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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ㄷ) 화폐에 관한 우리나라 논문들을 덧붙임[本國錢貨說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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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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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화폐에 관한 우리나라 논문들을 덧붙임[本國錢貨說附]

고려 성종(成宗) 15년(995년)에 처음으로 철전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목종(穆宗) 5년(1002)에 시중(侍中) 한언공(韓顔恭) 한언공(韓彦恭)：고려 목종(穆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한 사람.

이 "추포(麤布) 사용을 금지하고 돈을 사용하는 것은 세속에 맞지 않고 백성의 원성을 자아낸다"라고 말하므로 철전 사용법을 폐지하였다.

숙종(肅宗) 숙종(肅宗)：고려 왕조의 제15대 왕.

7년(1102)에 처음으로 철전을 사용하라고 명령하였다. 숙종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풍속이 순박하고 검소하므로 백성의 경제생활을 향상시키겠다"고 하면서
관부[官]를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돈 주조 시설이 완비되었다.[글자를 해동통보(海東通寶)라고 썼다.] 이에 교서[敎]를 내리기를 "백성을 부유하게 하며 국가를
유익하게 하는 데는 화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중국에서는 사용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우리나라만이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제 처음으로 화폐제조 법령[鼓鑄之法] 을 제정하였으니
주조한 돈 1만 5천 꿰미[貫]를 대신과 문무 양반(文武兩班) 및 군인에게 나누어 주어 이것으로써 사용하기 시작하라!" 하였다. 주전도감(鑄錢都監)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모두 돈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오니 이 사실을 종묘(宗廟)에 고하자!"고 하므로 이에 철전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을 태묘(太廟) 태묘(太廟)：왕조를 창건한 임금의 사당.

에 고하였다. 이어 서울 좌우부[京城左右]에 술집을 두고 또 거리의 양쪽에 사는 사람이면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이든지 가개를 설치하게 하여 돈을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9년에는 지방에 명령하여 각 고을에서 쌀과 곡식을 내어 술집을 설치하고 백성에게 사고 팔 것을 용허하여 그들에게 돈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였다. 이때에
돈[泉貨]을 사용한 지가 이미 3년이 되었건만 백성들이 잘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10년에 숙종(肅宗)이 죽고 예종(睿宗) 예종(睿宗)：고려 왕조의 제16대 왕.

이 국왕으로 되었는데 여러 신하들 중에서 "숙종왕 때부터 돈을 사용하였으나 그것이 불편하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예종이 말하기를 "돈을 사용하는 것은 옛날 제왕들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하여 실행한 제도이며 아버님께서 재부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 듣는 바와 같이 요(遼)나라에서도 근년에 와서
돈을 사용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대체 어떤 법령을 처음 제정할 때에는 백성들의 불평이 일어나는 것이나 그대들이 태조(太祖)께서 주신 '당나라의 문물제도를 본받을 것이나 우리의
인물 풍습이 다르니 무조건 답습을 하지 말 것이며 거란[契丹]은 야만 국가로서 본받을 것이 없다'라는 유훈(遺訓)을 빙자하여 돈 사용을 방해할 줄은 뜻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께서
금지하라는 말은 다만 부화한 풍속을 본뜨지 말라는 의미이니 문물제도[文物法度]와 같은 것은 우리가 중국을 배우지 않고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으나 마침내 철전 사용법을 폐지하였다.

상고해 보면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거칠고 간소한 생활이 관습으로 되었기 때문에 추포(麤布)를 금지하고 화폐[錢貨]를 사용하는 것을 세속에 맞지 않고 백성의 원망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협애하기가 짝이 없었다. 숙종이 화폐 사용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으나 얼마 후 죽은 다음에 여러 신하들이 또다시 제의하여 화폐 사용법을 폐지하였다. 비단 이 한 가지뿐만이
아니다. 당시의 대신[宰相] 소태보(邵台輔) 소태보(邵台輔)：고려 성종 때 이자의(李資義)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협모공신(協謀功臣)'의 호를 받고 수태부(守太傅) 벼슬을 한
사람.

등이 아뢰기를 "국학(國學) 국학(國學)：국자감과 같음.

에서 선비[士]를 양성하는 것은 경제상 손해가 적지 않으니 실지 백성의 해독입니다. 중국의 제도를 우리나라에서는 실행하기 곤란하니 폐지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 가지만을
보아도 당시 벼슬아치들이 무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종(睿宗)이 비록 말은 옳게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의 요란스러운 말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대개 예종이 비록 문학에
밝다[文雅]는 말을 들었지마는 그가 날마다 실상에 없는 무리[浮華之輩]들과 함께 풍월[詩句]이나 읊으면서 나라를 관리하는 원대한 식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럭저럭 지내기를
좋아하고 개혁을 싫어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심정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사람이 더욱 심하였고 또 어떤 일을 근기 있게 계속하지 못하였다. 속담에 "고려의 정부 사업은 사흘이다"이라
하였으니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공양왕(恭讓王) 공양왕(恭讓王)：고려 왕조 최후의 왕.

3년에 중랑장(中郞將) 방사량(房士良) 방사량(房士良)：고려 공양왕 때의 사람으로서 벼슬은 중랑장(中郞將).

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온 천하가 비록 지역이 다르고 풍속이 같지 않으나 선비, 농민, 장인, 상인이 저마다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생활을 영위하며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을 바꾸어
서로 융통해서 쓰는 것은 화폐[錢]입니다. 중국은 주나라에서 구부환법(九府圜法)을 창제한 뒤로부터 지금까지 사용하여 오는바 이는 다름이 아니라 화폐의 질이 견고하고 통용하기에
편리하며 불에 넣어도 타지 않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않으며 오래 쓸수록 더욱 광채가 나고 먼 데로 보내기도 곤란할 것이 없으며 쥐가 축을 내지 못하고 칼로 베일 수도 없어서 한 번
주조해 놓으면 만년을 두고 쓸 수 있기 때문에 천하에서 이를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추포(麤布)를 화폐로 사용하기는 다만 동경(東京) 등지의 몇 고을[州郡] 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이 추포의 단점은 사용하는 수명이 10년도 되지 못하며 약간 연기나 습기를 만나면 변질되고 썩어질 뿐만 아니라 국가 창고에 축적해 두더라도 쥐가 축을 내거나 비가
새어 손실될 염려가 없지 않사오니 기관[官]을 설치하고 돈을 주조하여 화폐로 쓰고 추포 사용법을 일체 금지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공양왕(恭讓王) 때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고려 충렬왕(忠烈王) 5년에 고려 초기의 도병마사(都兵馬使)를 개칭한 것으로서 국가의 중대 사건이 있을 때에는 사(使)급 이상의 관원이 모여서 토의하던
군사기관 명칭.

가 아뢰기를 "하우(夏禹)씨 때의 홍수와 성탕(成湯) 때의 큰 가물에서 금으로 화폐를 주조하여 백성의 곤궁을 구제하였으며 주(周)나라는 태공(太公)에게 이르러서도
구부환법(九府圜法)을 시행하였으니 이것이 돈을 화폐로 사용한 시초입니다. 한나라시대로부터 지금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각 돈을 사용하였으니 이는 모두 돈으로써 재난을 구제하고 백성의
생활을 편리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화폐로 말하면 삼한중보(三韓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해동중보(海東重寶), 해동통보(海東通寶)와 같은 것들이
있었던 것은 중국 서적[傳籍]에 기재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으며 근세에 와서도 은병(銀甁)을 만들어 화폐[貨]로 쓰되 포[布匹]와 함께 가치를 서로 맞추어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법령이 해이됨에 따라 구리돈[銅錢]과 은병이 동시에 폐지되어 통용되지 못하고 그만 전혀 닷새 베[五綜布]를 화폐로 쓰게 되었는데 근년에 와서는 베올이 굵고 성글어져서
점차 두 새, 석 새로까지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여자들이 노력을 아무리 들여도 백성들의 실용에는 편리를 주지 못합니다. 이것을 운반하자면 땀에 젖고, 저장해 두자면 쥐가 축을 낼
뿐만 아니라 상업이 발전되지 못하고 곡가가 비싸게 되는 것이 모두 여기에 기인합니다. 만일 수재, 한재가 있거나 전쟁으로 인한 군사비용을 쓰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돈이나 은병(銀甁)으로 사용하던 화폐를 갑자기 다시 시행하기는 곤란할 것이니 해당 관리로 하여금 송나라의 회자(會子)나 원나라의 보초(寶鈔)제도를 모방하여
고려통행저화(高麗通行楮貨)법을 제정하고 이를 인쇄 배포하여 닷새 베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민간에서 그것으로 모든 물품을 매매하게 하고 성글고 굵은 베는 일체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상고해 보면 돈을 화폐로 쓰는 것은 국가의 경비를 넉넉하게 하며 백성의 생활을 부유하게 하려는 것으로서 나라를 가진 자가 반드시 시행해야 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시행하지 않는
것은 어찌 제도의 미비한 소치가 아니라고 할까?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하므로 실행하려고 하더라도 끝내 실행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니 이 말은 옳지
않다. 토지에는 비록 비옥하고 척박한 차이가 있으며 백성은 비록 빈부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토지의 호부와 백성의 빈부 정도에 따라 다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일찍이
천하에서 인류의 생겨난 지가 오래되었으며 각국에서 모두 돈 화폐[錢貨]를 사용하는데 다만 우리나라에서 아직 실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있어서 억지로
실행하기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그 후에야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의 토지나 농사가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으며 사람의 성품이나 기호(嗜好)도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으며 선비, 농민, 장인, 상인이 저마다 자기의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하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 여러 가지가 모두 다를 바가 없는 이상 무엇 때문에 실행할 수 없겠는가? 다만 상부에 있는 사람들이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숙종(肅宗)왕이 실행하지 못한 것도 그런 원인이다. 대체 화폐[泉貨]란 것은 원래 직접 쓸 수 없는 물건을 가지고 직접 쓸 수 있는 물건을 바꾸는 것으로서 국가에서 유도해서
유통시키는 것이다. 그를 유통시키지 않으면 어떻게 저절로 사용되겠는가? 그러면 유도하여 유통시킨다는 말은 무엇인가? 일단 들여온 것을 다시 내어 준다는 말이다. 숙종이 이 원칙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대신과 군인 몇 사람에게 돈을 주고 거리의 양쪽에다 술집을 설비해 놓고는 이것을 믿고 시행되기를 바랐으니 이는 실행할 수 있는 방도를 알지 못한 것이다.
그때에 만일 부과한 조세[賦稅]에서 화폐를 절반씩 받거나 지출하는 녹봉에서 절반씩을 넣어 내준다면 여러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자연히 실행되었을 것이다.

대체 물[水]이란 세상에 잘 흘러가는 물건이지마는 도랑[渠]을 파지 않고 그것을 끌어대려면 아무리 하여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도랑을 파고서 물을 인도하면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니 화폐의 유통도 어찌 이것과 다르랴?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에서도 실행할 수 없을 것이요, 꼭 이렇게만 한다면 천하에 실행 못할 나라가 없을
것이다.[근세에도 여러 번 실행하려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걷어치우는 것은 비단 이러저러한 의견들이 많아서 잠시 실행하다가 그만두었을 뿐만 아니라 대개 그 화폐를 조세[田賦]에
섞어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추포(麤布)를 화폐로 하여 물품을 교환하는 것을 본다면 여러 말할 나위가 없이 돈을 반드시 화폐로 써야 할 것은 명백한 일이다. 지금 통용하는 추포는 한 두 새[升]
베에 불과하여 도대체 베[布]라고 할 수가 없고 모두 쓸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교역하는 데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런 베를 짜지 못하게 하여도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니 돈을
일단 사용하게만 된다면 역시 아무리 돈을 쓰지 말라고 하여도 금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문제되는 것은 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실행해야 할 필요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며 또
옳은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서도 오래 지속하지 않는 데 있다. 추포로 화폐를 삼는다면 쓸모 있는 물건을 찢어서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며 구리로 돈을 만든다면 직접 쓸데없는 물건을 쓸모
있게 하는 것이다. 또 추포는 사람의 노력을 많이 들이는 것이나 얼마 안 가서 소모되어 버리지마는 구리돈은 한번 주조해 놓으면 만 대를 두고 서로 전할 수 있는 것이니 그
이해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구리와 주석이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어서 곤란하다고 한다. 이 말은 더욱 옳지 않다. 그것이 비록 우리나라에서 산출되지 않는다
하여도 사는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다. 그러므로 저 심산궁곡의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술잔과 밥그릇은 물론이요 동이, 바리 따위도 모두 구리로 만들었으며 절간은 크나 작으나
간에 한 고을을 치더라도 수십 군데씩 되는데 절 하나의 종만 해도 구리의 중량이 얼마인지 모른다. 그런데 더군다나 한 개 국가의 힘으로 무역을 하여도 돈을 제조하기에 부족하겠는가?
국내에 구리 광산이 없기 때문에 돈을 위조하는 백성이 적을 것이니 이는 도리어 구리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유리할지언정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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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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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國錢貨說附高麗成宗十五年 始令用鐵錢. 穆宗五年 侍中韓彦恭言"使錢禁麤布駭俗興怨."罷之.肅宗七年 始命行錢. 王嘗謂"本國 自昔風俗朴略 欲興民利."設官鑄錢 至是所鑄錢始備. 文曰海東通寶.
乃下敎曰"富民利國 莫重錢貨 西北兩朝 行之已久 吾東方獨未之行. 今始制鼓鑄之法 其以所鑄錢一萬五千貫 分賜宰樞 文武兩班ㆍ軍人以爲權輿!"鑄錢都監奏"國人以用錢爲便
乞告宗廟."乃以始用錢告于太廟. 仍置京城左右酒務 又於街衢兩傍 勿論尊卑 各置鋪店 以興使錢之利. 九年命州縣 出米}\開酒食店 許民貿易 使知錢利. 時 泉貨之行 已三歲矣 民不能興行 故有是命.
十年王薨而睿宗立 群臣多言"先朝用錢不便."王曰"錢法古昔帝王所以富國便民 非先考貨息爲之也 况聞大遼近年亦始用錢乎? 凡立一法 衆謗從起 不意群臣托太祖遺訓 禁用唐丹之說 以排使錢 然其所禁
蓋謂風俗華靡耳. 若文物法度則捨中國何以哉?"然 竟罷之.按本國 自昔習於荒略 故以興錢貨禁麤布 爲駭俗興怨 其陋甚矣. 肅宗銳意興行 而未久而薨 群臣又請而罷之. 非獨此一事也
其時宰相邵台輔等奏言"國學養士 糜費不些 實爲民害 中國之法難以行於我國 請罷之." 則可知其一時在位者之無識矣. 睿宗雖有是言而不能不牽於衆聒. 蓋睿宗雖稱文雅 而日與浮華之輩
吟哦詩句而無經國遠識故也. 大抵樂因循而憚改作 常人之情 而我國尤甚. 又凡事不能持久 諺云"高麗公事三日." 豈不信夫?恭讓三年 中郎將房士良 上書曰"天下雖方殊而俗異 其士農工商 各以其業資其生
以有易無 彼此通用者錢也. 自周設九府以來 至今通行者 無他. 其質堅貞 其用輕便. 火不燒 水不濕. 貿遷而益光 致遠而無咎. 鼠不能耗 刃不能傷. 一鑄之成 萬世可傳 故天下寶之. 本朝麤布之法
出於東京等處若干州郡. 且此布之弊 用無十年之久 乍遭烟濕 便爲災朽 縱盈公庫 未免鼠漏之傷. 願立官鑄錢爲貨 一禁麤布之行."時 都評議使司 啓曰"禹湯水旱 以金鑄幣 以救民困. 周至太公
又立九府圜法 此錢幣之始也. 自漢至今代 各有錢 皆所以備災患 而便民用也. 吾東方之錢 如三韓重寶ㆍ東國通寶ㆍ東國重寶ㆍ海東重寶ㆍ海東通寶ㆍ載之於中國傳籍 蓋可考也. 近古 又造銀甁爲貨皆與布匹
子母相權. 後因法弊 銅錢ㆍ銀甁 俱廢不行 遂全用五綜布爲貨. 近年以來 布縷麤疎 漸至於二三升 女工雖勞而民用不便 輸之則牛汗 積之則鼠耗 商賈不行 米}\踴貴 蓋由於此. 如有水旱之災
軍旅之費則將何以處之? 錢甁之貨 卒難復行. 宜令有司 依倣宋之會子 元之寶鈔之法 置高麗通行楮貨 印造流布 與五綜布 相兼行使 聽民間買賣諸物 疎縷之布 一切禁之."按錢貨 所以贍國用而裕民生
有國之必可行者也. 我國之不行者 豈非欠典乎? 或以爲我國土塉民貧 雖欲行之 終不可行 是則不然. 土雖有饒塉 民雖有貧富 隨其饒塉貧富而皆可行也. 嘗疑天下之生久矣 萬國皆用錢貨 而獨吾東方
尙未之行 是必有所由然 而難强焉者 後乃覺得大不然. 我國 土地稼穡 與他國無所異 人性嗜好 與他國無所異 四民之各資其生 以有易無 亦無所異. 茲數者皆無所異矣 則奚爲而不可行哉? 只爲上之人
不能行也. 高麗肅宗之不得行 亦有以也. 夫泉貨 本以無用易有用 上之所導而流行之者也. 不導其流 焉能自行? 導之行者 何也? 旣入之復出之之謂也. 肅宗不思其本 而徒給宰樞軍士 設左右酒坊
恃此而欲其行 則未知所以行者也. 苟能於賦稅 參半而收之 於祿賜參半而頒之 則不待多言 而自然行矣. 夫水 天下易流之物也 不開渠而欲其漑也 則終不可得 苟一朝開其渠而導之 則沛然流矣. 錢貨之行也
亦何異於是? 苟此之不爲 雖中國必不能行. 果此之爲 天下無不可行之國矣. 近世亦累欲行之 未久還罷者 非但囂囂多議 乍作乍輟 蓋以不爲參收於田賦故也. 且以今麤布交易觀之
則不待他言而知錢之必行無疑矣. 今囂布僅一二升 元不成布 百無所用 而貿遷相通 故禁之而不止. 錢若一行則雖欲禁止 亦不可得矣. 只患上之人 未能眞知其可行 又執德不恒 朝令而夕改也. 麤布以有用之物
而爲無用 銅錢以無用之物 而爲有用 麤布多費人功 而未久耗破 銅錢一成 而萬世可傳 其利害爲如何哉? 或又以銅錫 非本國所産爲難 是尤不然. 銅錫雖非本國之産 而貿之其價不甚高 故深山窮谷草屋之人
酒食器外 如盆椀之屬 無不以銅. 大小寺刹 或一縣數十餘區 而一寺鐘磬 不知其幾何. 况貿以一國之力 而未足於錢貨乎? 國無銅山 故民之盜鑄者小 是則便於行錢 非不便也.隨錄卷之八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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