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hema: "bangye-translation-original-pair/v1"
pair_id: "bangye-24-001"
document_sequence: 24
pair_index: 1
pair_count_in_document: 4
title: "ㄱ) 성지(城池)"
status: "complete"
pair_kind: "structural"
document_title: "반계수록 권24(卷之二十四)"
volume_title: "병제후록고설[兵制後錄攷說]"
translation_language: "ko"
original_language: "classical_chinese"
role_order: ["translation", "original"]
boundary_method: "unicode-script-runs-v1"
contains_embedded_bilingual_figure_labels: false
source_hwp: "raw_sources/[반계수록] 권24 兵制後錄攷說.hwp"
source_hwp_size: 168448
source_hwp_sha256: "3eb17b427ac52f251e08b1a55f52cfcf0c655dfea56884a38f57cc9e9b5919a9"
source_markdown: "source_mds/24_권24_兵制後錄攷說.md"
source_markdown_sha256: "f6f4c43dde622d8775ca6e89e2ae99f6923a42957d3142000b7d99bfece19b2d"
hwp_version: "5.0.3.4"
extractor: "pyhwp 0.1b15"
translation_source_spans: [[5, 30]]
original_source_spans: [[32, 32]]
translation_chars: 8310
original_chars: 2646
translation_sha256: "1f102d7bfba8e46128033dc4d0c052b39b569e37d86746a1f8443b41bed2d6fb"
original_sha256: "a67a6aedbf7c1636de6065ba6d3bc855892e37c8234fe9fd9e56e400723e7107"
translation_images: []
original_images: []
---

# ㄱ) 성지(城池)

<!-- PAIR_START id="bangye-24-001" -->

## 한국어 번역문

<!-- ROLE_START name="translation" lang="ko" pair_id="bangye-24-001" -->

ㄱ) 성지(城池)

『주례(周禮)』를 보면 장고(掌固)라는 관직이 성곽(城郭)을 쌓고 해자를 파며 나무를 심고 도랑을 파서 공고하게 하는 직무를 맡았는바 이에 관한 규정들을 수위하고 있는 관리의
아들들과 보통백성들에게 반포하고[정현(鄭玄)은 말하기를 "수(樹)라 함은 지극(枳棘)의 속(屬)이니 가시가 있는 것이고 중서(衆庶)라 함은 백성이 번갈아 고(固)를 지키는
자이라"하였다.] 필요한 기구들을 설비하며[병기(兵器) 갑(甲)옷의 속(屬)이다.] 거기에 필요한 재물을 나누어 주고 그들이 먹고 입을 월봉을 고르게 주면서 그 백성들을 부리되 그
재물과 기구들을 사용하게 하였다. 무릇 방어하는 데서는 모두 이 규정을 준수하였다.[맡긴다 함은 그 맡겨서 부림을 이름이고 백성의 재(財)와 기(器)는 그 쓰는 바의 참호를 파고
성(城)을 쌓고 또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다.] 유이(劉彝)가 말하기를 "『주역(周易)』에 '성(城)은 밑에 있는 해자[隍]에서 흙을 파서 더 쌓아 올린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도랑을 판 흙으로 성을 쌓는 것이며 못을 판 흙으로 외성을 쌓는 것이다. 즉 해자[溝池]를 밖에다 깊이 판다면 그 안에 있는 성곽이 더욱 공고화될 것이니 그것을 깊이 팜으로써 성의
높이를 증가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사험(司險)이 전국의 지도를 맡아서 군사상 중요한 산림(山林)과 내와 소택 지대들을 다 알고 있다 하였다.[고(固)라 함은 국(國)이 조(阻)에 의(依)한 것이며 국(國)에
있음을 고(固)라 하고 야(野)에 있음을 험(險)이라 하니 장고(掌固)가 성곽(城郭)ㆍ구지(溝池)ㆍ수거(樹渠)의 고(固)를 닦는다 함은 모두 국(國)에 의거하여 말함이고
사험(司險)이 산(山)ㆍ임(林)ㆍ천(川)ㆍ택(澤)이 조(阻)를 두루 안다 함은 모두 야(野)에 의거하여 말함이다.] 장남헌(張南軒)이 말하기를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백성을
나누되 국경으로 하지 않으며 국가를 공고히 하되 산과 계곡의 험한 것으로 하지 않으며 전국을 제압하되 병력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옛날 임금들이 국경으로 제정했다는 것이
『상서』｢주관(周官)｣ 편에 가장 상세히 기록되었고 또 험한 지대를 이용하여 나라를 방위했다는 것과 좋은 무기로서 장비했다는 것이 모두 주역에 기재되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것은
대개 옛날 임금들은 좋고 나쁜 일들을 백성들과 함께 염려하였으며 그 정치에 있어서 원칙과 실용 및 근본과 지엽에 관한 문제까지 구비하여 놓았다. 도덕을 자신이 체득하면 전체
백성들의 마음을 통일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과 제도를 세밀하게 제정한 것은 백성들의 생각하고 있는 바를 살피려고 한 것인데 이렇게 해야만 그 정치를 오랫동안 유지하면서도 또
공고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의 말은 그 근본 문제를 들어서 말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혁(韓奕)｣ ｢한혁(韓奕)｣：『시경』 ｢대아(大雅)｣의 편명.

장의 끝에 말하기를 "크기도 한 저 한성(韓城)은 연(燕)나라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한후(韓侯)의 선조가 임금의 명령을 받고 여러 이민족들을 안무하였다. 왕은 그 자손에게 한나라
후작을 주었고 그는 추(追)국과 맥(貊)국을 통솔하였는데 또다시 북방에 있는 나라들을 주었다. 그는 그 곳의 수령으로서 성[墉]도 높이 쌓고 해자[壑]도 깊이 팠으며 농사도 잘
짓게 하고 조세도 제때에 바쳤다. 또 그는 왕에게 곰, 붉은 표범, 누른 큰 곰의 가죽도 바쳤다"라고 하였다.[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부(溥)는 크다는 뜻이고, 한(韓)은 나라의
이름이고, 후작(侯爵)은 무왕(武王)의 자손이고, 연(燕)은 소공(召公)의 나라이고, 사(師)는 무리라는 뜻이고, 추맥(追貊)은 오랑캐의 나라이고, 용(墉)은 성(城)이고,
학(壑)은 못이고, 자(藉)는 세(稅)이고, 비(貔)는 맹수(猛獸)의 이름이다"하였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한(韓)나라가 처음 봉(封)할 때에 소공(召公)은 사공(司空)이 되었으며 왕(王)이 명하여 그 무리로써 이 성(城)을 쌓게 한 것이니 소백(召伯)이
사(謝)를 경영하고 산보(山甫)가 제(齊)나라에 성을 쌓고 춘추에 제후(諸侯)가 형(邢)에 성을 쌓고 금구(禁丘)에 성을 쌓고 함과 같은 유(類)이다. 왕(王)은 한후(韓侯)의
선조(宣祖)가 이 백만(百蠻)으로 인하여 장(長)이 된 까닭에 추맥(追貊)을 주어 백(伯)이 되게 하고 그 성지(城池)를 닦고 그 전토(田土)를 다스리고 그 세법(稅法)을 바로잡고
하여 거기에 있는 것을 왕(王)에게 바친 것이다"하였다. 동래 여씨(東萊呂氏)는 말하기를 "춘추(春秋) 때에 형(邢)에 성(城)을 쌓고 초구(楚丘)에 성을 쌓고 연릉(緣陵)에 성을
쌓고 기(杞)에 성을 쌓고 한 유(類)는 모두 제후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패권(覇權)을 잡은 자의 명령도 이와 같거늘 주(周)나라가 성(盛)했을 때에 연(燕)나라에 명령하여
한(韓)나라에 성(城)을 쌓은 것은 진실로 떳떳한 정사(政事)이다"하였다.

상고하여 보면 옛날의 제후국은 즉 지금의 군(郡)ㆍ읍(邑)과 같은 것인데 성을 쌓는 것을 큰 사업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한 제후국 백성의 힘으로 완성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반드시 조정에서 인접 제후국들에 명령하여 힘을 합쳐서 쌓게 하였다. 이것은 대개 성곽을 쌓고 방어하는 것이 일개 제후국의 일인 것만이 아니라 그 사업이 조정과 실질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이었다.

『춘추설(春秋說)』 『춘추설(春秋說)』：중국 송나라 홍차연(洪次燕)이 저작한 전 38권의 서적.

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5판(板)[1판은 8척(尺)임] 거리를 도(堵)로 하고 5개의 도를 치(雉)[200척]로 하며 100개의 치를 성(城)[2만 척]으로 하는바[6척은
보(步)가 되고 300보가 이(里)가 되니 곧 둘레가 11리 33보 2척이며, 100치는 곧 공후(公侯)의 제도이다.] 천자에게는 1천 개의 치가 있고[이는 100치의 성(城)
열을 넣음이다.] 공(公)작과 후(侯)작에게는 100개의 치가 있으며 백(伯)작에게는 70개의 치가 있고[둘레가 7리 남짓하다.] 자(子)작과 남(男)작에게는 50개의 치가
있다"라고 하였다.[둘레가 5리(里) 남짓하다.]

상고하건대, 이는 천자의 서울 안에 있는 영지는 평방 1천 리로, 공작과 후작의 영지는 평방 100리로, 백작의 영지는 70리로, 자작과 남작의 영지는 평방 50리로 하여 제정한
것이다.

｢고공기(考工記)｣에 이르기를 "장인(匠人)이 공작의 서울을 건설하는데 성을 평방 9리(里)로 하였다"고 하였다.[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성(城)의 크고 작음을 경영하여 재는
것이다. ○ 소(疏)에 이르기를 "천자(天子)의 성은 방(方) 12리(里)이다"하였다.]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공작의 성은 평방 9리[둘레가 36리]며 후작과 백작의 성은 평방 7리[둘레가 28리]며 자작과 남작의 성은 평방 5리[둘레가 20리]였다"라고 하였다.

상고하여 보면 이는 대개 모든 공작의 영지는 평방 500리로, 모든 후작의 영지는 평방 400리로, 모든 백작의 영지는 평방 300리로, 모든 자작의 영지는 200리로, 모든
남작의 영지는 100리로 한 주(周)나라의 제도를 말한 것이다.

『춘추』에 은공(隱公) 9년 여름에 낭(郎) 지방에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호씨전(胡氏傳)』 『호씨전(胡氏傳)』：중국 송나라 학자 호안국(胡安國)이 공자의 『춘추』를 해석한 30권의 전(傳).

에 이르기를 "성이란 것은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곳으로서 성을 쌓는 데도 제도가 있고 그 공사에도 일정한 시기가 있는 것이다. 즉 큰 도읍[大都]은 서울 성의
3분의 1을 넘지 않게 하며 읍(邑)의 성은 백 치(雉)를 넘지 않은 것이 제도이다. 무릇 토목 공사는 9월부터 사업을 시작하며 10월에는 도구들을 해당 장소에 이르게 하며 또
휘틀을 짜고 판자를 대는 것은 10월에 하며 동짓달에 준공하였으니 이는 시기를 두고 한 말이다. 또 노나라 은공(隱公)이 중구(中丘)와 낭(郎) 지방에 성을 쌓았는데 다 여름철에
하였으니 이는 농사에 방해를 주었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가 아닌 것이다. 대체로 성을 쌓을 때에는 제도를 위반하지 말아야 하며 공사도 제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며 또 비용, 시설
도구, 공사 측정, 거리의 타산, 성 기지의 설정, 성의 두께와 해자의 깊이의 타산, 식량의 준비, 해당 관리의 배치, 공사 규정에 관한 일들을 미리 유감이 없이 준비해 두어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을 쌓는 시기와 제도를 무시하고 함부로 거대한 공사를 일으켜서 백성의 생활을 돌보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자가 있다면 그 죄의 경중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양공(襄公) 2년에 호뢰(虎牢) 땅에 성을 쌓았다.

『호씨전』에 이르기를 "호로는 정(鄭)나라 땅인데 옛날에는 제읍(制邑)이라고 일렀고 한 나라 때에 성고(成皐)라 하였으며 지금에는 사수(汜水)현이라 한다. 그 지대의 바우가
험하기로 전국에 알려졌는데 우(虞)나라의 하양(下陽), 조(趙)나라의 상당(上黨), 위(魏)나라의 안읍(安邑), 연나라의 유관(楡關), 오(吳)나라의 서릉(西陵), 촉(蜀)나라의
한락(漢樂)과 같이 지형 상으로 반드시 의거해야 할 지대이며 또 성을 쌓고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기 때문에 그냥 버릴 수 없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험하다는 것으로 하여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정나라에 소속되지 못하고 있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지형에 따라 험악한 지대에 성을 쌓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천험(天險)이라고 하는 것은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며
지험(地險)이라는 것은 산천과 구릉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들은 험악한 지대에 성을 쌓고 그 나라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역』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성곽과 해자를 공고히
하는 일에도 군자(君子)는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맹자도 등문공(滕文公)에게 '못을 파고 성을 쌓아서 백성과 함께 견고히 방어하시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야심 있는
자들이 강토를 확장할 생각을 가지고 토지를 쟁탈하려고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 들에 가득하며 성을 쟁탈하려고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 성에 가득 차게 하는 것이 『춘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한 것이 아니다. 또 임금의 영지를 지키고 선왕(先王)의 종통을 이어받은 자로서 험악한 지대에 성을 쌓지 않고 있다가 쫓겨 다니거나 멸망하는 것도 성인의 가르친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무릇 토목 공사는 9월달에 농사일이 끝나는 때부터 사업을 시작한다.[임요수(林堯叟)는 말하기를 "각(角)ㆍ항(亢)은 용성(龍星)이니 월건(月建)이
술(戌)로 되는 9월에 해가 방성(房星)에 있으므로 각ㆍ항이 새벽에 동방에 나타나고 봄ㆍ여름ㆍ가을 3시(時)의 농무(農務)가 비로소 끝나고 백성이 장차 한가롭게 된다. 이에
백성에게 토공(土功)의 일로써 알린다"하였다.] 10월에는 성 쌓을 도구들을 해당 장소에 갖다 놓으며[심성(心星)이 대화(大火)가 되니 해월(亥月)인 10월 초에 심성(心星)이
각(角)ㆍ항(亢)의 뒤에 차례하여 새벽에 동방에 나타나면 성을 쌓을 도구를 준비하니 담틀ㆍ흙ㆍ그릇ㆍ들것을 모두 공사하는 처소에 준비함을 이름이다.] 휘틀을 짜고 판자를 대는 것도
10월에 하며[수(水)는 영실성(營室星)이니 지금의 10월에 혼중(昏中)함을 이르는 것이며 이에 판(板)을 세우고 공사를 일으킨다.] 동짓달에 준공한다.[해가 남지(南至)에 이름에
미양(微陽)이 비로소 움직이므로 토목공사가 쉬는 것이다. ○ 장공(莊公) 29년이다.]

『좌전』을 보면 노나라 소공(昭公) 32년 겨울에 사미모(士彌牟)가 주(周)나라의 성 건축을 설계하였는데[사미모(士彌牟)는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이니 주(周)나라 낙읍(洛邑)의
성(城)을 경영하여 쌓았다.] 성 쌓을 거리를 측정하고[성을 쌓아야 할 곳의 길이를 계산함이다.] 성의 높이와 두께를 타산하고[높은 것을 재는 것을 췌(揣)라 한다.] 해자의
깊이를 확정하고 그 지역에서 흙을 파 올 수 있는 곳을 지정하며[밑과 끝의 두텁고 엷음을 헤아려 잰다. 깊이를 재는 것을 인(仞)이라 한다. 물색(物色)은 살펴봄이니 흙을 취하는
방향을 살펴봄이다.] 공사에 참가할 사람들의 거리를 토의하고[역도(役徒)의 사는 곳의 멀고 가까움을 논의한다.] 공사 기일과[일이 어느 때에나 끝날 것인지를 알아본다.] 소요
인원을 계산하며[몇 사람의 공력(功力)을 쓸 것인가를 판단한다.] 공사의 비용과[얼마만한 재물의 비용이 소비될 것인지를 안다.] 식량의 수효를 기록하여[얼마만한 양식을 쓸 것인가를
안다.] 제후국들에게 공사에 착수할 것을 명령하고 또 해당 인원수와 구역을 책임지게 한다.[일에 마땅한 일꾼의 인원수를 붙이고 거기에 마땅한 성(城) 길이 몇 장(丈) 몇
척(尺)을 나눠 붙인다.] 이상의 기록들을 해당 부분의 최고 책임자에게 주고[수(帥)는 제후의 대부이니 각각 성문(成文)을 만들어서 제후의 수(帥)에게 준다.] 그에 관한 사업은
유문공(劉文公)의 지도를 받으며[효(效)는 그 설계한 법대로 바르게 할 것을 주나라의 경사(卿士) 유문공(劉文公)에게 드리는 것이다.] 한간자(韓簡子)가 공사에 직접 임석하여
제후국들을 총지휘하였다고 하였다.[한간자는 진(晋)나라의 대부 한불신(韓不信)이니 그 공사(工事)에 다다라서 실제로 현장을 밟으면서 제후들에게 명령하였다.]

또 노나라 선공(宣公) 11년에 초(楚)나라의 영윤(令尹) 벼슬을 한 위애(蔿艾)[즉 손숙오(孫叔敖)]가 사냥을 하고 기(沂) 땅에 성을 쌓는데[초나라의 읍(邑)] 기 땅을 맡은
관리에게 성 쌓을 데 대한 계획을 세우게 하고[봉인(封人)은 그때에 성 건축을 주관한 자이고, 일을 여(慮)한다 함은 계획을 꾸며서 사공(事功)을 계산함이다.] 그에게 사도(司徒)
벼슬을 주어서 공사를 진행하게 하였다. 그가 작업량을 계산하고 소요 일수를 타산하여[공사량의 가볍고 무거움을 헤아리고 날수를 명하여 정한다.] 소요되는 재정과 도구들을 각 담당
부분들에게 고르게 분배하고[재용(財用)이라 함은 성을 쌓는 기구이니 나눠서 고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휘틀을 짜고 판자를 대이고 삼태기와 다지는 도구들을 알맞게 만들며[간(幹)은
담틀이니 담틀을 세운 뒤에 판자를 대고 쌓고 평(平)하게 하여 다스린다. 삼태기는 흙을 담는 기구이고, 공이는 흙을 다지는 기구이며, 알맞게 한다 함은 그 가볍고 무거움을
헤아림이다.] 사용할 흙의 양과[흙을 취하고 물자를 씀에 정도와 한계를 정한다.] 그 운반 거리를 토의하고[먼데를 의논하고 가까운 데를 살펴서 그 노력(勞力)을 고르게 한다.] 성
기초의 규모를 확정한 뒤에[성터의 밑바닥을 넓고 좁음을 적당히 하여 행한다.] 소요 식량을 준비하고 해당 관리들을 선정함으로써[먹을 양식을 충분히 갖춘다. 감독하고 주관하는
유사(有司)와 꾀하고 헤아린다.] 공사를 30일 동안에 준공하여[성을 쌓는 일은 대략 30일에 이룬다.] 처음 예정 기일을 초과하지 않았다 한다.[본대 계획한 기일을 초과하지
아니하니 전(傳)에는 손숙오(孫叔敖)가 능히 백성을 부림을 말함이다.]

한나라 고조(高祖) 6년 10월에 전국의 현(縣) 소재지에 성을 쌓게 하였다.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진시황(秦始皇)이 여러 제후국을 병합하고 성곽들을 파괴하여 버렸다. 그러나 고조는 전국을 통일한 뒤에 현 소재지에 성을 쌓게 하였으니 그 마음 넓고 좁은
것과 어느 국가가 오래갈 것인가를 여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하였다.[구준(丘濬)은 말하기를 "고을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백성 무리에는 많고 적음이 있으나 모두 보장(保障)이
없어서는 안 되기는 한가지이니 보장을 하여 적(敵)을 막는 소이(所以)가 성곽(城郭)이 아닌가. 시황(始皇)은 천하의 관리(官吏)와 백성으로써 적국(敵國)을 삼고 있으니 오직 그
막음이 있어서 자기를 대항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함이고 고조(高祖)는 천하의 관리(官吏)와 백성으로써 한집을 삼고 있으니 오직 그 막음이 없어서 혹 백성의 생명(生命)을
상(喪)할까 두려워함이니 이는 그 마음의 공변되고 사사롭고 다르고 보존(保存)과 멸망이 나뉘는 소이(所以)이라 할 것이다"하였다.]

주(周)나라 세종(世宗) 현덕(顯德) 2년에 조서를 내려 외성(外城)을 확장하게 하였는데 먼저 표말뚝[標幟]을 세워 놓고 금년 겨울 농한기를 이용하여 쌓되 농사 때가 시작되면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농한기를 이용하여 점차적으로 완성하라고 하였다. 또 명령을 내려 지금으로부터 무덤은 다 표말뚝으로부터 7리 밖에다 할 것이며 그 표말뚝 내에는 현관(縣官)이
시가, 창고, 시장, 병영, 관청 등의 건물 구역을 확장한 다음에 백성들이 편리에 따라 집을 지으려고 하는 것을 승인한다 하였다.

상고하여 보면 세종의 이러한 조치는 후세에 성을 쌓고 못을 팔 때에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주세종이 점차적으로 진행하는 법을 제정하여 준수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공사에서 피로를 주지 않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리 주의해야 할 일들을 알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토목공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준수함으로써 성 쌓는 공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업에서 본받아야 한다.[이상은 성지(城池)를 논한 것이다.]

<!-- ROLE_END name="translation" pair_id="bangye-24-001" -->

## 한문 원문

<!-- ROLE_START name="original" lang="classical_chinese" pair_id="bangye-24-001" -->

城池周禮掌固掌脩城郭ㆍ溝ㆍ池ㆍ樹ㆍ渠之固 頒其士庶子及其衆庶之守. 鄭玄曰 "樹 謂枳棘之屬 有刺者也. 衆 庶民遞守固者也."設其飾器 兵甲之屬. 分其財用 均其稍食 任其萬民 用其財器 任
謂以其任使之也 民之財器 其所用塹築及爲藩落. 凡守者受法焉.劉彛曰"易曰'城復于隍'則是浚溝之土 所以爲城也 鑿池之土 所以爲郭也. 溝池深於外則城郭固於內 用其深以增其高也."司險掌九州之圖
以周知其山林川澤之阻.固 國所依阻者也在國曰固 在野曰險. 掌固掌脩城郭ㆍ溝池ㆍ樹渠之固 並據國而言. 司險周知山林ㆍ川澤之阻 並據野而言.張氏南軒曰"孟子謂'域民不以封疆 固國不以山谿
威天下不以兵革.'而先王封疆之制 甚詳於周官 設險守國與弧矢之利 幷著於易經 何耶? 蓋先王 吉凶與民同患 其爲治也 體用兼備 本末具擧. 道得於已 固有以一天下之心 而法制詳密 又有以周天下之慮
此其治 所以長久而安固. 若孟子之言則推其本而言之耳."○詩大雅韓奕之末章曰"溥彼韓城 燕師所完 以先祖受命 因是百蠻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實墉實壑 實畝實藉
獻其貔皮ㆍ赤豹ㆍ黃羆." 朱子曰"溥 大也. 韓 國名. 侯 爵 武王之後也. 燕 召公之國也. 師 衆也. 追ㆍ貊 夷狄之國也. 墉 城. 壑 池. 藉 稅也. 貔 猛獸名."朱子曰"韓初封時
召公爲司空 王命以其衆 爲築此城 如召伯營謝 山甫城齊 春秋諸侯城邢 城楚丘之類也. 王以韓侯之先 因是百蠻而長之 故錫之追貊 使爲之伯 以脩其城池 治其田畝 正其稅法而貢其所有於王也."呂氏 東萊
曰"春秋之時 城邢 城楚丘 城緣陵 城杞之類 皆合諸侯爲之. 覇令尙如此則周之盛時 命燕城韓 固常政也."按 古之侯國 卽今郡邑 築城大役也. 一國之民 不足以自成之必 須朝廷命隣方 合力爲之.
蓋以城郭之守 非但一邦之事 實以其事 關朝廷也.○春秋說曰"古者 五板而堵 八尺曰板. 五堵而雉 二百尺 百雉而城 二萬尺. ○六尺爲步 三百步爲里 卽周十一里三十三步二尺. 百雉乃公侯之制也.
天子千雉 蓋受百雉之城十.公侯百雉 伯七十雉 周七里有餘. 子男五十雉." 周五里有餘.按 此以天子畿內之地方千里 公侯之地方百里 伯七十里 子男五十里而爲制也.○考工記 匠人營國方九里.
建邦而營度其國城之大小也. ○疏曰"天子城則方十二里."鄭氏 玄 曰 "公之城 方九里 爲周三十六里.侯伯之城 方七里 周二十八里. 子男之城 方五里. 周二十里.按 此蓋以周制諸公之地方五百里
諸侯方四百里 諸伯三百里諸子二百里 諸男百里而爲制也.○春秋 隱公九年 夏城郎.胡氏傳曰"城者 禦暴保民之所而城有制 役有時. 大都不過三國之一 邑無百雉之城 制也. 凡土功 龍見而戒事 火見而致用
水昏正而栽 音再. 日至而畢 時也. 隱公城中丘 城郎而皆以夏 則妨農務而非時矣. 城不踰制 役不違時 又當分財用 平板幹 稱畚築 程土物 議遠邇 畧基址 揣厚薄 仞溝洫 具餱糧 度有司 量功命
日不愆于素然後 爲之可也. 况失其時制 妄興大作 無愛養斯民之意者 其罪之輕重見矣."襄公二年 城虎牢.胡氏傳曰"虎牢鄭地 故稱制邑 至漢爲成}C 今爲汜水縣. 巖險聞於天下 猶虞之下陽 趙之上黨
魏之安邑 蕪之楡關 吳之西陵 今夷陵. 蜀之漢樂. 今成固. 地有所必據 城有所必守 而不可以棄焉者也. 有是險 而不能守 故不繫於鄭. 然則據地設險 亦所貴乎! 天險不可升也 地險 山川丘陵也.
王公設險 以守其國 大易之訓也. 城郭溝池以爲固 亦君子之所謹也.'鑿斯池 築斯城 與民同守'孟子之所以語滕君也. 夫狡焉思啓封疆 而爭地以戰 殺人盈野 爭城以戰 殺人盈城者 固非春秋之所貴.
守天子之土 繼先君之世 不能設險守國 將至於遷潰滅亡 亦非聖人之所與."○左傳曰"凡土功龍見而畢務 戒事也. 見賢遍反 下同. ○ 林堯叟曰'角亢龍星也. 建戍之月 日在房故 角亢晨見於東方
三時之務始畢 民將閑暇. 於是 戒民以土功之事.' 火見而致用心爲大火. 亥月之初 心星次角亢之後 而晨見於東方. 而致築作之所用 謂板幹畚挶 皆致之於作所. 水昏正而栽 水 營室星也
謂今十月而昏中. 於是 樹板幹而興作. 日至而畢" 日南至 微陽始動 故土功息. ○莊公二十九年."昭公三十二年冬 士彌牟營成周 士彌牟 晉大夫. 營 度成固之城. 計丈數 計所當城之丈數. 揣高卑
度高曰揣. 度厚薄 量度本末厚薄.仞溝洫 度深曰仞. 物土方 物 相也 相取土之方面. 議遠邇 議役徒之遠邇. 量事期 知事幾時畢. 計徒庸 知用幾人功. 慮財用 知費幾財用. 書餱糧 知用幾糧食.
以令役於諸侯 屬役賦丈 屬所當役人數而付所當城丈尺. 書以授帥 帥諸侯之大夫 各爲成書 以授諸侯之帥.而效諸劉子 效致其正法於周卿士劉文公. 韓簡子臨之 以爲成命. 韓簡子晉大夫韓不信 臨履其事
以命諸侯.宣公十一年楚令尹蔿艾獵 孫叔敖也. 城沂.楚邑. 使封人慮事 封人 其時主築城者 慮事謀慮計功. 以授司徒 司徒掌役. 量功命日 量功輕重 命作日數. 分財用 財用築作具也 分之使均.
平板幹 幹 楨也 主幹而後施板而築之 平之使治. 稱畚築 畚 盛土器. 築 實土器 稱 量其輕重. 程土物 取土用物 爲作程限. 議遠邇 議遠察邇 均其勞也. 略基址 城基址足行其廣狹. 具餱糧
具備餱糧. 度有司 謀度監主之有司. 事三旬而成. 築城之事 約三十日而成.不愆于素 不過素所慮之期也. 傳言孫叔敖之能使民.○漢高祖六年冬十月 令天下縣邑城.呂氏曰"始皇幷諸侯而隳壞城郭
高祖定天下而令縣邑城 心量之廣狹 世祚之長短 於是可卜矣."丘濬曰"郡邑有大小 民庶有衆寡 皆不可無保障一也. 所以保障而捍蔽之者 非城郭乎? 始皇以天下吏民 爲敵國 惟恐有其所捍蔽 而得以拒我.
高祖則以天下吏民 爲一家 惟恐其無所捍蔽而或以喪生 此其心公私之異 而存亡所以分也歟."○周世宗顯德二年 詔展外城 先立標幟 俟今冬農隙興板築 東作動則罷之 更俟次年 以漸成之. 且令自今葬埋
皆出所標七里之外 其標內俟縣官分畫街ㆍ衢ㆍ倉ㆍ場ㆍ營ㆍ廨之外 聽民隨便築室.按 世宗此擧 可爲後世開展城池之法. 蓋爲之以漸立之以準使民 不疲於用力 而豫知所以避就. 凡有營繕 皆可準此以爲法
不但展城一事也. 已上論城池.

<!-- ROLE_END name="original" pair_id="bangye-24-001" -->

<!-- PAIR_END id="bangye-24-00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