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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성지(城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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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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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성지(城池)

[상고하여 보면 성지와 군용 수레는 비록 병조[兵部]에 속하였으나 성을 쌓고 수레를 제조하는 일들은 본래 공조[冬官]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무릇 성은 어느 정도로 크고 작게 할 것인가를 잘 타산하여 되도록 지형과 실용에 맞게 쌓아야 한다.[성은 비록 작고 공고해야 한다고 하지마는 우리나라의 각 고을에 쌓은 성들은 너무
협작하여 그중 어떤 것은 한두 부락의 주민도 수용할 수 없으니 너무나 타산 없이 한 것이다. 이런 것은 응당 넓게 개축해야 하며 새로 쌓는 것은 반드시 모든 실정을 잘 타산하여
그에 적합하게 해야 한다.]

상고하여 보면 성이 너무 넓으면 방어하기에 곤란하고 협소하면 수용할 면적이 없기 때문에 알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옛날에는 5판(板)[8척이 1판이다.]이 1도(堵), 5도가
1치(雉)[2백 척] 백 치가 1성(城)[2만 척으로 되었는데 6척이 1보(步)이며, 2백 보가 1리(里)가 되니 즉 둘레[周] 11리 22보 2척이다. 백 치는 바로 공(公)작과
후(侯)작의 성 규묘이다.] 천자(天子)는 천 치, 공작과 후작은 백 치, 백(伯)작은 70치, 자(子)작과 남(男)작은 50치로 되었다. 이는 대개 천자의 직속 영지[畿內]는
평방 천 리로서 그 성은 천 치이며[혹은 백 치되는 성 열을 차지한다고도 한다.] 공작과 후작의 영지는 평방 백 리로서 그 성은 백 치이며 백작의 영지는 70리로서 그 성은
70치이며 자작과 남작의 영지는 50리로서 그 성은 50치이다. 또 주(周)나라 제도에는 천자의 성은 평방 12리[주위[周] 48리], 공작의 성은 평방 9리[주위 36리],
후작과 백작의 성은 평방 7리[주위 28리], 자작과 남작의 성은 평방 5리[주위 20리]로 되었으니 이는 대개 『주례(周禮)』에 공작들의 영지는 평방 500리, 제후들의 영지는
평방 400리, 백작들의 영지는 평방 300리, 자작들의 영지는 평방 200리, 남작들의 영지는 평방 100리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이렇게 제정한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두 시대의
성(城) 제도가 비록 같지 않다 하더라도 다 일정한 규정이 있어서 영지의 대소에 알맞게 제정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주와 군(郡)의 성들도 역시 그 고을의 대소와 인구 및
물산의 다과를 타산하여 적합하게 쌓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산과 계곡이 많고 평지가 적으므로 고을들은 대부분이 산에 의거하여 성을 쌓고 있다. 이 성들을 비록 다 평지에서처럼
일매지게 하기는 어렵지마는 옛날 제도를 참작하여 해당 지방 지리의 형편에 맞도록 하는 것이 옳다.

또 역사를 상고하여 보면 수양(睢陽)성 안에 사는 주민이 수만 호였고 즉묵(卽墨) 즉묵(卽墨)：지금 산동성에 있는 지명인데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 전단(田單)이 이 성을 지키고
있다가 적에게 강점당한 제나라의 전국을 회복하였던 성.

성에서는 소[牛] 1천여 두를 얻어냈다고 하였다. 수양성은 당(唐)나라 때의 큰 고을이니 물론 그렇게 흥성하였을 것이나 즉묵성은 열국(列國)의 한 개 속읍으로 3년 동안 포위되어
갖은 곤란을 겪은 끝에도 오히려 소 천여 두를 내었으니 평시에 이 성에 사는 주민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록 장순(張巡), 전단(田單)과 같은 장수라
할지라도 그 성들을 보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각 고을의 성들은 실로 형편이 없어서 그 대부분이 한 부락의 주민도 수용할 수 없다. 이러고야 어떻게 사람들에게 성을
지키라고 책임을 지우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성지는 반드시 그 규묘와 제도를 정확히 제정하여 부락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우리나라의 고을들에는 성이 없는 곳이
상당히 많다. 혹 성이 있다 해도 너무 협착하여 주민들을 수용할 수 없으며 또 어떤 성은 관청 소재지와 따로 떨어져 있어서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내가 일찍이 『주서(周書)』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고구려의 서울은 평양성(平壤城)인데 성안에는 다만 군량과 병기를 저장해 놓고 침략군이 당도할 때에야 성안에 들어가서 지킨다. 국왕은 그 옆에 딴 집을 지어 놓고
평소에는 거처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옛날 미개한 유습인데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다 개혁되지 못한 것이다.]

1\. 성을 쌓는 것은 반드시 농사 시기가 아닌 때를 택하여야 하며 군인들을 징발하되 반드시 규정에 의하여 번과 부역을 시키며 규정 외에 징발하거나 부역을 연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무릇 성을 쌓는 공사는 반드시 사기가 아닌 겨울에 해야 하며 바쁜 때에 백성을 동원하여 농사일에 방해되게 해서는 안 된다. 무릇 성을 보수하는 적은 공사는 다만
경부(頃夫)나 삯꾼을 부릴 것이나 개축(改築)이나 신축(新築)과 같은 공사는 거창하니 군대를 시켜서 쌓야 하는바 먼저 사업량의 대소를 계산하고 공사에 필요한 일꾼의 수를 정확히
타산하여 정규군[正軍]만을 동원하고 그 보(保)를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 보병은 30일간 부역을 시키되 한 차례의 번(番)과 그 기간의 연습 및 사격 시험을 면제하며 기병[騎軍]과
속오군은 15일간 부역을 시키되 1년간의 연습 및 사격 시험을 면제해야 한다. 대개 관청은 식량을 공급하되 열흘에 쌀 세 말로 규정하고 부역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잘 먹여서
보내야 한다. 무릇 성을 쌓는 공사가 있으면 지방의 원근을 타산하고 근방 가까운 여러 고을의 군인으로서 징발할 인원수를 계산하여 성을 쌓는 공사를 떼어 맡기며 반드시 일시에
모여들어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건을 참작하여 한 차례에 천 명 혹은 수천 명을 초과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계속 차례로 이르게 하고 또 부대 배정을 정확하게 하여
노력을 남비하거나 일에 손실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 시기에 준공 못했다면 공사를 중지하여 명년에 다시 계속하더라도 절대로 빨리 준공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영구하고
견고하게 쌓을 것을 목적해야 한다. 무릇 각 고을 군사로서 공사에 참가한 자들은 비록 성을 쌓은 지방 장관의 통솔을 받아야 하나 그들의 장관이 영솔하여 오며 작업을 감독하게 해야
한다. 무릇 이런 공사가 있을 때에는 승려들도 마땅히 예에 의하여 부역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수를 정확히 제정하여 주어야 한다. 상세한 것은 태승(汰僧)조에 있다.]

상고하여 보면 군인들이 한 달 부역을 하면 두 달의 번을 면제하며 또 연습과 사격 시험을 면제하여 준다. 또한 급료와 보(保)가 있으니 군인들이 부역을 하여도 고통으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서울이나 각 도 병영에 번서는 군인이 대단히 많다. 그러나 평시에는 특별히 맡은 임무가 없으니 일부 인원을 이동하여 공사의 일부를 떼어 부역을 시켜야 한다. 그
급료미[料米]는 소요 수량을 계산하여 축성하는 고을의 조세(漕稅)에서 남겨 놓고 또 그 군대의 보미(保米)를 넘겨받으면 넉넉히 비용을 충당할 것이다. 만일 보부(保夫)가 서울
근처에 있어 성을 쌓는 고을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평상 예에 의거하여 서울로 갈 쌀과 교환해도 좋다. 이와 같이 하면 군인들에게 부역을 시키더라도 별로 고통 받을 것도 없을 것이나
그들의 노력과 휴식을 타산하여 주와 군에 성을 쌓을 곳이 있으면 두어 해씩 사이를 두고 차례로 쌓아도 괜찮을 것이다.[우리나라 사람들은 안일하여 모든 일을 다 되는대로 해 버린다.
심지어 성지는 더욱 형편이 없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고을마다 다 성이 있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의 10개 성을 쌓는 힘을 합하여 차라리 하나의 성을
쌓더라도 반드시 영구하고 견고하도록 할 것이며 그 제도에 의거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을 되는대로 하는 습속의 역사가 이미 오래되어 말로써는 깨우쳐 주기 어렵다. 그러므로 반드시
한 곳에 먼저 성 하나를 규정에 의하여 쌓아 놓고 다른 곳으로 하여금 본뜨게 하는 것이 좋다. 만일 난리를 한 번 겪고 난다면 모두다 그 이해(利害)를 알게 될 것이며, 습속도
역시 변해지게 될 것이다.]

또 상고하여 보면 성을 쌓는 것은 거대한 공사니 그 고을의 힘으로 쌓을 수 없다면 반드시 조정에서는 이웃 고을과 힘을 연합하여 쌓게 해야 한다. 옛날 형성(邢城)과 초구(楚丘)성과
같은 것은 다 영주들의 힘을 연합하여 쌓은 것이니 일례로 된다. 그 부역을 하던 군인들은 비록 성 소재지의 책임 장수의 통솔을 받으나 반드시 그 본 고을의 장수에게 자기 군대를
인솔하고 와서 부분적 공사를 책임지게끔 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할 뿐만 아니라 공사도 빨리 끝나게 된다. 무릇 많은 사람을 한 곳에 모을 때에는 혹 의외의 사변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것도 역시 옛사람들이 사업하는 방식이다.

2\. 무릇 성을 쌓을 때에는 절대로 군인을 많이 동원하여 한때에 급하게 쌓지 말고 마땅히 지리를 측량하고 사업량을 타산하여 인원수를 나누어 공사를 떼어 맡겨야 한다. 공사에
동원된 인원을 좌, 우 군으로 나누고 각기 지휘관을 두며 매 10명에 1명의 패장(牌長)을 지정한다.[본래 군대의 대장(隊長)으로서 지정하거나 혹 공사에 동원된 군인들 중에서
적당한 자를 선택하여 지정하여도 좋다. 매 5명에 오장(伍長)이 있으니 이것은 물론 군법에 의한 것이다. 또 30명에 도패(都牌) 1명을 지정한다.] 또 매 백 명에 감장(監將)을
두어[또 5백 명 혹은 천 명마다 별장(別將)을 두어야 하나 모두 사업에 따라 실정을 참작하여 지정하는 것이 좋다.] 각각 그 공사를 책임지고 반드시 영구하고 견고하도록 쌓게
한다.[매 책임진 곳에는 반드시 아무 부대가 쌓았다고 돌에다 새겨 두며 혹 건축한 것이 규정에 맞지 않거나 겹쳐 쌓아서 무너지게 생긴 데는 당장 개축(改築)하게 하며 10년 내에
무너진 경우에는 해당 감장(監將)과 영장(領將)을 논죄하며 각기 그 군대를 인솔하여 자신이 식량을 부담하면서 고쳐 쌓아야 한다는 것을 미리 인식시켜야 한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무릇 성을 쌓을 때에 높이 5장(丈), 아랫너비 2장 5척, 윗너비 1장 2척 5촌으로 한다면 그 공수[功]를 아래와 같이 계산한다.
아랫너비와 윗너비를 가하면 3장 7척 5촌이 된다. 그것을 둘로 나누면 1장 8척 7촌 5푼으로 된다. 거기에 높이 5장을 승하면 1척 성을 쌓는데 필요한 양이 9백 37척 5촌이
된다. 매 1명의 공수가 하루 흙 2척을 쌓으니 총 공수를 계산하면 대략 47명의 노력을 요하게 된다. 즉 1보(步)[5척]의 성을 쌓는 데는 2만 3천 5백 명의 노력을 요하며
100보의 성을 쌓는 데는 2만 3천 500명의 노력을 요하며 300보의 성을 쌓는 데는 7만 500명의 노력을 요한다. 이것을 1리(里)[300보] 비율로 한다면 10리의 성을
쌓는 데 필요한 토량과 몇 짐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총 공수를 계산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만일 성 해자[城壕]의 윗너비 2장, 깊이 1장, 밑 너비 1장으로 파려면 윗너비에다 밑 너비를 가하고 둘로 나누면 1장 5척이 되는데 거기에 깊이 1장을 승하면
해자 1척에서 파내는 흙이 15장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 1명이 하루에 3장을 파내게 되므로 총 공수를 계산하면 5명의 노력을 요한다. 1보(步)를 파는 데 필요한 공수는
25명, 10보의 공수는 250명, 100보의 공수는 2천 500명, 1리의 공수는 7천 500명의 노력을 요하니 이것을 비율로 하여 따지면 10리를 파는 데 필요한 공수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상고하여 보면 이것은 중국의 평지에 쌓는 성의 토공 일꾼들을 계산한 것이다. 만일 험한 산에다 돌이나 벽돌로 쌓게 되면 응당 그 지형 조건과 인력으로 할 사업의
고난 여부를 참작하여 타산하여야 한다. 요즘 듣건대 입암(笠巖) 산성(山城)을 개축할 때에 서쪽 2천 보의 부분을 승려군[僧軍] 6천여 명이 돌을 운반하여다가 쌓는데 11일 만에
공사를 끝냈다. 그리고 공사가 쉬운 곳은 매 2보에 3∼4명, 어려운 곳은 7∼8명이 완료하였다고 하니 대략 2보에 평균 6명이 들었다. 이것은 옛 성을 고쳐 쌓은 것이니 만일
새로 쌓는다면 30일간 부역을 시켜야 될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가령 성을 높이 쌓고 해자[池]를 깊이 파서 지금의 성과 같이 낮고 약하게 하지 않고 영구성이 있고 견고하게
쌓더라도 매 2보에 12명으로 하여 30일간 부역을 시키면 될 것이다.]

상고하여 보면 근년에 여러 산성들을 수축하는 것은 대부분 군인들을 동원하여 열흘간이면 완공하나 매년 무너지기 때문에 그것을 보수[補築]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고통만을 무한히 준다.
그러나 결국 울룩불룩하여 가소로운 성이 되고 마니 어찌 그것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리라고 기대하겠는가? 과연 이렇게 성을 쌓으려면 차라리 쌓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오직
남한산성(南漢山城) 만은 조금 완전하고 견고하여 믿을 만하다. 그러나 이 성도 3년 만에 완공했다. 대개 그때에는 지휘관과 아전들이 성지의 규모와 제도에 서툴러서 공수를 상세히
계산하지 못하고 공사 지도를 명확하게 하지 못하여 이미 쌓은 것이 도리어 허물어져서 다시 쌓은 데가 많다. 무릇 공사의 대부분이 두 벌 일을 하였기 때문에 실지는 1년에 마칠
공사를 3년을 낭비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면 사업을 맡은 자가 먼저 규모와 제도를 연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또 듣건대 옛날에나 후세에 여러 성들을 수축할 때에 아전,
장교(將校)로부터 상급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 뇌물을 받으며 혹 병역을 면제하여 주고 대가를 받거나 혹 지면례(知面禮), 견장례(見將禮)와 같은 것으로 주식을 토색하여 먹기도 하고
포를 부역 대신에 받기도 하여 애잔한 군인만이 받는 그 고통이란 차마 말할 수도 없다고 한다. 무릇 지금은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키고도 급료를 주지 않으며 번을 면제하지도 않으니
이것은 모두 공으로 하는 부역으로서 가련한 정성이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나 관리배들은 이렇게 발라 먹을 줄만 아니[승려군[僧軍]이나 승려 두목[僧將]들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오늘의 지휘관들이나 아전들은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남의 것을 뺏아 먹는 것이 일상 습관으로 되었기 때문에 염치를 돌볼 줄 몰라서 일마다 그렇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한심할 일이다. 인재를 선발하여 쓰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니 모든 일이 잘될 수 없는 것이다. 저 정치를 하는 자들로서 무엇보다 임금의 마음을 먼저
바로잡고 백성들에게 교양할 줄을 모르면서 사업에서 성과만 얻으려는 자가 있다면 이야말로 정치를 하는 요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고려 말기에 헌사(憲司)가 임금에게 요청하기를 "각 도 주와 군의 산성은 국가에서 왕왕 사신을 파견하여 수축하는데 대부분 군인들을 동원시켜 몇 날 안 가서 준공하나 금방 허물어져서
그 폐단이 막대합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사신을 보내지 말고 지방 장관에게 근처 고을의 군인들을 징발하여 농한기에 수축케 할 것이며 만일 그 공사가 완공하지 못하면 중지하였다가
명년에 다시 계속하도록 연중행사로 규정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3\. 대체 성 높이는 반드시 5장 이상이 되어야 하고[성 높이는 다 가퀴[垜] 높이를 제하고 말한 것이다. 서울 큰 성은 반드시 6장 이상이어야 하고 산 위에다 쌓는 성은 그
지형을 참작하여 높이를 적당하게 해야 한다. 주척(周尺) 주척(周尺)：자의 일종인데 이 자의 6촌 6리가 목척 8촌 9푼 9리에 해당함.

으로 10척을 1장(丈)이라고 하는데『기효신서(紀効新書)』에는 성 높이를 3∼4장으로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관척(官尺) 관척(官尺)：자의 일종으로서
영조척(營造尺)이라고도 하는데 즉 지금의 목척임.

으로 말한 것이니 주척의 길이에 비하여 실로 배가 되는 것이다.] 가퀴 높이는 10척이 되어야 하며 성 밑에서 40척 밖에 해자[壕]를 파며 해자의 너비는 반드시 40척, 깊이는
20척 이상으로 하고[깊고 넓을수록 좋으며 거기에 물을 채우면 더욱 좋다.] 해자 변두리는 반드시 벽돌로 쌓아야 한다. 무릇 성은 밑으로부터 20척까지는 엇비슷하게 기대어 쌓으며
20척 이상은 점차 사직선(斜直線)으로 쌓는다.[왜성(倭城)도 이렇게 쌓는다.] 성의 치(雉)와 옹성(瓮城)과 우마장(牛馬墻)은 다 『기효신서』의 규정[法]에
의거하였다.[『기효신서』에 가퀴 50개마다 치(雉) 하나를 둔다고 하나 응당 그 지형을 참작하여 설계할 것이다. 대체로 치는 성 밖으로 40∼50척을 덧붙여서 쌓는데 가로 길이가
60∼70척 되는 것이다. 해자 변두리에 우마장(牛馬墻)을 규정대로 쌓으나 만일 산성의 지형이 험한 곳이나 해자에 물이 깊은 데는 우마장을 꼭 쌓을 필요가 없지마는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쌓아야 한다. 만일 치를 쌓을 곳에 포루(砲樓)를 쌓으면 더욱 좋다. 포루를 쌓는 법은 아래에 있다. 이렇게 하면 우마장을 쌓을 필요가 없다.] 해자 밖에는 길을
내야하며[길 너비는 40∼50척] 성 밖의 3백 보 이내에는 집을 짓지 못하게 하며[서울 성[都城]은 4백 보 이내이다. 산에다 성을 쌓아 가팔라진 데는 백 보 이내로 한다.]
성안 20보 이내에도 집을 짓지 못하게 한다.[서울 성은 30보 이내이다.] 무릇 평지에 쌓는 성은 안쪽을 반드시 평평하게 하지 말고 안팎의 높이를 모두 똑같이 쌓아야 하며[그
모양을 담장과 같이 하나 두껍게 쌓야 하나니 중국의 성도 이렇게 쌓는다.] 골짜기 우묵한 곳에 쌓는 성은 성 안팎에다 제방을 쌓아서 해자를 만드는 것이 좋다.[산을 의지하여 쌓은
성의 한쪽이 평지까지 잇닿게 된 데는 그 안팎에 못이나 해자를 만들되 깊고 넓게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물의 긴요성이 산만 못하지 않아서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성 밖의 금지
구역 내에 집을 지은 자가 있으면 곤장 백 도를 치고 그 가옥을 헐어 버린다.]

상고하여 보면 우리나라는 산이 가파르고 내[川]가 좁으므로 주와 군의 성들은 거의 산밑에 대어 쌓기 때문에 성이 매양 산보다 낮게 되는 것이 유감으로 된다. 또 성이 계곡을 걸쳐서
쌓는 것을 곤란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오직 지형의 편리하고 적당한 곳을 선택할 것이며 계곡을 걸쳐서 쌓는 것을 곤란하다고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일찍이 중국의 기록들을
보았는데 남방의 절강(淅江)과 소흥(紹興) 등지의 성과 같은 것은 다 큰 냇물[大水]을 걸쳤는데 수문(水門)을 3중(重), 4중으로 설치하고 배들도 그 물을 따라 출입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재정으로서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그에 관한 기술을 잘 발휘하고 지리를 잘 타산하여 설계한다면 냇물을 건너서 수축하는 것을 기피할 것은 없다고
본다.

4\. 성 높이를 50척으로 하려면 밑 너비를 30척으로 하며 반드시 안팎을 쌓아 올린 뒤에 흙을 부어 안을 채울 것이며 쌓으면서 바로 흙을 부어 돌이 흙에 의지하거나 흙과 돌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한다.[무릇 성을 전부 순 돌로 두껍게 하며 면을 갖준하게 쌓는다면 아무리 큰 장맛비가 오더라도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만약 바깥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아 돌이 흙에 의지한다면 비록 안에 돌과 흙을 섞어 넣더라도 겨울에는 흙이 얼어 부풀고 여름비에는 흙이 습한 데가 있게 되어 얼마 가지 않아 허물어지게 된다.
만일 중국의 성과 같이 안팎 높이를 똑같이 쌓으려면 아랫폭을 반드시 80척 이상, 윗폭을 30척이 되게 쌓아야 한다.] 성의 기초 공사는 반드시 땅을 깊게 넓게 파고 굳게 다지며
먼저 큰 반석을 깔고 그 위에 돌을 3∼4척 채운 뒤에 돌로 높게 쌓기 시작한다.[여기서부터 돌로 엇비슷이 쌓는다.] 다시 흙으로 그 바깥쪽을 무릎에 닿을 만큼 메우고 전부
다진다.[산에다 쌓는 성은 기초를 닦을 때에 산등성이에 하지 말고 반드시 등성이 밖에다 하여 성을 쌓은 뒤에 성가퀴가 산등성이와 평면이 되게 해야 한다. 그 기초는 깊고도 넓게
파며 굳게 다지되 규정대로 해야 한다.] 성의 중둥[城腰] 이하는 정으로 큰 돌을 쪼아서 길이로 쌓고 중둥 이상은 벽돌로 쌓되 다 석회로 사이를 발라서 쌓는다.[이렇게 쌓으면
영구히 견고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돌이 많은 곳이라도 성을 절반도 쌓기 전에 가까운데 있는 돌을 다 주어 쌓게 되어 먼 데 있는 돌을 운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그를 운반하는데
드는 힘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벽돌을 구워서 쓰는 것이므로 노력이 훨씬 적게 드는 것이다. 척남당(戚南塘)이 말하기를 "성을 쌓는 데 있어서 벽돌이 첫째요, 돌이
둘째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옳다.] 가퀴[垜]는[즉 여장(女墻)이다.] 반드시 벽돌로 쌓고 석회를 이겨서 바른다.[벽돌을 쌓을 때에는 반드시『기효신서』의 식과 같이 쌓아야
한다. 만일 돌로 쌓는다면 가퀴의 사이나 구멍을 규정과 같이 쌓기 어려우며 또 쉽게 무너진다. 우리나라 성들의 가퀴는 높이가 두어 자 밖에 되지 않아서 사람의 허리에도 닿지
않으므로 적의 탄환을 피하지 못하며 가퀴 사이가 너무 넓어서 사람이 들어가도 여유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가퀴의 밑이 메산(山) 자 모양으로 되어 더욱 적이 올라오기 쉬우며 높은
구멍이 있고 낮은 구멍이 없어서 아주 방어에 불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퀴의 높이를 반드시 10척(尺)이 되게 쌓으며 가퀴의 사이도 절반쯤 올라와서 사이를 두게 하되 그 사이를
좁게 하고 양옆이 등성이가 지게 하여 좌우편으로 보면서 사격하기에 편리하게 해야 한다. 또 가퀴의 높은 구멍을 낮은 구멍으로 개조해야만 성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 『기효신서』에 있다. 또 근래에 여러 성들은 모두 석회로 바깥면을 바르는데 1∼2년이 못 가서 다 떨어지니 백성의 노력만을 낭비할 뿐이며 추호의 이익도 주지 못한다.
만일 석회를 완전하게 바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한쪽만을 하고 내년에 남은 공사를 계속 할지언정 쌓는데 만큼은 반드시 석회를 발라서 쌓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척남당(戚南塘)에 묻기를 "여러 지방의 성들은 모두 옛 제도대로 쌓았는데 만일 『기효신서』의 식대로 다 개조하려면 경비도 대단히 많이 들 것이니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척남당이 대답하기를 "옛 성을 다 이 법대로 개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힘이 부족하고 진척하기 어려운 일을 어찌 고려하지 않으랴? 그러나 새로 쌓는 성은 그냥
그전 식대로 쌓게 할 수는 없다. 성이 허물어지면 개축해야 하고 해자가 메이면 파내야 될 성이야 어찌 이 식대로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옛 성을 통채로 다 개조하기는 물론
곤란하다. 그러나 가퀴의 사이를 고치는 것쯤은 비용도 그리 많이 들지 않으니 왜 이 식대로 하지 않겠는가? 평시에 성을 뜯어고치는 것은 백성들의 격분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적이 이르게 될 때에 모든 사람의 지향에 따라서 개조할 양을 참작하여 이 식대로 고칠 수 없겠는가? 1척을 개조하면 1척의 이익이며 10척을 개조하면 10척의 이익이 되는 것이니
다만 시기에 따라 적당하게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계주[薊鎭]의 3둔(屯)과 준화(遵化)현의 성도 고북(古北)구로 통하는 여러 군데에 새로 수축한 변방 성[邊墻]들과 같이
모두 이 식에 의하여 개조하고 있다. 이 말은 헛소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실을 보고 미리 연구하여 안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5\. 성에는 포루(砲樓)[혹은 적루(敵樓)라고도 한다.]를 만드는 것이 제일 긴요하다. 그 제도는 치(雉)를 만드는 법과 같으나 치는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좌우로 사격하게 되어
있지마는 포루는 바로 성 밑까지 속을 비워서 여러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며 좌, 우와 전면에다 포 구멍을 많이 만들었다.[3면에 있는 포는 구멍은 벽돌에다 석회를 발라서 쌓는데
바깥쪽은 좁고 안쪽은 넓게 만들어서 사격하기 편리하도록 하였다. 또 구멍 위에는 두 장이 맞붙은 벽돌을 얹혀 우마장(牛馬墻)을 만드는 식과 같이 하여 밖을 내다보기 편리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처음 그 벽돌을 만들 때에는 모형을 떠서 만든다.] 아랫구멍에는 천자(天字), 지자(地字), 현자(玄字) 총을 걸고 그 윗구멍에는 승자(勝字) 총을 걸고 그
위에는 누(樓)를 지어 활을 쏘고 바라보는 곳으로 한다. 만일 적이 성 오른쪽으로 달라붙으면 오른쪽 구멍에서 포를 쏘고 왼쪽으로 오면 왼쪽 구멍에서 포를 쏘며 앞으로 오면 정면
구멍에서 포를 쏜다. 이렇게 해 놓으면 아무리 큰 성[萬堞之城]이라도 수백 명을 시켜 넉넉히 방어할 수 있고 성 하나에 10여 개의 포루만을 설치하더라도 백만의 적병이 감히
얼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유서애(柳西厓) 『징비록(懲毖錄)』에 이르기를 "옛날의 성은 다 치를 쌓았는데 치는 곧 지금의 곡성(曲城)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일 성에 치를 쌓지
않는다면 비록 가퀴 하나에 사람 하나씩 지키고 가퀴 사이에 방패를 두어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나 탄환을 막는다 하더라도 성 밑에 기어든 적을 보고 막을 수 없는
것이다.『기효신서』를 보면 가퀴 50개마다 치 하나를 쌓되 성으로부터 밖으로 20∼30척쯤 나가게 하고 두 치의 사이는 가퀴 50개의 거리로 한다. 치 하나가 가퀴 25개씩을 맡고
있어서 화살 위력이 가장 힘을 나타내는 거리이다. 치에서 좌우 편을 살피면서 사격하기가 편리하니 적이 성 밑에 얼씬할 수 없게 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내가 안주(安州)에
있었는데 하루는 청천강(淸川江)에 나갔다가 하나의 묘안을 생각해 내었다. 안주성 바깥면에 지형을 잘 이용하여 따로 불거지게 성[凸城]을 쌓되 치와 같이 그 속을 비우고 사람을
수용할 수 있게 하며 전면(前面)과 좌우에 포 구멍을 내어 포를 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위에는 포루를 쌓되 두 포루의 사이를 600∼700보 혹 1천 보 가량 되게 한다.
포루에는 대포를 걸어 놓고 포에다 새알만한 탄환 두어 말씩 장치하여 두었다가 만일 적이 성 밖에 집결하면 양편 포루에서 집중 사격하여 사람이나 말은 말할 것도 없고 쇠와 돌이라도
모두 부서지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만 한다면 비록 다른 가퀴에 방어 인원을 두지 않고 수십 명을 포루만 지키게 하더라도 적이 감히 얼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성을 방어하는
가장 묘한 방법으로서 제도는 치를 본뜬 것이나 효과는 치에다 비할 바 아니다. 두 포루 사이에 적이 감히 얼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소위 운제(雲梯)나 충차(衝車) 등도 모두
소용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에 즉시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이 묘안을 보고하였고 그 후 경연(經筵)에서 여러 번 제의하였으며 또 사람들에게 그 시설을 보고 본뜨도록 하였으나
지금까지 낡은 성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한 곳도 실행한 데 없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유서애가 "전수기이(戰守機宜) 전수기이(戰守機宜)：전투와 방어에 관한 요체라는 뜻.

"10조(條)를 지었는데 그 중 성 방어[守城] 조에 이르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군사면에 있어 가장 서툰데 그중 성을 쌓는 한 가지만 보더라도 아무 타산 없이 다만 산 형세에 따라
모양만을 성 비슷하게 쌓을 뿐입니다. 옛날의 성 쌓는 제도는 50개 가퀴마다 치 하나를 설치하였는바 소위 가퀴[垜]란 것은 곧 지금의 여장(女墻)이며 치란 것은 곧 지금의
곡성(曲城)이다. 가퀴의 높이가 10척 남짓하기 때문에 가퀴 안에서 사람이 마음 놓고 서서도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여장은 겨우 두어 척 밖에
안 되니 성에서 방어하는 자가 허리를 굽히고 기어 다녀도 적의 탄환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첫째 결점입니다. 두 가퀴의 사이는 좁고 작아야 좋습니다. 겨우 사격하고 감시할
수 있게만 만들어서 적이 넘어 들지 못하도록 되어야 바로 성의 건축 설계가 세밀하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성은 여장의 사이가 넓고 커서 왕왕 두어 사람씩 들어갈
수 있으니 이것이 둘째 결점입니다. 곡성도 극히 드물게 설치하여 한 성에 한두 개가 있을 뿐입니다. 서울의 큰 성으로 다만 동대문 밖에 옹성(甕城)이 있을 뿐이며 곡성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이 치가 없는 성을 어디다가 쓰겠습니까? 이것이 셋째 결점입니다. 성 위에 아무리 방어하는 군인을 많이 배치하더라도 그들이 내려다볼 수 없으면 성 밑에 다가붙은 적을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근세 중국 성에는 가퀴에다 구멍을 내는 제도[懸眼之制]가 있는데 그 법은 가퀴 안에서 밖에까지 나오게 구멍을 내어서 성 밑에 있는 적을 발견하고 전멸시킬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이 방법이 가장 좋으나 다만 벽돌을 만들어야만 이룩할 수 있으므로 지금 졸지에 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외에 또 우마장(牛馬墻)을 만드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 밖에 있는 해자[壕] 변두리에 담장을 한 길쯤 높게 쌓고 아래에 큰 구멍을 내어 대포를 쏘게 하고 중간에는 작은 구멍을 내어 작은 포를 쏘게 하며 특별히 용력이 있는
사람을 지키게 하며 성 위에 있는 사람과 함께 유기적으로 싸우게 하는 것이니『기효신서』에 '어디에나 이것만 만들어 놓으면 백만의 침략군이 오더라도 문제없다'고 이른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력을 많이 요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인원을 보내어 방어하게 되니 오늘 우리나라의 힘으로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의 포루를 설치한다면
이상에서 말한 곡성이나 포의 구멍[懸眼]과 우마장의 제도를 겸할 뿐만 아니라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지극히 간단하고 용이하여 실수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중봉(趙重峰)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임금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기를 "제가 여행 시에 보건대 요양(遼陽) 서쪽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길은 몽고[胡地]와 가장
가깝습니다. 이 지대에서 만리장성에 잇대어 긴 담장을 쌓고 해자를 파 놓았으며 매 5리마다 연대(烟臺) 연대(烟臺)：봉수대와 같은 뜻으로서 성이나 국경 혹은 바닷가의 산에 대를
묶고 봉화를 들던 것.

를 두고 연대 밑에 적은 성이 있고 연대 위에 집이 있습니다. 성의 네 모퉁이에 각각 패옥(牌屋) 패옥(牌屋)：중국 만리장성 위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은 집.

을 지어 놓고 모두 기와로 영을 이었습니다. 또 성 밖에는 해자를 파고 해자 밖에는 담장을 쌓고 담장 밖에는 깊은 구덩이를 두어 겹으로 파고 구덩이 밖에는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서 아무리 침략 군대[胡兵]가 몰려오더라도 말을 타고 덤비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안에는 군인 5명이 한 조가 되어 살림을 하면서 지키게 하며 군인 한 명에게 월급[한 달에 은
2냥 5전씩]을 줍니다. 그들은 성 가에 있는 공지를 경작하여 생활하고 있으며 만일 사변이 있을 때에는 해변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거기에 모아서 방어합니다. 15리마다 하나의 적은
상점[鋪]을 두고 30리마다 큰 상점 하나씩을 두었는데 성이 점차 넓어지면서 인가가 점차 많아졌고[우가장(牛家莊)에는 상시 일정한 군대가 있으며 겨울에는 증가하여 1천 명이 있다고
합니다.] 장비한 기계가 아주 완비되면서 수비도 대단히 주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이 혹 무너진 데가 있으면 관청에서 돈을 내어 수리한다고 합니다. 산해관 안에는 비록
연대와 대성(臺城)은 없으나 15리에 적은 상점 하나, 30리에 큰 상점 하나씩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주와 현의 성들은 모두 견고하고 웅장하게 구축되어서 아무리 강적이
침입하더라도 공포를 느끼지 않고 자신 있게 방어하게 되었습니다. 명나라는 이렇게 험한 지대에다 방어 시설을 하여 놓고 국경 수비를 하고 있으니 방어 시설이 과연 잘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평안도와 함경도의 국경 지대에 장성(長城)이 있기는 하나 말도 뛰어넘을 수 있으며 연대를 쌓아 놓았다고 하나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연대 위에다 성을 쌓아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초가집 한 간, 문 하나도 없다.] 그리하여 모진 바람과 눈보라 칠 때 홑옷 입은 수비군이 얼어 죽는 자가 많으니 적의 침략을 대기하지 않고 도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누가 이런 성에서 목숨으로 지키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각 주와 진(鎭)에 있는 성은 더욱 형편이 없어서 만일 침략군이 들어온다면 모두 단박 넘어오지 못할 데가
없으며 성안에 있는 사람이나 물자도 대단히 스산하니 거기에 있는 남녀를 전부 동원하여 방어한다더라도 성의 모퉁이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남쪽 여러 도의 해변을 말한다면 적의 배가
닿을 만한 곳에 어민들의 부락이 즐비하니 적이 상륙하여 진탕을 칠 만한 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런 포구에다 성을 쌓고 많은 무기를 준비하여 두었다가 위급한 때에 방위를
엄하게 한다면 왜적이 감히 배에서 내려 상륙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만일 성을 쌓으려고 백성을 동원한다면 성도 완공하기 전에 백성의 힘이 진하여 방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제가 듣건대 각 도 병영(兵營)에는 매년 사사로이 저장한 식량이 수천씩 되나 다만 개인의 청탁에 주어 버리며 기타 포백(布帛)도 쓸데없이 적치해 둔 것이 많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병조(兵曹)에서 해마다 받아들이는 포(布)를 쓸데없이 저장해 둔 것이 대단히 많다 합니다. 만일 저 병조 판서[兵判]나 병사로 된 자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칠 생각을
가지고 개인의 생활에 넘겨쓸 생각이 없다면 이상의 포와 쌀을 내어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면서 성을 쌓는다면 1년에 두어 성을 완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도
내수사(內需司)의 저장물을 내어 그 비용에 보태어 쓰게 한다면 저 국경의 장수[邊將]들이 아무리 미련한 자라 할지라도 전하의 지극한 성의에 감동되어 사사로이 써 버리는 포를 내어
성 쌓는 비용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강항(姜沆) 강항(姜沆)：임진왜란 때 의병 투쟁을 하였고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복견성(伏見城)까지 잡혀 갔으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옥중에서 일본의 지리, 관직 및 그들의 모든
정황들을 은밀히 기록한 『간양록(看羊錄)』을 선조 왕에게 바쳤으며 1600년 귀국 후에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저작에 노력하여 『운제록(雲堤錄)』, 『건거록(巾車錄)』,
『강감회요(綱鑑會要)』, 『좌씨정화(左氏精華)』, 『문선찬주(文選撰注)』 등 서적을 저작한 사람.

이 말하기를 "제가 일본에 있을 때에 그들의 성들을 보았는데 반드시 외딴 산꼭대기나 강이나 바닷가에 쌓되 상봉우리를 평편하게 만들고 그 4면을 깎아서 원숭이도 오를 수 없게
하였으며 성 밑은 넓고 위는 뾰족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의 네 모퉁이에는 높은 다락을 지었는데 가장 높은 것은 3층으로 하고 최고 지휘관[主將]이 거처하며 군량과 군기의 창고를
다 그 다락에다 두었습니다. 성에는 문 하나를 내고 그 한 길로만 출입하게 하고 성 밖에는 긴 담을 쌓았는데 그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담 중턱에는 두어 보(步)마다 포 쏘는
구멍을 냈으며 담 밖에는 해자를 팠는데 길이를 80∼90척 되게 하고 강물을 끌어다 대고 있습니다. 또 해자 밖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강이나 바닷가 가까운 곳에는 배가
거기까지 내왕하게 되었으며 훈련된 용감한 군인들을 그 성 주변에 살게 하였습니다.[그 까닭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외딴 산 위에다 쌓은 것은 우리는 적을 내려다 볼 수 있지마는 적은
높은 데서 우리를 눌러 칠 수 없게 하자는 것이며 강이나 바닷가에다 쌓는 것은 다만 한쪽만을 방어하게 되는 것이니 방어에 힘을 적게 들이고 성과를 배로 얻자는 것이다. 성 밑층은
넓게 하는 것은 적들이 구멍을 뚫어서 허물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며 위를 뾰족하게 하는 것은 적을 내려다보기 쉽게 하자는 것이다. 문 하나를 내고 그 한 길로 내왕하는 것은 여러
곳으로 나누어 방어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배가 성 밑까지 통하게 하는 것은 수로(水路)를 방어하자는 것이다. 훈련되고 용감한 군인을 성 주위에 살게 하는 것은 불의의 사변이 있을 때
그들이 용이하게 방위케 하려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성들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정유(丁酉)년 난리에 적이 호남(湖南) 지방의 여러 성들을 보고 그 불완전한
것을 조소하였답니다. 그러다가 담양(潭陽)의 금성(金城)을 보고는 '만일 조선 사람이 이 성을 끝까지 방위하였다면 우리가 어떻게 점령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또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곳의 산성은 거의 읍내와 떨어져 먼 곳에 있는데 비상시에는 고을 백성을 데리고 산성(山城)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적의 침입이 그리 급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자기의 가신을 잊을 수 없고 또 험하고 먼 길 가기를 꺼려서 성에 들어가 방위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적이 딱 다가오면 늙은이를 붙들고 어린이를 껴안고
산과 들로 도망을 치면서도 명령에 복종하기를 싫어하니 하물며 다른 고을 성에 들어가서 지키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호남과 영남(嶺南)에서 성을 가진 고을들이 다 폐허로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담양읍[潭陽府]을 금성 산성에 옮기고 그 이웃의 두어 고을을 떼어 담양 고을에 편입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침략군이 이르면 그 고을 사람으로 금성산성을 지키게
하되 그 성을 지킬 관리는 반드시 백성을 잘 다스리고 많은 사람을 통솔할 재능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그 직무에 오래 두어 성과를 얻도록 할 것입니다. 또 정읍(井邑)과
장성(長城)을 입암(笠巖) 산성에 옮기고 역시 담양에서와 같이 할 것입니다. 기타 영남에 있는 여러 산성도 다 그 고을의 행정 소재지로 한다면 군대를 주둔한 곳이 서로 바라볼 수
있고 형세가 서로 의지하게 될 것이니 적이 그전과 같이 제멋대로 강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제 강항의 말을 상고하여 보면 "읍(邑)은 반드시 산성에다 두어야 한다"고 한 것은 그렇게 실시하기는 곤란한 일이다."성은 반드시 읍으로 되어야 한다"라는 말은 경험에서 얻은
깊은 의견이라고 할 만하니 응당 지방의 정황을 참작하여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산성으로서 읍을 설치할 만한 곳이 있다면 읍을 옮기어 행정 소재지로 만들고 성으로 두고 방어할
만한 성이 있다면 더 확충하고 개수하여 방어를 위주로 하는 성으로 결정하되 반드시 일정한 규정의 치(雉)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기타 산성으로서 읍을 설치할 수도 없고 지형상
중요하지도 않은 성은 다 폐지할 것이며 여러 고을 중에서 쇠퇴 몰락하여 형편이 없는 것은 떼어다 옆 고을에 소속시킬 것이다. 요는 평시에 이렇게 힘을 허비하여 성을 단속하는 목적이
전시에 거기를 요새로 만들자는 데 있다. 그러나 지금은 평시에 백성에게 고된 노동을 시키며 재물을 허비하면서 구축하여 놓고도 전쟁만 나면 그만 버리고 가서 폐허로 한다. 이것은
책임진 관리가 인심이 비겁한 까닭만 아니라 성 위치가 그럭저럭 일정한 타산이 없이 선정되었기 때문이며 평시에 사업을 미미하게 해 치우다보니 비상시에 하나도 믿고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아아！ 얼마나 통탄할 일이냐. 지금의 제도대로 답습하며 지금의 성을 개축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성과 읍을 없애고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 상고하여 보면 산과 험한 지대에 의거하여 성을 구축하는 것이 평지에다 구축하는 것 보다 십 배, 백 배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성들은 통례로 산이 높고 험한
지대에다 구축하여 백성들이 그 안에 들어가 살 수 없게 한다. 만일 산성으로서 읍을 설치할 만한 데가 있다면 물론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읍을 설치할 수가 없는
산성이라면 평지에 성을 쌓고 거기에 읍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해당 지역의 지형 조건과 인사(人事)관계를 잘 타산하여 장소를 결정해야 한다. 만일 일본의 제도와
같이 하려면 다만 성을 높이 쌓고 해자를 깊이 파며 다락을 세우고 배가 통행하게 하여 견고하게 하는 것만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산 위에다 쌓은 성은 문 하나만으로 통하게 하면
백성들이 들어가 살 수 없는 것이니 소위 일본 사람의 토굴(土窟)과 여진인[北虜]의 산채(山寨)와 그 의미가 근사한 것으로서 국가를 보위하고 백성을 살리는 입장에서 나온 시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산성으로 읍을 설치할 수 없는 데는 차라리 읍이 있는 평지에 성을 견고하게 구축하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비록 성은 작고 견고해야 한다고 하나 역시 부락의
백성들을 수용할 만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성을 방어하는 데는 험한 지대만큼 좋은 데가 없다. 방어하려는데 험한 지형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한다. 성이란
본래 읍을 보위하기 위하여 구축한 것으로서 사람이 사는 집에 울타리를 쳐서 보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읍이 쇠잔하고 산이 많기 때문에 산성과 읍을 따로 구별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본래의 근본을 모르고 한 것이다. 대체로 읍에서 떨어진 곳에 산성을 구축하여 놓고 사변이 발생하여 급하게 된 때에야 읍의 백성들을 들어가게 하면 백성들이
들어가기를 싫어한다. 가사 들어간다 하더라도 졸지에 빈 성에 왔으니 모든 일이 마음에 맞지 않게 되며 또 그 성을 버리고 가더라도 아무 미련을 둘 것이 없기 때문에 너도나도 도망을
치니 누구와 함께 그 성을 지키겠는가? 대체로 사람이란 누구나 부모와 가정에 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 평시에 살던 그 고을에 있는 기관, 창고,
사품을 이용하며 백성과 함께 합력하여 방어하는 것과는 이해관계에 있어서 천양지차로 되는 것이다. 가사 산성을 고수하였다 하더라도 읍이나 부락은 물론 창고와 주민과 가축들을 전부
적에게 빼앗겨 버린다면 사수했다는 그까짓 산봉우리 하나가 결국 무엇을 줄 것인가? 이것이 반드시 망할 데로 가는 길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은 일본이나 여진 사람들처럼 전쟁만을
일삼고 항상 집이 없는 군인을 거느리고 활쏘기와 사냥을 직업으로 하며 가는 곳마다 산채를 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 공격과 방어는 상호 연대 관계를 가진 것으로서 공격할 수 있어야 방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시에 백성을 보호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인
것을 알지 못하며 오직 돈벌이하는 관리들은 군인에게 포(布)를 받아먹는 것만을 일상 행사로 하고 있다가 사변을 만나게 되면 멀리 높고 험한 성으로 도망하여 헐덕이는 숨을 죽이고
들어박혀서 감히 성 밖을 내다보지도 못한 것이 일쑤이다. 이렇게 된다면 아무리 쇠성[鐵城]을 하늘에 닿게 쌓았더라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아! 이 일은 아는 자는
이해하겠지마는 속된 자[俗人]와는 말하기도 어렵구나![산성을 아무리 높고 험한 곳에 구축하였다 하더라도 만약 성에서 나와 적과 싸우려면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게 되며 길이
불편하여 습격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또 평지로 내려온 뒤에는 아무 은폐물이 없어서 평지에서의 전투와 다름이 없다. 또한 가정이 있지 않아 관심을 가질 만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더욱
분산하기 쉽게 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성을 통례로 말하며 또 '성은 작고 좁아야 한다'고 하면서 혹 그리 좁지 않은 성이 있으면 대 개축하여 좁히려고 한다. 장만(張晩)
장만(張晩)：임진왜란 때에 호남ㆍ영북 양도 관찰사가 되어 많은 업적을 세웠고 인조 때에 8도 도원수가 되어 평양에 있다가 이괄의 반란군을 평정한 공로로 옥성부원군 봉작을 받았으며
벼슬이 8도도 체찰사(八道都體察使)에 이른 사람.

과 같은 이는 근세에 명장(名將)이라고 칭하는 사람인데 역시 그렇게 말하니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라고 한다. 비단 장만뿐만 아니라 유서애(柳西厓)도 그렇게 말하였다. 이는 대개
지금 군 소재지[郡邑]는 평시에 다 형편이 없어서 민가가 모아들지 않아 아주 스산하게 되었고 소위 읍에 있는 성이란 것이 빈한한 집의 허물어진 담장과 같다. 이런 성에서 갑자기
적의 침입을 당하여 방어하려고 하면 반나절도 못되어 강점을 당하니 반드시 높은 산에 올라가서 험한 바윗돌에 의지하여 싸워야만 잠시라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방에
흩어지고 다만 남은 몇 사람을 데리고 갑자기 빈 성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조금 넓으면 방어할 수 없게 된다. 지금 목전의 사태가 모두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나라의 장래를 생각지 않고 한 말들이다. 그러므로 원칙을 세우고 제도를 수정하여 지방 조직을 적당히 개편하고 지금의 스산한 고을들을 병합한다면 평방
100리의 지대에 있는 각 군 소재지들은 자기의 형태를 갖추게 될 것이며 관리나 아전들에게 일정한 녹봉을 주며 장인이나 장사꾼에게 착취하는 행동을 금지시키면 백성들이 읍에 모아
살며 민가가 즐비하게 되고 시가에 점방이 서게 되어 완전히 중국 각 고을의 형태와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성을 구축하는 것도 그 제도와 같이 부락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게
하며 성을 높게 쌓고 해자를 깊이 파서 견고하고 웅장하게 한다면 평시에는 모든 일이 다 볼 만하게 진척될 것이며 급한 때에 성을 방어하는 것도 공고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어느 고을이나 다 방어할 수 있고 형세도 서로 연결되어 국가가 영구히 공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이 일찍이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예로부터 지방 고을들
중에서 끝까지 방어하여 1년 혹은 수년을 버티어 낸 데가 무수히 많다. 아주 먼 옛날은 그만두고라도 얼마 전에 요동 금주성(金州城)은 평지에 있는 성이지마는 여진 군대[虜兵]가
3년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강점하지 못하였다. 만일 이 금주성이 외딴 산봉우리에 있었거나 졸지에 백성들을 데리고 들어갔더라면 두어 달도 못되어 식량도 떨어졌을 것이며 사람도 분산되어
성을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니 어떻게 수년을 버티려고 생각조차 했겠는가? 이 실례만을 가지고도 성 구축의 여하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성이란 지방의
읍에다 구축하는 것이 옳다. 읍에 구축하지 말고 딴 곳에다 백성이 살지 않는 성을 구축해야 한다고 논한 자들은 다 너무나 사고가 없이 한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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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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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池按城池ㆍ兵車雖屬兵部 而若築城ㆍ造車則本是冬官所掌爾.凡城審度大小之宜 務使適其所當. 城雖曰宜小而固 我國列邑城子太狹窄 或不得容接一二民居 殊甚無意. 如此者當拓而廣之 其新築處則必須審度事實
適當其宜.按城過濶則難守 狹小則無容 是以合制爲貴. 古者 五板而堵 八尺曰板. 五堵而雉 二百尺. 百雉而城 二萬尺 ○六尺爲步 三百步爲里 卽周十一里 三十三步二尺. 百雉乃公侯之制也. 天子千雉
公侯百雉 伯七十雉 子男五十雉. 蓋天子畿內之地. 方千里 其城千雉. 或以爲受百雉之城十. 公侯之地方百里 其城百雉. 伯七十里 其城七十雉. 子男五十里 其城五十雉也. 又周制 天子城方十二里
周四十八里. 公城方九里 周三十六里.侯伯城方七里 周二十八里. 子男城方五里.周二十里. 蓋以周禮 諸公之地 方五百里 諸侯方四百里 諸伯三百里 諸子二百里 諸男百里而爲制也. 二代之制 雖有不同
皆各有規度而稱其地之大小也. 然則今州郡之城 亦當量其土地大小 民物衆寡而制其宜也. 我國山谿不平 邑居多因山而爲城 縱難以一如平地之均齊 酌以古意 而要不失其地形之便爲可.又按傳記 睢陽城中
居人數萬戶 卽墨城中 得牛千餘. 睢陽則唐時大邑 固宜其盛 卽墨乃列國屬邑 而三年圍窘之餘 猶得牛千餘則 其平時城中居民之衆可知. 不然 雖以張巡ㆍ田單 亦無能保守矣. 我國列邑城子 不成模樣
多不得容一民居 如是安能責人以守乎? 凡城池必須量定規制 容奠閭閻也. 我國郡邑 無城處固多矣. 其有城者亦狹窄 不容民居. 又或有城與邑治別處者 其不合事理甚矣. 嘗觀周書云 "高句麗治平壤城
而城內唯積倉儲器備 寇至日方入守 王則別爲宅於其側 不常居之." 此蓋亦夷狄遺俗 而至今猶有因習未盡變也.一 築城必以其時 無當農節 其調軍丁 必依常格 除番赴役 愼無格外別調及添役.凡城役
必以冬月農隙之時 不得非時動衆以防農務. ○凡修弊小役則 但可役以頃夫及雇役 若改築新築役巨則調發軍士 先計事功大小 量定該用丁夫 只發正軍 勿並發其保. 步軍則役三十日 免一次番上及其間習操ㆍ試射
騎軍ㆍ束伍軍則役十五日 免一年習操ㆍ試射 皆官給糧一旬米三斗爲式. 準役放送時則犒饗以送. ○凡有城役 量其遠近 計調旁近諸郡軍士 畫赴城西 而不必一時俱集以致煩擾. 酌宜定數 每巡毋過千人或數千人
使之排次以赴 部分精明 無憊力無惰事. 其時 若未畢功 停待明年 勿圖速畢 唯以永久牢固爲務. 凡各邑軍士赴役者 雖總統於城所主將 各其將官領來監役. ○凡有役事 僧徒則自當依例赴役
而亦量定其日數詳見汰僧條.按軍士立役一朔 除其二朔之番 又除試操 有料有保則軍士役無所苦矣. 京及兵營 番軍甚多而平居別無緊防 可量宜移 畫以赴役. 其料米則量留本邑漕稅 又移捧本軍保米 足以支用.
若保夫近京而遠於築城邑 則依常例收保米於京而以本處他}\ 換支亦可. 如是則雖役軍士而別無所苦 量其勞逸 州郡當築處 間數歲次第築之 亦無不可. 我國人心怠慢 百事皆苟且憑假 至於城池 尤無狀.
若是則雖邑皆有城 奚益? 合今十城之力 寧築一城 必期永固 必如其制也. 習俗苟且 其來已久 殆難以言說開悟 必於一處 先築如制之城 使他處見以取法可也. 若經一番寇難則庶眞知其利害
而俗亦爲之變矣.又按築城 大役也. 本邑之力 不足以成之 必須朝廷移合旁郡之 力以爲之. 古者如城邢城 楚丘之類 皆合諸侯爲之者是也. 其所役軍士 雖總統於城所主將 必各使其本處將 領率來分役
非唯事理攸當 功役易就. 凡合大衆 亦慮其或有意外之變 此亦古人處事之道也.一 凡築城 切勿多發軍丁 一時促迫 宜量地度功 分人授役. 於役丁數內 分爲左右軍 各置領將 每十人定一牌長 以元軍隊長仍定
或於役衆中擇定亦可. 五人有伍長 此則固自依法. 又三十人定一都牌. 百人置監將 又五百人或千人 又置別將 皆隨事量宜 定之可也.令各任其功 必以永固爲期. 每其分地 各有記刻 或所築不合規制
或疊以塊礫則卽令改築 十年內崩頹處 監領論罪 各率其軍 自備糧改築事 先爲知委.杜佑通典云 "凡築城 如城高五丈 下濶二丈五尺上濶一丈二尺五寸 則料功以上濶加下濶 得三丈七尺五寸
半之得一丈八尺七寸五分. 以高五丈乘之 一尺之城積數. 得九十三丈七尺五寸. 每一人功 日築土二尺 計功約四十七人. 一步 五尺. 之城 計役二百三十五人 一百步計功二萬三千五百人
三百步計功七萬五百人. 率一里三百步. 則十里 可知其出土負簣 竝計其大功之內. ○如城濠面濶二丈 深一丈 底濶一丈則以面濶 加底積數 太半之 得數一丈五尺. 以深一丈乘之 鑿壕一尺 得數一十五丈.
每一人功 日出三丈 計功五人 一步計功二十五人 十步計功二百五十人 百步計功二千五百人 一里計功七千五百人 以此爲率則十里可知. 按此以中國平地城土築之功而論也. 若夫緣山因險
石磚以築則又當參其地形便否 人功難易而爲之量度也. 頃聞 笠巖山城改築時 西邊二千步 僧軍六千餘名 幷運石築城 十一日畢役 每二步功易處三四名 功艱處七八名 大約二步六名 此是改舊重修也.
若新創則役三十日可. 準此倘令城高池深 不如 今之低微 而永得牢固 則每二步可十二人 三十日役云.按近時 諸山城之修築 多發軍丁 旬日而畢 而每歲崩頹補築 勞民無已 時而終爲碨礌可笑之城
何望其守國而保民乎? 果如此則寧不築之爲愈也. 唯南漢山城 稍爲堅完可恃 然此則三年而畢功. 蓋緣當初將吏 不習城池規制 度功不詳 分數不明 旣築而還毁 復築者多 凡事太半再役故
實可一年之功而枉費三年云. 以此觀之當事者 不先講究規制可乎? 又聞前後諸城修築時 自色吏將校以上 至於領將 皆受賄賂 或減軍受價 或稱以知面禮ㆍ見將禮 徵索酒食 代納布疋 疲殘軍士 未勞先苦
不可忍言云. 凡今役民 不給料 不除其本番 都是加役 哀矜莫甚而此輩剝割如此. 僧軍僧將則無此弊云. 可見今日將領ㆍ吏胥 自少至老 一心在得 習以爲常 無復廉恥 觸事皆然也. 嗚呼! 不擇任人
不正人心 天下事無可爲也. 彼不知先明君德 先立敎化而欲務事功者 不知孰甚焉?麗末 憲司請曰 "諸道州郡山城 國家往往遣使修築 多發軍丁 不日畢功 旋致崩毁 其弊甚巨. 自今勿復遣使
令守令徵發傍郡軍丁 農隙修葺 若未畢則停待明年 以爲年例."一 凡城高必五丈以上 城高皆除垜而言. ○京都大城 必六丈以上 若山上城則 因其險夷 量爲高卑. ○用周尺十尺爲一丈. 紀効新書
城高雖以三四丈爲言 然彼以官尺 則比周尺實加倍矣. 垜高一丈 城底四丈 外開濠 濠廣必四丈 深二丈以上 愈深濶愈好 引水成池尤妙.濠岸亦必築以磚石. 凡城自下二丈 斜倚以築 二丈以上斜直漸上.
倭城如此. 其雉及瓮城ㆍ牛馬墻 並依紀効新書法. 新書 每五十垜一雉 更當量其地形而爲之. 大約雉出城外四五丈 則橫長六七丈. ○濠岸內 築牛馬墻如其式. 若山城地勢峻處及有池濠水深 則不必有牛馬墻.
不然則必有之. ○若設雉處 代設砲樓則尤好. 其制見下. 如此則不必爲牛馬墻. 濠外開路 路廣四五丈. 城外 三百步內 勿許作家 都城則四百步. ○緣山峻阪處 以百步爲限. 城內二十步內 亦勿許家
都城則三十步.凡城平地則不必內平 可令內外並高. 其形如墻而厚 中國城如此. 其當谷口窪下處則城內城外 因作堤以開池濠可也. 凡依山爲城 而一面迤就平下處則於其內外 鑿築池湖 令極深廣爲可.
蓋水險無異山險而兼有利益也. ○城外限內作家者 杖一百毁家.按我國山川迫阨 州郡邑城 每以近於山底 被其所壓爲嫌. 又有難於跨越溪澗處 此則唯在形勢便宜 不必以跨越溪澗爲難也. 嘗按傳錄
中國南方如浙江紹興等城 皆跨越大水 重設水門 至於三重四重而檣帆亦緣水出入. 本國財力 雖不逮此 亦當措置 各盡其事. 苟其地形便宜則跨越川水不必忌也.一 城高如五丈則底濶三丈 必表裡成築然後
方補土以平內岸 愼勿旋築旋補 使石倚於土 或土石相雜. 凡城全厚純石 方面順疊則雖有大霖雨 永無崩頹. 若表石裡土而使石倚於土 雖裡石而間雜以土 則冬凍土墳 夏霖土濕之際 不久崩潰.
○若內外並高如中國城制則底濶必八丈 上面濶三丈. 城基必開土深廣固杵 先鋪大盤石 石上引入三四尺 始疊石爲高. 自此斜倚. 復實土其外 使沒脛而廣杵之. 凡城緣山處 則開基勿緣岡脊
必緣脊外量令垜與脊齊 開基深廣 固杵如法. 城腰以下則 以大面石 釘削縱疊 腰上則以磚皆間 粘石灰築之. 如此則非但永爲堅固 雖是多石之地 城未及半 近石已盡故未免運於遠處 所以費力尤多 燔磚之功
若比遠運 不啻減矣. 戚南塘曰 "凡城 磚第一石次之." 此言誠是. 垜則 卽女墻. 必以磚 粘和石灰爲之. 其造磚時 必依紀効新書之式. 若以石則垜口懸眼 難以如制 又易頹落. 本國諸城 皆垜高數尺
僅及人腰 不避賊丸. 垜間濶大 容人有餘 又自垜根 成山字形 尤易登越. 設高眼而無懸眼 皆犯至忌 宜令垜高必一丈 垜口亦及半開口 其間狹小而兩邊成脊 便於左右瞭射 改高眼爲懸眼 如此然後可以爲城.
其詳皆具新書. 且近來諸城 石灰塗其外面 一二年內 頹剝無餘 徒費民力 實不得分毫之益. 力若不逮則寧止一面 以待後年 其築處則必粘和以築.或問於戚南塘曰 "諸處城池 俱有成制 若如新書之法 將盡易之
貲且不贍奈何?" 戚公曰 "此法非盡欲易其舊也. 夫力屈擧贏 豈可不察? 卽創業之秋 固不能措圮則修 塡則改 不可如其制乎? 舊城身固難易 垜口所費甚微 不可如其制乎? 平居重遷 衆怒難犯. 萬一賊至
順人情之所欲 酌量更改 不可如其制乎? 改一尺 一尺之利 改一丈 一丈之利 但在適時變通爾. 今薊鎭之三屯營城 遵化之縣城 如古北各路之新修邊墻 俱依圖式. 言非鑿空而先事人惟豫則立."一 城有砲樓
一云敵樓. 爲第一要法. 其制如雉 而但雉城則只可下臨 左右以射. 此則直下城底而中空之 使容人衆 左右前面 多作穴眼. 其三面 皆以磚粘石灰 築之. 其開穴眼 亦令外狹內寬 以便放銃. 又眼上
加一直縫 如牛馬墻之制 宜於眼瞭. 造磚時 皆作模以造. 下安天ㆍ地ㆍ玄字銃 次上安勝字銃 其上作樓. 以爲射矢瞭望之所. 賊若來附右城則從右穴放砲 來附左城 則從左穴放砲 其在前面者 從前穴放砲.
若是則雖萬堞之城 可使數百人守之而有餘 一城不過十數砲樓 而敵兵百萬不敢近矣. 西厓懲毖錄曰 "古制 城皆有雉 雉卽今之所謂曲城者也. 城無雉則雖人守一垜而垜間立盾以遮外面矢石 賊之來傳城下者
不可見而禦之也. 紀効新書 每五十垜置一雉 外出二三丈 二雉相去五十垜 一雉各占地二十五垜 矢力方盛 左右顧眄 便於發射 賊無緣來傳城下矣. 壬辰倭亂 余在安州 一日出淸川江上 思得一策 城外當從形勢
別築凸城 如雉制而空其中使容人 前面及左右 鑿出砲穴 可從中放砲 上建敵樓 兩樓相距六七百步或千步 大砲中藏鐵丸如鳥卵者數斗. 賊若來集城外則砲丸從兩處交發 無論人馬 雖金石無不糜碎.
若是則他堞雖無守兵 只使數十人守砲樓 而敵無敢近矣. 此實守城妙法 其制雖倣於雉而功勝於雉萬. 兩樓之間 敵旣不敢近則所謂雲梯衝車者 皆不得施矣. 其時卽啓聞行在 後於經席屢發之 又欲使人見其必可用
而至今因循 無一處擧行."壬辰亂中 柳西厓作 "戰守機宜十條" 上之其論守城曰 "我國之人 最不習兵 其於築城一事 亦全無意思 但從山勢 逶迤作形而已. 古之城制 五十垜而一雉
所謂垜卽今之女墻雉者卽今之曲城也. 垜之高 一丈有餘故垜內之人 能放意平立以避外面矢石. 我國女墻則僅至數尺 守城者鞠躬曲腰 鼠伏以行而不免於賊丸 此其不可者一也. 兩垜之間 貴於狹窄 纔可放矢
眺望而已 使賊不得以踰入則是乃城制之纖密 而我國之城則女墻中間濶大 往往可容數人 此其不可者二也. 曲城亦甚稀設 一城之上 但有一二 雖以都城之大 只有東門外甕城而無一曲城 無雉之城 將何用乎?
此其不可者三也. 城上雖有守禦之人 不能引頸下視則賊之附城下者 終不能禦矣. 近世 中原有懸眼之制 其法從垜內穿穴 直出城外 使洞見城下之賊 以施格殺之方. 此制甚好 但必須多作磚甓然後可成
今難猝辦. 此外又有牛馬墻之制 於城外濠子內 築墻高一丈許 下面鑿大穴 使放大砲 中穿小穴 使放小砲 別使勇力之人守之 與城上人 互爲輔車之勢 紀効新書所謂'任他百萬來犯者'是也. 然 此則用功旣多
亦必用別人而守之 非我國今日之力所易言. 若一置砲樓則上項曲城ㆍ懸眼ㆍ牛馬墻之制 兼而爲一 不煩衆力 至簡至易 萬無一失者也."趙重峰東還封事曰 "臣竊見遼陽以西 至于山海一路 距胡地最近
以接長城爲長墻 有濠子. 五里各置一烟臺 臺下有小方城而臺上有屋 城之四隅 各有牌屋 俱覆以瓦. 城外鑿濠子 濠子外築墻 墻外深坎數重 坎外或列植楡柳 雖胡兵衆驅而勢不得奔突也. 城中例令 五軍丁
率家而守之 丁給月俸. 銀二兩半. 各墾城旁空地 以爲産業. 有警則沿海居民 群聚以守之. 十五里有一小鋪 三十里有一大鋪 城子漸廣而人居者漸衆 如牛家莊旣有元軍 而冬月益戍以千軍.
器械完繕而守備周密. 凡城頹之處則官撥銀兩以修之. 關內則雖無烟臺ㆍ臺城而十五里鋪 三十里鋪則無處無之 州縣城池 無不牢壯 雖有勁敵 人恃無懼 皇朝之所以設險守國如此 險之時用 信乎其大矣.
我國兩界之地 雖有長城而馬可超升 雖有烟臺而人不能居 臺上不唯無城 而無草屋門間. 風饕雪虐之除 薄衣戍卒 多有凍死 不待賊來而反走也必矣 孰肯以死守之? 且州鎭之城 齟齬尤甚 如有胡寇
無非一呼而可登者 城中人物 到底蕭索 雖盡男女 或不能守城之一隅矣. 至於南道海邊 賊船可泊之處 漁人籬落 多有櫛比者 賊來登陸而肆其焚蕩. 若於浦口設城多置軍器 有急嚴守則倭賊不敢舍舟而登陸矣. 然
今若欲築城而一用民力則城池未完而民已不守矣. 竊聞各道兵營 歲留私米 累千石而只應私行之請 其他布帛 積於無用者 不可勝數. 况兵曹歲入之布 空積者甚多 若彼爲兵判爲兵使者有徇國之志
無營産之念則出此米布 分募飢民 歲完數城. 殿下又損內需之儲以補其缺則彼爲邊將者 雖是至愚之人 亦感殿下之至誠 爭出私用之物 以造築其城矣."姜沆曰 "臣在日本 見日本爲城邑 必於獨山之頂 江海之濱
夷山之巓而斲削其四面 使猿狖不得上. 其城基廣而上尖 四隅設高樓 最高者三層 主將居焉. 軍糧軍器之庫 皆設於樓中. 開一門一路以通其出入. 城外設長垣 高可一丈許 垣中數步 設砲穴 垣外鑿濠
深可八九丈 引江水以注之. 濠外又設木柵 濱江海處 舳艫相連 精勇之士 環城而居之. 問之則曰'獨山之頂者 我可以俯瞰 彼不得臨壓也. 江海之濱者只防一面 事半而功倍也. 基廣者難於衝毁也.
上尖者易以俯矚也. 一門一路者 防守不分也. 舳艫連江者 防水路也. 精銳之環城而居者 爲倉卒易以入保也.' 我國城池 正與此相反. 丁酉之難 賊見湖南諸城 莫不笑其齟齬.
及見潭陽之金城則曰'使朝鮮固守 我何可攻陷?'云. 臣又竊念 諸處山城 頗與邑居懸遠 臨急始收邑居之民 使入山城. 賊勢稍緩則愚下之民 顧變家業 憚其險遠 不肯入保. 賊勢旣迫則扶老携幼
竄匿山野而又不肯從令 况望其傍邑之疊入乎? 今者 湖嶺城邑 盡已蕩毁 莫若乘其蕩毁 移設潭陽府於金城山城 省傍近數邑以益之. 賊至則因其人因其城而守之 城守之官 必擇有牧民御衆之才者 久任責成.
移井邑ㆍ長城於笠巖 亦如之. 以及嶺南諸山城 盡爲治所則複屯相望 形勢相倚 此賊不敢如前荐食矣."今按姜沆之言 謂邑必就山城則有難盡施 而城必爲邑居則有深實見 要當參酌形勢而措置之. 蓋山城之可設邑者
移邑爲治 邑城之可城守者 增拓繕修 定爲當守之城 必有畫一之規. 其餘山城之不可設邑 無甚形便者 悉罷之. 諸邑之殘弊不成模樣者 省屬傍邑 要使平日所致力者 爲臨亂所必守之地也. 今則平時勞衆費財
民力已殫而臨急委而去之 任其蕩然. 此非但官授匪人 民心▩弱之致 亦緣區畫苟簡 未有一定之計 平時苟延歲月 臨急無可恃倚而然也. 可勝痛哉! 由今之道 無變今之爲 寧無城無邑
不勞民之爲愈也.又按因山據險 比諸平地 難易百什. 然山城之地 例多高險傾危 民不得居. 若山城而可設邑則固爲大善 其不可移邑者 莫如設險平陸 因邑爲守 此宜審察山川形要 人事便否而定爲區畫也.
若倭人之制則只可取其城池ㆍ樓櫓之高深牢固而已. 其山頂小城 唯開一門 民不居內則是所謂倭人土窟 與北虜山寨 其意相近 非所施於體國奠民之地者. 故山城而不可邑則寧堅築平地之邑城.
城雖曰宜小而固亦不可不包納閭閻也. 或曰 "守城莫如地險 欲守邑城則其於無地險何?" 曰城本所以衛邑 如人居舍有籬以衛之也. 而我國邑殘山多 故因有山城邑居之異 其不知本末甚矣. 夫築城於別處
臨急始抽邑居之丁 民不肯入 猝至空城 百爲齟齬. 入者亦無顧戀之意 相率而逃 將誰與爲守? 其與按平時之舊 因其府庫民物而與之共守 人各有父母家室之慮者 利害相萬萬矣. 假令固守山城 盡棄邑里
倉廩ㆍ人民ㆍ頭畜 付爲賊屯則獨守山頂 終何歸乎? 必亡之道也. 此與倭人ㆍ北虜之只事戎戰 常屯無家之卒 射獵爲業 逐設山上之寨者 事理絶異矣.又戰守本自相須 可戰而後亦可守也. 我國人平居
不知保民練兵之爲當務而唯以債帥收布爲常事 及其應變則以遠避高險 脅息竄身 終不敢窺見城外爲心. 若是則雖懸天鐵城 守不可得矣. 噫噫! 此難與俗人言 唯知者知之. 山城雖絶高險 若欲出兵要擊則自上至下
徑途不便 未易乘機. 又旣下至平地則失其所以爲恃矣 與野戰者無異 而本無家 室係戀之心者 尤易於奔散.或曰 "我國人例言山城 又謂城宜狹小 或有不甚狹者則皆欲改築小之. 如張晩近世所謂名 將而亦然
何也?" 曰非但張晩 西厓所論亦如此 此蓋今之郡邑 平時皆不成模樣 民戶不聚 絶爲蕭殘 而所謂邑城者 有若貧家破垣 卒然當敵 欲守則未及半日而直陷 必奔上高山 依阻巖石之險 然後可以少支. 而人民四散
只抽若干丁 猝入空城 故稍濶則不得守. 目下所見者惟此 故意每如是矣 殊不思爲國之道. 當定經修制 置郡咸得其宜 而倂今殘零則百里之地 各有郡邑規模 吏隸皆給廩祿而至於工商 擧絶橫侵之途則民聚邑居
屋舍櫛比 市肆成廛 宛如中國之列邑矣. 其爲城池 亦包納閭閻 高深牢壯 必如其制. 如是則平時 萬事皆有可觀而臨急城守 亦得堅實 唯如此而後 可以處處捍守 形勢相連而國以永固矣 而我國人
意思曾不及於此也. 自古列邑堅守 或經年閱歲者 不可勝數 遠者姑勿論 向時遼東金州城 亦是平地而虜兵圍住三年 相戰而不能陷. 若如孤絶山城 卒然投入者則不待數月 糧盡人散 不得保矣 安敢望支過年歲?
其利害此亦可見也大抵城必邑城爲是非 邑居而別設空城云者皆不思之甚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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