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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한나라 때부터 지금까지의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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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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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한나라 때부터 지금까지의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

한고조(漢高祖)는 초기에 미처 제도를 수립하지 못하고 11년에 가서야 비로소 조서를 내리기를 "대체 듣건대 착한 정치를 수행한 임금으로서는 주문왕(周文王) 주문왕(周文王)：무왕이
중국에서 주나라를 건국한 후에 아버지 희창(姬昌)을 추존한 시호.

보다 더 나은 자 없고 술책으로써 여러 나라를 제압한 임금으로서는 제(齊)나라 환공(桓公)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훌륭한 일꾼들을 만나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지금 세상이라 하여 훌륭한 사람의 지혜와 재능이 어찌 옛사람만 못하다는 법이 있을까? 다만 병통이 임금 된 자가 그들과 접촉하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만일 훌륭한 인사들이 즐겨
나와 함께 교유할 자가 있으면 나는 그를 존경하고 발전시킬 용의가 있으니 전국적으로 공포하여 나의 의도를 명확히 알게 하는 동시에 훌륭한 덕행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가 있으면
지방관이 반드시 직접 권고하여 수레에 태워다가[어진 자가 있으면 군수(郡守)가 스스로 권면(勸勉)하여 수레를 태워 보낸다.] 상국부(相國府)에 보내어 이력과 연령을 등록하게 할
것이다.[행장(行狀)과 연기(年紀)를 이름이다.] 만일 이런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때에 보고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발각되는 대로 철직을 적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발각되면
그 벼슬을 파면시킨다.]

혜제(惠帝) 4년에 조서를 내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농업에 노력하는 자에게는 그의 국가 부역을 면제해주게 하였다. 문제(文帝) 15년에 지방과 중앙의 최고
장관들에게 명령하여 도덕적으로 우수하며 곧은 말로 임금의 과오를 시정시킬 수 있는 자를 추천하라 하였다.

무제(武帝) 초기에 동중서(董仲舒)가 왕의 질문을 답변한 글에 이르기를 "저의 견해로는 각 지방의 장관들로 하여금 매 사람마다 자기 관하에 있는 관리나 백성들 중의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매년 두 명씩 추천케 하여 궁중에서 수직하는 임무를 부여하며 또 대신으로서 인재를 잘 추천하는 자는 상을 주고 옳지 못한 사람을 추천하는 자는 벌을 주도록 할 것입니다.
대체로 이렇게만 한다면 지방관들이 모두 인재를 탐구하는 데 온갖 열성을 다하게 될 것이며 전국의 인재들을 벼슬에 등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무제가 즉시 한 고을을
단위로 하여 각각 효행 있고 청렴한 자 1명씩 추천하라고 명하였다. 조금 있다가 이것을 규정으로 제정하여 고을로서 인구 20만 이상인 데는 해마다 1명씩을, 40만 이상인 데는
2명씩을, 60만인 데는 3명씩을, 80만인 데는 4명씩을, 100만인 데는 5명씩을, 120만인 데는 6명씩을, 20만 미만인 데는 2년에 1명씩을, 10만 미만인 데는 3년에
1명씩을, 선발 추천케 하였다.[지금 한(漢)나라 때의 호구(戶口)를 추산하여 보면 1년에 바치는 사람이 200여 명에 지나지 못한다.] 그리고 선발과목을 네 가지로 지정하였으니
첫째는 도덕과 행실이 고상하고 깨끗하며 지조가 청렴 결백한 것이요, 둘째는 학식에 정통하고 품행이 세련되었으며 경전의 지식이 박사(博士)에 적합한 것이요, 셋째는 법령에 밝아서
애매한 것을 해결할 만하며 제기되는 의견을 참작하고 질문을 해명하여 문장이 어사(御史) 자격에 적합한 것이요, 넷째는 의지가 견고하고 지략이 많아서 사업에 임하여 당황하지 않으며
총명이 사물을 판단할 만하고 재능이 삼보(三輔) 현령(縣令)을 맡길 만한 것이다.

원광(元光) 5년에 다시 명령하여 하부 관리나 백성 중에서 현 시기의 임무에 정통하고 성현들의 학술을 습득한 자가 있으면 소집하여 올려 보내되 현마다 연달아 식비를 공급하여
계부사(計簿使) 계부사(計簿使)：중국 고대에 지방에서 추천 선발한 인재를 서울로 데리고 가던 사신.

와 동반하여 오게 하라 하였다.[계(計)라 함은 계부(計簿)를 나라에 올리는 사자(使者)이다. 군국(群國)은 해마다 계부(計簿)를 서울에 보내어 올리는데 나라에서 부른 사람과
계(計)가 함께 오고 고을 차례로 식사를 공급한다.] 원삭(元朔) 원년(元年)에 또 조서를 내리기를 "자애를 기본으로 하고 정의에 입각하며 도덕을 표창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록하며
선량을 장려하고 포악을 처벌한 것들은 오제삼왕(五帝三王)의 정치가 융성하게 이룩한 기본이다. 그러므로 해당 일꾼에게 명령하여 청렴하고 효행 있는 사람을 추천함으로써 좋은 기풍을
조성할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대체로 아주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직하고 신의 있는 인사가 있는 것이요, 세 사람이 동행하는 데도 반드시 내의 선생이 있는 법이다. 지금 더러는 전
군(郡)을 치고도 한 사람을 추천하지 않은 데가 있으니 이것은 내의 덕화가 밑으로 침투되지 않아서 많이 세련된 우수한 인물들이 위에로 알려지지 못한 까닭이다. 지방 장관은 윤리적
미풍을 지도하는 책임이 있는 것인데 이러고야 앞으로 어떻게 내가 목적하는바 '엄폐된 것을 밝히고 백성들을 고무 격려하여 향촌에 중점을 두라!'는 교시를 대행하겠는가? 또 인재를
추천하면 높은 상을 받고 인재를 숨기면 큰 벌을 받는 것이 옛날의 법칙이었다. 지방 장관과 예관(禮官) 및 박사들과 토의하여 효행 있고 청렴한 인재를 추천하지 않는 자는 처벌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해당 관리들이 아뢰기를 "옛날 지방 장관이 인재를 추천함에 있어서 한 번 옳은 사람을 추천하면 '도덕을 좋아한다[好德]'고 말하고, 두 번 옳게 추천하면
'현명한 사람을 훌륭하게 대접한다[賢賢]'고 말하고, 세 번 옳게 추천하면 '공로가 있다[有功]'고 말하여 구석(九錫) 구석(九錫)：봉건시대에 황제가 유공한 신하에 대하여 특별히
주는 수레, 의복, 의장병, 무기 등 아홉 가지 물건.

으로 상을 주었으며[두우(杜佑)는 말하기를 구석(九錫)은 경(經)에 본시 글이 없고『주례(周禮)』에는 구명(九命)이라 하고 『춘추설(春秋說)』에 있는데 구석(九錫)으로 물(物)을
갖추는 것은 패자(覇者)의 성(盛)한 예(禮)로서 제환공(齊桓公)ㆍ진문공(晋文公)도 오히려 능히 갖추지 못하였거늘 이제 세 번 어진 이를 드리고 곧 받는다 하니 이는 그렇지 아니할
듯하며 마땅히 어진 이를 드린 상(賞)을 받을 것이다.『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이르기를 세 번 적(適)함을 공(功)이 있다 일러서 거복궁시(車服弓矢)를 준다고 하였다.] 반대로
인재를 추천하지 않을 경우에는 첫 번이면 작위를 회수하고 두 번이면 영지를 삭감하고 세 번이면 작위도 토지도 다 없애버렸습니다. 대체로 하부와 융화하고 상부를 기만하는 자는 죽어
마땅하고 상부에 아첨하여 하부를 기만하는 자는 형에 처하며 나라 정치에 참가하면서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 자는 배척하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인재를 등용하지 못하는 자는
축출해야 할 것입니다. 효행 있는 인재를 추천하지 않는 것은 임금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니 응당 불경(不敬)죄로 논하는 것이 해당하며[그 선비를 구하여 나라에 보답(報答)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청렴한 인재를 선발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니 의례히 면직시켜야 합니다"라고 하니 무제가 상주문의 옳은 점을 승인하였다.

한나라 제도에서는 모든 지방들에서 모두 자체로 자기에게 필요한 관속들을 임명할 수 있었으며 또 소속된 관속이나 부서 내의 우수한 자들을 조사하여 '수재(秀才)', '염리(廉吏)'로
추천하여 중앙에 올려 보내는데 그들 중에는 장관[郞]으로 임명된 자가 많았다. 그들을 삼서(三署) 삼서(三署)：중국 한나라 때 오관(五官), 좌우(左右), 중랑장(中郞將)이 있던
관서.

에 배치하되 일정한 정원이 없어서 때로는 천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모두 광록훈(光祿勳) 광록훈(光祿勳)：중국 한나라 때부터 내려오면서 궁중의 의식을 맡기도 하며 때로는 국왕의
조서와 명령에 관한 자문에 응하기도 한 관직명.

에 속하였었다. 그러므로 광록훈에는 향교(鄕校)에서 지방 수령들이 놀고 앉아서 임금의 임명 내리기를 대기하기도 하고 혹은 지방에서 추천 인원을 보내는 수레와 조정에서 특별히
불러오는 인재를 태워 오는 수레들이 모두 차 있었다. 광록훈은 다시 삼서 가운데에서 낭관들을 전형하기도 하며 그 중에서 해마다 '수재'와 '염리'를 추천하여 다른 관직으로 이동시켜
결원을 보충하기도 하였다.[후한(後漢)의 제도도 이와 같다.]

원삭(元朔) 5년에 명령하기를 "박사관(博士官)의 관제를 두어 그에게 제자 50명을 주는 동시에 그에게 국가적 부역을 면제한다. 태상(太常) 태상(太常)：중국 한나라 때
종묘(宗廟)에 관한 의례를 맡은 관직명.

에서는 백성 가운데 나이 18세 이상으로서 외모가 단정한 자를 선발하여 박사관에 보충한다. 군과 현 또는 읍들에서 만일 학문을 좋아하고 어른을 존경하며 정령을 준수하고 향촌에
친목하여 그의 가정과 사회에서의 행동이 과연 들리는 말과 틀림없는 자가 있다면 군과 현의 관리들을 시켜서 자기의 소속 장관에게 올려 보내며 장관은 그 중의 가합한 자를 선발하여
항상 계부사(計簿使)와 함께 태상으로 파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게 하고 일 년에 이어 고사를 진행하여 한 가지 재능 이상을 통달한 자는 문학에 보충하거나
유고 결원자의 직무를 맡게 한다. 그들 중 최우등으로서 낭중(郞中) 낭중(郎中)：중국 각 시대에 있었던 중앙기관의 관직 이름.

에 해당될만한 자가 있으면 태상에서 문건으로써 즉시 '특이한 재능이 있어서 초월하기 때문에 명단을 올립니다'라고 주달할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거나 재간이 없어서 한
가지 기능도 소유하지 못한 자가 있다면 즉시 파면시키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를 처벌하라'고 요청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제(元帝) 때에 조서를 여러 지방관들에게 내려 수재를 천거하라 하였더니 간의대부(諫議大夫) 장발(張勃)이 대관(大官) 헌승(獻丞)인 진탕(陳湯)을 추천했었다. 그 후 탕(湯)이
죄에 걸렸기 때문에 발(勃)이 그의 연루로 200호에 해당하는 봉호[戶]를 떼우고 그 짬에 그가 죽었기 때문에 나쁜 시호로 "목후(繆侯)"라 불렸으니[그 천거함이 옳은 사람을 얻지
못한 까닭에 나쁜 시호를 주었다.] 이는 인재 추천자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에 문제(文帝), 경제(景帝) 이후로 관리는 적임자를 만나게 되고 지위는 반드시
오래도륵 안전하게 되었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한광무(漢光武)：중국 한고조가 건국한 나라―서한(西漢)이 망한 후에 한나라를 회복한 임금 유수(劉秀).

가 조서를 내려 "삼공(三公) 삼공(三公)：중국의 관제에 있던 태보(太保)ㆍ태부(太傅)ㆍ태사(太師)로서 중앙정부의 최고 관직인데, 조선의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과 같음.

은 수재[茂材] 각 한 명과 염리(廉吏) 각 한 명씩을 추천하며 좌우 장군은 해마다 염리 각 두 명씩을 선발하며 광록훈은 해마다 낭(郞), 수재, 사행(四行) 사행(四行)：후하고
순박하고 겸양하고 검약한 행동.

을 각 한 사람씩 추천하고 염리 세 사람씩을 선발하며 중이천석(中二千石) 중이천석(中二千石)：한나라 때 매월 곡식 180석의 녹봉을 받던 지방 장관의 등급 칭호.

은 해마다 염리 각 한 사람씩 선발하며 정위(廷尉), 대사농(大司農)은 두 사람씩을 선발하며 군대를 통솔한 장군들은 매년 염리 각 2명씩을 선발하며 감찰어사(監察御史)와 지방
장관[司隸州牧]들은 매년 수재 각 한 명씩을 추천하라!"하였다.[전한(前漢)에서는 수재(秀才)라 일렀는데 후한(後漢)에서는 광무 황제(光武皇帝)의 휘(諱)가 수(秀)이므로 그를
피한 연고로 무재(茂才)라 일렀다.] 당시의 선거 사업은 지방 고을의 것은 공조(功曹)에, 삼공 아문의 것은 동서조(東西曹)에, 천대(天臺)의 것은 이부조(吏部曹)에 소속시켜
진행하였는데 상서령(尙書令)이 전부 통솔하였었다.[성제(成帝) 때에 처음으로 상서(尙書) 오조(五曹)를 두고 장주(章奏)에 대한 일을 통틀어 맡으니 일(一)은 이르기를
상시조(常侍曹)이니 공경(公卿)의 일을 맡고, 이(二)는 이르기를 이천석조(二千石曹)이니 군국(郡國)의 일을 맡았다.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르러 상시조(常侍曹)를 고쳐서
이부조(吏部曹)를 삼고 선거하는 일을 맡으니 이가 이부(吏部)의 법(法)이 말미암아 비롯한 곳이다. 이때에는 상서(尙書)가 비록 조(曹)의 이름은 있으나 호(號)를 삼지 아니하고
상서령(尙書令)도 처음에는 심히 벼슬 차례가 낮더니 그 뒤에 점점 중(重)해지고 광무제가 친히 이직(吏職)을 총령(總領)하고 삼공(三公)에게 맡기지 아니한 까닭에 권세가 상서에게
돌아가고 이에 상서령이 정승의 직임(職任)이 된 것이다.] 당시 고을 수령[郡國守相]으로서 사업에 착수한 지 만 1년이 못되었으면 효행 있는 인재와 염리를 추천할 수
없었다.[이때에 징소(徵召)하고 천거하고 하는 사람은 모두 특별히 임명하고 다시 고시(考試)를 하지 아니하니 선비들이 혹 세상을 속이고 거짓을 꾸몄다. 장제(章帝)의 초년에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향거(鄕擧) 이선(里選)은 반드시 공로를 쌓아야 하는데 지금 자사(刺史)ㆍ수상(守相)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밝히지 못하니 이미 재능이 나타나서
적당(適當)함이 아니거늘 그에게 정사(政事)를 맡기는 것은 매우 사리에 맞지 못함이다. 매양 전대(前代)에서 사람을 들고 선비를 바치고 함을 찾아 보건대 혹은 농토(農土)에서
일어나서 벌열한 문벌이 없으되 주달(奏達)하기를 말로써 하면 문장을 취할 만하고 명시(明試)하기를 사공(事功)으로써 하면 다스림이 특이한 성적이 있으니 짐(朕)이 매우 아름답게
여기노라"하고 이에 다시 전한(前漢) 승상(丞相)의 옛 법을 써서 네 과목(科目)으로써 선비를 부르고 옳지 못한 사람을 천거하거나 또 천거하지 아니하거나 하는 자는 죄를 주었다.]

순제(順帝) 양가(陽嘉) 원년(元年)에 상서령 좌웅(左雄) 좌웅(左雄)：중국 후한 때의 저명한 정론가.

이 건의하기를 "인재를 추천 선발하는 제도를 개혁하되 연령은 40세 이상 된 자에게만 허하여 유학자[儒者]에게는 경전으로 시험하고 문서 일꾼[文吏]은 그의 문장 능력으로 고사하되
그 가운데에서 만일 수재와 특별한 행실이 있는 자가 있으면 연령에 구애하지 말 것입니다" 하였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호광(胡廣) 호광(胡廣)：중국 후한 때 태부(太傅) 벼슬을
한 사람.

이 논박하여 말하기를 "인재를 추천하는 것은 그의 재능에 의거할 것이고 일정한 제도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한나라는 주나라와 진(秦)나라를 계승하여 도덕과 술책을 참고하여 섞어서
대대로 정치를 해 왔으니 함부로 변동을 말아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순제가 마침내 좌웅의 주장을 채택하였다. 이에 좌웅이 아뢰어 말하기를 "지금 고을에서 추천하는 효행 있는 자나
염리는 옛날의 공사(貢士)와 같은 것으로서 일단 출세하면 백성의 수령으로 되어 도덕적 교양을 발양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앞뒤가 막힌 우매한 인간이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나이 40에 의지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예기』에 '벼슬할 만한 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효행
있는 자와 염리들의 나이가 40 미만이면 선발 추천을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추천을 받은 뒤에도 모두 먼저 삼공 아문에 나가서 전체 응시케 하되 선비에게는 가정의
규범[家法]을 시험해 보고 문서 일꾼에게는 각종 형식의 문장을 시험해 보고도 또 단문(端門; 어사대이니 복시를 보는 곳)에서 복시를 거쳐서 그의 실력 유무와 특수한 재능의 소유
여부를 관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게 할 것입니다. 만일 이 규정에 순응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치죄할 것이며 그 중에 뛰어난 재능과 특이한 행실이 안연(顔淵) 안연(顔淵)：공자의
제자 안회(顔回). 연(淵)은 그의 자(字).

과 자기(子奇) 자기(子奇)：중국 한나라 때 열 여섯 살에 아(阿) 땅의 원이 되어 정치를 잘하였다는 사람.

같은 자가 있다면 연령에 구애하지 말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각 고을에 이런 취지를 하달한 결과 이듬해 제음(濟陰) 태수(太守) 호광(胡廣) 등 10여 명이 모두 사람을
잘못 추천한 죄로 철직을 당하고 오직 여남(汝南) 지방의 진번(陳蕃) 진번(陳蕃)：중국 후한 때 태부 벼슬을 한 사람.

과 영천(潁川) 지방의 이응(李膺) 이응(李膺)：중국 동한시대 저명한 유학자.

등 30여 명이 낭중(郎中) 벼슬의 임명을 받았다. 이때로부터 지방관들이 움씰하여 감히 되는 대로 인재를 추천하지 못했다. 좌웅이 상서의 직책에 있으면서 영가(永嘉) 연간에
이르기까지 십여 년 동안에 선발한 것이 공정하여 많은 인재들을 선발해 내었다. 태사령(太史令) 장형(張衡) 장형(張衡)：중국 후한(後漢) 때 문장가이며 천문의기(天文儀器)와
지동기(地動機)를 제작하였으며 『주역훈고(周易訓誥)』를 지은 사람.

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처음부터 효자와 염리를 선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200년 동안에 언제나 효행을 선차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실천하고서 여유 시간이 있으면
비로소 문학과 법률을 공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령에는 문장에나 능하고 상소문을 잘 작성하는 것에 국한시켜 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효행에 특이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응시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이는 근본을 폐기하고 지엽을 택하는 것입니다. 증자(曾子)는 효행에 우수하였지마는 실지는 두뇌가 명석한 편이 못되어서 문학은
자유(子遊)ㆍ자하(子夏)보다 못하였으며 정치는 염유(冉有)ㆍ계로(季路)보다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사람에게 이 두 가지를 겸하도록 하였으니 혹 겉으로는 볼 만한 것이 있다
해도 속으로는 틀림없이 결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영화(永和) 때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무용(武勇)하여 장수를 맡을 만한 자를 천거하라 하니 좌웅(左雄)이
사례교위(司隷校尉)가 되어 풍직을 천거하여 장수를 맡기더니 풍직(馮直)이 일찍이 뇌물을 먹고 죄를 받았다. 상서(尙書) 주거(周擧)가 이 일로써 좌웅을 탄핵하여 아뢰니 좌웅이
말하기를 조서에 무용(武勇)한 자를 선거하라 하고 맑고 높은 자를 선거하라고는 하지 아니한 것이라 하니 주거가 말하기를 "조서에 군(君)으로 하여금 무용한 자를 선거하라 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선거하라고는 하지 아니한 것이라"하였다. 주거는 본시 좌웅의 천거한 사람이기로 좌웅이 말하기를 "군(君)을 천진(薦進)한 것은 내가 스스로 나를 침이로다"하니
주거가 말하기를 "옛적에 조선자(趙宣子)가 한궐(韓厥)을 맡겨서 사마(司馬)를 삼더니 한궐이 조선자의 하인을 죄로써 육형(戮刑)하거늘 조선자가 여러 대부(大夫)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축하할 만한 일이라 하였다. 이제 군이 나를 부재(不才)하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그를 천거하여 정부(政府)에 올리니 나는 감히 군에게 아첨하여 군의 부끄러움을 만들 수는 없노라.
군의 뜻이 조선자와 다른 줄을 깨닫지 못하노라"하였다.

좌웅(左雄)이 기뻐하며 사례(謝禮)하기를 "이는 나의 허물이라"하니 천하가 이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을 모두 어질게 여겼다.]

한안(漢安) 2년에 황경(黃瓊) 황경(黃瓊)：중국 후한 때 처사(處士)의 몸으로 발탁되어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른 사람.

이 상서령이 되어서 좌웅(左雄)의 주장한 효렴의 선발은 유학과 문학 및 관리의 실무안을 표준하는 것이므로 인재를 등용하는 원칙에서도 완전하지 못한 바 있다 하여 글을 올려 효제
또는 행정 실무를 증가시켜 네 가지 과목으로 만들었다.[범화(范曄)는 말하기를 "옛적에는 제후(諸侯)가 선비를 바쳐서 어진 이를 드리면 상상(上賞)을 받고 어진 이가 아니면
작(爵)과 땅을 폄(貶)하며 사마(司馬)에게 올려서 그 재주를 변론하고 논(論)함이 정한 연후에 벼슬을 시키고 벼슬을 맡긴 뒤에 봉급을 마련하여 준다. 그러므로 왕자(王者)는 옳은
사람을 얻고 벼슬로 나아가는 사람은 그 행실을 힘쓰고 하여 나라를 경륜(經綸)하고 세무(世務)를 넓힘이 유래한 지 오래었다. 한(漢)나라의 처음에 조서(詔書)를 내려 현량
방정(方正)한 사람을 선거하고 주군(州郡)에서는 효렴(孝廉)과 수재(秀才)를 찰거(察擧)하니 이도 또한 선비를 바치는 방법이다. 후한(後漢)이 중흥(中興)한 뒤에 다시
돈박유도(敦朴有道)ㆍ인현능(仁賢能)ㆍ직언(直言)ㆍ독행고절(獨行高節)ㆍ질직(質直)ㆍ청백돈후(淸白敦厚)의 등속을 더하니 선비들의 영화(榮華)의 길이 이미 넓어지니 이로부터 명예를
도적하고 거짓을 꾸미고 점점 더욱 훼경(卉競)으로 흐르며 권문귀사(權門貴士)들은 청탁(請托)과 사알(私謁)이 번다히 일어났다. 좌웅이 일을 맡아서 나이를 제한하고 재주를
시험하면서부터 비록 얼마간 주밀치 못한 일도 있었으나 진실로 또한 시의(時宜)를 알았다. 호광(胡廣)ㆍ장형(張衡)ㆍ최원(崔瑗)의 무리는 옛 방법에 이체(泥滯)되어 서로
궤변(詭辯)하고 공박하였는데 형식을 좇는 자는 소견(所見)이 짧아서 굴(屈)하고 계획이 실제에 맞는 것은 그 효과를 나타내었으니 좌웅이 상서(尙書)로 있음에 천하가 감히 그릇된
천거를 하지 못하여 십여 년 동안에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으니 이것이 또한 실제에 맞은 효과의 증거이다. 옛 법에는 선거를 삼공부(三公府)에 맡기고 삼공부가 참의(參議)
속관(屬官)을 선거할 때는 그 행상(行狀)을 묻고 그 기량(器量)과 재능을 헤아리고 시험을 받고 벼슬에 임용하여 성공하기를 책(責)한다. 이름이 가히 살펴서 택할 것이 없는 연후에
상서의 거자(擧刺)에 붙여서 형관(刑官)에 내리기를 청하여 허실을 조사하고 그 주벌(誅罰)을 행한 것이다"하였다.]

위(魏)나라 조비(曹丕) 때에 세상이 소란스러워서 유식한 층들이 분산되고 네 백성이 뒤범벅이 되어 분간할 길이 없었다. 이부상서(吏部尙書) 진군(陳群)이 조정의 간부 선발은 인재를
충분히 탐구해내지 못한다 하여 즉시 아홉 등급으로 벼슬을 임명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각 고을에다 모두 중정(中正)을 두어 중정으로 하여금 그 고을의 지감이 있는 자를 선택케 하였으며
인물을 심사하여 그 등급을 사정하였다. 또 고을의 호구 10만 이상에는 매년 한 명의 인재를 선발하나 그 중에서 뛰어나고 특수한 인재가 있으면 호구의 다소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관의 선발은 호군(護軍)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두우(杜佑)는 말하기를 "9품(品)의 제도는 처음에 한(漢)나라 말기에 천하에 병란(兵亂)이 일어나므로 인하여
의관사족(衣冠士族)들이 본토를 떠나간 자가 많고 위씨(魏氏)가 혁명(革命)한 뒤에 주(州)ㆍ군(群)ㆍ현(縣)에 모두 대중정(大中正)ㆍ소중정(小中正)을 두는데 각각 본 고을의
사람으로서 여러 부(府)의 공경(公卿)이나 대성(臺省)의 낭리(郎吏)로 있으면서 덕(德)이 충실하고 재주가 성(盛)한 자를 가리어 중정(中正)을 삼고 그 관내(管內)의 인물을
구별하여 9등(等)으로 정하였다. 그 말과 행실이 잘 닦여서 나타남이 있으면 등급을 올려서 혹은 5품(品)으로써 4품에 올리고 6품으로써 5품에 올리며, 만일 혹 도의(道義)가
이지러진 자이면 등급을 내려서 혹은 5품으로부터 6품에 내리고 6품으로부터 7품에 물리치는 것이니, 이는 이부(吏部)가 능히 천하의 인재와 사(士), 서민(庶民)을 자세히 살펴서
정할 수가 없으므로 중정에게 맡겨서 등급을 전형(銓衡)하고 그것을 증빙(證憑)으로 하여 벼슬을 보직(補職)하여 일의 어긋남을 면하고 법(法)이 이해진 것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
뒤에 중정들이 흔히 그 옳은 사람이 되지 못하여 다시 인물의 어질고 어리석고 함을 분변하지 못하고 오직 문벌로써 등급의 높고 낮고 함을 삼았으며 남조(南朝)는 양(梁)나라와
진(陳)나라에 이르기까지 북조(北朝)는 주(周)나라와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 선거하는 법(法)이 비록 서로 손(損)하고 익(益)하고 한 것이 있으나 대개 9품(品)과
중정(中正)의 제도를 쓰고 수(隋)나라의 개황(開皇) 때에 이르러 이에 파(罷)하였다.]

진(晋)나라에서는 위(魏)나라의 구품(九品) 구품(九品)：중국 진(晋)나라 때 모든 관직을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서 녹봉을 주던 제도.

제도에 의거하여 내부 관리로 이부(吏部) 상서(尙書), 사도(司徒), 좌장사(左長史) 등을 두고 지방 관리로 대중정(大中正)을 주(州)에 두고 소중정(小中正)을 군에 두어서 모두
인재 선발의 사무를 맡아서 처리케 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이부에서 인재를 선발 등용하려면 반드시 문건을 중정에게 내려 그 사람의 거주와 부, 조(父祖)의 관직을 따지게 하였다. 그
당시에 풍습과 교화가 문란하여 아무런 규범이 없었지만 그래도 공정한 여론이 있어서 시속을 장려할 수가 있었다. 그의 실례로 진수(陳壽) 진수(陳壽)：진(晋)나라 때
『삼국지(三國志)』를 편찬한 사람.

가 삼년상 안에 여자 하인을 시켜 환약을 만든다 하여 여러 해 동안 버림을 받았으며 극선(郤詵)이 효행이 지극하였으나 임시로 장사하는 데 규정을 위반하였다 하여 벼슬 한 등을
깎였으니 당시 사람들에게 권고 또는 자극을 주는 힘이 이러하였다. 그 뒤로 중정을 맡은 자가 사람답지 못하여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개인감정에 좌우되었기 때문에 구품제도가
점차 폐지하게 되었으며 다만 벼슬의 품계만을 따져서 등급을 결정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오직 직위 있는 자만을 훌륭한 자로 쳐주게 되었다. 상서복야(尙書僕射) 유의(劉毅)
유의(劉毅)：중국 송나라의 저명한 학자.

가 구품 제도는 임시적 대책으로는 되나 정상적인 원칙으로 될 수 없으니 응당 지방을 단위로 하는 원칙을 적용하여 옛날의 향리에서 선발하던 방법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글을 올려
말하기를 "구품 제도는 여덟 가지 결함[八損]이 있으니 이것이 모두 국가의 융성하느냐 침체하느냐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말한다면 인물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첫째
곤란이요, 곱고 밉게 보는 개인감정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둘째 곤란이요, 진실과 허위를 밝히기 어려운 것이 셋째 곤란입니다. 오늘에 있어서 아홉 등급을 정하여 놓고 높이고
낮추기를 자유로 하며 사람의 잘되고 못되는 것이 그 손에 달려서 열흘이나 한 달도 못되는 동안에 정황이 변동되므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 치고는 빈한한 출신이 없으며 낮은 직위에는
세도하는 친척이 없으니 첫째 정치를 손상시키는 방도이며, 지방[주도(州都)는 곧 중정(中正)이다.]에 중정을 두는 근본 목적은 고을과 마을에서의 여론의 결과를 수집함으로써 장차
있을 수 있는 요언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언론을 통일시키려는 것이며 어느 한 개인의 머리로써 다른 한 사람의 재능을 이해하다가 중정 한 사람의 심사가 잘못되었을 때에 연대 책임을
지게 되지 않았으므로 시비질들이 향촌에 유포되고 증오와 원망의 초점이 대신에게까지 집중되게 되었으니 둘째 정치를 손상시키는 방도이며, 본래 규정으로 아홉 등급을 제정한 것은 재능과
덕행에서 차이가 있고 순차에서 선후가 있음을 의미한 것이었으나 지금에는 중정이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개인의 주견에 복종시키기 때문에 우수하고 열등한 것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머리와
꼬리가 거꾸로 서게 되었으니 셋째 정치를 손상시키는 방도이며, 임금께서는 잘한 것을 상주고 나쁜 것을 벌주어 무엇이나 법에 의거하지 않은 것이 없건마는 오직 중정(中正)에게만 한
나라의 중책을 위임한 다음 그에 대한 상벌의 조치가 없기 때문에 그는 아무 거리낄 바 없이 저의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사람들의 신소까지 금지하게 되어 억울함을 당한
자로 하여금 상달하여 해결할 길을 잃고 장기간 간사한 무리들의 농락에 좌우되게 되니 넷째, 정치를 손상시키는 방도이며, 옛날에는 정치와 교육을 지방에서 하는 의의를 중요하게
여기었기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이 본지에 안착하여 기본 학문에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지방의 인재로서 많은 경우에는 천 명이란 수효가 혹은 다른 행정 구역으로
가서 유랑하며 혹은 딴 지방에 가서 복무하게 되니 얼굴도 서로 모르는 형편이거늘 더구나 그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정이 알고 모르고 간에 장차 품계를
결정하려면 반드시 조정에서 칭찬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뜬소문에서 비방하는 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관에 맡기자면 자체가 알지 못하는 폐단이 있고 남의 말을 존중하자면 각자
한편에 쏠리는 결함이 반복됩니다. 아는 자에게는 감정상 곱고 미운 것으로써 그의 공적을 묵살시키며 모르는 자에게는 인사 문제를 가지고 그의 제도를 혼란시킵니다. 이미 지방 연로자
층에서 품행을 등록하는 토의 제도가 없고 또 조정에서도 공적을 고사하는 절차가 없어서 그만 벼슬하는 자들로 하여금 가까운 데를 버리고 먼 데를 구하며 근본을 등지고 말단에 치우치게
하니 다섯째 정치를 손상시키는 방도이며, 대체 인재를 탐구하는 목적은 앞으로 백성에게 훌륭한 정치를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관직에 복무하면서 공적을 나타낸 자가 더러는
낮은 등급에 머물러 있는 반면에 아무런 성과도 달성하지 못한 자가 한 층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지의 공로를 묵살하고 헛된 명예를 앞세우며 부화 사상을
조장시키고 실적 고사를 폐기하는 것이니 여섯째 정치를 손상시키는 방도이며, 대체 관직은 사업이 동일하지 않고 사람은 재능이 동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재능에
적합한 실정을 따지지 않고 다만 아홉 등급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등급에 의하여 인재를 등용하려면 더러 그의 재능상 전공한 것이 아니며 실정으로 인재를 등용하려면 기정
등급의 제한을 받게 되어 빈 여론만을 환기시키고 등급과 실정의 상호 모순을 조성하니 이것이 일곱째 정치를 손상시키는 방도이며, 지금의 구품 제도로 말하면 구품 이하의 관리에게는
있는 죄과를 폭로하지 않으며 구품 이상의 관리에게는 있는 장점도 열거해 주지 않아서 표창하고 자극 주는 의의를 망각하여 주관자의 곱고 미워하는 평정에 맡겨 버립니다. 이렇게 된
이상 온 나라 사람들이 어찌 덕행에 태공하고 출세에 급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여덟째 정치를 손상시키는 방도입니다. 그리하여 관직의 명칭은 '중정'이라 하지만 실지는
협잡하는 장소로 되고 사업의 명목은 구품 즉 아홉 등급이라 하지만 여덟 가지 손상을 가지고 있으니 마땅히 '중정'을 폐지하고 구품 제도를 제거한 다음 다시 한 조대(朝代)
조대(朝代)：역사에서 말하는 한 성씨의 세습 왕조의 전 기간을 가리킴.

의 제도를 수립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공(司空) 위관(衛瓘) 위관(衛瓘)：중국 진(晋)나라 때의 명필.

도 말하기를 "옛날 명철한 임금들은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한 자를 선발하고도 실무적으로 가르쳐서 등용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도덕 있는 자에게 겸양하는 기풍이 조성되었고 지방에서는
원칙을 무시하는 행동이 발로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향촌의 조직을 통하여 상호 감시하는 제도를 강화할 수 있으며 사업을 검토하고 담화를 참작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그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모든 사람들이 명예를 우연히 구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고향에 돌아와서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데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어진 이를 존경하면서
풍속이 더욱 화목하게 되고 나쁜 자를 제거하면서 품행을 더욱 가다듬게 되는 것이니 이는 자기 고을에서 추천하고 마을에서 선발하는 제도가 옛날의 훌륭한 방법으로 되었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위(魏)나라가 전란의 뒤를 계승하여 식자층이 전부 분산되어 해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구품 제도를 설정하여 우선 인재 등용의 기초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처음 선발할
때에는 고을의 공정한 여론들이 작위의 여하를 불구하고 표창과 질책이 있어서 미풍을 장려할 수 있었으며 그 지방의 옳은 여론을 존중히 하던 풍습을 그래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이 미풍이 점차로 해이해져서 이어 품직을 올리고 관등을 정하는 것을 세상이 다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벼슬에 종사하는 자만을 귀한 존재로 간주하고 도덕적
품성과는 배치되는 행동을 감행하여 사소한 이익 끝에 길고 짧은 것을 다투게 되니 선량한 풍속을 손상시키는 점에 있어서 그의 해독이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 국가적으로 동일한
규정이 적용하게 되는 이상 응당 낡은 방법을 모두 개혁하고 한결같이 옛날 제도에 의거하여 행정 구역을 단위로 하는 토단법(土斷法)을 제정해야 합니다. 즉 최고 관리로부터 하부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거주지로 표준을 삼아서 다시는 어떤 지방 사람으로서 멀리 다른 지역에다가 호적을 붙여 두는 일이 없게 할 것이며 '중정(中正)'제도를 철저하게 폐지하여
인재의 선발 등용을 각자 자기 고향의 여론에 의거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래에서는 윗사람을 존경하고 도덕적 감화에 순응하게 되며 풍속은 정치와 함께 깨끗해지고 도덕적 교화는
정치와 함께 성과를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좋고 나쁜 교양이란 어떤 세력 있는 친구를 교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므로 즉시 부화와 경쟁의 기풍이
자연히 종식되고 모든 것을 각자 자신의 반성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때에 시평왕(始平王)의 문학 이중(李重)이 또 글을 올려 말하기를 "구품 제도는 전쟁 시기 군대 내에서 시작된 정책이고 사실은 국가를 통치하는 고정불변의 법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나쁜 행동을 검열 방지하는 조치가 해이해져서 법행의 외면만을 추궁하다가 진상을 포착하지 못하게 되어 풍속을 소란하게 되니 폐해가 너무 심합니다. 때문에 저는 생각하기를 구품
제도를 당장 없애고 우선 그들 이사 자유의 길을 열어서 서로 자기 고향에서 취직하는 것을 용허하는 동시에 추천하는 제도를 회복하여 함부로 자기 지방 밖에서 하지 못하게 하면
토단법(土斷法)의 기본 방도가 수행될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기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자기 향토에서 자신을 단련할 것을 생각하게 된다면 분주하게 경쟁하는 기풍이 자연히 중지되고
예의가 날로 제고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무제(武帝)가 이 말을 옳게 여기기는 했으나 때마침 가비(賈謐)와 곽창(郭彰)이 정권을 독차지하여 벼슬하는 자들이 빨리 진출할 것을
힘쓰기 때문에 어느 것이고 실시될 수 없었다.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제도에 양주(楊州) 지구에서는 해마다 두 명씩, 지방에서는 각각 한 명씩을 추천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세상이 어지러워서 될 수 있는 대로 포용정책을
쓰기 때문에 먼 지방의 '수재(秀才)'나 '효행', '염리(廉吏)'에 추천된 자에 대하여는 다시 시험을 거칠 것이 없이 도착하는 즉시로 등용 임명하였다. 그러나 정치가 점차
안정됨에 따라 계속하여 경전으로 시험을 실시하는 한편 추천된 인재로서 옳게 선발되지 못한 경우에는 그의 추천자인 지방 장관[太守]을 파면시켰다.[후조(後趙)의 석륵(石勒)이
우교(右校) 장빈(張賓)으로 하여금 선거의 일을 거느리게 하여 9품(品)과 6과(科)를 정하고 공경(公卿)과 주군(州郡)에 명령하여 해마다
수재(秀才)ㆍ지효(至孝)ㆍ청렴(淸廉)ㆍ현량(賢良)ㆍ직언(直言)ㆍ무용(武勇)의 선비를 각 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다시 진(晋)나라의 제도에 의하여 수재ㆍ효렴(孝廉)의 경학(經學)을
시험하는 법(法)을 세웠다.

진(秦)의 부견(符堅)은 사과(科)로써 선비를 선거하는데 고을의 목(牧)ㆍ백(伯)ㆍ수령(守令)에게 명령하여 각각 효제(孝悌)ㆍ염직(廉直)ㆍ문학(文學)ㆍ정사(政事)의 네 과(科)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고 그 천거한 바를 살펴보아서 옳은 사람을 얻은 자는 상(賞)을 주고 그 옳은 사람이 아닌 자는 죄(罪)를 주니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천거하지
못하고 청탁(請托)이 행하지 아니하고 선비들이 모두 스스로 면려(勉勵)하고 비록 왕족이나 외척이라도 재능이 없는 자는 쓰지 아니하였다. 이때에는 서울과 외방(外方)의 관원이 모두
직책을 다하고 전토(田土)가 잘 개척되고 부고(府庫)가 충실하고 도적이 두려워하여 숨을 숨겼다.]

유씨(劉氏) 송(宋)나라 제도에는 단양(丹陽), 오(吳), 회계(會稽), 오흥(吳興) 등 네 군(郡)에서는 해마다 두 명씩 기타 군에서는 각 한 명씩 추천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주에서 추천한 수재라든가 군의 '효행', '염리'가 도착하면 모두 작문 시험을 실시하였는데 더러는 임금이 직접 나와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 장관[公卿]들의 추천한 것은 모두
이부(吏部)에 넘겨 재능을 보아 채용하게 하였다. 모든 추천에 있어서 잘되고 못된 데 따라 각기 상벌이 있었는데 잘못 추천한 자에 대하여는 그 사람을 금고형에 처하되 기일의 다소는
부서의 협의에 따라 제정하였다. 문제(文帝) 원가(元嘉) 연간에는 나이 30에 벼슬하도록 제한하였고 군이나 현은 여섯 돌 만에 교체하며 지방의 최고관인 자사(刺史)는 혹 10여
년까지 두기도 하였다. 그 후 효무제(孝武帝)가 직위해서는 벼슬하는 자에게 다시 늙고 젊은 것을 제한하지 않았으며 지방 장관들은 3주년으로 만기를 잡았다. 좌위장군(左衛將軍)
사장(謝莊)이 그 당시 인재 탐구의 길이 좁다 하여 글을 올려 말하기를 "광활한 영토와 복잡한 여러 부류의 각종 견해들에 대하여 저울질하는 것을 이부에만 위임하게 됩니다. 대체로
한 사람의 지식이란 제한되기 쉽고 세상의 인재는 구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제한되기 쉬운 지식으로 구명하기 어려운 인재를 감별한다면 과연 조정에서 인재를 빠짐없이 선발하여 관리를
임명하고 향촌에서 누락된 인재가 없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광범히 대신들에게 각자 아는 범위 내에서 인재를 추천하라 하여 상서(尙書)에 넘기어 그들을 선발 채용케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효무제가 이 말을 접수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효무제는 중요한 권한이 아랫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이어 이부(吏部)를 쪼개어 두 상서를
둠으로써 이부의 세력을 분산시켰다.[배자야(裵子野)는 말하기를"사람을 벼슬 주기 어려움은 선왕(先王)이 말하기를 자세히 하였다. 집에 있어서는 그 부모에 효도(孝道)하고 형제에
우애(友愛)함을 보고, 향당(鄕黨)에서는 그 성실과 신용(信用)을 살피고, 나가고 들어오고 함에는 그 지조(志操)와 의리(義理)를 관찰하고, 우환(憂患)과 고난에서는 그 지혜와
모계(謀計)를 취하고 시끄럽게 하기를 사건으로써 하여 그 처리함을 구하고 임(臨)하기를 이익으로써 하여 그 청렴함을 살핀다.『주례(周禮)』에는 학교에서 비롯하여 주리(州里)에서
논하여 육사(六事)를 고(告)한 뒤에 왕정(王庭)에 바쳤고 그 한(漢)나라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다. 주군(州郡)은 그 공능(功能)을 쌓은 연후에야 오부(五府)의 부름을
받고 오부는 그 속관(屬官)을 천거하여 조정(朝庭)에 올리면 삼공(三公)이 그 잘되고 잘 못되고 함을 참작하고 임명하는 것은 상서(尙書)가 천자에게 알리니, 선비 한 사람의 몸에
고열(考閱)하는 곳이 많고 한 어진 이를 올림에 그 과정(課程)이 자세하므로 능히 벼슬자리에 그 인재를 얻어서 일을 실패함이 적었고 위(魏)나라와 진(晋)나라는 이를 바꿔서
실패하는 일이 대단히 많았다. 대저 얼굴이 두텁고 속이 깊어서 험(險)하기가 산골짜기와 같으므로 말을 가리고 행실을 살펴보더라도 오히려 골고루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거든 하물며 이제
만품(萬品) 천군(千群)의 사람을 갑자기 한 번의 면접으로서 결정하며 서료(庶僚) 백위(百位)를 오로지 한 관사(官司)에서 단정하게 되니, 이에 시끄럽게 다투는 풍(風)이 드디어
행하여 멈출 수가 없고 박휘통을 부딪히고 소매를 떨치면서 저 시(寺)ㆍ대(臺)에 몰려들며 벼슬을 구하는 자가 마구 나와서 반드시 얻기를 힘쓰고 더하기를 모든 더러운 짓으로써 하되
이조(吏曹)는 문벌을 상고하여 선거하고 향읍(鄕邑)에 조사하여 볼 겨를도 없었다. 아버니는 그 아들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면 무엇을 얻으리요 하고, 형(兄)은 그 아우를
독려하여 말하기를 힘써 기회를 살피라 하니, 다시 염치(廉恥)의 풍과 삼가는 지조(志操)가 없고 관(官)이 사악하고 나라가 무너져서 기강(紀綱)을 세울 수가 없다. 설령 용(龍)
같은 어진 신하로 납언(納言)을 삼고 제순(帝舜) 같은 성인(聖人)이 남면(南面)하는 왕위에 거(居)하더라정치를 공평 명랑하게 하기는 기필할 수가 없거든 하물며 후세의 어질다는
사람이리오? 효무제(孝武帝)가 비록 이조(吏曹)를 나눠서 둘을 만들었으나 능히 주(周)나라나 한(漢)나라와 같은 세상으로 돌리지 못하고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잔꾀를 부려서 그
병폐(病弊)가 더욱 심한 것이다"하였다.]

제(齊) 제(齊)나라：중국 오대(五代) 때 송나라(유송)의 소도성(蕭道成)이 송나라를 계승하여 건국한 나라인데 북제(北齊)와 구별하여 남제(南齊)라 함.

나라에서는 송나라의 연령을 제한하는 제도를 답습하였다. 그러나 지방에서 추천하고 마을에서 선발하는 것에 대하여 재능과 덕행을 심사하지 않고 양반과의 혼인과 문벌을 선차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귀족들에게는 20세에 벼슬하고 미천한 사람들은 30세에 응시하도록 한 까닭에 나이를 늘리고 얼굴을 가장함으로써 출세를 기도하는 자가 있었다.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혼인의 연계를 단단히 맺었으며 방문, 초대에 분주하였었는데 그것이 점차 습속으로 되어버렸다.

후위(後魏)에서는 주와 군에 중정(中正)을 두어 인재 선발의 책임을 지워서 매 분기 말에 이부와 함께 가부를 심의하여 선발하였는데 선발된 수재로서 응답서에 평정된 성적 순차가 중등
이상에 해당해야만 임금께 요청하여 채용하게 되었다. 효명제(孝明帝) 때에 이르러서는 호태후(胡太后)가 정부 일을 보면서 비로소 문인들로 하여금 품계에 따라 선발에 참가하도록
하였다.[처음에 효문제(孝文帝)가 정사(政事)를 힘써서 잘 다스리기를 구하고 중정(中正)을 정밀하게 가리어 향국(鄕國) 안에서 덕이 가장 높은 자로써 충당하고 그 변방(邊方)의
주(州)와 작은 군(郡)에 인물이 고단(孤單)하고 적으면 다른 주(州)에 아울러 붙이니 이 당시에는 나라에서 인재를 얻어 쓴다고 일컫더니 선무(宣武)ㆍ효명(孝明)의 때에 이르러서는
주(州)에 크고 작고 한 구별이 없이 반드시 중정(中正)을 두어서 인재를 얻지 못함이 많고 혹은 용렬하고 더러운 자가 전형고사(銓衡考査)하는 권력을 잡음이 있어 선임(選任)하는
법(法)이 무너져 어지럽고 선비가 아닌 잡류(雜類)가 청관(淸官)에 무릅쓰고 올라간 자도 있었다. 이에 중정을 없애고 드디어 벼슬에 있는 자로 하여금 모두 다섯 사람이 서로 보증을
서게 하고 임관(任官)을 보증할 사람이 없는 자는 벼슬을 빼앗고 백성의 구실로 돌려보내었다. 이때에 효명(孝明)이 사위(嗣位)하니 나이 어리고 호태후(胡太后)가 조정에 나와 정치를
하더니 정서장군 기주대중정(征西將軍冀州大中正) 장이(張彛)의 아들 장중우(張仲瑀)가 봉사(封事)를 올려 청하여 선거하는 자격을 전형(銓衡)하여 구별하고 무인(武人)을 억제하여
청관(淸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니, 이에 무인(武人)들의 원망이 길마다 가득 차서 곧 방(榜)을 큰 거리에 내어 걸어 모여서 죽여 없애기를 기약하고 우림군(羽林軍)의 호분(虎賁)
천여 명이 서로 모여서 그 집을 불사르고 장이(張彛)를 이끌어 내어 죽이니 서울이 크게 진동하였다. 태후(太后)는 그 흉악 강력(强力)한 자 팔 인(八人)을 잡아 버리고 나머지는
대사(大赦)하여 그 마음을 안정시키고 인하여 명령을 내려 무인도 자(資)에 의하여 선거에 들게 하니, 이에 벼슬의 정원수(定員數)는 적고 선임(選任)에 응(應)하는 자는 많아서
선조(選曹)가 능히 처리하지 못하였다.] 최량(崔亮) 최량(崔亮)：중국 후위(後魏) 때 운하를 수축하여 공을 세운 사람.

이 이부상서로 되어서 이어 임금께 아뢰고 관리 승급 규정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관리의 자격에 불구하고 복무 기간만을 따져서 결정하는 것이었다. 결과 무능하고 낮은 지위에서 오래 있던
자들이 모두 그더러 능숙하다고 칭찬하였다.[이때에 최량(崔亮)의 외생(外甥) 유경안(劉景晏)이 최량에게 글을 주어 말하기를 "은(殷)나라와 주(周)나라는 향숙(鄕塾)으로써 선비를
바치고 두 한(漢)나라는 주군(州郡)을 말미암아 인재를 천거하고 위(魏)나라와 진(晋)나라는 옛 제도를 그대로 지켜서 이에 중정(中正)을 두었습니다. 옛적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선거를 신중히 심사하지 아니함이 없어 비록 아름다움을 다하지는 못하였으되 넉넉히 10분의 6∼7쯤의 효과는 거뒀습니다. 우리 조정(朝廷)에서는 인재를 바침에 다만 그 글을 구하고
그 이치를 취하지 아니하며 효렴(孝廉)을 살펴 가림에 다만 글 짓는 장구(章句)를 논하고 정치의 도(道)에 미치지 아니하며 중정을 세움에 재주와 행실을 고사(考査)하지 아니하고
부질없이 성씨를 가리고 있으므로 선비를 취함이 넓지 못하고 태거(汰去)함이 정밀하지 못합니다. 구(舅)가 마침 인재를 전형(銓衡)함에 당(當)하여 마땅히 고쳐 베풀고 바꿔 골라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도리어 연수(年數)로써 등용하는 자격을 삼는 정년격(停年格)을 만들어서 그를 제한하는고? 천하의 선비가 누가 다시 명분(名分)과 행실을 닦고
힘쓰리까?"하였다. 최량(崔亮)가 답서(答書)하여 말하기를 "너의 말하는 바는 곧 깊은 이치가 있고 내가 전일에 이 격식(格式)을 만든 것은 연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데 이제
이미 너의 괴이(怪異)하게 여김이 되니 천년의 뒤에 누가 나의 마음을 알 것인고? 내가 세 번 상서(尙書)가 되니 전형(銓衡)을땅하게 하는 일은 어지간히 하는 터이다. 다만 옛적과
지금이 같지 아니하여 지금에는 선거하는 일이 오로지 상서에서 돌아오니 한 사람의 감식(鑑識)으로써 천하의 재주를 비쳐서 살피기는 대쪽 구멍으로써 하늘을 엿봄과 다름이 없고 또 이제
무인(武人)들이 심히 많고 벼슬의 정원수(定員數)는 지극히 적어서 설령 열 사람으로 하여금 한 가지 벼슬을 함께 시킨다 하더라도 오히려 벼슬자리가 모자라서 줄 수가 없거늘 하물며
한 사람이 한 벼슬을 바라고 있으니 어찌 원망하지 아니할 것이냐. 내가 근래에 위에 면알(面謁)하여 견집(堅執)하기를 무인으로 하여금 선거에 넣음이 마땅치 아니하다 하여 그
작(爵)을 주고 그 봉급을 후(厚)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이미 청종(聽從)함을 보지 못하니 그러므로 한때의 권도(權道)로써 이 격식을 세워서 제한하기를 정년(停年)으로써 한
것뿐이다"하였다.]

낙양령(洛陽令) 설숙(薛淑)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백성들의 생명은 지방의 수령급 관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만일 선조(選曹)에서 다만 연한만을 따지고 인재의 현명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면 관리 한 사람이 장부나 들고 이름이나 부르면 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인원수나 계산하여 등용하고서 무슨 심사 선발이라고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의 글이
올라갔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 후에 진침(甄琛), 원수의(元修義) 등이 서로 잇대어 상서가 되어 자기에게 해롭지 않은 것을 무방하게 여기고 그대로 답습하여 실행하였으니
위(魏)나라의 인재선발에서 인재들을 놓치게 된 것은 실지 최량(崔亮)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그 뒤에 신웅(辛雄)이 이부낭중(吏部郞中)이 되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연전(年前)으로부터 이래로 오로지 정년(停年)으로써 선거를 삼아 선비는 선(善)함과 악(惡)함의 구별이 없이 연수(年數)의 오랜 자를 올려 쓰고 직무는 극심함과 용이함의 구별이
없이 이름이 당도(當到)하는 차례로 벼슬을 주니 문서(文書)를 잡고 있는 아전은 세월의 차례로써 공로와 재능을 삼고 전형(銓衡)을 맡은 사람은 오래된 노구(老舊)를 뽑음으로써
공평정직하다 합니다. 또 용렬한 사람은 욕심이 많고 더럽고 하지 아니함이 없거늘 한 말들이 기량(器量)의 소인(小人)에게 나라를 함께 다스리는 무거운 책임을 맡기고 곡식을
도적질하는 쥐 같은 자에게 일군(一郡)의 생명을 부탁하니 모두 뇌물(賂物)을 구하여 마음대로 방종하며 그 재도는 비록 번거로우나 그 욕심을 이기지 못한다. 이것이 요역(徭役)으로
하여금 고르지 못하게 하여 인부(人夫)를 징발함이 법(法)에 어기고 잡다한 부과(賦課)가 문에 넘치게 하여 잡혀 갇히는 자가 길에 가득함을 일러 온 소이(所以)입니다"하였다.]

수(隋)나라 문제의 개황(開皇) 십제(十制)에는 모든 주에서 해마다 세 사람씩을 추천하되 상공업자만은 벼슬할 수 없게 되었다. 양제(煬帝)가 처음으로 '진사(進士)'라는 과거를
두었는데 전혀 문장만으로 인재를 고사하였다. 또 법으로 제정하기를 각종 관리들의 실적 고사에 의하여 급수 올리는 것을 불허하고 그의 공로와 재능이 두드러진 자야만 등용하게
하였다.[구준(丘濬)은 말하기를"위진(魏晋) 이강(以降)으로 비록 향리(鄕里)의 선거하는 제도는 없어졌으나 선거하는 수재(秀才)와 효렴(孝廉)은 오히려 경술(經術)을 취하고
주군(州郡)에 모두 중정(中正)을 두어 그 재주와 행실을 등품(等品)하니, 비록 그 법을 세움은 미진하나 청근(淸謹)한 선비가 오히려 외기(畏忌)함이 있어서 감히 방자하지 못할
줄을 알고 말이나 행실의 결점이 그 누(累)가 됨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수양제(隋煬帝)에 이르러 진사(進士)의 과(科)를 두고 비로소 오로지 선비를 시험하기를 문사(文辭)로써
하니 선비들이 모두 글장을 내고 스스로 나아가며 주리(州里)에서는 다시 찰거(察擧)하는 제도가 없었다.]

당(唐)나라에서의 인재 선발의 방법은 많은 경우에 수(隋)나라의 제도를 본떠서 큰 군[上郡]에서는 세 명씩, 중간 군[中郡]에서는 두 명씩, 작은 군[下郡]에서는 한 명씩을
추천하기로 정하고 재능이 있는 자에 한 하여는 고정된 숫자가 없었다. 그것의 일정한 추천 과목으로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명법(明法 ; 법률에 정통한 것),
명서(明書 ; 글씨에 능한 것), 명산(明算 ; 산수에 정통한 것)이 있다. 서울과 지방에는 다 학교가 있고 매년 동짓달에는 지방의 학교 사감[館監]이 이상 과목에 완성된 자들을
고사한다. 그때에 지방 장관은 관속들을 집합한 다음 빈과 주인의 좌차를 설정하고 양이나 돼지[少牢]를 잡아 써서 향음주례(鄕飮酒禮) 의식을 거행하는데 『시경』의 ｢녹명(鹿鳴)｣편을
노래하였다. 나이 많고 덕망 있는 자를 초대하고 늙은이 젊은이들을 석차에 따라 앉히고 구경시켰다. 의식이 끝난 다음 추천된 자를 계부사(計簿使)와 함께 정부에 올려 보내었다.
그리고 정식 학교 숙사에서 공부하지 않고 추천받는 것을 향공(鄕貢)이라고 말하였는데 옛날에는 모든 군들에서 하나, 둘, 셋으로 인수가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지는 고정된 수가 없었다.
추천된 자가 상서성에 도착되면 호부(戶部)와 함께 모아서 검열하는데 사업 평가와 시험 성적에 합격한 자를 급제로 한다.[무덕(武德) 때의 옛 제도에는 고공낭중(考功郞中)으로써
공거(貢擧)를 감시하더니 정관(貞觀) 이후에는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이 오로지 맡았다.] 처음에는 수재과(秀才科)가 가장 높아서 정치 문제에 대한 응답서를 다섯 조항으로 구분하여
고사하였었는데[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ㆍ중상(中上)의 4등(等)이 있었다.] 정관(貞觀)시기에 추천을 받은 자로서 급제하지 못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 주의
장관[州長]을 증벌하게 된 결과 이로 말미암아 수재가 폐지되었다. 사족(士族)들의 지향하는 것은 오직 명경(明經), 진사(進士) 두 과목 뿐이었다. 그 당초에는 정치 문제에 대한
해답서를 제출하는 데 그쳤으나 정관시기에는 명령으로 경전이나 역사의 일부를 통독하는 과목을 증가하였다.[이때에 고공원외랑(考功員外郎) 왕사단(王師旦)이 공거(貢擧)의 일을 맡았는데
기주진사(冀州進士) 장창령(張昌齡)과 왕공근(王公瑾)이 모두 준재(俊才)가 있어 명성이 서울과 외방(外方)에 떨쳤다. 왕사단이 그 글을 고사(考査)하고 낙제(落第)를 시켜 내치니
온 조정(朝廷)이 그 소이(所以)를 알지 못하였으며 급제(及第)한 등급을 아룀에 미쳐 태종(太宗)이 그 속에 장창령(張昌齡) 등의 이름이 없음을 괴이(怪異)하게 여겨 왕사단을 불러
물으니 왕사단이 대하여 말하기를"이 무리들은 참으로 글을 아름답게 짓는 재주가 있으나 그 문체(文體)는 경박하고 문장은 부허하고 미염(美艶)하니 반드시 좋은 그릇을 이르지
못하리이다. 신(臣)이 만일 이 무리를 뽑아 올리면 후생(後生)들이 이 글을 서로 본받아서 폐하의 풍아(風雅)를 변(變)함이 있을까 두려워합니다"하니 태종(太宗)이 그것을
명언(名言)이라 하더니 뒤에 모두 그 말과 같았다.] 고종(高宗) 때에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유사립(劉思立) 유사립(劉思立)：중국 당나라 때 사람.

이 비로소 임금에게 아뢰어 두 과목에다가 경전의 첩경(帖經) 첩경(帖經)：경서(經書)의 글에서 1행만 남기고 앞뒤를 덮거나 또는 1행 중의 몇 자에 종이를 붙여서 보이지 않게
하고, 그 대문을 알아 맞히게 하는 시험 방법.

을 첨가시켰고[그 뒤에 또 『노자(老子)』와 『효경(孝經)』을 더하였다.] 뒤에 다시 명령하여 명경과 시험에는 쪽지 여섯 문제를 맞춰야 하며 진사과에는 잡문 두 편을 시험하고 나서
응답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무후(武后) 초기에 낙성전(洛城殿)에서 추천한 인재들의 응답서 시험을 보았는데 임금 앞에서 인재를 고사하는 제도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무후(武后)가 또
스스로 신궤(臣軌)하는 글 두 편을 지어서 공사(貢士)들로 하여금 업(業)을 익히게 하고 『노자(老子)』를 정지하였으며 중종(中宗) 처음에 신궤(臣軌)를 정지하였다.]

무후가 또한 무관에게 과거 보이는 제도[武擧]를 창설하였는데 향음주례를 거행한 다음 병부(兵部)로 보내었다.[개원(開元) 때에 명령하여 무과(武科)의 공인(貢人)은 명경과(明經科)
진사과(進士科)로 더불어 한가지로 향음주례(鄕飮酒禮)를 행하였다.] 그 고사 진행 절차는 우선 천에다 다섯 개의 사격판을 만들어 '타(垜)' 타(垜)：성(城) 위에 낮은 담을
쌓아서 활 쏠 때에 몸을 은신하던 성가퀴.

에 설치하는데 105보쯤 떨어진 거리에서[내규(內規)는 광(廣)이 6척(尺)이고 나머지 4규(規)는 매 규(規) 내 양변(兩邊)이 각각 광(廣)이 3척(尺)이고 현고(懸高)는
30척(尺)으로써 한도를 삼는다.] 일렬로 앉아 사격하게 하고 그를 긴 타[長垜]라고 불렀다.[활은 1석(石)의 힘의 것을 쓰고 화살 무게는 6전(錢) 중(重)이다.] 또 땅을
파서 둑[埒]을 만드는데 그의 길이를 '타'와 같게 한 다음 가죽으로 두 마리의 사슴을 만들어서 그 위에 벌려 세우고 말을 달려가면서 사격하게 하고 그를 기사(騎射; 말 타고
활쏘기)라고 불렀다.[사슴의 길이는 5촌(寸)이고 고(高)는 3촌(寸)이고 활은 7두(斗) 이상의 힘의 것을 쓴다.] 또 나무를 깎아 사람을 만들고 사각형의 판자를 그 이마에
얹는데 대체로 네 개의 가짜 사람을 둑 위에다 벌려 세워 두고 말을 달려 둑으로 들어가면서 창을 휘둘러 좌우 쪽으로 찌르되 꼭 판자만 떨어뜨리고 사람을 자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마창(馬槍)이라고 불렀다.[창(槍)의 길이는 1장(丈) 8척(尺)이고 지름이 1촌(寸) 5분(分)이고 무게가 8근(斤)이며 그 목인(木人)의 위의 판(板)은 방(方) 2촌
5분이다.] 그리하여 어느 것이고 날쌔고 맵시 있어서 빗나가지 않게 맞히는 것을 일등으로 삼고 겸하여 걸어가면서 쏘기, 판자 쪽을 꿰뚫기, 성문의 가로장 나무 들기, 무거운 짐
지기, 신체, 언어 등 시험에서 전부 당선된 자를 합격으로 하였으며 그 밖에 또 수평선으로 쏘는 과목이 있었다. 이 과거에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우등으로 합격한 자에 한하여는
벼슬로 임명하고 그 다음가는 자는 순차적으로 올려주었다.[천보(天寶) 6년에 또 무거인(武擧人)으로 하여금 성(省)에 올리면 먼저 태공묘(太公廟)에 뵈게 하며 매양 대장(大將)을
임명하거나 군사를 행하여 이기거나 하면 모두 묘(廟)에 고(告)하였다.]

개원(開元) 21년에 현종(玄宗)의 『신주노자(新註老子)』 『신주노자(新註老子)』：도교(道敎)의 경전인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이 새로 주석한 것.

가 편성되었는데 조서로 『상서』와 『논어(論語)』를 빼고 『노자(老子)』를 넣으라 하였다. 24년에 인재 선발의 사무를 예부(禮部)에 이관시키고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할 것을 제정했는데 그것이 영구한 제도로 되어버렸다.[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이묘(李昴)가 진사(進士) 이권(李權)의 문장을 훼방하다가 크게 이권에게 모욕을 당하니 조정의
의논은 고공(考功)의 낭관(郞官)이 지위가 낮은 까닭이라고 하여 예부(禮部)에 옮기고 드디어 영구한 제도를 삼았다.] 29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숭현관(崇玄館)을 두고 각 고을에도
도학(道學 ; 노자를 연구하는 학문)을 두며 학생들을 '지방 선발[道擧]'이라 불렀는데 추천하여 보내고 시험 보는 절차가 명경(明經)과 같았다. 대체로 선발 책임 기관에서의 시험
절차는 경전에서 응시하는 자의 첩경과 같이 그의 배운 서적에서 양쪽 줄을 덮고 중간의 한 줄만 내어 놓은 다음 종이를 오려 쪽지를 만들어서 흔히 세 글자를 붙이는데 때로는 더하기도
하고 감하기도 하며 의미가 통하게 하거나 통하지 않게 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더러는 넷을 맞히든가 다섯을 맞히든가 여섯을 맞히는 것으로 통(通 ; 합격의 뜻)을
삼는다.[그 뒤에 과거를 보는 거인(擧人)이 점점 많으므로 그 법(法)이 더욱 어려워서 힘써 떨구고자 하여 고장(孤章)과 절구(絶句)가 서로 의사(疑似)하고 서로 얼크러진 자를
첩(帖)하여 써 현혹케 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며 더 심한 것은 혹 위로 그 주(注)를 어그러지게 하고 아래로 한두 글자를 남겨서 그것을 찾게 하여 알기 어렵게 하니 이를
예발(例拔)이라고 한다. 이미 몹시 어려우므로 시험을 보는 거인들은 고절(孤絶)한 문구를 뽑아 모으고 유은(幽隱)한 뜻을 찾아내어 시(詩)나 부(賦)를 만들어서 읽고 익히는 자가
있으며 만일 십수 편(十數篇)을 통(通)하면 어려운 것이 모두 자세히 알려지는 것이나 그 평문(平文)의 대의(大義)에 대하여는 대개 담에 면향(面向)한 듯이 캄캄한 자가 많았다.]
명경과의 시험에는 『예기』, 『춘추』, 『좌씨전(左氏傳)』 중에서 한 가지와 『효경(孝經)』, 『논어』, 『이아(爾雅)』에서 쪽지를 붙이는데 각각 다른 차이의 숫자를 두어 붙인다.
쪽지를 전부 다 통과하고 나서는 구답에 들어가는데 한 가지 책에 열 문제를 물어서 여섯 맞히는 자가 '통'으로 된다. 구답 시험에서 통과된 다음에는 응답서를 내는바 대체로 세 문제
중에서 세 종목을 모조리 통과한 자를 급제로 한다. 진사과의 시험 과목은 『예기』, 『춘추』, 『좌씨전』 중의 한 가지와 『이아』인데 쪽지에 통과한 다음에는 산문이나 부(賦)
부(賦)：한문 작문체의 하나.

로 각 한 편씩을 제출하며 작문에 통과되고는 응답서 다섯 제목을 내어서 세 종목에 다 통과한 자를 급제로 하였다. 법률과에서는 법률과 법령 각 열 문제와 응답서 열 제목을
시험쳤다. 여기서 전부 통과된 것이 우등[甲]이고 여덟 이상이 보통[乙]으로 되었다. 글씨에서는 『설문(說文)』과 『자림(字林)』에서 열 문제를 시험치고[율(律)이 7조(條)이고
영(令)이 3조(條)이다.] 암송하는 것은 일정하지 않은데 전부 통과하는 자가 급제로 되었다. 산수 시험에서는 『구장(九章)』 『구장(九章)』：구장산법.

, 『해도(海島)』, 『손자(孫子)』 『손자(孫子)』：춘추시대의 명장으로서 군사학서적 『손무자전서(孫武子全書)』를 저작한 사람. 이름은 무(武)인데 손무자(孫武子)라고도 함.

, 『오조(五曹)』, 『장구건(張丘建)』, 『하후양(夏侯陽)』, 『주비(周髀)』 『주비(周髀)』：천체는 동이를 엎어 놓은 것과 같다고 설명한 고대 중국의 천문서적.

, 오경(五經) 오경(五經)：『주역』, 『서경』, 『시경』, 『춘추(春秋)』, 『예기(禮記)』.

, 『철술(綴術)』 『철술(綴術)』：중국 남제(南齊) 조긍(祖)이 저작한, 천문에 관한 숫자를 산출하는 산술서적.

, 『집고(緝古)』 『집고(緝古)』：중국 당(唐)나라 때 왕효통(王孝通)이 저작한 산술서적.

등 서적에서 취재하는데 쪽지의 수는 각각 차이가 있으며[구장(九章)이 3첩(帖)이고 해도(海島) 이하 오경(五經) 등 7부(部)가 각 1첩이고 철술(綴術)이 6첩이고 집고(緝古)가
4첩이다.] 겸해서 작문 시험을 치는데 문장의 대의를 전부 통하게 지은 자가 합격하게 되었다. 대체로 모든 과목들에서 겸하여 학문을 소유한 자에게는 표창을 가하되 일정한 규정이
없었다.

대체로 시험을 실시하려면 사전에 시험 응모자를 시켜 선철의 사당에 참배하게 하고 해당 일꾼이 날을 결정한 다음 대학[國學]에다 설비를 갖추어 놓고 재상 이하가 전부 모여서 참관함과
동시 광범한 여러 의견을 집합하여 연구 토론하고 물러갔다. 예부에서는 시험 날에 언제나 엄격히 위병[兵衛]을 세우고 겹으로 가시울을 하며 의복을 수색하고 출입을 단속하여 온갖
부정행위를 방지하였다. 그리고 명령을 하달하여 응시자에게 고정된 과목을 주지 않으며 모두 그의 조항들을 게시하여 자유로 선택하게 하였다. 시험 날에 더러는 임금이 직접 나와 보기도
했다. 시험에서 이미 그의 성명은 밀봉한 다음에는 작문과 응답서만을 시험 보아서 우수한 자에게는 특별히 좋은 벼슬[美官]을 주고 그 다음가는 자에게 출신(出身)을 내어 준다.
개원(開元) 이후로 전국의 평화가 계속되어 선비라면 잘나고 못나고를 불문하고 문학 모르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응시자는 언제나 4, 5천 명씩 되는 중에서 합격자는 겨우 백에
한두 명일 뿐이었다.[심기제(沈旣濟) 심기제(沈旣濟)：중국 당나라 때 벼슬이 이부 원외랑(吏部員外郞)에 이르렀으며 『건중실록(建中實錄)』을 저작한 사람.

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현경(顯慶) 이후부터 고종(高宗)이 건강이 좋지 못하므로 무태후(武太后)가 사업하게 되었는데 정치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제왕과 통일하였다. 태후는
매우 글과 역사를 읽었고 조그만 문학예술에 취미를 가졌던 관계로 영륭(永隆) 연간에 전연 문장으로 인재를 선발했고 영순(永淳) 이후로 태후가 정권을 잡은 지 20년 동안이
되었으므로 당시 대신이 문장으로 출세하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어 그대로 시일이 오래되어 점차 습속화하였다. 개원, 천보(天寶) 연간에 이르러서는 고조(高祖)와 태종(太宗)의 남은
업적을 계승하여 백성들의 가정생활이 풍족하며 변경의 이민족들이 복종하게 되어 국가가 평화로웠다. 그리하여 아무리 웅대한 지략과 신기한 무술이 있다 하더라도 발휘하지 못한 채 백여
년을 경과하는 동안에 이 나라에 생장하면서 전쟁을 모르고 늙어 왔다. 때문에 태평 세상의 사람들이 오직 매가정마다 벼슬하게 되고 붓대 놀음으로 봉급과 작위를 받으니 이것이 출세하는
가장 좋은 길이었다. 그리하여 아비는 이것으로 아들을 지도하고 형은 이것으로 아우를 권고한 결과 대체로 과거를 하게 되면 대개 잘되면 중앙급[臺閣]이요 못되어도 지방관을 따서
일신이 편하고 가정을 꾸림에 각각 만족을 누리게 되었다. 어린이들까지도 문학 모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진사(進士)'가 지식인들의 고귀한 칭호로 되고 또
사방의 이목이 모두 그의 풍채를 보기 원하였다. 그리하여 해마다 급제한 사람의 이름은 십여 일도 안 되어 전국에 알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훌륭한 숨은 인재들이 전부 여기서 나오는
일도 있었지마는 왈패꾼과 교활한 무리배들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시비질이 서로 오가고 중상과 칭찬이 서로 얽히며 더러는 파당을 불러 모아서 속으로 짜고 약속함으로써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세상에 날리기도 하며 더러는 그의 비밀을 폭로 적발하여 조소거리인 단편 작품을 만들어 길거리에 퍼뜨림으로써 상호 비방을 하는 등 못할 짓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대종(代宗)의 초기에 예부시랑(禮部侍郞) 양관(楊綰)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에는 인재 선발에 있어서 반드시 품행과 질적인 학문을 표준으로 하여 취택하였었는데 수(隋)나라
양제(煬帝) 때부터 처음으로 진사과를 두었으나 역시 응답서를 받을 뿐이었습니다. 그 후 고종(高宗)시기에 와서 유사립(劉思立)이 처음으로 주달하여 진사과에다 잡문을 첨가하고
명경(明經)과에는 쪽지 뽑이를 첨가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습속으로 되어 대신들이 이렇게 인재들을 상대하고 아비가 이렇게 아들을 지도하게 되었으며 그 중 '명경'에서는 쪽지나 암송하여
요행을 바라게 되었으며 또한 응시자들이 자진하여 요청서를 제출하고 응시하게까지 되었으니 이러고서 순박하고 겸양한 풍속으로 돌아가려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라건대
'효행', '염리'과를 두어서 현령(縣令)들로 하여금 품행이 향촌에서 저명하고 학문으로서 경술(經術)을 해독하는 자를 선발하여 주에 추천케 하며 주의 장관[刺史]이 그들에게 시험을
치려서 정부의 해당 성에 올려 보내게 할 것이며 성에서는 그에게 경서 하나를 추려 뽑으라 하여 그 경서의 내용 20문제를 질문하고 응답서 세 통을 내게 하여 우수한 자에게는 벼슬을
임명하고 합격자에게 출신(出身) 출신(出身)：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고 아직 관직 임명을 받지 않은 자.

을 발급하며 낙제자는 돌려보낼 것이며 그 외의 도교로 보는 과거[道擧]도 국가 정치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니 '명경', '진사'과와 함께 폐지할 것을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대종이 각 부서에 명령하여 이를 토의하라 하였는데 급사중(給事中) 이서균(李栖筠), 좌승(左丞) 가지(賈至), 경조윤(京兆尹) 엄무(嚴武)가 다 양관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고 이어
겸하여 학교를 더 확장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대종이 예부에 명령하여 세칙을 꾸며 보고하라 하였다. 양관이 주달하기를 "국자감(國子監)에서 선발한 인재는 박사로 하여금
좨주(祭酒) 좨주(祭酒)：국자감(國子監)의 고급 관직명.

에게 추천케 하고 제주가 시험을 보여서 통과된 자를 정부에 올려 보내는 절차는 향촌에서 추천하는 방법[鄕貢法]처럼 하며 명법(明法)과 시험은 형부(刑部)에 위임하여 실시할
것입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진사와 명경과는 실시한 지 이미 오래여서 갑자기 고칠 수가 없다"라고 말하여 사업이 그만 수행되지 않았지마는 지식층들은 모두 양관(楊綰)의 말을
옳게 여겼다.[이서균(李栖筠) 등이 토의에 이르기를 "하(夏)나라의 정치는 충직을 주로 했고 은[商]나라의 정치는 공경을 주로 했고 주(周)나라의 정치는 문화를 주로 했었다.
그렇다면 문화는 충직, 공경과 함께 모두 사람의 덕행에 포함되는 것이며 또 시호(諡號)에서 그 사람의 이력을 평가할 때 '문(文)'보다 더 훌륭한 칭호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문화만
발전되면 충직, 공경은 그 속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전 세상에서도 문장으로 인재를 뽑은 것은 문장과 덕행에 기본을 두었던 것이다. 공자는 '안연(顔淵)은 갑에서 발작된
분노를 을에로 연장시키지 않으며 한 번 범한 과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다'라고 칭찬하면서 그것이 학문을 좋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학도들을 고사하는 제도는 글자를
뽑아서 외우면 정통했다 하여 그의 본질적인 의미를 파지 않으니 어떻게 분노를 연장한다느니 과오를 되풀이한다느니 하는 의의를 체득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문장을 고사하는 자는 고
발음의 병통으로 탈을 삼으니 그들이 어떻게 풍속을 개혁하고 전국을 교화하는 방도를 알 수 있겠는가? 이러므로 상부에서는 그 근본을 그르치다 나니 하부에서는 그 지엽적인 것을
답습하게 되어 옛날 조상들의 제도가 실시될 수 없는 것이다. 대체 조상들의 제도가 실시되지 않으면 나쁜 자들의 주장이 우세하게 되고 나라를 배반하는 역도들이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다. 지금 인재를 선발하는 데 있어서 비근한 방법으로써 고사를 진행하고 원대한 것을 도외시하니 이는 마치 달팽이나 지렁이 같은 미끼를 가지고 바다에 넣고 앉아서 큰 고기를
잡으려는 셈이니 또한 곤란하지 않을까? 때문에 주는 미끼를는 것은 모두 송사리떼들이요 과거에 응하는 자는 모두 하찮은 재간을 가진 자들 뿐이다. 그리고 하나라가 세상을 통치한 지
400년 만에 우(禹)임금의 제도가 낡았기에 상(商)나라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상나라가 세상을 통치한 지 600년 만에 탕(湯)임금의 법제가 폐기되면서 주나라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주나라가 통치한 지 800년 만에 문왕, 무왕의 정치가 해이되면서 진(秦)나라가 열국(列國)을 병합하게 되었다. 삼대(三代)의 인재선발과 관리임명에는 전부 그들의 실지
덕행을 고려한 결과 풍속이 순박 솔직하고 역사가 장구하였던 것이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서 이 점을 관찰하고 유술(儒術)을 중하게 여기고 명분과 절의를 숭상한 결과 비록 가까운
친척들이 왕위를 찬탈하고 억센 신하들이 권세를 남용하며 약한 임금은 괴뢰로 서 있고 어미가 정권을 독차지하는 등의 사태를 발로시키기는 하였으나 역시 400년이란 역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학문과 덕행의 성과가 아니겠는가? 위(魏)나라, 진(晋)나라 이후로 전혀 부화와 사치에만 치중하고 도덕과 예의를 돌보지 않은 결과 자손들의 멸망을 촉진시키고 통치
기간이 길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양관의 건의한 바가 실지 올바른 이론이다. 그러나 진(晋)나라의 전란이 있은 뒤로 사람들이 많이 분산 이주하게 되었으니 이제 꼭 자기 지방에서
선거하는 제도를 실시한다더라도 만전을 기할 수 없을 우려가 있다. 이 기회에 겸하여 학교를 확장하여 교양과 설복을 확정하는 동시 서울과 시골을 막론하고 모두 소학을 설치하게 할
것이다. 전쟁 끝에 학생들이 분산되고 학자와 교원들의 녹봉이 나올 데가 없다. 그러므로 박사를 증원하여 그들을 우대하며 고명한 지식인들을 선발하여 지방에다 사이사이 취임시킬
것이다. 즉 열 개 도(道)나 큰 군(郡)마다 태학관(大學館)을 설치한 다음 박사를 파견하여 각 군에 돌아다니면서 겸하여 군의 학교까지를 영도하게 하여 학생들을 교육하도록 할
것이다. 학생으로서 고향에 박혀 있어서 우수한 자는 자기 고을에서 추천하고 객지에 있는 우수한 자는 학교에서 추천하도록 한다면 아침에 실천하고 저녁에 당장 성과를 나타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대종이 양관(楊綰)으로 하여금 조항별로 방안을 작성하여 제출하라 하였었는데 재상(宰相)들이 인재선발에서의 관습을 빨리 개혁시키기는 곤란하다 하여
내년부터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종이 이 문제를 한림학사(翰林學士)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진사과는 이미 폐지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아마도 그들이 학업을 중단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대종이 '명경', '진사' 및 '효렴' 등 여러 과목을 병행시킬 것을 명령하였으나 사업이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의 건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대체로 인재를 선발함에 있어서[당(唐)나라 제도에서는 과거를 거쳐서 진출하였었는데 진사, 명경 등 종류와 같은 것을 '거인(擧人)'이라 하고 관직 순서에 따라 이부(吏部)의 시험을
통과하여 진출한 자를 '선인(選人)'이라 한다. 그리고 전일에 벼슬을 했던 자나 임기 완료된 자도 역시 이부의 시험을 거친 다음에 시험 성적에 따라 조동하게 되었다.] 문과는
이부에서 선출하고 무과는 병부(兵部)에서 선출하는 것을 '전선(銓選)'이라고 한다. 문, 무의 선발 사업을 모두 삼전(三銓)으로 나누어서 상서(尙書)가 그 하나를 맡고
시랑(侍郞)이 그 둘을 분담하는바 대체로 선발이 초겨울에 시작되어 늦은 봄에 끝난다.[매년 5월에 규정을 주, 군에 발표하여 사람들에게 모집 요강을 시달하고 나서 그들을
집합시킨다. 처음에는 일률적으로 이력서를 출신 군 기관에 제출하고 혹 전일 벼슬을 한 자는 전임 장소에 가서 이유를 기입하여 상서성에 제출하는바 시월까지 성에 도착되게 한다.
그러면 성에서는 그 사람의 직함에 대한 내력을 조사하는바 원적, 주소, 부조(父祖)의 관직명 내외 친척의 관계, 연령, 모습, 사업상 우결함, 책벌 범죄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한다. 같은 과에 속한 자 25명씩을 한 패[聯]로 짜며 서울에 있는 관원 5명이 보증[保]을 서되 그 중 1명이 집필[職]을 하여 모두 서명 날인한다. 그러나 이 보증인
중에는 극형을 받은 자의 자식이나, 상인, 장인 등 잡다한 부류들과 남의 성명을 빌리거나 온갖 부정행위를 감행하는 도배들의 잠입 행위를 불허한다. 같은 응시자 중에서 남의 허위
사실을 3명 이상 적발 폭로할 때는 우수하게 대우하여 준다. 시험 기일에 장소를 준비하고 가시울타리로 둘러막고 감시 수색하는 것은 예부에서 실시하는 과거꾼의 규정과 동일하다.]
그의 인재를 심의함에 있어서 네 가지 일[四事]을 기준으로 하니 첫째는 신체인바 그의 몸과 얼굴이 장대하고 풍후함을 취하며, 둘째는 말이니 그의 말씨가 조리 있고 정확한 것을
취하며, 셋째는 글씨니 그의 서체가 굳고 고음을 취하며, 넷째는 판단력이니 그 문체와 이론이 우수함을 취한다. 이 네 가지 조항이 모두 취할 만하면 덕행을 우선적으로 보고 덕행이
균등하면 재능 있는 자를 취하며 재능이 균등하면 공로 있는 자를 취한다. 그 중에서 6품 이하는 집체적으로 고사하되 자격을 고려하고 공로를 참작하여 그에게 벼슬을 임명하며 5품
이상은 시험을 보지 않는다. 대체로 선발할 때에도 처음 보는 시험은 그의 글씨와 판단력을 보고 일단 시험이 끝나면 그의 신체와 말씨를 심사하고 또 심사가 끝나면 관직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여 예정한다. 이것이 끝나면 호명하여 대중에게 발표한다. 그런 다음에는 부문에 따라 일등[甲]을 정하여 먼저 선발하는데 복야(僕射) 복야(僕射)：고대 중국에서 천자를 보좌하던
중요 관직명인데 후에 와서는 좌우 복야의 구별이 있었음.

가 문하성(門下省)에 올려 보내면 급사중(給事中)이 내용을 읽고 황문 시랑(黃門侍郞)과 성 시중(省侍中)이 심의하여 해당치 않은 자는 이유를 달아서 각하한다. 심의가 끝나면 임금께
보고하는데 주관하는 자가 명령에 의거하여 각자에게 신임장[符]을 주고 이것을 '고신(告身)'이라 하였다.[출신(出身)한 사람으로부터 공경(公卿)에 이르기까지 모두 준다.] 무관은
병부에서 받는데 병부의 무과 선발도 마찬가지다. 시험 실시 방법은 문과 시험제도와 같으면서 그의 신체가 듬직하고 말대답이 똑똑하며 용맹과 재간이 있어서 통솔자가 될 만한 자를
선발한다. 만일 문관으로서 무과에 응시하려 할 때는 신장 6척(尺) 이상과 법적 연령 40세 이하로서 완강성과 용감성이 있고 남을 통솔할 만한 자를 고르며 무인으로서 문과에
응시하려 할 때는 글씨와 판단력이 세밀하고 능숙하며 남을 지도할 역량이 있고 전공이 낙후했거나 과오 범한 일이 없는 자를 고른다. 대체로 인재선발에서 규격에 미비한 점이 있더라도
작문 세 편을 잘 쳤으면 '큰 문장[宏詞]'이라고 말하고 어려운 문건의 해독력에서 세 문제를 쳐서 합격하면 '보통에서 뛰어난다[拔萃]'고 이르는바 합격자는 제한이 없이 벼슬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벼슬 임명이 끝나면 모두 궁궐 앞에서 임금감사를 드린다.[처음에 이부(吏部)가 재주를 가림에 장차 그 사람을 보되 그 공문(公文) 처리하는 이사(吏事)를 가지고
심사하는데 비로소 주현(州縣) 문서(文書)의 의의(疑議)를 취하여 그것을 어떻게 결단하고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시험하여 그 능(能)하고 능치 못하고 함을 보니 이가 소위
판(判)이다. 그 뒤에 세월이 점점 오래고 선인(選人)이 너무 많고 문서의 뜻이 천근(淺近)하여 어렵게 여길 것이 되지 못하니 이에 경적(經籍)의 옛 뜻을 가지고
갑론(甲論)ㆍ을론(乙論)을 가설하여 그것을 판단케 하더니 그 뒤에 시험 보러 오는 자가 더욱 많아서 일반 통용되는『경서(經書)』와 정식(正式)의 서적으로서는 또 문제를 삼을 것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통용되지 아니하는 벽서(僻書)와 정상치 아니한 곡학(曲學)의 숨은 뜻을 끄집어내어 묻되 오직 사람들이 능히 그것을 알아맞힐까 두려워하였으며 공교(工巧)한 자는
과거에 오르니 이것을 입격(入格)이라 이르고 몹시 졸렬한 자는 남루(藍縷)라 일렀다.]

처음 무덕(武德) 연간에 전쟁이 막 종식되고 글 읽은 자는 취직을 요구하지 않으며 관직에는 인원이 차지 않기 때문에 이부에서 지방 기관에 공문을 띄우고 사람들이 응시하도록 과업을
준 다음 오는 대로 벼슬을 주어 하나도 버리는 것이 없었는데 4∼5년 동안에 요구하는 자가 점차 많아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미끄러지는 자가 있었다. 정관(貞觀) 연간에는 서울에
식량이 귀하였기 때문에 처음으로 낙주(洛州)에다 인원을 나누어 선발하였는데 응시자는 7천 명이고 벼슬에 붙은 자는 6천 명이었었다. 그때 태종(太宗)이 이부상서(吏部尙書)
두여회(杜如晦) 두여회(杜如晦)：중국 당나라의 건국 초기에 법전과 여러 제도를 많이 제정한 유명한 재상.

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부에서 인재를 선발함에 있어서 말과 글씨만을 주로 하고 그의 재능과 덕행을 세밀히 따지지 않은 결과 혹시는 관직을 받은 몇 해 만에 죄악이 드러나므르 아무리
이어 처형을 가하여도 사람은 벌써 없어지고 마는 형편이니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옛날 한나라 때에는 사람을 뽑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지방에 기초를 두어
선발한 다음에야 관직에 등용했기 때문에 모두들 한나라에 인재가 많다고 일렀던 것입니다. 지금은 해마다 인재를 모집하는데 걸핏하면 수천 명씩 되니 외모가 풍후하고 말만 잘하는
것으로서 어떻게 감별하겠는가? 게다가 선발을 책임진 부서는 다만 그의 벼슬 품계만 따질 뿐이니 재능을 가리고 덕행을 분간하려 하여도 어떤 방침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그때부터 한나라 법에 의거하여 중앙에 소재한 주로 하여금 공신들을 소집하게 하고 봉건제도를 수립할 데 대하여 토의하다가 사업이 그만 중지되고 말았다. 다음날 태종이 다시
말하기를 "예나 이제나 좋은 정치를 이룩하는 데는 훌륭한 인재를 얻는 데 있다. 그런데 지금 대신들이 잘 알 수 없고 내가 일일이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인재들은
멀어진다. 그리하여 나는 앞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추천하도록 하려는데 그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위징(魏徵) 위징(魏徵)：중국 당나라 초기의 명재상으로 일컬어졌으며
공영달(孔穎達)과 함께 주(周)나라와 수(隋)나라 역사를 편찬한 사람.

이 대답하기를 "대체로 슬기로워야 남을 알고 총명해야 자기를 아는 것이므로 남을 알기란 정말 어려운 것인데 자신을 아는 문제가 어찌 용이하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계집들의 정당하지 못한 행동일 뿐더러 이것은 혼란과 경쟁을 조장하는 것이니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다시 중지되었다. 이 시기로 말하면 이부의 법규가 실시된 지
20년 남짓한 정도여서 그 중에서 폐단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다지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층에서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더러 있었으며 태종은 그 조짐을 알고도 미처 고치지
못하였다. 그대로 답습하다가 영휘(永徽) 연간에 이르러서는 관리의 규율이 이미 문란해졌으며 인덕(麟德) 후기에 임박해서는 그 폐단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무후가 직접 정치를 간섭하면서부터 인심을 사는 데 노력하여 자격 여하를 불문하고 응시자를 많이 받아들였으나 직원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속 이부로 하여금 대량적으로 시험관을
두어 처리하게 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수레로 싣고 말로 된다'는 노래까지 있었다. 또한 등현정(鄧玄挺) 등현정(鄧玄挺)：중국 당나라 무후(武后) 때 사람.

, 허자유(許子儒) 허자유(許子儒)：중국 당나라 고종(高宗) 때 사람.

등을 시랑(侍郞)으로 임명하였는데 그들은 아무런 식별의 표준도 없으면서 영사(令史) 영사(令史)：각 관처에 소속된 구실아치의 하나.

에게 위임하여 관등에 따라 평균식으로 분배한 결과는 그 후 벼슬꾼이 허투루 들어온 것이 많아서 걷잡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공문서를 위조하는 자도 있고 남의 명의를 빌리는
자도 있고 먼데 사람으로서 친분관계도 없으면서 보증을 사서 세우는 자도 있고 시험 시기에 남에게 대리 작문을 받는 자도 있어서 이러한 부정 사실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무후는
또 이부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많이 공정치 못하다 하여 이어 시험 날에 자체로 이름을 봉하게 한 다음 비밀로 고사하여 등수를 결정케 하였는데 이름 봉하는 방법이 이때부터
시작하였다.

신룡(神龍) 이후부터는 위후(韋后)가 정권을 행사하면서 벼슬을 옳지 않게 임명한 것이 많았고 정음(鄭愔) 정음(鄭愔)：중국 당나라 때 이부시랑(吏部侍郞) 벼슬을 한 사람.

이 이부시랑이 되어서 공개적으로 선물을 받고 너무 많이 사람을 뽑아서 빠짐없이 등록하는 동시 벼슬을 주고 삼 년째 결원된 것들까지 소급시켜 보충하여 넣었다. 현종(玄宗)의 초기에
송경(宋璟) 송경(宋璟)：중국 당나라 때의 저명한 재상.

이 상서가 되어 비로소 지난 시기 결함들을 퇴치하였었는데 그 후 양국충(楊國忠) 양국충(楊國忠)：중국 당나라 때 양귀비의 사촌 남형.

이 상서가 되면서 남의 시비를 자아낼까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근무 연한이 많은 자부터 모조리 등용한 결과 미련하고 하급에 오래 있던 자들은 다 좋다고
감복하였지마는 국가 규율은 여지없이 문란하였다.

송(宋)나라의 인재 선발하는 제도는 대개 당나라의 과목을 답습하여 진사과와 명경 기타 여러 과들이 있었고 정상적인 선발 이외에 또 '제술 과거[制科]'가 있어서 그 시험 과목은
역시 시(詩), 부(賦), 책(策), 경전 필답[墨義] 등 종류가 있었다. 영종(英宗)이 해를 걸러 인재를 추천하는 방법은 불편하다 하여 예부에 명령하여 3년에 한 번씩 추천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정상적인 규례로 정하였다.[이보다 앞서는 매양 한 해 걸러 과거를 설(設)하였다.]

신종(神宗)시기에 참정 왕안석(王安石)이 아뢰어 말하기를 "지금 인재가 결핍되고 또 그들의 학술이 한결같지 않아서 외론이 분분한 것은 도덕을 통일시키지 못한 탓입니다. 도덕을
통일시키려면 학교제도를 정비해야 하고 학교제도를 정비하려면 선거제도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이 과목에서 항상 인재를 얻게 된다면 그들이 자연 그 길을 따라 출세하게
되고 별다른 길이 없을 것이니 그 중에는 훌륭한 사람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나이 젊고 정력 좋은 때 꼭 사물의 진리를 강구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문 닫아 걸고
시나 부[詩賦] 짓기만 배운 결과 벼슬에 나간다 해도 사회의 실정은 전부 모르고 있으니 이는 선거법이 못쓰게 되어서 인재들을 옛날과 같이 선발해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바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의 인재선발은 모두 학교에 기본을 두었기 때문에 도덕이 위에서 통일되고 그것이 밑에서 습속으로 이루어져서 거기에서 산출한 인재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세상에서 역할을 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옛날 제도를 회복하려면 점진적인 조치가 없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러므로 운문적인 대구식 문장으로 과거보는 것을 없애고 학도들로
하여금 경전의 원리에 전력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법을 개정하여 시ㆍ부와 경전의 쪽지뽑기[帖經] 및 경전의 필답 등의 시험을 폐지하고 응시자들이 각자 『주역』,
『시경』, 『상서』, 『주례』, 『예기』 또는 『논어』, 『맹자』 등 서적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여 대의를 논술하는 방식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대의로 응시하는 자는 꼭 경의 내용을
잘 알고 문장력이 있어야만 합격으로 간주하였다. 희령(熙寧) 3년에 신종이 직접 '진사' 시험을 보이는데 단 한 가지 응답서로 결정하는 동시 1천 자 이상의 저술을 하라 하였다.
그러다가 원우(元祐) 초기에 다시 이전 방법을 적용하여 시, 부로 시험을 실시하였다.[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빈말공부는 본래 사람을 교육하는 것이 못되며 인재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며 시ㆍ부란 또 빈말공부 중에서도 첫째가는 빈말로서 그것이 시험제도를 설정하고 인재를 선발하는 데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할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신종이 시ㆍ부 과거제도를 폐지했지마는 논의하는 자들이 옳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시ㆍ부를 폐지해서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왕씨(王氏)의 경의에 대한 옳지 못한 이론을 주로
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원우 초기에 그것을 개혁하려고 논의가 있었으나 사마광[司法溫公]과 여신공(呂申公)이 모두 옛날 것을 회복하려 하지 않았었고 그 중 회복하려고 노력한 자는
오직 유지(劉摯)이었으나 고사하기가 곤란하다고 말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들의 지식이 저열하고 이론이 비속한 것으로 보아 어찌 그들과 함께 옛날의 학문을 존중히 하고 인재를 등용하던
본의를 논의할 수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당장 폐지해야 할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그런데 근년부터 경술(經術)을 공부하는 자들이 경전의 본문과 선배들의 주석은 읽지 않고 다만 요즘 과거에 합격한 글들을 뽑아서 암송 모작하며 경전 가운데서 제목이 될 만한 문구를
가려서 저의 마음대로 날조하고 건방지게 주장을 내세운다. 이들은 그것이 경전의 본의가 아닌 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다만 문장 구성에 편리한 것만을 취하여 그 외에는 고리를 돌리지
않는다. 주관 기관에서도 그 오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세련된 작품이라 하여 우등으로 매번 결정하므로 이것이 한 개 습속으로 되어 나도 너도 본뜬 결과 선철들의 언론을
모독함이 낱로 더욱 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명목은 경전을 공부한다지마는 실지는 경학의 적이며 글을 짓는다지마는 실지는 문자의 요물이 되어 그 폐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또
주관 기관에서 제목 제시에 있어서 다수 경우 이상야릇하게도 응시자들이 상상 못할 만한 것을 찾아내어 응당 떼야 할 데를 반대로 붙이며 응당 붙여야 할 데를 반대로 떼어서 어쨌든
이치로 해석할 수 없고 말로 통할 수 없게 함으로써 갑작스러운 순간에 옳게 붙이고 떼는 재간을 보려고 애를 쓴다. 주관 기관에서 이미 이것으로 선창하고 응시자 역시 이것으로
호응한다. 그리하여 평소에 학습한 자도 전연 경전 문구를 오려 가지고 교묘하게 각색 떡작란[鬪飣]을 함으로써 시험관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니 이것은 또한 경학의 적(賊) 중의 적이요
문자의 요물 중의 요물[妖]이다"라고 하였다.]

명(明)나라의 인재 선발하는 제도는 역시 이전의 과목을 답습하여서 제술과, 명경, 굉사(宏辭)의 종류 같은 과목들을 다 폐지하고 다만 진사과만 존속하였으나 역시 경서의 본의,
논설, 임금에게 올리는 문장들로써 고사하고 3년 만에 한 번씩 시험을 실시했다.[태조(太祖) 초기에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폐지하려 하였으나 이어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듣고 이전
과거법의 기성제도에 의하여 만 3년 되는 해 8월에 각 성에서 지방 고사를 진행하고 다음해 2월에 예부에서 회시(會試)를 보이되 응시자들은 각각 경서 한 가지를 주로 하는 동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 사서(四書)는 공통 과목으로 하였다. 첫 시험은 초 9일에 보는데 5경의 요지를 고사하는바 각각 기본 과목 한 통[道]은 500자
이상으로 규정하며 사서의 요지 한 통은 300자 이상 쓰게 하였다. 다음 시험은 12일에 보는데 예법과 음악에 대한 이론을 300자 이상으로 쓴 것 한 통과 조소 고유문,
표문[詔誥表] 중 한 통을 제출하게 했다. 마지막 시험은 15일에 보는데 경전이나 역사 및 시무책(時務策) 중 한 통을 1천 자 이상으로 쓸 것을 규정했다. 전시(殿試)
전시(殿試)：조선시대 국왕의 임석 하에 마지막 시험을 보던 과거.

인 경우에는 3월 초 1일에 시무책으로 1천 자 이상 한 통을 써내도록 했다. 영락(永樂) 연간에 또 첫 시험에는 사서(四書) 내용에서 세 통과 경의(經義)에서 네 통으로 쓸 것을
규정했고 끝 시험에는 시무책 다섯 통으로 하되 불가능한 자에게는 어느 것이고 두 통씩을 삭감해 주었다. 그리고 향시(鄕試)의 정원수는 처음에 500명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성들에
평균 40명씩 배정하였으니 복건(福建)은 30명, 광동(廣東)과 광서(廣西)는 각 25명, 직례(直隸)는 100명으로 되었으나 만일 응시자가 많을 경우에는 정원의 제한이 없이
뽑기도 하며 수에 차지 못할 때는 실수대로 선발했으며 회시(會試)는 정원을 100명으로 했다.

선덕(宣德) 연간에는 다시 두 서울과 열두 성[귀주(貴州)는 운남(雲南)에 합함]으로 배정하여 시험 합격자는 그 지방 인재의 다소에 따라 인원수를 조절하였다. 또 북부 지방
학자들은 문장이 부족하다 하여 남부, 북부, 중부 세 지역으로 나누어 인재를 뽑았었다. 정통(正統) 연간에는 각 지방의 기정 인원수에 대비하여 증원시켰으므로 지금은 50％ 가량
초과된 셈이다. 경태(景泰) 초기에 또 회시를 변경하여 정원을 없이하고 임기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아 수효를 결정했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조상 때의 시험문제는 전부 경전 속에서 내는바 윤리와 정치 방도에 직접 관계되는 대체의 원리, 제도를 제목으로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문제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학도들이 전적으로 크고 중요한 것에 주의를 하면서도 여유 시간이 있으면 부차적으로 다른 서적에 유의할 수 있었으며 이 부문 책임 일꾼들도 그들을 고사하기에
용이하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이를 주관하는 자들이 응시자에게 모르는 부분으로 곤란을 주기 위하여 경서에서 문제를 출제하는데 흔히 궁벽한 것을 찾아서 억지로 구절을 쪼개고
경문(經文)을 갈기갈기 찢어서 붙이지 않을 데를 붙이고 떼지 않을 데를 떼어 놓은 결과 그만 응시자들로 하여금 의거할 곳이 없게 만든다. 이로 인하여 첫 시험 문제가 전보다 몇
배나 많아서 학도들은 있는 정력과 있는 시력(視力)을 다 바쳐도 미처 해결해내지 못한 자가 있었다. 때문에 시무책(時務策) 시험에서 보는 소위 고금의 제도라든가 과거의 정치적
업적과 당면의 대책들에는 노력할 사이가 없게 되고 심지어는 선두에 등록되었다는 자도 역사서적의 이름과 글자의 변[偏傍] 같은 초보적인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또 소위
'주의(主意)'라는 술어는 더욱 얼토당토않은 것인바 대체로 제시한 문제에서 전적으로 한 가지 의견[一說]을 주장한 것을 '주의'라고 한다. 응시자들은 반드시 그것에 맞출 것을
결심하는 동시에 시험관의 의도와 틀리면 합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경전의 본의를 가지고 추상과 왜곡으로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출제자의 목적한 의도에 맞기를 위주하니 이것은 비단
학도[사자(士子)]들의 기습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선철들의 고전에 대한 해독으로 되는 것이 더 심하다. 주관자[主司]들이 이것을 목표로 문제를 내고 학도[士子]들이 이것을 목표로
답안을 작성하며 오늘에도 학도가 이것으로써 출세를 하고 다음날 주관자[主司]가 되어서도 이것으로써 간부를 선발할 모양이니 『송사(宋史)』에서 말하는 '나쁜 악습의 종자가 오늘의
폐해를 유전시켰다'라는 것이 자못 이에 비슷한 말이다. 비단 과거제도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각 도의 제학(提學)과 헌신(憲臣)들의 재주 시험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한나라 때부터 지금까지의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이다. 대체로 삼대시기에는 백성에게 경지를 분배해 준 다음 교육을 시켰으며[기른다 함은 토지와 향리(鄕里)를 제정하고
부과(賦課)와 징렴(徵斂)을 고르게 하여서 생활을 부(富)하게 함을 이름이고 가르친다 함은 학교를 세우고 예의(禮義)를 밝힘으로써 가르침을 이름이다.] 교육을 시킨 다음
등용하였다. 한(漢)나라로 말하면 경지분배와 교육사업이 없었지마는 인재 선발에 있어서는 그래도 지방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인재를 놓치지 않았으며 풍속이 순박하여 성실한 것을
앞세워서 허위의 기풍이 없었다. 수나라, 당나라 후로는 전연 문학만으로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인재를 탐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종래의 제도마저 더 파괴한 것이 되었다. 대체로
세속의 융성 침체와 인재의 많고 적은 것은 곧 여기에 관련되기 때문에 이것이 언제나 평화스러운 시일이 적고 전쟁의 기간이 많게 되며 간교한 무리들이 득세하고 미개한 종족들의 침략을
받게 되는 기본 요인이다. 정치적 관심을 가진 임금이 정말 지난 시기의 제도를 더듬어 보고 그 사실을 연구한다면 자연히 그에 대한 원인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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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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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高祖初 未遑立制. 十一年 乃下詔曰"蓋聞王者 莫高於周文 伯者莫高於齊桓 皆待賢人而成名. 今天下賢者智能 豈特古之人乎? 患在人主不交故也. 賢士大夫有肯從我游者 吾能尊顯之 布告天下
使明知朕意. 其有意稱明德者 必身勸爲之駕有賢者 郡守自爲勸勉 駕車遣之. 遣詣相國府署行義年. 謂行狀年紀也 有而不言 覺免.發覺免其官.惠帝四年 詔擧孝悌力田者 復其身. 文帝十五年
詔諸侯ㆍ王公ㆍ卿ㆍ郡守 擧賢良能直言極諫者. 武帝初 董仲舒對策曰"臣愚以爲使列侯郡守二千石 各擇其吏民之賢者 歲貢各二人 以給宿衛. 且以觀大臣之能所貢賢者賞 所貢不肖者有罰. 夫如是 諸侯吏二千石
皆盡心於求賢 天下之士 可得以官使也."帝於是 令郡國 各擧孝廉各一人. 旣而 定制郡國口二十萬以上 歲察 一人. 四十萬以上 二人. 六十萬 三人. 八十萬 四人. 百萬 五人. 百二十萬 六人.
不滿二十萬 二歲一人. 不滿十萬 三歲一人. 今推漢時戶口 一歲所貢不過二百餘人 限以四科 一曰德行高潔 志節淸白. 二曰學通行修 經中博士. 三曰明習法令 足以決疑 能按章覈問 文中御史.
四曰剛毅多略遭事不惑 明足決斷 材任三輔縣令.元光五年 又詔徵吏民 有明當世之務 習先聖之術者 縣次續食 令與計偕. 計者 上計簿使也. 郡國每歲 遣詣京師上之 令所徵之人與計者 俱來
而縣次給之食也. 元朔元年 又詔曰"本仁祖義褒德錄賢 勸善刑暴 五帝三王所繇昌也. 故詔執事 興廉擧孝 庶幾成風. 夫十室之邑 必有忠信. 三人同行 必有我師. 今或闔郡 不薦一人是化不下究
而積行之君子 壅於上聞也. 二千石官長紀綱人倫 將何以佐朕燭幽隱 勸元元 勵烝庶 崇鄕黨之訓哉? 且進賢受上賞 蔽賢蒙顯戮 古之道也. 其與中二千石 禮官博士議 不擧孝廉者罪!"有司奏曰"古者諸侯貢士
一適 謂之好德. 適得其人 再適 謂之賢賢. 三適 謂之有功. 乃加九錫. 杜佑曰'九錫 經本無文. 周禮以爲九命 春秋說有之 九錫備物 伯者盛禮 齊桓ㆍ晉文猶不能備. 今三進賢便受之 似不然也
當受進賢之賜. 尙書大傳云'三適謂之有功 賜以車服弓矢.' 不貢士 一則黜爵 再則削地 三則黜爵削地畢矣. 夫附下罔上者死 附上罔下者刑. 與聞國政 而無益於人者斥. 在上位而不能進賢者退.
其不擧孝不奉詔 當以不敬論. 爲其不求士報國也. 不察廉 不勝任也 當免."奏可.漢制 凡郡國 皆得自署其屬僚. 又調屬僚及部人之賢者 擧爲秀才廉吏 而貢於王庭 多拜爲郎. 居三署無常員 或至千人
屬光祿勳. 故鄕校牧守 居閑待詔 或郡國貢送公車 徵起悉在焉. 光祿勳 復於三署中 詮第郎吏 歲擧秀才廉吏 出爲他官 以補缺員. 後漢制同. 元朔五年 詔爲博士官 置弟子五十人 復其身.
太常擇民年十八已上儀狀端正者 補博. 郡國縣邑 有好文學 敬長上 肅政敎 順鄕里 出入不悖所聞者 令相長 丞上屬所二千石. 二千石謹察可者 常與計偕. 詣太常 得受業如弟子. 一歲輒試 能通一藝以上
補文學掌故缺. 其高第可以爲郎中者 太常籍奏 卽有秀才異等 輒以名聞. 其不事學 若下材及不能通一藝者 輒罷之 而請諸不稱者罰.元帝時 詔列侯擧茂才 諫議大夫張勃 擧大官獻丞陳湯 湯有罪 勃坐削戶二百
曾薨. 故賜謚曰繆侯. 以其所擧不得人 故加惡諡. 其爲勸勵也 如是. 故是時 自文景以來官得其材 位必久安.○後漢光武帝詔"三公 擧茂材各一人 廉吏各一人. 左右將軍 歲察廉吏各二人. 光祿
歲擧郎ㆍ茂才四行各一人 察廉吏三人. 中二千石歲察廉吏各一人 廷尉大司農二人. 將兵將軍 歲察廉吏各二人. 監察御史ㆍ司隸州牧 歲擧茂材各一人."前漢曰秀才 後漢避光武諱 故曰茂才. 其時選擧
於郡國屬功曹. 於公府屬東西曹. 於天臺屬吏部曹. 尙書令總之. 成帝時 初置尙書五曹 通掌章奏. 一曰常侍曹 主公卿事. 二曰二千石曹 主郡國事. 至光武 改常侍曹爲吏部曹主選擧
此吏部之法所由始也. 是時尙書 雖有曹名 不以爲號. 尙書令初甚秩卑 其後漸重. 光武親總吏職 不任三公. 故權歸尙書 於是尙書令 爲端揆之任. 凡郡國守相 視事未滿歲 不得察擧孝廉. 于時所徵擧
率皆特拜 不復簡試 士或矯飾. 章帝初 詔曰"鄕擧里選 必累功勞. 今剌史守相 不明眞僞 旣非能者而當授之政事 甚無謂也. 每尋前代擧人貢士 或起畎畝 不繫閥閱. 敷奏以言 則文章可採. 明試以功
則理有異跡 朕甚嘉之."乃復用前漢丞相故事 以四科辟士 擧非人兼不擧者罪.順帝陽嘉元年 尙書令左雄 議改察擧之制 限年四十以上儒者試經學文吏試章奏 若有茂才異行 不拘年齒.
尙書僕射胡廣駁曰"選擧因才無拘定制."漢承周秦 參雜王覇 代以致理 莫或回革 帝竟從雄議. 於是雄上言"郡國孝廉 古之貢士 出則宰人 宣協風敎. 若其面墻 則無所施用.
孔子曰'四十而不惑.'禮稱'强仕'自今孝廉 年不滿四十 不得察擧. 皆先詣公府 諸生試家法文吏課牋奏副之端門 練其虛實 以觀異能 以美風俗. 有不承科令者 正其罪. 其有茂才異行若顔淵子奇
不拘年齒."乃班下郡國 明年濟陰太守胡廣 廣以僕射出爲太守. 等十餘人 皆坐繆擧免黜. 惟汝南陳蕃ㆍ穎川李膺等三十餘人 得拜郎中. 自是牧守畏慄 不敢輕擧. 雄在尙書 迄于永嘉 十餘年間 察選淸平
多得其人. 太史令張衡 上疏曰"自初擧孝廉 迄今二百歲 皆先孝. 行之有餘力 乃學文法耳. 今詔書以能章句奏案 爲限. 雖有至孝 猶不應科 此棄本而取末也. 曾子長於孝 然實魯鈍. 文學不如游夏
政事不若冉季. 今欲使一人兼之 苟外有可觀 內必有闕矣."永和中 詔擧武猛任將帥者 左雄爲司隸校尉 薦馮直 任將帥. 直嘗坐贓受罪 尙書周擧以此劾奏雄.
雄曰"詔書使選武猛不使選淸高."周擧曰"詔書使君選武猛 不使君選貪汚也."擧本雄所薦. 雄曰"進君適所以自伐也."擧曰"昔趙宣子 任韓厥爲司馬 而厥戮其僕. 宣子謂諸大夫曰'可賀我矣'今君不以擧之不才
誤升諸朝 不敢阿君 以爲君羞 不窹君之意 與宣子殊也."雄悅謝曰"是吾過也."天下聞而兩賢之. 漢安二年 黃瓊爲尙書令 以左雄所上孝廉之選 專用儒學文吏. 於取士之義 猶有所遺. 乃奏增孝悌及能從政者
爲四科. 范曄曰"古者諸侯貢士 進賢受上賞 非賢貶爵士. 升之司馬 辨論其才 論定然後官之 任官然後祿之. 故王者得其人 進仕勸其行 經邦弘務 所由久矣. 漢初 詔擧賢良方正. 州郡 察擧孝廉秀才
斯亦貢士之方也. 中興以後 復增敦朴有道 仁賢能直言 獨行高節ㆍ質直ㆍ淸白ㆍ敦厚之屬. 榮路旣廣 自是竊名僞服 侵以流競權門貴士請謁繁興. 自左雄任事 限年試才 雖頗有不密 固亦因識時宜.
而胡廣ㆍ張衡ㆍ崔瑗之徒 泥滯舊方 互相詭駁 循名者屈其短 算實者挺其効. 雄在尙書 天下不敢繆擧 十餘年間 稱爲得人 斯亦效實之徵乎! 舊典選擧 委任三府 三府有選. 參議椽屬 咨其行狀 度其器能
受試任用 責以成功 名無可察 然後付之尙書之擧 剌請下廷尉 覈按虛實 行其誅罰."○魏曹丕時 天下喪亂 士流播遷 四人錯雜 詳覈無所. 吏部尙書陳群 以天朝選用 不盡人才 乃立九品官人之法
州郡皆置中正 以定其選擇州郡之有鑑識者 爲之區別人物 第其高下. 又制郡口十萬以上 歲察一人 其有秀異 不拘戶口. 其武官之選 俾護軍主之. 杜佑曰"九品之制初因漢末 天下兵興 衣冠士族 多離本土.
魏氏革命 州郡縣 俱置大小中正 各以本處人 在諸府公卿及臺省郎吏 有德充才盛者 爲之區別 所管人物 定爲九等. 其有言行修著 則升進之 或以五升四 以六升五. 如或道義虧缺 則降下之 或自五退六
自六退七矣. 蓋以吏部 不能審定天下人才士庶. 故委中正 銓第等級 憑之補受 欲以免乖戾救法弊也. 其後中正 多非其人 不復辨其賢愚 唯以門閥爲高下. 南朝至于梁陳 北朝至于周惰 選擧之法 雖互有損益
而率用九品及中正. 至開皇中 乃罷之."○晉依魏九品之制 內官吏部尙書司徒左長史 外官州有大中正. 郡國有小中正 皆掌選擧. 若吏部選用 必下中正 徵其人居及父祖官名. 時風敎頹失 而無典制.
然有淸議 尙能勸俗. 陳壽居喪 使女奴丸藥積年沉廢. 郤詵篤孝 以假葬違常 降品一等. 其爲勸懲也 如是. 其後中正失人 愛憎由己 而九品之法 漸弊. 遂計官資 以定品格 天下唯以居位者 爲貴.
尙書僕射劉毅以爲 九品是權時之制 非經久之典. 宜用土斷 復古鄕擧里選之法. 上疏曰"九品有八損 而官才有三難 皆興替之所由也. 人物難知一也 愛憎難防二也 情僞難明三也. 今之中正定九品 高下任意
榮辱在手 一人之身 旬月異狀. 上品無寒門 下品無勢族 損政之道一也. 置州都 州都卽中正 者 本取州里淸議所服將以鎭異 仝一言議 不謂一人之身 了一州之才 一人不審 遂爲坐廢也. 今使是非之論
橫於州里 嫌隙之仇 結於大臣 損政之道二也. 本立格爲九品者 謂才德有優劣 倫輩有首尾也. 今乃坐徇其私 優劣易地 首尾倒錯 損政之道三也. 陛下賞善罰惡 無不載之以法. 獨中正委以一國之重
而無賞罰之防 使得縱橫 無所顧憚. 又禁人訴訟 使受枉者 不獲上聞 長壅蔽於邪人之銓 損政之道四也. 古先政敎崇鄕黨之義 故天下之人退而修本. 今一國之士 多者千數 或流徙異邦 或給事殊方
猶不識其面. 况能盡其才乎? 而中正知與不知 將定品秩. 必採譽於臺府 納毁於流言 任己則有不識之弊 聽受則有彼此之偏. 所知者 以愛憎奪其平所不知者. 以人事亂其度 旣無鄕老紀行之議
又非朝廷考績之課. 遂使爲官之人 棄近求遠 背本趨末 損政之道五也. 凡求人才 以治民也. 今當官著效者 或付卑品 在官無績者 更獲高叙. 是爲抑功實而崇虛名 長浮華而廢考績 損政之道六也.
凡官不同事 人不同能 今不狀其才之所宜 而但第爲九品. 以品取人 或非才能之所長 以狀取人 則爲本品之所限. 徒結白論 品狀相妨 七也. 今九品 所下不彰其罪 所上不列其善. 廢褒貶之義 任愛憎之斷.
天下之人 焉得不懈於德行 而銳於人事乎? 損政之道八也. 職名中正 實爲奸府 事名九品 而有八損 宜罷中正除九品 更立一代之制."司空衛瓘亦曰"昔聖王崇賢擧善而敎用 使朝廷德讓 野無邪行.
誠以閭伍之政 足以相檢 詢事考言 必得其善. 人知名不可虛求 故還修其身. 是以崇賢而俗益睦 黜惡而行彌篤. 斯則鄕擧里選者 先王之令典也. 魏氏承喪亂之後 人士流移 考詳無地. 故立九品之制
粗具一時進用之本耳. 其始選也 鄕邑淸議 不拘爵位 褒貶所加 定爲勸勵 猶有鄕論餘風. 中間漸染 遂升資定品 使天下觀望. 唯以居位爲貴 棄德而忽道 爭多少於錐刀之末 傷損風俗 其弊不細. 今九域同規
宜皆蕩除末法 一擬古制 以土斷定. 自公卿以下 皆以所居爲正 無復縣客遠屬異土 盡除中正 使擧善進才 各由鄕論. 然則下敬其上 人安其敎 俗與政俱淸 化與法並濟. 人知善否之敎 不在交游 卽華競自息
各求於己矣."時 始平王文學李重亦上疏曰"九品始於喪亂 軍中之政 誠非經國不刊之法也. 且檢防轉碎ㆍ徵形失實 駈動風俗 爲弊已甚. 謂九品旣除 先開移徙 聽相倂就 且明貢擧之制 不濫於境外
則土斷之實行矣. 若使人思反本 修之於鄕 奔競自止 禮義日崇矣."帝雖善之 而時賈ㆍ郭專朝 仕者務速進 故皆不能行.○東晉元帝制楊州歲貢二人 諸州各一人. 時以天下喪亂 務存慰勉遠方秀孝 不復策試
到卽除署. 旣經略粗定 乃試經 有才不中擧者 免其太守. 後趙石勒 使右校張賓 領選定九品六科. 命公卿及州郡 歲擧秀才 至孝ㆍ廉淸ㆍ賢良ㆍ直言ㆍ武勇之士各一人. 復依晉制 立秀孝 試經法.
○秦符堅以四科擧士命牧伯守宰 各擧孝悌ㆍ廉直ㆍ文學ㆍ政事. 察其所擧 得人者賞 非其人者罪之. 由是 人莫敢妄擧 而請托不行 士皆自勵. 雖宗室外戚 無才能者 不用. 是時 內外之官皆稱職 田疇修闢
府庫充實 盜賦屛息.○劉宋制 丹陽ㆍ吳ㆍ會稽ㆍ吳興四郡 歲擧二人 餘郡各一人. 凡州秀才ㆍ郡孝廉至 皆策試 帝或親臨之. 及公卿所擧 皆屬于吏部 叙才銓用. 凡擧得失 各有賞罰. 失者其人加禁錮
年月多少 隨部議制. 文帝元嘉中 限年三十而仕 郡縣以六周而代 剌史或十餘年. 及孝武帝立仕者不復拘老幼 守宰以三周爲滿. 左衛將軍謝莊 以其時搜才路狹 上表曰"九服之曠 九流之難 提鈞懸衡
委之選部. 一人之鑑易限 而天下之才難源. 以易限之鑑 照難源之才 使國罔遺授 野無滯器 其可得乎? 請普令大臣 各擧所知 以付尙書銓用."不從 帝又不欲重權在下 乃分吏部 置兩尙書 以散其權.
裴子野曰"官人之難 先王言之詳矣. 居家視其孝友 鄕黨察其誠信 出入觀其志義 憂難取其智謀. 煩之以事 以求其理 臨之以利 以察其廉. 周禮始於學校 論之州里 告諸六事 而後貢於王庭. 其在漢家
尙猶然也. 州郡積其功能 然後爲五府所辟. 五府擧其椽屬 而升之於朝 三公參其得失 除署 尙書奏之天子. 一人之身所閱者衆 一賢之進其課也詳. 故能官得其才鮮有敗事. 魏晉易是 而所失弘多.
夫厚貌深裏 險如谿壑 擇言觀行 猶▩不周. 况今萬品千羣 俄折乎一面 庶僚百位 專斷於一司. 於是囂風遂行 不可止已. 擊轂攘袂 塡彼寺臺 求者干進 以務必得. 加之以諳黷吏曹 按閥閱而選擧
不遑訪採於鄕邑. 父誨其子曰'不索何獲?'兄勵其弟曰'努力窺覦.'無廉恥之風 謹愿之操 官邪國敗 而不可紀綱. 假使龍作納言 舜居南面 而治政平章 不可必也. 况後之哲人者哉? 孝武雖分曹爲兩
不能反之周漢 朝三暮四 其病愈甚也."○齊仍宋限年之制 然而鄕擧里選 不覈才德 其所進取 以官婚胄籍爲先 遂令甲族 以二十登仕 後門以三十試吏. 故有增年矯貌 以圖進者. 其時 士人皆厚結姻援
奔馳造請 浸以成俗.O後魏州郡 置中正掌選擧. 每以季月 與吏部銓擇可否. 其秀才對策第居中上 表叙之. 至孝明帝時 胡太后臨朝 始令武人 依資入選. 初 孝文帝勵精求治 精選中正 德高鄕國者充之.
其邊州小郡人物單鮮者 則倂付他州 當時稱謂得人. 及宣武ㆍ孝明時 州無大小 必置中正 多不得人. 或有庸鄙者 操銓覈之權 選叙頹紊 有以雜類冒登淸流. 乃罷中正 遂令在位者 皆五人相保 無人保任者
奪官還役. 時孝明嗣立幼冲 胡太后臨朝 征西將軍冀州大中正張彝之子仲瑀上封事 請銓別選格 排抑武夫不使預淸品. 於是 怨謗盈路 乃懸榜於衢 會期屠害 羽林ㆍ虎賁千餘人 相聚焚其第 敺曳彝殺之
京師震駭. 太后斬其凶彊者八人 餘大赦以安之 因命武人 得依資入選. 於是 官員少而應調者多 選曹無以處之. 崔亮爲吏部尙書 乃奏爲格制 不問士之賢愚 以停解日月爲斷. 庸才下品沉滯者 皆稱其能.
時亮外甥劉景晏 與亮書曰"殷周以鄕塾貢士. 兩漢由州郡薦才. 魏晉因循乃置中正. 諦觀在昔 莫不審擧 雖未盡美 足應什收六七. 朝廷貢才 只求其文 不取其理. 察孝廉 唯論章句不及治道. 立中正
不考才行 空辨姓氏. 取士不博 沙汰未精. 舅屬當銓衡 宜須改張易調 如何反爲停年 格以限之? 天下士子誰復脩勵名行哉?"亮答書曰"汝所言乃有深致 吾昨爲此格 有由而然. 今已爲汝所怪 千載之後
誰知我哉? 吾三爲尙書 銓衡所宜 頗知之矣. 但古今不同 今日選擧 專歸尙書. 以一人之鑑 照察天下 無異於以管窺天. 又今武人甚多 官員至少 設令十人共一官 猶無官可授. 况一人冀一官
何由可不怨哉? 吾近面執 不宜使武人入選 請賜其爵厚其祿 旣不見從. 是以權立此格 限以停年耳." 洛陽令薛淑上書曰"黎元之命 繫於長吏. 若選曹唯取年勞 不簡賢否 執簿呼名 一吏足矣. 數人而用
何謂銓衡?"書奏不報. 其後 甄琛ㆍ元修義等 相繼爲尙書 利其便己 踵而行之. 魏之選擧失人 自亮始也. 其後 辛雄爲吏部郎中. 上疏曰"自頃年以來 專以停年爲選士 無善惡歲久叙用 職無劇易 名到授官
執案之吏 以差次日月爲功能. 銓衡之入 以簡得老舊爲平直 且庸劣之人 莫不貪鄙. 委斗筲以共理之重 託碩鼠以百里之命 皆貨賄是求. 肆心縱意 其制雖煩 不勝其欲. 此所以致令徭役不均調發違謬 聚斂盈門
囚執滿道也."○隋文帝開皇中制 諸州歲貢三人 工商不得入仕. 煬帝始置進士科專以文辭試士. 又制百官不得計考增級 其功能昭然者 乃擢之. 丘濬曰"魏晉以降 雖失鄕里之選 所擧秀孝 猶取經術.
州郡皆置中正 以品其才行. 雖其立法未盡 然淸謹之士 猶知有所畏忌 不敢放恣 恐有言行之疵 以爲其累至. 隋煬置進士之科 始專試士以文辭 則士皆投牒自 進州里無復察擧之制矣."○唐取士之法 多循隋制
上郡歲三人 中郡二人 下郡一人 有才能者 無常數. 其常貢之科 有秀才 有明經 有進士 有明法 有明書 有明算. 自京師郡縣 皆有學 每歲仲冬 郡縣館監 課試其成者. 長吏會屬僚 設賓主 牲用少牢
行鄕飮酒禮 歌鹿鳴之詩 徵耆艾叙少長而觀焉. 旣餞而與計偕. 其不在館學而擧者 謂之鄕貢. 舊令諸郡 雖有一二三人之限 而實無常數. 到尙書省 戶部集閱 而關於考功課試 可者爲第. 武德舊令
以考功郎中 監試貢擧. 貞觀以後 則考功員外郎 專掌之. 初 秀才科最高 試方畧策五條. 有上上ㆍ上中ㆍ上下ㆍ中上凡四等. 貞觀中 有擧而不第者 坐其州長 由是廢絶. 自是士族所趣
唯明經ㆍ進士二科而已. 其初止試策 貞觀中詔加讀經史一部. 時考功員外郎王師旦知貢擧 冀州進士張昌齡王公瑾 並有俊才 聲振京邑. 師旦考其文策黜之 擧朝不知所以. 及奏等第 太宗怪無昌齡等名
因召師旦問之. 對曰"此輩誠有詞華 然其體輕薄 文章浮艶 必不成令器. 臣若擢之 恐後生相倣效 有變陛下風雅." 帝以爲名言 後並如其言. 高宗時 考功員外郎劉思立 始奏二科 並加帖經.其後
又加老子孝經. 後又詔明經帖得六 進士試雜文兩篇 然後試策. 武后初 策問貢士于洛城殿. 殿前試人 自此始. 武后又自製臣軌兩篇 令貢士習業 停老子. 中宗初停臣軌. 武氏又建武擧 行鄕飮酒禮
送于兵部.開元中詔武貢人 與明經進士 同行鄕飮酒禮.其課試之制 畫帛爲五規置之於垜 去之百有五步. 內規廣六尺 橛廣六尺餘. 四規 每規內兩邊 各廣三尺 懸高以三十尺爲限. 列坐引射 名曰長垜.
弓用一石力箭重六錢. 又穿土爲埒 其長與垜均 綴皮爲兩鹿 歷置其上 馳馬射之 名曰騎射. 鹿子長五寸 高三寸 弓用七斗以上力. 又斲木爲人 載方板於頂上 凡四偶人. 互列埒上 馳馬入埒 運槍左右觸
必板落而人不踣 名曰馬槍. 槍長一丈八尺 徑一寸五分 重八斤. 其木人上板 方二寸五分. 皆以儇好不失者 爲上. 兼有步射穿札 翹關負重身材言語之選 通得五上者爲第. 其餘復有平射之科 不拘色役
高第者授以官 其次以類升. 天寶六年 又令武擧人上省 先令謁太公廟. 每拜大將及行師克捷 皆告廟.開元二十一年 玄宗新註老子成. 詔減尙書論語 而加老子焉. 二十四年 制移貢擧於禮部 以侍郎掌之
因爲永制. 因考功員外郎李昴 詆訶進士李權文章 大爲權所凌詬. 朝議以郎官地輕 故移於禮部 遂爲永制. 二十九年 始於京師 置崇玄館 諸州亦置道學 生徒謂之道擧. 擧送課試與明經同. 凡擧司課試之法
帖經者以所習經 掩其兩端 中間開唯一行 裁紙爲帖 凡帖三字隨時增損 可否不一. 或得四得五得六者爲通. 後 擧人積多 故其法益難 務欲落之 至有帖孤章絶句 疑似參互者 以惑之.
甚者或上抵其注下餘一二字 使尋之難知 謂之例拔 旣甚難矣. 而擧人則有駈懸孤絶 索幽隱爲詩賦而誦習之 若通十數篇 則難者悉詳矣 其於平文大義 類多面墻焉.明經所試 一大經及孝經ㆍ論語ㆍ爾雅 帖各有差.
帖旣通而口問之 一經 問十義得六者爲通. 問通而後試策凡三條 三試皆通者爲第. 進士所試 一大經及爾雅. 帖旣通而後 試文試賦各一篇. 文通而後試策凡五條 三試皆通者爲第. 明法 試律令各十帖
試策共十條. 律七條 令三條. 全通爲甲 通八以上爲乙. 書者試說文ㆍ字林凡十帖. 說文六帖 字林四帖. 所誦無常限 皆通者爲第. 算者試九章ㆍ海島ㆍ孫子ㆍ五曹ㆍ張丘建ㆍ夏侯陽ㆍ周髀ㆍ五經ㆍ綴術ㆍ緝古
帖各有差. 九章三帖 五經等七部各一帖 綴術六帖 緝古四帖. 兼試文 大義皆通者爲第. 凡衆科有能兼學則加超奬不在常限. 凡試先期命擧人 謁于先師. 有司卜日宿張於國學 宰輔以下 皆會而觀焉.
博集群議 講論而退之. 禮部閱試之日 皆嚴設兵衛荐棘圍之 搜索衣服 譏訶出入 以防假濫焉. 其制詔擧人 不有常科 皆標其目搜揚之. 試之日 或天子親臨觀之. 試已糊其名 考之文策 高者特授以美官
其次與出身. 開元以後海內宴安 士無賢不肖 恥不言文墨. 應擧者每四五千人 得第者纔百一二. 沈旣濟曰"國家自顯慶以來 高宗聖躬不康 武太后用事 參決大政 與天子並. 太后頗涉文史 好雕虫之藝.
永隆中 專以文詞選士. 及永淳之後 太后臨天下二十餘年. 當時公卿 無不以文章達. 因循日久 寢以成風. 至于開元天寶之中 上承高祖太宗之遺烈家給戶足 人無苦窳 四夷來同 海內晏然.
雖有宏猷上略無所惜 奇謀雄武無所奮. 百餘年間生育長養 不知金鼓之聲 烽燧之光 以至於老. 故太平君子 唯門調戶選 徵文射策 以取祿位 此行己立身之美者也. 父敎其子 兄勉其弟 凡所易業 大者登臺閣
少者任郡縣. 資身奉家 各得其足. 五尺童子 恥不言文墨焉. 是以進士 爲士林華選 四方觀聽 希其風采. 每歲得第之人 不浹辰而周聞天下. 故賢雋韞才者咸出於是 而桀姦無良者或有焉. 故是非相陵
毁譽相騰. 或扇結鉤黨 私爲盟歃 以取科第 而聲名動天下. 或鉤撫隱匿 嘲爲篇詠 以列於道路迭相談訾 無所不至焉." 代宗初 禮部侍郎楊綰上疏曰"古之選士 必取行實. 自隋煬帝始置進士科 猶試策而已.
至高宗時 劉思立始奏進士加雜文明經加帖括. 從此成俗 公卿以此待士 長老以此訓子. 其明經則誦帖括以僥倖 又令擧人 投牒自應 如此欲其反淳朴崇廉讓 何可得也. 請置孝廉科 令縣令 取行著鄕閭
學知經術者 薦之於州 刺史考試 升之於省. 任占一經 問經義二十條 對策三道. 上第注官 中第出身 下第罷歸. 其道擧 亦非理國所資 請與明經進士並停."帝命諸司通議. 給事中李栖筠 左丞賈至
京兆尹嚴武 並是綰議 仍請兼廣學校. 勑禮部 具條目以聞. 綰奏"國子監擧人 令博士薦於祭酒. 祭酒試通者升於省 如鄕貢法. 明法委刑部考試." 或以爲進士明經 行之已久 不可遞改 事遂不行.
然識者是之. 栖筠等議曰"夏之政忠 商之政敬 周之政文. 然則文與忠敬 皆統人行. 且諡號述行 莫美於文 文興則忠敬存焉. 前代以文取士 本文行也. 宣父稱'顔子不遷怒 不貳過 謂之好學.'今試學者
以帖字爲精通 不窮旨義 豈能知遷怒貳過之道乎? 考文者以聲病爲是非 豈能知移風易俗化天下乎? 是以上失其源 下襲其流 先王之道 莫能行也. 夫先王之道消 則小人之道長 亂臣賊子 由是生焉. 今取士
試之小道 而不以遠大 是猶以蝸蚓之餌 垂海而望呑舟之魚 不亦難乎? 所以食垂餌者皆小魚 就科目者皆小藝. 且夏有天下四百載 禹之道喪而商始興. 商有天下六百祀 湯之法棄而周始興. 周有天下八百年
文武之政廢而秦始幷焉. 三代之選士任賢 皆考實行 是以風俗淳一 運祚長遠. 漢興 監其然 尊儒術尙名節. 雖近戚窃位 强臣擅權 弱主外立 母后專政 而亦能終彼四百 豈非學行之效耶? 魏晉以來 專尙浮侈
德義不脩 故子孫速顚 享國不永也. 今綰所請 實爲正論. 然自晉室之亂 人多僑處 必欲復鄕擧里選. 恐未能盡 請兼廣學校 以明訓誘. 雖京師州縣 皆有小學 兵革之後 生徒流離 儒臣師氏碌廩無向.
請增博士員 厚其廩 選通儒碩生 間居其職. 十道大郡 置大學館 遣博士出外 兼領郡官 以敎生徒. 保桑梓者鄕里擧焉 在流寓者庠序推焉. 朝而行之 夕見其利."帝令綰 具條目以進. 宰相以爲"擧人循習
難於速變 請自來歲始."帝以問翰林學士 對曰"進士已久廢之 恐失其業."乃詔明經進士與孝廉兼行 事因以寢. 然天下高其議.○凡選 唐制由科目而進 若進士明經之類 謂之擧人. 由吏道而進 試於吏部者
謂之選人.前資及官滿者 亦試於吏部 然後從試高下遷除.文選則吏部掌之 武選則兵部掌之 謂之銓選. 文武選事 皆分爲三銓. 尙書典其一 侍郎分其二. 凡選始於孟冬 終於季春. 每歲五月
須格於郡縣示人科限而集之. 初皆投狀於本郡 或故任所 述罷免之由 而上尙書省 限十月至省. 乃考覈資緖 郡縣鄕里ㆍ名積ㆍ父祖官名內外族姻ㆍ年齒形狀ㆍ優劣課最ㆍ譴負刑犯必具焉 以同流者五五爲聯
以京官五人爲保 一人爲識 皆列名結款. 不得有刑家之子 工賈類假名ㆍ承僞ㆍ隱冒ㆍ升降之徒應選者. 有知人之詐冒 而糾告三人以上者 優以授之. 其試之日 除場授棘譏察防檢 如禮部擧人之法. 其擇人有四事
一曰身 取其體貌豐偉. 二曰言 取其言辭辨正. 三曰書 取其楷法遒美. 四曰判 取其文理優長. 四事皆可取 則先德行 德均以才 才均以勞. 其六品以下集以試之 計資量勞 而擬其官. 五品以上不試 凡選
始集而試觀其書判 已試而銓察其身言 已銓而注詢其利便 已注而唱 集衆告之. 然後類以爲甲先簡 僕射乃上門下省給事中讀 黃門侍郎ㆍ省侍中審之 不當者駁下. 旣審然後上聞 主者受旨奉行 各給以符
謂之告身. 自出身之人 至于公卿 皆給之.武官則受於兵部 兵部武選亦然. 課試之法如擧人之制 取其軀幹雄偉 應對詳明 有驍勇才藝及可爲統帥者. 若文吏求爲武選 取身長六尺以上 籍年四十以下
强勇可以統人者. 武人求爲文選 取書判精工 有理人之才而無殿犯者. 凡選人有格限未至 而能試文三篇 謂之宏詞 試判三條 謂之拔萃. 入等者得不限授官. 凡官已受成 皆殿庭謝恩. 初吏部選才 將視其人
覆其吏事 始取州縣案牘疑議 試其斷割 而觀其能否 此所謂判也. 其後日月浸久 選人猥多 案牘淺近 不足爲難. 乃採經籍古義 假設甲乙 令其判斷. 旣而來者益衆 而通經正籍 又不足以爲問.
乃徵僻書ㆍ曲學ㆍ隱伏之義問之 唯▩人之能知也. 工者登于科第 謂之入格 甚拙者謂之藍縷. 初武德中兵革方息 士不求祿 官不充員. 吏部乃移牒州府 課人應集 至則授官 無所退遺. 四五年間 求者漸多
方稍有沙汰. 貞觀中 京師}\貴 始分人於洛州選集 參選者七千人 而得官者六千人. 時 太宗謂吏部尙書杜如晦曰"今吏部取人 獨擧其言辭刀筆 而不詳才行. 或授職數年 然後罪彰 雖刑戮繼及 而人已斃矣.
如之何?"對曰"昔兩漢取人 必本於鄕閭選之 然後(入)官 是以稱漢爲多士. 今每歲選集 動踰數千人 厚貌飾辭 何可知也? 選曹但校其階品而已. 若揄才辨行 未見其術."帝由是 將依漢法
令本州辟召會功臣 議行封建 事乃寢. 他日帝又謂曰"古今致治在於得賢. 今公不能知 朕不遍識 日月其逝而人遠矣. 吾將使人自擧 如何?"魏徵曰"知人則智 自知則明 知人誠難矣. 而自知豈易乎?
且自媒自衒 士女之醜行 是長澆競也 不可."復寢. 是時吏部之法 行始二十餘年 雖已爲弊 而未甚滂流 故公卿或有未之覺者 太宗知其微而未及更. 因循至于永徽中 官紀已紊 迨麟德之後 不勝其弊.
及武后臨朝 務悅人心 不問賢愚 選集者多收之 職員不足. 乃令吏部 大置試官以處之 故當時有車載斗量之謠. 又以鄧玄挺ㆍ許子儒等爲侍郎 無所藻鑑 委成令史 依資平配. 其後仕者猥衆 不可禁止.
有僞立符告者 有接承他名者 有遠人無親而賈保者 有試判之日 求人代作者 如此假濫 不可悉數. 武后又以吏部選人多不實 乃令試日 自糊其名 暗考以定等第 糊名自此始也. 及神龍以來 韋后用事 官多橫除.
鄭愔爲吏部侍郎 大納貨賄 選人過多 無闕注擬 逆用三年闕員. 至玄宗初 宋璟爲尙書 方革前弊. 其後 楊國忠爲尙書 ▩招物議 求以悅人 其從選年多者率收之. 故惷愚廢滯者咸荷 而綱紀大紊.○宋取士之制
大槩仍唐科目 有進士 有明經諸科. 常選之外 又有制科 其所試 亦用詩賦策墨義之類. 英宗以間歲貢士法不便 詔禮部三歲一貢擧 自此定爲常制. 先是 每間歲設科. 神宗時 參政王安石奏曰"今人才乏少
且其學術不一 異論紛然 不能一道德故也. 一道德則脩學校 欲修學校 則貢擧法 不可不變. 若謂此科常多得人 自緣仕進 別無他路 其間不容無賢耳. 今以少壯時 正當講求天下正理. 乃閉門學作詩賦及其入官
世事皆所不習 此科法敗壞人才 致不如古."旣而言者又謂"古之取士 皆本學校 道德一於上 習俗成於下 其人才皆足以有爲於世. 今欲追復古制 則患於無漸 宜除去聲律對偶之文 使學者專意經術."於是改法
罷詩賦ㆍ帖經ㆍ墨義 士各占易ㆍ詩ㆍ書ㆍ周禮ㆍ禮記 兼論語ㆍ孟子中書 撰大義式頒行. 試義者須通經 有文采 乃爲中格. 熙寧三年 親試進士 專以策定 著限千字以上. 元祐初 復用前法 試以詩賦之類.
朱子曰"空言本非所以敎人 不足以得士 而詩賦又空言之大者 其無益於設科取士明矣. 然熙寧罷之 而議者不以爲是者 非罷詩賦之不善 乃專主王氏經義之不善也. 故元祐初議有改革 而司馬溫公ㆍ呂申公
皆不欲復. 其欲復之者 唯劉摯爲最力 然不過以考校之難爲言. 其識之卑而說之陋 豈足與議先王敎學官人之本意哉? 今當直罷 無可疑者. 至於近年以來 則治經者 不復讀其經之本文 與先儒傳注
但取近時科擧中選之文. 諷誦摹放 擇取經中可爲題目之句 以意扭捏 妄作主張 明知不是經意 但取便於行文 不暇恤也. 主司不唯不知其謬 乃反以爲工 而置之高等 習以成風 轉相祖述 慢侮聖言 日以益甚.
名爲治經 而實爲經學之賊 號爲作文 而實爲文字之妖 其弊不可勝言矣. 而又主司命題 多爲新奇 以求出於擧子之所不意 於所當斷而反連之 所當連而反斷之. 大抵務欲無理可解 無說可通 以觀其倉卒之間
趍附離合之巧. 主司旣以此唱之 擧子又以此和之. 平居講習 專務裁剪經文 巧爲鬪飣 以求合乎主司之意. 此又經學賊中之賊 文字妖中之妖也."○大明取士之制亦仍前科目 而如制科明經宏辭之類 皆廢之
惟存進士科. 亦試以經書義論表策等 每三年一開試. 太祖初欲停罷科擧. 旣而聽群臣之言 因前科法定制. 子午卯酉年八月 各省鄕試 辰戌丑未年二月 禮部會試. 士各專一經
皆兼大學ㆍ論語ㆍ孟子ㆍ中庸四書. 初場以初九日 試五經義 各試本經一道 限五百字以上 四書義一道 限三百字以上 次場以十二日 試禮樂論一道 限三百字以上 詔誥表內科一道. 終場以十五日
試經史時務策一道 限千字以上. 殿試以三月初一日 時務策一道 亦限千字以上. 永樂中 又令初場試四書義三道 本經義四道. 終場時務策五道. 未能者並許減其二道焉. 其鄕試額數 初以五百人爲率
諸省各四十人 福建三十人 兩廣各二十五人 直隸一百人. 若人才衆多 則不拘額數. 不及數者從實充選 會試取百人. 宣德中 更鐫定兩京十二省 (貴州附雲南) 解額隨其地人物多少差定. 又以北方學者
文采不足 分南北中三類取人. 正統中 於各省舊額量增之而會試則加以半. 景泰初 又改會試無定額 臨期取旨. ○丘濬曰"祖宗時 其所試題目 皆摘取經中大道理大制度關係人倫治道者 以爲題. 當時題目無甚多
故士子專用心於其大且要者. 又得以餘力 旁及於他經及諸子史. 主司亦易於考校 近來典文者 欲窘擧子以所不知. 其出經書題 往往深求隱僻 强截句讀 破碎經文 於所不當連而連 不當斷而斷
遂使擧子無所據依. 以此初場題目 數倍於前. 學者竭精神窮日力 有所不能給. 故於策場 所謂古今制度 前代治蹟 當世治務 有不暇致力焉者. 甚至登名前列者 亦或有不知史冊名目 字書偏傍者.
又有所謂主意之說 尤爲乖繆. 凡所命之題 專主一說 謂之主意 擧子志於必得謂不合主司之意 不可以取中 將聖經賢傳之旨 旁求曲說 牽綴遷就 以求合其所主之意. 此非獨壞士習 其爲聖經之蠹也甚矣.
有司主此以出題 士子主此以爲文. 今日爲士子 旣以此進身 異日爲主司 又以此取士 宋史所謂'繆種流傳.'今日之弊 殆類之也. 不但科試爲然 諸路提學憲臣之人試 尤有甚者焉."右漢以下至今取人之法.
蓋三代養而敎之養 謂制田里 平賦斂以富之敎 謂立學校 明禮義以敎之. 敎而擧之. 漢則無敎養之事 而其選擧猶本鄕里. 故能擧不失人俗尙淳實 無虛僞之風. 隋唐以來 專以文詞取人 則非惟無以得人
又從以壞敗之. 世道之汚隆 人才之盛衰 職此之由. 此所以治日常少 亂日常多 小人得志 戎狄亂華者也. 有志之君 苟覽其制而思其事 則自可知其然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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