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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ㄷ) 인재 선발에 관한 이론의 역사적 고찰을 덧붙임[選擧議論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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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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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인재 선발에 관한 이론의 역사적 고찰을 덧붙임[選擧議論附]

한무제(漢武帝)시기에 동중서(董仲舒)가 대책을 올려 말하기를 "대체 인재를 양성하지 않고 훌륭한 간부를 구하려는 것은 옥을 다듬지 않고 광채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인재를
양성하는 데는 태학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태학이란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는 관문이요 교육 문화의 기본 원천입니다. 원컨대 태학을 창설하고 고명한 스승을 초빙함으로써 천하의 인재를
육성하고 자주 심사를 거쳐 거기에서 배출한 인재를 남김없이 등용해 쓰면 뛰어난 간부들을 얻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군수(郡守)나 현령(縣令)은 백성의 교양자인 동시에
영도자이어서 국가의 배려를 받들어 교화를 침투시킬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지도자가 훌륭하지 못하면 임금의 덕화를 백성에게 발휘하지 못하고 혜택을 입히지 못합니다. 지금 하부 일꾼들은
본래 밑에서 교양을 받은 일이 없기 때문에 왕왕 국가의 법령도 준수하지 않으며 백성을 못살게 하고 간교한 자들과 사리사욕을 채우며[소리(小吏)들이 간사하고 협잡을 하는 자가 있으되
수령(守令)들이 그것을 검거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들로 더불어 교역(交易)하여 이(利)끝을 구하는 것을 이름이다.] 빈궁하고 고독한 사람들이 억울하고 고통스러워서 직업을 잃는
현상이니 대단히 임금의 의도와 배치됩니다. 대체 지금의 지방 장관은 많이 낭중(郎中) 중의 낭리(郞吏)에서 나오고 또 이천석(二千石)의 자제가 낭리로 선발되므로 부유한 그들은 꼭
훌륭한 사람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말한바 공적[功]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관직에 충실함으로써 평가되는 것이요, 연한이 길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때문에 하찮은 인재는
연한이 오래되었더라도 작은 벼슬에서 떠나지 못하며 훌륭한 인재는 오래지 않아도 대신으로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들이 있는 정력과 지혜를 다 바쳐서 자기가 맡은 바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노력함으로써 공훈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날짜를 끌수록 귀하게 되고 연한이 오랠수록 벼슬이 올라가기 때문에 염치가 여지없이 없어진 동시에
잘하고 못한 것이 혼동됩니다. 그러므로 중앙과 지방의 최고 간부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의 소속 관리 또는 백성들 중에서 인재를 선발하여 해마다 두 사람씩 추천하라 하여 그들에게
수직, 시위를 맡기는 동시에 대신들의 인재보장 정황을 보아서 잘한 자에게 상을 주고 잘못한 자에게 벌을 주기를 바랍니다. 대체 이렇게 하면 중앙과 지방 장관을 막론하고 모두 인재
탐구에 열성을 바칠 것이니 전국의 인재를 선발할 수 있고 또 벼슬을 주어 부려 쓸 수 있을 것입니다.[벼슬로 써 주어서 그 재능을 부린다.] 연한으로 공적을 평가하지 말고 실지
현명하고 재능 있는 자를 뽑아 쓰는 것이 첫째 요무입니다. 그리하여 재능에 따라 벼슬을 맡기고 덕행에 알맞게 직위를 결정하면 염치 있는 자가 대우를 달리 받을 것이며 현명 여하에
따라 지위를 달리 갖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제가 지방에 명령하여 효행, 염리 각 한 사람씩을 추천하라 하였다.

한광무(漢光武) 때에 시사문제에 대하여 건의하는 사람들이 많이 말하기를 "지방의 인재추천에 있어서 대체로 공적을 기준으로 하여 순차적으로 등용하지 않기 때문에 직무 수행이 점차
해이해지고 관리들의 사업이 침체하여 가니 책임이 주와 군들에 있습니다"라고 하므로 정부 성원들에게 명령을 내려 토의하라 하였던바 위표(韋彪)가 건의하기를 "대체로 국가는 인재
선발로 주요 임무를 삼으며 인재의 표징은 효행을 으뜸으로 삼는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므로 그는 충성을 국가에 옮길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충성한
사람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정에서 구하게 됩니다. 대체 사람이란 재능과 덕행을 겸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맹공작(孟孔綽)이 조(趙)씨, 위(魏)씨와 같은 세도 집의 가신이
되기에는 넉넉하지마는 등(滕)나라와 설(薛)나라와 같은 작은 나라의 대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충성이나 효성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순후한 데 가깝고 사업에 단련된 재능이
풍부한 사람은 마음이 각박한 데 가까운 것이므로 삼대 때에는 솔직성 그대로 행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재란 응당 재능과 품행을 선차적으로 할 것이요 문벌관계에다 결속시키지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요는 그 귀결점이 추천자 자체에 달린 것이니 지방 장관 자신이 현명하면 그가 추천하는 인재도 모두 옳은 사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니 광무가 심각하게 접수했다.

한순제(漢順帝) 때에 장형(張衡)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에는 어진 것을 표징으로 하여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지방 장관이 해마다 인재를 추천하였습니다. 무제(武帝) 세대에 군에서
효렴을 추천하고도 현량, 문학 등 시험제도가 있었으므로 유명한 간부들이 배출했으며 문이나 무가 함께 발전되었으니 한나라의 인재 해결의 길은 이 몇 가지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대체로
글씨니 그림이니 사(詞)니 부(賦)이니 하는 것은 하찮은 재간이므로 나라를 바로잡고 정치를 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즉위한 초기에 먼저 경학하는 사람들을
방문하고 정치를 보살피는 여가에 문학 작품을 열람하여 취미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투기적인 경향들은 이것이 교화로써 사람을 뽑는 기본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도들이
머리를 싸매며 비등하여 사, 부에로 쏠리었습니다. 그 중에 고상하다는 층은 제법 경전의 풍자적이며 비유적인 언사를 인용하기도 하나 저열한 자는 속담을 인용하여 짝을 맞추어 배우를
연상케 하며 혹은 남의 글을 따내어 부질없이 성명만을 보충하는 현상입니다. 제가 성화문(盛化門)에서 명령을 받을 때마다 그들의 순서와 등급을 기록하였는데 아직 승급 연한이 못된
자들도 역시 자기 동반과 함께 등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미 베풀어준 은택을 회수하기도 어려운 일이며 다만 봉급만을 타 먹게 하는 것도 분의에 벌써 넘치는 일이니 다시
그들로 하여금 남을 지도하거나 주, 군의 책임을 맡지 말게 할 것입니다. 옛날에 선제(先帝)가 제후(諸侯)를 석거(石渠)에 회합하였으며 장제(章帝)가 학자를 백호(白虎)에 집결하여
경전을 통독하고 경의를 해석하였으니 그것이 매우 갸륵한 사업입니다. 문무의 방도에 있어서 응당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기타 작은 기능과 작은 장점은 혹 볼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공자는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먼데를 목표한 사람이 그 따위를 눈뜨다가는 한 자리에 답보할 우려가 있으니 식견 있는 자는 응당 원대한 것을 목표로 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진(晉)나라 무제 때에 부현(傅玄) 부현(傅玄)：중국 진나라 때 문장과 음악에 능했다는 사람.

이 위(魏)나라 때에 문사들의 기풍이 타락했다 하여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제가 듣기에는 옛날 임금이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교육의 큰 의의를 명확히 인식하고 충절과 정의를 배양한
결과 도덕 교화가 위에서 장려되고 공정한 언론이 아래서 실천되어 위와 아래가 서로 받들고 사람들이 의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몹쓸 진(秦)나라가 옛날의 훌륭한 제도들을
없애고 가혹한 법과 기만적 술책으로써 상호 통제하여서 정의감이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근세에 와서 위(魏)나라 무제가 그런 술책을 좋아하니 세상이 모두 형벌과 명분을
앞세우게 되고 문제가 자유를 지향하니 세상이 모두 지조 있는 생활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규율이 유지되지 않고 허무 황탄한 언론들이 전국을 휩쓸어서 세상에 다시는 공정한
여론이 없게 되고 망해버린 진(秦)나라의 병통이 다시 지금에 발로하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왕위에 오른 뒤에 아직 청렴 고상하고 예절다운 일꾼을 등용하여서 기풍과 절의를 장려하지
못하며 허무 비열한 인사를 물리쳐서 불성실한 자들을 퇴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문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겨서 즉시 부현(傅玄)으로 조서 초안을 작성하여 제출하라 하였으나
마침내 채용하지 못하였다.[부현(傅玄)이 또 아뢰기를 "옛날 임금들이 사(士), 농민, 장인, 상인으로 구분함으로써 국가를 운영하고 사업을 조직하였던바 사람은 각각 한 가지 직업을
가지고 자기의 일을 달리하였습니다. 사 이상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들을 위하여 태학을 설립함으로써 그를 교육하고 훌륭한 선생을 선택하여 교도하는 동시에 재질의 우열에 따라
그를 등용하며 농업으로써 식량을 공급하고 공업으로써 생활필수품을 충족시키며 상업으로써 물화를 융통시키기 때문에 아무리 광대한 지역과 다수의 백성이라도 그 속에는 놀고먹는 자가 끼울
수 없었습니다. 한(漢)나라 위(魏)나라는 그들의 신분을 확정해 놓지 않았고 모든 관리의 자제들이 경술과 기예를 배우는 대신 부화에 물젖으며 사업을 처리할 줄 모르면서도 앉아서
국가의 봉급만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업과 공업이 많이 황폐되어 혹시는 작은 이익에 쏠려 그 사업과 유리되며 이름만을 태학에 걸어 놓고 조상들의 우수한 전통을 들어 보지도
못하는 현상입니다. 지금 훌륭한 정치가 발족하기는 했으나 한, 위(漢魏)의 결함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 명목만 띤 관원이 많고 학교는 설치되지 않으며 건달꾼은 늘어만 가고 농업에
접근하는 자는 적으며 일용 필수품이 그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저는 바로 그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확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옛날 하우(우왕)씨와 후직은 몸소
밭을 갈았기에 그 혜택이 자손에게까지 미쳤으며 ｢명당월령(明堂月令)｣ ｢명당월령(明堂月令)｣：『예기』의 편명으로서 농가의 일년행사를 월별로 기록해 놓은 것.

편에 임금이 본보기로 밭가는 제도를 게재했고 이윤(伊尹) 이윤(伊尹)：고대 중국 은(殷)나라의 저명한 재상.

은 옛날 유명한 신하로서 유신(有莘)이란 들판에서 밭을 갈았습니다. 지금 임금이 관직을 많이 임명하고도 한직에 있는 자를 배움의 길로 인도하지 않을 테면 응당 농업에 종사시킬
것이며 무단히 방임하여 그들로 하여금 앉아서 백성의 밥을 공으로 먹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현금 문무의 관원이 이미 초과한데다가 임명만 하고 실지 관직에 배치되지 않은 자도 많으며
더욱이 군대에 복무함으로써 밭갈이를 못하는 자가 농민의 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놀고 봉급만 먹는 자가 전보다 3배나 됩니다. 이런 쓸데없는 관원들을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조세를
징수한다면 가정에서는 그의 실수입을 더 높이는 동시에 국가의 양곡이 결핍될 우려가 없을 것이요 국가의 식량이 풍족하면 도덕 교양을 그들에게 일일이 지도 통제를 가하지 않아도 자연
수행될 것입니다. ｢우서(虞書)｣ ｢우서(虞書)｣: 『상서』의 요전(堯典)으로부터 익(益)ㆍ직(稷)에 이르기까지의 소위 순임금 때 서적이라는 부분.

에 이르기를 '3년 만에 관리의 실적을 고사하고 세 번 고사 끝에 잘잘못을 보아 등용 또는 철직시킨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9년 만에야 비로소 이동이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관직에 오래 머물게 되면 끝장의 성과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반대로 임시성을 띠면 서로 일반적인 사업으로 대치하려는 것인바 6년의 기한으로는 시일이 짧아서 등용
철직을 주밀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니 오직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문제가 부현의 말을 다 옳게 여겼으나 결국 채용하지 못했었다.]

양(梁)나라 심약(沈約)이 논의하기를 "군자(君子)와 평민[小人]이란 보통적으로 지위를 따져서 부르는 칭호이다. 자기의 도덕을 발휘하여 출세하게 되면 군자라고 하는 것이요 그렇게
되지 못하면 평민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태공(太公)은 낚시꾼으로서 일약 주나라의 스승[周師]이 되었고 부열(傅說) 부열(傅說)：중국 상(商)나라 고종(高宗) 때
부암(傅巖)에서 담 쌓는 천역을 하다가 고종을 만나 정승이 되었다는 사람.

은 담 쌓다가 은나라 정승[殷相]이 되었으며 호광(胡廣)은 여러 대의 농부의 신분으로서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황헌(黃憲) 황헌(黃憲)：중국 후한 때 국가에서 여러 번 불러다가
등용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는 인물.

은 소의원의 아들로서 명망이 수도에까지 떨쳤으니 뒷날의 군자 평민의 두 길로 갈라놓은 그것과는 달랐다. 한나라 말기에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에 위나라 무제가 처음 전시의 응급
대책으로 구품(九品)제도를 설정했던 것이다. 대체 이 제도가 인재의 우열을 차별하기 위한 것이며 지벌의 높고 낮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지마는 이때부터 서로 답습하여 그만 법적
규정으로 되어서 위나라로부터 진(晉)나라에 이르기까지 고칠 수가 없었다. 주와 도와 군의 정(正; 인재 선발을 맡은 관직)이 재능으로써 인재를 평정한다고 하나 온 세상의 인재가
재능에 따라 오르고 내리는 자는 대체로 적다. 다만 조상들의 관직에 의거하여 상호 밟고 올라서곤 한다. 그러므로 도정(都正)은 본래 시속 선비라 시기를 참작하여 품계를 늘리고
주리며 등급에 따라 높이고 낮추니 유의(劉毅) 유의(劉毅)：중국 송나라의 저명한 학자.

의 이른바'낮은 등급에는 두드러진 문벌이 없고 높은 등급에는 미천한 족속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다. 세월이 변천됨에 따라 이 기풍이 점차로 굳어져서 대체로 거룩하게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모조리 이품(二品)관 만이니 이로부터 인재의 자격이 그만 비속화되어 버렸다. 주나라나 한나라의 제도는 영리한 자가 우매한 자를 부리어서 높은 부서와 낮은 부서의
차별을 둠으로써 등급을 이루었지마는 위(魏)나라와 진(晋)나라 이후로는 지위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부리게 되면서부터 귀천의 신분이 현저히 한계를 그었다. 대체로 임금이 왕위에 앉아
궁궐이 깊어서 외부와 떨어져 있다. 아침저녁으로 상대하는 면에서도 대신들과 항시 가깝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간부 사업을 처리하는 책임 관리를 측근에다 하나 두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무제 천감(天監) 연간에 심약(沈約)이 다시 글을 올려 말하기를 "과거 한나라시기부터 본래 선비와 평민의 차별이 없어서 의례히 벼슬아치가 아니면 서울에 가지 않았으며 중앙과 지방의
장관의 직위에서 파면을 당하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평민[小人]들이 모두 듣고 본떠서 습속으로 되었습니다. 또한 학교가 많이 시설되어 있어서 옛 문헌들을 강구하였기 때문에
누구나 충분히 배워서 벼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은 한 지방의 사무원[小吏] 명칭을 띠고 최하부 일꾼으로부터 출발하여 촉락을 지도하며 군 기관의 보조역 등 직무를 거쳐서 오랜 시일을
경과해야만 우수한 인재로 인정되어 처음으로 상급의 소환을 받았으며 지방 장관[牧守]으로 등용했다가 중앙에 들어가 내직 재상[台司]이 되었으니 한나라에서의 인재 해결에 있어서 이때를
제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선비들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중앙에 집결합니다. 그 중에는 더러 터전을 고수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은 자도 있으나 이는 정직한
것이 아니라 우매하고 미천해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은 선비란 것이 너무 많아서 대략 1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언제나 벼슬자리는 적고 인재는 남아서 처치할 장소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리고 수재(秀才)란 것은 별도로 임명하는 관직으로 되어서 한나라시기의 인재를 선발하던 전례와 같지 않는 것입니다. 가사 '수재'는 다섯 문제를 대답하면 칭호를 줄 수 있고
'효렴(孝廉)'은 책문 한 장만 제출하면 통과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야말로 세쇄한 문자 놀음의 작은 기술이요 정치의 잘못과는 하등관계가 없는 것이니 이것으로써 인재를
탐구해낸다는 것은 공연한 빈말에 불과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배자야(裴子野) 배자야(裴子野)：중국 양(梁)나라 때의 문장가.

가 말하기를 "옛글에 이르기를 '귀한 자를 귀하게 대접하는 것은 그가 임금과 가까운 까닭이다'라고 하였으니 세상에는 나면서부터 귀한 자가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도덕상으로 존경할
만하면 등짐장사를 가릴 것이 없고 만일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면 문벌을 택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주나라가 쇠약하고 예의가 해이해지면서 모든 정령이 신하들로부터 나오고 대신층이 서로
이어 계승하므로 귀족의 맏자식이 아니라도 오히려 가신(家臣)과 동등할 수 있었다. 또한 아무런 명색 없는 도배라도 지방 장관의 눈에 들면 문간에서 절하고 비를 휴대하는 등의 존경을
받는 일[軾問擁篲] 절하고 비를 휴대하는 일[軾問擁篲]：고대 중국에서 하급 관리가 고급 관리를 영접할 때 머리를 숙이며 비를 휴대하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의식.

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 후 각처의 귀하고 세력 있는 집들에서는 1천 명의 사랑손님을 가지고 자신을 낮추고 겸양하여 함께 먹고 자면서 서로 의존하는 일도 한 개의 풍속으로
되었다. 전한(前漢), 후한(後漢)에 미쳐서는 유학과 도덕을 존중히 하여 서울과 시골을 막론하고 학문과 행실을 선차로 삼은 결과 아무리 귀족이라도 고향에 돌아오면 평민과 같았으며
신분은 갈리어 있지마는 귀천의 차별은 없었다. 진(晉)나라 이후 그의 습속이 약간 개혁되었으나 향촌의 특수한 인사들이 그래도 높은 벼슬길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말기에 내려와서는
전혀 문벌만을 내세우게 되었으므로 삼공(三公)의 자식은 경, 대부의 집[九棘之家]을 깔보고 중앙급의 자손들은 지방 수령의 가문을 멸시하여 점차로 털끝을 서로 다투게 된 결과
논의되는 것은 꼭 문벌 타령이며 입 밖에 내는 것은 덕행이나 재능과 관계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저열한 풍속이 조성되고 오만한 폐해가 발작하니 이는 단연코 겸양을 조장하고 도덕과
교화를 장려하는 방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후위(後魏)의 효문제(孝文帝)시기에 한현종(韓顯宗) 한현종(韓顯宗)：중국 후위(後魏) 때 사람.

이 말을 올리기를 "이전 시대의 인재선발은 반드시 명분을 선차적으로 바르게 했기 때문에 인재선발에 있어서 '현량 방정(賢良方正)'과의 명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방에서
추천하는 인재란 '수재', '효렴'의 명목만이 있고 실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다만 그의 문벌이 좋은가 만을 조사하고 기타의 것은 다시 책임을 규명하려고도 않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별도로 문벌을 위주로 추천하는 특별 제도를 두어서 인재들을 채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거늘 무슨 '수재'요, '효렴'이요 하는 명목을 둘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문벌이라는 것은 그의 조상들의 선행한 업적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이 또다시 국가에 무슨 이익을 주겠는가? 만일 특출한 재간만 있는 자라면 아무리 짐승잡이와 낚시꾼과 같은 하천의
계급이라도 등용할 것이며 만일 그런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삼공의 자식이라도 의례히 하천배로 전락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평범한 가정에는 특출한
인재가 없으니 문벌에서 선발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나 이것도 잘못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 소공(召公)：중국 주문왕(周文王)의 서자로서 이름은
석(奭).

같은 사람이 없다 하여 그만 재상(宰相)의 직위를 없애 버리고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의 재능이 우수하고 명망이 높은 자를 고사하여 즉시 우선적으로 등용하면 훌륭한 인재가
등용되지 못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연간에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이악(李鍔)이 인재선발이 옳게 되지 못하다 하여 글을 올려 말하기를 "위(魏)나라의 무제, 문제, 명제로부터
문장을 더 숭상하여서 국가와 백성이 해야 할 원칙적인 도리를 무시하고 글자나 파는 하찮은 재간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밑에서 위를 본뜨는 경향이 그림자와 음향보다 빨라서 허식과
형식에만 치중하게 되어 이것이 풍속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강좌(江左)에 있는 제(齊)나라 양(梁)나라에서는 그의 폐해가 더욱 심하여 귀하고 천하고 영리하고 우둔하고를 불문하고 오직
시 짓기에만 전력한 결과 다시 원칙을 버리고 이상한 것만을 보존하며 허무를 찾고 궁벽한 것에 쏠리어 한 구의 기이한 소리와 한 자의 교묘한 재주를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긴
사설과 수다한 책들이 달과 이슬을 묘사한 데 불과하고 책상과 상자에 가득찬 것들이 오직 바람과 구름의 타령뿐입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으로써 서로 높은 체하며 조정에서도 이것에
의거하여 사람을 뽑은 결과 관록의 길이 열리게 되므로 그것을 사랑하고 숭상하는 심리가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농촌의 아동과 도시의 소년들이 육갑(六甲)은 채 몰라도 우선
오언시(五言詩) 오언시(五言詩)：한시(漢詩)에서 다섯 자(字)를 한 구절로 하는 시체.

를 지으며 옛날 조상들의 역사와 이윤(伊尹), 부열(傅說), 주공, 공자의 경전과 사업에 이르러서는 다시 관심한 일도 없었거니 언제 귀에 들어나 보았겠습니까? 그리하여 자고자대하고
황탄한 것으로써 자기가 세속을 초월한 듯이 여기며 정서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걸작으로 삼아서 유술과 질소한 것은 낡고 우둔한 것이라 하여 사(辭)나 부(賦)를 잘하면 잘났다고
합니다. 때문에 문장은 날로 쏟아져도 정치는 날로 어지러워 가니 이는 성현들의 규범을 폐기하고 쓸데없는 것을 조작하여 사용하는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결과 근본을 버리고 지엽을
따르는 기풍이 전국을 휩쓸게 되어 이것을 전해 가면서 상호 배우고 본받을 뿐만 아니라 혼란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수나라가 건국한 뒤로 성현의 방도가 확립되어 부화한 것을 퇴치하고 허위적인 것을 제거한 결과 자연히 경술과 실질을 파악하고 도덕과 인의에 의거하는 자가 아니면 벼슬자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개황(開皇) 4년에는 전국에 널리 명령하여 국가와 개인의 문건들은 다 같이 사실대로 기록하도록 했으며 그해 9월에 사주(泗州) 사주(泗州)：지금의 중국 산동성
연주(兗州) 지방에 있던 고을 이름.

자사(刺史) 사마유지(司馬幼之)가 상서한 문장이 화려에 치우쳤으므로 책임 기관에 넘겨 치죄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공경 대신(公卿大臣)이 모두 정당한 노선을 알고 누구나
대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연구하며 부화와 기교의 것을 폐기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지금 지방의 주와 현들에서는 아직도 그대로 낡은
풍습을 답습한다 합니다. 즉 관리를 선발하고 인재를 추천함에 있어서 원칙을 준수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친척들이 그를 효행 있다고 칭찬하고 향촌이 그를 어질다고 쳐주며 학문이 반드시
진리를 탐구하고 친구를 함부로 사귀지 않는 자라과 쳐주면 그는 가정에 타락되어 사람으로 쳐주지도 않는다 합니다. 반대로 그의 학문이 고전에 의거하지 않고 시속에 휩쓸려 부화한
문장이나 짓고 당파와 결탁하여 칭찬을 받는 자이라고 하면 관리의 직책에 보선하고 중앙에 추천하기도 한다 합니다. 이는 아마도 현령(縣令)이나 자사(刺史)들이 당면한 국가적 방침에
순응하지 않고 아직도 정실에 끌리어 공정한 길을 택하지 않는 데 기인된 것일 것입니다. 제가 검찰 기관에 이름을 걸고 있으므로 모든 부정적인 것을 규탄 폭로하는 직책을 져야 할
것이나 만일 소문에 의하여 당장 추궁하게 되면 법에 걸릴 자가 많을 것이 염려스러우니 청컨대 각 부서에 명령하여 널리 수사 탐방하는 한편 이와 같은 자가 있으면 문건을 갖추어 검찰
기관에 넘기도록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고종(唐高宗) 시기에 유상도(劉祥道) 유상도(劉祥道)：중국 당나라 고종(高宗) 때의 재상.

가 선발제도가 점차로 해이해진다 하여 임금께 진술하기를 "이부(吏部)에서 요즘 사람을 뽑는 것이 너무 많고도 무원칙한 것이 걱정입니다. 매년 합격자 수효가 1천 400명을 초과하니
이는 많아서 걱정이요[영휘(永徽) 5년에 1천 430명이고 6년에 1천 18명이고 현경(顯慶) 원년(元年)에 1천 450명이다.] 각 기관들의 특징을 분간하지 않고 즉시 벼슬을
임명하니 이는 무원칙하여 걱정입니다.[잡색(雜色)은
해문삼위(解文三衛)ㆍ내외행서(內外行署)ㆍ내외번관(內外番官)ㆍ친사장(親事帳)ㆍ내품자(內品子)ㆍ재잡장(在雜掌)ㆍ기술직(伎術直)ㆍ사서수(司書手)ㆍ병부품자(兵部品子)ㆍ훈관기실(勳官記室)ㆍ급공조삼군(及功曹參軍)ㆍ검교관(檢校官)ㆍ둔부역(屯副驛)ㆍ교위(校尉)ㆍ목장(牧長)이다.]
그리하여 경학(經學)과 시사 문제[時務]에서 선발된 인재를 잡색 기관의 것과 대비하면 3분지 1도 못되는 현상입니다. 그들이 경학에 밝고 실천에 단련된 사람이라 해도 오히려 옳은
인재가 드물 것이거늘 하물며 서리[胥]들을 다수 뽑으니 어떻게 그들이 전부 덕행이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서슴없이 이 세상에서 백성을 통치하는 임무를 함께 보는 자들 중에서
선한 자는 늘 적고 나쁜 자가 늘 많은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를 창건한 이래 40여 년에 백성이 아직도 형벌에 벌한 자가 있으니 어찌 이 문제와 연관되지 않으랴? 또한
벼슬아치들이 해당한 인재가 아님은 기본 원인이 사람을 등용하는 방도가 무원칙한 데 있고 무원칙한 원인의 발생한 이유는 또한 합격자들에 대한 심사가 부족한 데 기인됩니다. 이제
임기와 기한의 등급을 사정함에 있어서 이부의 조와 사[曹司]가 그들을 고사하고는 좋고 나쁜 것도 분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마구 벼슬을 임명하니 하찮은 재간들이 쉽사리 진출할 수
있으며 잡색 서리들이 합격자로 혼동될 우려가 있습니다. 청컨대 이부의 조와 사에 명령하여 그들의 고사가 끝난 다음에 네 등급으로 구분하여 보고하게 할 것입니다.[재주의 쓸 만한
것이 있고 겸하여 큰 덕행이 있는 자를 헤아려서 제1등을 삼고 신품(身品)이 강장(强壯)하여 급제(及第)함이 상(上)에 들고 병부(兵部)에서 보낸 바의 사람으로서 오래지 아니한
제1등과 예(例)에 비겨서 병부에 급송(給送)한 자로 제2등을 삼고 나머지는 적당히 가리어 제3ㆍ4등을 삼는다.] 그리하여 제1등은 이부에 넘기고 제2등은 병부에 넘기고 제3등은
주작(主爵) 주작(主爵)：지방 영주들의 관직과 봉지에 관한 직무를 주관하던 고대 중국의 관직명.

에 넘기고 제4등은 사훈(司勳) 사훈(司勳)：봉건시대에 훈공과 음사(蔭仕)에 관한 직무를 맡은 관청.

에 넘기어 모두 규례에 따라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 즉 등급 사정과 임명에 있어서 부정행위가 있는 자는 낙제로 하며 국가적 범죄인자는 하의 하등에 해당시켜 이전에 사(赦)를 받은
자라도 정상이 아직 추궁할 여지가 있는 것은 역시 고려하여 법사에 배치하고 사를 받지 못한 자는 본 고장으로 돌려보내며 응시의 무원칙한 현상을 제거하도록 할 것이며 또 하급
관속들로 하여금 인재를 심사하고 선발하는 절차가 있는 줄 알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본래 청렴 근신한 사람이 아니라도 반드시 앞으로 점차 주의를 가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옛날의 인재선발이란 관직을 본위로 하여 사람을 뽑았기 때문에 사람을 많이 뽑고 관원은 적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지금의 선발에서도 역시 사람을 뽑는 것만은
틀림없으나 다만 뽑는 데 기준이 없어서 관원은 고정된 숫자가 있으나 들이고 내보내는 데는 제한이 없다. 고정된 수에 무한한 것을 대치시킨 결과 사람이 해마다 밀려나니 어찌 과잉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필요한 인원을 잘 타산하여 연차별로 합격자 수를 알맞게 보장할 것이다. 지금 안팎 문관은 1품 이하로부터 9품 이상까지가 1만 3천 465명이니
그것을 대략 크게 말하면 1만 4천 명이다. 사람의 생명이란 길고 짧은 것이 있다. 대체로 20대부터 벼슬길에 나서 70에 물러가지마는 50년 동안 봉급생활을 하는 자가 보기
드물다. 30에 벼슬하여 60에 사직한다면 그 가운데의 숫자로 따져서 30년을 지속하는 셈이니 이것은 1만 4천 명이 30년 만에는 대략 다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연차별 합격자가 500명씩이라면 30년을 지나는 동안 곧 1만 5천 명의 관리를 해결하는 것으로 되니 고정된 수요자 1만 3천 465명에서 필요한 인원을 넉넉히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30년 후에도 벼슬살이를 지속하는 자가 많을 모양이니 이만 해도 관리가 넉넉하여서 부족할 우려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매년 합격자 수가 1천
400여 명에 이르니 필요한 인원 500명을 충당하고도 항상 1배 이상이 남는다. 또 근년에는 과오를 범한 자로서 돌려보낸다는 자들을 그대로 두고 있는 자도 역시 1천여 명이다.
여기에 다시 연차별로 새로 증가하게 되니 실지 인재를 등용하는 원칙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잡색(雜色)과'를 '명경(明經)', '진사(進士)'과와 함께 합격자의 수효에 통산하되 3분으로 따져서 언제나 2분은 명경, 진사를 뽑고 1분은 잡색과를 뽑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유학이란 교육 교양의 근본이며 학문의 기본이므로 유교가 발전되지 않으면 풍속이 장차 저하될 것이다. 지금 학교들이 전국에 널렸고 학생이 삼학(三學)
삼학(三學)：고려 때 국자감(國子監), 대학(大學), 사문학(四門學)의 세 교육기관.

에 찼으나 그들을 추동하여 전진시키는 방도가 세밀하지 못한 결과 국가를 창건한 지 지금 40년이 경과하였으나 백성과 관료들 속에서 수재와 효렴의 추천이 없으니 모르기는 하지만 지금
사람이 옛날만 못한 관계라고 할까? 또는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이 철저하지 못한 탓이라고 할까? 6품 이하의 관리에게와 저 산골에까지 특별히 명령을 내려 인재를 다시 세밀히 탐구
방문하는 한편 규정을 마련하여 점차로 우대 장려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훌륭하고 행복한 시대에 이 사업이 결국 중단되고 말 모양이니 실로 국가를 위하여 애석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상원(上元) 초기에 유요(劉嶢)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국가에서 예부(禮部)로써 수재를 고사하는 기관을 만들고 문장을 갑(甲), 을(乙)로 고사하기 때문에 전국이 그 영향을 받아서
재능에만 분주히 날뛰고 덕행에는 힘쓰지 않습니다. 대체 도덕적 행동[德行]이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조성할 수 있으며 기술적 재능[才藝]이란 법적 통제 밑에서
명분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갑과(甲科)에 올랐다가 저녁에 처형되는 자가 있으니 이는 법률 제정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개혁하지 않고 도리어
발전시키고 있습니까? 아무리 날로 일 만 글자를 암송한들 정치의 본질에 무슨 관계가 있으며 일곱 걸음에 시 한 편을 완성한들 사람을 교양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옛날
자장(子張)이 취직하는 방도를 배우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말에 과오가 적으며 실천에서 후회할 일이 적으면 먹을 관록은 그 속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실천하고
남은 시간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에는 학문의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옛날의 작문은 반드시 풍아(風雅) 풍아(風雅)：『시경』에
있는 풍(風)과 아(雅)를 합칭한 것. 원래 각 제후국에 있는 시를 풍이라 하고 천자의 직속 경내의 시를 아라 하였으나 점차 문학(文學)이란 의미로 쓰였음.

에 맞았다면 후세의 지금 학도들은 옛사람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게 되어 화초나 연기, 구름 등 풍경 묘사에 정력을 소모하고 기교를 부려서 한 개 습속으로 되었으니 이것이 큰
착오입니다.

『시경』의 제재를 참고하여서도 풍속을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권이(卷耳)｣장을 읊으면 충신이 기뻐하고 ｢육아(蓼莪)｣장을 외우면 효자가 슬퍼하는 것과 같이 시가는
온화, 선량, 진실, 돈후의 성격을 갖도록 교양하는 것이니 어찌 부화한 문장만을 위주로 하겠습니까? 대체 사람들의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 마치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위에서 좋아하는 자가 있으면 밑에서는 더 좋아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만일 덕행을 선차로 하고 문예를 부차로 하여 반드시 높은 도덕과 특출한 품행이 있는 자를
최우등에 충당시키며 일생 동안 출세하지 못한 자를 높이 우대하되 연령순으로 그를 선발 등용하게 한다면 많은 인재들이 소문을 듣고 그리 쏠려서 전국이 발끈할 모양이니 지방에는 바람에
쏠리고 위에서 훌륭한 정치가 실시된다면 어찌 일대 전변을 일으키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무후(武后) 때에 설겸광(薛謙光) 설겸광(薛謙光)：중국 당나라 무후 때 시ㆍ부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반대한 사람.

이 그 당시의 학교시설과 인재선발에 있어서 법률적으로 협잡을 금지하는 제도가 있으나 풍속의 폐습이 모두 근본을 버리고 지엽에 치우쳐서 청탁과 방문을 일삼는다 해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에는 인재를 선발하는 데 있어서 평소의 품행 상 자료를 참작하고 지방의 여론에 의거하여 예절을 우선적으로 보고 지조와 의리를 밝힘으로써 순박한 것을 앞세우고 글 짓는
것을 뒤로 하였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겸양을 숭상하고 지식층들은 부화한 문장을 제거하며 훌륭한 사람과 나쁜 자를 추천한 수를 계산함으로써 해당 고을의 영예와 수치를
평가하였습니다.

기결(冀缺) 기결(冀缺)：중국 춘추시대 진(晋)나라 사람.

이 높은 자리를 겸양하다가 등용되었으므로 진(晉)나라 사람들이 예의를 알았고 문옹(文翁)이 경전으로써 후진을 교육하였기에 촉(蜀)나라 학도들 중에서 유학자가 많았으니 대체 위에서
좋아하는 자가 있으면 밑에서 따라가지 않는 실례가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한(漢)나라 시대에는 인재를 구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그의 품행을 고려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체를 단련하는
자가 많았고 지방의 추천을 받은 다음에야 부에서 이어 책임지고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씨(魏氏)는 인재를 등용하되 호방, 활달한 것을 좋아했으며 진(晉)나라, 송(宋)나라
기간에는 문벌에만 치중하여 사람을 보아 벼슬을 구하는 기풍을 조장하여 훌륭한 인재에게 관직을 맡기는 본의와 배치되었으며 양(梁)나라, 진(陳)나라 어간에는 특히 문장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그 풍속에는 시 짓고 술 마시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고 자신을 단련하는 것쯤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수나라 문제가 이악(李鍔)의 말을 접수하고 명령을 내려 문장의 부화한
형식을 금한 결과 당시 사주(泗州) 자사(刺史) 사마유지(司馬幼之)의 표문 내용이 화려 요염한 이유로 벌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풍속이 약간 시정되고 정치적인 성과가 볼
만했습니다. 그러나 양제(煬帝) 때에 다시 진사 등 과목을 설치한 뒤로 청년들이 다시 상호 진출이 빠르고 시속의 순응에 쏠리어 짤막한 글을 수집해 가지고 책학(策學)
책학(策學)：중국 수(隋)ㆍ당(唐) 때에 과거 본위의 학풍에서 나온, 술어와 고증 문구만을 주워 모아 연구하던 학문.

이라고 명칭하였으나 모두 부화, 공허를 위주로 하였습니다. 지금은 인재선발에 있어서 더욱 그의 기본을 상실하여 지방의 여론이 교활한 무리들의 붓끝에 결정되며 품행이 우수하여도
연로자들의 평가를 요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책문 합격자가 고을에 떠들썩하고 한자리를 얻기 위하여 정신이 없이 굽신거립니다. 혹시 임금의 글이 마침 하달되어 시험에서 숨은 인재들을
찾으라고 명령하였다면 주요한 기관을 바쁘게 드나들고 권세 있는 자들을 방문합니다. 그들은 있는 지식을 털어서 한 말씀의 혜택이 내리기를 바라며 이마가 벗겨지고 발꿈치가 터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를 돌보아주는 은혜를 기대합니다. 때문에 시속에 과거한 사람을 '과거를 찾아다니는 자[覓擧]'라고 부르는바 찾는다는 것은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의미하고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과거한 사람들이 아무리 행적이 원칙에서 떠나고 죄가 형법에 해당되었더라도, 혹은 문서를 위조하여 관직을 횡취하며 혹은 공로를
빙자하고 직급을 협잡하며 물질로써 매수하였더라도 바로 무사하게 되는 판입니다. 지방에 설령 재능이 있어서 국가를 경리할 만한 자가 있더라도 책문만을 시험 치게 하며 무예로는 적을
제어할 만한 자가 있더라도 단지 활이나 잡아당기는 것을 시험 볼 뿐입니다. 문장이 청신하면 일등 과거[甲科]에 합격하고 문체가 좀 어색하면 낙제로 되니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택한다면 사실과는 틀릴 우려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악광(樂廣) 악광(樂廣)：중국 진(晋)나라 때 상서복야(尙書僕射) 벼슬을 한 사람.

이 안인(安仁) 안인(安仁)：중국 명나라 때에 시에 능하였던 승려.

에게 글을 빌었으며 사영운(謝靈運) 사영운(謝靈運)：중국 남조(南朝) 송나라 때 서화와 문학을 잘하던 사람.

이 목지(穆之)보다 문장이 우수하고 평진(平津)의 글이 사마장경(司馬長卿) 사마장경(司馬長卿)：중국 한나라 때의 저명한 문학가 사마상여(司馬相如). 장경은 그의 자.

만 못하며 조자건(曹子建) 조자건(曹子建)：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의 아우로서 저명한 문학가이며 이름인 식(植).

의 문장이 순욱(荀彧)보다 미려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책문 합격으로 벼슬을 한다면 반악(潘岳) 반악(潘岳)：중국 진(晋)나라 때의 문학가.

, 사영운, 조자건, 사마장경이 손빈(孫臏) 손빈(孫臏)：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장.

, 악의(樂毅) 악의(樂毅)：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명장.

의 윗자리에 있게 될 것이나 나라의 중대한 정치를 협찬함에 있어서는 안인과 사영운도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니 이런 것으로 보아서 정말 일률적으로 인재를 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예도 그렇기 때문에 전략가가 활 쏘고 말 달리는 데 우수하지 못하는 것이니 훌륭한 재상이 어찌 책문 합격을 전제로 할 것입니까? 바라건대 폐하는 명철한 지시를 내리고
엄격한 법을 발포하여 문과에는 정치적 역량으로 고사하고 무과에는 국방에 중점을 두어서 이름을 흐리게 하고 순차를 날조하는 무리들의 야비하고 협잡하는 행동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참고한 바에 의하면 오기(吳起) 오기(吳起)：중국 전국시대의 저명한 장수로서 군사학서적 『오자(吳子)』를 저작한 사람.

가 전투에 임했을 때 근시자가 칼을 올리니 오기가 말하기를 "대체로 난세를 만나서 전략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휘자로서의 임무요 칼 하나를 잘 쓰는 것이 지휘자의 사업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양득의(楊得意)가 사마장경의 글을 외우니 한나라 무제가 듣고 말하기를"이런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장경이
도착하게 되자 문원령(文園令)이란 벼슬에 그칠 뿐이요 재상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았으니 이것은 대체로 그의 적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한나라의 법을 상고해 보면 남을 추천한
사람이 종신 책임을 지게 된 결과 양웅(揚雄) 양웅(揚雄)：중국 한나라 때의 저명한 문학가로서 『태현경(太玄經)』을 지은 사람.

이 전의(田儀)의 관계로 죄를 당한 것은 그가 전의를 함부로 추천한 까닭이며 성자(成子)가 위상(魏相) 위상(魏相)：중국 한나라 때의 저명한 재상.

을 추천한 공으로 득현(得賢)의 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상벌의 명령이 실시되면 청탁 방문하는 야심이 없어지고 현명한 사람에게 자리를 사양하는 미풍이 조성되어 탐오 경쟁의 길이 막힐 것입니다. 때문에 계속 요청하는 바는 재직 연한을
넉넉히 주는 법령을 제정하여 그들의 인재를 탐구하고 선택할 여유를 주어 쓸 만한 자는 시험 삼아 지방관을 임명함으로써 재간이 있는가 없는가를 이해하며 사업정황을 참작함으로써 옳고
그른 것을 해명하여 인재추천의 임무를 잘 완료한 자에게는 인재추천의 상을 받고 잘못 추천한 자에게는 기만한 죄로써 처단한다면 자연히 재능과 덕행이 구비한 사람을 선발하게 되어서
훌륭한 일꾼의 대열이 장성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질(劉秩)이 인재선발에 관한 논설에 이르기를 "옛날 삼대 때에는 인재선발이 꼭 학교[庠序]를 통하게 되었으므로 해당한 경로를 밟지 않고서는 출세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인재를
양성함에 두 길이 없고 그에 응하는 사람도 역시 통일적이었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의 말기에 이르러서 영주[諸侯]들이 정치를 달리하여 인재선발의 방법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상앙(商鞅)이 진효공(秦孝公)을 사촉하여 법령을 개혁하여 전쟁이니 농업에 참가하지 않고서는 벼슬을 못하게 한 결과 진(秦)나라가 필경은 이것으로 육국(六國)을 병합하였습니다.
한나라가 창건되면서 순박하고 진실한 것을 앞세웠습니다. 즉 고후(高后)는 '효제(孝悌)'와 '역전(力田)' 과목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문제(文帝), 경제(景帝)가 이 제도를
고수하여 변동하지 않은 결과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에서 생활하게 되고 조정에는 쓸모 있는 인재가 많았다고 일렀었습니다. 무제가 '효렴(孝廉)'의 인재를 탐구하고
'오경박사(五經博士)'와 제자를 설치하면서 열에 두세 명쯤이 문벌관계가 있었지마는 도덕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외적들에게 관심을 높이게 되어 전쟁이 연방 계속되고
국가의 비용이 부족했기 때문에 세금을 징수하며 재정을 통제하는 사무가 생기고 국방을 강화하며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꾼들이 대두하여서 옛 조상들의 도리를 준수하거나 예절에 관한 절차를
습득한 자들은 쓸모 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부터 학식이 풍부한 수재(秀才)들이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것도 몽땅 문장과 글자를 파는 부류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제(昭帝) 때에 곽광(霍光) 곽광(霍光)：중국 한무제의 유명(遺命)을 받아 어린 황제들인 소제(昭帝)와 선제(宣帝)를 보좌한 유명한 사람.

이 백성들의 고통을 물을 때에 태상(太常)의 학생들을 대상하지 않고 전국적인 현량 문학들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동한 때에 이르러서 광무(光武)가 학문을 좋아했으나 그것을 정치에다
발양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 혼자서 경서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숙종(肅宗) 이후는 때로 혹 옛날 것을 본 받고 유학을 존중히 여겼지마는 그 근본을 알지 못하고 문장을 섭취하였기
때문에 삼공(三公)이나 상서(尙書)의 직위에다 경전 연구자를 등용하였지마는 경전에서 제시한 방도를 적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한에 이르러서 애국적인 박학자들이 적었고
국가보다도 개인의 청렴과 지조만을 고수하려는 도배들이 많아졌습니다. 한나라가 통제력을 잃고 조조(曹操)의 위(魏)나라가 정권을 절취한 뒤에는 '중정(中正)'으로 인재를 선발하게
되어 권력이 문벌 좋은 씨족들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이 제도가 잡다한 반대 분자들을 제압할 수는 있었으나 우수한 인재를 존중히 하는 방도로는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당시에는
명철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고 인재들은 직위가 없었으며 시 짓는 풍습이 성행하였으니 백성들은 성년된 남녀노소 제때에 결혼을 하지 못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晉), 송(宋),
제(齊), 양(梁)에 미쳐서는 번갈아 가며 이 제도를 서로 답습하여 그의 기풍이 더 고조된 결과 학문을 버리고 문장을 앞세우며 도덕을 무시하고 황탄을 장기로 여겨서 장주(莊周)
장주(莊周)：중국 춘추시대의 저명한 사상가로서 『장자(莊子)』를 저작한 사람.

, 노담(老聃) 노담(老聃)：중국 도교(道敎)의 창시자인 노자(老子).

의 학설을 토론하고 초사(楚詞) 초사(楚辭)：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이 지은 문장들.

『문선(文選)』 『문선(文選)』：중국 양나라 소명태자 소통(蕭統)이 한나라로부터 양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유명한 시문을 편찬한 전 60권의 서적.

의 내용을 암송하며 육경(六經)ㆍ구류(九流)는 보는 자도 있었으나 삼사(三史) 삼사(三史)：처음에는 『시경』, 『서경』, 『춘추』의 합칭이었으나 당나라 때부터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로 개칭하여 과거볼 때의 과목으로 하였음.

는 이름조차 들은 자가 적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저서를 발취함으로써 학문이라 하고 여러 시들을 모아서 자료를 만들며 부(賦)를 잘 짓는 자를 조정에서 벼슬할 사람[廊廟之人]이라
하고 문자나 파는 재상 자격[台鼎之器]이라 하였습니다. 하부에서는 이것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위에서는 이것으로 인재를 뽑아서 상부나 하부가 서로 연결되어 이것을 가지고 직업을
삼았습니다. 이렇게 선발된 인재는 이름이 비록 세상에 드높아도 정치에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인재를 뽑는 방도로 풍속을 선량하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로
｢주서(周書)｣ ｢주서(周書)｣：『상서』에서 태서(泰誓)로부터 진서(秦誓)에 이르기까지의 부분.

에 이르기를 '말로 사람을 뽑으면 사람들은 말을 표방할 것이요 행실로 사람을 뽑으면 사람들은 행실을 표방한다'라고 하였으니 인재를 선발하는 방도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ㆍ부의 관한 근본 의의를 상고하여 보면 하부의 의견을 전달하여 임금을 풍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작가들은 문장을 앞세우고 이론을 뒤로 하기 때문에 문체가 아담하지 못하며
풍자와 아무런 연관이 없을 뿐더러 또 사실을 진실하게 발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개 원칙이 잘못된 것이니 다시 더 추구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수나라에서 '중정'에게 맡겨 선발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또 지방 추천에 의존하지 않았던 결과 향촌에는 귀족이 없고 고을에는 관리 복장을 볼 수 없었으며 사람들은 자기 향토를 떠나 서울로 집중하게 되기 때문에 지식분자는
품행에 대한 관심이 없고 인간들은 나약하고 우매한 데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대체 옛날은 실적으로 공로를 표창하고 자격에 따라 관직을 맡겼습니다. 자격에 따라 관직을 맡기었기 때문에
관직과 사람이 서로 맞았었는데 요즘은 관직으로 공로를 표창하기 때문에 관직이 사람과 맞지 않게 됩니다. 또한 옛날에는 사람을 타산하여 인재를 추천하였고 관리를 타산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기 때문에 인재로서 벼슬 못하는 자가 없었으며 벼슬자리에는 결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벼슬자리는 옛날보다 갑절이 많고 선발된 인재는 벼슬자리보다 열 곱이 많고 벼슬을
하려는 자는 또 선발된 자의 십 배가 되므로 선발된 자는 벼슬자리가 없고 벼슬한 자의 녹봉이 부족하며 관리는 백성을 못살게 하는 판입니다. 옛날에는 중앙으로부터 천리 이외의
지방에는 영주들에게 봉지를 주었는데 영주들의 관리는 경(卿)으로부터 내려가면서 전부 자기가 임명하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에는 보(保), 부(傅) 보부(保傅)：중국 역대의 관제로서
천자의 고문격 고관인 태보(太保)ㆍ태부(太傅)의 약칭.

, 장(將), 상(相) 이외는 모두 영주 자신이 처리하였으며 주와 현의 소속 관리들은 지방 장관들이 모두 등용 교체하게 되었었습니다. 대체 재상[公卿]이란 임금을 보좌하는 직무를
가졌지마는 지방의 관리는 또한 지방의 영주나 장관의 사업 한계 내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상으로서 등용시킬 수 있는 것은 단지 중앙의 관리이며 재상의 부서에 속한 부분일 뿐일
것이니 어찌 적은 수효가 아니겠습니까? 등용하는 범위가 적고 보면 왜 엄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세에는 봉지의 봉호는 있으나 영지의 예선이 없기 때문에 광활한 강토 안에의
모든 사업이 전부 중앙 정부의 결재를 받게 되어 일체 인사문제도 반드시 이부에 귀속되어야 합니다. 결과 명단에 의거하여 벼슬을 주기에도 오히려 두서를 못 차리는 형편이거늘 어느
겨를에 어진 인재를 탐구하며 덕행과 재능 있는 자를 심의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모두 그의 결함을 조소하면서도 그 결함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세히 밝혀서 말합니다."라고
하였다.

양주(洋州) 자사(刺史) 조광(趙匡) 조광(趙匡)：중국 당나라 때 양주자사(洋州刺史)를 지냈으며 『춘추집주(春秋集註)』를 저작한 사람.

의 인재선발에 대한 논의에 이르기를 "옛날 삼대시기에는 영주제도가 있어서 오늘의 현실과 달랐으니 이론과 방법을 참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라로부터 이야기한다면 한나라 때에는
황제가 조명[詔]으로 임명한 것 이외에 중앙기관과 지방 관아의 소속 관리들은 전부 자체가 해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자체를 단련하고 있어도 소환
문건이 번갈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명분과 절조를 지키는 데 충실하였었고 풍속이 정화되었었습니다. 위(魏)나라에서 구품(九品)제도를 수립하여 중정(中正)이란
관서를 두어 관활하게 되면서부터 문벌 좋은 자가 높은 관직에 처하게 되고 미천한 집 수재들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정부(당나라)의 선발은 수나라의 제도를 적용했던바 시일이
이미 오래됨에 따라 그 방법이 더욱 글러졌습니다. 대체 사람의 재능과 지식이 학습을 통하여 이룩해지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진사' 그 자체는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고 있지마는
주관 기관의 올리고 내리는 표준이 실지는 시(詩), 부(賦)에 두어서 문장의 기교 화려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것을 우수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니 실용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의 정당한 학문에까지 방해를 주며 순박한 기풍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다시 경박한 습성을 조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학식과 역량이 남보다 초월하거나
혹 특수한 소질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대다수가 평소에 습득한 바에 빠져서 전부 근본 원리에 암둔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천적인 진실성을 계발함으로써 후진들을 양성하려
하더라도 이것도 곤란한 문제입니다. 때문에 지식층에서는 국가를 운영할 만한 이론을 가진 자가 적으니 그 해독이 첫째요, 또 사람의 지력은 대체로 한계가 있는 것이며 『구류(九流)』
구류(九流)：유학, 도학, 법학, 논리학, 변론, 묵가, 농가, 잡가 등을 말한 것.

, 『칠략(七略)』 『칠략(七略)』：중국 하나라 때 유흠(劉歆)이 아버지 유향(劉向)의 사업을 계속하여 당시의 일체 도서를 집략(輯略), 육예략(六藝略), 제자략(諸子略),
시부략(詩賦略), 병서략(兵書略), 술수략(術數略), 방기략(方技略) 등으로 분류하여 명목과 내용을 서술한 일종의 도서 해제.

등 서적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발을 책임진 주관 기관에서 표준 범주에 대하여 아무런 경계를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비들이 공부할 때에 간단한 발취에만 주력했다가
시험기에 도달하여서 요행으로 맞출 것을 기대하니 학업에서 완성된 것이 없는 원인이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때문에 당시에 남의 스승으로 될 만한 학식을 가진 자가 적으니 그 해독이
둘째요, 주석문[疏]을 가지고 경의를 해석하라는 문제는 원칙에 있어서 근본을 망각하는 짓으로서 경전을 연구하고 글을 읽는 데 있어서 더 고생스럽게 되었습니다. 이미 경전의 대의를
해석하라 하여 놓고 다시 주석문까지 암기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갓 급하지 않은 학문을 공부하는 데 정력을 소모하였으나 당면한 예의와 법률에 대해서는 거의 눈뜬 소경으로 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대상하여 사업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하부 관리[胥吏]들의 말만 듣고 처결할 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배운 것이 쓸 것이 아니고 쓰는 것은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관직에 있어서 자기 역할을 하는 분자가 적은 것이니 그 해독이 셋째요, 인재선발에 있어서 대략 20명 중에서 겨우 한 명을 뽑기 때문에 늙어 죽도록 과거를 못하는 자가 허다합니다.
사업이 어렵고 그 길이 이렇게 좁기 때문에 잡색 부류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집니다. 이것이 하나이면 저것은 열이고 이것이 백이면 저것은 천이어서 그 순서로 따지면 하등 줄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저급한 사람이 많이 관리로 임명되며 공부를 축적하고도 때가 늦은 탄식을 품게 되니 무능한 자를 대우하는 것은 어찌 그리 후하며 유능한 자를 대우하는 데는 어찌 그리
박합니까? 이는 지엽을 숭상하고 근본을 억제하며 암흑을 조성하고 광명을 엄폐하기 때문에 학도들은 정당한 학문을 버리고 말단으로 내닫게 되니 그 해독이 넷째요, 인재를 뽑는 숫자가
이미 적다 보니 합격에 대한 경쟁이 심각하여 저마다 고관들에게 좇서 이끌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동류를 중상 비방함으로써 남을 밟고 올라서려고 합니다. 때문에 학업은 점잖은
부문을 그대로 배운다고 하면서도 품행은 아주 음험, 경박한 짓을 하게 되니 이것은 어떤 선천적인 품성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차로 습속을 형성하여 전국적인 기풍을 훼손시키니 그 해독이 다섯째요, 대체로 과거보는 사람들이 초가을에 길을 떠나서 늦은 봄에야 돌아오므로 휴식을 보장할 수 없으며 식량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이어 추수[秋事]에 착수되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어서 더욱 실력이 낙후하게 되니 그 해독이 여섯째요, 객지에 가고 오는 데 경비가 실로 막대하니 비단 생활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흔히는 묵은 살림까지 털어 바칩니다. 몇 차례 과거를 겪지 않고 쓸쓸하게도 빈주먹이 되고 마니 그 해독이 일곱째요, 가난한 선비들이 먼 지방에서 서울을
가려고 노력하나 수요 비용이 너무 한량이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 마련만 하다가 그만 세상을 마치고 말아 버립니다.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억울한 원한을 품게 되며 국가적으로 보아서
인재를 놓쳐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 그 해독이 여덟째요, 국가 기관에서 양자강과 회하(淮河) 유역의 물자를 운반하는 데 있어서 5분지 4라는 막대한 비용을 허비해야 서울에
도착하게 되며 나무가 또 지방에 비하여 열 곱 비쌉니다. 거기에는 또 과거보는 사람들의 매년 경비가 있으니 이것을 집계하면 사람과 말의 수요 비용이 아마 몇 만이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아무런 성공이 없이 돌아가는 자가 십분지 칠팔이나 되어 한갖 국내의 번잡과 낭비를 가져오게 하니 그 해독이 아홉째요, 대체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뽑는 데는 오직 자격자를
선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발에 있어서 연한으로 등급을 따지는 규정까지 설정하여 연한에 합격자라면 실적이 아무리 열등으로 판정되었어도 일체로 다 뽑고 만일 연한에
해당하지 못하면 응시자로서 약간의 흠집만 있어도 모두 버림을 받게 됩니다. 때문에 무능한 자는 봉급이 제대로 올라가나 훌륭한 층들은 그대로 앉아 늙게 됩니다. 이것은 확실
옛사람들의 인재를 탐구하고 관리를 심사하는 본의가 아니라 그 해독이 열째입니다. 인재선발에서 그 지방적 고사에 맡기지 않고 몽땅 서울에 모으게 한 결과 인원이 벌써 너무 많은
데다가 문건이 복잡하여 여기서부터 협잡이 생기고 백 가지 해독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시속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이 "응시자로서 본인 신분[正身]을 갖지 않은 것이 십분지
3, 4요 임관된 자로서 본인 신분을 갖지 않은 것이 10분지 2, 3이다"라고 하니 이것은 해독 중에서도 가장 심한 부분입니다. 지금 가사 당장 과거시험을 폐지하고 옛날의 제도를
복구할 수 없다하더라도 우선 약간의 개혁으로써 해독의 근원을 종식시킨다면 관청에는 쓸모 있는 일꾼들이 많아지고 풍속을 변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심기제(沈旣濟)의 인재선발에 대한 논의[관직을 임명하는 조항에 수록되었음. 생각건대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앞으로 벼슬자리에 등용하자는 것이어서 기에 관한 조항이 구분이 있지마는
본질상 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뒷세상에 와서 과거와 연한의 법[科目資格之法]이 생기면서 그만 현저히 두 갈래로 되어버린 나머지 그 이론조차도 불가피하게 두 갈래로 되었다.
지금 '인재선발'과 '관리 임명'등 모든 이론들도 각각 그와 관계되는 조항에 따라 기록함과 함께 상호 참고할 개소는 서로 대조할 수 있도록 하였음을 부언한다. 송(宋)나라
마단림(馬端臨)의 말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덕행이 첫째가 되고 재능이 다음으로 되었다. 순[虞]임금의 인재 채용에도 구덕(九德) 구덕(九德)：유교의 아홉
가지 실천 도덕으로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충직, 신의, 겸양, 견실, 유순, 화애, 강직, 신임, 순량 등을 말한다.

이 있었고 주(周)나라의 인물 추천에는 그의 덕행을 고려하여서 재능에는 대수롭잖게 여겼었다. 동한, 서한 이후부터 자사(刺史)나 수령들이 간부 선발 등용하는 권한을 자신이 할 수
있었고 위(魏), 진(晉) 이후로 구품제도를 두어 중정(中正)이 인사관계의 요직을 장악할 수 있어서 모두 향촌의 여론에 의거하여 선발하며 말단 행정의 직무로부터 시험한 뒤에
중앙급에 진출시켜 고귀한 자리에 옮아가도록 하였으니 대체로 그 제도 자체는 비록 옛사람의 덕행으로 선발하는 데 비하여 손색이 있었으나 그래도 재능을 소유한 인재를 뽑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수(隋)나라에 이르러서 지방의 하급 관속들도 모두 이부의 전조(銓曹)에서 임명하게 되었으며 귀족으로서의 출세도 과거의 종별에 의하여 선발되었으며 또 전조가 관리를 임명한다는
것도 그들의 참고로 하는 것은 연한[資格]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문서놀음이나 하는 하찮은 관리가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권한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칭 과거로 인재를 뽑는다
하나 고사하는 것은 문장일 뿐이었다. 이에 붓대나 놀리는 보잘것없는 기능이 영귀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길로 되었다. 대체로 처음 진출할 때에 붓대 놀음하는 지엽적인 기능으로써
시험하여 문장에만 주로 해 놓고 한 번 벼슬에 붙은 다음은 문서놀음하는 하급 관리에게 맡겨서 그들의 연한만을 전적으로 따지니 이렇게 되면서 어진이를 선발하고 재능 있는 자를
우대하는 의의를 다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또 옛사람들의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대체로 장차 관직에 등용하려는 것이었다. 삼대(三代)시기에 법률제도가 간단하였지마는 세밀히
고사하는 데서 어질고 어리석은 자가 자연 실증되었으므로 당시의 인재로 선발된 자로서 왕왕 벼슬하지 못한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두 길이 있던 것은 아니다. 뒤로
내려오면서 협잡 행위가 날로 심하고 법령이 지나치게 번잡함에 따라 과거 과목은 인재를 선발하는 도구로 되고 전조(銓曹)의 심사는 관리를 등용하는 도구로 되어 두 가지 제도가 각각
자기의 규정을 엄수하고 있었다.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선비를 선발하는 과거는 예부(禮部)에서 주관하고 관리에 대한 시험은 이부(吏部)에서 주관하게 된 결과 과거법과
심사법[銓選之法]이 날로 변하고 달로 달라져서 각자 자기의 사업을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참작하는 데서도 그 대략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삼대시기에는 향촌마다 서당[庠塾]을 설치하고 서울에 학교[黌學]를 세워서 공경대부의 자제들을 교육하고 우수한 자를 상급에 추천하는 조례를 설정하여 그들을
양성함에 노력하였었다. 유년시기부터 입학하여 40에 가서 처음으로 벼슬을 하였으니 이렇게 해야만 품행과 학업이 완성되며 사업과 성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秦),
한(漢) 이후부터는 그만 이와 달라져서 교육을 심오하게 시키지 못하면서 인재의 채용은 빠른 것을 주장하였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도덕[五常之道]에 물젖어서 모두 행복한 낙원에
살도록 하려 한들 어찌 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상등 인재는 적은 것이며 중등 인재는 개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교양을 가함으로써만이 좋은 간부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에 대한 교양을 강화하지 않고 많은 인재를 기대한다는 것도 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사람은 열등한 것이 많고 옛날 사람은 대다수가 우수한 것이 아니라
정책을 수립하고 원칙을 세우는 데 따라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말로 인재를 뽑는 자체가 벌써 실책인 데다가 말로 고사를 하는 것도 말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을 택하게 되니
실책은 더욱 증대되는 것이다. 만일 이 방법을 개선한다면 인재가 왜 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송나라 인종(仁宗) 때에 왕안석(王安石)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사람[先王]들은 인재를 채용함에 있어서 언제나 시골에서나 학교[庠序]를 통하여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어질고
유능한 자를 추천하게 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여 왕께 보고한 다음 이를 심사하여 그 사람이 참으로 어질고 유능한 자이라야만 그의 도덕 및 재능의 수준에 알맞게 벼슬을 임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사[察]'라는 것은 어떤 듣고 보는 방식으로 한 개인의 진술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도덕을 심의하기 위해서는 그의 행동을 물어 보며 그의 재능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담화를 통하여 물어 보는바 그의 말과 품행이 과연 보고한 바와 같은 것을 확인한다면 시험적으로 사업을 맡겨 보는 것이니 '심사는 사업으로써 시험한다'는 것이 곧
이것입니다.

지금 인재선발에서는 많이 기억하며 여러 경서를 외우고도 대략 문장이나 지을 줄 알면 '수재[茂才]'니 '이등(異等)'이니 '현량(賢良)'이니 '방정(方正)'이니 합니다. 대체
'수재', '이등', '현량', '방정'이란 모두 재상[公卿] 자격의 선발인 것입니다. 또 많이 기억하지 않고 여러 경서를 외우지도 않으며 대략 문장을 지을 줄 알고도 시와 부를
배운 경험이 있었다며 그를 '진사(進士)'라고 말하는데 진사 중에서도 우수한 자는 역시 재상 자격의 선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두 가지 과거에서 얻어진 기술과 재능이 재상의
자격으로 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말쟁이들은 여기서 '나는 언제나 이 방법으로 전국의 인재를 선발했으나 재능 상 재상으로 될 만한 자가 늘
여기서 나오니 반드시 옛날의 선발제도를 본뜨지 않아야만 인재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하나 그도 현실에 암둔한 말입니다. 옛날에는 인재를 뽑을 데 대한 방도를 철저히 하면서도 오히려
유능한 자들의 진출이 어렵고 무능한 자들의 중간 혼입이 있을지를 염려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에는 옛날의 인재등용 하던 방법을 전부 폐지하고 전국의 인재들을 몰아다가 몽땅 '현량'이나
'진사'로 되게 하였으니 재능 상 재상으로 될 만한 자가 의례히 '현량', '진사'로 될 만한 자도 있을 것이며 '현량', '진사' 중에서도 때로는 재상이 될 만한 인재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능한 자로서 만일 소소한 글줄이나 쓰고 글자를 파는 학문에 능하다 하여 '현량', '진사'로 되어서 재상[公卿]급에까지 올라간 자가 있다면 재능상
정말 재상으로 될 만한 재능을 가진 자는 쓸데없는 공부에 사로잡혀 결국 이것으로 향촌에서 묻혀 죽는 경우가 십상팔구일 것입니다.

대체로 옛날의 정권을 잡은 자로서 그의 간부선발에 있어서 신중성을 기하는 것은 재상급 선발입니다. 그것은 재상급만 옳은 사람을 얻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동류를 끌어다가 조정에
집결시킨다면 모든 부서들에서 다 같이 옳은 일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능한 인간으로서 요행히 재상 지위에 올라가면 역시 그의 동류를 끌어다 조정에
집합하게 되었으니 이는 조정에 무능한 자가 많게 된 까닭이며 중간에 혹시 어질고 슬기로운 사람이 있더라도 왕왕 쓸데없는 데 사로잡혀 자기의 의사대로 실행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옳지 못한 재상이 있어서 자기의 동류들을 끌어다가 조정을 꾸리었다면 조정의 옳지 못한 것들이 또 자기의 동류들을 끌어다가 전국의 요직에 배치할 것이며 전국의 요직에 있는 자들은
또 같은 옳지 못한 자를 끌어다가 고을마다 박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추천한 사람에게까지 연대적 형벌을 주는 조치를 취한다 하더라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마치 옳지 못한 자들의 도움으로만 될 뿐일 것입니다.

그 다음 구경(九經), 오경(五經), 학구(學究) 학구(學究)：중국 당나라에서 경서 하나만을 배워서 연구한 자에게 보이는 최하급의 과거.

, 명법(明法) 명법(明法)：법률에 정통한 학자라는 뜻이나 법률과목 시험을 보는 과거의 명칭으로도 쓰인다.

등 과목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조정에서 벌써부터 그것이 세상에 소용이 없음을 걱정하여 약간 그의 대체적인 의의를 구명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체적인 의의의 논점도 옛 것에
비해 나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다시 명경(明經)이란 과거를 설치함으로써 경전을 연구하는 사람을 등용하기로 한다고 하나 이 명경에서 뽑는 것도 역시 경서나 외워 가지고
문장을 약간 지을 줄 알 정도이면 통과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옛날 사람들의 정신을 연구하여 국가의 시책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라면 아마도 반드시 이런 선발에 참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안석이 또 말하기를 "지금 주나 현들에서는 학교가 있다 하나 건물만 서 있을 뿐이고 책임적인 지도 관리가 인재를 육성하는 사업을 하지 않으며 오직 태학에 교도하는 관리가 있기는
하나 역시 사전에 그를 엄격히 선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의 예법, 음악, 형벌, 정치 등 일체 사업이 학교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 학생들도 역시 막연하여 이상의 사업은 어떤
책임진 일꾼의 사업이며 자기의 당연히 알아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학자들의 가르치는 것은 문구 해설에 그치는 정도인데 근년부터는 게다가 과거에 필요한 문장을 가르친다.
대체로 과거에 필요한 문장이란 여러 경전을 외우며 힘써 배워서 아침에서 저녁까지의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성공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크게는 국가의 일을 운영할 수
없고 작게는 국가의 소용으로 될 수도 없다. 때문에 아무리 학교[庠序]에서 일생 동안 종일토록 선생의 가르침에 복종한다 하더라도 일단 현실 사회에 부닥치게 되면 막연하여 그 방향을
모르게 된 것은 다 이 까닭이다. 대체로 오늘날의 교육이란 것이 사람들의 재질을 육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뒤좇아 다니면서 고통을 주며 파괴를 가하여 인재로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체로 사람의 재능이란 과목을 전공하는 데 완성되고 번잡한 데서 허물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옛날에는 학생들을 학교[庠序]에 수용시키고 각각 그 학업에
전공케 하는 동시에 다른 사물과의 접촉을 금하게 하였으며 옛 사람들의 선행 방도만을 제시하고 백가 제자(百家諸子)의 다른 학설들은 전부 배척하였기 때문에 감히 학습하는 자가
없었다.

대체로 간부[士]들로서 배워야 할 것은 국가에서의 소용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은 그것을 전부 덮어두고 가르치지 않으며 과거에 필요한 문장을 가르쳐서 정력을 소모하고 시간을
최대한으로 짜내어 이에 종사케 한다. 그러나 벼슬을 맡기는 날에 가서는 또 전일에 가르친 것을 전부 버려 두고 국가사업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대체로 옛날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학도에게 국가사업에 필요한 학업을 전공시킬 때에도 오히려 재질에서 잘하고 못하는 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정력을 분산시키고 시간을 빼앗아서 날마다 쓸데없는 학문에 치중하다가 실지
사업에 부닥치게 되어서야 갑자기 국가적 소용이 되기를 요구하니 의례히 그의 재능이 쓸 만한 인재로 될 수 있는 자가 적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나는 말하기를 '이는 사람의
재능을 육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뒤를 쫓아다니면서 고통을 주고 파괴를 가하여 인재로 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또 보다 더욱 심한 해독을 주는 일이 있다.
옛날에는 선비로서의 배우는 길은 정치, 군사에 대한 두 가지었다. 선비들의 재질이 재상, 대부[公卿大夫]로 될 수 있는 자도 있고 사(士)로 될 수 있는 자도 있어서 그의 재질의
크고 작은 데 따라서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의 차이가 있었지마는 군사에 한해서는 그 재질의 크고 작은 데 따라 배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중 큰 자는 조정에 앉아서
재상[六官之卿]이 되고 나가면 육군(六軍) 육군(六軍)：옛날 중국 천자가 거느리던 군대 명칭.

의 장수[將]가 되는 것이며 그 다음가는 자는 비(比), 여(閭), 향, 당(黨)의 군대[師]로서 역시 모두 구분대의 지휘관[卒伍師旅之帥]으로 되었었다. 때문에 국경 방어와 정부
수비 등 임무를 전부 사대부(士大夫)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활한 도배들이 해당 직무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학자들은 정치와 군사를 별개 사업으로
간주하여 나는 문장이나 할 뿐이라고 하면서 국경 방어와 정부 수비와 같은 직무는 하부 병사들에게 밀어 맡기는 결과 그들 중에는 왕왕 세상에 아주 불칙한 무리배들이 들어 있다.
병사들 중에서 만일 그 재능과 행실이 향촌에서 제법 신망을 받는 사람이라면 친척을 떠나 초모(召募)에 응하기를 좋아하는 자도 없었을 것이다. 국경 방비와 정부 수비는 물론 국가의
중대한 사업이며 임금으로서 응당 신중히 해야 할 일이다. 때문에 옛날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활 쏘고 말달리기를 급선무로 삼았고 기타 기능들은 사람의 재질에 적합 여부를
보아서 가르치되 그 재질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강요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활 쏘는 문제에 한해서는 남자의 의무로 되어 있어서 생리적으로 병이 있으면 할 수 없으나 만일 병이 없다면
활쏘기를 거부하고 배우지 않는 자가 있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학교[庠序]에 있어서는 물론 활쏘기에 종사하게 되었고 손님들의 집회가 있을 때에 활쏘기요 제사지내는 일이 있을 때에도
활쏘기요 사람들의 실력이 동일할 때에 등급을 사정하기 위하여서도 활쏘기여서 어떤 예식이나 음악에 관한 행사에서 활쏘기로 대항하지 않을 때가 없었으며 동시에 활쏘기 그 자체가
예악(禮樂), 제사 속에 연결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주역』에 이르기를 "활과 화살의 우수한 것으로써 세상에 시위한다" 하였으니 옛날에 어찌 활 쏘는 것을 예절을 학습하기 위한
한 개의 의례적 행사로만 간주할 뿐이었겠는가? 응당 활 쏘는 것은 군사상 가장 중대한 것으로서 세상에 시위하며 국가를 수호하는 도구로 하기 위함일 것이다. 집에 들어서는 이것으로
예악을 학습하고 밖에 나가면 이것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학생들이 이미 아침저녁으로 여기에 종사해서 능수로 된 자가 많으면 국경 방위와 정부 수비의 사업에 모두 골라서 쓸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학생들이 일찍이 옛날 사람의 도리를 학습하였고 또 그의 우수한 품행들이 자기 고향에서 추천을 받은 다음에야 그의 재능에 따라 국경 방비와 정부 수비의 직무를
위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 임금이 병권을 남에게 밀어 맡기고도 안팎 근심이 없게 된 근본 요인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임금이 이러 중대한 임무이며 극히 신중히 선택해야 할
권리를 가져다가 세상에서 교활한 무뢰배와 재능과 품행이 자기의 고향에서 향촌에서 신임을 받지 못할 사람에게 밀어 맡긴다. 이것이 방금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항상 국경 방비에 걱정을
가지게 되고 정부 수비에 있어서 믿고 안심할 수 없음을 근심하게 되는 원인이다"라고 하였다.

신종(神宗)시기에 정자(程子)[명도(明道)]가 글을 올려 열 가지 일을 논의하였는바 그 중 인재선발을 논한 부분에서 이르기를 "학교교육[庠序之敎]이란 옛날에 인륜을 밝혀서 온
나라를 교양, 육성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사업이 폐지되고 도덕이 통일되어 있지 못하며 향사례(鄕射禮)가 없어지고 예의가 발전되지 않으며 인재선발의 근본을 지방에 두지
않아서 도덕적 품행이 발전되지 않고 우수한 분자들은 학교에서 양성되지 않아서 인재가 많이 버림을 받게 된다"라고 하였다.

정자[이천(伊川)]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국가의 훌륭한 정치는 훌륭한 인재를 해결함과 연관되어 있고 국가의 정치가 잘되지 못한 이유는 인재를 놓혀 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요는 탐구하는 방법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에 있어서도 인재를 탐구하는 것은 원래 정치를 잘하기 위해서이며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은 어느 것이고
옛날 역대 선철[五帝三王周公孔子]들의 나라를 통치하던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본 원칙에 밝은 자를 탐구하여 각각 얻어진 인재의 크고 작은 것에 의하여
등용하되 재상(宰相) 사업을 할 자가 있으면 재상을 시키고 경, 대부(卿大夫)의 사업할 자가 있으면 경, 대부를 시키고 군(郡)을 담당할 만한 기능이 있는 자는 자사(刺史)를
시키고 현의 정치를 수행할 만한 자는 현령(縣令)을 시켜서 각각 적임자에게 맡기면 어떤 직무이고 강화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고서 나라가 다스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몇 개 과목을 적용하여 선발하고 있으나 '현량', '방정'으로 선발한 것이 매년 한두 명에 그칠 뿐입니다. 게다가 선발한다는 것도 여러 경전을
많이 암기하는 부류들뿐입니다. 소위 '명경'과 출신이라는 것이 단지 겉만 암송할 뿐이고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니 더욱 쓸모없는 자들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진사'과이나 이들은 시, 부나 운문[聲律]으로 전공[功]을 삼으니 시나 부 속에 국가를 통치하는 방도가 있지 않습니다. 또 사람들이 이 사, 부를 배워서 과거에 합격해 가지고
연한이 오래되어 재상 지위에 올라가게 되니 어떻게 선철들의 기본 도리와 교육 문화의 본질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가 관직에 임명되어 사업을 하게 될 때에는 일찍이 학습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마치 북방 사람에게 배를 젓게 하고 남방에 사는 사람에게 말을 타라고 하는 셈입니다. 이러고서 능숙하기를 바라기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 정도(丁度)
정도(丁度)：중국 송나라 때의 저명한 유학자. 이름은 호(灝), 자는 백순(伯淳).

가 건의하기를 '송나라가 건국한 이래로 인재를 뽑는 데 있어서 다수의 경우에 우매하기가 짝이 없었기 때문에 논의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이를 가는 형편입니다. 묵자(墨子)의 신봉자를
시켜 묵자를 평가하게 하면 물론 묵자의 교리가 좋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정치가 잘되지 못한 것은 실로 어진 임금만 있고 어진 신하가 없는 데 기인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 세상에 인재가 없겠습니까? 그들을 탐구하는 방법이 틀린 탓입니다. 정말 인재를 꼭 구하려면 꼭 구할 수 있을 것이니 왜 방법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왕도(王道)의 행(行)치 못한 지 2천 년이며 후세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때가 다르고 일이 변하여서 다시 행치 못할 것이라 하니 이는 무지하기 깊은 것이거늘 그런데
인군(人君)들은 왕왕히 그 말에 혹(惑)합니다. 지금에 어느 사람이 길에서 물건을 주워서 옥공(玉工)에게 보이니 옥(玉)이라 말하고 중인(衆人)에게 보이니 돌이라 말하였다고 하면
마땅히 옥공의 말로써 옳다고 하리까. 중인의 말로서 그렇다고 하리이까. 반드시 옥공으로써 옳다고 할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유식(有識)과 무식(無識)입니다.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수시(垂示)한 것은 후세를 다스림을 생각한 것이어늘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금 세상에 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니 그러면 성인의 도(道)를 지켜야 하리이까? 중인의 말을
좇아야 하리이까? 중인에게 이르기를 왕도(王道)를 행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눈먼 자에게 묻기를 오색(五色)의 고운 빛으로써 하고 귀먹은 자에게 묻기를 팔음(八音)의 아름다운
소리로써 하는 것과 같으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고 함이 마땅합니다. 저들이 오색을 미워하거나 팔음을 싫어하거나 함이 아니고 보고 듣는 것이 국한됨 입니다"하였다.]

정자(程子)가 또 말하기를 "한나라에서 '현량'을 뽑을 때에도 공손홍(公孫弘) 공손홍(公孫弘)：중국 전한 무제 때 미천한 가정 출신으로 승상(丞相)이 되고 평진후라는 봉작을 받은
사람.

같은 자를 '현량'으로 추천한 자가 있었다. 그러나 공손홍 같은 자도 억지로 불러내야만 나가서 임금의 묻는 말에 대답하였었다. 그런데 뒷날의 '현량'은 즉 자신이 추천을 요구한
자뿐이다. 만일 그들이 과연 '내 마음은 임금과 직접 면대하여 국가사업을 숨김없이 털어놓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한 자가 있다면 긍정할 점도 있다. 그러나 만일 목적을 부귀에 둔다면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될 때는 이어 교만하고 방탕하게 될 것이며 뜻대로 되지 못할 때에는 이어 방탕, 타락, 비관을 발로할 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덕행과 도리 및 기예로써 교육한 다음 그 중 현명하고 재능 있는 자를 추천하였던바 그 방법이 주밀하고 의미가 심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소위 상세하게 가르치고 엄밀하게 심사한다는 것이란 이러저러한 수단으로 털어 버리며 두세 차례 선택한다고 하지마는 그 가르치고 선발한다는 과목이란
쓸데없는 빈말에 지나지 않는 것뿐이다. 깊이 그 의미를 연구해 보면 혹 앞으로 사용 가치가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이 무용한 빈말을 해야만 국가의 작위와 봉급을 얻을 수 있는 줄로
알고 있으니 그들이 어찌 국가의 자기들을 선발하는 의도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할 여가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날의 학교에서 선발하는 방법은 시골에서 시작하여 수도에 이르기까지 덕행과 재능으로써 교육한 다음 그 중에서 어질고 유능한 자를 추천하여 우대하였었다. 그들의
생활하는 장소가 다르지 않았고 벼슬을 임명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았고 그들을 뽑는 길이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학도들은 일정한 목적을 가져서 딴 생각을 하지 않으며 밤낮 열성을
기울이어 다만 덕행과 학업이 전진하지 못할까를 염려하고 작위와 보수가 이르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공자가 말한바 '말에 과오가 적고 행동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녹봉은 그
속에 있다'란 것과 맹자가 말한바 '자기의 타고난 도덕적 품성을 잘 육성한다면 사람이 주는 관작은 자연 따라온다'라는 것들이 대체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삼대 때의 교육은 기예가 가장 하등으로 되었지마는 그래도 모두 실용적이어서 폐지할 수 없었다. 당시 제정한 법의 제도가 세밀하게 되어 기예가 또 마음을 바로잡고 품성을 배양하는
보조로 되는 동시에 도덕적 귀결점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옛날에 인재를 완성시키고 풍속을 돈후하게 하며 국가사업을 추진하여 평화를 이룩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는 그렇지 못하여서 비록 지방 추천[鄕擧]이 있다고는 하나 그 뽑는 인원수가 고르지 못하며 또 태학에서의 이욕으로 유도하는 길 하나 이외에 감시(監試), 조시(漕試),
부시(附試) 등 협잡스런 지름길을 설정함으로써 분주 유랑하는 심리를 조장시켰다. 그 교육 자체는 도덕과 품행의 실지에 기본을 두지 않으며 소위 문예 그 자체도 전부 쓸데없는
빈말들이다. 극단에 이르러서는 빈말이 모두 황당무계하여서 마치 학도들의 의지를 퇴패시키기 좋을 만하다. 이러므로 인재는 날로 감소되고 풍속은 날로 각박해져서 중앙과 지방을 불문하고
한 가지 불의의 일이 제기되면 재상[公卿] 대부로부터 각급 하부 일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실색을 하여 서로 바라만 보고 해결 방도를 찾지 못하니 여기에서도 그 교육이 잘되고 못된
것을 실증할 수 있다. 앞으로 이 제도를 개혁하여 옛날 조상들의 제도를 찾고 오늘의 습속을 개선하려면 반드시 명도(明道) 선생의 희령(熙寧) 때 건의한 바와 같이 하여야만 그
근본적인 문제를 철저히 시정하고 거기에서 발생한 여려 가지 폐해를 전부 혁신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명도의 희령 때 건의는 11권에 게재하였음.]

또 말하기를 "옛날의 교육이란 덕행을 우선적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순(舜)임금이 사도(司徒)에게 명령하여 다섯 가지 교화[五敎]를 실시하는 것과 전악(典樂)에게 명령하여
귀족의 맏아들[胄子]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모두 이것이었다. 주(周)나라에 이르러 교육제도가 비로소 완비되었기 때문에 인재가 많았으며 풍속이 아름다웠으니 후세에 도저히 그를 따를 수
없었다. 한나라 초기에도 아직 남은 제도들이 있었는바 그 선발하는 과목으로서 추천을 받는 자가 반드시 어른을 존경하고 마을에서 온순하며 정령을 엄숙히 준수하여 들어가나 나가나
품행이 소문과 틀리지 않는 자를 첫째로 삼았었다. 위(魏), 진(晉) 이후에도 비록 옛날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구품(九品)제도이니 중정(中正)이니 하는 제도가 있어서 그래도 옛
제도와 비슷한 바 있었으나 수나라, 당나라에 이르러서 전혀 문장으로 사람을 뽑게 되면서부터 덕행을 앞세우는 기풍을 다시 찾아 볼 수 없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오늘에 와서는 남은
폐해가 극도에 달하였으니 형편상 그것을 개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상 인재선발에서의 잘못에 대한 역대 명인들의 의논이 이미 구체적이어서 많은 말을 다시 요하지 않는다. 만일 훌륭한 임금이 있어서 낡은 폐단을 고치고 옛날의 우점을 다시 적용한다면
한 번 전변을 일으키는 순간에 있어서 쇠약은 강성에로, 혼란은 정리로 전변될 것이다.[세상의 말하는 자들은 보통 예(例)와 이제의 정황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나도 그
말이 옳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의혹이 없지 않았으나 그 사물의 실정을 상고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황당무계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대체 하늘 이치의 가리키는 기본 원칙이란
사람의 마음도 편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사세의 표현도 필연적으로 규칙되는 그것이다. 그대로 하면 소득이 있고 반대로 하면 실패를 하며 그대로 하면 평화로웠고 반대로 하면
어지러웠으며 그대로 하면 편안했고 반대로 하면 위태로웠던 것은 실로 과거 유구한 역사가 한결같이 말하여준다. 그러면 무엇이 변동을 시킨단 말인가? 그처럼 나쁜 법[弊法]이 생기게
된 원인을 따져 본다면 그 초기에는 대개 몽매한 임금과 아첨쟁이 신하들이 있어서 우선 눈앞의 사리사욕에만 추구하다가 옛 제도를 변경, 혼란시킨 데서 발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뒤를
이은자들도 그대로 답습하여 하루하루 날이 오래됨에 따라 옛 법과 같이 되어 버렸다. 그 중에는 비상한 자질을 가진 임금이 있었지마는 자신이 체득한 학문과 옛 것을 연구한 실력이
옛날의 명철한 왕들과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못된 자[庸人]들의 저지를 받아 역시 개혁하지 못하게 된 거이니 그 나쁜 법을 개혁하지 못한 밑과 끝이란 이러할 뿐이다. 무슨
정황의 변동이 있으며 또 무슨 정세가 중간에서 가로막고 있을 것인가? 그의 마련된 법이 이렇다나니 시속의 편향적 사업들이 그렇게 조성되어 자연히 옛날과 다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제도가 예와 다른 것을 보고 그만 정세와 인심이 이미 옛날과 변화되었다고 간주하게 되니 아!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어떤 사업을 막론하고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니 하필 낡은 것에 얽매어 하나하나 옛것을 회복할 것인가?"라고 한다. 낡은 것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사업에서 제일 훌륭한 것들은
옛날에 모두 실행했고 제일 나쁜 것들은 뒷 시기에 모두 되풀이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훌륭한 것을 취하자니 자연 옛것을 회복하는 것이 되며 나쁜 것을 버리자니 자연 지금의 것을
개혁하는 것이 되는바 이것은 오직 슬기로운 자라야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정치를 한다면서 옛날 사람들의 자취를 밟지 않으면 지혜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격언이라 하겠다. 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니라 백 가지 일이 다 그러한 것이다. 문장과 무술로써 과거를 보이는 제도에 있어서 처음 못쓰게 만든 장본인은
수양제(隋煬帝)와 무후(武后)이다. 이것은 다만 우리나라의 연산군(燕山君)이 부화방탕하여 진상, 공물 제도를 변경한 그것을 지금까지 시정하지 못한 것과 같으며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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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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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擧議論附漢武帝時 董仲舒對策曰"夫不素養士 而欲求賢 譬猶不琢玉 而求文釆也. 故養士莫大乎太學 太學賢士之所關也 敎化之本原也. 願興太學置明師 以養天下之士 數考問以盡其材 則英後宜可得矣.
今之郡守縣令 民之師帥 所使承流而宣化也. 故師帥不賢 則主德不宣 恩澤不流. 今吏旣無訓於下 或不承用主上之法 暴虐百姓 與奸爲市 言小吏有爲奸欺者守令不擧 乃反與之交易求利也. 貧窮孤弱 寃苦失職
甚不稱陛下之意. 夫長吏 多出於郎中中郎吏 二千石子弟選郎吏 又以富貲未必賢也. 且古所謂功者 以任官稱職爲差 非謂積日累久也. 故小材雖累日 不離於小官 賢材雖未久 不害爲輔佐. 是以有司竭力盡智
務治其業而以赴功. 今則不然 累日以取貴 積久以致官. 是以廉恥貿亂 賢不肖混殽也. 請令諸侯ㆍ列卿ㆍ郡守ㆍ二千石 各擇其吏民之賢者 歲貢各二人 以給宿衛. 且以觀其大臣之能所貢賢者有賞 不肖者有罰.
夫如是 諸侯ㆍ吏ㆍ二千石皆盡心於求賢 天下之士可得而官使也. 授之以官以使其材也. 無以日月爲功 實試用賢能爲上 量材而授官 錄德而定位 則廉恥殊路 賢不肖異處矣."帝於是
令郡國擧孝廉各一人.○光武時 陳事者多言"郡國貢擧 率非功次. 故守職益懈 而吏事寢疎 咎在州郡."詔下公卿朝臣議. 韋彪上議"夫國以簡賢爲務 賢以孝行爲首. 孔子曰'事親孝
故忠可移於君.'是以求忠臣 必於孝子之門. 夫人才行 少能相兼. 是以孟公綽優於趙魏老 不可以爲滕薛大夫. 忠孝之人 持心近厚 鍛鍊之吏 持心近薄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 士宜以才行爲先
不可純以閥閱. 然要其歸 在於選 二千石賢 則擧貢皆得其人矣."帝深納之.○順帝時 張衡上疏曰"古者以賢取士 諸侯歲貢. 孝武之世 郡擧孝廉 又有賢良文學之選. 於是名臣皆出 文武並興 漢之得人
數路而已. 夫書畫辭賦才之小者 匡國理政未有能焉. 陛下卽位之初 先訪經術 聽政餘日 觀省篇章 聊以遊意. 當代博奕 非以敎化取士之本 而諸生競利 作者鼎沸. 其高者頗引經訓風喩之言 下則連偶俗語
有類徘優 或窃成文 虛冒名氏. 臣每受詔於盛化門 差次錄第其未及者 亦復隨輩 皆見拜擢 旣加之恩 難復收改. 但守俸祿 於義已加 不復使治人及任州郡. 昔孝宣會諸侯於石渠 章帝集學士於白虎 通經釋義
其事優大. 文武之道 所宜從之. 乃若小能小善 雖有可觀 孔子以爲致遠則泥. 君子故當致其大者遠者也."○晉武帝時 傳玄以魏世 士風頹廢. 上疏曰"臣聞先王之臨天下也 明其大敎 長其節義 道化崇於上
淸議行於下 上下相奉 人懷義心. 亡秦蕩滅先王之制 以法術相御 而義心亡矣. 近者魏武好法術 而天下貴刑名 魏文慕通達 而天下賤守節. 其後綱維不攝 而虛無放誕之論盈於朝野 使天下無復淸議 而亡秦之病
復發於今. 陛下龍興 猶未擧淸遠有禮之臣 以敦風節 未退虛鄙之士 以懲不恪也."帝善其說 乃使玄 草詔進之而不能用. 玄又奏曰"先王分士農工商 以經國制事 各一其業而殊其務. 自士以上子弟
則爲之立太學以敎之 選明師以訓之 隨才優劣 以之授用. 農以豊其食 工以足其器 商賈以通其貨. 故雖天下之大 兆庶之衆而無遊人在其間. 漢魏不定其分 百官子弟 不修經藝而務交遊 未知蒞事而坐享天祿.
農工之業多廢 或逐輕利而離其事 徒繫名於太學 而不聞先王之風. 今聖政資始 而漢魏之失未改. 散官衆而學校未設 遊手多而親農者小 工器不盡其宜 臣以爲宜亟定其制. 禹稷躬稼 祚崇後代 明堂月令
著帝籍之制. 伊尹古之名臣 耕於有莘. 今王人賜官冗散無事者 不使督學則當使耕 無緣放之 使坐食百姓也. 文武之官旣衆 賜拜不在職者又多. 加以服役爲兵 不得耕稼 當農者之半 南面食祿者 三倍於前.
使冗散之官爲農 而收其租稅 家得其實 而天下之穀可以無乏矣. 天下足食 則仁義之敎 可不令而行也. 虞書曰'三載考績 三考黜陟幽明'是爲九年之後 乃有遷叙也. 故居官久則念立愼終之化
不久則競爲一切之政. 六年之限 日月淺近 不周黜陟 惟陛下裁之."帝並善之 而終不能用.○梁沈約論曰"君子小人 類物之通稱. 蹈道則爲君子 違之則爲小人. 是以太公起屠釣爲周師 傳說去板築爲殷相.
胡廣累世農夫 致位公相黃憲牛醫之子 名重京師. 非若晩代 分爲二途也. 漢末喪亂 魏武時始於軍中 倉卒權立九品. 蓋以論人才優劣 非謂世族高卑 因此相沿遂爲成法. 自魏至晉 莫之能改. 州都郡正
以才品人 而擧世人才 升降蓋寡. 徒以憑籍世資 用相凌駕 都正俗士 斟酌時宜 品目多小 隨等俯仰. 劉毅所云'下品無高門 上品無賤族也.'歲月遷訛 斯化漸篤 凡厥衣冠 莫非二品. 自此以還 遂成卑庶.
周漢之道 以智役愚 臺隸參差 用成等級. 魏晉以來 以貴役賤 士庶之科 較然有辨. 夫人君南面 九重奧絶 倍奉朝夕 義隔卿士 階闥之任 宜有司存."武帝天監中 約又上疏曰"頃自漢世 本無士庶之別.
自非仕宦 不至京師. 罷公卿牧守 並還鄕里 小人瞻仰 以成風俗. 且黌校棊布 傳經授業 皆學優而仕始 自鄕邑本於小吏ㆍ幹佐方至文學功曹 積以歲月 乃得察擧人才秀異 始爲公府所辟 遷爲牧守 入作台司
漢之得人 於斯爲盛. 今之士人 並聚京邑 其有守土不遷 非直愚賤. 且當今士人繁多 畧以萬計. 常患官少才多 無地以處. 秀才自別是一種任官 非若漢世取人之例. 假使秀才對五問可稱
孝廉答一策能過此乃雕蟲小道. 非關治功得失 以此求才 徒虛語耳."○裴子野曰"書云'貴貴爲其近於君也.'天下無生而貴者. 是故道義可尊 無擇負販. 苟非其人 何取世族? 周衰禮壞 政出臣下
卿士大夫自相繼及 非夫嗣嫡 猶等家臣. 且徒步匹夫 見理侯伯 軾閭擁篲 無絶於時. 其後四方貴勢之家 門客千數 卑身折節 比食同袍 雖相傾倚 亦成風俗. 迄于二漢 尊儒重道 朝廷州里 學行是先.
雖名公子孫 還齊布衣之士 士庶雖分 而無華素之隔. 自晉以來 其流稍改 草澤奇士猶厠淸塗 降及季年 專稱閥閱. 自是三公之子 傲九棘之家 黃散之孫蔑令長之室 轉令互爭銖兩 所論必門戶 所議莫賢能.
苟且之俗成 傲慢之禍作 非所以敦弘退讓 厲德興化之道也."○後魏孝文帝時 韓顯宗上言"前代取士 必先正名. 故有賢良方正之稱. 今州郡貢察 徒有秀孝之名 而無秀孝之實 而朝廷但檢其有門地遂不復彈坐.
如此則可令別貢門地 以叙士人 何暇置秀孝之名也? 夫門地者 是其祖父遺烈 亦何益於皇家? 苟有奇才 雖屠釣奴虜之賤 亦用之 苟非其人 雖三后之胤 自墜於皁隸矣. 或云'今世等無奇才
不若取士於門.'此亦失矣. 豈可以世無周召 便廢宰相而不置哉? 但當校其才長望重者 卽先叙之 則賢才無遺矣."○隋文帝開皇中 治書侍御史李鍔以選才失中 上書曰"自魏之三祖 更尙文詞 忽君人之大道
好雕蟲之小藝. 下之從上 有同影響 競騁浮華 遂成風俗. 江左齊梁 其弊彌甚. 貴賤賢愚 唯務吟咏 遂復遺理存異尋虛逐微 競一韻之奇 爭一字之巧. 連篇累牘 不出月露之形 積案盈箱 唯是風雲之狀.
世俗以此相高 朝廷據茲擢士 祿利之路旣開 愛尙之情愈篤. 於是閭里童昏貴游總角 未窺六甲 先製五言. 至如羲皇舜禹之典 伊傳周孔之業 不復關心 何嘗入耳? 以傲誕爲淸虛 以緣情爲勳績 指儒素爲古拙
用辭賦爲君子. 故文筆日煩 其政日亂 良由棄大聖之軌範 構無用以爲用也. 捐本逐末 流徧華壤 遞相師祖 澆醨愈扇. 及大隋受命 聖道聿興 屛黜輕浮 遏止華僞. 自非懷經抱質 志道依仁 不得參厠纓冕.
開皇四年 普詔天下 公私文翰 並宜實錄. 其年九月 泗州刺史司馬幼之上表華豔 付所司治罪. 由是公卿大臣 咸知正路 莫不鑽仰墳素 棄絶華綺. 似聞在外州縣 仍踵弊風 選吏擧人 未遵典則. 至於宗黨稱孝
鄕曲歸仁 學必典謨 交不苟合 則擯落私門 不加收齒. 其學不稽古 逐俗隨時 作輕薄之篇章 結朋黨而稱譽 則選充吏職 擧送天朝. 蓋由縣令刺史 未行風敎 猶挾私情 不存公道. 臣旣忝憲司職當糾察
若聞風卽劾 恐挂網者多. 請勅諸司 普加搜訪 有如此者 具狀送臺."○唐高宗時 劉祥道以選擧漸弊 陳奏曰"吏部比來取人 傷多且濫. 每年入流數 過千四百人 是傷多. 永徽五年 一千四百三十人.
六年一千十八人. 顯慶元年 一千四百五十人. 不簡雜色人 卽注官 是傷濫. 雜色解文三衛 內外行署 內外番官 親事帳內品子 在雜掌伎術 直司書手 兵部品子 兵部長校 勳官記室及功曹參軍 檢校官
屯副驛校尉 牧長. 經學時務 等比雜色 三分不居其一. 經明行修之士 猶罕有正人 多取胥徒之流 豈可皆求德行? 卽知天下共釐百姓之務者 善人少而惡人多 爲國以來 四十餘載 尙未刑措 豈不由此?
且官人非材者 本因用人之源濫 濫源之所起 復由入流人失於簡擇. 今行署等勞滿 唯曹司試判 不簡善惡 雷同注官 斗筲之器傷於易進. 其雜色應入流人請令曹司試判訖 簡爲四等奏聞. 量有材用兼有景行者
爲第一等. 身品强壯及第八上幷兵部所送人 不古第一等及準例給送兵部者 爲第二等. 餘量簡爲第三四等. 第一等付吏部 第二等付兵部 第三等付主爵 第四等付司勳 並準例處分. 其行署等 私犯下第 公坐下下
雖經赦降 情狀可責者 亦量配三司. 不經赦降者 放還本貫 冀入流不濫. 且令胥徒之輩 知有銓擇 若復素非廉謹 必將漸自飭勵."又曰"古之選者爲官擇人 不聞擇人多而官員少. 今之選者亦擇人 但擇之無準約
官員有數入流無限. 以有數供無限 人隨歲積 豈得不賸? 謹準約所須人 量支年別入流數. 今內外文官一品以上九品以下一萬三千四百六十五員 略擧大數 當一萬四千人. 人之賦命有修促 弱冠而從政 縣車而致仕
五十年食祿者 罕見其人. 壯室而仕 耳順而退. 取其中數 不過支三十年. 此則一萬四千人 三十年而略盡. 若年別入流者 五百人 經三十年 便得一萬五千人. 定須者一萬三千四百六十五人 足充所須之數.
况三十年之外 在官者猶多 此便足有賸 人不慮其少. 今每年入流者 遂至一千四百餘人 應須五百數外 常賸一倍以上. 又比來放還者 見停亦千餘人. 更復年別新加 實非搜揚之法."又曰"雜色人 請與明經進士
通充入流之數 以三分論 每二分取明經進士 一分取雜色人."又曰"儒爲敎化之本 學者之宗. 儒敎不興 風俗將替. 今庠序遍於四海 儒生溢於三學 而奬進之道未周. 國家于今四十年 百姓官僚 未有秀孝之擧
未知今人之不如昔 將薦賢之道未至? 請六品以下爰及山谷 特降綸言 更審搜訪 仍量爲條例 稍加優奬. 不然赫赫之辰斯擧遂絶 實爲朝廷惜之."○上元初 劉嶢上疏曰"國家以禮部爲考秀之門 考文章於甲乙.
故天下響應 驅馳於才藝 不務於德行. 夫德行者 可以化人成俗 才藝者可以約法立名. 故有朝登甲科 而夕陷刑辟 制法使之然也. 陛下焉得不改而張之? 至如日誦萬言 何關理體 文成七步 未足化人.
昔子張學干祿 仲尼曰'言寡尤行寡悔 祿在其中矣.'又曰'行有餘力 則以學文.'今捨其本而循其末. 况古之作文 必諧風雅 今之末學 不近典謨. 勞心於卉木之間 極筆於煙雲之際 以此成俗 斯大謬也.
昔之採詩 以觀風俗. 詠卷耳則忠臣喜誦蓼莪而孝子悲. 溫良敦厚詩敎也 豈主於淫文哉? 夫人之愛名 如水之就下 上有所好 下必甚焉. 陛下若以德行爲先 才藝爲末 必敦德勵行 以佇甲科 豊舒俊才 沒而不齒
陳寔長者 拔而用之 則多士雷奔 四方風動. 風動於外 聖理於上 豈有不變者歟?"○武后時薛謙光以時 雖有學校之設 禁防之制 而風俗流弊 皆背本趍末 以請托奔馳爲務. 上疏曰"古之取士考素行之原
詢鄕邑之譽 崇禮讓明節義 以敦朴爲先 調文爲後. 故人崇勸讓 士去輕浮 以計貢賢愚爲州之榮辱. 蓋冀缺以禮讓升 而晉人知禮 文翁以經術敎 而蜀士多儒 未有上好而下不從者也. 漢世求士 必觀其行.
故士有自修 爲閭里推擧 然後府寺交辟. 而魏氏取人 好其放達. 晉宋之間 只重門資 奬爲人求官之風 乖授職惟賢之義. 梁陳之間 特尙詞賦 故其俗以詩酒爲重 未嘗以修身爲務. 隋文帝納李鍔之言
詔禁文章浮詞 時泗州剌史司馬幼之以表辭華艶得罪 由是風俗稍改 政化可觀. 煬帝始置進士等科 後生復相馳競 赴速趍時 綴緝小文 名曰策學 而皆以浮虛爲貴. 方今擧士 尤乖其本. 鄕議決小人之筆
行修無長者之論. 策第喧競於州府 祈恩不勝於拜伏. 或明製適下 試令搜揚 則驅馳府寺 請謁權貴. 陳時奏記 希咳唾之澤 摩頂至足 冀提携之恩. 故俗號擧人爲覓擧. 夫覓者自求之稱 非人知我之謂也.
今夫擧人 雖跡虧名敎 罪加刑典 或冒籍窈資 邀勳盜級 假其賄賂 卽爲無犯. 鄕閭設如才應經邦 惟令試策 武能製敵 只驗彎弧. 文摽淸奇則登甲科 藻思小減則爲不第. 以此收人 恐乖事實. 何者?
樂廣假筆於安仁 靈運詞高於穆之 平津文劣於長卿 子建藻麗於荀彧. 若以射策爲官 則潘謝曹馬 必居孫樂之右. 協贊機猷 則安仁靈運 亦無裨附之益. 由此言之 固不可一槩而取也. 其武藝亦然
故謀將不長於弓馬 良相寧資於射策? 願陛下降明製 班峻刑文則試以理官 武則令其守 禦. 使澆名濫次之伍 無所藏其庸謬. 臣謹按吳起臨戰 左右進劍. 起曰'夫臨難決疑 乃將事也. 一劍之任
非將事也.'又按楊得意誦相如之文 武帝曰'恨不得與此人同時'及相如至 終於文園令 不以公卿之位處之者 蓋非其任故也. 又按漢法所擧之主 終身保任. 楊雄之坐田儀 責其冒薦 成子之得魏相 酬於得賢.
賞罰之令行 則請謁之心絶 遜讓之義著 則貪競之路塞矣. 仍請寬立年限 容其採訪簡汰 堪用者 試令守以觀能否 參檢行事 以覈是非. 稱職者受薦賢之賞 濫擧者抵欺罔之罪 自然擧得才行
而君子之道長矣."○劉秩擧選論曰"夏殷周選士 必於庠序 非其道者莫得仕進. 是以誘人也無二 其應之者亦一. 及周之末 諸侯異政 取人多方. 商鞅說秦孝公變法令 非戰非農不得爵位 秦卒以是幷呑六國.
漢室初定 貴尙淳質. 高后擧孝悌力田 文景守而不變 故下有常業 朝稱多士. 及孝武察孝廉 置五經博士 弟子雖門閥二三 而未失道德也. 逮至晩世 銃意四夷 軍旅相繼 官用不足. 故聚斂計料之政生
設險興利之臣起 而法先王之術 習俎豆之容者 無所任用. 由是精通秀穎之士 不游於學 游於學者 率章句之儒也. 是以昭帝時 霍光問人疾苦 不本之於太常諸生 徵天下賢良文學以訪之. 至於東漢光武好學
不能施之於政 乃躬自講經. 肅宗以後 時或祖述 尊重儒術 不達其意而酌其文. 三公尙書 雖用經術之士 而不行經術之道. 是以迄于東漢 慷慨方通之士寡 廉隅立節之徒衆. 漢氏失馭 曹魏僭竊 中正取士
權歸著姓 雖可以鎭伏佗庶非尙賢之術. 于時聖人不出 賢哲無位 詩道大作 怨曠之端也. 洎乎晉宋齊梁 遞相祖習 其風彌盛. 舍學問尙文章 小仁義大放誕 談莊周老聃之說 誦楚詞文選之言. 六經九流時曾閱目
百家三史罕聞於耳. 撮群抄以爲學 緫衆詩以爲資. 謂善賦者廊廟之人 雕蟲者台鼎之器. 下以此自負 上以此選材 上下相蒙 持此爲業. 雖名重於當時 而不達于從政. 故曰取人之道 可以敦化.
周書曰'以言取人 人謁其言 以行取人 人謁其行.'取人之道 不可不愼也. 原夫詩賦之義 所以達下情諷君上也. 近之作者 先文後理 詞冶不雅 旣不關於諷剌 又不足以見情. 蓋失其本 又何爲乎?
隋氏罷中正擧選 不本鄕曲 故里閭無豪族 井邑無衣冠. 人不土著 萃處京畿 士不飭行 人弱而愚. 夫古者以勳賞功 以才蒞職. 以才蒞職 是以職與人宜. 近則以職賞功 是以官與人乖. 古者計人而貢士
計吏而用人 故士無不官 官無乏吏. 近則官倍於古 士十於官 求官者又十於士 故士無官 官乏祿 吏擾人. 古者王畿千里之外 封建諸侯. 諸侯之吏 自卿以降 各自擧任. 當乎漢室 保傳將相外 餘盡專之
州縣佐使則皆牧守遷辟. 夫公卿者 主相之所任也. 甸外之官吏者 又諸侯牧守之事也. 然則主司之所遷者 獨甸內之吏 公卿府之屬耳. 豈不寡哉? 所遷旣寡 則焉得不精? 近則有封建而無國邑 五服之內
政決王朝一命 拜免必歸吏部 按名授職 猶不能遍. 何暇採訪賢良 搜覈行能耶? 時皆共嗤其失 而不知失之所以 故備詳之."○洋州剌史趙匡擧選議曰"昔三代建侯 與今事異 理道損益. 請自漢言之. 漢朝用人
自詔擧之外 其府寺郡國屬吏 皆令自署. 故天下之士修身於家 而辟書交至. 以此士務名節 風俗用修. 魏氏立九品之制 中正司之 於是族大者第高 而寒門之秀屈矣. 國朝擧選 用隋氏之制 歲月旣久
其法益訛. 夫才知因習就 固然之理. 進士者時共貴之 主司褒貶 實在詩賦 務求巧麗. 以此爲賢 不惟無益於用 實亦妨其正習 不惟撓其淳和 實又長其佻薄. 自非識度超然 時或孤秀 其餘溺於所習
悉昧本源. 欲以啓導性靈 奬成後進 斯亦難矣. 故士林鮮體國之論 其弊一也. 又人之心智 蓋有涯分 而九流七略 書籍無窮 主司徵門 不立程限. 故修習之時 且務鈔略 比及就試 偶中是期 業無所成
固由於此. 故當代寡人師之學 其弊二也. 疎以釋經 蓋筌蹄耳. 明經讀書 勤苦以甚. 旣曰問義 又誦疏文 徒竭其精華. 習不急之業 而當代禮法 無不面墻及臨人決事 取辨胥吏之口而已. 所謂所習非所用
所用非所習者也. 故當官少稱職之吏 其弊三也. 擧人大率二十人中 方收一人 故沒齒而不登科者甚衆. 其事難 其路隘也如此 而雜色之流廣通其路也. 此一彼十 此百彼千 揆其秩序 無所差降. 故受官
多底下之人 修業 抱後時之歎. 待不才者何厚? 處有能者何薄? 崇末抑本 啓昏窒明. 故士子舍學業而趍末伎 其弊四也. 收人旣小 則爭第急切 交馳公卿 以求汲引. 毁訾同類 用以爭先. 故業因儒雅
行成險薄 非受性如此 勢使然也. 浸以成俗 虧損國風 其弊五也. 大抵擧選人 以秋初就路 春末方歸休息未定 聚糧未辦. 卽又及秋事 業不得修習 益令藝能淺薄 其弊六也. 羈旅往來 縻費實甚.
非唯妨闕生業 蓋亦隳其舊産. 未及數擧 索然已空 其弊七也. 貧窶之士 在遠方 欲力赴京師 而所冀無際 以此揆度 遂至歿身. 使茲人有抱屈之恨 國家有遺才之闕 其弊八也. 官司運江準之儲計 五費其四
乃達京邑. 芻薪之貴 又十倍四方 而擧選之人每年攢會計 其人畜蓋將數萬. 無成而歸 十乃七八 徒令國中煩耗 其弊九也. 爲官擇人 唯方是待. 今選並格之以年數 合格者判雖下劣 一切皆收 如未合格
應科目者 纔有小瑕 莫不見棄. 故無能之士 祿以例臻 才俊之流 坐成白首. 此非古人求賢審官之義亦已明矣 其弊十也. 選人不約本州所試 悉令聚於京師. 人旣浩穰 文簿繁雜. 因此渝濫 其事百端.
故俗間相傳云'入試非正身十有三四 赴官非正身 十有二三.'此又弊之尤者. 今若未能頓除擧選以從古制 且稍變易 以息弊源 則官多佳吏 風俗可變."○沈旣濟選擧議. 見任官條. ○按選士將以入官.
雖其條序有辨 而本非二途. 後世科目資格之法興 則遂判爲二途. 以故其所論說者 亦未免爲二端矣. 今於選擧任官諸說 亦各從其條載之 而其有相參者 使得互見之云. 宋馬端臨之言曰"古之用人 德行爲首
才能次之. 虞朝載采 亦有九德 周家賓興 考其德行 於才不屑屑也. 兩漢以來 刺史守相 得以專辟召之權. 魏晉而後 九品中正 得以司人物之柄. 皆考之以里閈之毁譽 而試之以曹椽之職業.
然後俾之入備王官 以階淸顯. 蓋其爲法 雖有愧於古人德行之擧 而猶可以得才能之士也. 至於隋而州郡僚屬 皆命於銓曹 搢紳發軔 悉由於科目. 自以銓曹署官 而所按者資格而已. 於是 勘籍小吏
得以司升沉之權 自以科目取士 而所試者詞章而已. 於是操觚末技 得以階榮進之路. 夫其始進也 試之以操觚末技 而專主於詞章. 其旣仕也 付之於勘籍小吏 而專校其資格. 於是選賢與能之意 無復有者.
又古人之取士蓋將以官之. 三代之時 法制雖簡 考核本明 賢愚自判. 往往當時士之被擧者 未有不入官 初非有二途也. 降及後世 巧僞日甚 法令滋多 科目爲取士之途 銓選爲擧官之途
二者各自爲防閑檢泥之法. 至唐則以試士 屬之禮部 試吏屬之吏部. 於是科目之法 銓選之法 日新月異 不相爲謀矣."觀於此說 亦可以知其槩矣.○杜佑曰"三王之世 立庠塾於鄕閭 建黌學於都邑.
訓公卿大夫之子弟 設俊造之目 而最勉成之. 自幼年入學 至四十方仕 然後行備業全事理績茂. 秦漢以降 乃異於斯 其行敎也不深 其取材也務速 欲人浸漬於五常之道 皆登仁壽之域 何可及已? 夫上材蓋寡
中材則多有可移之性. 故有敎方善. 若不敦其敎 欲求多賢 亦不可及已. 非今人多不肖 古人多材能. 在施政立本 使之然也. 而况以言取士 旣已失之. 考言唯華 失之逾遠. 若變玆道
材何遠乎?"○宋仁宗時 王安石上疏曰"先王之取人也 必於鄕黨 必於庠序. 使衆人推其所謂賢能 書之以告于上 而察之 誠賢能也 然後隨其德之大小 才之高下 而官使之. 所謂察之者 非專用耳目之聰明
而聽私於一人之口也. 欲審知其德 問以行 欲審知其才 問以言. 得其言行 則試之以事 所謂察之者 試之以事是也. 方今取士 强記博誦 而略通於文辭 謂之茂才異等賢良方正 茂才異等賢良方正者
公卿之選也. 記不必强 誦不必博 略通於文辭 而又嘗學詩賦 則謂之進士 進士之高者 亦公卿之選也. 夫此二科所得之技能 不足爲公卿 不待論而後可知也. 而世之議者 乃以爲'吾常以此取天下之士
而才之可以爲公卿者 常出於此 不必法古之取人而後得士也.'其亦蔽於理矣. 先王之時 盡所以取人之道 猶懼賢者之難進 而不肖者之雜於其間也. 今悉廢先王所以取士之道 而敺天下之才士 悉使爲賢良進士
則士之才可以爲公卿者 固宜爲賢良進士 而賢良進士亦固宜有時而得才之可以爲公卿者也. 然而不肖者苟能雕蟲篆刻之學 以此進至乎公卿 才之可以爲公卿者 困於無補之學 而以此絀死於巖野 蓋十八九矣.
夫古之有天下者 其所以愼擇者 公卿而已. 公卿旣得其人 因使推其類以聚於朝廷 則百司庶物無不得其人也. 今使不肖之人 幸而至乎公卿 因得推其類聚之朝廷 此朝廷所以多不肖之人. 而雖有賢智 往往困於無助
不得行其意也. 且公卿之不肖 旣推其類 以聚於朝廷 朝廷之不肖 又推其類 以備四方之任使 四方之任使者 又各推其不肖 以布於州郡 則雖有同罪擧官之科豈足恃哉? 適足以爲不肖者之資而已.
其次九經ㆍ五經ㆍ學究ㆍ明法之科 朝廷固已嘗患其無用於世 而稍責之以大義. 然大義之所得 未有以賢於故也. 今朝廷 又開明經之選 以進經術之士. 然明經之所取亦記誦而略通於文辭者 則得之矣.
彼通先王之意 而可以施於天下國家之用者 顧未必得與於此選也."又曰"方今州縣 雖有學 取墻壁具而已. 非有敎導之官 長育人才之事. 唯太學有敎導之官 而亦未嘗嚴其選. 朝廷禮樂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 自以禮樂刑政爲有司之事 而非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 講說章句而已 近歲乃敎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窮日之力 則不能及其能工也. 大則不足以用天下國家
小則不足以爲天下國家之用. 故雖白首於庠序 窮日之力以帥上之敎 及使之從政 則茫然不知其方者皆是也. 蓋今之敎者 非特不能成人之材而已. 又從而困苦毁壞之 使不得成材者何也? 夫人之才 成於專而毁於雜
故先王處士於庠序 使各專其業 而不見異物. 一示之以先王之道 而百家諸子之異說皆屛之 而莫敢習者焉. 夫士之所宜學者 天下國家之用也. 今悉使置之不敎 而敎之以課試之文章 使其耗精疲神 窮日之力
以從事於此. 及其任之以官也 則又悉使置之 而責之以天下國家之事. 夫古之人 以朝夕專其業 而猶才有能有不能. 今乃移其精神 奪其日力 以朝夕從事於無補之學. 及其任之以事
然後卒然責之以爲天下國家之用 宜其才之足以有爲者少矣. 臣故曰非特不能成人之才 又從而困苦毁壞之 使不得成才也. 又有甚害者. 先王之時 士之所學者 文武之道也. 士之才有可以爲公卿大夫 有可以爲士
其才之大小宜不宜則有矣. 至於武事 則隨其才之大小 未有不學者也. 故其大者居則爲六官之卿 出則爲六軍之將也. 其次則比閭族黨之師 亦皆卒伍師旅之帥也. 故邊疆宿衛 皆得士大夫爲之 而小人不得奸其任.
今之學者以爲文武異事吾知治文章而已. 至於邊疆宿衛之任 則推而屬之於卒伍 往往天下姦悍無賴之人. 苟其才行 足自託於鄕里者 亦未有肯去親戚 而從召募者也. 邊疆宿衛 此乃天下之重任
而人主之所當愼重者也. 故古者敎士 以射御爲急 其他技能則視其人才之所宜 而後敎之. 其才所不能則不强也. 至於射則爲男子之事 人之生有疾則已 苟無疾 未有去射而不學者也. 在庠序之間
固當從事於射也. 有賓客之事則以射 有祭祀之事則以射 別士之行同能偶則以射. 於禮樂之事 未嘗不偶以射 而射亦未嘗不在於禮樂祭事之間也. 昜曰'弧矢之利 以威天下'先王豈以射爲可以習揖讓之儀而已乎?
固以爲射者 武事之尤大 而威天下守國家之具也. 居則以是習禮樂 出則以是從戰伐 士旣朝夕從事於此 而能者衆 則邊疆宿衛之事 皆可以擇而取也. 夫士嘗學先王之道 其行義嘗見推於鄕黨矣. 然後因其才
而託之以邊疆宿衛之事. 此古之人君 所以推干戈以屬之人 而無內外之虞也. 今乃以夫天下之重任 人主所當至愼之選 推而屬之姦悍無賴 才行不足自託於鄕里之人. 此方今所以諰諰然常抱邊疆之憂
而虞宿衛之不足恃以爲安也."○神宗時 程子 明道 上疏論十事 其論貢士曰"庠序之敎 先王所以明人倫 化成天下. 今師學廢而道德不一 鄕射亡而禮義不興. 貢士不本於鄕里 而行實不修 秀民不養於學校
而人材多廢."○程子 伊川 上疏曰"天下之治 由得賢也. 天下不治 由失賢也. 世不乏賢 顧求之之道如何爾. 今夫求賢 本爲治也. 治天下之道 莫非五帝三王周公孔子治天下之道也.
求乎明於五帝三王周公孔子治天下之道者 各以其所得大小而用之. 有宰相事業者 使爲宰相 有卿大夫事業者 使爲卿大夫 有爲郡之術者 使爲剌吏 有治縣之政者 使爲縣令. 各得其任 則無職不擧 然而天下不治者
未之有也. 國家取士 雖以數科 然而賢良方正 歲止一二人而已. 又所得 不過博聞强記之士爾. 明經之屬唯專念誦 不曉義理 尤無用者也. 最貴盛者 唯進士科 以詞賦聲律爲工 詞賦之中 非有治天下之道也.
人學之以取科第 積日累久 至於卿相 帝王之道 敎化之本 豈嘗知之? 居其位責其事業 則未嘗學之. 譬如胡人操舟 越客爲御 求其善也 不亦難乎? 往者丁度建言'祖宗以來 得人不少愚瞽之甚 議者至今切齒.
使墨論墨 固以墨爲善矣. 今天下未治 誠由有君而無臣也.'豈世無人? 求之失其道爾. 苟欲取士必得 豈無術哉?"又曰"王道之不行 二千年矣. 後之愚者 皆云'時異事變 不可復行.'此則無知之深也.
然而人主往往惑於其言. 今有人得物於道 示玉工 曰'玉也.'示衆人 曰'石也.'則當以玉工爲是乎? 以衆人爲然乎? 必以玉工爲是矣. 何則? 識與不識也. 聖人垂敎 思以治後世
而愚者謂'不可行於今.'則將守聖人之道乎? 從衆人之言乎? 謂衆人以王道 可行 其猶詰瞽者以五色之鮮 詢聾者以八音之美. 其曰'不然.'宜也. 彼非憎五色而惡入音 聞見限也."程子又曰"漢策賢良
猶是人擧之如公孫弘者 猶强起之乃就對. 至如後世賢良 乃自求擧耳. 若果有曰'我心 只望廷對 欲直言天下事.'則亦可尙矣. 若志在富貴 則得志便驕縱
失志則便放曠與悲愁而已."○朱子曰"古者敎人以德行道藝 而興其賢者能者 其法備而意深矣. 今之爲法不然. 其敎之之詳 取之之審 反覆澄汰 至于再三 而其具不越乎無用之空言而已. 深求其意
或將有賴於其用 然彼知但爲無用之空言 而便足以要吾之爵祿 則何暇復思吾之所以取彼者 其意爲何如哉?"又曰"古者學校選擧之法 始於鄕黨 而達於國都 敎之以德行道藝 而興其賢者能者. 其所以居之者無異處
所以官之者無異術 所以取之者無異路. 是以士有定志 而無外慕 早夜孜孜 惟懼德業之不修 不憂爵祿之未至. 夫子所謂'言寡尤行寡悔 祿在其中.'孟子所謂'修其天爵 而人爵從之.'蓋謂此也. 三代之敎
藝爲最下 然皆有實用 而不可闕. 其爲法制之密 又足以爲治心養氣之助 而進於道德之歸. 此古之所以能成人材而厚風俗 濟世務而興太平也. 今之爲法 不然. 雖有鄕擧 而其取人之額不均 又設太學
利誘之一道 監試漕試附試詐冒之捷徑 以啓其奔趨流浪之意. 其所以敎者 旣不本於德行之實 而所謂藝者 又皆無用之空言. 至於甚弊則其所謂空言者 又皆怪妄無稽 而適足以壞敗學者之心志. 是以人材日衰
風俗日薄 朝廷州縣 每有一事之可疑 則公卿大夫官人百吏 愕貽相顧 而不知所出 此亦可驗其爲敎之得失矣. 必欲改制 以復先王之舊 而善今日之俗 則必如明道先生熙寧之議. 然後可以大正其本
而盡革其末流之弊矣."明道熙寧議見上篇.又曰"古之敎者 莫不以德行爲先. 若舜之命司徒 以敷五敎 命典樂以敎胄子 皆此也. 至於成周 而法始大備. 故其人材之盛 風俗之美 後世莫能及. 漢室之初
尙有遺法 其選擧之目 必以敬長上 順鄕里肅政敎. 出入不悖所聞爲稱首. 魏晉以來 雖不及古 然其九品中正之法 猶爲近之. 及至隋唐 專以文詞取士 而尙德之擧 不復見矣. 積至于今 流弊已極
其勢不可以不變也."右選擧得失 歷代議臣ㆍ先賢之論已具 更不須多談. 苟有明君變其所弊 復其所善 在一轉移間 而衰可爲盛 亂可爲治矣. 世之言者例以古今異宜爲說 雖知其說之非 猶不能無惑.
及省觀事物之情 然後乃深知其爲誕妄無據也. 夫天理之固然 人心之所安 事勢之所形. 如此則得 如此則失 如此則治 如此則亂 如此則安 如此則危者 固萬世如一. 何者爲變? 原弊法之所由起 其初
蓋有昏欲之君 諂悅之臣 姑以便目前之私 而變亂古章. 繼世者因而循之 因循旣久 有若舊法. 則雖有美質之主 無心得之學 稽古之功 如古之明王者. 故每爲庸人所沮 而亦莫之改. 其本末止如斯耳.
何嘗風氣有變 而因風氣而爲之制者乎? 其制法旣如此 則俗尙事爲 驅之使然 不得不與古有異. 人見其與古有異也 而遂以爲風氣人情 已變於古. 嗚呼? 可勝歎哉! 或曰"凡事但當求其善而已
奚必泥跡而一一復古."曰非以泥跡也. 事之莫善焉者 古皆行之 莫不善焉者 後世皆蹈之. 故取其善焉則自爲復古 捨其不善焉則自爲變今. 此知者爲能知之. 孟子謂"爲政而不行先王之道
可謂知乎?"眞知言哉! 非獨此一事 百事皆然也. ○詞科武科作俑於隋煬ㆍ武后. 此只如燕山荒淫 變亂貢案 至今不能改耳 無他意義也.隨錄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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