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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병거(兵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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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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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병거(兵車)

『상서』 ｢서(序)｣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융거(戎車) 융거(戎車)：대형으로 된 군용 수레.

300냥(兩)과 호분(虎賁) 300명을 거느리고 주(紂)와 목야(牧野)에서 싸웠다고 하였다.[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융거(戎車)는 치거(馳車)이니 옛적에는 치거가 1승(乘)이면
혁거(革車)가 1승이며, 치거는 전거(戰車)이고 혁거는 치거이니 기계ㆍ물화ㆍ의복ㆍ장속을 싣는 것이다. 사마법(司馬法)에는 이르기를 "1거(車)에는 갑사(甲士)가 3명이고
보졸(步卒)이 72명이고 밥짓기꾼이 10명이고 의장(衣裝)지키기꾼이 5명이고 말먹이꾼이 5명이고 땔나무ㆍ물질이꾼이 5명이라 하니, 치거가 75명이고 혁거가 25명으로서 100명이
2거(車)인 까닭에 양(兩)이라 이르니 300냥은 3만 명이며 호분(虎賁)은 100명의 장(長)이다"하였다.

○구준(丘濬)은 말하기를 "옛적에 차전(車戰)하는 법은 매 차마다 갑사(甲士) 3명이 함께 타는데 왼쪽 사람은 활을 잡고 오른쪽 사람은 창을 잡고 가운데 사람은 수레 고삐를
잡으며, 보졸(步卒)은 72명인데 24명이 앞에 있고 좌우에 각 24명이 있으며 앞에 있는 자가 싸우고 좌우에 있는 자가 수레 멍에를 끼고 항상 서로 교대하여 번(番)을 서며 뒤에
또 25명으로 한 대(隊)를 삼고 수레와의 거리가 25보(步)이니 이른바 밥짓기꾼ㆍ의장(衣裝)지키기꾼ㆍ말먹이꾼ㆍ땔나무 물질이꾼이며 행할 적에는 수레로써 위(衛)를 삼고 거할 적에는
수레로써 영(營)을 삼는다"하였다.]

진력(陳櫟)이 말하기를 "한 호분은 반드시 100명의 군인을 통솔하며 융거 한 채는 모두 100명 군인을 배속할 수 있기 때문에 융거의 수와 호분의 수를 합하면 대개 3만 명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례』에 건거(巾車) 건거(巾車)：수레를 맡은 관리의 우두머리.

[정현은 이르기를 "건거는 거관(車官)의 우두머리다" 하였다]는 임금의 다섯 가지 수레[五路]를 주관한다고 하였다.[옥로(玉路), 금로(金路), 상로(象路), 혁로(革路),
목로(木路)이다.]

혁로(革路)는 푸른색에 이마가 흰 말(駹)에 잡색 굴레를 물기며 말의 뱃줄[纓]은 다섯 겹으로 메우며 대백(大白) 대백(大白)：은(殷)나라 때 기(旗)의 일종.

기를 세워서 군용으로 사용한다.[혁로(革路)는 이끌기를 혁(革)으로써 하고 옻칠을 하되 다른 꾸밈이 없으며, 용(龍)은 표이니 흰빛과 검은빛으로써 위(韋)를 꾸미고
잡색(雜色)으로써 늑(勒)을 한 것이며, 조(條)는 조(絛)로 읽는다. 영(纓)은 말의 가슴에 당(當)함을 이름이니 곧 지금의 마앙(馬鞅)에 조사(條絲)로써 영(纓)을 꾸며
오잡(五匝)을 만든 것이며, 태백(太白)은 은(殷)의 기(旗)이니 정색(正色)을 형상한 것이며, 융(戎)이란 병사(兵事)를 말한다.]

또 거복(車僕)은 군용 수레들인 융로(戎路), 광거(廣車), 궐거(闕車), 췌거(萃車), 경거(輕車)의 예비 수레들을 주관한다고 하였다.[췌(萃)는 부(副)와 같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병거(兵車)이니 이른바 오융(五戎)이다. 융로(戎路)는 왕(王)이 군(軍)에 있어서 타는 것이고, 광거(廣車)는 가로 진을 치는 수레이고, 궐거(闕車)는
보궐(補闕)함에 쓰는 수레이다. 췌(萃)는 가리는 것과 같으니 췌거는 적을 대하여 스스로 숨고 가리우고 함에 쓰는 수레이고, 경거(輕車)는 적에 달려가서 군사를 유인함에 쓰는
수레이다.『춘추전(春秋傳)』에 말하기를 "공(公)이 융로(戎路)를 잃었다"하고 또 말하기를 "그 군(君)의 융(戎)이 나뉘어 그 광(二廣)이 되었다"하였으니, 제후의 융로는
광거(廣車)이다. 또 말하기를 "사유궐(師斿闕) 40승(乘)이고 손자팔진(孫子八陣)에 췌거(萃車)의 진(陣)이 있다"하고 또 말하기를 "치거천승(馳車千乘)이라"하니, 다섯 가지의
제도와 췌(萃)의 수효는 모두 들어 알지는 못하였다.] 무릇 군용 수레들은 각기 예비 수레 하나씩 정비한다.[오융(五戎)이라는 것은 그 하나를 함께 하여 왕(王)과
우존자(優尊者)의 타는 것으로 삼고 췌(萃)는 각각 그 장(長)을 좇는다. ○상고하건대 여기에 이른바 혁거(革車)는 곧 병거(兵車)이니 위의 서서주(書序註)의 혁거
치거(革車輜車)라는 것과는 다르다.]

옛날 수레로 싸우는 법[車戰之法]을 상고하여 보면 매 병거(兵車) 한 채에 갑사(甲士) 3명, 보병[步卒] 72명과 또 큰 수레[重車]를 끌고 뒤에서 가는 군인 25명이 있으니
도합 100명이었다. 행군할 때에는 수레로써 호위하고 머물러 있을 때에는 수레로써 병영을 삼으며 각 수레에 또 예비 수레를 두어 보조함으로서 불의의 사변을 방비하였었다.

｢고공기(考工記)｣에 이르기를 "군용 수레는 여섯 등급이 있으니 수레 뒤턱[車軫] 나무가 4척이면 1등으로 하며 창 자루[戈柲]가 6척 6촌인데 창[戈]을 엇비슷이 세워서 가로지른
나무보다 4척 높게 만든 것을 2등이라 하며 사람의 키가 8척인데 사람이 서서 창보다 4척 높게 만든 것을 3등이라 하며 날 없는 창[殳]의 길이는 12척인데 그것을 세워서
사람보다 4척 높게 만든 것을 4등이라 하며 민늘창[戟]은 16척인데 그것을 세워서 날 없는 창보다 4척 높게 만든 것을 5등이라 하며 세모진 창[矛]은 20척인데 그것을 꽂아서
미늘창보다 4척 높게 만든 것을 6등이라고 한다. 이것이 수레의 6등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이것이 이른바 병거(兵車)이다. 진(軫)은 여(輿) 뒤의 횡목(橫木)이고,
비(柲)는 병(柄)이고, 숭(崇)은 높다는 뜻이다. 8척(尺)을 심(尋)이라 이르고, 심(尋)을 곱절함을 상(常)이라 이르고, 수(殳)의 길이는 2장(丈) 2척(尺)이다.
과수극모(戈殳戟矛)는 모두 거기(車騎)에 꼽는다. 정사농(鄭司農)은 이르기를 "기댄다 함은 의(倚)함이니 과(戈)를 수레에 붙이어 비껴 기대는 것을 이른다"하였다.]

『시경』 ｢서(序)｣에 이르기를 "6월에 주선왕(周宣王)이 북방의 적을 토벌할 때에 큰 군용차 10채[乘]를 앞세워 길을 개척하였는데 그 수레들이 편안하여 앞이 낮은 수레[輊]와도
같고 앞이 높은 수레[軒]와도 같았다고 하였다.[한영(韓嬰)은 말하기를 "수레에 대융(大戎) 10승(乘)이 있으니 수레는 만륜(縵輪)으로 하고 말은 갑(甲)옷을 입히고 멍에 위에
모두 칼과 창이 있으니 이름하기를 함군(陷軍)의 수레라 한다"하였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원(元)은 크다는 뜻이고 융(戎)은 융거(戎車)이니 군사의 선봉이며, 계(啓)는 여는 것이고 행(行)은 길이며 지(輊)는 수레가 복(覆)하여 앞으로
함이고 헌(軒)은 수레가 각(却)하여 뒤로 함이다"하였다.]

또 『시경』 ｢진풍(秦風)｣ ｢소융(小戎)｣장에 이르기를 "적은 군용 수레의 가로놓인 앞뒤 나무에 짐을 약간 싣고서 말 두 마리 사이에 있는 성에를 다섯 군데 묶었으며 말 등에다
가죽 고리를 이리저리 유동하게 달고 말 옆구리에 묶어서 말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수레에다 밧줄을 달아 멍에에다 메고 호피 담요와 바퀴 통 밖에 나온 긴 굴대[軸]에
기린[騏馵]과 같이 왼발이 흰말을 메웠다"라고 하였다.[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소융(小戎)은 병거(兵車)이다. 천(俴)은 천(淺)이다. 수(收)는 수레 턱나무이니 수레의 앞뒤
양단(兩端)에 가로지른 나무를 이름이고 싣는 물건을 수렴(收歛)하기 위해서이다. 수레의 제도는 너비가 모두 6척 6촌인데 평지에서 짐을 싣는 것은 큰 수레로서 진(軫)의 깊이가
8척이고 병거(兵車)는 진(軫)의 깊이가 4척 4촌이니 그러므로 소융(小戎)이 수(收)가 얕다고 한 것이다. 오(五)는 5속(束)이고 목(楘)은 빛이 서로 무늬진 문장(文章)의
모양이다. 수레채인 양주(梁輈)는 전진(前軫)의 앞에서부터 조금 구부러져 올라가고 멍에에 이르면 아래로 향하여 갈구리지고 멍에를 수레채 아래에 가로질러서 수레채 형용이 하늘처럼
되어 위로 구불기를 집의 들보와 같고 또 가죽으로써 다섯 곳을 묶으니 그 문장(文章)이 무늬진 것이다. 유환(游環)은 말 가슴걸이의 고리이니 가죽으로써 고리를 만들어
양복마(兩服馬)의 등에 당(當)하게 하고 위로 놀고 앞으로 옮겨서 정해진 곳이 없는데 양참마(兩驂馬)의 밖의 고삐를 이끌어 그 가운데에 꿰어 잡으니 이는 참마를 어거하여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참(驂)의 가슴걸이가 있는 것과 같다' 함이 이것이다. 협구(脅驅)는 또한 가죽으로 만들어서 앞으로는 멍에 양쪽에 매고
뒤로는 뒤턱나무의 양쪽에 매어 복마(服馬)의 갈비 밖에 당(當)하니 이는 참마를 몰아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음(陰)은 굴대를 가리는 것이니, 굴대는 수레 앞
횡목의 앞에 있는데 판자로써 옆에 가로질러 가리우고 그 그늘로써 이 굴대를 비치게 하므로 이것을 음(陰)이라 이른다. 말 가슴걸이는 가죽 두 줄로써 앞으로는 참마의 목에 매고 뒤로
음판(陰板)의 위에 매는 것이다. 옥속(鋈續)은 음판(陰板)의 위에 가슴걸이를 이은 곳이 있는데 백금(白金)을 녹여서 그 고리에 도금(鍍金)하여 장식을 삼는 것이니 이는 수레의
멍에의 길이는 6척 6촌으로서 다만 이 복(二服)을 넣을 뿐이고 참마의 목이 멍에에 닿지 아니하므로 따로 두 가슴걸이를 만들어 수레를 이끌고 또한 근(靳)이라 이르니 『좌전』에
이르기를 '두 가슴걸이가 장차 끊어진다' 함이 이것이다. 문인(文茵)은 수레 안에 깔고 앉는 호피(虎皮)요 창(暢)은 긴 것이고 곡(轂)은 수레바퀴의 속에 있어 밖으로는 바퀴살을
유지하고 안으로는 굴대를 받는 바퀴통이다. 큰 수레의 바퀴통은 1척 반이고 병거(兵車)의 바퀴통의 길이는 3척 2촌이므로 병거를 긴 바퀴통이라 한다. 기(騏)는 기문(騏文)이고
말의 왼발이 흰 것을 주(馵)라 한다"하였다.]

『좌전』을 보면 노나라 은공(隱公) 9년에 북쪽에 있는 야만족[北戎]이 정(鄭)나라를 침입하였을 때에 정백(鄭伯)이 방어하였는데 침입군에 대하여 걱정하기를 "저 놈들은
보병이고[임요수(林堯叟)는 말하기를 "도(徒)는 보병(步兵)을 이름이다"하였다.] 우리는 수레로 편성하였으니 놈들이 우리의 수레를 쓰지 못하게 술책을 쓸 것이다"고 하니
공자(公子) 돌(突)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가사 용감하다 하더라도 강하지 못한 자는 시험적으로 침입해 보다가 곧 가버리는 것이니 임금은 세 번 복병을 해 두고 대기할
것입니다.[복(覆)은 복병(伏兵)이다.] 침입자의 군대가 빠르기는 하나 조직이 정연하지 못하며 약탈만을 하고 서로 단결하지 못하니 그들은 반드시 승전할 때에는 서로 전공을 다툴
것이며 패전을 하더라도 서로 구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 선 자는 약탈을 위하여 반드시 힘을 다해서 진격할 것이나 퇴하다가 위리 복병을 만나면 반드시 급히 도망할 것이며
뒤에 있는 자가 구원하지 않으면 그들이 계속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이때를 타서 보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에 융(戎)에게서 뜻을 쾌(快)하게 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더니 정백이
그 말대로 하였다. 과연 전진하다가 복병을 만난 침략군은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축담(祝聃)이 추격하고 정백이 적과 충동하여[복병이 융(戎)의 군사의 한복판을 공격하였다.] 앞뒤에서
공격함으로써[제1복병이 그 앞을 치고 축담(祝聃)이 제3복병과 더불어 그 뒤를 치고 아울러 제2복병이 그 복판을 치니 융(戎)이 앞 뒤 복판의 세 곳에서 적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융(戎)의 군사의 복판을 치고 앞뒤에서 쳤다"고 하였다.] 전멸시킨 결과 북방의 적들이 대패하였다고 하였다.

또 노나라 환공(桓公) 5년에 주나라의 왕(王)이 여러 제후(諸侯)의 군대로 정(鄭)나라를 토벌하였다. 정백이 방어하게 되었는데 만백(曼伯)으로 우군[右拒]을 삼고[만백(曼伯)은
정(鄭)나라의 우군(右軍)을 거느렸다.] 제중족(祭仲足)으로 파군[左拒]을 삼았으며 원번(原繁)과 고거미(高渠彌)가 중군(中軍)이 되어 정백을 호위하고 어려진(魚麗陣)으로
편성하였다.[두 대부(大夫)가 중군(中軍)으로써 정(鄭)나라 임금을 받들고 어려(魚麗)라는 진(陣)을 만들었다.] 앞에는 편(偏)이 서고 뒤에는 오(伍)가 섰으며[사마법(司馬法)에
차전(車戰)은 25승(乘)이 편(偏)이 되고 5명이 오(伍)가 되니 수레로써 앞에 거하고 오(伍)로써 뒤에 거함이다.] 또 오들을 수레 사이에 배치시켜 공간을 없앤
다음에[오(伍)로써 편(偏)의 틈을 이어서 그 궐(闕)한 데를 채우니 이것이 대개 어려진법(魚麗陣法)이다.] 유갈(繻葛)이란 땅에서 싸웠다.[정(鄭)나라의 땅 이름이다.] 싸움을
시작할 때에 정백이 좌, 우군에 명령하기를 "대장기가 움직이면 북을 치고 전진하라!"고 하였다.[괴(旝)는 전(旃)이니 이는 지금의 대장(大將)도 기(旗)로 지휘하여 호령(號令)을
삼는 것이다. 좌우의 두 거(拒)는 괴(旝)의 움직임을 보면 각각 북을 울리면서 군사를 몰고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왕을 원조하던 채(蔡)ㆍ위(衛)ㆍ진(陳) 등 제후의 군대가
다 먼저 도망하여[세 나라에서 왕을 좇은 군사가 모두 먼저 달아났다.] 왕의 군대가 무질서하게 되었을 때에 정나라 군대가 합세하여 공격한 결과[정나라가 삼군(三軍)으로써 합하여
쳤다.] 왕의 군대가 대패하였다고 하였다.

또 노나라 선공(宣公) 12년에 진(晉)나라가 초(楚)나라와 필(邲) 땅에서 싸웠다. 난무자(欒武子)[진나라의 대부]가 말하기를 "초나라 임금의 친위군[융(戎)은
친병(親兵)이다.]은 두 광(廣)[좌, 우광]으로 나누었는데 광은 한 개의 졸(卒)로 편성하고도 양(兩)을 더 보충하였다.[1광(廣)에는 수레 15승(乘)이 있고 매 승(乘)에
보졸(步卒) 100명을 쓴다. 사마법(司馬法)에 100명이 졸(卒)이 되고 25명이 양(兩)이 되고 수레 15승(乘)이 대편(大偏)이 되었는데 지금 광(廣)이 15승(乘)이라 하니
또한 옛 편(偏)의 법(法)을 쓴 것이고 다시 25명으로써 뒤따르는 버금을 삼은 것이다. ○주씨(朱氏)는 말하기를 "주(周)나라의 제도에 15승(乘)이 대편(大偏)이 되고 25명이
양(兩)이 되는데 초(楚)나라는 50명으로써 양(兩)을 삼으니 옛 편(偏)으로써 논(論)하면 1졸(卒) 100명의 밖에 또 이 50명의 양(兩)이 있는 것이니 이는 초(楚)나라의
1거(車)는 주(周)나라의 양거(兩車)의 사람 수효를 겸하여 주(周)나라는 1거(車)에 75명이 있고 초(楚)나라는 1거(車)에 150명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이정(李靖)의
문대(問對)에 쓰여 있으니 주(注)의 말이 틀린 것이다.] 우광(右廣)은 새벽에 동원되어[날마다 우광(右廣)이 계명(鷄鳴)에 처음으로 말을 메운다.] 시간이 정오가 되면 좌광이
교대하여[그 시간을 재어 일중(日中)에 이르면 좌광(左廣)이 대신 받는다.] 어두울 때까지 방위하며[해가 질 때에 이르러 멈춘다. 내관(內官)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자이고 차례를
만들어 그 밤에 당직(當直)하니 지금의 야순(夜巡)과 같은 유이다.] 밤에는 초나라 임금의 친근자들이 방위책임을 지고 불의의 사변을 대비하고 있으니 그들의 방위가 주밀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초나라에서 승광(乘廣) 30채[乘][승광(乘廣)은 병거(兵車)의 이름이다.]를 좌광(左廣)과 우광(右廣)으로 나누었는데[나누어 좌우 두 광을 삼으니 매 광(廣)에
15승(乘)이다.] 우광은 닭이 울 때에 동원되어 정오까지 방위하면[좌광은 그것을 받아서 해가 져서 벗기며 허언(許偃)이 우광을 어(御)하고 양유기(養由基)가 우(右)가 되며]
좌광이 교대하여 해가 질 때에 또 교대하였다. 허언(許偃)은 우광을 영솔하였고 우광 양유기가 우익이 되었으며[우(右)는 거석(車石)이 됨이니 이는 두 광(廣)은 초(楚)나라 임금이
번갈아 타는 까닭에 각각 융어(戎御)와 융석(戎石)이 있다.] 팽명(彭名)이 좌광을 영솔하였고 굴탕(屈蕩)이 좌광의 우익이 되었다.

이정(李靖) 이정(李靖)：중국 당(唐)나라 때의 명장.

이 말하기를 "초나라에서 승광(乘廣)이 30채라 하였는데 광은 한 개의 졸(卒)로 편성하고도 양(兩)을 더 보충하였다. 말은 군대가 행군할 때에 오른쪽 채목을 주로 하는 것이며 또
그 채목을 주로 하여 싸우기 때문에 싸움은 채목을 끼고 싸우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다 주나라의 제도였다. 100명은 졸(卒)이며 50명은 양(兩)이다. 이것은 곧 매 수레 한 채에
150명의 군인을 편성한 것이 되니 주나라 제도와 많은 차이가 있다. 주나라 제도에는 수레 한 채에 보병 72명을 갑사(甲士) 3명으로 편성되어 있다. 또 25명을 1갑(甲)이라
하는데 총 3갑으로 하였으니 도합 75명이다. 그러나 초나라는 산과 늪이 많은 나라로서 수레는 적고 사람은 많기 때문에 군인들을 3개 대오로 나누어 편성하였으니 주나라 제도와 다를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노나라 성공(成公) 7년에 초나라 무신(巫臣)이 먼저 초나라에서 진(晉)나라로 도망하였다. 이 진(晉)나라로부터 오(吳)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양(兩)들로써 한 개의
졸(卒)을 편성하여 데리고 가서[사마법(司馬法)에 100명이 졸(卒)이 되고 25명이 양(兩)이 되니 무신(巫臣)은 1졸(卒) 100명으로써 오(吳)나라에 간 것이다.] 한 개의
편(偏)과 양(兩)을 남겨두어[사마법에 수레 9승(乘)은 소편(少偏)이 되고 15승(乘)은 대편(大偏)이 되니 이는 소편 9승의 수레와 1양 25명을 머물러 두고 오나라로 하여금
익히게 한 것이다.] 오나라 사람들에게 활쏘기와 말 타기를 가르치며 또 수레로 싸우는 법과 전투 서열(陣)을 편성하는 법들을 가르쳐서[이전에는 오나라 사람이 스스로 편소(偏小)하고
비루하고 함에 편안하여 일찍이 활쏘기ㆍ말 타기ㆍ수레타기를 하지 아니하고 싸우고 진(陣)치고 함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무신(巫臣)이 그 활쏘기 군사와 말몰이 군사로 오나라에
수레 타는 법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싸우고 진을 치고 하는 것을 가르쳤다.] 그들로 하여금 초나라를 배반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아들 호용(狐庸)을 시켜 오나라에 가서
행인(行人)이 되게 하였다.[무신(巫臣)이 또 그 아들 호용(狐庸)을 오나라에 두었다.] 오나라가 처음에 초나라를 치고 다음에 소(巢)와 서(徐)라는 나라들을 쳐서
이겼다.[오나라가 비로소 초나라로 더불어 강함을 다툰 까닭에 비로소 초나라를 치고 또 두 나라를 쳤다.]

진상도(陳祥道)가 말하기를 "옛날 전쟁에는 험한 지대에서는 사람을 주력으로 하고 평탄한 지대에서는 수레를 주력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험한 지대라 하여 수레를 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위주로 한다는 말이며, 평탄한 지대라 하여 사람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수레를 위주로 한다는 말이다. 대체로 전쟁에서 수레를 사용하는 것은 수레가 동원되면
적의 진영에 쳐들어갈 수 있고 정지하면 병영을 만들어 지휘관을 호위하며 군인들은 은피할 수 있고 기계, 의복 등에 관한 군수 물자들을 보관할 수 있으므로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대단히 유리한 것이다. 옛날 주나라가 정나라를 칠 때에 정 나라가 수레로 길게 어려진(魚麗陣)을 치고 편(偏)을 앞세우고 뒤에는 오(伍)를 배치하였으며 수레 사이에 오를 배치하여
사이를 보충하였다. 또 노나라 환공이 필(邲) 땅에서 싸울 때에도 초나라 군대의 수레 전술은 좌, 우 광(廣)으로 나누었는데 광은 한 개의 졸(卒)에다 양(兩)을 배속시켜
편성하였다. 초나라 무신(巫臣)이 오나라에 갈 때에 양(兩)으로써 한 개의 졸(卒)을 편성하여 가지고 오나라에 가서 한 개의 양과 편을 남겨 두었다. 『주례』를 참고하여 보면 다섯
개의 오(伍)가 양(兩)이 되고 4개의 양(兩)이 졸(卒)로 되었는데 『사마법(司馬法)』 『사마법(司馬法)』：옛날 중국의 사마양저(司馬穰苴)가 저작하였다는 군사 서적인데 군사
기술, 편제 등을 기록하였음.

에는 25명이 양이 되고 백 명이 졸이 되었다. 졸과 양은 사람들로 편성하며, 편(偏)은 수레로 편성하는 것이다. 두예(杜預)가 말하기를 '수레 15채가 대편(大偏)이 되고 9채가
소편(小偏)이 되며 보다 큰 것도 있는데 25채로 편성한 편(偏)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정(鄭)나라의 어려(魚麗)의 편(偏)은 25채로 편성한 편이며, 초나라의 2광의 편은
15채로 편성한 편이며, 무신이 오나라에 남겨둔 편은 9채로 편성한 편이다. 앞에 편(偏)이 서고 뒤에 선다고 한 오(伍)는 그 편에 종속되며 졸에다 양을 배속시킨다고 한 양은 그
편에 종속되었다. 앞에 선 수레들은 적을 대적할 수 있으며 뒤에 따르는 사람들은 불의의 변을 대처할 수 있게 하였으니 옛날의 전쟁 방법을 대략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노나라 소공(昭公) 원년(元年)에 진(晉)나라 중행목자(中行穆子)가 무종(無終)과 여러 야만인들의 침략군을 태원(太原)에서 구축하였다.[무종은 곧 산융(山戎)이고 중행목자는 곧
순오(荀吳)이다.] 군대를 집합시켜 전투를 하려 할 때에 위서(魏舒)가 말하기를 "적의 군대는 보병이며 우리의 군대는 수레로 하는데 전투 장소가 매우 협애하므로 수레 한 채에 군인
10명을 더 편입시켜야만 반드시 이길 수 있으며 여러 협애한 지대를 통과하지 못하게 해야만 또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전부 보병으로 편성하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나부터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고 곧 수레를 해체하고 보병 서열을 편성하였는데[위서가 먼저 스스로 그 소속한 수레를 허물어서 보진(步陣)을 만들었다.] 5채의 수레를 3개의 오(伍)로
편성하였다.[수레를 타는 자는 한 수레에 3명이고 5승(乘)에는 15명이니 이제 고쳐서 수레를 버리고 다시 5명으로써 오(伍)를 만들고 나누어 세 오(伍)를 삼았다.] 그런데
순오(荀吳)의 친근한 사람 하나가 보병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므로[수레를 버리고 보졸(步卒)로 나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함이다.] 그의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다섯 개의 진(陣)을
편성하여 일정한 간격을 두어 배치하였는바[보졸(步卒)을 정하여 다섯 진(陣)을 만들고 서로 구원하게 하니 이는 길이 좁아서 많은 무리를 쓰기가 어려운 까닭에 임시(臨時)의 마땅한
대로 정하여 다섯 진을 만들고 서로 잇닿지 아니하여 나아가고 물러가고 하기에 쉽게 한 것이니 아래 글에 말한 바와 같이 하였다.] 양(兩)을 앞에다 배치하고[전방에 배치하는
진(陣)을 양이라 한다.] 오(伍)를 뒤에다 배치하며[후면에 배치하는 진을 오라고 한다.] 전(專)을 우익[右角]으로 삼고[우군(右軍)의 진을 전이라 한다.] 삼(參)을
좌익[左角]으로 삼으며[좌군의 진을 삼이라고 한다.] 편(偏)을 전방 척후[前拒]로 삼아 가지고[전방 척후 진을 편이라 한다. 이 다섯 가지 이름은 다 임시로 부르는 이름이다.]
유도하니 적군들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적인이(狄人)보고 웃었다.] 그러나 적들이 진(陣)을 다 치기 전에 공격하여[적인이 진을 채 치지 못함을 타서 가까이 달려들어 쳤다.] 크게
패배시켰다.

이정이 당나라 태종에게 말하기를 "중행목자의 수레로 싸우는 전술에 있어서 수레를 버리고 싸웠다 하지마는 전술은 역시 그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는 좌익으로 삼고 하나는 우익으로
삼으며 또 하나는 전방 척후로 삼아서 3개 대오[隊]로 편성하였으니 이것은 수레 한 채에서 싸우는 법[一乘法]이며 천만 채의 수레라도 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조공신서(曹公新書)』 『조공신서(曹公新書)』：중국 동한 헌제(獻帝) 때의 군사 정치가인 조조(曹操)가 지은 책. 조공은 조조를 존칭하는 말이다.

를 보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공격하는 수레[攻車]는 75명으로 되었는데 전방 척후가 한 대(隊)로 되고 좌, 우익이 두 대로 되었으며 수위하는 수레[守車]는 1대인데 식사
인원[炊子] 10명, 의장을 지키는 인원[守裝] 5명, 말먹이 인원 5명, 나무하고 물긷는 인원 5명 도합 25명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공격과 수위하는 수레[功守] 두 채의 인원이
도합 100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군대 10만 명을 동원하는데 공격하는 수레 1천 채를 쓰므로 두 가지 수레가 도합 2천 채이다. 이것이 대략 순오(荀吳)의 옛 편제입니다.
또 한나라와 위(魏)나라의 군대 편제[軍制]를 보면 다섯 채의 수레를 한 대(隊)로 하여 복야(僕射) 한 사람을 두고 열대의 수레를 사(師)로 하여 솔장(率長) 한 사람을 두며
무릇 천 채의 수레에는 장리(將吏) 두 사람을 두는 것으로서 아무리 수레가 많더라도 다 이 방식으로 편성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의 법을 참작하여 사용하는바 돌격은 기병(騎兵)으로
하고 전투 서열 부대는 보병과 기병으로 하되 인원수를 각각 절반씩 되게 하며 주둔하였을 때에는 수레로 경비하고 있다가 출전할 때에는 타고 나갑니다. 제가 서쪽 지방에서
돌궐(突厥)을 토벌할 때에 험한 천여 리를 내왕하면서도 이 법을 경솔히 변경한 일이 없었으니 대개 옛 법의 절도와 제도를 진실로 존중히 여길 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정이 또 말하기를 "제가 『춘추』에 어려진(魚麗陣)에서는 앞에 편(偏)이 서고 뒤에 오(伍)가 선다는 법을 상고하여 보았는데 이것은 수레와 보병이 기병 없이 좌, 우익을
편성하였다 하였으니 방어를 말하였을 뿐이며 기습 작전으로 승리하는 전술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진(晉)나라 순오(荀吳)가 미개인을 정벌할 때에 수레로 편성한 대오를 해체하고 보병
대오를 편성하였으니 이것은 기병이 많아서 기습 작전으로 승리하기에 편리하게 하였을 뿐이며 방어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전술들을 고루 적용하여 한 사람이 말 한
필을 타면 세 사람 몫을 할 수 있으므로 수레와 보병도 서로 절반씩 되게 편성하여 그 법들을 혼합하여 하나의 법으로 하였습니다. 요는 그 법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나라 하후영(夏候嬰)이 이전(李田)의 군대를 옹구(雍丘) 땅에서 격파하였는데 그가 군용 수레를 빨리 몰아친 결과 성공하였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에 위청(衛靑)이 국경선에서 천여 리를 나가 흉노[單于]를 쳤는데 흉노의 전투 서열[兵陣]을 보고 기다리고 있다가 무강거(武剛車)로써 둘러서 병영을
만들고[무강거는 병거(兵車)이니 『속한지(續漢志)』에 모든 군사가 모극(矛戟)이 있고 그 꾸민 것은 번유기치(幡斿旗幟)이고 건(巾)이 있고 개(蓋)가 있음을 무강거라
이른다"하였다.] 5천 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가서 흉노를 쳐서 패배시켰다.

한나라 때 이능(李陵)이 국경선을 넘어 흉노를 치다가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러 흉노 왕[單于]과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흉노의 군대가 이릉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이릉의 군대가 두
산 사이에 있게 되었는데 큰 수레[大車]로 병영을 만들어 놓고 군대를 인솔하여 병영 밖에 나가서 진(陣)을 치고 여러 번 싸웠다.

마단림(馬端臨)이 말하기를 "수레로 싸우는 전술은 한나라 때에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상고해 보면 수레에 군량과 기계를 싣고 다녔으며 정지하여 있을 때에 수레를 둘러서
병영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소위 갑사(甲士) 3명이 좌익에서 활[弓]을 가지고 우익에서 창[矛]을 가지고 가운데서는 기[綏]를 가지고 싸운다는 법은 이미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진(晉)나라의 마륭(馬隆)이 선비(鮮卑)족을 쳤는데 선비족의 장수 수기능(樹機能)이 군대 수만 명으로 험한 지대에 의거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마륭이 산이 협애하기 때문에 곧
편상거(偏箱車)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지대가 넓으면 녹각거(鹿角車) 영(營)을 만들고 길이 좁으면 녹각거 위에다 나무로 집을 만들어서 계속 전투를 하면서 전진한 결과 천여 리를
행군하면서 전투를 하여 적을 많이 살상하였으며 나중에는 양주(凉州)를 평정하였다.

이정이 말하기를 "평상거와 녹각거는 군사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즉 하나는 병력을 잘 이용할 수 있고 하나는 전방 척후로 이용할 수 있고 하나는 군인의 대오를 잘 편성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서로 연결시켜 적용하면 된다. 이로 보면 마륭이 옛 법을 가장 깊이 해득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옛날 군용 수레 제도는 수레 한 채에 말 4마리를 메웠고 거기에 갑사 3명, 보병 72명을 배속하였는데 그 제도가 너무 커서 수비하는 데는 유리하였으나
공격하는 데는 불리하였고 평지에서는 용이하였으나 험한 길에서는 곤란하였었다. 그러나 진나라 마륭이 제조한 소위 편상거는 넓은 지대에서는 녹각거 병영을 만들고 좁은 길에서는 녹각거
위에다 나무집을 지어 놓고 전투도 하고 전진도 하였다. 그런데 소위 녹각거 영(鹿角車營)이라는 것은 수레로 병영을 만들어 사람들은 그 가운데 있고 칼과 창을 수레 위에 세워서
사슴의 뿔과 같이 된 것이다. 이제 그 제도는 상고할 수 없지마는 옛날부터 수레를 만드는 법이 다 상자(箱子) 둘씩을 두었는데 이 수레만은 편상(偏箱)이라고 이름한 것을 보아
상자를 하나 두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대개 상자를 두 개 둔 것은 큰 수레[大車]이며 하나 둔 것은 작은 수레이다. 오직 그 수레가 작기 때문에 협애한 땅에서 사용하며
그리고 전투도 하고 또 전진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면 세상에는 외바퀴 차[獨輪車]란 것이 있어서 백성들이 물건을 싣고 다니는데 한 사람이 밀고 가기도 하며 혹은 한두
사람이 앞에서 끌고 가기도 하는데 그것을 전쟁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제조법도 두 개의 상자[箱]로 만들어서 한 쪽에만 실으면 기울어지고 또 속도가 대단히
느리다. 내가 일찍이 영남(嶺南) 지방에 여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 지방에서 만들어 쓴 작은 수레들은 외바퀴에 상자를 설비하지 않았다. 만일 그 수레의 제조법을 본받아 개조하여
전쟁에서 사용하는 수레도 만든다면 첫째는 공격도 할 수 있고 둘째는 전방 척후[前拒]로도 이용할 수 있으며 셋째는 병영을 만들 수도 있고 넷째는 돌격도 할 수 있으며 다섯째는
군수품도 실을 수 있고 여섯째는 부상병도 운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값도 많지 않아 1천 돈[千錢]을 들이지 않아도 한 채씩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사 중로에서 파괴된다
하더라도 목수 없이 수리할 수 있으며 험한 길을 만나면 밀고 가고 불의의 사변을 만나면 버리고 갈 것이다. 대체로 수레 한 채에 군인 5명씩 배속시키며 1명은 밀고 2명은 끌며
2명은 무기를 들고 보위한다. 그리고 5명의 식사 도구와 의복, 장비들은 다 그 속에 싣고 밤이면 둘러서 병영을 만들 것이니 군인들이 둘러 세워 병영을 만들어 밤에 우리를 만드는
곤란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레를 만드는 법은 아래의 주석에 있다" 하였다.[그 수레의 방식은 나무가 둘레 9촌, 길이 9척의 것을 두 개를 써서 수레채를 삼는다. 수레채의
머리는 활처럼 서원(斜圓)하고 가운데가 일어나서 바퀴 굴대를 받아 외바퀴를 만들며 그 바퀴는 지름이 2척 5촌이고 판자로써 만들고 바퀴살을 설치하지 아니하고 가운데는 사곡(死轂)을
만들고 또 바퀴를 시(施)하는 곳에는 앞뒤에 5, 6촌쯤 두 수레채의 위에 각각 하나의 횡목울 더하여 앞에 둘, 뒤에 셋으로 하고 또 뒤의 횡목이 바퀴에 가까운 곳에 깎아서 두
구멍을 만들고 두 작은 만목(彎木)을 써서 그 구멍의 속에 조치(條置)하고 인(引)하여 굽히기를 활 모양으로 하고 노끈으로 그 끝을 앞 횡목 위에 얽어매고 짐을 싣는 것이 있으면
노끈으로써 그 위에 맨다. 또 바퀴의 뒤에, 수레채의 아래에 나무로써 발을 만들어 굴대와 동등하게 하고 그 뒤의 횡목 위에 부드러운 깔개를 펴서 앉는 자리를 만들고 자리 밑의 두
발 사이에 대고리짝을 놓고 밥그릇을 담으며 군중(軍中)의 조두(刁斗)도 쓰기를 다하면 또한 그 속에 싣는다. 그 수레채의 머리의 교합(交合)한 곳은 그 높이를 말 가슴을 표준하고
사람의 손으로 잡을 것을 표준삼아 주철(鑄鐵)로 날카로운 병장기를 만들기를 보습 날 모양과 같이 하여 수레채의 교합한 머리에 올려놓고 싸움에 다다라서는 그것을 써서 적(敵)의 말
가슴에 당(當)하게 하는 것이다. 수레채의 머리와 상거(相去)가 1척(尺)쯤에 또 가로 한 철조(鐵條)를 베풀어 길이 1척 3∼4촌쯤으로 하고 위에는 이를 벌려서 칼과 창을 걸고
두 수레채의 옆에는 그 앞뒤에 각각 쇠고리 4개와 좌우에 각각 2개를 만들고 앞에는 쇠사슬 줄을 매고 뒤 쇠갈고리를 매어서 수레를 잇대어 영(營)을 만들 때에는 앞 수레채의 간격이
조금 멀면 쇠사슬 줄을 써서 고리에 매고 뒷수레채를 단단히 서로 당기며 옆에는 쇠갈고리로써 그 고리에 걸어서 피차(彼此)에 서로 유지하여 튼튼하게 하고 또 뒷고리의 다음에는 좌우에
각각 한 큰 고리를 더하여 수레를 머무를 때에는 칼이나 혹은 창으로써 고리의 가운데에 꿰어서 세운다. 저 양쪽 군사가 싸울 때에는 앞에 벌려서 말을 막아 녹각거(鹿角車)의 대신으로
쓰고 적이 와서 충돌할 때에는 한 사람이 밀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네 군사가 각각 칼과 창을 잡고 껴들면서 앞으로 나아가 그 말 가슴에 당하며 또 나무나 혹은 가죽으로서 펴고 접고
하는 접첩패(摺疊牌)를 만들어 수레 위에 세워 수레 미는 사람을 가린다. 대저 그 수레는 새기거나 장식하거나 함을 쓰지 아니하고 그 도끼나 자귀를 쓰지 못할 곳에 다만
삼ㆍ노끈으로써 얽어매고 수레마다 위에 칼ㆍ도끼ㆍ자귀 각각 하나와 판자ㆍ노끈ㆍ못 같은 것들을 갖추어 급한 쓰임을 준비하는 것이다.]

당나라 대력(大曆) 연간에 마수(馬燧)가 하동(河東) 절도사로 되어 군용 수레[戰車]를 만들었는데 사자 모양으로 가죽을 덮었으며 창을 뒤에다 벌려 세웠다. 행군할 때에는 병장기를
싣고 정지할 때에는 그것으로써 진지로 삼으며 혹 험하고 협애한 지역을 지켜서 적군의 공격을 막기도 하였는데 그 전투 기재들이 모두 견고하고도 예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역사를 상고하여 보면 마수가 제조한 이 군용 수레는 가서한(哥舒翰)이 황하 구곡(黃河九曲) 지방을 회복할 때에 사용하였으며 송(宋)나라의 범중엄(范仲淹)도 이 수레를 제조하여
사용할 것을 조정에 요청한 일이 있었다.

송나라 함평(咸平) 연간에 오숙(吳淑)이 상소하여 수레로써 전투하는 법을 다시 실행하자고 요청하여 말하기를 "대체 사람들이 평상시 살 때에도 반드시 울타리를 막고 열쇠를 단단히
채워서 불의의 사변을 방지하거늘 하물며 한 국가가 외국의 침략군과 대치하여 적 기병의 날쌘 돌격을 방어하면서 아군을 보호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군인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는
것은 자기의 몸을 보호하려는 것이며 싸울 때에 수레를 사용하는 것도 한 진지의 갑옷과 투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레는 행군이나 정지할 때에 병영이나 진지를 만들 수 있고
적군이 오면 군대를 집합시켜 수레에 의거하여 적을 방어하며 적이 퇴각하면 승리의 기세를 타고 군대를 출동시켜 추격하며 때로는 기습 작전도 하면서 진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할 때에는 이에 의탁하여 돌아와야 할 구역으로 삼고 행동하지 않을 때에는 이것으로써 거처할 병사로 삼는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마음속에 의거할 곳이 있기 때문에 적의
기병이 돌격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강(李綱)이 말하기를 "보병이 기병을 당할 수 없고 기병이 수레를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용 수레 만드는 법을 서울 동, 서 양쪽에 있는 군대들에게 보내어 제조하게
하고 사용법을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고 수레 만드는 법을 그림으로 그리어 임금에게 바쳤다. 그 제조법은 통제관(統制官) 장행중(張行中)의 창안[創]으로 된 것이었다. 그 두
바퀴 위에 채 나무 두 개를 올려놓고 병장기를 실으며 또 가죽으로 둘러막아서 적의 활살을 방비하며 아래에다 철판을 둘러 붙여서 운용하는 군인의 발을 보호하며 긴 무기로는 적 보병을
방어하고 짧은 무기로는 적 기병을 방어한다. 또 수레 옆에다 쇠줄을 달아 두어 행군 시에는 밀고 가면서 전투 서열도 하고 정지하면 수레들을 잇대어 병영을 만든다. 수레 한 채에
군인 25명씩 편성하는데 4명은 채를 잡고 수레를 운전하며 1명은 수레 위에 올라 활을 쏘며 나머지 인원들은 무기를 갖고 수레의 양쪽을 보호하면서 전투한다. 그러므로 한 군(軍)이
2천 500명이라면 5분의 1은 군수 기재 운반과 호위 책임을 맡고 나머지 인원들은 전부 수레에 달라붙어 전투한다. 수레 80채로 방진(方陣)을 만든다면 4면에 각각 20채씩
배치하며 군수품은 그 속에 둔다. 여러 장수들이 이 수레를 보고 다 사용할 만하다고 하였다.

위승(魏勝) 위승(魏勝)：중국 송나라 때 의병을 일으켜 요(遼)ㆍ금(金) 침략군을 여러 번 격퇴하였으나 나중에 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

이 여의거(如意車)를 제조하였는데 위에는 짐승의 상판을 만들고 나무의 방패와 큰 창[大槍] 수십 개를 장비하였으며 또 담요 휘장[氈幕]과 굳지 않은 방패[軟牌]들을 걸어 놓았다.
수레 한 채마다 두 사람이 밀고 갈 수 있는데 50명의 군인을 은폐시킬 수 있었다. 행군할 때에는 짐과 병장기를 싣고 가며 정지할 때에는 병영으로 만들었다. 또 수레들을 잇대어
붙여 놓으면 성가퀴[城壘]를 쌓아 놓은 것 같아서 적 보병이나 기병이 접근할 수 없었으며 적과 맞부딪칠 때에는 또 적의 화살을 방어할 수도 있었다. 만일 전투 서열을 지을 때에는
여의거는 밖에 배치하며 깃대들로 전투 서열을 엄폐하고 노거(弩車)는 진문(陣門)으로 삼는다. 그 위에 평상[床子]을 설치하였는데 노시(弩矢)가 큰 것은 끌[斲]과 같고 한 개의
활살로 두어 명을 쏘아 죽일 수 있고 활살 셋을 쏘는 거리는 수백 보(步)에 달한다. 또 포거(砲車)란 것이 전투 서열 중심에 배치하고 화석포(火石砲)를 쏘는데 이 거리도 300보
가량 나간다. 양쪽 전투 서열이 서로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 전투 서열 간에 활[弓]과 노전(弩箭)과 포(砲)를 쏘며 진문에 접근하면 칼, 도끼, 창을 가진 군대들이 돌격하여 양
전투 서열이 서로 맞붙게 되면 기병을 출동시켜 양편에서 불의 습격을 하며 또 전투 서열을 거두고 추격이나 습격을 하기도 편리하였다. 또 싸우다가 잠깐 동안 자기 진지에 들어가
휴식할 수도 있었다. 여의거는 행진과 퇴각에 있어서 모두 편리하고 형편을 보아 나와서 공격하기도 편리하였으며 방어 장치를 미리 준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과 싸우다가 빠져 나가는 데
필요한 설비까지 미리 다 준비하였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위승이 제조하였다는 수레는 그 제조법을 지금은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수레는 대개 세 가지로 말하는데 하나는 여의거[如意戰車]이며 하나는 노거(弩車)이며
하나는 포거(砲車)이다. 지금 꼭 그 제도와 같이 만들 필요는 없지마는 만일 그 원리를 연구하여 우리의 의사에 따라 지향한다면 세 가지를 합하여 한 가지 제도로 만들어 사람이 밀고
다니는 수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두어 사람의 힘으로 방패, 담요, 휘장, 창, 포 등을 운반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매 양(兩)은 군인 수십 명을 은폐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강 위승의 제조 방법과 같이 하여 국경 지대의 방어 진지마다 300∼500채 가량씩 배치하여 둘 것이다. 그리하여 해마다 농사철에는 농경지가 있는 곳으로
운반하여 노동하는 군인들을 보호하여 농사일을 하게하며 전시에는 진지로 만들고 또 거처하기 위한 병사로도 만들며 수확한 농산물을 운반할 수도 있으니 무익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이상은 병거(兵車)를 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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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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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車書序武王戎車三百兩 虎賁三百人 與受戰于牧野. 蔡 氏曰"戎車 馳車也. 古者 馳車一乘則革車一乘 馳車 戰車 革車 輜車 載器械ㆍ貨財ㆍ衣裝者也." 司馬法曰"一車 甲士三人 步卒七十二人
炊家子十人 固守衣裝五人 厮養五人 樵汲五人. 馳車七十五人 革車二十五人 凡百人二車故謂兩. 三百兩 三萬人也. 虎賁百人之長也. ○丘濬曰"古者車戰之法 每車 甲士三人同載 左持弓 右持矛
中執綏. 步卒七十二人 二十四人居前 左右各二十四人. 居前者戰 左右者夾轅 常相更番. 後又二十五人爲一隊 去車二十五步. 所謂炊家子守衣裝 厮養樵汲者也. 行則以車爲衛
居則以車爲營."陳櫟曰"一虎賁必長百人 一乘車總用百人 以車數合虎賁數 蓋三萬人也."○周禮 巾車 鄭玄曰"巾車 車官之長" 掌王之五路. 玉路ㆍ金路ㆍ象路ㆍ革路ㆍ木路也.革路龍勒 條纓五就
建太白以卽戎. 革路 輓之以革而柒之 無他餙. 龍駹也. 以白黑餙韋 雜色爲勒. 條 讀爲絛. 纓 謂馬當胸 卽今馬鞅 以條絲餙纓 而爲五匝也. 太白 殷之旗 蓋象正色也. 卽戎
謂兵事.車僕掌戎路之萃 廣車之萃 闕車之萃 萃車之萃 輕車之萃. 萃 猶副也. 此五者 皆兵車 所謂五戎也. 戎路 王在軍所乘也. 廣車 橫陳之車也. 闕車 所用補闕之車也. 萃 猶屛也
所用對敵自隱蔽之車也. 輕車 所用馳敵致師之車也. 春秋傳曰"公喪戎路" 又曰"其君之戎 分爲二" 廣則諸侯戎路廣車也. 又曰"師斿闕四十乘." 孫子八陣 有萃車之陣. 又曰"馳車千乘"
五者之制及萃數 未盡聞也. 凡師共革車 各以其萃. 五戎者 共其一 以爲王優尊者所乘也 而萃各從其元焉. ○按 此所謂革車 卽兵車 與上書序註革車ㆍ輜車者有異.按 古者車戰之法 每兵車一乘 甲士三人
步卒七十二人 又二十五人 將重車在後 凡百人也. 行則以車爲衛 居則以車爲營 而每車又有萃車 爲之副貳以備不虞焉.○考工記曰"車有六等之數 車軫四尺謂之一等. 戈柲六尺有六寸 旣建而迤 崇於軫四尺
謂之二等. 人長八尺崇於戈 四尺 謂之三等. 殳長尋有四尺 崇於人四尺 謂之四等. 車戟常崇於殳 四尺 謂之五等 酋矛常有四尺 崇於戟 四尺 謂之六等. 車謂之六等之數." 此所謂兵車也. 軫
輿後橫木. 柲 柄也. 崇 高也. 八尺曰尋 倍尋曰常. 殳長丈二. 戈ㆍ殳ㆍ戟ㆍ矛 皆揷車騎. 鄭司農云"迤 讀爲倚謂著戈於車. 斜 倚也."○詩序 "六月宣王北伐也 元戎十乘以先啓行 戎車旣安
如輊如軒." 韓嬰曰"車有大戎 十乘 謂車縵輪 馬被甲 衡軛之上 盡有劒戟 名曰陷軍之車." ○朱子曰"元大也. 戎 戎車也 軍之前鋒也. 啓 開. 行道也. 輊 車之覆而前也 軒
車之却而後也."秦風小戎曰 "小戎俴音淺. 收 五楘 音木.梁輈. 游環脅驅 陰引鋈 音沃. 續 文茵暢轂 駕我騏馵. 之樹反. ○朱子曰小戎 兵車也. 俴 淺也. 收 軫也 謂車前後兩端橫木
所以收斂所載者也. 凡車之制 廣皆六尺六寸 其平地任載者 爲大車則軫深八尺. 兵車則軫深四尺四寸故曰小戎. 俴收也. 五 五束也. 楘 歷錄然文章之貌也. 梁輈 從前軫以前稍曲而上 至衡則向下鉤之
橫衡於輈下而輈形穹隆上曲 如屋之梁. 又以皮革五處束之 其文章歷錄然也. 游環 靷環也 以皮爲環 當兩服馬之背上 游移前却無定處 引兩驂馬之外轡 貫其中而執之 所以制驂馬 使不得外出.
左傳曰'如驂之有靷'是也. 脅驅 亦以皮爲之 前係於衡之兩端 後係於軫之兩端 當服馬脅之外 所以驅驂馬 使不得內入也. 陰揜軓也. 軓在軾前而以板橫側揜之 以其陰 暎此軓故謂之陰也. 靷以皮二條
前係驂馬之頸 後係陰板之上也. 鋈續陰版之上 有續靷之處 消白金 沃灌其環 以爲餙也. 蓋車衡之長 六尺六寸 止容二服驂馬之頸 不當於衡故 別爲二靷以引車 亦謂之靳. 左傳曰'兩靷將絶'是也. 文茴
車中所坐虎皮褥也. 暢 長也. 轂者 車輪之中 外持輻內受軸者也. 大車之轂 一尺有半 兵車之轂 長三尺二寸故兵車曰暢轂 騏 騏文也. 馬左足白曰馵."○左傳隱公九年 北戎侵鄭 鄭伯禦之 患戎師曰
"彼徒 林堯叟曰'徒謂步兵也.' 我車 懼其侵軼我也." 軼突也. 公子突曰"使勇而無剛者 嘗寇 嘗試也. 速去之 君爲三覆以待之. 覆伏兵也. 戎輕而不整 貪而無親 勝不相讓 敗不相救 先者見獲
必務進 進而遇覆 必速奔. 後者不救則 無繼矣 乃可以逞." 乃可以快志於戎. 從之 戎人之前遇覆者奔. 祝聃逐之 祝聃 鄭大夫. 衷戎師 伏兵衝擊戎師之中. 前後擊之 第一 伏擊其前 祝聃與第三
伏擊其後 幷第二伏擊其中 戎前後中三處受敵 故曰"衷戎師前後擊之." 盡殪 殪死也.戎師大奔.桓公五年 王以諸侯伐鄭 鄭伯禦之. 曼伯爲右拒 曼伯將鄭右軍. 祭仲足爲左拒 祭仲將鄭左軍. 原繁ㆍ高渠彌
以中軍奉公 爲魚麗之陣. 二大夫以中軍 奉鄭公 爲魚麗之陣.先偏後伍 司馬法 車戰二十五乘爲偏 五人爲伍 以車居前 以伍居後也. 伍承彌縫 以伍 承偏之隙而彌縫其闕漏也. 此蓋魚麗陣法. 戰于繻葛.
鄭地名. 命二拒曰"璯動而鼓." 璯 旃也 蓋今大將之麾 執以爲號令. 左右二拒 見璯動則各鳴鼓以進軍也. 蔡ㆍ衛ㆍ陳皆奔 三國從王之師 皆先走. 王卒亂 鄭師合以攻之 鄭以三軍合攻.
王卒大敗.宣公十二年 晉與楚 戰于邲. 欒武子 晉大夫 曰"楚君之戎 戎 親兵也. 分爲二廣 分爲左右二廣. 廣有一卒 卒偏之兩 一廣有 車十五乘 每乘用步卒百人. 司馬法百人爲卒 二十五人爲兩
車十五乘爲大偏. 今廣十五乘 亦用舊偏法 復以二十五人 爲承副也. ○朱氏曰周制車十五乘爲大偏 二十五人爲兩. 楚以五十人爲兩 以舊偏論之 一卒百人之外 又有此五十人之兩也. 蓋楚一車兼周兩車人數
周一車有七十五人 楚一車有一百五十人 此說見李靖問對. 注說誤.右廣初駕 每日 右廣鷄鳴而初駕馬. 數及日中 左則受之 數其時刻 至日中則左廣代而受之. 以至于昏 至于日入而止.
內官序當其夜內官近君者 爲次序以當其夜 如今行夜之類.以待不虞 不可謂無備."○楚子爲乘廣三十乘 乘廣 兵車名. 分爲左右 分爲左右 二廣每廣十五乘. 右廣鷄鳴而駕 日中而說 說音 稅舍也. 左則受之
日入而說. 許偃御右廣 養田基爲右 右 爲車右也 蓋二廣 楚王更迭乘之 故各有戎御戎右. 彭名御左廣 屈蕩爲右.李靖曰 "'楚子乘廣三十乘'廣有一卒 卒偏之兩 軍行右轅 以轅爲法 故挾轅而戰
皆周制也. 百人曰卒 五十人曰兩 此是每車一乘 用士百五十人 比周制差多爾. 周制 一乘步卒七十二人 甲士三人 以二十五人爲一甲 凡三甲共七十五人. 楚山澤之國 車少而人多
分爲三隊則與周制同矣."成公七年 楚巫臣 自晉 先是巫臣 自楚奔晉.使于吳 以兩之一卒適吳. 司馬法 百人爲卒二十五人爲兩 巫臣 蓋以一卒百人往吳也. 舍偏兩之一焉. 舍音赦 ○司馬法 車九乘爲少偏
十五乘爲大偏 蓋留少偏九乘車及一兩二十五人 令吳習之. 與其射御 敎吳乘車 敎之戰陣.先是 吳人自安偏陋 未嘗射御乘車 未識戰陣之法 故巫臣與其射御 敎吳乘車 敎之戰陣. 敎之叛楚 寘其子狐庸焉
巫臣又留其于狐庸於吳使爲行人於吳 吳始伐楚 伐巢伐徐. 吳始與楚 競强故始伐楚 又伐二國.陳祥道曰"古者之用兵也 險野人爲主 易野車爲主 則險野非不用車而主於人 易野非不用人而主於車. 車之於戰
動則足以衝突 止則足以營衛 將卒有所芘 兵械衣裘有所齎 車之爲利大. 昔周伐鄭 鄭爲魚麗之陣 先偏後伍 伍承彌縫. 桓邲之戰 楚軍之戎 分爲二廣 廣有一卒 卒偏之兩. 楚巫臣使吳 以兩之一卒
適吳舍偏兩之一焉. 考之周禮 五伍爲兩 四兩爲卒. 司馬法 二十五人爲兩 百人爲卒 卒兩則人也 偏則車也. 杜預云'十五乘爲大偏 九乘爲小偏 其尤大者. 又有二十五乘之偏'則鄭魚麗之偏
二十五乘之偏也. 楚二廣之偏 十五乘之偏也. 巫臣所舍之偏 九乘之偏也. 先偏後伍 伍從其偏也. 卒偏之兩 兩從其偏也. 先其車足以當敵 後其人足待變 則古者車戰之法 略可知也."昭公元年 晉中行穆子
敗無終及羣狄于太原. 無終 卽山戎. 中行穆子 卽荀吳. 崇卒也崇 聚也. 將戰 魏舒曰"彼徒我車 所遇又阨所遇之地 又險阨. 以什共車 更增十人以當一車. 必克 困諸阨又克 請皆卒 去車
爲步卒.自我始" 乃毁車以爲行 行戶郎反. ○魏舒 先自毁其屬車 爲步陣. 五乘爲三伍. 乘車者 車三人 五乘十五人. 今改去車 更以五人爲伍 分爲三伍. 荀吳之嬖人 不肯卽卒 不肯棄車卽步卒.
斬以徇 爲五陣以相離制 步卒爲五陣 互相救援 蓋以道阨 難於用衆 故臨時之宜 制爲五陣 不相聯屬 易於進退 如下文所云. 兩於前 其居前之陣 名曰兩. 伍於後 居後之陣 名曰伍. 專爲右角 右軍之陣
名曰專. 參爲左角 左軍之陣 名曰參. 偏爲前拒 前拒之陣 名曰偏 此五者 皆臨時處置之名. 以誘之 翟人笑之. 狄人見而笑之. 未陣而薄之 乘狄人未陣 進而擊之. 大敗之.李靖曰"荀吳用車法
爾雖舍車 而法在其中焉. 一爲左角 一爲右角 一爲前拒 分爲三隊 此一乘法也 千萬乘皆然. 臣按曹公新書云'攻車七十五人 前拒一隊 左右角二隊. 守車一隊 炊子十人 守裝五人 廐養五人 樵汲五人
共二十五人 攻守二乘 凡百人'. 興兵十萬 用車千乘 輕重二千 此大率荀吳之舊法也. 又觀漢魏之間軍制 五車爲隊 僕射一人 十車爲師 率長一人 凡車千乘 將吏二人 多多倣此. 臣以今法參用之
則跳盪騎兵也 戰鋒隊步騎相半也 駐隊兼車乘而出也. 臣西討突厥 越險數千里 此制未嘗敢易 蓋古法節制 信可重也."靖又曰"臣按春秋魚麗陣先偏後伍 此則車步無騎 謂之左右拒 言拒禦而已 非取出奇勝也.
晉荀吳伐狄 舍車爲行 此則騎多爲便 唯務奇勝 非拒禦而已. 臣均其術 人一馬當三人 車步稱之 混爲一法 用之在人."○漢夏侯嬰破李田軍於雍丘 以兵車趣戰疾 破之.○漢武帝時 衛靑出塞千餘里 擊凶奴
見單于兵陣而待 靑乃以武剛車 自環爲營武剛車 兵車也. 續漢志 諸軍有矛戟 其餙幡斿旗幟 有巾有蓋 謂之武剛車. 而縱五千騎 往當凶奴 敗之.李陵出塞擊凶奴 至浚稽山 與單于相値 圍陵軍 陵居兩山間
以大車爲營 引士出營外爲陣 連戰.馬端臨曰"車戰之制 漢尙用之. 然詳考其辭 則是以車載糗糧器械 止則環以爲營耳. 所謂甲士三人左持弓 右持矛 中執綏之法已不復存矣."○晉馬隆擊鮮卑 樹機能以衆數萬
據險拒之. 隆以山陿隘 乃作偏箱車. 地廣則爲鹿角車營 路狹則爲木屋施於車上 轉戰而前 行千餘里 殺傷甚衆 遂平凉州.李靖曰"偏箱ㆍ鹿角 兵之大要. 一則治力 一則前拒 一則束部伍 三者迭相爲用
斯馬隆得古法深矣."丘濬曰"古者 車制用四馬駕之 用甲士三人 步卒七十二人 其制太大 利於守而不利於戰 易於平野而難於險路 惟晉馬隆所謂偏箱車. 地廣則爲鹿角車營 路狹則爲木屋 施於車上 且戰且前.
所謂鹿角車營者 以車爲營而人居其中 架鎗刀於車上 如鹿角然也. 今其制雖不可考 然自古 車皆有兩箱 而此車獨以偏箱名則其偏爲一箱 可以意推矣. 蓋兩箱者大車也 一箱者小車也. 惟其車之少
故可行於陿隘之地 而且戰且前焉. 觀今世有獨輪車 民間用以般運者 一夫推之 而或用一二人以前挽 似亦可以爲戰具. 然其制亦爲兩箱 偏載則傾欹 推行頗遲滯. 臣嘗經行嶺南地 其所造小車 獨輪無箱
若因其制而改以爲戰車 一可以戰 二可以前拒 三可以爲營 四可以衝突 五可以載軍裝 六可以舁病卒 且其費不多 千錢以下可具一車 中途有損 不用匠而可修 逢險阻則舁而行 遇急難則棄而去. 大率一車
用卒五人 一人推而二人挽 二人執兵仗以輔之. 凡五人者之食具衣裝 皆載其中 夜則環列以爲營 可免士卒夜夜立柵 桃塹之擾. 其車之式具于分註." 其車之式 用兩木 園九寸長九尺者爲轅 轅之首
斜彎而起中以受軸. 爲獨輪 其輪經二尺有五寸 以板爲之而不設輻 中爲死轂. 又於施輪處前後 五六寸許 兩轅上 各加一橫木 前二後三. 又於後橫木近輪處 斲爲二孔 用二小彎木條 置其孔中 引而屈之
如弓狀. 繩縛其端於前橫木上 有所載則以繩繫於其上. 又於輪之後兩轅下 用木爲足 與軸等. 其後橫木上 施軟蓐以坐席 席之下兩足間 施行簟以盛食器ㆍ軍中刁斗 用畢 亦載其中. 其轅首交合處 其高準馬胸
用人手執之爲準. 鑄鐵爲利器 如耕犁 樣冒于交轅之首 臨戰 用以當敵之馬胸也. 去轅首尺許 又橫施一鐵條長尺三四寸許 上列齒以架刀鎗. 兩轅之旁其前後 各爲鐵環四 左右各二 前繫鐵鎖 後繫鐵鉤
連車爲營之際 前轅相去稍遠則用鎖 繫之於環 後轅緊相挨傍 則以鐵鉤 搭其環 彼此相維以爲固. 又於後環之次 左右各加以一大環 駐車時 用刀或鎗 貫環中而立焉. 彼兩軍交鋒之際則列於前 以拒馬以代鹿角.
敵來衝突 一夫推之而前 四卒各執刀鎗以夾持之 趍前以當其馬胸. 又用木或革爲摺疊牌 立於車上 以蔽推車者. 大抵 其車不用雕餙 其不可施斧斲處 只用麻繩 縛繫每車上
各具刀ㆍ斧ㆍ斲各一及板木ㆍ繩ㆍ釘之類 以備急用.○唐大曆中 馬燧爲河東節度使 造戰車 冒以狻猊象列戟於後 行以載兵 止則爲陣 或塞險阨以遏奔衝 器械無不堅利.按史 馬燧此車
卽哥舒翰所用以收黃河九曲者也. 范仲淹亦嘗以此車 請造于朝.○宋咸平中吳淑上疏 請復車戰之法. 謂"夫人平居 猶必謹藩籬固 關鍵以備不虞 何况當胡虜之戰陣 禦突騎之輕慓而無蔽護哉? 夫人之被甲鎧
所以蔽護其身也 而戰之用車 亦一陣之甲鎧也. 故可以行止爲營陣 賊至則斂兵附車以拒之 賊退則乘勝出兵以擊之 用奇掩襲 見可以進. 以故 出藉此爲所歸之地 入以此爲所居之宅 人心有所依據
不▩胡虜之陵突也."○李綱言"步不足以勝騎 而騎不足以勝車 請以車制 須於京東西路 使制造而敎習之." 因繪圖進呈 其法用統制官張行中所創. 兩竿雙輪上 載弓弩 又設皮籬以捍矢石 下設鐵裙以衛人足
長兵禦人 短兵禦馬 傍施鐵索 行則步而爲陣 止則聯以爲營 每車用卒二十有五人 四人推竿以運車 一人登車以發矢 餘執軍器 狹車之兩傍. 每軍二千五百人 以五之一 爲輜重及衛兵 餘當車. 八十乘卽布方陣
則四面各二十乘 而輜重處其中 諸將皆以爲可用.○魏勝創爲如意戰車 上爲獸面 木牌大槍數十 垂氈幕軟牌. 每車用二人推轂 可蔽五十人. 行則載輜重器甲 止則爲營 掛榙如城壘 人馬不能近
遇敵又可以禦箭鏃. 列陣則如意車在外 以旗蔽陣 弩車當陣門. 其上置床子 弩矢大如斲 一矢能射數人 發三矢可數百步. 砲車在陣中 施火石砲 亦二百步. 兩陣相近則陣間發弓弩箭砲 近陣門則刀斧槍手突出
交陣則出騎兵 兩鄕掩擊 拔陣追襲 少却 入陣間稍憩. 進退俱利 俟便出擊 慮有拒遏預爲解脫計.丘濬曰"魏勝所制之車 其制今不可考 然大率有三 曰如意戰車 曰弩車 曰砲車. 今不必盡如其制 誠能推求其故
而以意消息之 合三者以爲一制 爲人推之車數人之力可將者 樹牌ㆍ垂氈ㆍ列槍ㆍ駕砲 每兩必須蔽數十人. 略如勝所制者 每邊城制三五百兩 歲遇農作之時 運置田所 障蔽官軍 俾得耕穫 戰以爲陣 居以爲營
收穫以爲載 不爲無益." 以上論兵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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