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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병거(兵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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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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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병거(兵車)

병거는 응당 모든 형편들을 깊이 연구하여 적합한 것을 타산하고 제조하여 군용으로 쓴다.[대개 병종에 있어서 기병이 제일이며 보병이 그 다음으로 된다. 그러나 기병과 보병을 활용하는
법[騎步之法]은 기병과 보병에다 수레를 배합시키는 것 만큼 좋은 것이 없다. 중국은 각처에서 수레를 사용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산과 계곡이 장애로 되는 데가 많아서 중국과 같이
편리하지 못하다. 그러나 북에서 침입하는 연진 기병을 막아내려면 수레로써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해당 지대의 정황을 잘 타산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평양, 안주(安州),
의주(義州), 함흥(咸興), 경성(鏡城), 회령(會寧), '종성(鍾城) 혹 경원(慶源)' 등지와 기타 국경의 진(鎭)에서도 적당한 지대가 있다면 병거 부대를 설치하여 비상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비상시의 대책을 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시도 진법(陣法)에 의하여 기병과 보병을 배합시켜 행동하는 규정을 정해야 하며 훈련을 할 때에도
병거가 동시에 출동하여 전투 기술을 연습케 해야 한다. 그 외에 물자를 운반할 일이 있을 때에는 위에 있는 나무 방패와 병장기를 떼어 놓고 이를 이용하여 운반하여도 유익할
것이다.'

대체로 남쪽에서 침입하는 왜적을 막는 데는 수군만한 것이 없고 북쪽에서 침입하는 여진을 막는 데는 병거를 사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국가사업에 관심을 두는 자들은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거란[契丹] 임금 자신이 보병, 기병 합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 얼음을 건너왔었는데 도통사(都統使) 강조(康兆) 강조(康兆)：고려 현종
때(1010년)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거란군과 흥화진(興化鎭)에서 싸우다가 전패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죽은 사람.

가 통주(通州)[지금 선천(宣川)]에 나가서 방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조는 군대를 세 패로 나누고 칼과 병기를 쓰는 군인을 배합시켜 진(陣)을 치고 있다가 거란군이 이르자 세
부대가 공격한 결과 거란 군대는 모두 분산되어 버렸다. 또 고려 선종(宣宗) 때에 서북면 병마사(兵馬使) 유홍(柳洪) 유홍(柳洪)：고려 문종(文宗) 때 군사학에 특출하였고
『좌씨춘추』에 정통했던 인물.

이 임금에게 병거를 제조하여 구주(龜州)에 감춤으로써 불의 사변의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는데 선종이 그 제의를 찬성하였다.

요전 병자호란[丙子之難] 때에 여진 군대가 곧추 서울까지 들어왔는데 서도[西路]에 있는 모든 장수들이 다 산성(山城)에 들어박혀서 적의 군대가 흘겨보고 지나갔으나 감히 산성에서
내려와 싸우는 자가 없었다. 그때에 만일 병거가 있었다면 병거로써 오는 길목을 막고 진(陣)을 치되 공격을 하려면 공격하고 방어를 하려면 방어를 할 수 있게 하여 공격과 방어를 다
우리가 주동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여진 군대가 어찌 감히 제멋대로 이 지대를 통과할 수 있었겠는가? 이 일을 보더라도 험한 지대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요충지를 살펴서 기습
작전을 하는 것도 병거를 사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더군다나 우리 국가의 사업과 실력이 완전히 회복된 뒤에 군대를 일으켜 국경선을 넘어 여진족의 조정을 짓밟고 그 왕의 과거 죄를
따지려면 이 병거로써 작전을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옛 사람이 말하기를 "병거는 군대의 갑옷이며 다리[脚] 있는 성(城)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실천에서 얻은 결론이다.]

상고하여 보면 수레의 용도는 광범하며 특히 군사면에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 첫째는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며 둘째는 군량과 무기를 운반할 수 있으며 셋째는 적의 화살을 방어할 수
있으며 넷째는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전진할 수 있으며 다섯째는 기병을 은폐하여 놓고 요충을 살필 수 있으며 여섯째는 비와 눈을 방비하고 병든 군인을 후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또 행군할 때는 진(陣)이 되고 정지할 때는 병진지[營]가 된다. 전쟁용 기구로서는 수레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옛날에 군사를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병거의 수효로써
군대의 많고 적은 것을 평가하였으니 소위 천승(千乘)이니 만승(萬乘)이니 하는 것이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좌전(左傳)』에서 말한바 "정(鄭)나라의 군대는 수레 뒤에 군인
5명씩을 세웠으며 초나라 군대는 좌우편에 수레 15승씩을 세웠다."란 것이 역시 이 제도인 것이다.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오면서 군대의 수레 제도[車乘之制]가 폐지되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나 한(漢)나라 위청(衛靑)이 북으로 국경선을 넘어 흉노(匈奴)를 칠 때에 무강거(武剛車)를 둘러놓고 진지[營]를 만들고 기병을 출동시켜 적을 공격하였으며 진(晉)나라
마륭(馬隆)이 수기능(樹機能)을 토벌할 때에 편상거(偏廂車)와 녹각거(鹿角車)를 사용하여 천 리를 다니면서 전투하여 양주(凉州)를 평정하였다 하였으니 이로 보면 한나라와
진(晉)나라 때에도 전쟁에서 병거를 사용하여 성공한 자가 있었던 것이다. 송(宋)나라 때에도 유명한 신하와 장수들이 대부분 병거를 만들 것을 건의하였지마는 그 당시에 장수를 옳게
등용하는 임금이 없었으니 어찌 군대에서 쓸 기재를 이해할 수 있었으랴? 우리나라에는 산과 계곡이 험하고 좁아서 병거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큰 길가에 있는 군과 읍에는 평평한 곳이 많으며 막힌 데라 하여도 통행 못할 수 없는 곳은 없다. 옛 병법에 이르기를 "평평한 지대에서는 병거가 주로 되고 험한 지대에서는
사람이 주로 된다"라고 하였는데 해석한 자들이 말하기를 "평평한 지대라 하여 사람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병거를 주로 사용하며 험한 지대라 하여 병거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니나
사람을 주로 사용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험한 지대에서도 병거를 절대 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한나라의 이능(李陵)이 흉노를 칠 때에 국경선을 넘어
30일을 행군하여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러 선우(單于)와 서로 대치하게 되었는데 이릉의 군대가 포위를 당하였다. 이릉의 군대가 두 산의 사이에 있으면서 큰 수레로 진지를 만들고 또
군인을 진지 밖으로 보내어 진(陣)을 치고 싸운 결과 흉노의 군대를 많이 쳐죽이었다고 하였다. 또 지금 여진의 습속에는 전쟁에서 기병을 전용한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에는
심양(瀋陽)으로부터 수레에다 대포와 군수품을 싣고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남한(南漢)산성과 강도(江都)에 온 때가 많았다. 이로 보면 이런 군사 기재는 지휘관의 운용 여하에 있는
것이며 꼭 지형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는 군사 제도를 완비하게 제정하고 군사학에 전통하고 옛일을 잘 아는 인재를 선발하여 책임을 지워 그에게 장비를
갖추게 한다면 반드시 그 이해관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후세에 와서 구(丘)씨와 마(馬)씨 같은 이도 다 "중국 사람끼리 싸울 때에는 병거가 필요하지마는 서북에 있는 이민족들과
싸울 때에는 병거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너무나 연구가 부족한 말이다. 대체로 중국 사람끼리 싸울 때에도 병거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이 중국과 이민족이
싸울 때에는 병거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척계광이 남방에서 도적을 평정하고 왜놈의 침략군을 방어할 때에는 보병으로써 성공하였지만 나중에 계주(薊州)의 침략군을
토벌할 때에는 병거를 제조하여 싸운 뒤에야 이민족의 침략군을 소멸하고 국경 지대를 평안케 하였으니 이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지형이 평평하지 않아서 병거를
사용하는 데 대하여 의심을 품는 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하여 보면 사용하지 못할 런 이유도 없다. 내가 요즘에 남도로부터 서울까지 오면서 보았는데 지형 조건이 어느
군이나 큰 차이가 없으며 도로를 닦아 놓은 데는 어디나 거침없이 수레가 통할 수 있었다. 평시에 도로와 교량을 구축 수리하는 것도 착한 정치의 중요 부분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일들을 되는대로 해 버리어서 오직 생기 하나 없이 조락의 일로를 걷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할 사업을 하지 않고 지리 조건에 구실을 붙이지마는 중국인들
어찌 계곡과 구릉이 없겠는가? 더군다나 전쟁에 병거를 사용한다는 것은 남방의 병거를 갖다가 북방 변방을 방어하자는 것도 아니며 북방의 병거로써 남방의 침입을 방어하자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렇게 자기 방어 지대에서 싸우지 않게 한다면 아무리 기병과 보병만을 두더라도 군인들이 피곤하게 될 것이니 어찌 패망할 길이 아니겠는가?'이 병거를 사용하는 것은
가까운 거리에서 적당한 지대를 택하여 진(陣)을 치고 길목을 막아서 방어 또는 공격하는데 불과한 것이니 어찌 사용 못할 까닭이 있겠는가? 만약 불의에 기습 작전을 하게 될 때에는
병거가 주로 되고 기병과 보병을 배합한다. 즉 병거로 엄호하고 기병으로 기습한다. 이것은 진지로부터 기병을 출동시킬 때 편리한 조건을 지어 줄 뿐이며 병거를 가파라진 산에 올라가게
하거나 험한 지대에 가지고 가라는 것이 아니다. 이렇기 때문에 척계광의 법에도 병거는 언제나 가깝고 편리한 진(鎭)이나 성(城)에다 두며 성의 주위를 호위케 하며 성과 병거가 서로
의지하여 적의 공격을 방어하여 불의의 습격을 진행하니 어찌 이를 가장 안전한 전술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최근에 많은 군사 경험을 가진 이(李)모란 자가 항상 말하기를 "북쪽의
적(狄)을 평정하는 데는 병거로 싸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라 하여 병거를 사용하지 못할 조건이 없다. 만일 수레가 넘어가지 못하는 곳이라면 행군하는 법은
반드시 열을 지어 가게 되었으니 기병, 보병도 위험하여 갈 수 없는 곳으로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 자신이 일찍이 간단 용이하고 견고한 병거를 제조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헛된 말만을 하는 자에게 비할 말이 아니다. 대체로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중국에서 실행한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실행할 수 있는 일이며 옛날에
실행하였던 일이라면 후세에도 실행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병거를 제조할 때에는 옛날과 지금 있는 여러 제도를 참고하고 연구하여 사용에 편리하도록 적당하게 만들어야 한다.[진(晉)나라 마륭(馬隆)이 제조한 편상거(偏廂車)와
녹각거(鹿角車), 당나라 마수(馬燧)가 제조한 전거(戰車), 송나라 장행중(張行中)이 제조한 병거(兵車)와 위승(魏勝)이 제조한 여의거(如意車) 등은 그 제조한 법이 대체로 거의
같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이미 실천한 제도를 상세히 연구하여 현재 우리에게 적용하기 적합한 병거를 만들되 가볍고도 빠르고 또 견고하고도 치밀하게 제조하며 또 한두 사람이 다룰 수
있게 하고 밖에다 구멍과 방패와 창들을 장치하여 적이 감히 병거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도록 하며 또 병거에서 대포와 활을 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화살도 능히 막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병거에다 기병과 보병을 배합하여 행군할 때에는 진으로 되고 정지할 때는 진지로 되게 하는 법은 모두 '『진법도설(陣法圖說)』 『진법도설(陣法圖說)』：조선 문종왕이
정인지ㆍ김효성(金孝誠) 등에게 명하여 편찬, 출판한 군사 서적인데 전 1책임.

'에 있다.]

상고하여 보면 옛날에는 병거가 항상 전쟁의 도구로 되었기 때문에 "문을 닫고 병거를 만들지마는 병거가 문밖에 나가면 바퀴의 척도가 다 맞는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수레의 제조법이
다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군대를 수레로 편성하던 제도[車乘之制]가 폐지되었으나 왕왕 수레를 사용한 자가 있었다. 그들은 각기 그 지형을 참작하고 지혜와
재간을 부려서 창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병거를 잘 적용한 자들은 그래도 그것을 이용하여 성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응당 여러 제작법을 참고하여 연구하고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하여 제조하되 사람이 밀 수 있는 가벼운 수레를 만들어 쓰기 편리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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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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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車兵車宜審度形便 量宜造備以爲軍用. 凡兵 騎爲上 步次之 而用騎步之法 莫如攝之以車. 中國在處 皆可用車而本國則山溪多阻 不如中國之便易. 然欲制虜騎 捨車不可 宜審度形便.
如平壤ㆍ安州ㆍ義州ㆍ咸興ㆍ鏡城ㆍ會寧(鍾城或慶源)等處及他藩鎭 地形便宜處 可設一陣車以備緩急爲當. (若然則不徒藏置待變而已 在平日 宜依陣法 配以騎步 定爲約束 而操鍊時 車亦同出習陣.
又凡有載運輸將之事 去其木牌兵械 用此運輸 亦有益矣) ○凡制南倭 莫如舟師 制北虜 莫如車戰 謀國者 不可不深爲講究也.高麗顯宗時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氷渡鴨綠江 都統使康兆 出通州 今宣川.
以備之 分軍爲三 以劒ㆍ車排陣 丹兵至 合攻之 無不摧糜. 宣宗時 西北面兵馬使柳洪 請造兵車 藏之龜州以備不虞 制可. 頃在丙子之難 虜直抵京都 西路諸帥 皆入山城 虜騎睨而過之 而不敢下域出戰.
若令有車則塞路結陣 欲戰則戰 欲守則守 戰守皆在我爲一事 虜人焉敢直過? 此可見設險禦衝 伺便出奇 莫如車 况迨國家事力完復 將興師出塞 躡虜庭而問渠酋之罪則非車以行師 不可以有濟也. 古人謂
"車爲一陣之介 有脚之城." 是實驗之言也.按車之用大矣 而在行師爲尤重. 一可以止衝突 二可以載糗糧兵裝 三可以捍禦矢石 四可以冒敵前進 五可以藏騎伺便 六可以庇雨雪 舁病卒. 又行則爲陣 止則爲營
行師之用 莫善於車. 是以 古者出兵 必以車乘 凡言千乘ㆍ萬乘者 是也. 而傳所謂 "鄭之先偏後伍 楚之左右二廣者" 亦此制也. 自秦以降 車乘之制 雖廢不行 然漢衛靑 出塞擊匈奴 以武剛車
自環爲營而縱騎擊虜. 晉馬隆 討樹機能 以偏廂ㆍ鹿角車 轉鬪千里 遂平凉州則漢晉之際 尙有用車取勝者矣. 宋時 名臣謀將 多建造車之請而時無用 將之君 安可語夫用兵之具耶? 我國山谿險阨
說者謂不便用車是固然矣. 然沿路郡邑 亦多平易處 其阻阨處 亦不至不得經越. 古法曰 "易野車爲主 險野人爲主." 解者謂 "易野非不用人而主於車 險野非不用車而主於人." 則是雖險野
不至全不得用車也. 史稱李陵擊匈奴 出塞行三十日 至浚稽山 與單于相値 圍陵軍. 陵居兩山間 以大車爲營 引士出營外 爲陣 擊斬甚衆. 又今虜俗 專用騎戰 然而丙子之難 虜自瀋陽 車載大砲ㆍ軍裝
歷平安ㆍ黃海 以抵南漢ㆍ江都者無數 以此見之則在乎將之能運用 而不專在於 其地之險易也. 如國家修擧軍制 而知兵達古者任閫 寄以經紀則必有以識其便否之所在矣. 後世說者 如馬氏ㆍ丘氏輩 皆以爲 "車戰
中國與中國人戰之法 若與戎虜戰則不可用車." 甚矣! 其不思也. 夫中國與中國戰車固爲要 而中國與戎虜戰則尤不可以無車也. 近世 戚南塘在南方 平盜禦倭則能以徒成功 而及其鎭薊則造設車戰然後
乃得懲虜乂安邊境 其實效於此可見矣. 至若本國則地勢不平 用車宜若可疑 然苟深察之則亦不至不得用車. 頃自南中往京都 地勢平否 諸郡一樣而其道路修治處 皆可行車無滯. 平時道路橋梁 亦是王政之緊切者
我國百事苟且 唯知委靡若不擧人事而徒委諸地形 則雖中國豈無溪澗丘陵乎? 况車戰 非以南方之車 運防北邊 北方之車 運防南徼也. (若如此則雖騎步軍豈非疲擾? 取敗之道.) 運行不過近道 相地以成陣
當途而禦衝 豈有不得用之理? 若夫出奇追擊則車營 本配以騎步 車以爲衛 騎以爲奇爾 便可開營出騎 唯所便當 非可以車 逆峻坂馳險阨也. 是以戚公之法 車營常于近便鎭城 沿城爲衛 使車城相依 禦衝出奇
豈非萬全之法乎? 近有李之者 歷習戎事 常言 "制狄莫如車戰 我國實無不可用 苟車不得經越處則行師之法 必成列而行 雖騎步亦是危險不可行處也. 嘗自造簡易堅緻之車以示可用." 此非空談者比也.
大抵萬事 中國所當行者 東國亦無不可行 古時所能行者 後世亦無不可行也.一 造車 參覈古今衆制 務得便宜以爲製.晉馬隆偏廂車ㆍ鹿角車 唐馬燧戰車 宋張行中所造兵車 魏勝如意車等 其制大略不相遠.
宜詳求古人已試之法制 爲適用之車 使輕捷堅緻 要令一二人 可以推挽而外施穴ㆍ牌ㆍ槍ㆍ戟 敵不敢近. 又可以放矢砲而禦來箭爲妙. 若其配以騎步 行爲陣 止爲營之制則具在陣法圖說.按古者兵車 爲常戰之具
故閉門造車 出門合轍 彼此同一其制焉 後世車乘之制旣廢 往往有用車者 而人自爲製 隨其形勢 運其智巧 而創爲之 然善用之者 亦可以取勝矣. 今宜參覈衆制 擇其便宜者 而制 爲人推輕車 使適於用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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