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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 학교 세칙[學敎事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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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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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학교 세칙[學敎事目]

1\. 서울에는 태학을 설립하고[선발된 선비들을 수용함] 또 중학[사학(四學)에서 추천되어 온 선비들을 수용함] 및 사학[즉 동ㆍ서ㆍ남ㆍ북의 학교이다. 『대대례(大戴禮)』
『대대례(大戴禮)』：본래의 『예기(禮記)』 240편을 한나라 대덕(戴德)이 정리하여 85편으로 만든 서적. 지금은 40편만이 남아 있음.

를 보면 옛적에는 태학과 동ㆍ서ㆍ남ㆍ북 학교가 있었고 당(唐)나라 제도에도 역시 태학 외에 또 사문(四門) 학교가 있었다.]을 두는바 사학에는 내사(內舍)[정원 내의 학생을
수용함] 외사(外舍)[증광생(增廣生)을 수용함. 증광생을 지금은 정원 외의 학생이라 함. 그 제도는 내사는 안에 있는데 역시 동, 서재(東西齋)로 나누어 있고 외사는 밖에 있는데
역시 동, 서재로 나누어 있는바 그 내, 외 양사는 한 담 안에 있으나 작은 담을 사이에 두어 중문을 열게 되었다. 지금 지방 향교에서는 양반은 동쪽 재[東齋]에 거처하고 평민은
서쪽 재[西齋]에 거처하므로 서쪽 재가 비록 비었더라도 양반은 들어가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동쪽 재가 비록 비었더라도 평민은 들어가지 못하니 이것은 극히 무리한 일이다. 응당
누구나 편의를 보아 들어가 거처해야 할 것이요 결코 동, 서쪽 재를 가지고 차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각 도(道)의 감영(監營)에는 모두 영학(營學)을 설치하고[주와 현(州縣)에서 올라온 선비들을 수용하기 위한 것. 경기(京畿)도에서도 역시 경기 감영 근처에 영학을 설치할
것이다.] 각 주와 현에는 읍학(邑學)을 설치하는데 읍학에도 내사, 외사를 둔다.[그 제도는 위에 설명한 바와 같다. 각 도의 영학은 그 본읍(本邑) 학교와 딴 데 둘 것이 아니라
서로 이웃에 설치하여 여러 선비들이 모아서 토론하며 연구하기에 편리하도록 할 것이다. 또 감사(監司)가 영학에 오면 시시로 본 고을 교관들과 더불어 그 고을 학생들을 합석해 놓고
학문상의 강독과 학업을 장려해야 한다. 또 서울[京城]에는 태학에만 공자 사당[文廟]을 세우고 모든 다른 학교에는 따로 세우지 말 것이다. 감영과 읍에는 감영 학교에만 공자 사당을
세우고 감영 소재지의 본읍 학교에는 따로 세우지 말 것이다.]

경기도에는 따로 감영 학교를 세우지 말고 경기도 내의 주와 현에서 추천하여 올라온 선비들을 모두 중학에 입학시키고 중학 선생으로 하여금 그들의 교육을 전담케 하며 도사(都事)도
역시 그에 관한 일을 맡아서 교수를 겸임하기를 전례와 같이 할 것이다. 추천받아 올아온 선비들이 처음 오면 그들과 같이 앉아서 시험 겸 강론을 하고 틈나는 대로 또한 학교에 와서
함께 격려할 것이다. 경기도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기는 하나 그러나 감영 학교를 따로 설치하는 것이 꼭 조리에 합당할는지 그 여부는 모르겠다. 주와 현의 학교에도 역시 공자
사당[聖廟], 강당, 동서재(東西齋), 식당, 전사청(典祀廳), 제기고(祭器庫), 장서각(藏書閣) 등을 모두 다 이 격식에 의하여 설치하고 또 앞 행랑[前廊]과 남쪽 누각[南樓]을
지을 것이며 학교 옆에다 또 교관실[敎官衙]을 만들 것이다.[모든 학교의 부속 건물들은 지방관[守令]이 파손되는 대로 수리하되 만일 공사가 거대하면 원들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경상비로써 공사비에 충당한다. 그러므로 감사가 매번 그 수축 정황을 순시, 검사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3\. 태학의 학장과 부학장은 그의 도덕이 선생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정할 것이요[대사성(大司成) 대사성(大司成)：조선시대 최고 학부인 성균관(成均館)의 실무 책임자격인 정3품
관직.

은 응당 정2품(正二品)으로 올릴 것이다. 만일 1품이면 행(行)이라 하고 종2품(從二品)이면 수(守)라 하며 조선 판서(判書)나 대제학(大提學) 대제학(大提學)：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벼슬 이름.

이 의례히 지관사(知館事)를 겸임하는데 대사성(大司成)과의 관계는 빈주(賓主)의 예와 같이 한다. 사성(司成)은 정3품(正三品)으로 올릴 것이다. 중학에는 사교(司敎)를 두는데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하고 사도(司導)를 두되 종3품으로 할 것이다. 감영 학교에는 감사(監司)와 도사(都事)가 그 교육을 전담하여 감사가 학장으로, 도사를 부학장으로 할
것이니 도사를 참리(參理)로 개칭하여 종3품으로 할 것이다.] 모든 학교의 교직원은 역시 남의 사표가 될 만한 학식이 있는 사람 중에서 잘 선정할 것이다.[사학(四學)에서 두는
교도(敎導)는 종4품으로 교수는 6품으로 하여 지금과 같이 태학관원이 겸무하지 말고 그 학교의 전임 선생으로 정할 것이다. 큰 부[大府], 도호부(都護府), 부(府)의 학교에는
교도를 두는데 큰 부와 도호부의 교도는 정5품이요 부의 교도는 종5품이며 군, 현의 학교에는 교수를 두는데 군 교수는 정6품이요 현 교수는 종6품으로 할 것이다. 주와 현 학교의
교관은 가족을 데리고 살림하면서 임기를 마칠 것이요 서울 학교[京學]의 교관도 역시 꼭 임기를 마쳐야 할 것이다. 만기되기 전에는 결코 조동[遷動]하지 말 것이며 완료한 뒤에는
모두 그 성적을 고사하여 승급시킬 것이다. 서울과 지방 학교의 모든 교직원 중에서 덕망이나 학식이 상당한 사람으로서 그의 직품의 고하가 있을 때에는 역시 행(行), 수(守)의 예에
따라 실행할 것이다.]

학교 구획도[學圖]

![도판 3](../assets/09/image-03.png)

강당(講堂)

서재(西齋) 내사(內舍) 동재(東齋)

서재(西齋) 외사(外舍) 동재(東齋)

영학과 태학에는 외사와 중학이 없음.

4\. 태학에는 존현당(尊賢堂)을 세우고 또 관광법(觀光法)을 실행할 것이요[정이천(程伊川)의 정한 바에 의거할 것이니 본문에 이미 자세히 말했다.] 중학, 영학(營學), 사학,
주와 현의 학교에서도 학빈(學賓)을 두며 또 관광법을 실행할 것인바 그 절차는 대개 태학의 것과 같이 한다.[학빈은 대부(大夫)나 선비를 불문하고 그 고을이나 혹은 이웃 고을
사람으로서 오직 학식이나 조행이 일반 학생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으로 정한다. 주자(朱子)가 동안현(同安縣)의 원으로 있을 적에 서응중(徐應中)을 청해다가 학빈을 삼아 손님으로
대우하고 생도들의 모범이 되게 하였던바 이것이 선비들을 교양 감화함에 있어서 제일 유익한 일로 되었었다. 학빈을 존경하며 공대하기는 선생에게 대하는 절차와 같이 한다. 그러나
적당한 사람이 없으면 그만둘 것이다.]

5\. 학교 유생의 정원은 서울의 사학(四學)에는 각각 100명씩, 지방의 큰 부[大府], 도호부(都護府)는 80명씩, 부(府)는 60명씩, 군은 40명씩, 현은
20명씩이요[이것은 곧 내사생(內舍生)이다.] 그 증광생(增廣生)은 내사생보다 각각 그 수를 배로 할 것이다.[내사생이 20명이면 증광생을 40명으로, 내사생이 80명이면 증광생을
160명으로 할 것과 같다. 큰 부, 기타 군과 현의 제도는 군현조에 자세히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현재 유생의 정원[儒額]은 서울 사학(四學)이 각 100명, 부와 주는 각 90명, 도호부는 7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이니 이대로 두어도 무방한데
꼭 개정할 필요가 무엇인가?"라고 한다. 주와 현의 제도에 있어서 이미 밭 4만 경(頃)의 경지를 가진 데는 큰 부 및 도호부로, 3만 경은 부로, 2만 경은 군으로, 만 경은
현으로 정하였으니 유생의 정원수의 다과(多寡)도 그 차이를 두어야 옳을 것이며 또 공사(貢士) 공사(貢士)：지방에서 선발하여 정부에 추천한 재능과 학술이 있는 선비.

를 식년(式年)마다 1명 혹 2명씩, 혹 2식년에 3명씩, 혹 식년 어간에 1명씩 하여[자세한 것은 아래에 있다.] 더욱 적당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실행해 본 뒤 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지금 서북 변경과 영서(嶺西) 등지의 광막한 데는 경작지가 비록 적으나 혹 변방 진관(鎭管)을 설치하기 위하여 특히 주와 부로 올린 데가 있는바 이런
고을들에서는 그 유생 정원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한다. 변방 진관(鎭管)을 적은 고을에다 설치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응당 토지의 실지 형편과 관청의 명칭이 서로 맞아야
한다. 공연히 헛된 명칭만으로 승급시킨다면 실지에 유익할 것이 무엇인가? 군과 현을 정리한 뒤에는 자연 이런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 혹 정리하기 전이라면 명칭이 비록 주나 부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두 본 등급[본래 현이면 1만 경(頃), 군이면 2만 경의 규례대로 할 것이다.]대로 정할 것이며 그리고 그 학교의 토지[學田]와 국가 식량 및
사용인원[典僕] 등의 수도 역시 이것을 참작하여 정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증광생(增廣生)은 그 수를 제한하지 말고 교육을 광범히 실시하는 본의에 맞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한다. 그것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증광생은 원래
내사생(內舍生)의 선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므로 너무 수에 제한이 없다면 필경 이 제도가 허물어져 수습하기 곤란한 점이 있을 것이니 오직 장래를 내다 본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여숙(閭塾), 당상(黨庠)을 설치한다면 선비 된 자만이 교육을 받을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주나 현의 학교에서 각 동리의
학교들로부터 우수한 자를 뽑아 입학시키는 것이니 이것은 벌써 향촌의 작은 학생[小學]으로 볼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선비로 되어 평민과의 분간이 있게 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지위가 있는 이상에는 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체 옛날의 현명한 정치는 그 교육과 교양에 관한 시설이 무궁하였지마는 직위에 관한 한도가 있었으니 이것은 물론 변경할 수 없는
법칙이다. 보라! 천지의 조화가 무궁하나 역시 순서가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이 순서가 있기 때문에 그 무궁(無窮)한 것을 달성하는 것이다.[만일 순서가 없으면 소위 무궁이란 것이
성립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학교의 유생 정원수를 둔다면 뒤에 교육과 교화사업이 크게 보급되고 인재가 배출하더라도 역시 그 정원수를 증가할 수는 없는가?"라고 한다.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나 선비와 평민의 차별이 있다. 경(卿), 대부(大夫), 사(士)는 모두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그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를 선발할 뿐인 것이다. 교육이 아무리
보급될지라도 인재의 부족이 걱정일 것이니 인재가 너무 많은 것은 근심할 바 아니다. 그러나 만일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다 벼슬을 시킬 만한 사람으로 된다면 그 직위를 증가하여 전부
인원에게 경, 대부를 시킬 것인가? 선비는 비록 벼슬을 아니할지라도 역시 장차 등용하기 위하여 선발해 두기 때문에 관직도 인원도 일정한 수가 있는 것이다. 선비가 나타나는 대로
정원수를 증가할 수 없는 것이니 대부(大夫)를 그 자격자가 있을 때마다 정원수를 증가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그것은 참으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인재의
배출 여부는 고을에 따라 혹 다른 수가 있는바 이 고을에서 낙제한 자가 저의 고을에서 선발된 자보다 나은 자가 없지 아니 할 것이니 역시 그 교류를 용허할 수는 없을까?"라고
한다. 이것은 공, 사(公私) 간에 모두 좋을 것이다. 옛적에도 재능과 덕행이 고명한 자가 자기의 포부를 실행하기 위하여 폐백을 가지고 국경을 나간 일이 있었고 농민도 또 살기
좋은 넓은 고장으로 이사하는 법이 있었으니 선비라 할지라도 자기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연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요 국가에서도 교육과 교양을 보급시키는 방향에서 응당 용허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법령에 규정하기를 객지에 와서 기류한 자에게도 역시 입학을 허가한다고 해야 하였다.]

6\. 다른 고을의 선비로서 그 지방에 기류하고 있는 자도 학교에 입학케 한다.[타 지방에 기류한 자라도 공부를 하겠다면 본 지방의 선비들이 반가이 친구로 받아들여 공부할 것을
협조할 것이다. 만일 정원수나 자리의 유무로 말썽을 부려 입학시키기를 싫어하는 자가 있다면 자연 착한 사람을 투기하는 벌을 줄 것이다.]

7\. 주와 현의 교관도 일정한 녹봉을 정하며[녹봉 액수는 녹제(祿制)에 실려 있으니 그 지방의 경비 중에서 계산할 것이다.] 그가 부릴 인원을 정할 것이다.[사용 인원수는
관직제도[職官條] 중에 실려 있고 사용 인원도 모두 급료를 줄 것인바 모두 녹제에 실려 있다.]

8\. 주와 현의 학교에서는 모두 학생에게 식량을 공급할 것이다. 큰 부[大府]와 도호부[都護府][쌀 345속[斛] 6두(斗).], 부(府)[쌀 259석 2두.],
군(郡)[172석 8두.], 현(縣)[86석 4두.]에 따라 각각 수량을 정하여 매월 초하룻날 지급하되 학생을 5조로 나누어 12명을 1조로 하여 1개월 분 합계 쌀 7석
2두[1명당 1일분 2승]로 할 것이요 만일 학생 수가 정원보다 적으면 그 수량을 감하고 윤달이 있을 때에는 증가할 것이다.[그 고을 경비 중에서 회계할 것이다. 교관과 학교에
있는 학생에게 필요한 시탄(柴炭) 등 물품은 그 고을 토지 수입 중에서 지출할 것이니 자세한 것은 녹제에 실려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증광생(增廣生)은 식량을 자담[自備]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 생각해 보고 이렇게 정한다. 만일 초기에 제도가 아직 제정되지 않을
때라면 당분간 그렇게 한 것도 좋을 듯하나 그러나 이것을 규례로 확정한다면 완전치 못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시험적으로 실행해 보면 그 어느 것이 옳은가를 알게 될
것이다.]

9\. 주와 현에는 모두 학교 소속 토지[學田]를 둘 것이다. 큰 부, 도호부(都護府)[원세(原稅) 480석[斛]을 수입할 만한 토지], 부[원세 370석을 수입할 만한 토지],
군[원세 260석을 수입할 만한 토지] 현[원세 150석을 수입할 만한 토지]에 각각 일정한 면적을 확정하여 매년 그 해의 세곡을 수입하며[토지 및 수세(收稅)에 관한 것은
전제(田制)에서 자세히 말했다.] 이것을 지방관[守令]과 교관의 감독하에 직원이 그 일을 담당하여 학교의 공용으로 하고[모든 학생에게 공급하는 간장, 어물, 채소, 등유(燈油) 및
학빈(學賓)에 공급하는 것과 모든 학생들의 대제(大祭)나 재회(齋會) 때에 공급할 것과 및 학교 중의 서책 기타 학용품과 재실(齋室)의 비치품과 같은 비용에 충당.] 약간 잉여분을
저축하였다가 흉년에 보용할 것이요 관원이나 직원[有司]이 일초라도 사사로이 쓸 수 없다.[만일 제복(祭服)이나 제기(祭器)를 다시 준비할 때에는 그 비용을 계산하여 부(府), 군,
현에 따라 그 수량을 정하고 또 그 비치 연한을 작성하여 그 연한이 만료되면 그 고을의 경비로써 회계하여 형편을 따라 조처하게 할 것이다. 모든 군과 현의 제복도 다 이와 같이
한다. 모든 학교의 단장 밖에 있는 하인들의 거주지도 학교에 부속시켜 세금과 병역을 면제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전제(田制)에 실려 있다. 학교 하인들도 역시 정원이 있고 급료가
있으니 자세한 것은 관제(官制)와 녹제(祿制) 규례에 실려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현재 지방에는 학교 토지와 하인의 부족한 데가 매우 많으나 어떻게 변통할 길이 없는바 만일 학생 중에서 토지와 노비를 바치고 학교에서 열등생을 낙제시키는
강독의 면제 받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정원을 초과하지 않는 한 현재의 실례에 의하여 허가해주는 것도 어떠할까?"라고 한다. 나라일을 해나가는 데는 자연 처리할 방법이 있는 것이니
어찌 이처럼 구차한 짓을 하겠는가? 대체 공전(公田)제도가 실행되고 하인들도 다 급료가 있게 된다면 자연 이런 걱정이 없이 가는 곳마다 일률로 넉넉하게 될 것이다.]

10\. 태학(太學)과 영학(營學)에 있는 학생의 식량 공급과 모든 물품 지급은 모두 경상비 중에서 일정하게 지급할 것이다.[영학에서도 역시 그 곳의 경상비에서 지출할 것이다.
식량 등은 토지 조세[田稅]에서 지급할 것이요 기타 비용은 조세나 혹 잡세에서 지출할 것인바 모두 일정한 수량과 규정이 있다. 중학이나 사학(四學)도 이와 같다.]

11\. 당번 학생의 식사는 하루 양시(兩時)를 공급하고 대제[大祭祀]나 재회(齋會)에 참여할 때에는 모든 학생에게 양일 분을 제공할 것이다. 모든 식사 때에는 북을 울리면
식당으로 가는데 연령의 순서대로 앉을 것이요[내사생(內舍生)과 외사생(外舍生)은 딴 줄을 잡을 것이다.] 식사를 할 때에는 말을 하지 말 것이며 식사를 마치면 차례대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학교 내에서는 서로 개인적인 회합이나 주식(酒食)을 배설할 수 없다.

12\. 서울이나 지방 학교에서는 하인 중에서 근간하고 착실한 자 두 사람씩을 골라서 사무원으로 정하여[번을 갈라 서로 교대할 것이다.] 모든 학생들의 식사에 관한 일을 맡게
하며[부엌을 검사하는 등의 일을 각 군의 관청 예방(禮房)이 하는 것과 같이 할 것이다. 서울이나 주와 부의 학교에서는 인수를 적당히 증가할 수도 있다.] 식사가 개시될 때마다
담임자가 직접 음식물을 맛볼 것이요.[지금 태학의 장무관(掌務官)이 하는 것과 같다. 대체 식당에서 북을 치며 식사를 차리는 절차는 모두 태학의 예와 같이 할 것이다.]
학장[師長]이 때때로 직접 순시해 본다.[지금 태학의 제도가 완비한 셈이니 그대로 준행해야 할 것이며 영학이나 기타 모든 학교도 이와 같이 한다.]

13\. 서울이나 지방 학교에는 서적을 많이 배치할 것이나 오직 잡스러운 이야기나 성현의 글이 아니면 비치하기를 불허한다.

[모든 창기나 무당 같은 것들을 학교 근처에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경서(經書)는 거의 집마다 있지마는 역대의 조선 역사는 전연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이 없으니 이런 책도 역시 인쇄해서 배포해야 할 것이요, 서울이나 지방 학교에서도
모두 이것을 비치하게 해야 할 것이다.]

14\. 모든 학교에는 모두 사장[射圃]을 부설한다.[즉 활 쏘는 장소이니 서울이나 지방 학교에서도 모두 그렇게 할 것이다.]

15\. 태학의 학장, 부학장을 위시하여 서울이나 지방 학교의 관원이 부임할 때의 스승과 학생들이 처음 보는 절차를 정할 것이다.[학장이 처음 부임하면 모든 학생이 일제히 모아 ―
날마다 출석하지 않는 학생은 그만둔다. ― 대문 밖에서 환영할 것이다. ― 학교 대문 밖 수십 보쯤 가서 하마대(下馬臺)가 있는데 학장이 하마(下馬)한 뒤에 모든 학생들이 몸을
굽혀 문 밖의 길 서쪽에서 환영한다. ― 학장이 공자 사당의 뜰로 가면 집사(執事)가 중문을 열며 학장이 재배하고 올라가서 분향하고 내려와 재배한 뒤에 강당 북쪽 벽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모든 학생들이 뜰로 들어와 순서대로 서는데 내사생(內舍生)이 한 줄이 되고 장의(掌議), 유사(有司), 직월(直月)이 앞에 서며 증광생(增廣生)이 그 다음 줄이 되어 모두
다 북쪽을 향하여 동쪽을 위로 하고 연령의 순서대로 서나 사람이 많으면 각각 여러 줄로 한다. 석차가 정해진 뒤에 직월이 명단을 드리면 해당 집사자가 받아서 학장에게 올리고 학장은
이것을 받아서 눈여겨본다. 그때에 모든 학생들이 차례대로 올라가되 서쪽으로부터 대청 위로 올라가서 북쪽을 향하여 순서대로 서되 뜰에 섰던 절차와 같이 하여 모두 재배하면 학장은
절만 받고 앉을 것이며 모든 학생들은 곧 물러갈 것이다. 부학장이 부임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한다. 그러나 부학장과 장관이 대청 위에서 서로 보는 예식을 행할 때에는 장관은 의연
북쪽 벽에 앉으며 부학장은 동쪽 벽에 앉고 모든 학생들은 북쪽을 향하여 절한다. 감사나 도사가 부임 초에 영학(營學)을 순시할 때나 군수[守令]가 부임 초에 향교를 시찰할 때에도
그 절차는 모두 이와 같다. 서울이나 영문 학교[營學]와 중학이나 사학(四學)에는 공자 사당에 절하는 절차가 없다. 날마다 출석을 하지 않는 학생은 그 환영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
다음에 각각 명함을 가지고 가서 보이되 그 절차는 보통 의식과 같다. 태학의 학장과 부학장이 모든 학교를 시찰할 때와 중학의 학장과 부학장이 사학을 시찰할 때와 감사(監司)
도사(都事)가 각 고을 학교를 시찰할 때의 절차도 역시 이상과 같다. 그러나 모든 학생이 절할 때에는 서서 받고 절하고 난 뒤에는 한 번 읍(揖)하여 답례하는 것만이 좀 다르다.
대체 윤회 강독할 때나 열등생을 낙제시키는 강독에는 날마다 출석하지 않는 학생도 이 모임에는 참여할 것이다. 모든 학생이 초하룻날 태학에 가서 분향(焚香)할 적에 태학생과 같이
참여하면 태학의 학장과 부학장이 읍으로 답례하지 않는다. 영학에 부설한 읍학생(邑學生)이 영학에 갈 때에도 역시 이에 준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교관은 읍으로 답례하지 않고 감사가 도리어 답례로 읍을 하는 것은 웬 까닭인가?"라고 한다. 옛적에는 비록 상하의 구별이 매우 엄하였지마는 예절에 대하여
답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국가에서 학교를 설립한 것은 본래 도리를 밝히고 현명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므로 선비를 대우하는 예절도 벼슬의 등급으로 따지지 않고 도덕을
존중히 하는 의미로 우대하는 것이다. 교관이 답례로 읍을 아니 하는 것은 선생을 존경하기 때문이니 선생을 존경하는 것은 도덕을 존중히 하는 의미이며 감사가 답례하는 것은 선비를
대우하기 때문이니 선비를 대우하는 것은 도덕을 존중히 하는 의미이다. 교관은 실지로 교육과 교양을 맡았으므로 그에게 대한 예절도 꼭 존엄해야 할 것이니 선생이 존엄성을 잃으면 그에
대한 도리가 존경하지 못하며 도리가 존경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학문에 대하여 존경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감사에게도 선생 제자의 의리는 있다 할 것이나 그러나 감사는 고찰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실상 평소의 교양을 맡은 관원이 아니다. 또 그 지위가 현저한 만큼 그가 만일 답례를 아니 하면 도덕을 존중히 하는 본의가 필경 표현되는 바 없어서 사람들이 학문을 숭상할
줄을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가 비록 서로 반대된 듯하나 그 의미는 일치한 것으로서 예절 상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 대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도덕을 존중히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기 때문에 선비를 대우하는 예절도 응당 군인이나 평민에게 대하는 예절과는 다르게 한 것이다.

16\. 서울이나 지방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 중에서 여럿이 신임하고 나이 많으며 학업과 조행이 특수한 자 1명을 장의(掌議)로 정하며 또 2명을 유사(有司)로 택정하고 두 사람을
선택하여 돌려가면서 직월(直月)을 하게 할 것이다.[장의, 유사, 직월의 수는 관학(館學)과 주 및 부(府)의 학교에서 적당히 증가할 수 있다.] 장의는 큰 사고가 있지 않으면
해임하지 않으나 유사와 직월은 모두 1년 만에 교체할 것이다. 모든 학교 중의 의논은 장의가 이것을 맡아 학장에게 보고하여 정한다. 모든 물품의 출납과 학교 하인의 사용과 서책 및
기구는 유사가 주관하며[대개 학교 하인은 학교 일[學事]과 동, 서재의 일[齋事] 외에는 사람마다 자기 개인의 일로 부릴 수 없으며 그들을 처벌하는 것도 유사와 장의가 주관하되
중대한 일이면 학장에게 보고하여 처리한다. 학생들도 하인이나 물품을 함부로 처리하지 말고 학장이나 주관자에게 보고하여 처리할 것이다.] 모든 물품은 모두 장부에 기재했다가 사무를
교체할 때에는 후임자에게 교부한다.

17\. 지방관이 주와 현의 교관, 수령(守令)에 대하여 예의로 대우하여 그의 체모를 존중히 할 것이며 무례하게 해서는 안 된다.[매사에 조금도 거만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니 비록
자기 고을의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존대할 것이다.]

18\. 모든 학교의 학장은 선생안(先生案)을 작성하여 두고 모든 전후 재직 선생의 이름과 부임 및 해임 연월을 기재하여 현직자로 하여금 살펴보고 그들에 대한 존경과 교훈을 가지게
할 것이다.

19\. 학빈(學賓)이 있을 때에는 관청과 학교에서 적당하게 하인 1∼2명을 마련하여 그의 수종으로 부리게 할 것이다.

20\. 학교의 하인은 이미 정원수가 있고 일정한 급료가 있는 이상 각자 자기의 직무에 충실하게 하여 오늘날의 작란부리고 해괴한 버릇을 엄금할 것이다.[현재 태학은 일종 명예와
이익을 얻기 위한 장소로 되어 있으므로 밑에 하인들까지도 나쁜 버릇이 생긴 지 이미 오래되어 해괴한 일이 매우 많다 소위 주인(主人)이란 것이 있어 급제한 사람에게 드러내놓고
무례한 짓을 하는바 팔을 끌고 목을 움켜쥐며 옷을 벗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집안에까지 들어가서 그의 가산을 가져오는 등 도적의 행위와 다름없다. 이것도 역시 명색 선비들이 염치없이
욕심만을 부리면서 도리어 '영광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하니 이것이 무슨 풍속인가? 그런데 지방 향교(鄕校)는 이처럼 심하지는 아니한바 그것은 지방 향교에서는 아무 먹을 미천이
없으므로 선비들이 모아들지 아니한 까닭이다. 만일 날림 글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를 폐지하고 지방에서 인재를 추천하는 제도를 회복한다면 자연 선비 버릇이 바로잡히고 규율이 확립되어
이러한 폐단이 점차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폐습을 당장에 전부 고치기는 곤란하니 따로 근신해야 할 조항을 반포하여 구습을 엄금해야 할 것이다.]

21\. 학교 교육을 실시한 뒤에는 점차 향당(鄕黨)에도 학교[庠序]를 설립해야 할 것인바 서울 각 방(坊)에 방의 학교[坊庠]를 설치하며[그 제도는 아래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두 방(坊)이 합하여 학교[庠] 하나를 경영하는데 방의 경상비 중에서 매년 쌀 20석[斛]씩을 지급하여 ― 예에 의하여 콩을 섞어서 춘추에 두 차례에 준다. ― 학교에
보관하여 선생[庠師]이 학교에 있을 때에 제공할 식량 및 학교비용과 학교 수리용 예비금으로 할 것이다. ― 수위하는 사람은 향읍에서 하는 것과 같이 역시 다섯 호씩 떼어주어서
맡기는데 그들의 모든 부역을 면제해준다. 시 외의 것도 이와 같이 한다. 주(州)의 성안에서도 1천 호 이상이 되는 데는 서울의 제도와 같다. 현재 서울에는 동몽(童蒙 ;
아동)교관 6명을 두고 생도들이 교관의 집에 가서 수업하게 하며 그들 교수상 근면 여하를 고사하여 봉급을 가감하고 만 30개월이 되면 6품관으로 승급하는바 이는 현재 시행하고 있는
법령으로서 가장 좋다. 그러나 교관의 집 거리가 고르지 않기 때문에 통학생의 협착한 데가 있는가 하면 보편적으로 되지 못한 데도 있으며 또 교관이 한 동리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조동되어 다니기 때문에 그 형편상 교관과 통학생 사이에 연계가 너무 긴밀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적의 고하를 불문하고 다만 근무 연한만을 계산하여 다 승급시킨다면 역시
관리 승진시키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 효과가 항상 실질적으로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직 지금 그대로 해가다가 학교 교육이 발전됨을 따라 개정할 것이다.] 주와 현의 각
향에[즉 현재의 면임] 학교[庠]를 설립하여[지금도 역시 마을들에는 아이들을 모아 수업하는 데가 있는데 이것을 서당(書堂)이라고 한다.] 아동들을 교육시킬 것이다.[옛적에 집에는
서숙[塾]이 있고 마을[黨]에는 학교[庠]가 있었다. 옛적 당(唐)나라 공(孔)씨[공영달(孔穎達)]가 말하기를 "스물 다섯 집이 한 마을[閭]이 되고 마을은 한 거리[巷]로
내왕하는데 그 거리의 들머리에 문이 있고 문가에 서당[塾]이 있다. 백성들이 집에 있을 때에는 아침, 저녁으로 서당에 출입하여 일상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마을[里]에 사는
사람으로서 도덕이 있고 벼슬하다가 늙어서 집에 와 있는 자를 스승으로 삼았다. 500집을 당(黨)이라 하고 당에는 학교[庠]가 있어 동리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교육시켰다"라고
하였다. 옛날 정한 제도란 참으로 잘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전부 그렇게 정비하지는 못하더라도 각 향의 부형[父老]들을 향중(鄕中)으로 모아 상의하여 학교[鄕庠]를 설립할 것이다.
향중에 학교를 설립하려면 지방관에게 보고하여 그 역사를 협조해 달라 할 것이다. ― 그 면에서 경비와 인부를 준비할 데 대하여 상의할 때에 수령(守令)도 그 수에 적당한 인부를
부역에서 떼어주며 또 국가 창고에서 미곡을 내어줄 것을 규정으로 정해야 한다. 대체 향에서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당지 경상비에서 미곡 20석씩을 주어서 모든 면의
학교를 설립하여 쓰도록 하여야 한다. ―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된 뒤에는 학교 부근에 사는 다섯 집을 정하여 ― 세납 즉 보포(保布)와 부역[頃夫]을 면제해주고 ― 학교의 수위
구역으로 하고 또 그 부근에 있는 원세(原稅) 20석 받는 땅을 면세시켜서 학교에 속하기를 학교전[學田]의 예와 같이 하여 선생의 식량과 교중 경비와 교사[庠舍] 수리비에 보용할
것이다. 모든 지방 학교의 선생은 각각 그 지방의 추천에 의하여 관직 유무를 불문하고 오직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 정하여 지방관[守令]이 우대할 것이며 그가 교육에 있어서 근실하여
성과를 거둔 사람인 때에는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정당히 표창하여 선발 등용할 것이다. 현재 서원(書院)470)이 있는 데는 따로 학교를 설치하지 말고 그것을 그 고을의 학교로
사용할 것이요 사창(社倉)471)이 있는 데는 거기에 붙여서 학교를 세울 것이니 어떻게 하든지 그 지방의리를 따라 정할 것이다.]

지방 학교의 교사[庠舍]는 8∼9칸쯤이면 될 것이니 중간 대청이 3간, 좌우 재실(齋室)이 각 2간, 주방과 창고가 모두 2칸으로 간략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체 지방에
학교를 설치하는 사업을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인재를 고을에서 추천하는 제도가 회복되고 따라서 학교에서 그를 선발하는 성적이 현저하다면 선비들이 요행을 바라고 덤비는
생각이 근절되고 사람마다 실천적으로 행동하기를 분발할 것이며 부형되는 이는 자제에게 대한 교육열이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려는 정도와 같을 뿐만 아닐 것이니 공부할 데가 없어서
도리어 걱정이 될 것이다. 이럴 때에 여러 사람의 희망에 의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하고 또 그들을 고무 협조하는 것이 사업상 적당한 순서로 될 것이다. 학교를 설립한 이상에는 그를
수호할 사람을 두어야 하며 또 면세한 토지를 학교의 재산으로 정하여 영구히 유지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세상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요 또 어려서부터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옳은 일만을 실행하는 일일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비단 학교에서 인재가 배출할 뿐만 아니라 하부의 관원과 아전[里胥]들까지라도 어찌 나쁜 버릇을 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렇게 하면 태평시절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니 훌륭한 정치적 성과를 이룩하는 데는 이것이 담보로 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지방 학교의 선생을 만일 관리 대우로 한다면 국가에서 봉급과 그에 따르는 하인들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니 관원으로 설정하지 말고 현재 동리에 있는
학장(學長) 따위와 같게만 하면 어떻겠는가?"라고 한다. 각각 그 지방의 추천에 따라 정한다면 자연 잘해갈 것이다. 그러나 학교 교육이 발전되면 이왕에 벼슬하다가 늙어서 집에 와
있는 사람으로서 교육에 뜻을 둔 사람도 선생 되는 것을 낙으로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요 모든 고을 학교의 학생 중에서 향교의 책임을 지지 않고 아직 승진되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선생이 될 만한 자가 있어서 향리(鄕里)의 자제들이 자연 성의껏 배우고 또 그들을 성의껏 가르칠 것이거늘 더군다나 발탁하는 특전이 있는 이상 어찌 그들을 격려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제가 배운 것을 연구하며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학교에 있으면서 식량을 공급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점잖은 자로서 수치스러울 것이 무엇인가? 지금 용렬하고 비루한 자들이 먹을
것을 동리 어린 것들에게 얻기 위하여 학장 되기를 애쓰는 자에게 비하면 일의 공사(公私)간으로 보거나 인품의 고하로 보더라도 그 구별이 실로 천양지간(天壤之間)이라 할 것이다.
대체 선비로서 아직 설발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주와 현의 향당(鄕黨)에서 채용할 것이다. ― 향관(鄕官)이나 향정(鄕正)도 모두 주와 현의 관직이다. ― 그렇게 되므로 세상에는
관직은 빈 자리로 있지 않고 인재는 빠짐없이 적용되어 직업을 잃고 허덕이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현재의 서원(書院)은 옛적에 없던 것이다. 대체 후세에 와서 교육제도가 문란해지자 주와 현의 학교가 과거(科擧)와 영예와 이욕을 획득하는 장소로만 되기 때문에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부득이 조용한 데에다 따로 집을 지어 공부하는 곳으로 하였으니 여기에서 서원이 창설된 것이다. 만일 국가에서 진행하는 교육사업이 그 적당한 길로 다시 돌아가서
읍학(邑學), 향상(鄕庠)이 다시 모두 회복된다면 서원에서 배울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원이 이미 있는 이상 학교로 사용하지 않는 데는 역시 그대로
수리하여 관청생활을 하지 않는 양반들의 휴양하는 장소로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라고 한다. 국가에서 이미 고을 학교[邑學]에 학교의 식량과 하인들을 제공하고 학교 토지의 소작인까지
정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에 또 소작인을 마련해주기는 사업과 경제면에 있어서 곤란할 듯하다. 또 서원(書院)은 본래 선비들의 수양을 위하여 창설했고 지방에 있던 유명하던 선생을
거기서 제사를 지내어 그의 고상한 도덕과 유풍을 추모하는 장소이므로 제사만을 지내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 제사만을 위주하여 설치하는 일이 허다하게
있었는데 나중에 당파 싸움이 벌어진 뒤로부터는 하잘것없는 자에게까지 제사를 지내겠다고 여기 저기서 서원을 설치하는 자가 많게 되었으나 이것은 선비들의 풍습이 정당한 방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자연 정리될 것이다. 대체 각 향(鄕)에 따로 학교를 설립하거나 혹은 사창(社倉)과 동일한 장소에 설치하게 하고 거기다 향사(鄕社)를 부설케 할 것이다. ―한(漢)나라의
이사(里社)와 『주례(周禮)』에서 말한 당영(黨禜)이 이런 것이다. ― 이렇게 하면 그 일이 대단히 좋다. 향중에서 유명한 선생으로서 제사지내는 규정에 적합한 이가 있다면 거기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역시 옛적 제도와 방불할 것이니 이것이 소위 '향선생이 죽으면 마을의 사당에 제사 지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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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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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校事目一 京都立太學 選士所居. 又置中學 以待四學 論升之士. 及四學 卽東西南北學. 按大戴禮 古者有太學 有東西南北學. 唐制 亦大學之外 又有四門學. 四學則有內舍 額內生所居.外舍
增光生所居. ○增光生 今稱額外生. ○其制 內舍 在內 分立東西齋. 外舍 在外 亦分立東西齋. 其內外兩舍同一周垣 隔以小墻而開中門. ○今外方鄕校兩班 居東齋. 庶類 居西齋
故西齋雖空而兩班則不肯入. 東齋雖空而庶類則不得入甚爲無理 只宜一體隨便入居 切勿以東西齋室分定等差.一 諸道監營皆置營學. 以待州縣論升之士. ○京畿亦於京營近處置營學. 各州縣 有邑學
邑學則有內舍ㆍ外舍. 其制見上. ○各道營學 與其本邑學 不可各在別處 使相連近以立以便多士之講磨相益. 又監司到學 則宜時時與本邑敎官 合坐邑學儒生 亦通同講讀勸課. 又京城則太學
立文廟而諸學不爲別立. 營邑則營學 立文廟而本邑學 不爲別立.京畿則不別立營學 而畿內州縣所升之士 同入中學使中學之師 專掌其敎監. 都事亦得兼其事 如兼敎授之例. 升士初到則同坐考講. 暇日亦至學中
同其勸勵. 如此亦可 然不如別立營學之盡合條理也.

![도판 4](../assets/09/image-04.jpg)

● 學圖營學太學則無外舍 中學同州縣學 亦聖廟及講堂ㆍ東西齋ㆍ食堂ㆍ典祀廳ㆍ祭器庫ㆍ藏書閣等 皆依式備具. 又構前廊及南樓 傍學又作敎官衙. 凡學校間閣 守令隨毁隨補. 大則報減經費以爲工役之用.
監司每巡審其修弊 以爲糾檢.一 太學長貳 必以道德可尊師者. 大司成 當陞爲正二品. 若一品則稱行 從二品則稱守. 吏曹判書ㆍ大提學例兼知館事與大司成 禮如賓主 司成陞爲正三品. ○中學 置司敎
正三品. (堂上) 司導 從三品. ○營學 監司ㆍ都事 專掌其敎. 監司爲長 都事爲貳. 都事改以參理陞秩 從三品. 諸學之官 亦極擇學業可爲人師者. 四學 置敎導 從四品. 敎授 六品.
勿如今以太學官員兼帶 定爲其學之官 專掌其敎. ○大府ㆍ都護府ㆍ府學敎導而大府ㆍ都護府則正五品. 府則從五品. 郡縣學敎授而郡則正六品. 縣則從六品. ○州縣敎官 皆挈家準任 京學敎官亦必準任
未任滿前切勿遷動 任滿然後 皆考其成效超遷. ○京外諸學官 德學可合者 其階有高下則亦當依行守之例. 一 太學 立尊賢堂. 又立觀光法. 依伊川所定詳見本文. 中學ㆍ營學ㆍ四學ㆍ州縣學 亦置學賓
又立觀光法 略如太學之儀. 學賓 勿論大夫ㆍ士 唯以學行爲諸生所矜式者 以其邑或隣邑之人. ○朱子 任同安縣時 延請徐應中爲學賓 待以賓客之禮 使生徒爲矜式. 此於風化 最爲有益. 其尊禮供待
一視師長. 無其人則闕之.一 學儒額 定以京城四學各一百人. 外方 大府ㆍ都護府 八十人. 府 六十人. 郡 四十人. 縣 二十人. 此乃內舍生. 其增廣生則比內舍各倍其數. 如內舍二十人
則增廣生四十人. 內舍八十人 則增廣生百六十人. ○大府以及郡縣之制 詳見郡縣條.或曰"卽今儒額 京中ㆍ四學各百人. 府ㆍ州皆九十人. 都護府七十人. 郡五十人. 縣三十人. 仍此無妨
何必改定?"曰州縣之制 旣以田四萬頃 爲大府ㆍ都護府. 三萬頃 爲府. 二萬頃 爲郡. 萬頃 爲縣 則儒額多寡之差 自有其宜. 又貢士 每式年 一人或二人. 或二式年 三人. 或間式年 一人則
詳見下. 尤不可不使之相當也. 唯驗之然後 乃可知爾.或又曰"今西北邊及嶺西曠僻等處 土地雖少 而或有爲邊方鎭管特陞爲州ㆍ府者 如此等邑 其儒額之數 宜如何? " 曰邊方與鎭管不可爲小邑
則當使土地之實與名相稱 徒陞虛名 何益於事 釐定郡縣之後則自無此弊. 若未釐定則雖是名爲州ㆍ府 一依本等 如一萬頃依縣. 二萬頃依郡. 以定 而其學田 公糧ㆍ典僕之數 亦當視此定之.或又曰"增廣生
勿限其數 爲合於施敎無窮之意 如何?"曰此似可矣 而但增廣生 本以備內舍之選者也 不可過多. 若無其限 終必有敝 靡難振處 唯遠覩然後 可見也. 夫旣設閭塾ㆍ黨庠 則非獨爲士者有敎 天下之民
無不敎之人矣. 至於州ㆍ縣之學則擇庠ㆍ塾之秀以入 已非小學之比 士ㆍ民之辨 於茲始焉. 旣有等位則不可無分數. 夫聖王之政 敎化無窮盡 而等位有分數 此自然不易之理. 試觀天地之化 無窮而亦莫不有節.
唯其有節 所以能成無窮也. 若不有節 所謂無窮者 將不得成無窮也.或曰"學校儒額 旣有定數則後雖敎化大行 人才盛多 亦無增額否?"曰同是天民而有士ㆍ民之別者 卿ㆍ大夫ㆍ士 皆所以治斯民者
故常選其尤者而已. 敎雖大行 猶患人才之不足 過盛 非所憂也. 然誠使天下之人比屋可封則將增置其位 盡並爲卿大夫乎? 士雖未仕 亦以選置以待用者 故有位有數 士之不可隨人增額
亦猶大夫之不可隨人增數也. 曰"是誠然矣 但人才盛衰 郡邑或殊 此郡所餘 不無愈於彼郡所選者 亦無許其遷移否?"曰此則公私 俱無不可. 古之君子 亦有出疆載質之事 農民 又有樂遷寬鄕之法.
在士願遂行業之意 自無所嫌 而國家均盛敎化之道 在所當許. 是以法令 人士寓居者 亦許入學.一 流寓士子居其地者 亦令入學. 流寓 有志學者則本土之士 亦當樂得朋友以相就學業. 如或有爭其額位
不肯許入者 自有妬賢忌人之罰.一 州ㆍ縣敎官 亦定其常祿 祿數 見祿制 以本處經費會減. 定其吏隸. 吏隸數 見職官條. 吏隸 亦皆有廩. 並見祿制.一 州ㆍ縣學 皆定儒生公糧. 大府ㆍ都護府
米三百四十五斛六斗 府 二百五十九斛二斗. 郡 一百七十二斛八斗. 縣 八十六斛四斗.各有數 每月朔支下. 儒生 分五番 每十二人幷一朔米七斛二斗. 一人日二升. 若儒生未滿數則計減. 有閏月則加下.
以本邑經費會減. ○敎官及學中儒生 支供所用柴炭等 以本邑田總所納 畫給. 詳見祿制.或以爲增廣生則自備糧爲宜. 在今思之 故如此. 若初頭則民制未成 姑令如此 可也. 若以爲定規 有所未盡 試使行之
自可知其得失矣.一 州縣 皆置學田. 大府ㆍ都護府 原稅四百八十斛地. 府 三百七十斛地. 郡 二百六十斛地. 縣 一百五十斛地. 各有定 每歲依年分收稅. 制田及收稅式 詳田制. 守令 敎官 總之
有司 掌其事以爲學中公需. 凡儒生所供鹽ㆍ醬ㆍ魚ㆍ菜ㆍ燈油及學賓支供 諸生大祭齊會時 所供及學中書冊ㆍ紙筆ㆍ器用ㆍ齋室鋪陳之類. 稍存贏餘 定爲規畫以備凶歉 官員ㆍ有司 不得一毫私費.
若祭服ㆍ祭器改備 則量其容入 以府ㆍ郡ㆍ縣爲差定數. 又酌定改備年限 每及其年以本邑經費會支 使之隨宜措備. 凡郡ㆍ縣諸祀服用 皆同此. ○凡學校垣外 僕隸所居地 屬於學校 免稅兵 詳見田制.
學校僕隸 亦有定數 有常祿 詳官制祿制.或曰"今外方校田ㆍ校僕不足處 甚多 未有可出之路 如有校生願納田ㆍ民 免汰講者 限充數間 依今例聽許 亦或可耶?"曰爲國自有其道 豈可如是弊 弊苟且哉?
蓋公田之法 旣行而吏僕 皆有常祿則自無此患 而處處均足矣.一 太學ㆍ營學儒士 供饋及諸需 皆以經費依例會支. 營學亦以本處經費會減. ○其糧料則以田稅會下. 其餘供費則以田稅或雜稅會下.
皆有定數定式. ○中學ㆍ四學同.一 學番生 常供 則一日兩時. 諸生大祭祀ㆍ齊會時 則供兩日. 凡食時 鳴鼓就食堂以齒序坐. 內ㆍ外舍生 異行. 不得開一言. 食訖 以次起. 凡學中 皆不得私相會集
設酒食.一 京ㆍ外學 擇典僕中勤幹謹飭者二人 爲掌務 分二番相遞. 監管諸生供饋. 檢擧廚子 如各官官廳禮房. 若京學及州ㆍ府學則量加人數. 每食堂時 有司親嘗 如今太學掌務官之爲.
○凡食堂鳴鼓飯排節次 皆依今太學例.師長 時時親視. 太學 今制已備 當遵依. 營學 諸學 同此.一 京ㆍ外學 多藏經籍. 唯雜談及非聖之書 勿許藏置. 凡娼妓 巫覡之類 切不得往來近處.今國中
經書則幾於比家有之 而歷代全史 則絶不行世. 此等書 亦宜印出廣布 使京ㆍ外學校 皆得藏儲.一 凡學校 皆傍設射圃. 卽射場 京外 皆然.一 太學長貳 京ㆍ外學校官 初上任 師生相見 皆定其儀.
師長初到 諸生齊會 (免番生則否.) 祗迎於大門之外. (學門外數十步 有下馬臺 師長下馬 諸生 乃鞠躬祗迎於門外路西.) 師長 詣聖廟庭 執事 開中門 師長 再拜陞上香降再拜 還至講堂北壁席坐.
諸生入庭序立. 內舍生 爲一行 而掌議ㆍ有司ㆍ直月 居前. 增廣生 爲次行 皆北向東上 以齒爲序 人多則各爲重行. 立定 直月 立呈擧案 該吏 請受 進呈于師長 師長 受而目之. 於是諸生以次陞
自西階堂上 北向序立 如庭立之次 皆再拜. 師長坐自如 諸生 乃退. 貳官初到 亦同. 但貳官與上官 行相會禮於堂上長官 仍北壁 貳官 東壁坐 諸生 北向拜. 監司ㆍ都事 初上任 視營學. 守令
初上任 視學 皆同. 京ㆍ營學ㆍ中學ㆍ四學 則無拜聖儀. ○免番生則不參齊會 追後 各具剌入見 如常儀. ○太學長貳 巡諸學. 中學長貳 巡四學. 監ㆍ都事 巡列邑學 亦如上禮. 但諸生拜時 立受
旣拜 一揖以答之. 凡巡講汰講則免番生 亦齊會. ○諸學生 當朔 往參太學焚香. 與太學生同參則太學長貳 無答揖. 附營邑學生於營學 亦倣此.或曰"敎官無答揖 而監司 反有答揖 何也?"曰古者
雖上下之分甚嚴 而禮無不答 况國家設學 本以明道養賢 故待士之禮 不施以爵位之等級 而優以重道之義 敎官之無答揖 所以嚴師也. 嚴師 所以尊道也. 使臣之答揖 所以待士也ㆍ待士 所以重道也. 敎官
實主敎養 其禮 不可以不嚴. 師不嚴 道不尊. 道不尊 人不知敬學矣. 監司雖曰亦有師義 但主考察之任 而實非平居主敎之官. 且其尊隔等 若無答禮 是重道之意 終無所著 而人不知尙學矣. 二者雖若相反
而其義 一致而禮之皆當者也. 蓋爲國之道 以崇德重道爲本. 故待士之禮 自異於臨軍民之禮耳.一 京ㆍ外學 以諸生中衆所推服 年長學行優特者一人 爲掌議. 又擇二員 爲有司. 又輪選二員 爲直月.
掌議ㆍ有司ㆍ直月 館學及州ㆍ府學則量加員數. 掌議 非有 大段事故 不遞. 有司ㆍ直月 皆一年相遞. 凡學中議論 掌議主之 稟于師長而定之. 凡物出納及學僕使喚 書冊什物
有司掌之.凡學校僕隸學事ㆍ齋事外 毋得人人私使喚. 其治罰等事 有司ㆍ掌議 主之. 重則稟于師長而處之. 諸生則不可私擅 告于師長及主者而處之.凡物 皆有籍 遞時 交付代者.一 州縣敎官 守令
待以客禮 尊其體貌 不得無禮. 凡事不得小慢 雖其邑人 必尊禮之.一 諸學師長 置先生案 錄前後任人 幷書任遞年月 使當任者 有所考閱而欽戒.一 有學賓則自官中ㆍ學中 隨宜除出僕隸一二人
以爲其陪徒.一 學僕 旣有定額 有常祿 宜令各恭其職 痛革卽今頑悖可駭之習. 今太學 但爲聲利之場 故下至僕隸 亦習非已久 極多駭愧之風. 所謂主人者 則公然無禮於登試者 不但提臂扼吭 赤脫衣袴.
又爲突入家中 撤其家産 有同劫賊. 是亦士流嗜利無恥反以爲榮而然 此何等風俗也? 外方鄕校則不至於甚 以鄕校無所於取利 而士不之居故也. 若廢詞科 復貢擧則自然士習 正而紀綱立 此等諸弊將漸袪矣.
然積世痼習 漬染心目 難以盡革 另宜申飭敬謹之節而痛禁舊習也.一 學敎旣興 漸設庠序 京中諸坊 設坊庠.其制見下. 但二坊 合置一庠自經費歲支米二十斛(依例參豆 春秋支下.)
屬之庠以爲庠師在庠糧及庠中緊需庠舍修葺之備. (護直人則同鄕制 亦五戶 盡免諸役. ○郊外同鄕制. 州府城中滿千家以上者 同京制.) ○今京中 設童蒙敎官六人 令童蒙就其家受學
考其敎之勤慢而上下其祿. 滿三十朔 陞遷六品. 此在今法中爲好然所居不必均則來學者 狹而不遍 只是遷轉之官 而非同里人則情勢 疎而不相係. 無論善否計朔皆陞 則亦非官叙之道 故其效 常淺而不實
姑且仍今 以待庠序之興而改之. 州縣各鄕 卽今之面.設鄕庠 今亦鄕里間 或有童蒙誦業之所 稱爲書堂. 以敎童學. 古者家有塾 黨有庠. 唐孔氏謂"二十五家爲閭 閭同一巷 巷首有門 門邊有塾.
民在家之時 朝夕出入 恒受敎於塾. 里中之有道德 仕而年老退歸者 爲之師. 五百家 爲黨 於黨中立庠 敎閭中所升也."至矣先王之制也. 今縱不能一齊整備 宜令各鄕父老 會議鄕中相宜 立鄕庠. 將立庠
鄕中狀告 守令量助其役 (鄕中議聚財丁 守令亦報使量給頃夫. 又報使給官儲米穀. 此則定規. 凡鄕有創立庠舍者 會減經費給米二十斛 諸面 遞年以施 可也.) 旣成定復其傍戶五夫 (免其保布頃夫之役)
爲其護直. 又以附近 定免原稅二十斛地 屬之庠 如學田例 以爲其師在庠糧及庠中緊需 庠舍修葺之備. 凡庠學之師 各從其鄕所推 勿論官秩有無 唯以學識 守令優以禮待. 其敎誨不倦 有成效者 論報監司
量加▩擢. ○今有書院處 不必別立 因以爲其鄕之庠. 其立社倉處 於其一處 連立鄕庠 幷從其鄕所便宜.庠舍 不過八九間 中堂三間 左右齋室 各二間 廚ㆍ庫幷二間 務從簡省 可也. 凡立鄕庠
不可强令立之. 若貢擧旣復 而鄕里學校之選 著則士絶徼倖奔趍之望 人人 爭奮於行實. 父兄之欲敎其子弟者 不啻飢渴之爲願 而顧無講學之所. 於斯時也 因衆之願而論令立之 又從而興助之.
此其事爲次第之宜也. 庠舍旣立則爲之置護直之人 又定免稅屬之庠 使之永久不廢. 如是則天下 無不敎之民 而從小習聞 無非行義之方 不但學校人才 蔚然羣出 下至官吏里胥 寧有奸偸之流乎. 時雍可封之俗
其可致矣 至治之成 此其本基.或曰"庠學之師 若欲設官則廩祿ㆍ僕隸 有不能給. 不爲設官 不過如今閭里學長之爲奈何." 曰各從其鄕所推 則自能盡善 苟學校興行則旣仕老休而有志敎育者 亦將樂爲之師
而凡學儒免番之未陞者 皆可爲師. 鄕里子弟 敎之受之自易以誠 而况有▩擢之典以勉之乎? 又推所學以誨人而留庠舍 食庠糧 皆所當然者 豈君子之羞乎. 其與今庸鄙賤流 私自謀食於閭閻小兒 而求爲學長者
公私高下之別 不啻天壤之間矣. 蓋士之未升者 亦用之於州縣鄕黨(鄕官ㆍ鄕正 亦皆州縣之職.) 故天下 無廢職 無遺才而亦無失所之人也. 今之書院古所未有. 蓋後世敎失 州縣學校 止爲科擧聲利之場
有志之士 不得已於閑僻處 別立精舍以爲講業之所 此書院之所以興也. 若國家 所以敎者 旣復其正而邑學ㆍ鄕庠 皆已修擧 則無所事於書院矣. 或以爲書院 今旣有之則其有不爲鄕庠者 亦且仍修
以待休居士夫之游息爲好. 國家 旣贍邑學糧廩僕隸 又定鄕庠田丁 於此又畫田丁 恐非事力之所能及也. 又書院本爲士子藏修而作 其有鄕賢則因以祀之 以爲報德表式之地耳 非端爲祭祀設也.
而近世往往有爲祠祀而立者. 及至黨論成風 則又多不合祀而祀 爭立書院者. 此則士風敦厚之後 自能稱停之爾. 蓋各鄕旣立鄕庠 又令社倉 同設一處而置鄕社. (漢有里社 如周禮黨榮.) 如此則其事恰好
如有鄕賢合祀典者則祀於此 亦近古意. 所謂鄕先生 沒而可祭於社者 是歟.隨錄卷之九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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