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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직 제도 개혁에 관한 세칙[職官因革事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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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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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제도 개혁에 관한 세칙[職官因革事宜]

서울에 있는 중앙 각 기관은 다 일정한 사무 장소를 설치하고 장관으로 하여금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게 하기를 지방관의 예와 같이 할 것이요 그 밑에 소속된 모든 관리는 법령에
의하여 출근케 할 것이다.[궐내(闕內)에 있는 각 기관과 대간(臺諫) 및 군영 기타 대소 각 기관도 다 이에 준하여 실행하며 그들의 부관 이하가 1명씩 또 교대하여 수직하기를 현행
규례와 같이 할 것이다.]

살펴보건대 옛적에는 비록 승상부(丞相府)나 어사부(御史府)라도 장관들이 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았으며 그 후 위(魏)나라, 진(晉)나라 때까지 내려오면서도 그렇게 하였으니 그
법의 의의가 매우 옳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기관이 다 빈집이 되며 여관과 비슷하다. 때로는 지시가 있어서 출근하는 일이 있지마는 계속하지 못하고 그리고 다 건성건성
하다가 걷어치우고 말아 버리니 관청 체면도 차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한산하고 지체된다. 그리하여 지어 지방에서 공문을 가지고 온 사람도 공연히 묵고 있게 되어서 필경
하인에게 뇌물이라도 쓰지 않고는 관원을 만나볼 수가 없게 되니 모든 일에 미치는 폐해를 다 말할 수 없다. 경기 감사(監司)까지도 역시 감영에 있지 않고 사택에서 사무를 처리하니
그 폐해가 더 한층 심하다.

비변사(備邊司)를 없애고 정부 의정이 정부에서 처결하던 제도를 회복할 것이다.[선왕 때에는 의정[宰相]이 매일 정부에 출근하여 각 기관의 직무를 전부 영도하였다. 만일 회의할
사건이 있을 때에는 육조(六曹)에서도 함께 출석하게 하며 혹 빈청(賓廳) 빈청(賓廳)：조선시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정무를 처리하던 집.

에서 회의하여 결정하기도 하였고 여러 기관이 왕에게 뵈옵고 보고할 일이 있을 때에도 거의 다 정부에서 하였다. 비변사는 명종(明宗) 을묘(乙卯)년에 창설한 것이다. 그 때 국경
지대에 발생한 외적의 침입 사건이 있어서 설치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외 대소사를 다 비변사에게 처결하게 되어 정부가 한 유령 기관[影職廳]과 같이 되어 버렸다. 관청 규율이
이렇게 질서를 잃게 되니 그 폐해가 막심하다. 그러므로 응당 비변사를 혁파하여 정부에서 처결하는 제도를 회복해야 한다.]

각 기관의 제조(提調)를 없앨 것이다.[각 기관 제조를 없애고 그 장관에게 전임시켜 성과를 거두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 왕에게 구두로 보고하여 결재를 받을 것이나 혹 서면으로
보고하여 해결하게 될 것은 그 소속 판서(判書)에게 말하여 처리하게 할 것이며 판서가 사고가 있을 경우에는 그 차석 당상관(堂上官)이 대리할 것이다.]

지금 각 기관에 모두 제조를 두었는바 매개 기관에서 다 수명 이상의 인원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모든 기관에는 각각 그 기관의 장관이 있고 또 모든 기관은 다 6조에 통활되어
있으며 6조에는 이미 판서가 여러 당상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조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더욱 번잡하게 되어 통제 상 규율이 없게 된 것이다. 지금 각 기관의 모든 일이 다
해이해지고 문부만 날로 복잡하게 되며 장관은 멀거니 앉아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 다 여기서 생겨난다. 당(唐)나라 말기로부터 있던 모든 기관의 영사(領使)란 것이 곧
이것이니 역사상으로 살펴보아도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를 알 만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제조(提調)는 실로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의사(醫司), 장악원(掌樂院), 관상감(觀象監), 사역원(司譯院) 같은 데는 그 소속 장관이 반드시 다 그
전문 학술에 정통하다 할 수 없으니 특히 여러 재상 중에서 그 방면 학식에 정통한 자를 선택하여 제조를 맡기고 동시에 이것을 영도하게 하는 것도 역시 좋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런
이론은 목전의 정황으로 본다면 매우 편리하고 좋을 듯 하나 깊이 생각해 본다면 이익은 적고 해가 많은 것이다. 대개 관리를 배치하며 사무를 부담시키는 것은 그 정신이 반드시
적임자를 얻는 데 있을 따름이다. 모든 기관의 관리를 만일 적임자를 얻어 직무를 맡긴다면 그 중에서 자연 그 장관과 교수가 서로 가르칠 수가 있고 또 때때로 성적을 고사하며 그리고
또 그 사무를 영도한다면 육경(六卿)이 될 만한 덕망이 있는 자로서 그 기술에 정통하지 못할지라도 그 기술자로 하여금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자격이 있고 또 그 직무에 꼭 진력하겠다는 성의만 있다면 자신이 그 방면의 학식에 정통하지 못할지라도 반드시 직접 남에게 배워서 성과를 달성하도록 노력할 것이니 정부에서는 응당
그에게 전적 책임을 전담시킬 뿐인 것이다. 만일 정부에서 먼저 혹 잘하지 못할가 염려하여 책임을 전담시키지 아니한다면 거기에서 생긴 폐단은 필경 상부에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나
하부에서 일을 맡는 자가 다 직무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고 임시 되는 대로 하기를 심상하게 알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제조를 둔다하더라도 어찌 그에
관한 학술을 정통한 자만이 꼭 제조로 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공연히 관청 규율만 문란하게 하고 책임을 대수롭게 여기게 될 것이니 그 해가 매우 클 것이다. 이에 관한 것을 다
말할 수 없으나 깊이 생각해 보면 자연 알 수 있을 것이다. 내약방(內藥房)에서 어용 의약[御醫藥]으로 말하여 보자 대신은 원래 모든 기관의 일을 다 영도하는 것이니 더구나 임금의
질병이나 의약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 없이 더욱 감독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경우에는 대신이 제조라고 명칭을 붙이지 않았더라도 당연히 자진하여 그 일을 감독할 것이 아닌가? 가령
남의 자식 된 자가 그 부모의 병에 대하여 어찌 반드시 의사라 약국이라는 명목을 가진 후에야 부모의 병 치료에 진력하겠는가? 이를테면 외교 문건 같은 것도 역시 대신이 정부에서
협의하여 거행하는 것이요 꼭 승문원(承文院) 제조를 겸한 후에야 그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조의 판서들은 매년 봄과 가을에 자기 소속 각 기관을 한 번씩 순회하여 좌정하고 모든 사업을 검열하기를 지방 감사가 각 군을 순회하는 방도와 같이 할 것이다.[판서가 사고가
있으면 차석 당상관이 대리할 것이다. 일상적으로 소속 기관에서 6조에 사건을 보고할 뿐 아니라 6조 당상관도 역시 꼭 이와 같이 할 것이다. 춘추로 하는 정상적인 순회 외에도 만일
일이 있으면 역시 어느 때든지 출석할 것이다. 모든 당상관 및 사무관[郎官]도 1∼2명씩 모두 본 기관으로 모이며 모든 관리도 동시에 참석할 것이다. 모든 순회 시에도 다만 평소에
출근하는 의례와 같이 각자의 식사는 자기 집에서 준비할 뿐이요 특히 주식(酒食)을 대접하는 버릇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사소한 경우라도 반드시 책벌할
것이요 지어 하급 관리들의 이런 행위는 더욱 엄금해야 한다.]

궁중의 어용 물자는 관청 하나를 설치하여 이것을 전담시켜야 하고 각 기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바치게 하는 규례를 없앨 것이다.[지금처럼 각 기관에서 날마다 바치게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사옹원(司饔院)에 전담시키고 중국 제도를 참작하여 1년 동안 필요한 어용 물자에 대한 예산을 세우되 모든 물자의 가격은 보통 가격보다 배 이상으로 정하며 어용으로 정한 쌀과
돈을 사옹원에 갈라다 두고 지정 납부인을 시켜 사들이기를 현재 공물(貢物) 주인(主人) 주인(主人)：조선시대 지방으로부터 바치는 공물(貢物)을 서울에서 책임지고 사서 바치던 사람.

의 관계와 같이 하여 정비한 물품을 사옹원에 직접 납부케 할 것이다. 그리고 간장, 초, 술, 육장과 같은 종류는 사옹원에서 정하게 제조하여 저장해 두고 쓰되 각각 책임자를 정하여
맡긴 후 감독 관리의 검사를 거쳐서 올릴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허다한 폐단을 없앨 뿐 아니라 왕에게 드리는 음식물도 매우 정결하여질 것이다. 현재 어용 잡물 중 생선, 육류,
소금, 간장 같은 것을 각각 여러 기관에 저장해 놓고 날마다 되로 홉으로 계산하여 바치게 되므로 그 수속이 번잡하여 뇌물을 쓰며 나라를 해롭게 하는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용음식은 정결치도 못하니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일이 다 실정에 맞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필요치 않은 기관을 합칠 수도 있고 필요치 않은 관리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실례를 보건대 한(漢)나라의 관제는 대단히 간략하였으니 이는 대개 실무를 처리하는 기관이었으며 궁중 물자 공급은 다만 기관 하나가 맡은 까닭이었다. 옛적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역대이래 명(明)나라까지도 다 그러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관청을 설치할 적에 여러 시(寺)이니 감(監)이니 하는 따위의 수가 중국보다 세 배나 되는 중 태반(太半)은
궁중에 물자를 공급하는 데 관련된 기관이니 이렇게 되고야 어찌 폐단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다 일이 없는데다가 일을 많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구준(丘濬)은 말하기를'주나라의
선부(膳夫)는 음식을 맡은 식관(食官)의 장(長)이니 곧 지금의 광록사(光祿寺)의 직무이다. 진(秦)나라 때에는 대관령(大官令)이 되고 한나라에는 비로소 광록훈(光祿勳)이 있었으나
이에 창을 잡고 궁금(宮禁)을 숙위(宿衛)하는 관(官)이요 이것으로써 어선(御膳)을 맡은 것은 남북조(南北朝) 때에 비롯하였고 당나라ㆍ송나라에서 이어받아서 썼다. 지금의 제도에
광록사에 사국(四局)이 있는데, 대관(大官)이라 함은 곧 『주례』의 포옹(庖饔)의 소임이요, 진수(珍羞)라 함은 곧 『주례』의 변인(籩人)의 직무요, 양온(良醞)이라 함은 곧
『주례』의 주정(酒正)이요, 장해(掌醢)라 함은 곧 『주례』의 해인(醢人)이 그것이다. 이는 사(寺)는 또 특별히 왕후ㆍ세자(世子)의 음식을 제공할 뿐이 아니라 제사의 제수와
빈객의 잔치도 모두 그 맡은 일 속에 있는 것이다.]

대소 관직은 다 직무 관계를 참작하여 설치하여 해당 직무를 전담시킬 것이고 현행 겸직하는 규례는 없애버릴 것이다.[현재는 관청을 너무 많이 설치하고 또 다른 관직으로서 겸임하는
것도 대단히 많다. 때문에 소위 영광스러운 관직[淸顯官]을 한 자들은 그 직함이 보통 몇 줄에 넘으나 사람마다 그것이 항상 듣고 보는 관습이 되어 이것을 도리어 훌륭하게 여기고
그것이 그릇된 것인 줄을 모르고 지낸다. 그리하여 그 해독이 필경 모든 관리가 자기가 진 책임을 다 경하게 여기게 되어 결국 허영에 끌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관리를 임명하며 책임을 맡긴 본의라 하겠는가?]

살펴보건대 옛날 관청을 설치하고 직무를 분담시키는 것은 각각 자기 맡은 직무를 전담케 하였을 뿐이어서 양한(兩漢) 양한(兩漢)：중국 한고조가 건국한 서한(西漢)과 한광무가 중흥한
동한(東漢)의 합칭.

때에도 겸직을 두었다는 말을 못 들었다. 위(魏), 진(晉) 때에 와서 비록 일을 임시적으로 처리했지마는 그 역시 일정한 규례가 없었다. 그러다가 당(唐)나라 때로부터 비로소
겸무를 두게 되었고 송(宋)나라는 오대(五代)의 해독을 받아 각 기관에서 겸직하는 예가 많아서 관청 규율의 문란한 정도가 아주 극도에 달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관직 제도는 대개
송나라 이후의 관직 제도를 모방하여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대전(大典)』에 실린 관직들에 겸관을 열거한 것이 십에 육칠이 되니 오늘날 관리로서 무책임하게 된 폐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만일 고금의 역사적 사실을 참작하여 그 결과를 살펴본다면 그 중에는 본받을 만하고 또 참고로 될 만한 것을 자연 알 수 있을 것이다.

도감(都監)은 후세에 생긴 폐단이니 그 규정을 개혁해야 한다.[지금 조정에서는 일시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곧 기관 하나를 따로 설치하여 도감이라고 칭한다. 거기에는 광범하게
당상(堂上), 도청(都廳), 낭청(郎廳), 이속[吏隸] 등을 내어 실행하다가 그 일이 끝나면 곧 없애버리는바 지어 보통 처리하기 쉬운 일이라도 역시 그렇게 한다. 대체로 관리를
배치하여 직무를 분담시키는 것은 곧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한 것인데 만일 임시로 어떠한 일이 있을 때마다 따로 허다한 기관을 만든다면 평소에 많은 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대개 이것은 고려 말경에 생긴 폐습을 그대로 계승하여 규례로 된 것이니 이런 폐단을 개혁해야 한다. 반드시 일정한 관직을 두고 적임자를 선택하여 각자가 자기의 직무를
맡게 할 것이다. 그리고 임시로 생긴 일에 대해서는 각각 그 기관에서 담당하여 처리케 할 것이요 특별히 큰 일이 아닌 경우에는 다시 따로 도감을 설치하지 말 것이다.]

의사(醫司), 관상감(觀象監), 사역원(司譯院)에도 다 적임자를 선택하여 고정된 직무를 맡길 것이며 현행 체아(遞兒)의 규정을 없앨 것이다.[일정한 녹봉이 없고 일 년에 4회
시험을 쳐서 그들의 점수를 보아 녹봉을 붙여 주는 것을 체아라 한다. 지금 삼의사(三醫司), 관상감, 사역원에는 정(正), 부정(副正)으로부터 참봉(參奉) 등 여러 관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모두 체아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 법이 잠간 보기에는 좋을 듯 하나 대단히 적당치 못하다. 그 해독이 필경 관청의 체통을 잃어버리게 하고 상하 간에 질서가 없게 되어
대개는 실력이 없는 자들이 겨우 시험에 통과되었을 따름이다. 응당 다른 기관의 규례에 의하여 일정한 직품과 녹봉을 주고 1년에 2회씩 시험을 보아 그들의 점수의 고하를 가지고도 또
그들의 학문과 사실이 과연 맞아 떨어지는가를 참작하여 우열의 등급을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정, 부정 및 교수는 당초 채용할 적에 다년간의 실적이 우수한 자를 잘 선택하여 임명한
것이므로 시험을 치는 것이 불가하다. 그러나 자기의 맡은 직무를 잘 꾸리는 것과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 성적의 우열로써 그의 사업 성적을 평정할 것이다. 그리고 사자관(寫字官),
화사(畫士), 악공(樂工) 등에게는 실적에 따라 급료를 올리고 내리는 것이 옳다.]

종친(宗親), 부마(駙馬)의 품계(品階)는 응당 문관, 무관의 것과 같이 해야 한다.[종친과 의빈(儀賓)도 본래 다른 관직과 품계가 동일한 것이니 달리 할 필요가 없다. 중국에서도
이런 규례가 없다.]

인조(仁祖) 초년에 어떤 평론가가 말하기를 "지금 비변사(備邊司)에서 국가 정치를 전담하게 되어 정부는 한가한 기관으로 되어 있고 정원(政院)은 국왕의 명령 출납만을 하고 있어서
승지(承旨)는 우두머리 관리로 되었으며 또 따로 도감(都監)을 설치하였으므로 본 기관은 도리어 필요치 않은 관청으로 되었다. 그리고 관리를 자주 교체하는 바람에 각 기관들은 손님이
오가는 여관[郵舍]과도 같다. 그리하여 문서를 관리하는 자가 없어서 이속[吏胥]배가 협잡을 부리게 된다. 겸임하는 관리가 많으나 실지 책임을 지는 자가 없으며 일을 맡은 기관에로
회부하나 직무를 분담하는 한계가 분명치 못하여 일을 망치고 지체시키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바 이것은 다 관직 제도가 잘못된 데서 생긴 폐단이다. 대체 직무를 배정하는 법이 해이해진
뒤로부터 의정[三公]들이 정무를 논의할 데가 없어졌다. 그래서 따로 비변사를 설치하여 재상들 중에서 군사 방면에 정통한 자를 당상관으로 하고 부관 중에서 글 아는 자를
낭청(郎廳)으로 정하여 국방상의 사무를 처리하는 기관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의 정령을 결재 받을 데가 없어서 모든 사업들이 다 비변사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각 조(曹)는 찬성(贊成), 참찬(參贊)의 병을 조리하는 자리로 되고 사인(舍人), 검상(檢詳)의 풍류 오락장으로 되고 말았으니 그것이 아주 괴상한 제도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허영에 날뛰고 실상이 없어서 대각(臺閣)으로 돌아다니면서 명사(名士)로 자처하여 실제 사업을 돌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중요한 국가의 정치문제가 도리어 물망
없는 재상이나 글자를 약간 아는 무관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렇게 되고서 태평의 정치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엉터리 없는 일이 아닌가? 마땅히 누대 선왕의 법에 의하여 다시
직무를 분배하는 규례를 회복한 후에라야 정령이 한 곬에서 나오게 되어 관청의 질서와 규율이 확립될 것이다. 현재의 승지는 곧 옛적의 시중상서(待中尙書)의 소임이요 중국의
내각(內閣)이다. 국가의 대소 문건이 여기를 거치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정령의 옳고 그른 것과 임금의 잘못에 대하여 대신이나 대간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도 오직 승지(承旨)는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니 그 임무의 중요성이 어떻다 하겠는가? 그러나 이제 승지의 물망이 도리어 삼사(三司)의 아래 있어서 다만 문서를 전달할 따름이요 사건에 대하여 논쟁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응당 물망 있는 사람을 잘 골라서 그 소님을 맡기는 동시에 일마다 이해를 분석하여 은근히 임금의 정치 처리에 도움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만 이런
주장이 있기는 했으나 필경 실시한 일은 없었다.

종친부(宗親府)：『주례』에는 소종백(小宗伯)이 삼족(三族)[부, 자, 손이다.]의 촌수를 구분하여 그들의 적자(適子)를 수위하는 법을 맡는다[문자(門子)라 함은 적자(適子)이니
장차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문을 이어받을 자이다.] 하였고 진(晉)나라에서 공족(公族) 공족(公族)：옛날 봉건시대 영주의 친족.

의 관리를 두어 공족의 종족을 맡게 하였는데 고관의 적자에게 이 관직을 맡겼다. 『좌전(左傳)』 『좌전(左傳)』：공자가 지은 역사 서적 『춘추』를 좌구명(左丘明)이 윤색하여 해석한
서적 이름인데 『좌씨춘추』라고도 함.

성공(成公) 18년에 진(晉)나라에서는 구회(苟會), 난엽(欒靨), 한무기(韓無忌)로써 공족(公族) 대부를 임명하여 공족 자제들에게 공순하고 검약하고 효도하고 우애하는 도리를
가르치게 하였다 하니, 이것은 공족의 관리란 것은 공족의 종족을 맡아 그들의 교육을 주관했던 실례다. 한(漢)나라에서는 종정관(宗正官)을 두어 구시(九寺) 중에 넣었고
명(明)나라에서는 종인부(宗人府)를 두고 종인령(宗人令), 종정(宗正) 등 관리에게 1품 품계로 올려주어 왕실 사람에게 맡기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 왕실에 관한 직무를 맡은
자들이다. 여러 종친의 촌수에 따라 작(爵)을 봉한 일에 관하여는 국가의 규례에 제정되어 있으므로 이부(吏部)에서는 그 법령에 의하여 시행할 뿐이었으며 때로 종실들이 종인부에
모이기는 하지마는 역시 종인부가 직접 시행하는 직무가 아니었다. 우리 나라 관제에는 종정 등의 책임 관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왕족들이 죄다 이 기관의 관리로 되고 있으니 옛
제도와는 달라서 실로 관청을 설치하여 직무를 분담시키는 본의가 아니니 이것을 옛 제도대로 개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충훈부(忠勳府), 의빈부(儀賓府)도 대개 다 그렇게 해야
한다.

충훈부(忠勳府)：이 기관은 옛적에는 없던 것으로서 고려 때에도 역시 훈신부(勳臣府)란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조(太祖)가 처음 충훈사(忠勳司)를 설치하여 훈권(勳券)
훈권(勳券)：국가에 공로가 있는 자에게 주던 관작과 녹봉을 기록한 증서.

을 맡게 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또 충훈사를 부로 하여 양부(兩府)와 동등으로 대우하여 경력(經歷), 도사(都事)등 관직을 두나 토지와 노비를 충훈사의 것보다 더 주었다. 중국
관제를 살펴보건대 이부(吏部)의 직제에 계훈(稽勳), 험봉사(驗封司)란 것이 있지마는 역시 훈신부란 것은 없다. 지어 충익부(忠翊府)란 것은 더구나 전대에 없던 것이다.

의빈부(儀賓府)：이것은 중국에서는 없었고 고려 때에도 소위 부마(駙馬)란 것이 없었다. 대개 옛적에는 왕녀는 제후에게만 출가하였다. 한(漢)나라 때에 와서 비로소 공주(公主)도
영지(領地)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관리를 두어 자기 집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옛 제도와는 틀린 것이다. 근세에 와서는 국가에서 공주에게 녹봉을 주었을
뿐이니 이미 사사집이 되어 공무가 없는 이상 어찌 관리를 들 수 있겠는가? 당나라 중종(中宗)이 공주에게 전속 기관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게 하였던바 원초객(袁楚客)이 지적한 당시의
실책 열 가지가 다 윤리에 위반된 사건이었는데 이 공주의 관계가 그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이 『강목(綱目)』 『강목(綱目)』：중국 송나라 때 저명한 유학자 주희(朱熹)가
『자치통감』의 내용을 요약해서 편찬하고 또 주석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약칭.

에 실렸으니 그것만으로도 그의 옳고 그른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부마들을 교양하고 또 그들이 의례에 참가하는 일에 관한 직무와 같은 것은 이미 종정부(宗正府)에 예속시켰으니 따로
둘 필요가 없다.[지금 비록 의빈부가 있기는 하나 허깨비 기관이며 부마는 평생에 한 번도 청에 나오는 일이 없고 소속 관리도 아무 하는 일이 없으며 다만 매년 정초에 부마의 집에
명함을 보내고 함께 술타령이나 할 뿐이다.]

주(周)나라 제도에는 왕녀를 제후에게 출가시켰으며 왕족 중의 제후로 하여금 그에 관한 직무를 주관케 하였던바 공(公)이란 것은 제후의 존칭이므로 이것을 공주라고 하였다.
후한(後漢) 때에 순상(荀爽)이 왕에게 글을 올려 이르기를 "한(漢)나라가 진(秦)나라의 법을 따라 공주 출가에 관한 규례를 제정하였는바 이것은 아내로서 남편을 제어하며 낮은
처지에서 높은 이를 깔보게 되는 것이니 응당 공주 출가에 관한 법규를 개정하여 도리에 맞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부인은 작(爵)이 없고 남편에 의하여 작을 따라 남편의 급수에 앉는 것이었으나 진(秦), 한(漢) 때에 와서 비로소 군(君)이라는 칭호가 있었고 영지를 가지는 제도를
마련하게 되었다.

돈녕부(敦寧府)：옛 제도나 중국에도 이런 기관은 없었고 고려 때에도 역시 없었다. 왕가의 인척에 대해서는 응당 그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여 특별히 우대하여 줄 것이다.[혹 죄를
범했을 적에 감형하기를 고려한다든지 또는 비록 입학을 아니 했더라도 사의 규정의 의하여 토지를 준다든지 그 외에도 병역이나 부역을 면제하여 주는 것들이다.] 만일 관리로 임명하여
직무를 맡긴다면 친분이 멀거나 가깝거나 관계할 것 없이 일체로 오직 덕망 있는 인재를 선택하여 쓸 것이니 어찌 돈령부에 한하여 특권을 줄 수 있겠는가? 인재를 등용하고 파면하는 데
있어서 이들을 특별 취급해서는 옳지 않다.[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선조의 관계에 의하여 관리를 임명하는 규례도 역시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이 관청은 일 없이 공연히 설치한 기관일
뿐만 아니라 여기를 거쳐 벼슬 길로 들어가서는 필경 모든 관직으로 이동하게 된다. 현재 중요한 군대와 행정의 장관 지위에 있는 자들 중에는 무능한 자가 많으니 이것은 까닭이 있은
것으로서 이상히 여길 것이 없다.

중추부(中樞府)：이것도 역시 전대에 없던 것이다. 대체로 직무가 없는 자의 녹봉으로 말한다면 송(宋)나라 때에는 사관록(祠官祿)이 있었고 명(明)나라 제도에는 직무가 없는 자에게는
일체로 녹봉이 없었다. 그러나 혹 놀고 있는 자에게도 녹봉을 줄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관청에 근무하다가 병으로 사직한 자에게 그의 녹봉을 전부 떼어버릴 수도 없으니 법령으로
정하여 당상관(堂上官) 이상과 대간(臺諫) 및 시종관(侍從官)으로서 혹 죄 없이 해임되어 녹봉을 떼어버릴 수 없는 자에게는 본봉의 반액을[왕의 특별 명령이 있으면 녹봉 전부를
준다.] 주면서 결원이 있기를 기다릴 것이므로 이 중추부는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니 어찌 소임(所任)이 없이 관아(官衙)를 개설(開設)하는 이치가 있으리요?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군직(軍職)이란 것도 역시 실직을 갖지 못한 자에게 녹봉을 주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서 오위(五衛) 오위(五衛)：조선시대 충좌위(忠佐衛=전위), 충무위(忠武衛=후위),
용양위(龍驤衛=좌위), 호분위(虎賁衛=우위), 의흥위(義興衛=중위)를 두었는데 1위를 5부(部)로 나누고 1부를 4통(統)으로 나누어 전국의 군대를 통솔하던 군대 편제.

에 병합되어 있기 때문에 군직이라 칭한다. 그런데 이 기관이 잠간 보기에는 좋은듯 하나 그 실상을 살펴본다면 유익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군사 규율을 문란, 복잡하게 하여
그에 따르는 폐해가 적지 아니 하니 군직도 역시 없애버려야 한다.[모든 관직이 없이 녹봉을 받는 자로서 궁중 의례에 참여할 경우에는 같은 품계의 말석에 서면된다.]

의금부(義禁府)를 없앤다. 이 기관도 없애야 할 것이니 이에 대한 설명은 형조(刑曹)조 아래 실렸다. 옛적에는 이런 기관이 없었고 고려 말년에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두었으며
우리나라 초기에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고쳤다가 다시 현재의 명칭으로 고친 것이다. 그런데 의금부 관리는 다 다른 기관의 관리로 겸임시킨다. 이 직무는 대개 이미 형조(刑曹)가
맡고 있는 이상 또 정식 관리를 두기가 곤란하여 그렇게 겸임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그것이 구차한 조치인 것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을 없애야 할 것은 다시 의심할 바
없다.[혹자는 말하기를 "의금부를 형조에 합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그러나 형조의 낭관(郎官)이나 부리는 하인들이 부족할 염려는 없지 않을까?" 한다. 이미 이것을 타산하여
인원을 정한 것이니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혹자가 또 말하기를 "현재 의금부 도사(都事)가 죄인을 잡아 오고 데리고 가는 일들은 어떤 관리를 시켜서 할 것인가?" 한다. 형조에 이미
낭관을 넉넉히 배치하였으므로 그들이 왕의 명령을 받고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큰 사건이 일어나서 낭관이 부족할 경우에는 지금 의금부에서도 가도사(假都事)를 쓰는 전례가 있으니
그와 같이 전례대로 임시 낭관을 임명하여 보낼 것이요 서울 근처라면 금오위낭장(金吾衛郎將)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 말하기를 "당직 낭관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한다.
그것은 형조 낭관이 1명씩 돌려 가면서 숙직할 것이다.]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 규정을 개정해야 하며 또 충익부(忠翊府)까지도 없앨 것이다.[공신들 중에서 공로는 있으면서도 아직 정식 훈작을 받지 못할 자가 있다면
응당 품계를 주거나 혹은 상급을 가지고 표창할 것이다.]

우리나라 법전에 원종공신(原從功臣) 원종공신(原從功臣)：조선시대 등급이 있는 공신보다 작은 공로가 있는 자에게 주는 공신 칭호.

은 따로 충익부를 설치하고 그 자손에게는 대수를 제한하지 않고 충찬위(忠贊衛)에 속한다 하였으니 이 일이 가장 엄중하다. 이것은 필시 정식 훈작이 함부로 등록될가 염려하여 공신
중에서 그 등급을 구별하자는 의사일 것이다. 그러나 훈공을 등록함에 있어서 이미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정한 이상 그 세 등급 중에 들 수 없는 자는 그들 훈공의 대소에 따라 품계를
주거나 혹 상급으로써 표창할 것이므로 본래 이 명칭을 두는 것이 부당하다. 더구나 지금 소위 원종공신이란 것은 꼭 자신이 공이 있어서 된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제서질(子弟婿姪)이 의례히 충찬위에 참여하고 있으며 공신 등록 문건을 작성하였거나 이것을 필사한 자와 또는 녹공도감(錄功都監)의 심부름하던 하인들이며 공신들이 모여 맹서할 때에
시중하던 하인들까지도 역시 다 여기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제도인가? 중종(中宗)이 나라를 바로잡을 당시에 박원종(朴元宗) 등이 유자광(柳子光)에게 공신의 감정을
전임시켰던바 그 간사한 자가 저의 자제들을 등록시킬 야심을 먹고 우선 인심을 수습하기 위한 계획으로 공의 유무를 막론하고 당시 고관들을 전부 등록하였으며 또 그 자제와 노예까지도
다 원종 공신 속에 넣었다. 훈공을 등록하는 절차가 문란하여진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장례원(掌隷院)：노예에 관한 직무는 본래 형조에 속하였기 때문에 형조 직제에 장례사(掌隷司)를 두었었다. 그 후 노비가 점차 많아짐에 따라 소송이 아주 복잡하게 되자 세조(世祖)
때에 와서 비로소 형조에서 갈라다가 따로 장례원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의 역대와 고려 때에도 없던 기관이니 의심할 것 없이 혁파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사세가 이러하니
아직 그대로 두고 노비에 관한 소송이 점차 간단해지기를 기다려서 이것을 없애고 옛 제도대로 회복할 것이다.

사간원(司諫院)：이 기관도 줄이거나 없애버리거나 해야 할 것이다. 옛적에는 간관(諫官)이란 것이 없었는데 한(漢)나라 이래로 비로소 이 제도를 설치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언론의 길을 확대하기 위하여 이 기관을 둔 것이다"라고 하지마는 실로 언론의 길이 더 좁아지기는 간관(諫官)을 둠으로부터 시작된 줄을 모른다. 임금의 측근에 있는 재상들이
조석으로 교훈이 될 만한 일을 말해 드리는 동시에 사건과 관련하여 정당한 방향으로 간하기도 하며 기타 여러 관리도 각자가 자기 맡은 일을 가지고 간하여 심지어 민간의 한미한
사람들까지도 역시 바른말을 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임금의 덕행상 수양이라든지 정치상 처리 방법도 다 바르게 될 것이니 이렇게 하고서야 참으로 언론의 길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 간관이란 명칭을 붙여 따로 한 기관을 설치해야만 될 것이 무엇인가? 후세에 와서 모든 일에 성과를 잘 거두지 못한 원인은 다 논쟁이 여러
파로 갈리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대간을 두는 해독이 역시 사소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인재를 등용하는 법이 옛날의 것과 다르며 임금의 측근에 있는 재상 자리에 꼭 다
현명한 인재를 배치하였다고 할 수 없는 처지에서는 혹 여기에 등대고 상당히 반대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갑자기 아주 없애기 곤란할 것이니 중국의 제도를 참작하여 다만
사헌부(司憲府)를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중국의 도찰원(都察院)은 즉 우리나라의 사헌부이다.]

[살펴보건대 사헌부를 둘지라도 그 풍문(風聞)에 의하여 일을 처리하는 점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후세에 대간이 풍문에 의하여 사건을 말하게 된 것은 당(唐)나라 무후(武后)
무후(武后)：무태후(武太后)를 가리킴.

때에 시작하였는데 호치당(胡致堂)은 논하기를 "무씨(武氏)가 법으로 여러 신하들을 제어하려 하여 간관과 어사(御史)에게 풍문에 의하여 사건을 논하는 것을 허가하였는데 그것이 부정적
사건을 일으키고 아첨쟁이를 불러들이어 실로 공평한 도리를 손상시키는 표본이 되었다. 조정이란 것은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본원지로 되며 시비도 거기서 결정되고 훼방도, 실상이
없는 찬양도 모두 거기서 정당하게 해결되어 인심의 복종 여부가 모두다 조정의 처리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풍문이란 것은 허투루 떠돌아다니는 말이기 때문에 혹 사실보다 지나친 악평도
있을 것이니 이것을 어찌 다 진실하다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갑자기 이것을 조사하여 형벌을 실시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잘못된 것이 많을 것이다. 이미 풍문에 치중하여 자세히 심리하지
않은 이상 피고자는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죄만 당할 뿐이요 달리 신소할 길이 없으니 그 원통한 일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것인가? 참으로 공명정대한 정치를 손상시키는 나쁜
조치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후세에 대간이 풍문에 의하여 사건을 논쟁하게 된 것은 무후 때에 시작된 것이요 그 전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송(宋)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전례로 알고 그대로 답습하여 이렇게 풍문에 의하여 사건을 논쟁하는 것이 마치 대간에게 맡긴 근본 직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이것이
어찌 태평한 국가의 정치라고 하겠는가? 혹 사정을 참고로 하는 데는 풍문도 무던할 것이다. 그러나 남의 숨은 일을 적발하여 그 사실을 규명하지 않고 곧 누명을 씌우는 것을 어찌
충직하고 진실한 방법이라 하랴? 대체로 어떤 사실이 있은 후에는 거기에 해당한 이름을 붙일 것이요 그 죄가 있는 후에는 거기에 해당한 벌을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진상을
살펴보지 않고 덮어놓고 남의 말만 듣고 곧 위에 보고하는 문건에 기록하여 형에 처하니 통탄할 일이다. 한마디 애매한 말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 사람을 심복시키겠는가? 지금 우리
정부에서는 이것을 국법에 엄격히 규정하여 어사(御史)로 하여금 모든 관리를 단속하여 만일 공평치 못하거나 불법 행위가 있을 때에는 꼭 그 사건의 발생 시일을 똑똑히 기재하며 그
증거를 명확히 하여 떠돌아다니는 헛소문을 가지고 사소한 일을 파고 돌아가는 것을 금하게 하였으니 그는 대개 사건을 처리하는 자가 이것을 구실로 삼아 개인의 원수를 갚거나 또는
정직한 사람을 중상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예문관(藝文館)을 없앨 것이다. 이미 홍문관(弘文館)과 춘추관(春秋館)을 둔 이상 예문관을 두는 것은 부당하니 이것을 없애고 모든 학사 중에서 문장이 용한 자만을 선발하여
지제교(知製敎) 지제교(知製敎)：조선시대 흥문관 부제학으로부터 부수찬(副修撰)의 직원으로서 국왕의 문서를 지어 바치던 겸임 관직.

를 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춘추관은 본래 당시의 정치상 기록을 맡는 것인바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문한서(文翰署)를 예문춘추관으로 고치고 수찬(脩撰), 검열(檢閱) 등 관리를 두었다가 그 후 두 관(館)으로
분리하였으니 지금의 검열, 대교(待敎), 봉교(奉敎)가 그것이다. 원래 사관(史官)으로서 예문관 관리로 된 것은 대개 이런 경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응당 사관을 춘추관
관리로 바꾸어 그 명칭을 바로잡고 참상(參上)급으로 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태사(太史)는 전국을 다스리는 육전(六典)을 맡아 가지고 대소 영주국들의 일을 조사하며
법률을 맡아 가지고 관청의 일을 조사하며 규정을 맡아 가지고 서울과 지방의 일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일 년간에 해야 할 사업들을 조리 있게 배정하며 역서를 여러 영주국들에 나누어
주며 큰 제사 때와 제후의 회합이 있을 때나 상사(喪事)가 있을 때에 사업을 협조 추진시킨다. 또 제문[誄]을 읽으며 시호(諡號)를 주는 일 외에도 태사는 전국의 기록과 고대
제왕의 글을 맡아 가지고 그 책 이름을 전국에 전달하였다. 이렇게 하자면 곧 천문에 밝고 민간의 일을 잘 알며 정치상 체계에 정통하고 옛 제도를 맡는 동시에 겸하여 정치에 관한
언어와 행동을 기록하였으니 그 관직을 마련한 의의가 참으로 심장하다. 그러므로 옛적에는 현명한 인재가 아니면 그 관직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기 직무를 잘 처리해 가기만 하면 평생을
그 자리에 두었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그 명목과 칭호의 어간에다 관직을 설치하였으니 여기서 그 본의가 옳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풍계에 따라 전직을 하게 되기 때문에
사관이 더욱 빨리 승급하는 자리로 되었으니 이것이야 다 말해 무엇하랴? 지금 비록 죄다 옛 법대로 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 직품의 급수를 정하여 인재를 골라서 맡기며 오랫동안 한
관직에 있게 한 후라야만 관리가 자기 직무를 잘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어찌 이 한 기관뿐이랴! 모든 기관이 다 그러하니 예를 들면 대신의 직무가 벌써 옛적의 법과는
틀린 점이 많은 것이다. 관직을 설정한 본의가 벌써 그러했고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이 또 이러한지라 필경 관리가 자기의 맡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며 사업의 실적이 날로 저하되는
때에는 논평하는 자들이 또 여기에 따라 말하기를 세상이 점차 말세가 되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니 어떤 과오도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임금이나 대신으로서 훌륭한 정치에 뜻을
두는 자라면 그 원인과 결과를 깊이 규명하며 이것을 모두 다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경연(經筵)：이미 사(師)와 부(傅)를 두었고 홍문관(弘文館)의 직무가 또 경서에 관한 강론과 연구를 맡아서 경연의 직무를 하게 된 이상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다 도덕과 의리에
대하여 임금에게 협조해 드릴 책임이 있는 것이니 그들이 자연 다 강론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꼭 경연이 따로 관직을 갖거나 겸임한다는 명칭을 붙여서 임금 앞에서 강론하게
할 필요가 없다. 대개 우리나라에서는 송(宋)나라 때와 같이 사와 부의 관직을 따로 두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칭호를 마련하여 겸임시킨 것이다.

독서당선(讀書堂選)도 없애 버릴 것이다. 휴가를 주어 서당(書堂)에 가게 한 것도 역시 전대에 없던 일이다. 대개 세종(世宗) 때에 임시 특명으로 된 것을 그 후에 그대로 규례를
삼았던바 지금에 와서는 문관 중에서 문학에 능한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고르게 되었다. 짐작컨대 세종의 착한 배려로는 미소한 문관 중에서 임시로 실무를 당분간 떠나 광범하게
경서[經術]에 관한 공부를 시켰다가 장래 크게 쓰자고 한 것이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옛적에는 학교에서 선비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학문과 재능이 성취된 자를
뽑아 정부에 추천하여 취직시켰다. 그리하여 한 번 취직하게 된다면 각자의 맡은 직무가 있는 것이니 어찌 맡은 직무를 내어 버리고 다시 독서당으로 보내어 공부를 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데 후세에 와서는 과거로 선비를 뽑아 쓰기 때문에 선비들이 다만 문장의 글자 해석이나 시부(詩賦)에만 몰두하고 경서 공부에는 잠심하지 못한 결과 필경 정치 문제에는 암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득이 이와 같이 한 것이다. 그 후로는 또 점차 선왕 때의 본의를 잊어버리고 오직 시문하는 사람만 뽑히게 되고 보니 도리어 교만, 안일, 경솔, 외식의 버릇만을
조장하는 결과로 되어서 무익할 뿐만 아니라 실로 큰 폐해가 되었다. 대체로 옛적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선비를 교양하였으므로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수양과 백성 다스리는 방안을
공부하였고 시부를 숭상하는 관습이 없었다. 그리고 관청을 설치하여 직무를 분담시킴에 있어서도 다 백성을 위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관리이었으며 불필요한 인원이 없었다. 학문 있는
사람에게 직무를 맡기게 되므로 그 학문을 잘 이용하여 직무를 처리하기 때문에 일이 실정에 맡게 잘되어 갔다. 따라서 사업의 실적이 나타나 세상이 태평하게 되었다. 그런데 후세에는
교육 교양 방법이 벌써 틀렸고 필요치 않은 관리를 많이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 처리를 하는 관리가 문서나 정리하는 아전 직무를 하게 되었고 소위 명사(名士)란 자들을 반드시 문필
관계의 한가한 자리에 앉히기 때문에 실무에 종사하는 자는 대부분 저급한 측들이요 문필 방면에서 명망을 얻은 자들은 더욱 실제 사업에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실무와는 관계없는
공허한 이론이 아주 유행하게 되고 진정한 학문과 사업의 실적은 둘 다 날로 망쳐졌다. 그것은 진(晉)ㆍ당(唐) 이래로 생긴 말할 수 없는 병통으로서 사회 발전 여부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따라서 임금 된 이는 관청을 설치할 때에 꼭 여기에 주의를 돌려야 할 것이며 따로 둔 문필 관계의 기관과 필요치 않은 안일한 관리들은 일체 다 없애어 옛 법대로 할
것이다.[시문이나 공허한 이론이 끼치는 해독으로 말하면 비단 실제에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이 한 고비만 넘으면 끼리끼리 당파를 형성하고 권력자에 아첨하게 되며 당파가
많아진다면 나중에는 규율과 질서를 문란케 할 것은 필연의 사세라 할 것이다.]

훈련원(訓鍊院)의 관제를 없앨 것이다. 무선(武選) 무선(武選)：조선시대 무과 시험에 합격하고 아직 관직 임명을 받지 않은 자.

을 이미 잘 선발하여 병조(兵曹)에서 일정한 시기에 훈련을 시키고 있으며 5위(五衛) 관리들이 그 직무를 맡아서 연습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으니 소위 훈련원 관제란 것은 허깨비로
되었으므로 응당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 시설은 그대로 두고 수리하여 사장[射圃]으로 만들어 무술을 공부하는 무사들의 연습장으로 하기를 다른 연무청(鍊武廳)의 규례와 같이
하는 것이 좋다.[다만 원직(院直)이 5명을 정하여 그 옆에서 살리면서 집을 돌보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국 관제에 이러한 것이 없고 고려 때에도 역시 육위(六衛) 육위(六衛)：고려시대의 군사 제도인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금오위(金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

밖에 다른 무관의 관직이 없었다. 대체로 국가에서 관청을 설정하기는 그 방면에 재능이 우수한 자를 골라서 직무를 맡기려는 것이니 어찌 인재를 선택하여 관리로 채용하여 놓고 맡길
직무가 없을 리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선생도 제자도 없이 공연히 훈련이란 명칭만 붙이고 있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도총부(都摠府)도 없앨 것이다. 도총부의 설치는 실로 옛 법이 아니며 또 병조를 두어 5위(五衛)의 사업을 통솔하고 있는 이상 무엇 때문에 필요 없는 기관을 또 하나 만들어
지도권을 분리시킬 것인가? 대체 이런 것들은 다 후세에 와서 비정상적인 조치에서 나온 것이니 유해무익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군사상 권한[兵權]은 반드시 여기저기 갈라
붙이는 것이 옛 제도인데 지금 이르기를 후세에 생긴 비정상적인 조치라고 하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라고 한다. 갈라 붙인다는 것은 각각 나누어 맡아 한군데서 전권을 못한다는
말이요 일부러 체계가 없이 한다는 말이 아니다. 현재 군사에 관한 직무를 이미 5위에 갈라 맡긴 이상 그만하면 넉넉히 갈랐다 할 것이다. 병조가 군정을 총활한다 하지마는 다 정부의
지도하에 놓여 있고 또 사건은 다 왕이 명령을 받아 실행할 뿐이니 이만하여도 개인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도총부를 설치하여 매사를 다 간섭하려 하니 이것은
일부러 상호간의 불일치를 가져오게 하는 것으로서 옛 법에는 이런 제도가 없다.

기로소(耆老所)：이 기관도 역시 전대에 없던 것이다. 퇴직한 재상 중의 노인[國老]과 현직 고관 중의 노인[卿大夫之老]은 임금이 응당 예절을 갖추어 대학[太學]으로 보내어 우대해
줄 것이요 지어 일반 백성들 중에서 응당 우대해야 할 노인에 대해서는 해당 관청에서 소정 규정에 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쌀과 고기를 줄 따름인 것이니 공연히 기관을 설치하는 것은
원래 부당한 일이다. 대체 부당한 관청을 설치한다면 그 자체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폐단이 생기는 것이다.[관청을 설치한 이상에는 의례히 관속과 하인들을 두어야 할 것인데
맡은 일이 없이 관속들을 두고 녹봉을 주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뿐만 아니라 현재 이 기로소는 다 세력 있는 고관들이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토지, 어장[魚箭], 염분(鹽盆) 같은
이권을 허다히 물려받았는바 중간에 있는 관속들이 가는 곳마다 폐단을 일으켜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일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수사(內需司)도 없애버릴 것이다. 내수사를 없애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입 달린 자는 다 말하고 있다. 국고의 재산이 다 임금의 소유라 하겠는데 무엇 때문에 따로 사유 재산을
저축하여 임금 자신이 자체의 존엄을 손상하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궁중에서 이러저러한 사소한 용돈을 항상 외부(外府)에 청구하기는 딱한 점도 있기 때문에 누대 선왕이 이것을 없앨
뜻을 두었다가도 그로 인하여 단행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옛적에 국왕의 세비(歲費)를 대신 10인분의 녹봉에 해당한 금액으로 정하던 제도[十卿祿之制]에 의거하여 1년
동안 궁중에서 수요 되는 일정한 액수를 정하고 경상적으로 들어오는 경비 중에서 지출한다면 왕의 수요에 관한 지출 외에 궁중의 제반 비용에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니 이렇게 마련한
후에 내수사를 당장 없애버릴 것이다.[내수사를 없앤 뒤에 거기 속했던 노비로서 서울에 거주한 자는 노비가 부족한 각 기관에 나누어 붙여주고 지방에 거주한 자는 각각 그 원적지인
읍(邑), 영(營), 진(鎭), 교(校), 역(驛)의 노비 부족처에 줄 것이다. 그리고 남은 노비는 다른 절[寺] 소속 노비의 예에 의하여 해당 기관에로 몸세를 바치게 할 것이다.
만일 내수사 소관 토지가 있다면 한전(閑田)의 예와 같이 하여 농민들에게 주어 경작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다음 왕자, 왕녀에게 줄 노비는 〈관청에 복무하지 않는 자〉 각
기관과 지방에서 한가히 있는 노비를 줄 것이다.]

성종(成宗) 때에 남효온(南孝溫)이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임금은 전국을 한 가정으로 삼고 동시에 한 궁(宮)으로 삼으며 온 나라의 백성은 한 가족이니 즉 임금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옛 임금은 백성들을 상대로 하여 이끝을 다투거나 재산을 임금의 사유로 저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중에 수요 되는 비용을 대신 10명분의 녹봉[十卿祿]에 해당한
수입으로써 충당하면 궁중의 1년간의 수용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고 지방 고을에다가 사사 집을 지어 본궁(本宮) 농장이라 칭하며 양곡과 포목을 저장하여 두고
일상적으로 백성들을 상대로 하여 상업상 이끝을 다투며 또 중앙에는 내수사를 설치하여 별좌(別坐)이니 서기이니 하는 허다한 인원을 둡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방에 내왕하면서 여지없이
착취하여서 여러 고을에 맡겨 저장하여 두기도 하고 서울로 수송하여 쌓아 놓고 썩힙니다. 그리하여 혹 이것으로 절에 가서 불공도 하고 혹 정당치 않은 귀신을 위하기도 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국가의 재산이 아니라 본궁의 사사 저축으로 한다 합니다. 아아! 세상의 재물은 꼭 일정한 수량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면 국가의 것이며 국가의 것이
아니면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저는 모르기는 하지마는 내수사의 재산만은 우리 백성들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정치상 업적이 멀리 삼대(三代)를
따를 수 있으나 이 내수사 하나만은 당(唐)나라의 덕종(德宗)과 한(漢)나라의 환제(桓帝)의 옳지 못한 제도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니 저는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전하는 공평
정대한 아량으로 만만한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을 불쌍히 여겨 곧 이 내수사를 없애고 거기에 속했던 노비는 장례원(掌隷院)으로 보내며 토지와 양곡은 호조(戶曹)로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 궁중의 사소한 수요를 「왕제(王制)」에 있는 재상 10인분의 녹봉에 해당한 규례대로 정하여 원칙에 어기지 말게 하는 동시에 민심을 위로하여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선조(宣祖) 때에 율곡(栗谷)이 왕에게 글을 올려 이르기를 "내탕(內帑)의 재물은 대부분 불공하는 데 써버립니다. 저는 전하께서 결심 용단하여 궁중과 정부를 일원화하는 견지에서
내탕의 재물을 전부 호조로 돌리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궁중의 사유 저축을 갑자기 없애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이란 일국의 부(富)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국의 재산이 모두다 국왕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그 재산을 절차 있게 수입하고 규모 있게 사용할 뿐이니 하필 따로 사유 재산을 저장하여 임금의 청백하고 광명한
덕을 손상케 하겠습니까? 만일 국고가 텅 비게 되고 군대나 국가의 수요가 참으로 급하게 된다면 궁중 재산도 반드시 그대로 저장할 수 없을 것이니 빨리 해당 기관에로 그 사유 재산을
돌려주는 것이 나을 줄로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응사 패두(鷹師 牌頭)도 없앨 것이다.[국왕의 찬수로 소용되는 꿩은 사옹원(司饔院)에서 사서 쓰기로 하였다. 지금 매군[鷹軍]이란 것이 각 도에 흩어져 있으면서 응사(鷹師)에
소속한 아전들을 위하여 포목 기타 허다한 물품을 징수하는 자가 8천여 명이라 하는바 이것을 모조리 다 없애고 정규군에 편입시킬 것이다.]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사도시(司導寺)：이미 사옹원(司饔院)을 두어 전적으로 왕에게 드리는 음식물에 관한 직무를 맡게 하고 또 제사나 연회 등에 관한 직무를
봉상시(奉常寺)와 예빈시(禮賓寺) 등 기관들에게 맡기게 되었으니 이 내자시, 내섬시, 사도시 등 세 기관은 없애 버려야 한다.

종부시(宗簿寺)：종정부(宗正府)를 설치한 이상 이 기관도 자연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

상서원(常瑞院)은 응당 승정원(承政院)에 합해야 한다. 당나라 제도에도 역시 문하성(門下省)에 부보랑(符寶郎)을 겸해서 두고 부보(符寶)를 맡았으며 패절(牌節)을 출납하였다.

제용감(濟用監)은 상의원(尙衣院)에 합칠 것이다.

내의원(內醫院). 이 기관의 이름을 내약국(內藥局)이라 하고 태의원(太醫院)과 합쳐서 한 기관으로 만들며 혜민서(惠民署)는 태의원(太醫院)에 합칠 것이다.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응당 감찰(監察)을 줄여 버릴 것이다. 상고해 보건대 각 기관에 대한 명령 출납을 살핀다는 그 체계가 아주 폐단만을 일으키고 이익이 없는 것으로 된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감찰이 조회(朝會) 때에 관리의 반열[班]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집의(執義) 이하 여러 관리 중에서 1명을 정하여 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통례원(通禮院)이 있어서 반열을 바로잡는 이상 위법한 자를 지적하는 것은 원래 통례원에서 할 책임이요.[제사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는 봉상시 관리가 의례히 대축(大祝)을 겸임하면서
그 중의 위법자를 지적할 것이다.] 만일 따로 즉석에서 지적하여 논쟁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의례히 대간(臺諫)이 맡아서 할 책임인 것이다. 당(唐)나라 제도에 비록 왕명의 출납을
살핀다는 명문이 있으나 이것은 본래 그릇된 법이요 명(明)나라 관제에도 역시 이런 관리가 없다.[당나라에 있던 소위 감찰이란 것은 곧 각 성(省)기관에 있는 감찰어사(監察御史)요.
우리나라의 현행 감찰과는 다른 것이다.]

사재감(司宰監)도 역시 없애야 한다. 임금에게 드리는 음식물과 제사 및 연회 때에 필요한 어물, 소금, 화목들은 이미 사옹원, 봉상시, 예빈시에서 직접 보관하고 있으며 각 상급
관청에 바칠 화목과 횃불 같은 것도 벌써 지출할 대금 중에 계산되어 있으므로 각 기관으로 하여금 저마다 물품을 바칠 주인을 정해 두고 필요한 때에 갖다 쓸 것이요 궁중에 바치는
화목과 숯 및 홰불 같은 것도 역시 사옹원에서 이것을 맡을 것이다.[사옹원 관리 중에서 한 사람을 이 직무 맡는 책임자로 정하며 하인들도 역시 수직 책임자를 둘 것이다.] 이렇게
하고 이 사재감을 없애 버릴 것이다.[손님이 있을 때에 그 침실에 소요되는 시탄도 역시 예빈시에서 제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목, 목탄, 홰불 같은 것은 다 현재 공물주인(貢物主人)처럼 물품을 사 바칠 사람을 정하며 필요한 때에 공급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궁중 소용은
일상적으로 바치게 되어 있고 또 일정한 수량이 있기 때문에 원래 수요 상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손님이 있을 때에 필요한 난방 소용 물자는 정상적이 아니라 불의에 쓰게
되는 것이니 만일 사람을 정해 두고 사서 바치게 한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라고 한다. 만일 일정한 규정 하에 값을 넉넉히 준다면 비록 불의에 쓰게 될지라도 시내 백성들이나
하인들이 서로 사 바치기를 경쟁할 것이니, 임시 곤란할 것을 걱정할 것이 없다. 만일 사서 바치게 되면 큰 연회가 있을 때에 임시로 소용되는 화목이나 목탄이 난방 소용보다 많기
때문에 곤란할 것 같지마는 소위 물품 납입 주인이란 자가 언제나 준비해 두고 기다리기 때문에 아직 수요 물자가 없어서 곤란한 때가 있었다는 말을 못 들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

수성(修成) 금화사(禁火司)도 없앨 것이다. 성을 보수하는 공사는 이미 공조(工曹)와 선공감(繕工監)이 있어서 맡고 있으며 화재를 금하는 직무는 병조(兵曹)와 금오위(金吾衛)를
두어 돌아다니면서 경비하고 있는 이상 적임자를 골라 맡겨 성과를 거두게 할 뿐이니 무엇 때문에 또 혹달이 관청을 설치하겠는가?

전함사(典艦司)도 폐지할 것이다. 이미 공조와 호조를 둔 이상 이 기관을 둘 필요가 없다.

전연사(典涓司)도 폐지할 것이다. 이미 궁중에 내시[掖庭宦官]와 궁중 하인[掖庭下人][대전(大殿) 별감(別監) 같은 것]을 둔 이상 이것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

전설사(典設司)도 폐지할 것이다. 지금 중국에도 이런 기관이 없고 의장(儀仗)용 장막 같은 것은 다 병부(兵部)에서 맡았으니[낭관(郎官) 한 사람이 주관한다.] 이것은 가장 잘된
일이다. 대체로 차일과 장막을 준비하는 일은 오직 임금이 거동할 때나 큰 연회나 혹 제사 때에 필요하고 그 밖에 다른 데는 차일 장막을 쓸 일이 있더라도 각각 자기 기관에 차일이
있으며 제향(祭享)이 있을 때에는 봉상시(奉常寺)가 이것을 맡을 것이요 손님을 접대할 때나 예조(禮曹)에서 연회를 베풀 일이 있을 때에는 예빈시나 예조에서 역시 자기 기관이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만일 이것을 맡은 기관을 둔다면 아무 일이 없는 평시에도 반드시 허다한 하인들을 두어야만 일이 생긴 즉시로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물품을 운반해 올 수
있을 것이니 이도 역시 처리하기 딱한 일이다. 지금 전설사를 두었다 하지마는 궁중에서 소요되는 장막 등 모든 차비는 다 내시[宦官]들이 주관하며 전설사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위 전설사의 직무란 것은 모든 기관이 공회(公會)가 있는 데를 쫓아다니면서 차비나 해 주는 정도임에도 결구하고 번폐스럽고 옹색한 일이 매우 많으니 이는 다 일을 만들고 다닌
셈이다. 그리고 또 매일 하는 일이란 것은 오직 사사로이 차일 등속을 빌리기 위하여 민가로 돌아다닐 뿐이다. 만일 외국 사신이 올 때에 쓸 것은 특히 차장도감(遮帳都監)을 정하여
이것을 맡기고 물품은 남별궁(南別宮)에 보관해 둔다고 한다.]

조지서(造紙署)도 폐지할 것이다. 다만 조지국(造紙局)을 두되 공조(工曹) 낭관이 이것을 책임질 것이며 만일 직공들을 모아 종이를 제조할 때에는 가서 감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포서(司圃署)도 폐지할 것이다. 지금 중국에도 역시 이런 기관이 없다. 대체 채소 등속도 응당 다른 물품의 전례대로 사옹원에서 사서 쓰는 것이 좋다. 만일 그렇지 않고 꼭 채전을
두어야 한다면 그 토지의 면적을 측량하여 채전 경작자에게 나누어 주고 전답의 규례에 의하여 10분의 1을 받을 것이요 일정한 수량을 사옹원에 바치게 하여 사옹원에서 그 일을 맡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상당한 가격으로 사옹원에 바치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어떤 이들은 값을 주고 사들이는 것은 비용이 많아진다고 아깝게 여기기도 하나 그것은 나라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모르는 소리다. 모든 일을 실정에 맞도록 옳게 마련한다면 비용은 자연 줄어질 것이니 다만 그 조치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질 뿐이다. 만일 경제적 측면으로
따진다면 이 사포서의 관리와 하인들의 봉급만 계산하여도 1년에 천 수백여 석이 될 것이니 아무리 비싼 값으로 살지라도 어찌 이렇게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일의 원칙을 모르고 현재
눈앞에 보이는 작은 비용을 아끼다가 도리어 많은 비용을 내게 된다.]

평시서(平市署)도 폐지할 것이다. 이미 호조와[납세를 조정하고 화물을 고르게 한다.]공조와[도량형기를 단속한다.] 형조와[협잡을 금지하고 소송을 처리한다.] 한성부(漢城府)[시장의
상인들을 단속한다.]가 있는 이상 오직 적임자를 임용하여 그 직무를 잘 집행하도록 노력할 뿐이니 무엇 때문에 또 집 밑에다 집을 지을 필요가 있겠는가?

전옥서(典獄署)도 폐지할 것이다. 그러나 옛 제도에나 현재 중국 제도에도 다 이런 기관이 없다. 예로부터 정위(廷尉)[곧 주나라의 사구(司寇)]는 정위옥(廷尉獄)을 두었고
경조(京兆)에는 경조옥(京兆獄)을 두었는데 모두 자기 기관 내에 두고 관할하였기 때문에 폐단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전옥이라는 한 독립 기관을 만들어 놓고 형조 죄수도
받아 가두었다가 심문할 때마다 그 죄수를 형조(刑曹)로 보내고 심문이 끝나면 또 받아 가두는바 그 다음날에도 또 이와 같이 한다. 그 뿐인가? 한성부의 죄수도 받아 가두었다가
심문할 때마다 그 죄수를 한성부로 보내고 심문이 끝나면 또 받아 가두곤 하여 그 다음날도 또 이와 같이 하는바 지어 사헌부의 여러 기관의 죄수까지도 다 이러한 식으로 한다.[이것은
마치 현재 각 관청 소용 물품을 다 한 기관에다 저장해 놓고 날마다 분배해 보내는 것과 같다. 예컨대 종이는 장흥고(長興庫)에다 전부 갖다 두고 매일 각 관청으로 분배하며 화목은
사재감(司宰監)에다 두었다가 분배해 주며 기타 기름, 장, 소금, 숯, 자리와 같은 여러 물건들을 모두다 이와 같이 하니 그 폐단을 어찌 다 말하랴?] 그러므로 관리의 지위가
저하되어 관리의 체면을 차릴 수 없고 관속과 하인들이 대단히 많으나 그도 부족하다. 그리하여 죄수를 가두었다 내어 보냈다 하기를 반복하여 백방으로 사건의 처리를 지연시킨다. 예를
들면 하루 동안에 조사하여 결정할 만한 사건을 혹 수십 일이 걸리게 되어 그 폐단이 한도가 없으니 이것은 죄다 일이 없는데다가 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니 반드시 이 전옥사를 폐지해야
한다. 그리고 감옥은 형조(刑曹)에 속하게 하고 거기서 직접 주관하며 한성부에도 그의 주관 하에 감옥을 둘 것이다. 만일 사헌부에서 혹 수용해야 할 죄수가 있을 때에는 현재 여러
관청에서 하는 규례와 같이 형조에 통첩하여 가두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일이 합리적으로 처리되어 모든 폐단이 영영 제거될 것이다.[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좋다. 그러나 감옥을 여러 군데 설치한다면 사람을 함부로 가두는 폐단이 없지 않을까? 또 지금 전옥사에서는 죄수를 상부로 올려 보낸다. 그런데 감옥을 갈라 두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한다. 지금 전옥사 감옥이 하나이지마는 여러 관청에서 함부로 가두는 폐단이 있다. 그들의 함부로 가두는 여부는 다만 그때그때의 처리에 달린 것이요 감옥을
가르고 합치는 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죄수를 올려 보내는 것은 두 곳에서도 다 보낼 수 있는 것이니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부(五部)도 역시 폐지할 것이다. 현재 서울 각 구역의 방(坊)과 이(里)에다 정(正)과 장(長)을 두고 한성부가 직접 관리하기로 한 것이니 무엇 때문에 또 오부(五部) 관리를
둘 필요가 있는가? 지금 오부는 조그마한 이익도 없고 공연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규율만 문란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중국 서울에도 역시 이 오부와 같은 제도가 없다.

사산감역(四山監役)도 폐지할 것이다. 이미 각각 산직이[山直]를 정해 둔 이상 한성부에서 그 일을 주관하면 그만이니 무엇 때문에 또 감역관(監役官)을 둘 필요가 있는가? 지어 산을
순시하여 부정 사건을 적발하는 것도 역시 한성부 낭관이 직접 처리할 일이다.

포도청(捕盜廳)도 폐지할 것이다. 악당을 잡아다가 조사하는 직무는 본래 형조가 하는 일이며 또 금오위(金吾衛)를 정식 관청으로 만들어 순회, 경찰의 직무를 맡게 하고 있는 이상 이
포도청은 응당 폐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대전(大典)』 직관 제도에도 역시 포도대장(捕盜大將)이란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기관은 근세에 오면서 설치한 것일 것이다.

겸사복장(兼司僕將), 우림위장(羽林衛將)도 다 폐지할 것이다. 사복위와 우림위를 폐지한 이상 그 장관들도 따라서 없애야 한다. 이 설명은 병제(兵制)에 실렸다.

사온서(司醞署)도 폐지할 것이다. 이미 사옹원을 두었고 내의국(內醫局)에서 또 술을 바치게 되었으며 손님 접대 및 연회 때에 필요한 술은 의례히 예빈시(禮賓寺)에서 준비할 것이니
이 사온서는 응당 폐지해야 한다.

의영고(義盈庫)와 장흥고(長興庫)도 역시 폐지할 것이다. 기름, 꿀 등속은 이미 사옹원, 봉상시, 예빈시에 저장하게 되었으니 돗자리[席子], 유둔(油芚) 등속은 공조나 호조에다
보관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종이는 각 관청의 소요 물품의 경비 중에 들어 있으니 궁중에 바칠 것은 공조에서 현재 필목의 전례에 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다.]

양현고(養賢庫)는 성균관(成均館)에 합칠 것이다.

전생서(典牲署)는 지금 사축서(司畜署)에 합했다.[사축서 관리 중에서 특히 제사용 짐승을 맡은 책임자를 정하는 것이 좋다.]

귀후서(歸厚署)는 선공감(繕工監)에 합칠 것이다.

문소전(文昭殿) 문소전(文昭殿)：조선시대 이태조(李太祖)의 맏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혼전(魂殿)으로서 태조와 태종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

과 연은전(延恩殿) 연은전(延恩殿)：조선왕조 성종왕이 생부를 추존하여 덕종이라 하였으나 왕위에 있지 않았으므로 따로 둔 사당.

의 참봉(參奉)은 벌써 폐지되었다.

소격서(昭格署)도 벌써 폐지되었다.

선전관(宣傳官)도 폐지해야 한다. 중국 역대에도 이런 관리가 없었다. 고려 말엽에 와서 비로소 소식을 선전하는 관리를 두었던바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둔 것이다. 그런데 왕명을
전달하려면 측근에 있는 신하에게 시킬 것이며 만일 급한 일을 전령하려면 내금위(內禁衛) 위사(衛士)를 골라 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직무상 체계를 따진다면 본래 병부에서 맡을
일이며 더군다나 새로 들어온 무사(武士)에게 맡겨서는 안 될 일이다. 『주례(周禮)』를 살펴보건대 호분씨(虎賁氏)가 왕의 주위를 호위하였으며 전쟁이나 열국 제후(列國諸侯)의 집회가
있을 때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즉 왕이 쉴 적에는 왕의 문을 지키고 왕이 서울에 있을 때에는 왕궁을 수위하여 국가에 사변이 있을 때에는 궁문을 수위하며 사대부(士大夫)를 따라
사방에 심부름도 가며 유명한 선비를 부를 일이 있을 때에는 명령서를 받들고 전국에 심부름을 다녔다. 현재의 내금위가 바로 옛적의 호분(虎賁)이므로 왕명을 전달하는 것은 본래
내금위의 직무인 것이다.

근년에 설치한 어영청(御營廳), 총융청(總戎廳), 수어청(守禦廳) 등 여러 관청을 죄다 폐지할 것이다. 이 설명은 병제에 실렸다.

문반, 무반의 잡직(雜職)을 죄다 폐지해 버릴 것이다. 잡직이란 것은 아주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관직이라 하면서도 잡(雜)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아서도 벌써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 만한 것이다. 만일 일반 백성으로서 관청에 다니는 자에게 녹봉을 더 주어야 할 경우에는 의례히 가봉만을 줄 뿐이니 꼭 잡직이란 명칭을 설정하여 놓고야 그들에게 녹봉을 더
줄 필요가 없다.[현재 종 9품 잡직 체아(遞兒)로 승급할 자와 같은 것은 그 녹첩(祿牒)에다 다만 "누구에게 종 9품 녹봉을 올려준다"고 쓰고 있다.]

양계 토관(兩界土官)도 이것을 폐지할 것이다. 토관은 더군다나 부당한 것이니 꼭 폐지해야 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설명은 군현조(郡縣條)에 자세히 실렸다. 이것은 중국의
토관과 명칭이 같지마는 실상은 다른 것이다.

각처 목장 감목관(監牧官)도 폐지할 것이다. 구 법전[舊典]에 의하면 그 지방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겸임케 한 것이다. 그 설명은 목마조(牧馬條)에 자세히 실렸다.[수령이 의례히
겸무하되 차관이 이것을 전담할 것이다.]

각처 권관(權管)도 폐지할 것이다. 별장(別將)이니 소모장(召募將)이니 하는 것도 폐지할 것이다.[지금 권관, 소모장이 있는 작은 성[小堡]은 죄다 줄이고 거기에 있는 군인을 다른
진(鎭)에 합쳐서 각 진(鎭)의 군사 시설로 하여금 규모가 서게 하며 어떤 위험이 생겨날 때에 대처할 수가 있도록 할 것이다. 어떤 작은 성이라도 중요한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데라면 거기에는 바로 첨사(僉使)나 만호(萬戶)를 두어 수비하게 할 것이요 임시로 조잔한 작은 성을 설치해서 아이들 장난처럼 해서는 안 된다.]

권관이란 것은 『대전(大典)』에 없는 제도이다. 혹은 이르기를 "성종(成宗) 말년에 임시로 설치했던 것을 연산(燕山), 중종(中宗) 어간에 그대로 답습하여 규례로 되었으며
소모(召募) 별장(別將)은 곧 임진(壬辰) 전쟁 후에 설치한 것이며 각처의 별장 같은 것은 대부분 인조(仁祖) 이후에 설치된 것이다"라고 한다.

근년에 설치한 각처의 영장(營將)도 없애 버릴 것이다. 이에 관한 설명은 병제(兵制)조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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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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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官因革事宜京中大小諸司 皆設公衙 令長官挈家赴居 如外任之例. 其下諸官則 依令赴坐. 闕內諸司及臺諫ㆍ軍營衙門外大小百司 皆依此而其貳官以下一員 又爲輪直 如今例.按古者 雖丞相府ㆍ御史府
亦皆率眷以居. 下及魏ㆍ晉猶然 此意極是. 今百司爲空舍 有如旅店 雖有應文開坐 不得連續 且皆忽忽而罷 非唯不成官府軆面 凡事渙散遲滯 至於外方呈牒之人 無端底留 非賂下吏則官員不知 百事之害
不可盡言. 至於京畿監司 亦不居於京營 而聽事於私家 其弊尤甚.罷備邊司以復相府之任. 祖宗朝 宰相日坐政府以總百官之政. 若有會議事則令六曹合坐 或會議於賓廳以決之 百官參謁禀事 亦皆於政府矣.
備邊司之設 始於明宗乙卯初 因邊寇而設. 今則內外細大事 皆歸於備邊司 而政府有如影職廳 官方失紀 其害深遠. 宜罷之以復舊制.罷各司提調. 罷各司提調 專任其長官責成. 而事當禀決或啓判者
則禀其屬曹判書爲之. 判書有故則次堂上 代爲之.今 各司盡有提調 率皆數員以上. 夫諸司各有長官 又諸司統於六曹 而六曹旣有判書諸堂上 則復設提調 是故爲紛亂而使無統紀也. 今之各司百爲皆弊
而文簿日煩 長官漫不省事者 皆由於此唐季以來 諸司領使是也. 考之前史 其得失亦可見. 或曰"提調固當罷 然若醫司ㆍ掌樂院ㆍ觀象監ㆍ司譯院之類 則爲其屬曹之長者 未必皆通其藝
別擇諸宰中精曉其術者爲提調 使同總察亦好."曰此論 以目前俗情則甚爲便好 而深思之則小益大害. 蓋設官分職 要在必得其人而已. 諸司之官 苟得其人則自有其長官ㆍ敎授以相敎訓 至於以時考試
而總察其政則德合六卿之任者 雖未必盡通其藝 亦可使有其藝者 得盡其才矣. 且夫有其德而有必盡其職之誠心 則雖己所未通者 必自爲博資於人 而期於善其事 朝廷則當責任以專而已. 若先自朝廷
慮其或未偏長而不專責任 則其弊終至上之任人 下之任職者 皆不思必愼必難 而以苟任循例爲常事矣. 若然則雖有提調 豈必通其藝者 爲之提調乎? 徒紊官紀 輕責任而已 其害甚大. 此意不可言盡 精思之
自可識之矣. 至於內藥房進御醫藥 則宰相百司之政 固皆總紀况係君上疾病醫藥乎. 雖不名以提調 自當體察其事 譬如人子之於親病 豈必名以醫藥色 而後 盡心於醫藥乎? 如事大ㆍ交隣文書
亦宰相議於朝廷而擧行者 非必兼承文院 提調而後 得與其事也.六曹判書 於其所屬司 每春秋巡至開坐 考察諸事 如外方監司 巡列邑之爲. 判書有故則次堂上 代爲之. 不但常時屬司 稟事於六曹 六曹堂上
亦必如是. ○春秋巡坐外 如有事亦不拘時開坐. 凡諸堂上及郎官一二人 幷會本司 諸官亦合坐. ○凡巡坐 只如常時坐衙 各自家供而已 愼勿開供設酒食之路. 犯者雖微必論罪 至於下吏尤宜嚴禁.御供
當立一衙門以專掌之 罷令諸司逐日進排之規. 不使如今諸司 逐日進排 而司饔院專掌之. 依中朝制 商量一歲御供支用之物 凡物皆優定其價倍簁簁常直. 以御需所定米錢 分藏本院而給定貿納人 如今貢物主人之爲
精備直納本院. 如醬醋酒醢之類則自本院精造藏貯以用 各有主者次知 該官監飪以進. 如此則非但萬弊皆除 御膳 極其精潔矣. 今御供雜物 如魚肉鹽醬油醋醢葅之類 亦皆各藏諸司 逐日升合進排 其節節煩擾
興賂病國之弊 已不可勝言. 而畢竟御供 亦不得精美. 必如此然後 事皆得宜 而冗司可合 冗官可省矣.嘗見漢官甚省約 蓋皆治事之官 而御供只是一司故也. 非獨在昔爲然 歷代以至皇明皆然. 我國設官
諸寺監之數 三倍中國 而太半爲御供所係立制 如此安得不弊? 此皆無事中生出多事也.丘濬曰"周膳夫 食官之長也 卽今光祿寺之職. 秦時 爲大官令 漢始有光祿勳. 然乃持戟宿衛之官 以之司膳羞 始於南北朝
唐宋因之. 今制光祿寺 有四局 曰大官 卽周禮庖饔之任. 曰珍羞 卽周禮籩人之職. 曰良醞 卽周禮酒正. 曰掌醢 卽周禮醢人是也. 是寺又非特供王后ㆍ世子之膳羞而已 祭祀牲俎ㆍ賓客饔餐
皆在所司."大小職官 旣爲酌事以設 皆專其任 罷今兼職之規.今設官過濫 而以他官兼之者甚多. 以故 所謂淸顯官則其職銜 常過數行 人習耳目 反以爲美而不覺其非 其害遂使百職責任皆淺 而終爲浮靡之歸
是豈授職任官之意也?按古者 設官分職 各專其任而已. 兩漢 亦未聞有兼職之事. 魏晉之際 雖事多苟且 亦無其規. 自唐以來 始有兼領 宋因五代之弊 諸司例多兼職 官紀紊亂 莫極於此.
至於本國官制則大抵倣宋以後而爲之 以故 大典職官 書以他官兼者 十居六七 所以今日官無責任之弊 至於斯也. 苟泝古今而觀其效驗則其可法可監 當自見矣.都監乃後世之弊 當革其規. 今 朝家一有事爲
輒別設一司 名之曰都監. 廣出堂上ㆍ都廳ㆍ郎廳ㆍ吏隸以行之 事已還罷 雖尋常易辨之事 亦然. 夫設官分職 將以應事也若有事 每爲別設官司則平時何用分峙百司也? 蓋此高麗衰季之習而因循成例者 宜革此弊.
官必擇人 令各任其職 而臨時各其攸司當之. 非別段大事 則不復別設都監.醫司ㆍ觀象監ㆍ司譯院 亦皆擇人定任 罷今遞兒之規. 無定祿而四時考講 以其分數 遞相高下付祿 謂之遞兒.
○今三醫司ㆍ觀象監ㆍ司譯院 雖有正ㆍ副正以至參奉諸官 然皆以遞兒. 此法乍看似好 而甚爲非宜 其害 乃使官無體統 上下無序 率以匪才 苟充應文而已. 當依諸司例 有定品有定祿而一年兩講 以其高下分數
參於術業效否 爲其殿最之等可也. 然正ㆍ副正及敎授則初必審擇累效精深者以授 而不可試講. 但以職事修否及諸生能否 爲功過也. 唯寫字官ㆍ畵士ㆍ樂工之類 陞降其祿可也.宗親ㆍ駙馬 階資 當同文武官.
宗親ㆍ儀賓 本與百官同是一階 不必別名其資也. 中朝亦無此規.○仁祖初 議者言"今 備局專主國政 而政府爲閑局. 政院只事出納 而承旨爲一該吏. 別設都監而本司反歸剩官. 數遞官員而省ㆍ寺 有同郵舍
不管文書而吏胥得以弄法. 職多兼帶而無專責之實事歸曹司而無分職之意. 課責不明而瘻曠成習 此皆官制之弊也. 蓋自署事之法廢 三公無論政之所. 於是別設備邊司 以宰臣知軍務者爲堂上 以武班之識字者爲郎廳
以爲酬應邊務之地 而朝家政令 無所裁斷 不得不並歸備局. 自此 贊成ㆍ參贊 爲養病之坊 舍人ㆍ檢詳 爲妓樂之司 其舛謬甚矣. 我國之人 浮華無實 翺翔臺閣 自謂淸流 專不事事 而機衡之重 反歸
於無物望之宰相ㆍ略識字之武夫 如是而望治 不已左乎? 宜遵祖宗之法 復設署事之規然後 政令出一而綱紀立矣. 今 承旨卽古之侍中尙書之任 而中朝之內閣也. 國之大小文書 莫不關由於此 凡政令之利病
君德之得失 大臣ㆍ臺諫 未得聞者 獨承旨知之. 其任之重爲如何而今之物望 反在三司之下 只得奉行文書而已 鮮有論執之事? 宜極擇時望以充其選 使之隨事封駁 密贊王猷也."然 徒有是言而竟無施焉.宗親府
周禮 小宗伯辨三族 父子孫也. 之別 掌其門子之政令. 門子適子 將代父當門者也. 晉有公族之官 掌公之宗族 以卿大夫之適子爲之. 左傳成公十八年 晉以荀會 欒靨韓無忌 爲公族大夫 使訓子弟恭儉孝悌
則是公族之官 掌公之宗族而主其訓戒者也. 漢置宗正之官列於九寺. 皇明置宗人府而宗人令 宗正等官 陞秩一品 專以皇親爲之 然此亦掌其皇族之政令者也. 若其諸宗親之以親封爵則自載朝廷令典
而吏部依法奉行而已. 雖以時聚會於府 亦不直爲此府之職也. 我國官制則無宗正等有掌之官 而直以諸宗親 盡列以爲此府之職 與古制有異 實非設官分職之意也. 改以從古爲當. 忠勳府ㆍ儀賓府
大槩皆然.忠勳府 此府前代所無 麗朝亦無所謂勳臣之府. 我太祖 初設忠勳司以主勳券. 世祖時 又陞忠勳司爲府 班視兩府 置經歷ㆍ都事 加賜田民. 考之中朝官制 吏部職掌 有稽勳驗封司而亦無勳臣之府矣.
至於忠翊府則尤前代所無者也.儀賓府 此府中朝所無 麗朝亦無所謂駙馬之府者. 蓋古者王姬 嫁於諸侯而已. 至漢始公主有邑 故置家令 掌理其事 然已非古意. 若近世則公主家 但自公給祿而已. 旣是私家
無公務 焉用置吏? 唐中宗 令公主開府置官屬 袁楚客數時十失 皆悖理紊紀之事 而此居其一 綱目書之 亦可見其是非也. 若其諸駙馬 敎戒禮會之政則已屬於宗正府矣. 今雖有儀賓府
只是虛設而駙馬終身無一開坐事 郎官亦無一事. 但每歲 投刺諸駙馬家 與之飮酒而已.周制 王姬嫁於諸侯 以同姓諸侯主之 公者諸侯之尊稱 故謂之公主. 後漢荀爽上疏曰"漢承秦法 設尙主之儀 以妻制夫
以卑臨尊 宜改尙主之制 以稱乾坤之位."凡婦人無爵 從夫命之爵 坐以夫之齒. 至秦漢 婦人始有封君之號 有邑司之制.敦寧府 古制及中朝無此司 麗朝亦無之. 王室姻戚 當定其典制 推其恩厚而已.
如犯罪議減及雖不入學 給田依士科 勿定軍役之類. 若夫授官任職 則無論親疎遠邇 一唯德選 豈可限以此內而擇人乎? 進退無所當者也. 我國蔭取才之規 亦如此. 不但是府 爲虛設之司而已 因此入仕轉遷百職
今世軍民之寄 多非其人者 固無足怪也.中樞府 此亦前代所無者. 夫無所任者之祿 在宋 有祠官祿 大明制則無所任者 一切無祿. 然或有許以錄秩閑住者 蓋仕而以病遞官者 亦不可全絶其祿 宜定爲著令.
堂上以上及臺諫侍從官 或以非罪過而見遞 不可絶祿者 給其本品半祿 其有給全祿則有特旨然後 爲然. 以待有闕而已. 此府則當省罷也 豈有無所任而開設衙門之理? 且今軍職 亦爲祿無官者而設 而倂於五衛
故稱爲軍職. 此乍看似好 而考其實則非徒無益 又使兵紀散漫紛擾 其害不細 軍職亦幷罷之. 凡無官而受祿者 其參朝賀則序於本品之末.義禁府罷之. 此府當罷 說見刑曹下. 古無此司 麗末有巡軍萬戶府本朝初
改爲義勇巡禁司 又改今名. 其官皆以他司官兼帶. 蓋旣有刑曹則難於又置正官而然也 亦可見其苟且携紊也. 其爲當罷 不須更疑也.或曰"禁府 合於刑曹 誠爲當矣. 但刑曹郎官隸卒
不無不足之患否."曰"旣爲稱是而置 又何不足乎?"曰"今禁府都事拿來領去等事 以何官乎?"曰"刑曹郎官 旣爲優置 刑曹郎官 受傳旨以去. 若或有大獄 郎官不足則今禁府亦有假都事之例
依此差假郎官以送之. 京近則或以金吾衛郎將 亦可矣."曰"當直郎廳則有無如何?"曰"刑曹郎官一員 輪直於當直廳."原從功臣 當改革其規 幷罷忠翊府. 其有功而未及正勳者 自當加資 或賞賜以酬之.國典
原從功臣 別立忠翊府 其子孫勿限世爲忠贊衛 則其事體甚重是必恐其濫錄正勳 於功臣中 別其差等之意. 然 錄功旣分三等以第之 其不應入於三等者 隨其功之大小 加資或賞賜以酬之 本不當立此原從之名也.
况今所謂原從者 非必身有功者也? 功臣子弟婿姪 例爲得參 功臣敎書製述書寫者及錄功都監使喚吏僕 會盟宴時侍陪下人 亦皆得參 此何樣事理耶? 蓋自中廟靖國時 朴元宗輩 專委柳子光勘勳. 奸人欲錄其子弟
故先爲悅人之計 不論有功無功 一時卿宰 無不收錄. 又錄其子弟奴隸 皆入原從 錄功之濫 蓋始於此爾.掌隸院 奴隸之政 本屬刑曹 故刑曹職掌 有掌隸司. 及至奴婢漸多 詞訟不勝其繁 世祖朝 始分刑曹所掌
別置掌隸院. 此乃中國歷代及前朝所無之司也 當罷無疑. 但今事勢如此 姑存之 待改奴婢法詞訟漸簡然後 罷之以復舊制.司諫院 此司當省罷. 古者諫無官 自漢以來 始置諫官 論者以爲開廣言路
殊不知言路之狹 自置諫官始也. 公卿輔弼之臣 朝夕納誨 隨事規諫 而百工各執其事以諫 以至草野之微 亦令直言. 如此則德無不脩 事無不正而眞可謂開廣言路矣 豈可以諫爲名 別設一司乎? 後世 凡事不成
皆由於論說多門 臺諫之害 亦甚非細. 但今用人不古 公卿輔弼 未必皆得其人 而或有賴此把持者 難遽盡罷 則依中朝制 只置司憲府可也. 中朝都察院 卽我國司憲府.按雖置司憲府 其風聞按事則不可不審.
後世臺諫 風聞言事 始於唐武后. 胡致堂論之曰"武氏以法制羣下 許諫官御史得以風聞言事. 其興姦慝 來讒譖 傷公道之符契乎! 朝廷者 衆正之原 是非所仰以決 譖愬所望以明 毁譽所賴以公.
人心服與不服一在是焉. 彼風聞者 得於道聽塗說 或兩怒溢惡 豈皆眞實? 遽然按之以施刑罰 其差失多矣. 旣以風聞 多不審諦 被言者 又泯默被罪 不得申理 而寃結無告
傷平明之政亦甚矣."又丘濬曰"後世臺諫 風聞言事 始於武后 前此未有也. 宋人因按以爲故事 而說者遂以此 爲委任臺諫之專 嗟乎! 此豈治朝之事哉? 夫泛論事情 風聞可也. 若乃訐人陰私
不究其實而輒加以惡聲 是豈忠厚誠實之道哉? 夫有是實而後 可加以是名 有是罪而後 可施以是刑. 苟不察其虛實 一聞人言 卽形之奏牘 寘于憲典 嗚呼! 莫須有 何以服天下哉? 我朝著爲憲綱
許御史糾劾百司 不公不法事 湏要明著年月 指陳實跡 不許虛文泛言 搜求細事. 蓋恐言事者 假此以報復私讎 中傷善類也."藝文館罷之. 旣有弘文館ㆍ春秋館 不當置藝文館. 罷之而凡學士能文者
但擇帶知製敎爲當.春秋館本掌記時政. 高麗忠宣王 以文翰署 爲藝文春秋館 設修撰ㆍ檢閱等官 後分爲二館 今檢閱ㆍ待敎ㆍ奉敎. 自是 史官而乃爲藝文館官者 蓋有此也. 宜以史官 移爲春秋館官
而正其官名陞爲參上秩可也. 又按古者 太史掌建邦之六典以逆邦國之治 掌法以逆官府之治 掌則以逆都鄙之治. 正歲年以序事 頒朔于邦國大祭祀ㆍ會同ㆍ喪事協相焉. 讀誄賜諡外 史掌四方之志ㆍ三皇ㆍ五帝之書
達書名于四方. 是乃明於天象而驗於人事 達於治體而掌典故 兼記其言動也 其制官之意 深矣. 是以 古者 非其人不處 稱其職則終其身. 後世 設官於其名號之間 可見 其意之苟舛 而又以資轉 故史官
尤爲驟遷之任 尙何足言? 今縱不能悉復古制 必定其官秩 擇人久任然後 庶乎官不失職也. 嗚呼! 非獨此一司 百司皆然. 自冢宰職任已失古意者 多矣. 設官之意 旣如彼 用人之道 又如此 而及其官無稱職
事功日隳則談者 又從而稱之曰世自漸降 無可奈何 不知孰甚焉. 君相之有志於治者 宜深究其本末而一以正之也.經筵 旣置師傅 而弘文館職是論思 凡近侍皆規補道義之任 則自當皆參講論也 不必別以經筵二字
列於職官而兼帶二字者 得參講席也. 蓋我國如宋朝 不置師傅之官 故不得已別設此號 使爲兼職也.讀書堂選亦罷之. 書堂賜暇 亦前代所無. 蓋出世宗朝一時特命 而其後因成規例 今則爲文翰極選.
恭惟世廟睿思 蓋欲令年少文臣. 姑停職務 覃思經術以需後日之用 甚盛意也. 然古者 敎士庠序 取其學成材達者 論升入仕. 旣仕則各事其職 又安有旣爲入仕 而帶職廢務 令開堂讀書也? 只爲後世科擧取士
入仕者止習章句詞藻 而未嘗究心經術 難以與議於政治 故不得已如此也. 其後則又漸失祖宗本意 但爲文詞之選而反長驕逸浮華之習 非徒無益 實爲深弊. 蓋古者 立學敎士 無非修己治人之術 而無詞藻之習.
設官分職 皆是爲民治事之官 而無衍餘之員. 以學道之人而職以治事 故能以道制事 事各得宜 功用興而世臻治平. 後世 敎養旣失 設官多冗 治事之官 指爲吏職 而所謂名士者 必處以文詞淸宴之官 故任職者
多是庸下之輩而文詞養望者 尤無所用. 是以淸淡(談)盛而學術事功日以交喪. 此晉唐以來莫大之弊 而世道興衰之大機軸也. 爲人君者 不可不致謹於設官之際 而凡別立文詞之司 衍餘逸豫之官
一切盡罷以復古制也.文詞淸談之害 非止無實用而已 論談一變而爲朋黨阿私 朋黨旣盛則終至斁喪綱倫 此事勢之必至者也.訓鍊院官罷之. 武選旣爲精選 而該曹以時試鍊 五衛之官 旣任其職 而使務鍊習
則所謂訓鍊院官 本是虛設而尤爲當罷矣. 但存其院廨 修置射圃 卽射場 以爲習武之士馳射之所 如各色鍊武廳之制可也. 但定院直五人 使居其側 看護院廨可也.中國官制 無如此者 前朝亦六衛之外
無他西班官. 夫國家設官將以擇其才之已優者而任之耳. 安有旣選人授官 而無所任之理? 且無師弟子 而虛名爲訓鍊可乎?都摠府罷之. 都摠府之設 實非古法. 旣有兵曹以摠五衛之政
則何爲贅設一司以携貳之乎? 凡此類 皆後世苟且之意 無益而有害者也. 或曰"兵權必分屬乃古制 而此謂後世苟且之意 何也?"曰分屬者 各有分領而不偏專 非故爲携貳而無統紀之謂也. 今主兵 旣分五衛
則其分已多矣. 兵曹雖總其政 皆領於朝廷 而事皆稟旨而行 亦無所專矣. 如此而又設摠府 每事皆與按同 則是故爲携貳之矣. 古制無如此者.耆老所 此亦前代所無. 蓋國老ㆍ卿大夫之老
則人君當以禮養老於太學 以至庶人耆老之應在優典者 該曹掌其政令 以時致賜米肉而已 本不當虛設衙門也. 大凡官司不當設而設 則非徒爲虛設而已 必有其弊. 旣設衙門則當有吏胥ㆍ僕隸 無所事而設吏隸給廩料
豈理也哉? 且今此司 皆是有勢力宰臣 故田園ㆍ魚箭ㆍ鹽盆之屬 紛紜折受 其間吏胥輩 作弊八方 侵虐生民等事 不可勝言.內需司罷之. 內需司之當罷 今有口者皆能言之. 府庫財 莫非人君之有 何爲別畜私財
自喪其德也? 但人君內間種種微細之用 或有難於每關外府者 累朝雖亦有意於罷 而以此留難. 若準古國君十卿祿之制 恒定一歲御需之數 以經稅畫入則御供之外 自當爲宮中之需 如此而內需司則直罷之.
罷內需司則內需奴婢京居者 分屬各司之不足處. 外居者 各屬本邑及本地營鎭校驛之不足處. 其餘則依他寺奴婢 納貢於該司. 若有內需田地 則自當依閑田與民受耕. 若後日王子女 所賜奴婢 則以各司及外方閑居
(不役於官者) 奴婢賜給.成宗朝 南秋江 孝溫 上疏曰"人君以天下爲一家 四海爲一宮 天下四海之民 一家人也 吾赤子也. 是故 古之人君 不與民爭利 不蓄私藏. 其宮中所需則十卿祿
祿十倍於卿則一歲宮中之需足矣. 今則不然 各於州郡 建立私第 稱爲本宮農舍 私蓄米穀布帛 日與民爭利 而又於京中 立內需司 置別坐數員 書題許多人 往來州郡 誅求無厭 督諸縣私藏 漕運上來 蓄積紅腐.
或以之營寺社 或以之修淫祀 曰非關於國廩 乃本宮私藏. 嗚呼! 天之生財 只有此數 不在民則在國 不在國則在民. 臣不知內需司之財 獨不出於吾民乎? 我朝治道 遠追三代 而內需一司
因循漢桓ㆍ唐德之古事 臣竊恥之. 願殿下 廓公明之量 痛小民之弊 亟革是司 奴婢屬掌隸院 田地米穀歸之戶曹 其宮中私需 依王制十卿祿 以全大體 以慰民心."宣祖朝 栗谷上疏曰"內帑之財 多歸於奉佛.
臣請斷自聖心 視宮ㆍ府爲一體 悉以內帑 付之戶曹. 議者必以內藏不可猝廢爲辭 此則不然. 人君富有一國 倉廩府庫 莫非吾財 只在取之有節 用之有度而已. 何必別爲私藏以累淸明之德耶?
若使府庫一空而軍國之需方急 則內帑之財 必不爲私蓄矣 不若早歸有司之爲愈也."鷹師牌頭罷之. 御供所用雉 則自司饔院貿用. ○今名以鷹軍 散在各道 爲鷹師所掌吏輩 徵納布疋雜物者 八千餘人云.
宜悉罷之屬正軍.內資ㆍ內贍ㆍ司導寺 旣有司饔院專掌御供 而祭享ㆍ賓燕等事 又有奉常ㆍ禮賓等寺掌之 此三司則當罷之.宗簿寺 旣立宗正府則此司 自當省罷.尙瑞院當合於承政院. 唐制亦門下省
兼有符寶郎而奉行符寶 出納牌節矣.濟用監合於尙衣院.內醫院名爲內藥局而與太醫院 通爲一衙門. 惠民署 合於太醫院.司憲府當省監察. 按同諸司出納 則有弊無益之甚者 本無可言.
其朝會糾正官班則執義以下諸員中 定一員爲之可也. 蓋旣有通禮院 以序班則其擧正其不如法者 本是通禮之任. 若祭祀則奉常寺官例兼大祝 擧其不如法者. 若欲另卽彈劾 則宜以臺諫莅之也. 古制姑不暇論
漢時亦無如今監察之任者. 唐制雖有察出納之文 本是弊法. 大明官制 亦無是任. 其所謂監察者 乃各省監察御史 非我國監察也.司宰監亦當罷之. 御供ㆍ祭享ㆍ賓燕所需
魚鹽ㆍ燒木則已各爲直藏於司饔院ㆍ奉常寺ㆍ禮賓寺ㆍ各上司進排燒木炬火 則已爲計入於所給鋪陳 雜物價中 而令各司 自爲定主人資用矣. 大內所進 燒木炭炬 亦宜自司饔院主之. 本院官員中 定一人爲掌色
吏隸亦有主直者. 如此而此司則罷之. 賓客時 寢房所用柴炭 亦自禮賓寺供之.或曰"燒木炭炬之類 皆定貿納人 如今貢物主人之爲而以資需用. 然大內所用則有常進有定數 固無慮於備納矣.
若賓客煖房所需則其用也 有時而不常 或難於定人貿納耶?"曰苟定其式優其價 則雖有時不常 都民ㆍ僕隸輩 爭求爲貿納之人而準備以納 臨時艱乏非所慮也. 若謂難於貿納則其燕饗 亦有時所入柴炭 多於煖房
而所謂主人者 預備以待 未聞有虧闕何也?修城禁火司罷之. 修城則旣有工曹ㆍ繕工監ㆍ禁火則有兵曹ㆍ金吾衛巡警 唯在得人擧職而已. 又奚用贅設衙門也?典艦司罷之. 旣有工曹戶曹則此司 不當設.典涓司罷之.
旣有掖庭宦官ㆍ掖庭下人大殿別監輩也. 則此不當別設也.典設司罷之. 今 中朝無此司 而儀仗供帳等 皆兵部掌之 郞官一人主之. 此最爲得. 大凡典設供帳 惟擧動大賓祀等事有之 自餘雖用帳設
諸司皆有遮帳. 如祭享所用則奉常寺主之 賓客所用及禮曹押宴之類則禮賓ㆍ禮曹 亦當以其所有用之也. 若設司則常時 雖無所用 必多備徒隸之盛然後 臨事可得奔走諸處 運致帳具矣 此亦難處者.
○今雖設司御帳諸具則皆宦官主之典設司不與焉. 其所謂職務者 諸司公會處往設 而其煩弊苟且之事極多 皆無中生有者也. 此外則日日所爲 唯私借遮帳 輪遍閭家而已. 若勅使時所用則別造遮帳都監次知
而藏貯於南別宮云.造紙署罷之. 但置其局 工曹郎官掌之. 若聚工造紙時則往監之 可也.司圃署罷之. 今 中朝亦無此司. 蓋蔬菜等物 宜如他物例 自司饔院 貿用爲當. 若不然而未免有田則量定田數
分授圃民 依米穀例 輸什之一 定其數式而納于司饔院 司饔院主其政可也. 然終不若給定貿納之爲善也. 或以給價貿納 惜其費多 是未知爲國之道也. 凡事得正得宜則自然省費 唯當問合宜與否而已. 苟計費多少
則試算此司官員吏隸之祿 歲可千數百餘斛 貿雖優價 豈至此乎? 是以惜小費於 目前而不顧事理者 每反多費也.平市署罷之. 旣有戶曹 掌均稅斂ㆍ平貨物.工曹 掌謹度量權衡ㆍ 刑曹 掌禁濫僞ㆍ治爭訟.
漢城府 治市廛人民. 唯務得人 平其政令而已. 又何用屋下架屋也?典獄署罷之. 古制及中朝 皆無此司. 自古 廷尉 卽周之司寇. 有廷尉獄京兆有京兆獄 各在其司故無弊. 我國則別設典獄一衙門於他處
而刑曹所囚 受而囚之 每坐 送其囚於刑曹 坐罷還來 又受而囚之 明日又如是. 漢城府所囚 受而囚之 每坐 送其囚於漢城府 坐罷還來 又受而囚之 明日又如是. 以至於憲府諸司 無不如是.
此正如今各司所用凡物 皆貯於一司而進排諸司也. 今紙則都藏於長興庫 而逐日進排於諸衙門. 燒木則都藏於司宰監 而逐日進排於諸衙門. 其他油ㆍ醬ㆍ鹽ㆍ炭ㆍ席子百物 無不皆然 所以其弊不可勝言. 是以
官員賤卑 不成爲官. 吏隸極繁 猶患不給. 囚縲上下 遲滯百端. 一日詰問當決之事 或至累旬 其弊無窮. 此皆無中生事者也 所當罷去此司. 置獄於刑曹 而刑曹直主之. 漢城府則置獄於本府 而本府主之.
若司憲府則或有當囚者 依今諸曹例 移文刑曹而囚之. 如此則合於事理 永絶諸弊矣. 或曰"如此極當矣. 但諸處置獄則不無濫囚之弊否? 且今該司上其囚徒 雖分置 亦可上否?"曰今雖一獄 諸司任意囚付
濫不濫 只係其時 不係獄之分合也. 若其上囚徒則雖兩處皆可上之 有何異乎?五部罷之. 當各坊里 皆設正ㆍ長而漢城府 直理之 何爲更設五部官? 今五部 未見一毫之益 而徒見無中生事 長煩擾隳綱紀而已.
中國京府 亦無有如五部者矣.四山監役罷之. 旣各定山直則漢城府 主治其政而已. 豈可更設監役官乎? 巡山摘奸 亦宜漢城府郎官 直爲之.捕盜廳罷之. 詰姦慝 本是刑曹職掌 而旣又令金吾衛爲定職衙門
主巡警捕姦盜 則此廳自當罷矣. 大典職官 亦無所謂捕盜大將者 必是近世添設也.兼司僕將ㆍ羽林衛將 皆罷之. 兩衛已罷則其將自當罷. 說見兵制.司醞署罷之. 旣有司饔院而內醫局 又供香醞. 賓客燕享之用
則自有禮賓寺 此署固當罷之.義盈庫ㆍ長興庫 亦罷之. 油蜜等物 旣各藏於司饔院ㆍ奉常ㆍ禮賓等寺. 席子ㆍ油芚等物 藏於工曹或戶曹 可也. 紙地則諸司所用 已入於其紙地雜物價中.
若大內進排則自工曹依今筆墨例 爲之可也.養賢庫合屬於成均館.典牲署今已合於司畜署. 以司畜署官員中特定典牲色 可也.歸厚署合於繕工監.文昭ㆍ延恩殿參奉 今已罷之矣.昭格署今已罷之矣.宣傳官當罷之.
中國歷代 無如此設官者. 高麗末 始有宣傳消息 本朝因以有之者. 宣御命 當使以近臣 若傳令急事 則以內禁衛士擇使 可也. 若形名則本是兵部所掌 尤不當以新出武士 主之也. 考之周禮
虎賁氏掌先後王而趨 軍旅會同 亦如之. 舍則守王閑 王在國則守王宮. 國有大故則守王門. 適四方使則從士大夫. 有徵事則奉書而使於四方. 今之內禁衛 卽古之虎賁也. 傳御命
本內禁衛之任也.近年添設御營廳ㆍ總戎廳ㆍ守禦廳等諸衙門 悉罷之. 說見兵制.東西班雜職 悉罷之. 雜職苟且之甚者 旣謂官職而名之以雜 可見其無所當矣. 若庶人在官之類 有當受加祿者 則但當加其祿而已.
不必設爲雜職以名之然後 乃加其祿也. 如今陞受從九品雜職遞兒者 則其祿牒但云"某人陞受從九品祿."兩界土官 罷之. 土官尤無所當者也 當罷無疑. 其說詳郡縣條. 此與中朝土官
名同而實異者也.各處牧場監牧官 罷之. 依舊典 以本地守令兼任. 其說 詳牧馬條. 守令例 爲兼察而貳官 專掌之.各處權管罷之. 別將ㆍ召募將 亦罷之. 今權管ㆍ召募將等小堡 當盡省之 移合其軍於他鎭
使列鎭形勢 成得模樣 緩急可恃. 設或此等小堡 有眞據形要者 則當直設僉使ㆍ萬戶 又不可權置殘堡 有同兒戱也.權管 大典無之. 或云"成宗末年權設之任而燕山中宗間 因循成規."召募別將
乃壬辰亂後添設. 若諸處別將 則多仁祖以後所設者.近年添設各處營將 罷之. 說見兵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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