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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진사 노사효를 위수로 한 서울과 지방 선비들의 상소[京外儒生進士盧思孝等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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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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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진사 노사효를 위수로 한 서울과 지방 선비들의 상소[京外儒生進士盧思孝等疏]

[갑술(甲戌)년 3월에 올린 것]

삼가 말씀드립니다. 맹자(孟子)는 "옛사람의 글을 읽고 그 글을 지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고, 양웅(揚雄)은 "살아서는 상대자의 사람 된 품을 보고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가 지은 글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저희들이 정성껏 이 『수록(隨錄)』 한 질을 전하께 올림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근세에 유형원(柳馨遠)과 같은 선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아! 유형원 같은 사람은 도(道)를 체득한 아름다운 자질과 진리에 정통하는 천재를 가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는 소시(少時)적에 벌써 성현의
도(道)에 심력을 경주하고 옛사람들을 성심으로 본받아 어떤 선생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능히 자체로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천지 만물에 관한 이치와 백성을 교양하고 풍속을 개선시킬
방도들을 철저하게 분석 연구하여 해명하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도덕 수양에 기초가 있는데다가 공부도 해박하게 하였으며 자신의 실천을 통하여 모든 사업에 적용하려 하였으니
이야말로 공씨 학설의 광범하고도 간략한 묘지를 파악한 것입니다. 유형원의 저서를 보면 이치와 사물에 침투 관통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한 그는 일찍이 정치 사업에 뜻을 두었던바
옛 경전을 상고하여 성인들의 마음을 체득하고 사람의 인정에서 출발하여 이치의 정당성을 천명하였으며 혹은 문헌들의 기록에서 혹은 자체의 연구 과정에서 그때그때 적어 둔 것을
수록(隨錄)이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유형원의 생각에는 "대학(大學)에서 하는 공부는 어떤 사물을 연구하여 그의 진리를 해명하며 진리가 해명된 뒤에는 사상을 굳게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국가의 정치 사업을 하는 기본으로 되며 국가의 정치 사업을 하는 것은 사물을 연구하여 진리를 해명한 학문의 활용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정치 사업을 하는 요체가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줄 모르고 정치 사업과 마음으로부터의 수양을 분리하여 연구하기 때문에 가정생활이나 국가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일마다 배운
바와 틀리게 된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을 편찬하여 영원한 표본[經遠之典]으로 되게 하려도 옛날 제도는 원칙만 있고 세칙이 없으며 한당(漢唐) 이후 서적들은 틀리게 기록된 것이
허다하므로 선대 임금들이 제정한 법의 심오한 점과 역대의 잘잘못들에다가 우리나라의 현행 법률 제도를 참고로 하며 이미 있는 것은 그대로 두어 미비한 점만 보충하며 간략한 것은 좀
더 자세하게 하기를 그물코를 절여 그물을 만들고 실올을 다듬어서 비단을 짜듯이 하며 후세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에 의거하여 영원히 국가를 태평하게 만드는 방안으로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이른바 본질을 명확히 알아서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이 혹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요?

만일 이 사람이 당시에 등용되어 자기의 포부를 남김없이 발휘하였더라면 그가 소유한 학문은 세상을 바로잡았을 것이며 재능은 모든 폐단을 고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은둔 생활로
자기 뜻을 더욱 굳게 가졌고 벼슬 한 자리도 하지 않았는데 수명이 너무 짧아서 중도에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는 아주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도덕은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았고 그의 글은 아직 책장에 남아 있습니다. 옛날 성현들의 모든 방안이 모두 이 수록[方冊]에 갖추어져 있으니 우리나라를 요순 적 시대처럼 만들려던 그의 지향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 그 글을 표창하여 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오늘 이 성대[聖世]의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순수한 그의 품질과
탁월한 그의 견해라든가 뜻을 독실하게 가지고 행실을 착하게 하던 미담과 학문을 좋아하고 성현의 도를 철저하게 믿는 사실들에 대하여는 일일이 다 진술하거나 수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전 현명한 재상이었던 허목(許穆)은 일찍이 그를 위대한 정치가라고 하였으며 선대 임금 때에 정부 관원들도 그를 의리에 깊은 연구가 있고 효성과 우애가 특출한 사람으로
추천하였던 바 이는 진실로 정확한 공론이었습니다.

유형원은 우리나라의 이름 높은 재상 유관(柳寬)의 9대 손이며 검열(檢閱) 유흠의 아들로서 대대로 서울에 살았으나 은둔 생활로 자기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그만 부안(扶安)의 해협
산중으로 들어가서 도덕과 의리를 주로 한 선비 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원근 선비들이 20여 년 동안을 어제 일처럼 그를 사모하여 오다가 서원(書院)을
세우자는 의견이 일치되어 지금은 벌써 그의 위패를 모시고 영원히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의 순박하고도 명철한 덕행을 찬양하는 데 그치거나 정치 문제에 관한 문헌들을 상자 속에 넣어
두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이에 감히 전하에게 올립니다. 만일 전하께서 조용하고 한가한 때에 한번 보아 주시며 옆에 두시고 거기에서 본받을 것을 취하는 동시에 현명한 사람을
표창하는 은전을 내려 착한 일을 격려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그것이 교육에 영향을 주며 정치 사업에 도움을 주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옛날부터 어진 임금들이 현명한 선비를 대할
때에 선비의 지위가 한미하다고 낮게 여기지 않으며 현명한 선비가 죽었다 하여 아주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혹 죽은 사람을 표창하기도 하고 혹 그의 언행을 찬양하기도 하였습니다.
본조[我朝]에 이르러서는 여러 어진 임금들이 서로 계승하여 유도(儒道)를 존중히 여기는 데서 온갖 방도를 다 강구하였고 사소한 미행이나 대단치 않은 재능이라도 다 특별한 배려를
돌렸으니 성현의 도를 장려하고 발양시키는 사업에서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 점을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국왕의 회답[下批]에 이르기를 "상소문을 보아 내용을 잘 알았으며 예조로 하여금 품의 처리케 하였다. 보낸 책자(冊子)는 조용히 읽어 보겠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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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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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三月封進伏以孟子曰"讀其書 不知其人可乎?"楊雄曰"存則人 亡則書."此臣等之所以齋沐百拜 謹奉一部緗帙於冕旒之下 使我聖上 知近世有若儒柳馨遠者也. 嗚呼! 若馨遠者 可謂契道之妙姿
通方之奇才也. 自其少時 卽已潛心大道 契誠前脩而不藉師承 能自心得. 凡於三才萬物之故 化民善俗之方 解剝硏窮 無不旁通 涵養有素 工用亦博 本之身心 推之事爲者 實有得於孔門慱約之旨矣. 觀其所著
於理無所不淹通 於事無所不貫穿. 又嘗用志於經濟之業 稽遺經而得聖人之意 原人情而闡天理之正 或取典籍所載 或因思慮所及 隨得錄之 名曰隨錄. 蓋其意以爲大學之道 格致誠正爲治平之本
治國平天下爲格致之用 而世之爲學者 不知治道自心學中出來 歧而二之故在家在邦 當事齟齬. 欲撰成一編以爲經遠之典. 而古制則大綱存而其目缺 漢唐以來多見其牴牾不通. 於是 乃取先王之法徵 歷代之得失
參國家之典章 因存以補缺 因畧以致詳 譬如張萬目而成罟 正萬縷而成帛 使天下後世 有所考據 而知長治久安之術. 噫噫 倘所謂明體而適用者非歟! 使斯人 得爲當世之用 展布其所蘊則學可以經世 才可以濟時
而隱德彌堅 一命不就 天奪太速 中歲奄忽. 所賴而不朽者 道不墜地書猶在笥. 皇猷帝圖 粲然備具於方冊之中 其堯舜君民之志 可考而知也. 若此而不崇奬其人 不表章其書 豈非聖世一大欠典也哉?
若其禀質之粹美 見識之絶卓 篤志修行之懿 好學信道之微 又不可縷述而藻陳. 故先正臣許穆 嘗以王佐之才 稱之. 先朝廷臣 又以義理潛心 孝友出天薦之 此誠確論也. 馨遠以國朝名相寬之九代孫
檢閱欽之子世居京師 欲隱居求道 遂入於扶安海山中 以道義終其身. 旣沒之後遠近縫掖之士 寤寐儀音 蓋二十餘年如一日 而俎豆之議不謀而同 今已妥靈 永爲崇奉. 顧此純明之德 不可但映於泉壤 經緯之文
不可空賁於巾箱 茲敢冒昧仰呈. 倘蒙聖明淸燕之暇 特賜睿覽 置諸左右 取以爲法 仍施褒賢之典 以示勸善之方 則其有關於學敎 爲補於治道 當何如也? 自古聖王之於賢士也 不以側陋而卑之 不以已死而遺之
或奬許焉其身 或揄揚焉其言. 至於我朝 列聖相承 崇儒重道 靡不用極 小善片藝 率皆賁寵. 興起斯文 莫大於此 伏願殿下 留神焉.下批曰"省疏具悉疏辭 令該曹稟處! 而所進冊子 當從容省覽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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