州貢金以定五品
周仍其舊. 太公立九府之法 於是圜貨始行 定銖兩之楷. 齊桓循用 以覇諸侯. 降及秦始ㆍ孝文 遂輕重之 逮于孝武 乃鑄五銖. 其中毁鑄 隨時改易 故使錢有大小之品而切尋. 太和之錢 孝文留心創制
後與五銖並行 此不刊之式 今不行之. 錢律有明文 指謂鵝眼ㆍ鐶鑿 更無除禁. 河北州鎭 旣無新鑄 復禁舊者. 專以單絲之縑 疎縷之布 狹幅促度 不中常式. 裂疋爲尺 以濟有無 徒成杼軸之勞
不免饑寒之苦 良由分截布帛 壅塞錢貨 實非救恤凍餒 子育黎元之意."又曰"周禮'外府掌布之出入.'布猶泉也 藏曰泉 流曰布. 然則錢之興也 始於一品 欲令世匠均同 環流無極. 降逮亡秦 易鑄相尋
參差百品 遂令接境乖貿. 今謹參量太和五銖 乃不朽之恒模 寧可全貨於京邑 不行於天下? 夫布帛不可尺寸而裂 五}\則有擔負之難. 錢之爲用 貫繈相屬 繈亦錢貫也. 不假斗斛之器 不勞秤尺之平 濟世之宜
允爲便利. 請下諸方州鎭 新舊諸錢 內外全好者 並得通行 鵝眼ㆍ鐶鑿及不如法者 依律而禁. 若盜鑄者 罪重常憲! 旣欲均齊物品 廛井斯和 若不嚴法 無以止奸."帝從之.○唐高祖武德四年 廢五銖錢
鑄開元通寶. 錢每十錢 重一兩 計一千 重六斤四兩 輕重大小 最爲折衷 遠近便之. 歐陽詢爲文 書合八分及隸體. 杜佑曰"每兩 二十四銖則一錢重二銖半以下. 古秤比今秤三之一也 則今錢
爲古秤之七銖以上 比古五銖 則加重二銖以上.○高宗永淳元年 勑 "私鑄錢造意人 及句合頭首者 幷處絞 仍先決杖一百. 從及居停主人 加役流 各決杖六十. 鑄錢處隣保徒一年. 里正ㆍ村正ㆍ坊正
各決杖六十. 若有糾告者 卽以其家産賞 同犯自首 免罪依例酎賞."○玄宗開元二十二年 欲倣漢文 不禁私鑄 勑百僚議可否. 錄事參軍劉秩 議曰"古者以珠玉爲上幣 黃金爲中幣 刀布爲下幣 今之錢
卽古之下幣也. 今若捨之 任人自鑄 則上無以御下 下無以事上 其不可一也. 夫物賤則傷農 錢輕則傷賈 故善爲國者 觀物之貴賤 錢之輕重. 夫物重則錢輕 錢輕(重)由乎物多 多則作法 收之使少. 少則重
重則作法 布之使輕. 輕重之本 必由乎是 奈何而假於人? 其不可二也. 夫鑄錢 不雜以鉛鐵則無利 雜以鉛鐵則惡 如不重禁 不足以懲息. 方今塞其私鑄之路 人猶冒死以犯之 况啓其源而欲人之從令乎?
是設陷穽而誘之入 其不可三也. 夫許人鑄錢 無利則人不鑄 有利則人去南畝者衆 去南畝者衆則草不墾 草不墾則又隣於寒餒 其不可四也. 夫人富溢則不可以賞勸 貧餒則不可以威禁 故法令不行 人之不理
皆由貧富之不齊也. 若許其鑄錢 則貧者必不能爲 臣恐貧者彌貧 而復役於富室 富室乘之而益恣. 昔漢文之時 吳濞諸侯也 富埒天子 鄧通大夫也 財侔王者 此皆鑄錢之致. 必欲許其私鑄 是與人利權
其不可五也. 今必以錢重而傷本 貨費而利寡 則臣願言其失. 夫錢重者 由人鑄日滋於前 而爐不加於舊 又公錢重 與銅之價頗等 故盜鑄者 破重錢以爲輕錢. 禁寬則行 禁嚴則止 止則棄矣 此錢之所以少也.
夫錢用不贍者 由乎銅貴 銅貴之由 在於採用者衆. 夫銅之爲兵 不如鐵以爲器則不如漆 禁之無害 陛下何不禁於人? 禁於人則銅無所用 銅無所用則益賤 賤則錢之用給矣. 夫銅不布下則盜鑄者 無因而鑄
無因而鑄則公錢不破 人不犯死刑 錢又日增 不復利矣 是一擧而四美兼也." 時 公卿皆以爲不便 乃但勑郡縣 嚴斷惡錢.○杜佑錢幣論曰 "立錢之意 誠深誠遠. 凡萬物不可以無其數 旣有數乃須設一物而主之.
其金銀則滯於爲器爲飾 }\帛又苦於荷擔斷裂 唯錢但可貿易 流注不住如泉. 若}\帛爲市 非獨提挈斷裂之弊 且難乎銖兩分寸之用. 歷代錢貨 五銖爲中 一品獨行 實臻其要. 金錢雖微重於古之五銖 大小斤兩
便於時矣. 太公旣立九府圜法於周 退行之於 齊曰'知開塞之術者 其理天下如化.'是謂政之大端矣. 又管仲曰'三弊握之 非有補於溫飽也 捨之 非有切於饑寒也 先王以守財物
以御人事而平天下也.'夫生殖衆則國富而人安 農桑寡則人貧而國危. 使物之重輕 由令之緩急 權制之術 實在乎錢. 管子曰 "歲有凶穰 故}\有貴賤 令有緩急 故物有輕重."又曰"物多則賤 寡則貴 散則輕
聚則衆 人君知其然 故視國羨不足 而御其財物. }\賤則以幣易食 布帛賤則以幣易衣 視物之輕重 而御之以準." 是之謂通輕重之權. 後之言事者 或惜銅愛工 改作小錢 或重號其價 以救贏利
是皆昧經通之遠旨. 令盜鑄滋甚 棄南畝日多 雖禁以嚴刑 死罪日報 不能止也. 昔賢有云'銅不布下 乃權歸於上.'誠爲篤論 固有國之切務 救弊之良算也."○憲宗元和十二年 勑"文武官僚
下至士庶ㆍ商旅ㆍ寺觀ㆍ坊市 私貯見錢 並不得過五千貫 如有過此 許市別物收貯. 期滿違犯者 白身人處死 官人聞奏科貶 其賸貯錢納官 五分取一充賞." 時 京師里閈區肆 所積多方鎭錢
如王鍔ㆍ韓弘ㆍ李惟簡 少者不下五十萬貫. 於是競買地屋以變其錢 而高貲大賈 多依倚左右軍官錢爲名 府縣不能究治 竟不行.馬端臨曰"後之爲國者 不能制民之産以均貧富 而徒欲設法以限豪强兼幷之徒.
限民名田 猶云可也 限民蓄錢 不亦舛乎? 買田者志於呑倂 故必須上之人 立法以限其頃畝. 蓄錢者志於流通 初不煩上之人 立法以敎其貿遷也. 今以錢重物輕之故 立蓄錢之限 然錢重物輕 逐利者之所樂聞也
正不必設法以驅之 徒開告訐之門 而重爲煩擾耳. 本朝紹興中 亦嘗爲限錢之令 是皆不可行之末策也."呂氏 東萊 曰"泉布之設 乃是阜通財貨之物 非先王財貨之本. 古者論國用 三年耕必有一年之食
以三十年通制 則有九年之食 以爲財貨之盛. 古人論財會(貨)但論九年之積 初未嘗論所藏者 數萬千緡. 何故? 農桑 衣食財貨之本 錢布 流通權時之宜而已. 先有}\粟 泉布之權方有所施 若無其本
雖積繈至多 何補盈虛之數? 所以 三代以前 論財賦者 皆以}\粟爲本 泉布不過權輕重. 取之於民 九貢九賦用錢幣 爲賦甚少. 所謂俸祿 亦是頒田制祿 君卿大夫 不過以采地爲多寡 未嘗以錢帛爲祿. 近世
田賦祿俸純以錢. 所以 三代之人 多地著不爲末作 蓋緣錢之用少. 漢初 尙有古意 王公至佐吏 萬石ㆍ千石ㆍ百石 皆以}\粟制祿 不過口算錢每人所納. 人一百二十錢爲一算. 至武帝時 國用不足
立告緡之法以括責天下 自此 古意漸失 錢幣方重. 大抵三代以前 惟其以}\粟爲本 以泉布爲權 常不使權勝本. 後世 以匹夫之家 藏繈千萬 與公上爭衡 亦是古意浸失 故貢禹之徒 欲全廢此 惟以}\帛
此又矯枉過直之論. 大抵天下之事 經權本末 常相爲用 權不可勝經 末不可勝本. 若徒見一時之弊 欲盡廢之 則是知其一 不知其二. 如魏文帝時 天下盡不用錢 遂有濕}\薄絹之弊 反以天下有用之物爲無用.
其意本要重}\帛 反以輕}\帛 此亦可見其得失矣. 自漢至隋 惟五銖錢 最爲得中 自唐至五代 惟開元錢最得其平. 太重則有所謂直百ㆍ當千之錢 太輕則有楡萊ㆍ三銖之錢 皆不得中. 惟五銖ㆍ開元
銖兩之多寡 鼓鑄之精密 相望不可易. 本朝初 用開元爲法 其錢可以久行 自太宗朝張齊賢變鑄之後 錢雖多 然甚薄惡不可用 當時 務要得多 不思大體. 國家之所以設錢 以權輕重本末 未嘗取利.
論財計不精者 但以鑄錢所入多爲利 不知鑄錢雖多 利之小者 權歸公上 利之大者. 南齊孔顗論'鑄錢 不可以惜銅愛工.'若不惜銅則鑄錢無利 若不得利則私鑄不敢起 私鑄不起則斂散歸公上 鼓鑄權不下分
此其利之大者. 徒徇小利 錢便薄惡. 如此則奸民務之 皆可以爲錢 不出於公上 利孔四散 乃是以小利 失大利 孔顗之言 是不可易之論也. 蓋錢之爲物 饑不可食 寒不可衣. 若地方旣盡 }\帛有餘
山澤之藏 咸得其利 錢雖少不過錢重. 錢雖重彼此相權 猶國家之利. 要當尋古意 識輕重然後 可以語此." 葉夢得石林燕語曰"漢書 王嘉傳'元帝時 都內錢四十萬萬 水衡錢二十五萬萬
小府錢十八萬萬'言其多也. 以今計之 纔八百三十萬貫爾 不足以當榷貨務盛時一歲之入. 蓋漢時錢極重}\價甚賤 時至斛數十錢 故嘉言. 是時 外戚貲千萬者 少正使有千萬 亦是一萬貫 今中下戶皆有之.
近世 患國用不足者 每以爲錢少 故夾ㆍ錫ㆍ當十等 交具 卒未嘗有補. 蓋錢之多寡 係物之輕重 不在鼓鑄廣狹也. 又如魏李悝言'一夫治田百畝 畝收粟一石半 爲粟百五十石 一夫五口 人 月食一石半.
百畝之入 以十五石爲稅 九十石爲食 餘四十五石. 石錢三十 計錢千三百五十 而社閭嘗新春秋之祠 只用錢二百 而其餘錢 以爲五口之衣. 則固不嫌錢之少也.'"○五代 周世宗 以久不鑄錢 民多銷錢
爲器皿及佛像 乃立監鑄錢 凡民間銅器ㆍ佛像 皆毁以鑄錢.司馬公曰"若周世宗 可謂明矣 不以無益廢有益."○宋初 錢文曰宋元通寶ㆍ太平興國. 後又鑄太平通寶 自後改元 必更鑄 以年號爲文.丘濬曰"鑄錢
以年號爲文 始於劉宋孝建. 宋自開寶 每更一號 必鑄一錢 故每帝皆有數種錢 最多者仁宗也. 在位四十二年 九改年號 而鑄十種錢. 嗚呼! 鑄銅以爲錢 銅炭於何所出? 工作以何人用? 不免取之於民
民得無受其害乎? 矧供給官吏 監督匠役 鎔液耗損造作違式 輦運致遠 吏民因之而得罪破家者 何所不有? 是以古人利民者害民也."○宋自王安石爲政 始罷銅禁 姦民日銷錢爲器 邊關ㆍ海舶 不復譏錢之出
國用日耗.胡氏曰"鑄錢爲器 其利十倍. 錢所以權百貨 平低昂. 其鑄之也 不計費不謀息. 今而銷之 可不禁乎? 雖然 銷而爲器 錢雖毁而器存焉. 若夫散而四出 舟遷車轉 入於他國 歸於蠻夷. 關防不嚴
法製隳壞 眞錢日少 僞錢日多. 以不貲之價 靡有限之財 雖萬物爲銅 陰陽爲炭 亦且不給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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