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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주나라, 한나라 이후 관리 임명에 관한 법제들[周漢以後任官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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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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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주나라, 한나라 이후 관리 임명에 관한 법제들[周漢以後任官之法]

『주례(周禮)』에 이르기를 "태재(太宰)가 여덟 가지 법(法)으로써 정부의 각 기관들을 통솔하는데 첫째는 정부의 직원[官屬]들이니 그것으로써 그 나라의 정치 체계를
세우며[정사농(鄭司農) 정사농(鄭司農)：중국 후한 장제 때의 저명한 유교 경전 주석가 정중(鄭衆)인데 그가 대사농 벼슬을 하였으므로 정사농이라 함.

이 말하기를 "정부 직원은 여섯 가지 관부[六官]에 각각 소속한 직원 각 60명씩 두는 것을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박사, 태사(太史), 태재, 대축(大祝), 태악(太樂)이
태상(太常)에 속한 것과 같다" 하였다.],

둘째는 관직(官職)이니 그것으로써 그 나라의 정치적 직무를 분담하며[관직은 여섯 부서[六官]가 맡은 바의 직무이다.],

셋째는 기관과의 연결[官聯]이니 그것으로써 각 기관의 관계되는 사업들을 보조하며[기관과의 연결은 국가에 큰일이 있어서 한 기관만이 단독으로 할 수가 없는 일이라면 여섯 부서가 서로
사무상 연결을 지어 협조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넷째는 기관의 경상적 직무[官常]이니 그것으로써 각자 자기 기관의 직무를 전적으로 처리하며[기관의 경상적 직무는 타 기관과의 연결된 일이 아니라면 자기 기관의 담임한 일만을
책임지고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관청의 규정[官成]이니 그것으로써 국가의 정치적 사무를 질서 있게 집행하며[관청의 규정은 부서 내의 사무 집행 절차를 조항별로 설정한 것을 말한다.],

여섯째는 관청의 규율[官法]이니 그것으로써 국가의 정치적 사무 집행을 바로잡으며[관청의 규율은 자기 부서 내부에서 실행하는 법적 통제 조항을 말한다.],

일곱째는 관청의 처벌[官刑]이니 그것으로써 국가의 정치적 사무 집행에 있어서의 범행자를 처단하며,

여덟째는 관청의 통계[官計]이니 그것으로써 국가의 정치적 사무의 집행 실적을 판정한다."라고 하였다.[부서의 통계는 3년 만에 여러 관리의 성적 고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처벌하고
표창하는 것을 말한다. 판정은 결정을 내린다는 뜻이다.]

또 이르기를 "태재가 여덟 가지 법칙[八則]으로 큰 도시와 지방의 작은 도시들을 다스리는데 그 중에서 둘째는 체계[法則]이니 그것으로써 자기 기관 내의 제도를 확립하며[체계는
기관의 제도이다.], 셋째는 행정적 조치이니 그것으로써 부서 내의 인원들을 통제하며[무능력한 자를 버리고 현명한 자를 선발하여 배치하는 것이다.], 넷째는 녹봉과 직위이니
그것으로써 자기 나라의 선비들을 통솔한다" 하였다.[녹(祿)은 봉급이요 위(位)는 작(爵)의 차례이다.]

또 이르기를 "태재가 여덟 가지 하부와의 연결 방식[八統]으로써 국왕에게 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데 그 중 셋째는 현명한 자의 등용이며[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 임용하는 것이다.],
넷째는 재능 있는 자들에게 일을 맡기며[재주 있는 자를 부려서 쓴다.], 일곱째는 하급에 있는 관리의 앞길을 열어 준다" 하였다.[낮은 직위에 있어서 열심히 복무한 자를 조사하여
선발한다는 뜻이다.]

『주례』｢하관(夏官)｣ 하관(夏官)：주나라의 관직명인데 군사를 맡은 사마(司馬).

에 이르기를 "사사(司士)가 여러 신하들의 패쪽[여러 신하들의 이름을 모두 패쪽에다 쓴다.]을 맡아서 여러 신하들에 관한 사무를 처리한다. 즉 해마다 신하들의 등급과 철직에 관한
숫자의 증감된 것을 기록하며[증감은 공로가 있어서 승급되고 죄과가 있어서 철직된 자를 말한다. 그 숫자가 많고 적을 때가 있으므로 해마다 사실대로 기록한다.] 신하들의 연령과
직위의 고하를 명확히 기재하며 큰 영주국과 작은 영주국, 큰 도시와 작은 채읍(采邑)의 성시, 현과 비(鄙)의 수와 재상, 대부, 사(士)의 아들들의 수효까지를 전부 알아서
국왕에게 보고하여 처리하는데 덕행이 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게 하며[덕(德)이 있는 자는 왕에게 고(告)하여 작(爵)을 준다.] 공로가 있는 자에게 녹봉을 올려주게
하며[공적(功績)이 있는 자는 왕에게 고하여 봉급을 준다.] 재능 있는 자에게 일을 맡기게 하며[재능이 있는 자를 왕에게 고하여 그로 하여금 일을 다스리게 한다.] 복무연한이
오래된 자에게 국가에서 곡식을 내려 보내어 주게 한다" 하였다.[국가에서 내려 보내어 주는 곡식은 국가의 창고에서 떼어 주는 것이니 연한이 많은 것을 보아서 결정한다.]

상고해 보면 『예기(禮記)』 『예기(禮記)』：유교 경전 13경 중의 하나로서 본래 공자의 제자와 후학들이 주나라 때의 예절을 기록했다는 글인데 한나라 때의 대덕(戴德)과
대성(戴聖)의 정리를 거쳐서 49편으로 된 서적.

｢왕제(王制)｣ ｢왕제(王制)｣：『예기』편명. 고대 왕들의 관직 설정, 녹봉 급여, 제사, 양로(養老)에 관한 절차들을 기록한 서적.

편에 이르기를 "사마(司馬) 사마(司馬)：중국 주나라 때 전국의 군사에 관한 직무를 맡은 관직.

가 선발한 선비의 우수한 자를 판정한 문건을 국왕에게 고하여 결재를 얻는다. 결재가 내린 뒤에야 그 선비가 어떤 성질의 관직에 적당한지 맡겨보아 해당 관직에 맡길 만한 뒤에야
임명하며 직위가 확정된 뒤에야 녹봉을 준다"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선비든지 사마에게 선발된 자라면 사마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한 패쪽을 장악하여 처리하였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이부(吏部)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부의 부서 중에서'문선(文選)'이라는 부서가 맡은 바의 사무가 즉 그 직무이다. 예와 이제의 관제는 다르지마는 직무는 같은 것이다.

한나라 제도에 군(郡)이나 국(國)의 수(守)나 상(相)으로서 선발된 우수한 자라야 이천석(二千石) 이천석(二千石)：한나라 때 지방 장관인 태수(太守)에게 주던 품계.

이 될 수 있으며 이천석 중에서도 성적이 우수한 자라야 아홉 재상[九卿]으로 될 수 있으며 이 재상 중에서도 자기 직무에 능한 자라야 어사대부(御吏大夫)로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자는 속관[郎]으로 10년 동안 있으면서도 조동되지 못한 자가 있는가 하면 3대(代)를 두고도 높은 직위로 승급되지 못한 자가 있었으니 이는 자격의 제한을 받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었다. 한나라에서는 군이나 영주국[國]의 관리에 있어서 수(守)와 상(相)만을 중앙 정부에서 임명하고 기타 관리는 해당 군이나 영주국에서 모두 자체가 임명하였으며 또 그 수나
상이 자기가 데리고 있는 부관 따위와 부원 중에서 나은 자를 '수재(秀才)'라, '청렴한 관리[廉吏]'라고 선정하여 중앙 정부에 추천하였다.

한나라 문제(文帝) 2년에 조서를 내려 현명하고 얌전한 선비를 추천하라 하였고, 15년에 조서를 내려 제후왕과 대신 및 군의 태수[郡守]들은 각각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였다.

한나라 선제(宣帝) 때에 간의대부(諫議大夫) 왕길(王吉) 왕길(王吉)：중국 한나라 선제 때에 박사 벼슬을 지낸 사람.

이 건의하기를 "지금 보통 관리가 자기의 자제들에게 벼슬을 맡기는 것을 용허하고 있는바[자제들이 그 부형이 관리(官吏)로 있음으로써 낭(郎)으로 임명되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교만하고 사리에 어두우며 지어 부형에게 의세하여 백성의 일을 처리하는 자가 있어서 백성들에게 해독을 주니 선발하여 등용하는 규정을 다시 천명하여 현명한 인재를 구해 써야 할 것이요
자제에게 맡기는 규정을 폐지할 것입니다" 하였다.

선제가 자사(刺史)나 수(守) 및 상(相)을 임명할 때에는 반드시 몸소 그를 불러 보고 그의 앞으로의 해 나갈 일을 물으며 그가 임소에 간 뒤에는 그의 사업을 고찰하여 전자 임명
받을 때에 한 말과 대조해 보며 만일 듣는 말과 실지 사업이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는가의 원인을 구명하였다. 선제가 일찍이 말하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에서 농사를 편안하게 짓게 하며 근심과 원한이 없게 하는 것은 정치가 가혹하지 않으며 법이 잘 집행되는 데 있다. 나와 함께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진 자는 아마 현명한
이천석(二千石)뿐이리라!"고 말하였다. 또 "태수는 백성을 부리는 공간이니 그를 자주 교체하면 하부에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 백성들이 태수가 오래 있을 줄을 알아서 감히 기만할 수
없게 되어야 태수의 지도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제는 이천석 중에서 성적이 좋은 자가 있으면 당장에 황제의 글로써 격려해 주며 벼슬을 올리고 상금을 주기도 하였다. 더러는 그들의 벼슬을 관내후(關內侯)
관내후(關內侯)：한나라 때 후작 칭호를 받으나 관내의 일정한 지방에서 세(稅)만을 받아 먹는 관직.

에까지 승급하기도 하였으며 대신이 결원인 때에도 지방 장관 중에서 선발해다가 순서 있게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 때의 이름난 관리들은 모두 이때에 많이 배출하였다.[선제가
일찍이 조서를 내리기를 "영천(潁川) 태수 황패(黃覇) 황패(黃霸)：중국 한나라 때 영천태수(潁川太守)로 있으면서 성적이 전국의 으뜸이었으며 후에 승상(丞相) 벼슬을 지낸 인물.

는 황제의 명령을 잘 받들어 집행하였으므로 백성이 모두 감화되어 효도하는 자식, 공손한 아우, 절조 있는 여자, 온순한 손자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며 밭갈이하는 자는 경지를 다투지
않고 길에 흘린 것도 주어 주며 홀아비와 홀어미를 돌보아 주고 빈곤한 자를 구제해 주게 되었다. 결과 8년 동안 감옥에는 큰 죄를 범한 죄수가 없었으며 백성은 그의 교양에 감화되고
의리에로 일떠서게 되었으니 이는 현인군자(賢人君子)라고 할 만하다. 그에게 특히 벼슬 관내후를 준다" 하였다. 그 후에 또 황패를 등용하여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삼았다가 바로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급시켰었다. 선제의 현명한 인재를 고무시키고 유능한 자를 우대하는 일은 이렇게 훌륭하였었다.]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봉지를 받은 여러 영주들에게 조서를 내려 재능 있는 인재를 추천하라 하였다. 간의대부 장발(張勃)이 대관헌승(大官獻丞) 진탕(陳湯)을 추천하였던바 나중에
진탕이 죄를 범한 일이 있기 때문에 장발이 그를 추천하였다는 관계로 죄가 되어 식읍 2백 호를 삭제 당하였었다. 또 그때에 장발이 막 죽었으므로 그의 시호를 목후(繆侯)[추천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쁜 시호를 준 것.]라 하였으니 당시의 추천자에 대한 표창과 벌칙이 이렇게 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제도가 이렇기 때문에 문, 경제[景帝] 때로부터
적임자가 관직에 있게 되면 직위에 오래 있을 수 있었으며 관리로 된 자도 관직을 자기의 자손에게 연속시켰으며 벼슬하는 자는 자기 벼슬로써 성씨 혹은 칭호를 하였으니 삼대 이래로
한나라 때가 가장 융성하였었다.

한나라 성제(成帝) 건시(建始) 연간에 처음으로 상서(尙書) 다섯 사람을 두어 임금에게 올리는 글들을 맡게 하였는데 첫째는 상시조(常侍曹)로서 대신에 관한 일을 주관하였고 기타는
나누어서 사조(四曹)를 설치하였었다. 후한 광무(光武) 때에 이르러 상시조를 이부조(吏部曹)로 개칭하여 인재 선발에 관한 일을 주관케 하였었다. 당시에 인재 선발에 관한 일을
집행하는 기관으로는 군이나 영지의 것은 공조(功曹)에 속하고 공부(功府)의 것은 동서조(東西曹)에 속하고 천대(天臺)의 것은 이부조(吏部曹)에 속하였으니 이부의 제도가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다.[성제가 상서 다섯 사람을 두었다는 것은 첫째는 복야(僕射)이며 넷은 4조(曹)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상시조로서 대신의 일을 주관하였으며 둘째는 이천석조(二千石曹)로서
군이나 영지의 일을 주관하였으며 셋째는 민조(民曹)로서 관리와 백성들의 상소를 받아서 전달하였으며 넷째는 주객조(主客曹)로서 외국과 관계되는 일을 주관하였으며 또 삼공조(三公曹)를
두어 송사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5조이다. 광무 때에 이르러 상시조를 이부조로 개칭하여 인재 선발에 관한 일을 주관케 하였으니 민조와 이천석조 등 조를 합하면 모두
육조(六曹)가 된다. 이때에 상서는 조(曹)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르지를 않고 있다가 영제(靈帝) 영제(靈帝)：중국 후한 말기의 황제 유굉(劉宏).

때에 이르러 시중(侍中) 양곡(梁鵠)으로 선부(選部) 상서를 삼은 때부터 비로소 조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위(魏)나라 때에 선부를 이부로 개칭하여 전적으로 인재 선발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되었으므로 상서의 사무와 권리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었다. 진(晉)나라, 송(宋)나라, 제(齊)나라, 양(梁)나라에서도 모두 6상서를 두었고 위(魏)나라, 진(晉)나라
때부터는 이부 임명장을 주는 자를 이부상서(吏部尙書)라고 하여 다른 상서의 직위에 준하였으며 바로 상서라고 칭하였었다.]

후한 순제(順帝) 때에 좌웅(左雄) 좌웅(左雄)：중국 후한 안제 때 기주자사 벼슬을 지낸 인물.

이 상소하기를 "백성을 편안케 하는 요체는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요체는 단적으로 그들의 실적을 고사하여 나쁜 자를 내쫓는 제도를 실행하는
데 있습니다. 옛날 영주 제도가 있을 때에는 영주가 백성과 가깝게 되어 백성들이 화목하였으나 진(秦)나라가 6국을 멸한 뒤에 영주 제도를 폐지하고 지방의 행정 조직을 다섯
등급[五等]으로 개혁하였습니다. 한(漢)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에 옛날의 영주 제도를 회복하지는 못했으나 가혹한 법령을 폐지하고 폐단을 없애어서 열심으로 백성의 곤란을 구제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문제, 경제 때에 이르러 전국이 승평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당시의 정치 제도가 관대하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할 것을 위주로 하고 관리의 선발을 신중히 한
까닭이었습니다.

대체 지방 관리를 자주 교체하면 하부에서 자기 직업에 복무할 수 없고 한 직무를 오래 보게 되면 백성이 그의 명령과 교양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세속이 점차 폐단이
생기게 되어 지방 관리를 자주 교체하는데 그들이 모두 임시 처치를 하고 영구한 대책을 고려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우둔한 생각으로는 지방에 있는 수(守)와 상(相) 및
장리(長吏)들 중에서 현저한 업적이 있는 자에게 곧 품직을 올려주고 전직을 시키지 말게 할 것이며 부모의 초상을 당하지 않은 자로서의 관직 이탈을 불허할 것입니다. 심지어 지방에
있는 백성과의 거리가 가까운 하부 관리에 관하여서도 유학자 중에서 청백한 자를 등용하는 동시에 상부 장관들이 그들의 소소한 과오를 관대하게 처리하고 또 그들의 품직과 녹봉을
올려주는 것을 용허하며 그들의 재직 기간이 과만에 찬 뒤에야 등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하였다.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소열제(昭烈帝)：삼국시대 촉한(蜀漢)을 건국한 유비(劉備).

가 죽은 뒤에 제갈량(諸葛亮)이 정치를 총 지도하게 되었는데 나쁜 자를 처벌하고 착한 자를 등용하며 자격을 보아서 사업을 맡겨 그들의 현 직위에 구애하지 않았었다. 당시에
건위군수(犍爲郡守) 이엄(李嚴)이 양홍(楊洪)으로 자기의 공조(功曹)를 삼았었는데 이엄이 그 고을을 떠나기 전에 양홍이 촉군수(蜀郡守)로 되었으며 또 양홍의 부하 서기
하지(何祗)가 재주와 능간이 있었던바 역시 양홍이 촉군을 떠나기 전에 하지가 광한군수(廣漢郡守)로 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이엄과 요립(廖立)이 다 제갈량에게 죄를 지어 면직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제갈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시 눈물을 흘리고 서러워하다가 결국 병이 나서 죽는 데까지
이르렀었다.

조위(曹魏) 조위(曹魏)：중국 한나라 말기 조비(曹丕)가 한나라의 정권을 탈취하고 건국한 조대 이름.

때에는 습속이 문예를 숭상하였었다. 명제(明帝)가 실제에 중점을 두지 않고 외면만을 꾸미는 선비를 심히 미워하여 이부상서 노육(盧毓)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인재를 선발할 때에 명예
있는 자를 등용하지 말 것이다. 명예 있는 자란 땅에 그린 떡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노육이 말하기를 "명예를 표준해서는 특출한 인재를 구할 수 없으나 보통 선비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보통 선비는 법령을 존중히 여기고 착한 일에 힘쓴 뒤에야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이니 그들을 질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둔한 저로서는 특출한 인재를 알아낼 수가
없으며 또 해당 사업을 주관하는 자들이 지금 명예의 안건에 의거하여 표준을 하고 있으니 이것은 명예 있는 자를 등용한 후에 그의 실적을 고사해 보면 좋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피선발자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을 진술하여 올리라 하여 그의 사업 실적 여하를 명확하게 고사하는 제도가 있었지마는 지금은 실적 고사의 제도가 폐지되어 사람의 훼방과 칭찬에 따라
사람을 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실지가 혼란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었다. 명제가 그 말을 옳다고 여겨 산기상시(散騎常侍) 유소(劉邵)에게 명하여
실적 고과법(考課法)을 제정하라 하여 실행하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많이 반대하기 때문에 결국 실행하지 못하였었다.

당시 인사들이 모두 윗자리에 올라가려는 경향이 많으며 청렴하고 겸양하는 미풍이 없었다. 그리하여 유식(劉寔)이 겸양을 숭상하는 논[崇讓論]을 지어 바로잡을 것을 역설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옛날 어진 임금들이 도의적으로 국가를 감화시킬 때에 겸양의 미풍을 숭상케 하는 것은 그것으로써 현명한 인재를 선출하며 서로 경쟁하는 작풍을 종식시키려는 것이었다. 대체
사람의 마음이란 모두 자기가 나은 줄로만 알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권고하여 높은 지위를 현명한 사람에게 양보하도록 하여 자신들로 하여금 현명한 사람을 밝혀내게 함이니 여기에
어찌 거짓으로 현명치 않은 자에게 양보하는 일이 있으랴? 이렇게 한다면 겸양하는 미풍이 일어나서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 출현할 것이며 지극히 공정한 추천
제도가 자연 확립될 것이며 모든 기관에서 적임자가 제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각 기관의 후보 인원까지도 미리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가사 어떤 기관에서 결원이 있더라도 여러
관리에게 가장 많이 양보를 받은 그 사람을 추려 등용할 것이니 이것이 인재를 가리는 방도이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상부에서 서로 지위를 양보하면 출세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그
미풍에 감화되어 재능 있는 자를 추천하고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양보하는 미풍이 이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일국에서 양보를 받은 사람이라면 일국에서의 제일가는 인재일 것이며 천하에서
양보를 받은 사람이라면 천하에서의 제일가는 인재일 것인바 추천하고 양보하는 미풍이 유행하면 현명하고 현명치 않은 자가 자연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명한 사람이 조정에서 서로
양보하게 되어 큰 재능을 가진 자는 항상 높은 지위에 있고 벼슬하지 않은 자도 하부에서 불평을 품지 않을 것이므로 전국이 무사하게 되며 현명한 인재가 지위를 얻지 못한 그런 일이
없게 되어 가장 좋은 정치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예의와 겸양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면 어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나은 자에게 서로 양보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서 온 천하가
그대로 되어버렸다. 위(魏)나라 때부터는 허위로 추천한 인사나 각 고을에 재직한 관리들을 마구 발탁하여 보는 대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자신이 비록 직위를 그만두려 하여도 될 수
없는 처지로 되어서 결국 자기보다 나은 자에게 양보하기를 싫어하게 되었다. 추천하고 양보하는 미풍이 없어지고 경쟁하는 마음이 생기고 보니 논의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세상에는
고명한 인재가 없으며 조정에는 높은 관직을 담당할 만한, 큰 재능을 가진 인재가 없다'고 하며 궁벽한 시골에 묻힌 사람이나 하급 관리들도 말하기를 '조정의 인사들로서는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자라도 그들의 명예와 덕망이 모두 옛날 사람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두 말이 다 옳지 못하다고 본다. 이것은 지금 현명한 사람이 결핍하여서 그렇게 될 뿐만
아니라 현재 현명한 자에게 양보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이라도 사람들에게 먼저 칭찬을 받게 되면 그에 대한 훼방도 반드시 있어서 온전한 명예를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된 바에는 가사 후직(后稷) 후직(后稷)：고대 중국 주나라의 시조 기(棄)가 순 임금에게 벼슬했다는 관직이름.

과 설(契)이 다시 이 세상에 있더라도 자기의 명예를 완전하게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피등용자의 재능 유무와 우열 여하를 알 수 없으며 선비에게는 본래부터 어떤 평가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가사 어떤 관직에서 빈자리가 있다면 간부 사업을 맡은 책임 직위에
있는 자도 그 사람을 어느 직위에 등용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관직의 순차에 의하여 추천한다. 같은 재능을 가진 자라도 먼저 등용되는 자가 세갓집[勢家] 자식이 아니면
반드시 세력 있는 자의 관심을 갖게 되는 인물들이다. 이 자만이 현명한 것도 아니지마는 그의 먼저 등용되었다는 단계를 따져서 다시 마구 승급을 시키고 보니 그는 나중에 직무를
감당해 내지 못하는 고장이 난다. 이와 같이 계속 등용하게 되는 것은 현명한 자에 양보하는 미풍이 없어지고 품계만을 따지는 데 기인한 것이므로 등용된 자 중에는 적임자도 있는
동시에 무자격자도 많다. 그리하여 한(漢)나라, 위(魏)나라 때로부터 광범히 추천 제도를 설정하여 여러 관리로 하여금 각자 자기가 아는 바의 인재를 추천하라 하여 재능만 있으면
그의 관직 순서를 불구하고 등용해 썼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를 자주 한 결과 각자가 추천한 중에서 꼭 해당한 자도 있을 것이지마는 그때에 그런 사람을 발탁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어느 누구가 가장 현명한 줄을 모르는 까닭이며 반면에 꼭 부당한 자도 있을 것이지마는 성실히 추천하지 않은 자에 대한 책벌이 없었으니 이는 어느 누가 가장 나쁜
자인 줄을 모르는 까닭이다. 이렇게 그 사람의 내용을 알 수 없게 된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서로 현명한 자의 추천을 싫어한 데서 기인하였으니 이는 피추천자의 현명 여부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천하는 자가 상부에 있는 사람의 조사가 세밀하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추천하여 승급시키며 재능 있는 자는 날로 세력 있는 자의 집에 쫓아다니게 되니
아무리 국가의 법령이 있어서 형벌을 주더라도 금지할 수 없게 되었다.

대체 현명한 사람에게 양보하는 미풍이 없어지므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폐단은 하부에 있는 현명한 사람이 제때에 승급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요 지위에 있는 어진 신하도
점차 죄를 받아 물러가게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안(顔)씨의 아들(안자)은 과오를 중복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보아 성인(聖人)과 같이 총명하지
않는 자라면 누구나 모두 과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국왕에게 총애를 받고 고귀하게 되는 것을 욕망하는 자가 많으므로 현명하고 재능 있는 자를 미워하고 그의 출세를 방해하여
과오 있는 그를 보고 훼방할 자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 훼방이 생겨나는 것은 허투루 들리는 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람의 조그만 과오를 잡아서 그것을 더 심하게
꼬집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훼방하는 말이 많이 들리면 아무리 상부에 있는 자가 받아 주지 않으려 하더라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므로 일후에 어떤 일이 있을 때에는
가만히 그의 행동을 살펴본다. 살펴보기를 마지 않으면 과연 그가 훼방하는 것이 옳다고 증명하게 된다. 이렇게 실제 증거를 잡은 이상 어찌 그대로 두고 죄를 주지 않을 것인가?
이리하여 죄를 받고 물러가는 자가 점차 많아지며 대신도 안심하고 직위에 있지 못하게 된다.

대체로 현명한 인재가 등용되지 않으면 믿을 만한 신하가 날로 적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국가일을 처리하는 자의 큰 걱정거리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이 습속을 개혁하기가 극히 쉽다고
본다. 대체 어느 때든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변변치 못한 인재가 많이 섞였다더라도 그 중에는 현명한 자도 많을 것이니 어찌 그들 전부가 현명한 사람에게 지위를 양보하는
작풍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다만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양보를 하지 않으며 또 그것이 습속으로 되었기 때문에 양보를 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옛날에는 관리가
처음 임명을 받을 때에 모두 글을 국왕에게 올렸는데 그 이름을 사장(謝章)이라 하여 전해 온 역사가 오래되었었다. 사장의 본의를 따져 보면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추천하여
국가의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뜻이다. 실례로 옛날 순(舜) 임금이 우(禹)로써 사공(司空)을 삼더니 우(禹)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직(稷)과 설(契) 설(契)：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 순 임금의 신하 이름.

에게 양보한 결과 그들이 또 구요(咎繇)에게 양보하였으며 익(益)으로 우관(虞官)을 삼았더니 그는 웅비(熊羆)에게 양보하였으며 백이(伯夷)로 삼례(三禮)를 삼았더니 그는
기룡(虁龍)에게 양보한 것과 같이 요 임금과 순 임금 때에는 여러 관리들이 처음 임명을 받을 때에 모두다 양보를 하였던 것이다. 사장을 받는 본의는 대개 여기에 근거한 것으로서
이렇게 기록해 둔 것은 그것을 영원한 법칙으로 삼으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말세에 와서는 그들이 등용될 때에 현명한 사람에게 양보를 하지 않고 쓸데없이 등용해 주신 은혜를
감사하다고 표시하는 데 불과할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가 지금까지 계속하여 내려오고 있으니 이것은 습속이 잘못된 것이다.

대저 임명 받은 관리로서 글을 올려 자기의 결심을 전달하는 자는 그가 현명한 자에게 양보하고 재능 있는 자를 추천하기를 자기의 제출한 바와 같이 할 것이며 그가 현명한 자에게
양보한 바 없이 공연히 종이만을 낭비한 자가 있다면 그런 자들에게는 모두 다시 그때의 글을 올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신하로서의 처음 임명을 받을 때에 모두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추천하여 그에게 양보할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니 그 후 그의 양보하는 문건은 주관자에게 맡겨 장악케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삼사(三司)에 결원이 하나 있으면
삼사들 중에서 양보를 받은 점수가 가장 많은 자를 골라서 등용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한 대신[一公]이 결원이 되면 세 대신[三公]이 미리 선정해 놓았다'라는 것이다. 또 선별을
주관하는 관리도 꼭 공론에 맡겨 삼공(三公)을 선정할 것이 아니라 삼공더러 각자 공(公) 하나씩을 선정하라 하여 심사하는 것이 더 좋다. 사정(四征)이 결원일 때에도 사정 중에서
양보 점수를 가장 많이 받은 자를 골라서 등용할 것이니 이것이 소위 한 정(征)이 결원인 때에는 사정이 미리 선정해 놓았다는 것으로서 반드시 그 자리가 정직(停職)인가 혹은
결원인가를 밝혀서 주관자로 하여금 사정을 선정케 할 것이다. 상서(尙書)가 결원인 때에도 상서들 중에서 양보 점수를 가장 많이 받은 자를 골라서 등용할 것이니 이것은 여러 상서로
하여금 공동으로 상서 하나를 선정하라는 것으로서 결원이 있게 되기 전에 미리 고찰하여 주관자로 하여금 상서를 선정케 할 것이다. 군수(郡守)가 결원인 때에도 여러 군수 중에서 양보
점수가 가장 많은 자를 골라서 임용하되 주관자에게 맡겨서 심사케 하는 것이니 이는 100명 군수로 하여금 군수 하나를 공동으로 선거하는 것이 된다. 대체 여러 관리들 중 100명
군수들의 사양을 받은 그 사람을 매년 군에서 한 명씩 추천할 때 주관자가 처리하는 것과 같이 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은 현명한 자나 우둔한 자가 모두 그에게 사양하는
것을 백성들이 보고 듣는 바이니 즉 전국 사람이 듣고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체 사람의 심정[人情]이란 상대자와 경쟁을 할 때는 자기보다 나은 자를 꼬집으려고 하는 것이나 어떤 자에게 사양하게 될 때는 자기보다 나은 자를 추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 세상이 경쟁하게 되면 상대자에 대한 훼방과 칭찬이 뒤섞이고 장점과 단점을 분간할 수가 없어서 사양에 의거하여 선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아서
사양하는 제도를 위주로 하면 현명하고 지식 있는 자가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며 그 제도가 확연하게 계속되어서 조금도 문란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는 관직에서 은퇴하여 자기
수양을 하려고 사양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빈한하고 낮은 직위에 있으려 하여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며 반면에 한 자리나 해먹으려고 싸다니면서 사람이 자기에게
사양하기를 욕망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걸음을 걷지 않고 앞으로 나가려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둔한 자와 지혜 있는 자를 세상이 다 알게 될 것이니 출세하고 추천을
받음에 있어서 자신의 자기 수양이 없는 자로서는 출로를 얻지 못할 것이며 벼슬을 구하기 위하여 외지에 돌아다니는 자들도 모두 고토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뜬소문과 훼방하는 말들도
자연 종식되어 버릴 것이다. 사양하는 제도가 있어야만 사람들이 출세하려는 데 마음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존중히 여기며 또 그들의 해결에 맡겨 전국이 자연 그대로 감화될
것이니 어찌 그 사양하는 제도의 실행에 노력하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에 극선(郤詵)의 책문 답안[對策]에 이르기를 "인재를 얻어야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으나 정치 자체는 사람을 바로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감히
고금의 역사를 보고 그 좋고 나쁜 점을 상고해 보았는데 옛사람들은 벼슬을 할 때에 서로 현명한 인재를 구하여 국가에 이익을 주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의 이익을 그만두고 서로
자기의 관작만을 추켜올리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위에서 관리들에게 인재의 추천을 책임지우면 그들은 하부에서 그대로 복종하였는바 현명한 사람을 추천할 때에는 상을 받고
나쁜 자를 추천할 때에는 벌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현명한 자를 구하여 추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의 관리들은 벼슬 자리를 구할 때에 부모들이 운동해 주고 친척들이
협조해 주는바 어떤 봉물을 주어야 될 수 있고 이것이 없으면 될 수 없으니 어찌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겠습니까? 현명한 자는 물론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을
구비해야 출세하고 의리에 어그러지면 출세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관직도 물론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운동을 해야 성공을 하고
남보다 뒤지면 실패를 하기 때문에 덤벼서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덤비면 경쟁이 생기고 경쟁이 생기면 당파가 생기고 당파가 생기면 서로 거짓말로 모함을 하여 그들이 말한 바 현명
여부와 진가 여하가 모두 사실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에 임금의 재결에 의혹을 끼치게 되니 이것은 모든 옳지 못한 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그와 반대로 가만히 앉았으면 고정하여 있고
고정하여 있으면 진실하고 겸양하며 진실하고 겸양하면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고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면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서로 자기 자리를 낮추어서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임금이 그 추천자의 현명 여부를 명확히 듣고 처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도덕 있는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가만히 앉아서 공부를 하도록 한다면 임금이
안심하고 누웠더라도 선비들이 모두 바르게 되려니와 그들의 운동하는 풍습을 금지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다시 걱정을 많이 하더라도 습속을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벼슬하는 사람에게는 사찰을 하지 않으니 나쁜 짓을 할 문을 열어 놓은 셈이며 조정에서 현명한 사람을 책임지고 추천하라 하지 않으니 바른 사람의 진출할 길이 막힌
셈입니다. 소위 현명한 사람을 책임지고 추천하라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서로 현명한 사람을 추천케 함이며 그들의 실지 여부를 고사하는 것은 벼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각자의
지위를 확보케 하는 것이므로 만일 그들이 추천이 옳지 못하다면 책임 추궁을 받게 되고 보증을 실지대로 하지 않았다면 벌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영주[諸侯]들에게는
반드시 "인재를 추천하라[貢士]"는 제도가 있어서 추천을 하지 않은 자의 봉지를 떼어냈으며 또 추천을 옳게 하지 못한 자의 것도 역시 떼어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세상의 너절한 자들을 제멋대로 등용해서 쓰기 때문에 그들의 자격이나 실적이 모두 기대를 가질 수가 없어서 국가적으로는 정치를 문란하게 하며 개인은 오물 투성이로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특별히 지방 장관들 중에서 숨겨두고 연루한 자가 많아서 관직을 이용하여 탐오 행위를 하고 있으나 이 자를 누가 등용해 주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벗어난 범과 같아서 누구하나 그를 제지할 수 없으니 법 밖에서 날뛰는 그 행동이 점차 확대되어 국가의 큰 일을 저지를 것이야말로 무엇이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서 물, 불을 밟는 것과 같아서 앞사람이 실패를 하더라도 뒷사람이 다시 이어 서로 계속하고 있으니 이를 누가 제지할 것이며 날마다 풍치를 위주로 한
허랑 생활에만 종사하고 있으니 이것을 누가 우려할 것입니까? 아무리 성상께서 이것을 시정하려고 밤낮으로 연구하시더라도 정치 사업을 한다는 자들이 모두 그 따위 무리인 이상 그들과
함께 백성들을 도덕 교양으로써 감화시키고 습속을 바로잡기는 역시 황하수의 맑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을 뿐일 것입니다.

이런 폐단을 시정하려면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는 법령을 제정하며 관리 실적의 사찰에 관한 대책을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이 제도가 일단 실행되면 사람마다 추천하기를 신중히 하여
허투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현명한 인재를 알아낼 것이며 현명한 인재를 알아내어 시험적으로 사업을 맡겨 보아서 등용하면 관직에서 적임자를 얻게 될 것입니다. 관직에서
적임자를 얻게 되면 사업이 순서 있게 진행되어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 사업에 대하여 만족감을 갖게 되고 생활이 풍부하게 되어 즐거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죄를 범하는
자가 줄어서 형벌을 적게 쓸 것이며 치욕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 도덕을 점차 중하게 여길 것이니 이 제도야말로 습속을 개혁하여 영구불멸의 제도를 세울 수 있는 요체로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에 시평왕(始平王)의 문학(文學) 이중(李重)이 당시 관기 제도의 등급이 번다하여 지방관을 낮보고 정부의 관리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습속의 병통으로
되게 하였으니 그것을 개혁하여 지방 관리를 중하게 여기고 등급을 간소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건의하기를 "옛날 어진 임금들이 관직을 두고 제도를 제정하는 것은 그때의 국가 사정을
고려하며 행정 구역을 적당하게 구획하였기 때문에 요, 순 때로부터 내려오면서 조대마다 가하기도 하고 감하기도 하였었습니다. 예를 들면 순 임금은 9관부[九官]를 임명하였으나
주(周)나라에서는 6관부[六職]로 나누어 두었으며 진(秦)나라는 전 제도대로 6관서[六職] 제도를 채용하였고 한나라도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승상(丞相)의 밑자리에 9경(卿)을
두었습니다. 이 정부의 고급 관직으로서 5조(曹) 상서령(尙書令)과 복야(僕射) 등의 관직이 있었지마는 처음에는 국왕에게 올리는 문건들을 맡아서 정부와 지방에 선포하였기 때문에
일이나 직무에 있어서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군의 수[郡守]는 지방관으로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제(宣帝)가 일찍이 '나와 함께 백성을 평안히 살게 할
자는 오직 현명한 이천석(二千石)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또 이천석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가 있으면 그에게 승급을 시키기도 하고 관작을 주기도 하였으니 이는 당시의
국왕들이 정치를 하는 근본적인 고리를 알았기 때문에 그 치적이 삼대(三代) 때와 같았던 것입니다. 동한(東漢) 동한(東漢)：중국 서한(西漢) 제국이 붕괴된 후에 종실 유수(劉秀)가
다시 건국한 국호. 후한(後漢)이라고도 함.

때에 이르러 상서를 조금 중하게 여겼으나 자기의 종을 지방 군수로 내보내었다가 바로 삼공(三公)으로 들여세운 일도 있었으니 우연(虞延), 제오륜(第五倫) 환우(桓虞), 포욱(鮑昱)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근자에는 위(魏)나라 때부터 이름 높은 지방 장관인 두기(杜畿), 만총(滿寵), 전국양(田國讓), 호질(胡質)과 같은 사람은 10여 년 혹은 20년을 한
군에 두었으며 혹은 품직을 더 받거나 가절(假節) 가절(假節)：고대 중국에서 사신(使臣)이나 최고 군사 지휘관에게 주던 신표.

을 군에서 받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역시 옛 사람들의 '사업을 잘만 하면 자기 생전이라도 벼슬을 옮기지 않는다'는 원칙인 것입니다.

한(漢)나라, 위(魏)나라 때부터 정부 관리를 지방관리보다 더 중하게 여겼는데 지금에 와서 그 지위를 더욱 높이 보며 관리의 계층이 많아져서 승급, 대리, 전직, 먼 지방의
수령으로 강직보내는 따위가 물 흐르듯이 그치지 않으므로 그들의 재능 유무도 알 길이 없으며 등용과 파직의 방법으로써 구분을 명확히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의
병통입니다. 대체 계층들을 많이 두면서 관직에 오래 두기를 기대하며 관직에 오래 두지 않으면서 명랑한 정치를 기대한다면 이는 성공을 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서(虞書)｣ ｢우서(虞書)｣：『상서』 중에서 요전(堯典)으로부터 익(益)ㆍ직(稷)에 이르기까지의 부분인데 순(舜) 임금 때의 글이라는 뜻.

에 이르기를 '세 번 고찰해 보아서 못쓸 놈을 내쫓고 치적이 현저한 자를 올려 쓴다' 하였으며, 『주관(周官)』에 이르기를 '3년 만에 여러 관리들의 치적을 고사하여 상벌을
시행한다' 하였으며, 한나라 법에 벼슬하는 사람이 처음 실지의 관직을 가지지 않은 자도 더러 있었으며, 위나라 초기에도 처음 낮은 지위를 주어 먼저 시험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생각에는 여러 관리의 계층을 병합하여 같은 계통에 있는 자로 하여금 자기들끼리 순서에 따라 조금씩 올라가는 습속을 되풀이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처벌하는 법
이외에 관리의 죄를 논의하는 관제를 특별히 설치해 둔다면 관직과 인재의 관계가 질서 있게 되어 선비들이 반드시 모두 자기의 재능에 알맞는 직위를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관직에
있는 기간이 오래 되고 사업의 성과를 고사할 수 있게 되면 벼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자연 안정되어 모두 자기반성에 노력할 것입니다' 하였다. 명제가 이 건의를 옳다고 접수는
하였으나 결국 실행하지 못하였다.

남제(南齊) 남제(南齊)：고대 중국의 소도성(蕭道成)이 송나라의 정권을 탈취하여 건국한 제나라인데 후세의 북제(北齊)와 구별하여 이렇게 부름.

의 좌복야(左僕射) 왕검(王儉)이 상부에서 인재 추천하는 제도의 철폐를 요청하면서 저언회(楮彦回)더러 말하기를 "선조(選曹)는 지금으로부터 오래되지 않은 한나라 말기부터
시작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옛 제도와는 다른 듯합니다. 그러므로 각 주와 군에서 인재를 추천하라 하여 점수를 계산할 때에 삼공부(三公府)에서 추천한 자와 각 주와 군에서 추천한
자를 동일하게 취급한다면 한 사람의 의사로 추천한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여러 사람을 추천하였다가 등용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특출한 재능과 절등한 지략을 가진
자들이 많이 불우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저언회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자네의 말과 같다. 그러나 실행한지 이미 오래된 일이므로 당장에 개혁하기는 곤란하다'고 하였다.

남제(南齊) 때에 관리 임명의 대상자에 대하여 재능과 덕행을 고사함이 없이 오직 국왕의 인척 관계와 고관들의 자제들에게만 우선적으로 대우하였는데 귀족[甲族]은 20세에 벼슬을 하게
되고 지벌이 낮은 사람은 30세에 시험 삼아 아전에 채용하였다. 양(梁)나라도 남제의 옛 제도를 답습하였으나 또 9개 등급[九品]을 18반(班)으로 나누었었다. 진(陳)나라도
양나라 제도를 답습하였는바 모든 선발이 일정한 기간도 없이 결원이 있을 때에는 당장 보충하였다. 또 관직에 청(淸)직, 탁(濁)직을 두어 올리고 내리고 하였는데 만일 탁(濁)직에서
청(淸)직에로 전직하게 되면 추천을 받은 것보다 더 영광으로 알았다.

[전직이나 임명이 있을 때에는 이부가 먼저 보고 문건을 만드는데 백지에다 수십 명의 후보자 명단을 열거하여 상서와 해당 사무 취급자가 공동으로 서명하여 칙령 재가를 요청한다.
그러면 국왕이 가(可)라든지 부(否)라든지를 결정하는데, 가(可)라고 재가를 받은 자의 명단을 조(曹)에 내려 보내어 해당자의 지벌의 귀천과 정부관리 및 지방관리로 구별하여 재능에
따라 보충하여 쓴다. 그 수속은 재가 받은 자의 명단을 누른 종이에 써 가지고 이부의 자리에 들려'상주 재가[奏可]'라고 서명한 뒤에 나와서 전명(典名)에게 회부하면 전명이 그
사람의 이름을 학두판(鶴頭板) 학두판(鶴頭板)：중국 역대 왕조에서 황제가 현명한 인재를 부를 때에 조서를 쓴 학 머리로 된 판자.

에다 써서 피임명자의 본가로 보내 준다. 그 외의 조서로써 임명하는 것은 직접 조국(詔局)에 회부하여 선포한다. 그 수속은 조국의 상주문을 올려서 '가하다'는 칙령이 내리면 누른
종이에 그의 이름을 써 가지고 문하(門下)로 나온다. 문하에서는 "소속 기관에 회부하여 실행케 하기를 바랍니다"라는 조서 회답문을 올리고 또 '재가'라는 글자를 써서 선사(選司)에
회부하여 임명자의 이름을 선포한다. 그러나 벼슬 임명을 받은 자기의 이름이 선포될 때까지 꼭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조서가 내렸다는 말만 들으면 이튿날 바로 궁내에 들어가서
사은(謝恩)한다.]

무제 때는 처음 후경(侯景) 후경(侯景)：중국 오대 때에 병권을 잡고 반복하면서 황제로 자칭하다가 왕승변(王僧辨)에게 죽은 인물.

의 난리를 겪은 뒤이므로 규율이 문란해지고 제도가 확립되지 못하여서 여러 관청에서는 관리의 성적에 대한 최선, 최악을 고사하는 제도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다만 해를 갈아 서로
추천하기만 하여 순서를 빨리 거쳐서 승급하기 때문에 법이라고 말할 것이 없었다.

후위(後魏) 때에 최량(崔亮)이 이부상서(吏部尙書)로 되어 관리의 전직과 승급을 연한제로 하자고 아뢴 결과 관리의 현명 여부를 불문하고 그들의 정직(停職)과 해임을 다만 연한으로
따져서 결정하였다. 설숙(薛淑)이 상서하기를 "백성들의 목숨이 지방 장관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연한만을 따지고 현명 여하를 불문에 붙이려면 출석부를 쥐고
이름을 점명해도 그만일 것이므로 관리 하나면 넉넉할 것이니 인재를 선택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상주문을 국왕에게 올리지 않았었다. 대체 후위 때의 간부
정책이 그릇되기는 이 최량으로 시작한 것이다.[이는 인재 선발에 관한 역사적 고찰에 자세히 있다]

호치당(胡致堂) 호치당(胡致堂)：중국 송나라 때의 저명한 유학자로서 『논어상해(論語詳解)』, 『비연집(斐然集)』 등 서적을 저작한 호인(胡寅). 치당은 그의 호.

이 말하기를 "어진 국왕으로서 착한 정치를 하는 데는 현명한 인재를 구하여 사업을 맡겨 실행하는 것보다 긴요한 것이 없다. 대체 문을 지키는 자[抱關者]는 반드시 때를 맞추어 문을
열고 닫아야 하며 시간을 알리는 자[擊柝者]도 반드시 어스름 새벽에 점수를 맞추어 쳐야 한다. 또한 경리 일꾼으로서 통계를 옳게 하지 못한다면 축적이 있을 수 없을 것이며
목장관리자[乘田]로서 짐승을 잘 번식시키지 못한다면 그 축산이 잘 되지 못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작은 책임과 세소한 직무에 있어서도 적임자가 아닌 자에게 맡기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대체 평방 백 리의 면적을 떼어 한 현(縣)씩을 만들어 원[令]을 두며 수백 리 평방의 면적을 떼어 한 주(州)씩을 만들어 수(守)를 둔다.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백성이
얼마이며 집행하는 사업이 얼마임을 고려함이 없이 적임자를 선택하여 맡기지 않고 재직 연한만을 따질 것인가? 대체로 보아 세상에서 착한 사람은 적고 나쁜 자가 많으며 재능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으나 무능한 자가 많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선택자의 재능 여하를 불문하고 다만 연한만을 따져서 결정을 하며 현명하고 무능하고 간사한 사람들을 동일하게 보아서
일률적으로 올리고 내려 버린 결과 현명한 자는 10분의 1도 되지 못하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가 10분의 9로 된다.

최량이 연한제를 실행한 뒤로부터 이것이 상규로 전하여 내려왔다. 그 사이에 총명한 임금과 훌륭한 재상들도 많았지만 그 제도를 지금까지 개혁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의
생각에는 '사람에게 선택 권리를 맡기면 정실에 빠지기 쉽고 규정한 법대로 등용하면 공정하게 등용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인재란 항시 얻기 어려운 것이니 차라리 일체 인재 선발을
법에다 붙이는 것이 났다'라고 생각함일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으면 이부 그 기관에다가는 상서나 소재(小宰) 및 여러 관속[郎吏]들을 둘 필요가 없고 다만
설숙의 말과 같이 관리 등용 사무에 관한 처리를 한 사람에게 맡겨 등용자의 명단을 가지고 그들의 이름을 점고하여 일자로 세워서 들어가게 하면 그만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잘
다스리는 자가 현명한 자만을 등용하여 관직을 주며 재능 있는 자만을 선택하여 사업을 맡기며 따라서 상ㆍ벌을 분명히 한다면 힘을 들이지 않고도 국가의 승평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우(杜佑) 두우(杜佑)：중국 당나라 헌종 때 사공 벼슬을 하였고 기국공(岐國公)의 봉작을 받았으며 역사 서적 『통전(通典)』 200권을 저작한 사람.

의 『통전(通典)』 『통전(通典)』：중국 당나라 두우(杜佑)가 편찬한 200권의 중국 역사 서적.

에 이르기를 "옛날 삼대(三代) 이전에는 전국의 영주국들에는 경(卿) 3명, 대부 5명, 사(士) 27명씩을 두었는데 큰 영주국의 경 3명 중에서 2명은 천자의 임명을 받았고
1명만을 해당 영주가 임명하였으며 작은 영주국의 경 3명 중에서 경 1명은 천자의 임명을 받았고 2명을 해당 영주가 임명하였으며 공(公)작, 후(侯)작, 백(伯)작의 대부는
명복(命服) 명복(命服)：중국 주나라 때 관리의 등급을 아홉으로 하였는바 매 등급마다 일정한 규정에 따라 국가에서 주는 예복.

을 받고 자(子)작, 남(男)작의 대부는 직함만을 받으며 이들의 사(士) 이하는 직함을 주지 않는데 그것은 모두 그 영주 자신이 임명하였다. 한나라 초기에는 왕ㆍ후(王侯)국의 여러
관직도 모두 중앙 정부의 제도와 같이 하였으나 다만 그 영주국의 승상(丞相), 태부(太傅)는 천자의 임명을 받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 이하의 관직은 전부 해당 영주 자신이
임명하였었다.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 영주국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반란을 교훈으로 하여 영주국에서 임명하는 제도의 범위를 축소하여 영주국에서 어사대부 이하의 관리를
임명하던 제도를 폐지하였다.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큰 영주국의 관리 이천석(二千石)의 품직을 영주 마음대로 등용할 수 없으며 이천석이 통치하는 주와 군의
관속으로서의 별가(別駕)와 장사(長史)로부터 이하는 그 주의 자사(刺史)나 태수(太守) 자신이 임명하라고 하였었는데 그 후부터는 그대로 답습하여 개혁하지 않았다. 북제(北齊)
북제(北齊)：중국의 남북조시대 고양(高洋)이 동위(東魏)의 정권을 잡고 건국한 나라의 이름.

무평(武平) 연간에 후주(後主) 후주(後主)：어떤 왕조의 국왕이 전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다른 자에게 정복을 당했을 때 그 최후의 임금을 가리키는 말.

가 정치를 옳게 하지 않고 아첨쟁이를 많이 등용하여 그들에게 돈을 받고 임명장을 주었었다. 그리하여 아첨쟁이들이 주와 군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어서 하부인 향(鄕)의 관속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임명을 받은 자가 많았으므로 당시에 칙명으로 임명된 주의 주부(主簿)와 군의 공조(功曹)가 있었다. 그 뒤부터 주와 군의 인재를 등용하는 권리가 점차 중앙 정부에
이속되었으니 지방관리의 자격을 세밀히 조사할 수 없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한 것이다. 수(隋)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지방에 있는 대부급 이상의 관리는 전부 중앙의 이부(吏部)
직권에 이속되어 주나 군에서는 다시 선발하여 임명하지 못하였다.[후위(後魏)의 말기와 북제(北齊) 때로부터 주나 군의 관속들을 이부에서 많이 임명하였었는데 수(隋)나라에 이르러
모든 임명권을 성사(省司)에 귀속시켰다. 우홍(牛弘)이 이부 상서로 되었을 때에 인재 선발에 있어서 해당자의 덕행을 중시하고 문장과 재능을 차요시하여 간부 사업을 가장 잘
하였었다. 우홍이 일찍이 유현(劉炫)더러 묻기를 "『주례』를 보면 사(士)는 많았으나 부사(府史)가 적었다. 그러나 지금에는 영(令)과 사(史)가 옛날보다 백배가 많으나 수효를
감하고는 사업을 진행할 수 없으니 그것이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유현이 대답하기를 "옛 사람은 책임을 지우는 추천제가 있어서 매년 세말에 그 실적의 우열을 고사하였으므로
중복되는 고사를 하지 않았으며 복잡한 문서를 상세하게 하지 않고 부사가 요점만을 장악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문부(文簿)는 항상 재심사할 것을 고려하여 만반 준비를
대단히 정연하게 갖추기 위하여 백 년이 지난 묵은 문서를 만 리나 먼 지방에서 증거로 추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담에 이르기를 "늙은 관리의 어떤 사건이 죽은 뒤에 발각되면
생시와 사후[古今]가 판이하다" 합니다. 이는 사건 처리를 이렇게 현수하게 한다는 말이니 사무가 번다하고 정치의 병통이 생기는 원인이 여기에 기인합니다" 하였다. 우홍이 또 묻기를
"위(魏)나라와 제(齊)나라 때에는 영(令)과 사(史)가 를 조용하게 처리하였을 뿐이었었는데 지금은 눈뜰 사이가 없으니 이건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니 유현이 대답하기를 "전에는
주(州)에서 다만 주부를, 군(郡)에서 수(守)와 승(丞)을, 현에는 영을 둘 뿐이었으며 기타 관속은 그 지방장관 자신이 임명하였으므로 조서의 임명을 받아 부임한 자는 한 주에
수십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모든 관리의 대소를 막론하고 이부에서 그들의 세소한 일까지 일일이 고사하여 성적표에 올리기 때문에 번잡해진 것입니다. 대체
관리를 축소하려면 사업을 간소화하는 것이 제일이며 사업을 간소화하려면 먼저 책임 직위에 있는 자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청의 사업을 간소화하지
않으면서 사업만을 조용하게 하려 하니 그것이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우홍이 그의 말을 대단히 옳게 여겼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통전』에 또 이르기를 "요 임금과 순 임금 이래로는 관리 승급을 반드시 아홉 해 만에 한 번씩 하였고[주(周)나라의 제도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주석에 이르기를 "3년 만에 작은
고사[小考]를 하니 이는 직무를 바로잡아서 사업을 진행케 함이며 9년 만에 대규모의 고사[大考]를 하니 이는 관리의 성적이 나쁜 자를 철직시키고 유공한 자를 표창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이후로는 모두 6년씩을 한 과만으로 하였으며 당(唐)나라는 수(隋)나라 제도를 답습하여 4년으로 하였다가 뒤에 또 감하여 3년을 한 과만으로
하였다"라고 하였다.[당나라의 1년 만에 한 번씩 고사하는 것은 수나라 제도에 의거한 것이다. 네 번 고사하여 교체를 하나 만일 교체할 만한 증거가 없을 때에는 다섯 번 고사한
뒤에 면직시켰다. 지덕(至德) 이후에는 국가에 관리가 많아서 겸직, 원외(員外) 등 관리가 정원(正員)보다 배나 많았다. 그러나 광덕(廣德) 연간부터 정원으로 회복하여 세 번
고사하여 교체하고 한 해를 다시 두게 되면 네 번 고사하여 면직시켰다.]

당나라 제도에 5품 이상의 관리는 직접 칙령으로 임명하는데 모두 재상들이 미리 상의하여 명단을 올리며[여러 영주와 정 3품 이상과 문무 산관(散官) 및 도독(都督), 도호(都護),
상급 주[上州]의 자사로서의 서울에 있는 자를 임명할 때에는 책명을 주는데 참대 쪽에다가 피임명자의 이름을 칠로 썼다.] 6품 이하는 이부 전재서(銓材署)에 명령하여 이부가 선발
임명하고 보고를 하라 하였다.[그들의 품계를 올리거나 9품 관직 따위는 해당 기관에서 판정하여 보충하는 것이다.] 문관 임명은 이부에 속하고 무관 임명은 병부에 속하여 그것을
전선(銓選)이라고 하였었다.

이부와 병부에서 선발하는 모든 문관, 무관은 모두 세 번 사정[三銓]을 하는데 한 번은 상서(尙書)에서 하고 두 번은 시랑(侍郎)이 나누어서 한다. 인재를 선발하는 법은 네 가지
과목이 있는데 첫째는 신체[체격이 걸출하며 얼굴이 풍후하게 생긴 자], 둘째는 말[언어가 조리 있고 바르게 하는 자], 셋째는 글씨[해서를 쓰라 하여 필법이 굳세고 또 아름답게
쓰는 자], 넷째는 문장[判]이다.[문장에 있어 문장력과 이론이 특출한 자.] 이 네 가지 과목이 구비한 자들 중에서는 덕행 있는 자를 우선적으로 채용하며 덕행이 같은 자들
중에서는 재능 있는 자를 우선적으로 하며 또 재능이 같은 자들 중에서는 공로 있는 자를 우선적으로 채용하였다. 6품직 이하는 모아서 시험을 보는데 자격과 공로를 타산하여 그에게
적당한 관직을 배치하나 5품 이상은 시험을 보지 않는다.[모든 선발에서 처음에는 모아서 시험하여 고사하며 고사가 끝난 뒤에 그들의 신체와 말을 비교하여 고사하며 고사가 끝난 뒤에는
고사한 여러 점수를 집합하여 공포한다. 병부의 무관 선발도 이와 같이 하는데 피선발자 중에서 체격이 우람하고 특출하며 묻는 제목에 대한 대답이 상세하고 명확하며 날쌔고 용감하며
재능과 기술이 있어서 통솔자로 될 만한 자를 채용한다. 이는 인재 선발에 관한 역사적 고찰에 자세히 있다.]

당태종(唐太宗) 때에 마주(馬周)가 상서하기를 "백성을 편안히 살게 다스리는 요체는 단적으로 수령에게 달린 것입니다. 예로부터 군수(郡守), 현령(縣令)은 모두 현명하고 덕행 있는
자를 추려서 임명하였으며 특별 등용을 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실무적인 연습을 거쳐서 백성을 대하게 하였는데 더러는 지방장관으로부터 정부 관리로 등용되어 재상(宰相)이 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조정에서는 정부 관리에만 중시하고 현령과 자사[당나라에서는 태수(太守)를 자사로 개정하였다.]의 인선에 대하여 아주 경시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자사를 선정함에 있어서
무관이나 공훈 있는 자 혹은 서울에 있는 관리로서 능력이 없는 자라야 지방으로 내보내며 절충(折衝), 과의(果毅)들 중에서도 체격 생김이 굳세고 건강한 자를 먼저 선발하여 내직
중랑장(中郎將)으로 등용하며 그 다음 가는 자를 뽑아서 주(州)의 군사 간부에 보충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먼 데 있는 변강의 군관의 인사 관계를 더욱 경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방 관리로서 능히 한 지방의 직무를 맡아서 감당할 재능을 가진 자와 덕행이 있어서 등용에 해당한 자는 열에 하나도 되지 못하였는바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게 된 원인이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 때에 위현동(魏玄同)이 이부의 선발 제도는 인재를 충분히 등용할 수 없는 방법이라고 하여 상소하기를 "옛날의 영주국들은 오늘의 군이나 현과 같습니다. 옛날에는
사(士)가 일정한 임금 하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었으나 한 번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게 되면 자기의 관속을 자신이 구하며 저마다 영특하고 현명한 인재를 선발 등용하였으며 오직
영주국의 대신만을 천자의 조정에서 임명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 후 진(秦)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영주 제도를 폐지하여 군에 수(守)를 두었으며 한(漢)나라도 그 제도를 답습하여
내려오면서 다소 개혁이 있었지마는 영주국의 사백석(四百石) 이하의 관리는 영주 자신이 임명하였고 영주국의 태부(太傅)와 상(相) 및 기타 대관은 중앙에서 임명하였으며 또 주나 군의
관속인 연리(椽吏), 독우(督郵), 종사(從事) 따위는 그 군의 장관에게 맡겨 임명케 하였습니다. 그리하다가 위(魏)나라 진(晉)나라 때에 이르러 비로소 관리 임명을 전부 이부에
일원화시켰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는바 내왕하는 문서에서 재능 있는 자를 구하고 부기 문서에서 덕행 있는 자를 구하게 되어 법이 병통으로 된지 오래였습니다.

대체 당시 높은 지위에 있는 착한 사람은 옛 제도를 존중히 여기며 개혁을 함부로 하지 않기 때문에 혹 부득이한 경우가 있어 인재를 등용할 때가 있더라도 자기 독자의 견해를 가지고
특출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선사(選司)에서 실행하고 있는 제도는 응당 개혁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렇게 넓은 국토와 이렇게 많은 인재들을
두어 사람의 손에다 맡기는 그 점입니다. 가사 그들의 선발에 대한 판정이 저울과 같이 반듯하며 사람을 알아보는 안광이 물을 대하듯이 맞비친다 하더라도 저울을 잡는 힘과 알아보는
안광도 한도가 있을 것이거늘 더군다나 함께 이 선발 직무에 있는 자들은 혹 옳지 못한 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세력에 끌리는 일이 있을 것이니 어떻게 공정하게 될 것입니까?

옛날 주나라 목왕(穆王)이 백경(伯冏)을 임명하여 태복정(太僕正) 벼슬을 삼을 때에 말하기를 '너의 관속들을 신중히 선발하여 쓰라!' 하였었습니다. 당시의 태복정은 중대부(中大夫)
직위에 속한 것이지마는 그래도 자기의 관속 선발권을 맡긴 것으로 보아 삼공(三公)과 구경(九卿)도 역시 자기의 관속을 선발 임명하였을 것입니다. 『주례』를 보면 "태재(太宰)와
내사(內史)가 함께 관작과 녹봉에 관한 직무를 주관하고 사도(司徒)를 폐지하였으며 사마(司馬)가 따로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과 국왕의 조칙에 관한 직무들을 주관했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정한 직무를 여러 기관에 나누어 맡기고 또 두어 관직에 통합시킴에 있어서는 각자 자기 기관에서 쓸 인재를 구했으며 그 중에서의 대관만을 국왕의 명령으로
임명하였던 것입니다. 옛날 조그만 송(宋)나라에서도 배자야(裵子野)가 이에 대하여 한탄한 바 있었거늘[인재 선발에 관한 역사적 고찰에 있다.] 더군다나 지금에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이외의 관직에 있어서 정치 생활을 하려면 학문을 소유해야만 옛일을 잘 알아서 벼슬을 할 수 있었으며 사건 처리를 법에 의거하여 사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현명한
인재가 아버지의 직무를 대받침하여 계속 나왔지마는 귀족 자제[胄子]란 그들도 반드시 여러 학문을 섭득하였습니다. 그들이 여섯 가지 예법[六禮] 육례(六禮)：옛날 봉건시대에 관을
쓰는 관례, 혼인하는 혼례, 초상 치르는 상례, 제사지내는 제례, 향에서 잔치하는 향음주례, 선비가 서로 만나 보는 상견례 등 여섯 가지 예절.

을 배워서 자기의 품성을 단련하며 일곱 가지 가르침[七敎] 칠교(七敎)：『예기』 왕제(王制)에서 말한 부자, 형제, 부부, 군신, 장유(長幼), 붕우(朋友), 빈객(賓客)에 관한
일로써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

을 깊이 인식하여 자기의 덕행을 발양하여 반드시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선발을 받은 뒤에야 벼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귀척 자제는 문벌을 보아서 추천해 주며 음사 관계가
있어서 높은 품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벼슬을 일찍이 하는 습속이 있기 때문에 시험 제도를 경시하고 학문을 연구하지 않으니 진실로 가석한 일입니다. 그 외의 훈관(勳官)
훈관(勳官)：국가에 공로가 있는 자에게 주던 관직.

, 삼위(三衛) 삼위(三衛)：중국 당나라 때 고급 관리와 훈공 있는 자의 자손으로 조직한 금위군(禁衛軍)인 친위(親衛)ㆍ훈위(勳衛)ㆍ익위(翊衛)를 가리킴.

, 저급 군관 따위는 주나 현의 추천을 거치지 않고 직접 글씨와 문장력 등으로써 시험하는 제도가 있어서 등용하게 되니 이는 아마 덕행을 중요시하고 재간과 기술을 차요시하는 본의에
위반되는 듯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를 받아주지 않았었다.

그 후 위현동(魏玄同)이 또 상소하기를 "제가 제서(制書)를 보면 매번 '3품으로 하여금 선비를 추천하여 하급 9품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인재를 추천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현명한 인재를 다방면으로 구하자는 본의입니다. 그러나 추천자에 대한 상, 벌이 대단히 명확치 않으며 피추천자의 현명 여부를 그리 중요하게 보지 않기 때문에 추천자들이 위로부터
내리는 책벌이 자기에게 미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아래로부터의 인재 탐구에 노력하지 않고 그만 명령 집행에 시늉만을 하여 추천할 인재를 함부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또 현명한
사람이라야 현명한 사람을 아는 것이며 같은 계열에서도 인재의 등급이 저마다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허튼 추천을 받아서 선발된 자이니 그 놈의 눈으로 어떻게 인재를
알아보겠습니까? 이제 만일 진실한 인재를 구하려 한다면 먼저 인재를 추천할 그 인물부터 선택해야 합니다. 물을 맑게 하려면 물 근원을 깨끗하게 해야 하며 초상화를 좋게 그리려면
대상자의 외표부터 좋게 해야 하는 것이니 추천자의 행동과 재능을 상세히 알지 못하면서 그더러 책임 있는 추천을 하라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일찍이 근시한 신하들을 불러 세워 놓고 현명하고 재능 있는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였다. 재상 이안기(李安期)가 나서서 말하기를 "어진 임금들은 모두 현명한
인재를 구하는 데 노력하고 그들을 부려 쓰고 직무를 맡기는 데에 있어서 오랜 기간을 주었습니다. 몇 호 되지 않는 작은 고을에도 충실하고 신의 있는 사람이 있거니 하물며 지극히 큰
우리나라에서 어찌 영특하고 어진 인재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근래에는 대신들의 추천이 있은 뒤에는 바로 여러 물의와 훼방을 만나서 당파를 한다고 공격을 당합니다. 이렇게 엎드린 자가
일어나기도 전에 현 지위에 있는 자가 따라 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그날그날 그대로 꾸려갈 것만을 생각하며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만일 폐하가 겸양하여 남의 의견을
존중히 여기며 인재를 광범하게 탐구하여 추천자와의 개인 관계를 가리지 말고 재능을 보아서 등용만 한다면 꼬집어 바치고 훼방하는 말이 없게 될 것이니 누구가 성심으로 추천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고종이 대단히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고종 때에 유상도(劉祥道)가 상소하여 인재 선발에 관한 폐습을 논하고 또 아뢰기를 "요 임금, 순 임금 때에는 관리의 사업 실적을 3년 만에 고사하였는데 세 번 고사하여 그들의
우열점을 보아 등용하고 파직하였습니다. 전한과 후한 때의 간부 정책도 자기의 직위에 오래 있게 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관직을 따서 성씨를 쓰게 되어 창(倉)씨이니 유(庾)씨이니 하는
성씨가 있었습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때에는 별로 기록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은 관직에 있는 자를 네 번 고사하고는 바로 관직을 올리고 있는바 사람들은 '곧 과만이
차니 어찌 이동이 없겠는가?'를 각오하고 있으며 백성들도 자기의 장관이 곧 갈려갈 것을 예견하고 반드시 그대로 발라 맞추기를 위주로 합니다. 이렇게 곧 이동되는 사람으로써 발라
맞추는 백성을 다스리게 하고 그로 하여금 백성을 나쁜 습속을 고치도록 교양하라고 책임지우려 하니 이것은 반드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래건대 네 번 고사하기는 현행 선발법대로
하되 그 임소에서 직함만을 올려주고 여덟 번 고사를 거쳐서 과만이 찬 뒤에 다른 관직에로 전직할 것을 용허한다면 옛날의 순박한 미풍을 회복하는 데까지는 기대할 수가 없다 하더라도
구관을 치송하고 신관을 영접하는 소란이 실로 많이 감소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중종(中宗) 신룡(神龍) 연간에 노회신(盧懷愼)이 상소하기를 "제가 듣건대 공자가 말하기를 '나라를 잘 다스린 백 년 후에야 난폭한 자를 없애며 형벌을 쓰지 않을 수 있다'
하였으며 그가 또 말하기를 '만일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다면 1년 만에 교양과 법령을 실시할 것이며 3년 만에는 성과를 얻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서에 '3년 만에
관리의 사업을 고사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관리들의 사업 실적을 비교해 본다는 뜻입니다. 자산(子産)은 어진 사람이었으나 그가 정권을 잡은 지 여러 해 되어서야 성과를 얻었거늘
하물며 보통 인재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제가 근자에 주나 현의 관리들이 부임하여 사업하는 것을 보건대 기간이 많은 자는 1∼2년을 지속하는 자도 있으나 적은 자는 3∼5개월 만에 그만 이동을 하여 그의 실적을 고사하지도
못하며 혹 오래 되도록 이동이 없다면 당장 귀를 기울여 탐지하고 쫓아다니면서 보며 서로 등용되려고 덤벼들어서 체면도 염치도 불구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이 어느 기간에 백성에게
도덕적 교양을 주며 백성들의 곤란을 구제해 줄 수 있겠습니까? 호수와 인구가 이산되어 백성들이 못살게 된 원인이 모두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들이 그 관리의
이동이 곧 있을 것을 알므로 장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관리가 자기의 이동이 미구에 있을 것을 알므로 자기 능력을 있는 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그날그날 발라 맞추어서
아침이나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옛날에는 관리가 된 자는 그 관직이 자손에게로 전해 가기도 하였으니 창씨(倉氏), 유씨(庾氏)의 성씨를 가진 성바지가 즉 그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도독(都督),
자사(刺史), 상좌(上佐)와 서울에 가까운 두 현령 등에 대하여 네 번 고사를 거치기 전에는 다른 관직에로 전직할 것을 불허하며 그들의 실적을 고사하여 특이한 자에게는 상급으로
수레나 갖옷을 주기도 하며 혹 직함을 올려주기도 하며 사신을 보내어 문의도 하며 조서를 내려 위로도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대신 중에서 혹 빈자리가 있으면 근간하고 유능한 자를
발탁할 것이나 정치적 업적이 보잘 것 없거나 난폭 또는 탐오에 범한 자는 자기 고향에 돌려보내는 등의 처리 방법으로써 상벌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지금에 있어서 정치를 바로잡고
폐습을 구제하는 방도는 이밖에 없다고 봅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년에 조서를 내리기를 "삼성(三省) 삼성(三省)：중국 당나라 때의 중서성(中書省), 문하성(門下省), 상서성(尙書省).

의 사랑(侍郎)이 결원일 때에는 자사 경력을 가진 자 중에서 선발하여 등용하며 낭관(郎官)이 결원일 때에는 현령(縣令) 경력을 가진 자 중에서 선발하여 등용하라!" 하고 또
제서(制書)에 이르기를 "중앙 정부의 관리 중에서 재능과 식견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지방의 도독(都督), 자사를 임명하며 도독, 자사 중에서 정치적 실적이 높은 자를 선택하여 중앙
정부의 관리로 임명할 것인바 이렇게 중앙과 지방 관리를 내고들임에 있어서의 규형을 항상 보장함으로써 영구한 규정을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장구령(張九齡) 건의에 의한
것이다.

그때에 장구령이 좌습유(左拾遺) 벼슬로 있으면서 상서하기를 "여러 백성들은 모두 생명을 현령에게 맡기고 생활을 자사에게 의탁하여 살므로 이 두 관리는 백성과의 큰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접 백성과의 관계를 가진 관리는 현명한 인재를 얻어야 하며 인재를 등용하는 방도는 그 선발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사와 현령은 거개
자기 직위에 맞은 재능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중앙관리 중에서 주나 현의 관리가 된 자는 혹 그 자신이 과오를 범했거나 자기 직위에서 성적이 보잘것없는 자들로서 그들을
지방관으로 보내어 일종 귀양보내는 감을 주고 있습니다. 무관으로 말하더라도 지방에 있는 저급 관리는 직위에서 많은 경험을 축적하였고 장구한 기간에 능숙해졌더라도 그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서는 국가의 평화와 만족한 생활을 도모하려 하여도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에는 지방의 자사가 정부 관직으로 들어 와서 삼공(三公)으로
되었으며 정부의 낭관(郎官)이 지방으로 나가서 장관이 되었었습니다. 저는 근세 습속이 이 중요한 관직을 이상하게 천시하는 것을 괴상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조정에 있는 대신들은 한
번 정부의 관리로 들어온 뒤에는 지방으로 나가지 않으니 이는 그들 자신으로서 막상 좋은 일일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서울에는 전국의 인물이 모여드는 곳이며 명예가 거기에서
나오는 곳이므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어떻게 한 축만 잘 들면 가만히 앉아서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지방관으로 나가게 되면 이와 다르게 됩니다. 이는 큰 이익이 정부
관리에 있고 지방 관리에 있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 폐습을 없애려면 지방의 자사와 현령을 중요하게 보는 것이 제일 상책입니다. 즉 도독과 자사의 경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그가 비록 높은 문벌에 속하더라도 그에게 시랑(侍郎)이나 대신의 임명을 불허하며 현령의 경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그가 아무리 좋은 실적을 내었더라도 그에게 대랑(臺郎)이나
급사(給舍)의 임명을 불허하며 또 아무리 먼 곳에 있는 도독이나 수령(守令)이라도 서로 정부 관리로 드나들게 하여 10년 이내에 정부 관리로 들여오게 하며 또 그로 하여금 10년
이내에 지방 관리로 나가게 할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여 관리 임명에 관한 폐습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이 습속이 영구화되어 일부 중앙관리들의 사생활에만 유리하게 될 것이므로 국가
일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옛날에는 현명하고 어진 인재를 선발 등용하되 그의 재능에 따라 관직을 맡기었기 때문에 혹 먼 데 있는 사람의 명망을 듣고도 불러다 등용하였으며 혹 한 번 보고도 대번
등용하였으므로 선비들은 자기의 본분인 학문 수양에 주중하였고 어떤 투기적 행동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 사업이 올바로 되지 못하여 사무만이 날마다 배로 증가하니
이는 진실로 그 원인이 생기는 근본을 바로잡지 않고 지엽이 되는 처지에다 재주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소위 그 부리는 재주란 것은 이부에 있는 천 개 만 개의 규정과 조항들을 붓으로
내두르는 아전들이 세밀히 해석하며 또 감하기도 하고 떼어 붙이기도 하여 문건 작성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본래 문건이 생긴 본의는 사람이 잊어버리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는 문건이나 편지 따위에 모든 심력을 허비하면서 인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칼을 중류에서 잃어버리고
배[船] 위에다 칼 잃어버린 곳을 각해 놓은 다음 더 멀리 가서야 배에 각해 놓은 자리에서 칼을 찾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대체 지금 이부(吏部)의 간부 사업에서 능하다는 자들이 말하기를 '현위(縣尉)를 올려서 주부(主簿)로 등용하고 주부를 올려서 현승(縣丞)으로 등용한다' 하니 이런 사람을 이부의
해당 관리로서의 가장 글도 잘 알고 관직의 순서도 잘 아는 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직으로부터 저 관직에 등용하는 것이 순서에 있어서의 적합 여부만을 표준하고 그
피등용자의 능력 여하를 불문하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부상서(吏部尙書)나 이부시랑(吏部侍郎)이 현명하지 않는 자라면 애당초 그에게 그 관직을 주지 말 것이려니와 일단
그들의 현명한 줄을 알고 그 관직을 맡긴 이상 어찌 또 그들이 인재를 못 알아내겠습니까? 인재는 알아내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신중히 하였으나 열 사람을 선발하여 다섯
사람만을 옳게 선발하더라도 그 방도가 실행할 만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품계에 따라 관직에 배치하면서 자칭 자신이 잘 관직에 맞게 인재를 선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재의 재능 여하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성질의 관직을 불문하고 평균 배정한다는 의론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부의 본신 사업에서도 인재를 등용한
실질적 성과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이부의 선발 부서에 있는 병통은 선발하는 법을 개혁하지 않는 데 있다고 보며 또 이 법의 개혁은 대단히 쉬우니 위에서 전날의
과오를 깨닫고 실행만 하면 된다고 봅니다"라고 하였다.[장구령(張九齡)이 또 말하기를 "만일 자사와 현령이 추천할 사람을 엄선하려면 바로 해마다 자기가 관할하는 지방에서 응당
합격할 만한 자를 발견할 것이므로 그로 하여금 후보자의 재능과 덕행을 고사한 다음에 상부에 보내게 하고 상부에서는 그들을 선택하고 추천하여 등용된 자의 비율에 의거하여 주나 현
사업의 우열점을 결정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첫째는 현령 자기가 추천할 사람에 대한 주의가 깊어서 반드시 인재를 추천하게 될 것이며, 둘째는 이부에서도 그들의 실적에 의거하여
따지기 때문에 허투루 추천하는 일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을 보면 해마다 인재 선발로 인하여 모여드는 자가 거의 매번 만여 명씩 오므로 서울 쌀이 그로
인하여 바닥을 긁게 됩니다. 헛된 인재 선발이 이렇게 되었건마는 낡은 인습을 그대로 처리하려 하며 또 그 제도를 개혁하기도 어려우므로 선발 규정이 더 까다롭게 되어 현명한 자와
나쁜 자가 더욱 혼동하게 될 뿐입니다. 그 규정 중에는 시(詩) 한 수씩을 지으라 하거나 판단력을 감정하는 문제 하나씩을 내어 그 답안의 옳고 그름을 가지고 인재를 평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후 바로 현명한 사람과 점잖은 사람[君子]들로 하여금 은둔하게끔 만드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이 법은 본래 당(唐)나라 때의 옳지 못한 제도로서 식견 있는
자들의 한탄하는 일입니다. 또 국토가 아무리 넓고 조정의 관리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상부에 있는 자가 명철하고 현명하다면 진실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 등용자에 대한 칭찬과
훼방이 혼란하여 무엇을 표준으로 하여 선택할 수가 없다면 다시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만일 후보자가 현명하고 재능 있는 것을 알면서도 성적과 순서대로 선발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따위
방식을 사용하겠습니까? 지금 어느 관직이든지 결원이 있을 때에는 더러 밑 계층에서 함부로 뽑아 올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 등용자의 현명 여부를 논하지 않으며 오직 누가
등용되고 누가 낙제되었다는 이것만을 논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옳은 의론이 성립되지 못하며 명예와 지조를 엄두에 두지 않으므로 착한 선비[善士]는 자기 지조를 지켜 한때가
오기만 기다리며 중간급의 사람은 바삐 서두른 결과 한 자리씩 쉽사리 얻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조정에서 명망을 표준으로 하여 인재를 등용한다면 선비들도 자기 수양을 통하여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발전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도 그 경향에 따라 갈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명예와 행복이 청백하고 수양하는 데서 나오지 않고 모든 추향[趍]이 벼슬에만 쏠리는 자가 많기 때문에 그 중에서 작은 자[小者]는 간신히 한 자리를 얻고서는 본심이
아닌 아첨을 상관에게 부리며 큰 자[大者]는 명분이니 대의니 떠버리다가 다시 둔갑하여 당파쟁이가 되어 버리니 이것은 다 도덕적 문화교양이 점차로 침체됨에 따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재를 등용할 때에는 반드시 심사를 잘해야 합니다. 만일 현명하고 현명치 않는 자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함부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선비 된 자가 반드시 각심하여 남과 같은
착한 사람이 되려 할 것이며 형벌에 관한 사업이 자연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국가의 흥하고 침체되는 큰 근본이 되는 것이니 어찌 심사를 잘 하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개원(開元) 13년에 현종(玄宗)이 이부의 선발하는 시험 제도는 공정하지 못하다 하여 십전(十銓) 제도를 두어 인재를 선택하라 했다가[예부상서 최정(崔頲), 어사대부[御史中丞]
우문융(宇文融) 등 열 사람으로 하여금 주관케 하였던바 인재의 전형 판정이 끝나게 되면 그를 황제 있는 데로 불러 들여 결정을 하였으므로 이부의 상서나 시랑도 모두 그 사업에
참예할 수 없었다. 오긍표(吳兢表)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폐하가 참소하는 말을 잘못 듣고 책임 맡은 관리를 믿지 않으니 이는 윗사람으로서의 사람을 대하는 성의로써 상대자를
감화시키는 도리가 아닙니다. 옛날 위(魏) 나라 명제(明帝)가 뜻밖에 상서성(尙書省)에를 간 일이 있었는데 상서령(尙書令) 진교(陳嶠)가 꿇고 묻기를 '폐하가 어디를 갔습니까?'
하였더니 명제가 '상서성의 문부를 보려 하다' 하였습니다. 진교가 말하기를 '이는 저의 직무에 관계되는 일이니 폐하가 일부러 보실 일이 아닙니다. 만일 제가 이 직무에 적합하지
않으면 당장에 파직을 시켜 주십시오!' 하였더니 명제가 부끄러워서 돌아왔었습니다. 또 진평(陳平)과 병길(丙吉)은 한(漢)나라의 재상이었지마는 진평은 전국 전곡(錢穀)에 관한
황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으며 병길은 행려 사망자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천자(天子)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자기의 직무를 지키고 조금이라도 남의 사업을
침해 간섭하지 못하는 것이어늘 하물며 우리 만승 천자[萬乘之君]로서 내려와서 글씨와 문장력을 시험하여 선발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될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에 다시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개원 18년에 배광정(裴光庭)이 이부상서로 있을 때에 순자격(循資格)법을 제정하였는데 그 법은 등용자의 현명 여부를 불문하고 일률적으로 제정한 규정에 합치되어야만 등용할 수 있으며
연한에 따라 승급을 하게 되었는바 조금이라도 기한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등용이 못된 자들은 모두 좋아하여 그 법을 성스러운 글[聖書]이라고 하였다.[그 전에는
선사(選司)가 관리된 자의 이름을 등록할 때에 시험을 거쳐서 자격을 측정하였으나 대개는 후보자의 재능 여부를 보기 때문에 혹은 특별히 등용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늙도록 하급에 있어서
출신한 지 20년이 되어서도 녹봉을 얻지 못한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배광정이 황제에게 아뢰어 순자격법을 제정하여 놓고는 관리 몇 명을 파직시킨 뒤에 모두 뽑아다 모아 보충하고
보니 관직이 높은 자는 적게 선출되었으나 저급에 있는 자가 많이 선출되었으며 재능 여부도 불문하고 연한만 되면 그냥 등용하였다. 결과 관직에 있어서 과오만 범하지 않은 자라면
승급하기만 하고 강직을 당하지 않았으므로 어리석고 무능한 자들이 모두 좋아라고 하였으나 재능 있는 자들은 모두 한탄하였다.] 송경(宋璟)이 이 법의 실행을 반대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특이한 재능과 덕행이 있는 자에게는 특별 등용을 용허하라!"는 조서를 내린 일이 있었으나 조서는 조서대로 실행을 보지 못하였으며 관리들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된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서 다만 보수적으로 법 조항만을 따라 시행할 뿐이었었다.[배광정이 죽자 바로 태상(太常) 박사 손완(孫琬)이 배광정의 순자격법 실행은 선비들을 고무 격려하는
도리를 잃어버린 것이라 하여 그의 시호를'극(克)'이라고 할 것을 요청하였었다. 그러나 배광정의 아들이 원통하다고 하소연하기 때문에 다른 시호를 주었다.]

상고하여 보면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소위 공적이란 것은 관리된 자의 관직에 있어서의 성적을 등급으로 하는 것이며 재직 기간의 오래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연한으로 따진다는 주장은 한나라 때에도 이미 있었던 것이나 인재를 등용하는 법으로는 시행하지 않았었다. 후위(後魏) 때 최량(崔亮)과 배광정에게 이르러 비로소 연한만을
표준으로 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법으로 제정한 것이다. 그 법인즉 관리에 관한 간부 문건만을 의거하여 재직 기간의 선후만을 따지게 되니 그들이 소위 인물 전형(銓量)이란 헛된
형식만을 실증한 데 불과한 것이다. 옛 선비들이 말하기를 "현명한 인재가 저급에 처박혀 있는 것은 그의 자격이 부족하다는 까닭이며 상부에서 사업이 잘되지 못한 것은 자격으로
억누르는 까닭이며 선비로서 청렴하지 않고 수치를 모르게 된 것은 자격을 쟁탈하는 데서 생기는 까닭이며 백성이 학정에 시달리는 것은 법정 자격 있는 자가 많은 까닭이며 모든 사업이
못쓰게 되는 것과 법률 제도가 해이하게 되어도 그대로 두고 바로잡지 못하게 된 원인은 모두 법정 자격자들의 잘못에서 오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옳은 말이다.

유질(劉質)이 논하기를 "대체 관직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으며 재능에는 잘하는 자와 서투른 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하는 자에게 큰 관직을 맡기고 서투른 자에게 작은 관직을
맡겨야만 관직과 인재가 서로 합당하게 되며 사업과 성과가 함께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맹공작(孟公綽)의 재능이 조(趙), 위(魏)와 같은 큰 세도집의 가신(家臣)이
되기에는 넉넉하지마는 등(滕)나라, 설(薛)나라와 같은 작은 나라의 대부(大夫)로는 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근리한 말이다. 대체 처음 벼슬을 맡길 때에 그를 선발하기는
간단하게 해놓고 그를 부려 먹기를 각가지로 한다면 한 사람의 몸으로 여러 가지의 일을 다 보게 될 것이니 어찌 잘못이 아니랴? 그러므로 관리가 된 사람이 자기 장점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서 관청 사업이 잘되어 가지 못하는 것이다. 삼대 때의 제도는 어느 벼슬을 하는 집이든지 그 직무가 대대로 이어가는 직업으로 되었으며 나라에는 또 대대로 주는 관직이
있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의(醫)원이 3대를 이어 내려오지 않았다면 그에게 약을 먹지 않는다' 하였고, 사목(史墨)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벼슬을 하게 되면 대대로
내려오면서 그것을 직업으로 하였던바 밤낮으로 생각하여 전문화하였으니 이는 만일 그 직업을 잃게 되면 죽음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상의 말로 보아 직업을 대대로 전습하지
않으면 그 사업이 전문화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이 제도로써 주나라 때에는 관직에서 적합한 인재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세습제도를 보면 옛날 희씨(犧氏), 화씨(和氏)는
하늘과 땅에 관한 직무를 맡았으며 유씨(劉氏)는 대대로 용(龍)을 길들였으며 적씨(籍氏)는 대대로 사람에 관한 일을 맡았으며 유씨(庾氏), 고씨(庫氏)는 대대로 곡식의 출납을
맡았으며 제씨(制氏)는 대대로 종(鍾)주조를 맡았다는 기사가 있으니 이것이 즉 직업을 전문화하는 사업들이다. 이 제도가 후세에 와서는 세습하는 대갓집에서 정권을 잡게 되어 자기의
가정에 이익을 붙이고 왕실을 누르게 된 결과 제(齊)나라는 전(田)씨에게 빼앗기고 노(魯)나라는 세 가문[三家] 때문에 약하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대신집의 세도하는 폐습을 개혁하여
직업의 대대로 전문화하는 제도를 회복하지 않았으니 의원, 장인, 복서, 수학[醫工筮數] 등의 학문과 기술이 침체하게 된 원인은 대개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대체 한 자[尺] 되는 비단으로 옷을 짓거나 한 치 되는 나무에 조각을 하는 데도 허투루 맡기지 않고 반드시 그 기술에 능한 자에게 맡기는 것이니 이는 이 조그만 것이라도 서투른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 한 자 되는 비단과 한 치 되는 나무는 하찮은 물건이라도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면 할 수 없거늘 하물며 국왕의 보좌자이며 국가 사업을
처리하는 사람을 신중히 선택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그러므로 큰 집을 건축하는 자가 먼저 편수를 정한 뒤에 재목을 선택하듯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도 먼저 보좌할 인재를 선택한 다음에
정치 사업을 맡기는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편수[大匠]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편수가 집을 지을 때에 반드시 큰 재목으로 들보와 도리를 만들고 작은 재목으로 서까래를 만들고도
꼭 필요한 데 따라서 한 자 한 치의 나무라도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리 하여야만 나무를 잘 다루는 편수라 하는 것이다" 하였다.

당나라 덕종(德宗) 초년에 예부(禮部) 원외랑(員外郎) 심기제(沈旣濟)가 인재 선발에 관한 의견을 올리기를 "예나 이제의 인재를 선발 등용하는 법에서 여러 학문 부문의 학자들을
항상 뽑아 썼지마는 결과로 보아서 세 과목뿐이니 덕행과 재능 및 실적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부에서는 이 세 과목을 다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지금
이부에서 표준으로 하는 기본이 법의 조항에 있는바 거기에는 '그의 덕행을 보아서 관직에 두며 재능을 맞추어서 관직을 주며 실적을 보아서 승급한다'는 조문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재를 고사하고 비교하는 법은 문장력, 글씨 경력, 언어와 행동면에 두고 있습니다. 이부 시랑(侍郎)이 신통한 재주를 가진 인간이 아닌 이상 어찌 그 내용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사실에 있어서 점잖히 걸어가고 천천히 말하는 것이 덕행이 아니며 글을 잘 짓고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이 재능이 아니며 연한이 많고 고사를 여러 번 겪는 것이 실적이
아닙니다. 만일 이대로 표준으로 하여 실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재를 혹 잘못 등용할 수 있거늘 하물며 여러 가지 학문에 관한 학설이 많아서 보고 듣는 바로서는 다 해명할 수 없는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는 대개 고사하기를 명확하게 하지 못하였거나 선택하기를 세밀하게 하지 못한 까닭이 아니라 선발하는 법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문황제(文皇帝)가 이 잘못된 제도에 관심을 두어 개혁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대개 사물이란 한도에 차면 줄어드는 것이며 법이란 오래되면 나중에 폐단이 생기는 것이므로 국왕된 자가 변경되는 형편을 보아서 법을 제정하며 시대의 정황을 참작하여 정책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상고해 보면 옛날의 선거와 등용하는 법은 모두 주(州)나 부(府)에서 고사하여 추천하였지마는 연대가 멀어짐에 따라 실책이 더욱 많아져서 제나라, 수(隋)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그 폐단이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모든 부서에의 배치가 모두 청탁에 의하여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때에 '정실 관계로 추천해 온 인재보다 자기 부서에서 선발하는
것이 나으며 지방에서 허투루 추천해 온 것보다 정부관리 중에서 추려 쓰는 것이 났다'고 논의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와 부의 권리를 없애어 전부 이부에 돌려버렸으니 이는
당시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임시 편법이었으며 국가를 옳게 꾸려나가는 영구불멸의 정상 법전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이부의 선발 제도는 긴박한 문제로 되었으니 그것을 다시 깨끗이
개혁하여야 할 것이며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아주 망쳐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의 생각에는 지금 선발 등용되는 자를 보면 그들이 본 거주지에서 오는 자만도
아니니 구태여 본 지방에서만 추천하라고 할 것이 없으며 인재 감정은 혼자만이 잘하는 것도 아니므로 이부에 다만 전적 책임을 맡길 수 없는 것이니 옛날의 제도를 상세히 참고하여
오늘의 형편을 잘 고려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5품 이상의 관리 및 여러 기관의 장관급은 대신으로 하여금 추천해서 올리라 하되 이부의 동의를 얻도록 하며 또 기관의 6품
이하의 관리이거나 혹 각 부서의 관속들에 대하여는 주나 부에서의 선발 등용하는 것을 용허한다면 인재를 선택하는 책임을 각 기관에서 다 지게 되는 동시에 그것을 종합하여 국왕에게
주달하는 직무도 다 두 부(部)에 귀속시키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목(牧)과 수(守)를 먼저 선발한 뒤에 그에게 관속 선발의 실권을 주되 그 중에서 관급이 높은 자는 자체로
먼저 등용하고 추후로 보고하여 임명을 받게 하며 낮은 자는 임명한 뒤에 보고만을 하게 하여 국왕이 임명하지 말 것입니다. 만일 지방의 장관[牧守]이나 장수(將帥)가 인재선발을
불공평하게 하여 등용하였다면 이부나 병부가 참견하여 다시 채용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상께서는 밝으신 총명으로 멀리 보시고 들으시와 정실 관계로 협잡 추천한 자와 선거에
부주의한 자를 치죄하되 조그만 죄를 범한 자에게는 견책이나 철직을 주고 큰 죄를 범한 자에게는 중형으로써 처단하여 관리를 임명하는 사업에 있어서 책임을 지게 한다면 누가 감히 그
사업을 경솔히 하겠습니까? 이렇게 한다면 이름을 바꾸어 허위 임명을 받은 자, 재능이 적고 덕행이 나쁜 자, 탐오하고 뇌물질하는 자, 비겁하고 간사한 자들은 조서 내리는 날 소문만
듣고도 없어질 것입니다. 대체로 그들의 수효를 계산하여 열에 여덟, 아홉을 털어 버린다면 인원수는 적어도 실지 유용한 인재가 넉넉하게 되며 일이 상세하게 진행되고 관리가 사업을
연구하게 되어 장려하지 않아도 현명한 자가 자연 진출하게 되고 압력을 더하지 않아도 나쁜 자는 저절로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수(隋) 나라 때의 임시 편법을 폐지하고
옛날의 좋은 제도를 회복한다면 재능 있는 여러 인사들이 다 자기에게 적합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니 국가의 가장 다행한 일로 될 것입니다" 하였다.[심기제(沈旣濟)가 또 말하기를
"근세로 내려오면서 관직과 녹봉 제도가 나쁘게 된 지 오래 되었었다. 그 나쁘게 된 원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네 가지 지나친 것[四太]'에 있을 뿐이라고 본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벼슬할 자리가 지나치게 많은 것, 귀족의 집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 녹봉에서 나오는 이익이 지나치게 후한 것, 책임을 추궁하는 법이 지나치게 경한 것이 그것들이다.
이것을 옛날 제도에 고증하여 증명하겠다. 『관자(管子)』 『관자(管子)』：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저명한 정치가 관중(管仲)이 저작한 서적명.

에 이르기를 '이익이 외곬에서 나오는 나라는 당적할 수 없는 것이며 이익이 두 군데서 나오는 나라의 군대는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며 이익이 세 군데에서 나오는 나라는 군대를 동원할
수 없는 것이며 이익이 네 군데에서 나오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하였다. 옛날 어진 국왕들은 이런 원인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익을 추궁하는 길을 막아서 그들로 하여금 놀고먹는
일이 없이 한 직업에 일정하게 종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근세로 내려오면서부터는 녹봉과 이익이 나오는 데가 수백 군데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면 다 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출되는 데가 많아서 관할할 수가 없게 된다. 대체 벼슬하는 자가 많으면 농사하는 사람과 장인이 더 적어지는 것이며 농사하는 사람과 장인이 적어지면 물화가 부족해지는 것이며 물화가
부족해지면 나라가 빈궁하게 되므로 벼슬할 자리가 지나치게 많다고 한다. 『예기』에 이르기를 '천자의 맏아들도 선비이므로 천하에는 막 나서 귀한 자가 없다' 하였다. 이로 보면
태자와 같이 존귀한 사람도 처음에는 평민과 같은 것이었다. 한나라 왕양(王良)이 대사도(大司徒) 벼슬을 사직하고 자기의 고향 난릉(蘭陵)으로 돌아갔었는데 후일 광무제(光武帝)가
순행하다가 그의 자손에게 읍(邑)에서 받는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로 보면 정승[丞相]의 아들에게 호별로 받는 부역을 면제해 주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로
내려오면서부터는 9품 관직에 있는 자의 집에서 부역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귀족 자제들은 국가의 음사(蔭仕)와 표창을 받으며 평시에도 모두 사람을 부려먹으면서 가만히 앉았으니
백성이 어떻게 견디어 나겠는가? 그러므로 귀족 집에 대하여 지나치게 우대한다고 말한다. 옛날 어진 임금들이 관직 제도를 제정한 것은 정치 사업을 하려는 것이었으며 녹봉 제도를
설정한 것은 관리로 하여금 농사를 지을 대신에 먹고 살게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농민, 상인, 장인들은 자기 직업에 종사하여 노력으로 제공하는 의무가 있으며 선비가 혹 도덕과
의리로써 교양하거나 평민으로부터 귀하게 되거나를 불문하고 그가 겪는 고락과 이해관계가 농민, 장인, 상인과 같아서 그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았었다. 그러나 후세의 선비들은 풍악을
잡히고 별장을 지어서 극단이 향락 생활을 하고 있으나 농민과 장인은 볼기와 등에 매를 맞고 근육노동을 하여 관리들의 생활을 부유케 한다. 그러므로 벼슬자리를 얻은 자는 신선이나 된
것처럼 편하게 살지마는 벼슬을 하지 못한 자는 샘에 빠진 것처럼 되었으니 그들의 환희, 안락과 근심, 고통의 관계는 천지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대체 윗사람을 부유하게 만들려면
백성에게서 세금을 많이 받아야 한다. 또 부유하게 받들어 주면 윗사람은 자기의 욕심나는 것을 노리고 있으며 받아 가는 세금이 많으면 백성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나쁜 인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 하며 간계를 꾸려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되니 이는 그들이 이익만을 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들의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녹봉에서 나오는 이익이 지나치게 많다고 말한다. 『논어』에 이르기를 '자기의 재주와 능력을 고려하고 자기의 관직에 맞추어 보아서 자신심이 없으면 그만둔다' 하였고
또 옛날 이응(李膺)과 주거(周擧)가 자사(刺史)로 되었을 때 지방 수령들이 그 소문을 듣고 두려워서 직인[印綬]을 던지고 도망한 자가 40여 고을의 원에 달했다고 하였다. 그
원들이 어찌 녹봉을 받아서 안락 생활하기를 싫어서 그리하였겠든가? 그러므로 한(漢)나라 때의 법은 비할 바 없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나라 때부터는 선발하는 법을
변경하여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구물구물 관직에서 박혀 있다가도 1년에 한 번씩 하는 실적고사를 추리고 4년 만에 집계하는 종합 점수만을 얻어 선발, 등용하게 되면 자기의 경력에
따라 보다 높은 관직에 임명하게 되었다.

그리 하면 소속 관속들이 열을 지어 따라다니면서 절하고 읍을 하게 되며 녹봉을 받아 축적해 두었다가 4년 만에 갈려 간다. 그 중에는 탐오로 인하여 파면당한 자도 더러 있다.
그러나 그가 파직당한 뒤에도 처자들이 화려한 생활을 하며 종이나 말도 너털너털 살이 찐다. 그래도 그는 선비측에 끼워 다니다가 기한이 지나면 또 선발된다. 이와 같이 벼슬을
그만두었다가도 또 시작하게 되어 큰 죄에만 범하지 않는 이상에는 죽는 날까지 관직을 그만두지 않기 때문에 속담에 '사람이 벼슬을 하게 되면 죽었다 살아나는 것과 같이 아주 막장을
보고도 도로 해먹지 않는 놈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벼슬하기가 이렇게 쉬우며 주는 녹봉이 이렇게 후하며 상부의 법령이 이렇게 관대하며 백성에게 받아 가는 세액이 이렇게 많거니
어느 누구가 저에게 손해될 일을 하면서 이익으로 될 일을 마다하랴? 그러므로 책임을 추궁하는 병령이 지나치게 경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관리의
녹봉을 정하게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중하게 추궁하여 벼슬자리를 비어 두고 직인[印]을 옆에 놓아두었더라도 그가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면 감히 받지 못하고 읍(揖)하고 사양한 뒤에
마지못해서 받게 해야 한다고 본다. 또 백성에게 세와 부역을 감해 주어서 각자 자기 고향에서 편안히 살게 하며 농민, 상인, 여러 장인들이 각자 자기의 직업에서 낙을 붙여 살게
하면 아무리 벼슬을 하라고 권고하더라도 쉽사리 접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벼슬 자리만을 노리는 선비들이 자연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책임을 추궁하는 법을 엄격하게 하지
않으며 백성에게 세와 부역을 경감해 주지 않고 어떤 법률이나 술책으로써 덮어 놓고 사람들의 농간과 허위를 금지하려 한다면 이는 한 줌 흙으로 흐르는 물을 가로 막는 것과 같아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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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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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漢以後任官之法周禮 太宰以八法治官府 一曰官屬 以擧邦治. 鄭司農曰"官屬 謂六官 其屬各六十. 若今博士ㆍ太史ㆍ太宰ㆍ太祝ㆍ太樂 屬太常也."二曰官職 以辨邦治. 官職謂六官所治之事.三曰官聯
以會官治. 官聯謂國有大事 一官不能獨供則六官 聯事通職 相佐助也. 四曰官常 以聽官治. 官常謂各自領其官之常職 非聯事所供. 五曰官成 以經邦治. 官成謂官府之成事品式. 六曰官法 以正邦治.
官法謂職所主之法度. 七曰官刑 以糾邦治. 八曰官計 以弊邦治. 官計謂三年則大計羣吏之治而誅賞之. 弊斷也.以八則治都ㆍ鄙 二曰法則 以馭其官. 法則其官之制度. 三曰廢置 以馭其吏. 廢其不能者
擧賢而置之. 四曰祿ㆍ位 以馭其士.祿 俸也. 位 爵次也.以八統詔王馭萬民 三曰進賢. 有德者 進任之. 四曰使能. 有才者 使用之. 七曰達吏.謂察擧勤勞之在下位者.夏官司士 掌羣臣之版 羣臣之名
皆書之版.以治其政 令歲登下其損益之數 損益 謂用功過黜陟者. 其數有多寡 每歲 登之下之也. 辨其年歲與其貴賤 周知邦國都家縣鄙之數ㆍ卿大夫士庶子之數 以詔王治 以德詔爵有德者 告于王而爵之.
以功詔祿 有功者 告于王而祿之. 以能詔事 有才能者 告于王 俾以治事. 以久奠食. 食 廩也 以仕事之久而定之.按王制曰"司馬論進士之賢者 以告于王而定其論 論定然後官之 任官然後爵之
位定然後祿之."故凡士之進於司馬者 司士掌其名數之版. 後世則屬之吏部 文選所掌者 卽其事也. 古今官制 不同而其事則一也.○漢制 郡國守相之高第者然後 爲二千石 二千石之有治行者然後 爲九卿
九卿之稱職者然後 爲御史大夫. 是以有爲郎十年 不得調者 有三世不徙官者 蓋未有資格之限也. 其郡國之官 漢獨爲置守相 其他皆自署置. 又調屬僚及部人之賢者 擧爲秀才ㆍ廉吏而貢於朝廷.○文帝二年
詔擧賢良方正之士. 十五年 詔諸侯王ㆍ公卿ㆍ郡守 各擧賢良.○宣帝時 諫議大夫王吉 上言曰"今使俗吏 得任子弟 子弟以父兄任爲郎.率多驕傲 不通古今 至於積功理人 無益於人. 宜明選求賢
除任子之令."○宣帝 拜刺史守相 輒親見問觀其所由 退而考察所行以質其言 有名實不相應 必知其所以然. 嘗稱曰"庶民所以安其田里 而無歎息愁恨之心者 以政平訟理也 與我共此者
其惟良二千石乎!"以爲"太守吏民之本 數變易則下不安. 民知其將久 不可欺罔 乃服從其敎化."故二千石 有治理效 輒以璽書勉勵 增秩賜金. 或爵至關內侯 公卿缺則選諸所表 以次用之. 是故漢世良吏
於斯爲盛. 宣帝嘗詔曰"穎川太守黃覇 宣布詔令 百姓向化 孝子ㆍ弟弟ㆍ貞婦ㆍ順孫 日以衆多. 田者讓畔 道不拾遺 養視鰥寡 贍助貧窮. 獄或八年 無重罪囚 吏民向于敎化 興于行誼 可謂賢人君子矣
其賜爵關內侯."後徵爲太子太傅 遷御史大夫. 其興良賞賢如此.○元帝時 詔列侯擧茂材. 諫議大夫張勃 擧大官獻丞陳湯 湯有罪 勃坐削戶二百 會薨 賜謚曰繆侯 以其所擧不得人 故加惡謚.其爲勸勵也如是.
故自文景之世 官得其材 位必久安. 爲吏者長子孫 居官者以爲姓號 三代以降斯爲隆盛.○成帝建始中 初置尙書五人 掌章奏 一曰常侍曹 主公卿事 其餘各分爲四曹. 至後漢光武時 改常侍曹 爲吏部曹
主選擧. 其時選擧 於郡國屬功曹 於功府屬東西曹 於天臺屬吏部曹 吏部之制 始肇於此. 成帝置尙書五人 一爲僕射 四分爲四曹 掌通章奏 一曰常侍曹 主公卿事. 二曰二千石曹 主郡國事. 三曰民曹
主吏民上書. 四曰主客曹 主外國事. 又置三公曹 主斷獄事 是爲五曹. 至光武 改常侍曹 爲吏部曹主選擧 並民曹二千石等曹 通爲六曹. 是時尙書雖有曹名 不以爲號. 至靈帝 以侍中梁鵠 爲選部尙書
始有曹名. 魏改選部 爲吏部 專掌選擧 尙書事權益重. 晉ㆍ宋ㆍ齊ㆍ梁 皆有六尙書. 自魏ㆍ晉 授吏部者曰吏部尙書 班序常遵諸尙書 直云尙書.○後漢順帝時 左雄上疏曰"寧民之道 必在用賢 用賢之道
必存考黜. 古者建侯親民 民用和穆 秦滅六國 剗革五等. 大漢受命 雖未復古 然蠲苛救弊 悅以濟難. 至於文ㆍ景 天下康乂 誠由寬靖克愼官人故也. 吏數變易則下不安業 久於其事則民服敎化. 今俗浸彫弊
令長數易 各懷一切 莫慮長久 臣愚以爲守相長吏 有顯效者 可就增秩 勿使移徙 非父母喪 不得去官. 其鄕部親民之吏 皆用儒生淸白任. 從政者 寬其負筭 增其秩祿 吏職滿歲 乃得辟擧."○蜀漢昭烈崩
諸葛亮秉政 懲惡擧善 量材授任 不計資叙. 時犍爲郡守李嚴 以楊洪爲功曹 嚴未去郡而洪已爲蜀郡守. 洪門下書佐何祗有才策 洪未去郡而祗已爲廣漢郡守. 後李嚴ㆍ廖立 皆得罪於亮 或廢或徙. 聞亮卒
垂泣發疾 以至於死也.○曹魏時 俗尙文藝 明帝深疾浮華之士 詔吏部尙書廬毓曰"選擧勿取有名 名如畫地作餠 不可啖也."毓對曰"名不足以致異人 而可以得常士 常士畏敎慕善然後有名 非所當疾也.
愚臣旣不足以識異人 又主者 正以循名案常爲職 但當有以驗其後耳. 古者敷奏以言 明試以功. 今考績之法廢 而以毁譽爲進退 故眞僞渾雜 虛實相蒙." 帝納其言 令散騎常侍劉邵 作考課法 欲行之
羣臣多異議 竟不行. 時人士多務進趨 廉遜道缺. 劉寔乃著崇讓論以矯之曰"古者聖王之化天下 所以貴讓者 欲以出賢才 息爭競也. 夫人情 莫不皆欲己之賢 故勸令讓賢以自明賢 豈假讓不賢哉? 故讓道興
賢能之人 不求而自出矣. 至公之擧 自立矣 百官具任 爲百官之副亦先具矣. 一官缺 擇衆官所讓最多者 而用之 審之道也. 在朝之士 相讓於上 草廬之人 咸皆化之推能讓賢之風 從此生矣. 爲一國所讓
則一國士也 天下所共推 則天下士也 推讓之風 行則賢與不肖殊矣. 此道之行 賢人相讓於朝 大才之人 恒在大官 小人不爭於野 天下無事矣. 以賢才化無事至道興矣. 孔子曰'能以禮讓
爲國乎則不難也.'在朝之人 不務相讓久矣 天下化之. 自魏以來 登進辟名之士及縣在職之吏 臨見授叙 雖自辭不能 終莫肯讓有勝己者矣. 推讓之風息 爭競之心生 議者 僉言'世小高名之才 朝廷未有大才之人
可以爲大官者.'山澤小人官吏 亦復云'朝廷之士雖大官 名德皆不及往時人也.'余以爲此二言者 皆失之矣. 非時獨乏賢也 時不貴讓. 一人有先衆之稱 毁必隨之 名不得成 使之然也 雖令稷契復存
亦不復能全其名矣. 能否混雜 優劣不分 士無素定之價 官職有闕 任選之吏 不知所用 但按官次而擧之. 同才之人 先用者 非勢家之子則必爲有勢者之所念也. 非能獨賢 因其先用之資 而復遷之無已
不勝任之病發矣. 所以見用不息者 由讓道廢 因資用之 人有得失矣. 故自漢魏以來 時開大擧 令衆官 各擧所知 唯才所任 不限階次. 如此者數矣 其所擧必有當者 不聞時有擢用 不知何誰最賢故也.
所擧必有不當者 而罪不加 不知何誰最不肖也. 所以不可得知 由當時之人 莫肯相推 賢愚之名 不別也. 擧者知在上者察不能審 故敢慢擧而進之 才高之士 馳走於有勢之門日多 雖國有典刑 不能禁矣.
夫讓不興之弊 非徒賢在下位 不得時進也 國之良臣荷重任者 亦將以漸受罪退矣. 何以知其然也? 孔子以爲'顔氏之子 不貳過矣.'明非聖人 皆有過. 寵貴之地 欲之者多矣 惡賢能 塞其路
過而毁之者亦多矣. 夫謗毁之生 非徒空說 必因人之微過 而甚之者也. 毁謗之言數聞 在上者雖欲不納 不能不投所聞 因事之來 而微察之. 察之無已 其驗至矣 得其驗安得不治? 於是 受罪退者稍多
大臣有不自固之心. 夫賢才不進 貴臣日踈 此有國者之深憂也 竊以爲改此俗甚易耳. 夫一時在官之人 雖雜有凡猥之才 其中賢明者亦多矣 豈可謂皆不知讓賢爲貴邪? 直以時皆不讓 習以成俗 故不爲耳.
人臣初除 皆通表上聞 名之謝章 所由來尙矣. 原謝章之本意 欲進賢能 以謝國恩也. 昔舜以禹 爲司空 禹拜稽首 讓于稷契及咎繇 使益爲虞官 讓于熊羆 使伯夷典三禮 讓于夔龍 唐虞之時 衆官初除
莫不皆讓也. 謝章之義 蓋取於此 書記之者 欲以永世作則. 季世所用 不能讓賢 虛謝見用之恩而已 相承不變 習俗之失也. 夫叙用之官得通章表者 其讓賢推能 乃通其章 其不能有所讓 徒費簡紙者
皆絶不通. 人臣初除 各思推賢能而讓之矣. 讓文付主者掌之. 三司有缺 擇三司所讓最多者而用之 此謂一公缺 三公已先選之矣. 且主選之吏 不必任公而選三公 不如令三公 自共選一公爲詳也. 四征缺
擇四征所讓最多者而用之 此謂一征缺 四征已先選之矣. 必詳於停缺而令主者 選四征也. 尙書缺 擇尙書所讓最多者而用之. 此爲令諸尙書共選一尙書 詳於臨缺 令主者 選出尙書也. 郡守缺
擇衆郡所讓最多者而用之 詳於任主者 此爲令百郡守 共選一郡守也. 夫以衆官百郡之讓與主者共相比 不可同歲而論也. 賢愚皆讓 百姓耳目 盡爲國耳目. 夫人情爭則欲毁己所不如 讓則競推於勝己
故世爭則毁譽交錯 愚劣不分 難得而讓也. 夫貴讓則賢知明出 能否之美 歷歷相次 不能亂也. 當此時也 能退身修已者讓之者多矣 雖欲守貧賤不可得也. 馳騖進取而欲人見讓 猶却行而求前也. 夫如此
愚智咸知 進身求通 非修之於己 則無由進矣. 遊外者於此相隨而歸矣. 浮聲毁論 不禁而自止矣. 人無所用其心 任重人議 而天下自化 讓可以致此 豈可不務之哉?"○晉武帝時 却詵對策曰"人能弘政
非政弘人. 臣竊觀古今 而考其美惡 古人相與求賢 今人相與求爵. 古之官 人君責之於上 臣擧之於下 得其人有賞 失其人有罰 安得不求賢乎? 今之官者 父兄營之 親戚助之 有人事則通 無人事則塞
安得不求爵乎? 賢苟可達 達在備道 窮在失義 故靜以待之也. 爵苟可求 得在進取 失在後時 故動以要之也. 動則爭競 爭競則朋黨 朋黨則誣罔 臧否失實 眞僞相冒 主聽用惑 姦之所會也. 靜則貞固
貞固則信讓 信讓則推賢 推賢不伐 相下無饜主聽用察 德之所趣也. 故能使之靜 雖高枕而人自正 不能禁動 雖復憂勤 俗不一也. 今世宦者無關梁 邪門啓矣. 朝廷不責賢 正路塞矣. 所謂責賢 使之相擧也
所謂關梁 使之相保也. 賢不擧則有咎 保不信則有罰. 故古者諸侯 必貢士 不貢者削 貢而不適亦削 今則不然 世之悠悠者 各自取辨耳. 故其材行並不可必 於公則政事紛亂 於私則汚穢狼藉.
自頃長吏特多此累 貪鄙竊位 不知誰升之者. 虎兕出檻 不知誰可求者 漏網呑舟 何以過此. 人之於利 如蹈水火焉 前人雖敗 後人復起 如彼此無已 誰止之者? 風流日競 誰憂之者? 雖今聖思
勞於夙夜所使爲政 恒得此屬 欲化美俗平 亦俟河之淸耳. 若欲善之 宜創擧賢之典 峻關梁之防 其制旣立則人愼其擧而不苟. 卽賢者可知 知賢而試 則官得其人矣. 官得其人則事得其序 而物得其宜 生生豐殖
而和樂興焉. 是故寡過以遠刑. 知恥以近禮. 此所以移風易俗 建不刊之統也."○武帝時 始平王文學李重 以其時等級繁多 又外官輕而內官重 使風俗大弊 宜釐改 重外選簡階級. 乃上議曰"古之聖王
建官垂制 所以體國經野 自帝王以下 代有增損. 舜命九官 周分六職 秦釆古制 漢仍秦舊 倚丞相 任九卿. 雖置五曹尙書令ㆍ僕射之職 始於掌封奏 以宣內外事 任尙輕. 而郡守牧人之官重 故漢宣
稱所與爲理 唯良二千石. 其有殊政者 或賜爵進秩 諒得爲治大體 所以遠比三代也. 及于東京 尙書雖漸優重 然令僕出爲郡守 便入爲三公 虞延ㆍ第五倫ㆍ桓虞ㆍ鮑昱是也. 近自魏朝 名守杜畿
滿寵ㆍ田國讓ㆍ胡質等 居郡或十餘年 或二十年 或加秩假節 而不去郡. 此亦古人 苟善其事 雖沒世不徙官之義也. 漢魏以來 內官之貴 於今最崇而百官等級 遂多 遷補ㆍ轉徙如流 能否無以著 黜陟不得彰
此爲治之大弊也. 夫階級繁多而冀官久 官不久而冀治 功成不可得也. 虞書云'三考黜陟幽明.'周官三年大計羣吏之治 而行其誅賞. 漢法 官人或不寘秩. 魏初用輕資以先試. 守臣以爲大幷羣官等級 使同班者
不得復稍遷. 又簡法外議罪之制則官人之理盡 士必量能而受爵矣. 居職者日久 政績可考 人心自定 務求諸已也."帝雖善之 竟不能行.○齊左僕射王儉 請解領選 謂楮彦回曰"選曹之始 近自漢末. 今若反古
使州郡貢 計三府辟士與衆共之 猶賢一人之意. 古者選衆 今則不然 奇才絶 智所以見遺於草澤也."彦回曰"誠如卿言 但行之已久 卒難爲改也."○齊時 官人不覈才德 以官婚胄籍爲先 令甲族以二十登仕後門
以三十試吏. 梁因齊舊 而又令九品 分爲十八班. 陳因梁制 凡選無定時 隨缺卽補. 官有淸濁 以爲升降 從濁得淸則勝於選. 凡有遷授 吏部先爲白牒 列數十人名 尙書與參掌者 共署奏勑 或可或否
其可者則下於選曹 量貴賤ㆍ別內外隨才補用 以黃紙錄名入座 通署"奏可"乃出 以付於典名 典名 書其名帖鶴頭板 選所授之家. 其別發詔除者 卽宣付詔局. 詔局草奏聞勑可 黃紙寫出門下 門下答詔
請付外施行 又書"可"付選司行名. 得官者不必皆行名到 但聞詔出 明日卽入謝. 初武帝 承侯景喪亂之後 綱維頹壞 制度未立 百官無復考校殿最之法. 但更年互遷 驟班進秩 法無可紀者.○後魏崔亮
爲吏部尙書 乃奏爲格制 不問賢愚 專以停解日月爲斷. 薛淑上言"黎元之命 繫於長吏 若取年勞 不簡賢否 執簿呼名 一吏足矣 何謂銓衡?"書奏不報 魏之失人 自亮始. 詳見選擧考說.胡氏 致堂
曰"聖帝明王 代天理物 莫急於求賢才而任使之. 今夫抱 關者啓閉必以時 擊柝者晨夕必有節. 爲委吏而會計不當 則蓄積缺矣. 爲乘田而牛羊不息 則芻牧缺矣. 是皆小役細務 猶不可任非其才.
若夫環百里而爲縣 縣有令 環數百里而爲州 州有守 所統凡幾民 所治凡幾事 乃不選擇勝其任者畀之 而付諸年格? 夫天下之善人少 不善人多 才者無幾 不才者皆是也. 不問其才 專以停解日月爲斷
是賢能ㆍ庸繆ㆍ姦凶之人 相爲升降以率會之 賢能不能十一 其九皆民之蠹也. 自崔亮制年格後 世襲以爲常 更明君碩輔亦衆矣 而終莫之改 何也? 其意以謂 任人則易以私 任法則易以公. 人不常得
不若一付之法 猶爲善也. 審如是而善 則吏部一司 不必置尙書ㆍ小宰及諸郎吏 第如薛淑之言 委之胥吏 按籍呼名 魚貫而進 何不可之有? 故善爲天下者 建官惟賢 位事惟能 而從以信賞必罰
則太平可坐而致也."○杜佑通典曰"昔三代以前 天下列國 有三卿ㆍ五大夫ㆍ二十七士. 大國三卿 二卿命於天子 一卿命於其君. 小國三卿 一卿命於天子 二卿命於其君. 公侯伯之大夫再命. 子男之大夫一命.
其士以下不命 皆國君專之. 漢初 王侯國百官 皆如漢朝 惟丞相ㆍ太傅 命於天子 其御史大夫以下皆自置. 及景帝 懲吳楚之亂 殺其制度 罷御史大夫以下官. 至武帝 又詔凡王侯吏職秩二千石者 不得擅補.
其州郡佐吏 自別駕ㆍ長史以下 皆刺史ㆍ太守自辟 歷代因以不革. 洎北齊武平中 後主失政 多有佞倖 乃賜其賣官 分占州郡 下及鄕官 多降中旨 故有勑用州主簿ㆍ郡功曹者. 自是之後 州郡辟士之權
浸移於朝廷 外吏不得精覈 由此起也. 至隋 海內一命以上之官 咸歸吏部所掌 而州郡無復辟署矣.自後魏末 北齊以來 州郡僚佐 多爲吏部所授 至隋 一切歸在省司. 牛弘爲吏部尙書 選擧先德行次文才
最爲稱職. 弘嘗問於劉炫曰'周禮 士多而府史少 今令ㆍ史百倍於前 減則不濟 其故何也?'炫曰'古人委任責成 歲終考其殿最 按不重校 文不繁悉 府史之掌要目而已. 今之文簿 恒慮覆理 鍛鍊甚密
萬里追證百年舊案 故諺云 老吏抱案死 古今不同. 若此之相懸也. 事繁政弊 職此之由.'弘又問'魏齊之時 令史從容而已 今則不遑寧處 其事何由?'炫曰'往者 州唯置綱紀 郡置守ㆍ丞 縣置令而已
其餘具僚則長官自辟 受詔赴任 每州不過數十. 今則不然 大小之官 悉由吏部纖介之迹 皆屬考功 所以繁也. 省官不如省事 省事不如淸心 官事不省而欲從容 其可得乎?'弘甚善其言 而不能行. 又曰唐虞以來
遷官必以九載. 周制亦然 其訓曰三歲而小考其功也. 小考者正職而行事也. 九歲而大考有功也. 大考者 黜無職而賞有功也. 魏晉以後 皆以六周爲滿. 唐因隋制 爲四周 後又減爲三周." 一歲一考
唐因隋制. 四考有替則爲滿 若無替則五考而罷. 至德之後 天下多亂 兼試員外等官倍多正員. 廣德以來 復令官以三考而代 無替 四考而罷.○唐制 凡五品以上 制勑命之
諸王及正三品以上及文武散官及都督ㆍ都護ㆍ上州剌史之在京師者 臨朝冊授 冊用竹簡 書用漆. 皆宰相商議進擬. 六品以下 旨授吏部銓材署聞.其視品及流外官判補之. 文官屬吏部 武官屬兵部 謂之銓選.
凡吏ㆍ兵部 文ㆍ武選事 各分爲三銓 尙書典其一 侍郎分其二. 其選人之法有四 一曰身 取其體貌豐偉. 二曰言 取其言詞辨正. 三曰書取其楷法遒美. 四曰判取其文理優長. 四事 皆可取則先德行 德均以才
才均以勞. 其六品以下 集而試之 計資量勞而擬其官. 五品以上不試. 凡選始集而試 觀其書判 已試而銓察其身言 已銓而注集 衆唱示之. 其兵部武選亦然. 取其軀幹雄偉 應對詳明
有驍勇才藝及可爲統帥者. 詳見選擧考說.○太宗時 馬周上書曰"百姓所以治安 唯在守令. 自古郡守ㆍ縣令皆抄選賢德 欲有擢升 必先試以臨人 或從二千石入爲宰相. 今朝廷獨重內官 縣令ㆍ刺史 唐改太守
爲刺史. 頓輕 其選刺史 多是武夫ㆍ勳人或京官不能職方始出外. 而折衝ㆍ果毅之內 身材强壯者 先入爲中郎將 其次始補州任 邊遠之處 用人更輕. 其才堪宰涖 以德行見擢者 十不能一 百姓未安
實由於此也."○高宗時 魏玄同 以吏部選擧未盡得人之術 上疏曰"昔之列國 卽今之郡縣. 士無常君 人有定主 自求臣佐 各選英賢 大臣乃命於王朝耳. 秦幷天下 罷侯置守 漢氏因之 有沿有革
諸侯得自置吏四百石以下 其傅ㆍ相大官則漢爲置之 州郡椽吏ㆍ督郵ㆍ從事 悉任之於牧守. 爰自魏晉 始歸吏部 處相因循 以迄于今 以刀筆求才 以簿書察行 法之弊久矣. 蓋君子重因循而憚改作 有不得已者
亦當運獨見之明 定卓然之儀. 如今選司所行者 所宜遷革 實爲至要 何者? 天下之大 士人之衆而委之數人之手 假使平如權衡 明如水鑑 力有所極 照有所窮. 况比居此任 時有非人 而徇於勢利者哉? 周穆王
命伯冏 爲太僕正曰'愼簡乃僚.'太僕正 中大夫耳 尙以僚屬 委之則三公ㆍ九卿亦然矣. 周禮 太宰ㆍ內史 並掌爵祿 廢置司徒. 司馬別掌興賢詔事 當是分任於羣司 而統之以數職
各自求其小者而王命其大者也. 昔區區宋朝 尙爲裵子野所歎 見選擧考說. 况於當今乎? 且夫從政莅官 不可以無學 學古入官 議事以制. 古者雖象賢繼及 所謂胄子 必裁諸學 修六禮以節其性 明七敎以興其德
必以材升然後出仕. 今貴戚子弟 門閥有素 資蔭自高 例早求仕 輕試廢學 良足惜也. 又勳官三衛流外之徒 不待州縣之擧 直取之於書判 恐非先德行 而後才藝之義也."疏奏不納. 後玄同又上疏曰"竊見制書
每令三品薦士 下至九品 亦令擧人 此聖朝側席旁求之意也. 但以褒貶不甚明 得失無大隔故 人上不憂黜責 下不盡搜揚 苟以應命 莫愼所擧. 且惟賢知賢 階秩雖同 人才異等 身且濫進 鑑豈知人?
今欲務得實才 先宜擇其擧主 流淸以源潔 影端由表正 不詳擧主之行能 而責擧人之庸濫 不可得也."○高宗 嘗列侍臣 責以不進賢良. 宰相李安期 進曰"聖帝明王 莫不勞於求賢 逸於任使 且十室之邑
必有忠信 况天下至廣 豈無英彦? 但比來 公卿有所薦引 卽遭囂謗 以爲朋黨. 淹屈者未伸 而在位者已損 所以人思苟免 競爲緘默. 若陛下虛已招納 務於搜訪 不忌親讎唯能是用 讒毁不入 誰不竭誠.
此皆事由陛下 非臣等所能致也."帝深然之.○高宗時劉祥道 疏論選擧之弊. 又奏曰"唐虞三載考績 三考黜陟幽明. 兩漢用人 亦久居其職 所以因官命氏 有倉庾之姓. 魏ㆍ晉以來事無可紀. 今之在任
四考卽遷官 人知將秩滿 豈無去就? 百姓見官人遷代 必懷苟且. 以去就之人 臨苟且百姓 責其移風易俗 必無得理. 請四考依選法 就任所加階 至八考滿然後聽選 還淳反朴 雖未敢期 送故迎新
實減其勞擾."○中宗神龍中 廬懷愼 上疏曰"臣聞孔子曰'爲邦百年 可以勝殘去殺.'又曰'苟有用我者 期月而已 三年有成.'故書云'三載考績.'校其功也. 子産賢者也 其爲政 尙累年而成化 况其常材乎?
竊見比來州縣官佐 下車布政 有多者一二年 少者三五月 遽卽遷除 不論課考. 或歷時未改 便傾耳而聽 企踵而覩 爭求冒進 不顧廉恥 亦何暇宣風布化 求瘼恤人哉? 戶口流散 百姓凋弊 職爲此也. 何則?
人知吏之不久 則不從其吏 吏知遷之不遙 又不盡其能 偸安苟且 脂韋而已. 又古之爲吏者 長子孫 倉氏ㆍ庾氏 卽其後也. 臣請都督ㆍ刺史ㆍ上佐ㆍ兩畿縣令等 在任未經四考 不許遷除. 察其課効尤異
或錫以車裘 或就加祿秩 或降使臨問 拜璽書慰勉. 若公卿有闕則擢以勤能. 政績無聞 抵犯貪暴者 放歸田里 以明賞罰. 致理救弊 莫過於此."○玄宗開元二年 詔"三省侍郎闕 擇嘗任刺史者 郎官闕
擇嘗任縣令者."又制"選京官有才識者 除都督ㆍ刺史. 都督ㆍ刺史有政迹者除京官 使出入常均 永爲恒式."因張九齡之言也. 時 九齡爲左拾遺 上書曰"元元之衆 莫不懸命於縣令 宅生於刺史
此其尤親於人者也. 是以親人之任 宜得賢才 用人之道 宜重其選. 而今刺史ㆍ縣令 多非其才 京官之中 爲州縣者 或是緣身有累 在職無聲 用於牧守 以爲斥逐之地. 至於武夫 流外積資而得成於經久
不許其才 如此而欲天下和洽 不可得也. 古者 刺史入爲三公ㆍ郎官 出宰百里. 臣竊怪近俗 偏輕此任. 今朝廷卿士 入而不出 其於私計 甚自得也. 京師 衣冠所聚 聲名所出 從容附會 不勤而成.
一出外藩有異於是. 是大利在內而不在外也. 莫若重刺史ㆍ縣令. 凡不歷都督ㆍ刺史 雖在高第 不得任侍郎列卿. 不歷縣令 雖有善政 不得任臺郎給舍. 雖遠處都督ㆍ守令 亦以爲出入. 不十年任京職
又不十年任外. 如不爲此 而救其失積 習爲常 遂其私計 天下不可爲也. 又古之選用賢良 取其稱職 或遙聞而辟召 或一見而任之 是以 士修素行 不圖僥倖. 今天下未理而事務日倍 誠以不正其本
而設巧於末也. 所謂末者吏部條章動盈千萬 刀筆之吏 辨析毫釐 節制搶攘 溺於文墨. 臣以爲始造簿書 以備人之遺忘耳. 今反求精於案牘 不急於人才 亦何異遺劍中流 而刻舟以記 去之彌遠? 可爲傷心.
凡稱吏部之能者則曰'從縣尉與主簿 從主簿與縣丞.'斯選曹知文而善知官次者也. 唯據其合與不合 而多不論賢與不肖 豈不謬哉? 陛下若不以吏部尙書ㆍ侍郎爲賢 必不授之以職. 旣以賢而授委 豈復不能知人?
人之難知雖自古所愼 而拔十得五 其道可行. 今則據資配職 自以爲能爲官擇人 初無此意 故使時人有平配之議 官曹無得才之實. 臣以爲選部之弊 在不變法 變法甚易 在陛下渙然行之而已."
九齡又曰"若刺吏ㆍ縣令 精覈其人 卽每年管內 應有合選之人 令考其才行然後送臺. 臺又推擇 據所用之多少 爲州縣之殿最. 一則縣令 愼於所擧 必取人才. 二則吏部 因其有成無多庸冒. 今每歲選者
動以萬計 京師米物 爲之空虛. 冒濫至此而欲仍舊致理 難於改制則只益法令煩碎 賢愚混雜耳. 就中以一詩ㆍ一判 定其是非 適使賢人ㆍ君子 從此遺逸. 斯乃明代之闕政 有識之所歎息也. 又天下雖廣
朝廷雖衆 而士之明賢 誠可知也. 若使毁譽相亂 聽受不明 無復可說. 如知賢能 而不以次用之 則焉用彼相? 今每官缺時 或以下等叨進 以故時議 無賢無愚 唯論得與不得自然淸議不立 名節不修.
善士則守志而俟時 中人則躁求而易操. 朝廷若以令名進人 士子亦以修身獲利 則利之所出 衆則趍焉而已. 名利不出於淸修 所趍多歸於人事. 故其小者 苟求取得 一變而至於阿私. 其大者 許以分義
再變而成朋黨 此皆敎化漸漬使之然也. 故用人之際 不可不審 若賢愚有辨不可謬求 士必刻意思齊 刑政自淸 此興衰之大端 安可不察也?" ○開元十三年 玄宗以吏部選試不公 乃置十銓試人
以禮部尙書崔頲ㆍ御史中丞宇文融等十人 掌之. 試判將畢 召入禁中決定 吏部尙書侍郎 皆不得預. 吳兢表以爲陛下 曲受讒言 不信有司 非居上臨人 推誠感物之道. 昔魏明帝 嘗卒至尙書省
尙書令陳嶠蛫問曰"陛下欲何之?"帝曰"欲按行省事文簿."嶠曰"此是臣之職分 陛下非所宜臨 若臣不稱職 則就黜退."帝慙而反. 陳平ㆍ丙吉 漢家之宰相 尙不對錢穀之數 不問路死之人. 故自古
天子至於卿士 守其職分而不可輒有侵越也. 况我萬乘之君 豈得下行選試書判之事乎? 明年復故.○開元十八年 裴光庭爲吏部尙書 作循資格 賢愚一貫 必與格合 乃得銓授 限年躡級 不得踰越. 於是久淹不收者
皆便之 謂之聖書. 先是 選司注官 雖試判量資 大槪視人能否 故或不次陞遷. 或老於下位 有出身二十餘年 不得祿者. 光庭乃奏定循資格 各以罷官若干 選而集官 高者選少 卑者選多 無問能否 選滿則注.
非負譴者 有升無降. 愚庸 皆喜而才俊嗟歎.宋璟爭之不能得. 其後詔有異才高行 聽擢不次. 然有其制而無其事. 有司利其便己 但守文奉式循資例而已. 及光庭卒 大常博士孫琬 議光庭用循資格 失勸奬之道
請謚曰"克"其子訟之 改賜謚.按漢董仲舒 謂"古之所謂功者 以任官稱職爲差 非謂積日累久也."則年勞之說 漢已有之而未嘗以爲用人之法. 至後魏崔亮 唐裴光庭 始專以此立法. 其爲法也 惟文移簿籍是稽
歲月先後是據所謂銓量人物者 徒建空名而已. 先儒有言"賢才伏於下者 資格礙之也 職業廢於上者 資格率之也. 士之寡廉鮮恥者 爭於資格也 民之因於暴政虐令者 資格之人衆也 萬事之所以刓弊 百吏之所以廢弛
法制之所以頹壞而不救者 皆資格之失也."誠哉 是言也!○劉秩論曰"夫官有大小 材有短長. 長者任之以大官 短者任之以小職 職與人 相宜而功與事並理. 是以'孟公綽爲趙魏老則優
不可以爲滕薛大夫.'近之. 任官 其選之也略 其使之也備 一人之身 職無不涖 何其謬歟? 故人失其長 官失其理. 三代之制 家有世業 國有世官. 孔子曰'醫不三世 不服其藥.'史墨曰'古之爲官
世守其業 朝夕思之 一朝失業 死則及焉'是知業不世習 則其事不精 此周之所以得人也. 昔羲氏ㆍ和氏 掌天地. 劉氏世擾龍. 籍氏世司人. 庾氏ㆍ庫氏 世司出納. 制氏世司鑄鍾 卽其事也. 至後世
以世卿執柄 益私門卑公室 齊奪於田氏 魯弱於三家. 革世卿之失 而不復世業之制 醫工筮數 其道浸微 蓋爲此也. 夫裁徑尺之帛 刻方寸之木 不任左右必求良工者 裁帛刻木 非左右之所能故也.
徑尺之帛ㆍ方寸之木 薄物也 非良工不裁之 况帝王之佐 經國之任 可不審擇其人乎? 故搆大厦者 先擇匠然後擇材 理國家者 先擇佐然後守人. 大匠搆屋 必以大材爲棟梁 小材爲榱桷. 苟有所中 尺寸之木無棄
此善理木者也."○德宗初 禮部員外郎沈旣濟 上選擧議曰"夫古今選用之法 九流常叙 有三科而已. 曰德也才也勞也 而今選曹 皆不及焉. 何以言之? 吏部之本 存乎甲令 雖曰度德居官 量才授職 計勞昇秩
其文具矣. 然考校之法 皆在判ㆍ書ㆍ簿曆ㆍ言詞ㆍ俯仰之間. 侍郎非通神 不可得而知之 則安行徐言 非德也. 麗藻芳翰 非才也. 累資積考 非勞也. 苟執此不失 猶乖得人 况衆流茫茫 耳目有不足者乎?
蓋非鑑之不明非擇之不精 法使然也 文皇帝病其失而將革焉. 夫物盈則虧 法久終弊 是以 王者觀變以制法 察時而立政. 按前代選用 皆州府察擧. 及年代久遠 訛失滋深 至於齊隋 不勝其弊. 凡所置署
多由請託 故當時 議者以爲與其率私 不若自擧 與其外濫 不若內收. 是以 罷州府之權而歸於吏部 此矯時懲弊之權法 非經國不刊之常典. 今吏部之法蹙矣 復宜掃而更之 無容循默 坐守刓弊. 伏以爲
當今選擧 人未土著 不必本於鄕閭 鑑不獨明 不可專於吏部 詳度古制 折量今宜. 謂五品以上及羣司長官 俾宰臣進叙 吏部得參議焉. 其六品以下或僚佐之屬許州府辟用 則銓擇之任 悉委於四方 結奏之成
咸歸於二部. 必先擇牧守 然後授其權 高者先署而後聞 卑者聽板而不命. 其牧守ㆍ將帥或選用非公 則吏部ㆍ兵部得參而擧之. 聖主明目達聰 逖聽遐視 罪其私冒 不愼擧者 小加譴黜 大正刑典 責成授任
誰敢不勉? 夫如是則接名僞命之徒 菲才薄行之人 貪叨賄貨 懦弱姦宄 下詔之日 隨聲而廢. 通計大數 十除八九 則人小而員寬 事詳而官審 賢者不奬而自進 不肖者不抑而自退. 除隋權道 復古美制
則衆才咸得 天下幸甚."旣濟 又曰"近世以來 爵祿失之者久矣. 其失非他 在四太而已 何者? 入仕之門太多 世胄之家太優 祿利之資太厚 督責之令太薄 請徵古制以明之. 管子曰'夫利出一孔者 其國無敵.
出二孔者 其兵不詘. 出三孔者 不可以擧兵. 出四孔者 其國必亡.'先王知其然 故塞人之養 隘其利途 使人無遊事而一其業也. 而近世以來 祿利所出 數十百孔 故人多岐心 疏瀉漏失而不可轄也. 夫入仕者
多則農工益少 農工少則物不足 物不足則國貧. 是以言入仕之門 太多. 禮曰'天子之元子 士也 天下無生而貴者.'則雖儲貳之尊 與士伍同. 故漢王良以大司徒 免歸蘭陵後 光武巡幸 始復其子孫邑中徭役.
丞相之子 不得蠲戶課 而近代以來 九品之家 皆不征 其高蔭子弟 重承恩奬 皆端居 役物坐食 百姓其何以堪之? 是以言世胄之家太優. 先王制士 所以理物也 置祿 所以代耕也. 農ㆍ工ㆍ商 有經營作役之勞
而士有勤人 致理之憂. 雖風猷道義士伍爲貴 其苦樂利害 與農ㆍ工ㆍ商等 不甚相遠也. 後世之士 乃撞鍾鼓 樹臺榭 以極其歡而農工 鞭臀背 役筋力 以奉其養. 得仕者 如昇仙 不仕者 如沉泉. 歡娛
憂苦 若天地之相遠也. 夫上之奉養也 厚則下之徵斂也重. 養厚則上覬其欲 斂重則下無其聊 故非類之人 或沒死以趣上 構姦以入官 非唯求利 亦以避害也. 是以言祿利之資太厚. 語曰'陳力就列 不能者止.
昔李膺ㆍ周擧爲刺史 守令畏憚 覩風投印綬者 四十餘城. 夫豈不懷祿而安榮哉? 故漢法之不可偸也. 自隋變選法則 雖甚愚之人 蠕蠕然第能乘一勞 結一課 獲入選叙則循資授職 族行之官 隨列拜揖 藏俸積祿
四周而罷. 因緣侵漁抑復有焉. 其罷之曰 必妻孥華楚 僕馬肥腯. 而偃仰乎士林之間 及限又選 終而復始 非爲巨害 至死不出 故里語謂'人之爲官 若死然 未有不了而倒還者.'爲官如此易 享祿如此厚
上法如此寬 下歛 如此重 則人孰不違其害 以就其利者乎? 是以言督責之令 太薄. 旣濟以爲當輕其祿利 重其督責 使不才之人 雖虛設座位 置印綬于旁 揖讓而進授之 不敢受. 寬其征徭 安其田里
使農商百工 各樂其業 雖以官誘之而莫肯易. 如此則規求之士 不禁而息矣. 若不重其令 不寬其徭而欲以法術遮列 禁人奸冒 此猶坯土以壅橫流也 勢必不止也."選擧雜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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